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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5-23 (목) 22:20
분 류 사전1
ㆍ조회: 3799      
[사찰] 김제 금산사 (민족)
금산사(金山寺)

관련 항목 : 금산사 미륵전, 금산사 미륵장륙상

      금산사 전경.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에 있는 절. 대한불교 조계종 제17교구 본사. ≪금산사사적≫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나한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에 있는 금산사의 전각. 나한전은 방등계단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하여 일명, 계단예배전이라고도 한다.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을 봉안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미륵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사의 불전. 국보 제62호. 미래불인 미륵보살을 모신 법당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미륵전.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전. 1층과 2층은 정면 5칸, 측면 4칸이고, 3층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된 팔작지붕 건물. 국보 제62호. 거대한 미륵존불을 봉안한 불전으로 1층은 대자보전, 2층은 용화지회, 3층은 미륵전의 편액이 붙어 있는 우리 나라 유일의 3층불전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미륵전' 항목

      금산사미륵장륙상.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조선시대의 불상. 본존불 높이 11.82m, 좌우협시보살상 8.79m.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양식을 보이는 본존불과 조선 후기 보살상의 양식을 갖춘 협시보살로 이루어진, 거대한 소조불의 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석종. 전북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금산사에 있는 고려 전기의 탑. 높이 2.27m. 보물 제26호. 방형기단의 상하층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었고, 탑신은 평면원형의 종형이다. 정상에는 9마리의 용이 조각되었는데, 머리 부분만 밖을 향하여 있다. 그 위에 앙련이 조각된 2매석이 있으며, 정상에 보주석이 얹혀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금산사 배치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

[역사]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절의 품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모셨고, 금당(金堂: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 法華玄贊≫·≪유식술기 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 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이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石蓮臺)·오층석탑·노주(露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看經:경전을 읽음)·법석(法席: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창건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대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南岳)이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주지)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 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 등이 머물렀다.

또한 포광(包光)이 지은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和尙) 또는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 1902년에는 섭리(攝理)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우 및 중요 문화재]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大寺)·봉천원(奉天院)·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 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 재건되었고, 나머지 사지(