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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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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727      
[삼국/남북국] 한국의 고대 사회 (민족)
한국(고대사회) 한국 고대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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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에 출현한 군장 사회 중에는 청동기 시대 말기에 이미 국가 형태를 이루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철기를 사용하게 된 뒤에 초기 국가의 단계로 발전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철기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서기전 4세기경으로, 중국의 전국 시대(戰國時代)에 출현했던 철기문화가 이 때 전래되었던 것이다(운영자 주 : 우리 나라 철기 문화는 중국에서 수용된 것이 아니라 청동기 문화와 마찬가지로 북방에서 수용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따라 생산력이 더욱 증가되어 지배자의 부(富)의 축적이 확대되고 철제 무기를 사용한 정복전쟁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우세한 군장 사회가 주위의 군장사회들을 병합해 초기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초기국가는 국왕의 출현과 더불어 정복사업으로 확대된 영토를 통치하기 위한 정치조직을 정비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군장들은 국왕 아래의 중앙관료로 변신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종래의 독립적인 성격을 그대로 유지하여 국왕권을 제약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세력관계는 왕권이 더욱 강화되고 완전한 국가 형태가 갖추어지는 고대국가가 형성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우리 나라의 각지에는 여러 초기 국가가 성립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고조선이었다. 고조선은 청동기 시대 말기인 서기전 5, 4세기경에 초기 국가로 발전하였다. 영역은 요하 유역으로부터 한반도의 서북부, 대동강 유역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그 뒤 고조선은 철기의 수용으로 더욱 강성해졌으나 한 무제(漢武帝)의 침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서기전 108).

이어서 서기전 2, 1세기경에는 만주 송화강 유역에서 부여가, 서기전 1세기 무렵에는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고구려가 각각 초기국가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진적인 옥저와 동예는 끝내 군장사회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삼한 역시 서기 전후까지도 군장 사회에 머무르다가 점차 내부에서 중심 세력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즉, 삼한 지역에서는 한강 유역의 백제국(伯濟國)과 낙동강 유역의 사로국(斯盧國) 및 구야국 (狗邪國)이 중심이 되어 백제와 신라ㆍ가야가 각각 출현했던 것이다.

부여는 고구려에 병합되고 가야는 신라에 병합됨으로써, 결국 고구려ㆍ백제ㆍ신라만이 발전을 거듭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는 데 성공하였다. 고대 국가는 초기 국가의 발전된 형태이다. 국왕권이 강화되고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가 마련되었으며, 이전의 반(半)독립적이던 군장들은 그 독립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중앙관료의 지위로 편제되었다. 강력한 왕권과 집권적인 정치력을 바탕으로 활발한 정복사업을 전개해 더욱 넓은 영토를 확보해 나갔다.

먼저 고구려는 1세기 후엽 태조왕 때에, 백제는 3세기 중엽의 고이왕 때에, 신라는 4세기 후반의 내물왕 때에 각각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영토를 확장해 고대 국가의 틀을 갖추었다. 이들 삼국은 이러한 성장을 기반으로 때로는 서로 충돌하고 때로는 협력하면서 경쟁적으로 발전하였다.

처음 삼국 상쟁의 주도권은 가장 일찍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한군현 및 위(魏)ㆍ전연(前燕) 등 중국 세력과의 싸움을 통해 국력을 축적한 고구려가 장악하였다. 고구려는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쳐 광개토왕과 장수왕대의 전성기를 구가해 북으로는 요동과 만주를 차지하고 남으로는 죽령ㆍ조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백제는 4세기 후반의 근초고왕 때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고구려와 대결하는 등 강성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 정책에 밀려 웅진(熊津: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천도하면서 국력이 위축되었다.

그리고 신라는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국가 체제를 갖추고 그나마 고구려의 군사적ㆍ외교적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5세기 초부터는 자주적인 발전을 도모하였다. 이로써, 5세기에는 고구려가 대단히 강성한 가운데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어 대항하는 형세가 유지되었다.

이러한 삼국간의 세력관계는 6세기에 들어 변화하였다. 우선, 신라가 지증왕ㆍ법흥왕ㆍ진흥왕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백제도 무령왕ㆍ성왕 때에 중흥을 이루었다. 이를 바탕으로 두 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곧 신라가 백제를 몰아내고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다. 이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의 풍부한 자원을 획득했을 뿐 아니라, 황해를 통해 중국과 직접 외교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 통일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6세기 후반에는 중국에서 남북조 (南北朝)의 분열이 수습되고 수(隋)ㆍ당(唐) 등 통일 왕조가 들어서면서 고구려와 충돌을 일으켰다. 이 때 고구려가 수ㆍ당의 거듭된 침략을 막아낸 것은 당사자인 고구려뿐 아니라 백제와 신라의 존립까지도 구원한 것으로 민족 보위의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는 오랜 전쟁으로 국력이 소모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신라와 당의 연합이 더욱 강화되어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백제와 고구려가 차례로 멸망하였다.

신라는 계속해서 당의 세력을 축출하여 삼국 통일을 완수하였다(676). 이 삼국 통일은 우리 역사상 매우 큰 의미를 가지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무엇보다 이제까지 혈통ㆍ언어ㆍ문화를 같이하면서도 서로 다른 국가체제 속에 들어가 있던 우리 민족이 하나의 국가 안에 통합됨으로써 민족국가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삼국의 문화를 수렴해 보다 차원 높은 민족 문화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그 영토가 대동강과 원산 이남에 그쳐 고구려의 영토였던 만주지역을 상실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만주 지방에는 곧 고구려의 유민들이 진국(震國), 즉 발해를 건국함으로써(698) 남쪽의 신라와 함께 남북국가가 형성되었다. 뒤에 발해가 멸망함으로써 우리 역사에서 이탈하고 신라만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지만,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가 발해의 유민을 포섭, 흡수함으로써 민족의 재통일은 완수되었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삼국은 강력한 왕권을 지닌 국왕이 종래의 군장들을 정치기구 속에 편입시켜 전제정치를 실시하였다. 먼저 삼국에는 모두 왕권이 강화되면서 고구려의 고씨(高氏)와 백제의 부여씨(扶餘氏), 신라의 김씨(金氏) 등 왕위를 세습하는 왕족이 출현하였다. 종래의 군장들은 그 독립성을 상실하고 고대 국가의 관리로 편입되었다.

이 때 이들을 왕권 아래에 흡수하면서 관등 조직(官等組織)이 성립하였다. 고구려의 대대로(大對盧)ㆍ태대형(太大兄) 등 14관등, 백제의 좌평(佐平)ㆍ달솔(達率) 등 16관품(官品), 신라의 이벌찬(伊伐飡)ㆍ이찬(伊飡) 등 17관등이 바로 그것이다. 또한, 국무를 분담하는 여러 관부들이 설치되었으며, 전국을 통치하기 위한 지방제도는 군사적인 성격으로 조직되었다.

군장들은 관등 조직에 편제되는 과정에서 귀족 신분을 보장받았다. 이들 귀족은 왕경에 거주하는 지배신분으로서 왕족과 함께 정치 권력을 독점하고 토지ㆍ노비 등 재산을 소유하며, 그 밖에도 사회적인 특권을 향유했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신라의 화백(和白)과 같은 합좌 기구(合坐機構)를 통해 재상(宰相)을 선출하거나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는 왕권의 전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귀족 연합적인 정치가 유지되었음을 뜻한다. 이 때문에 통일을 전후해 신라에서 전제 왕권을 더욱 강화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삼국의 왕족과 귀족들은 그들의 정치적ㆍ경제적ㆍ사회적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율령(律令)을 제정하고 신분의 엄격한 구분을 요구하였다. 당시의 신분 제도는 신라의 골품 제도(骨品制度)로 대표된다. 이는 신분에 따라 오를 수 있는 관등과 관직의 상한선이 규정되어 있을 뿐 아니라 일상 생활까지도 제약하는 매우 엄격한 것이었다. 이러한 골품 제도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아래로부터 붕괴되어 갔으나, 상위 골품인 진골(眞骨)과 6두품(六頭品)은 강고하게 존속하다가 신라의 멸망과 함께 비로소 소멸하였다.

엄격한 신분 제도 아래 모든 특권이 귀족층에 의해 독점되었지만, 이 시기에 가장 광범하게 존재했던 것은 역시 일반 농민이었다. 이들 농민은 신분으로는 평민(平民)으로 편제되었다. 이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경작하면서 조세(租稅)와 공부(貢賦)ㆍ역역(力役) 등을 부담하였다.

통일 신라에서는 백성들에게 정전(丁田)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도 사실은 농민들이 원래부터 소유하고 경작해 오던 토지에 대한 권리를 국가에서 인정해주고, 그 대가로 조세를 거두어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당시의 농민들은 아직도 촌(村)에 할당된 공유지를 공동체적인 노동으로 경작하는 전통적 유제에 의한 역역을 부담하고 있었다.

통일 이후 100여년 동안 전성기를 누리던 신라는 8세기 후반에 들어 진골 귀족 내부의 분열과 그에 따른 왕위 계승전의 격화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원래 진골 귀족들은 혈연적인 유대 관계를 가지고 이해 관계를 같이하는 운명 공동체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의 사회 발전은 이들의 유대를 이완시켜 여러 족당(族黨)으로 분열되었다.

점차 이들 족당 간의 대립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중앙 정부의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지방에서는 호족(豪族)들이 새로이 성장해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이들 호족은 촌주(村主) 등 지방의 토착 세력이나 지방에 내려간 중앙 귀족들이 성장한 세력이었다. 호족은 성주(城主)ㆍ장군 등을 자칭하면서 군사력을 가지고 그 지방의 행정을 장악했으며 조세와 역역을 징수하였다.

진골과 함께 신라 사회의 지배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나 역시 폐쇄적인 진골 중심의 사회에서 적지 않은 제약을 받았던 6두품들이 기존 체제에 비판을 가하기 시작했고, 지방의 호족에 협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9세기 말부터는 초적(草賊)이라 불리는 농민들의 반란이 일어났고, 호족들은 이를 이용해 자신의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들 호족 가운데 견훤(甄萱)이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라북도 전주)에서 후백제를 세우고(892), 궁예(弓裔)가 송악(松岳: 지금의 개성)에서 후고구려를 세움으로써(901)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후 후고구려는 마진(摩震)ㆍ태봉(泰封)으로 이름을 바꾸다가 역시 송악지방의 호족인 왕건(王建)에 의해서 고려로 교체되었다. 결국 신라가 고려에 항복하고(935) 곧이어 후백제가 정복되어 고려에 의한 후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936).

이와 같은 신라 말 고려 초의 변동은 단순한 왕조 교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이 성장한 호족 세력에 의해서 진골 귀족 중심의 고대적 체제가 극복되는 과정이라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사상계에서도 새로이 선종 불교(禪宗佛敎)가 풍미해 종래의 교종(敎宗)을 대신했고, 주로 6두품 지식인에 의해 유교적 정치 이념이 대두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지방 호족이나 6두품의 진출과 더불어 고대적인 신라 사회를 극복하고 보다 합리적인 중세 사회를 지향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사회의 출발은 고대에서 중세로의 이행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농민의 지위 향상은 새로운 사회의 대표적인 표징이었다. 신라 후기 농업 생산력의 발달에 따른 농민의 성장, 그 가운데서도 민전(民田)을 소유한 자영 농민의 성장은 종래의 공동체적인 국가 파악을 극복하고 고려초에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합리적인 수취 제도를 실시하게 하였다. 또한, 후삼국 혼란기의 농민 반란에 따른 농민 의식의 상승도 농민의 지위 향상에 커다란 구실을 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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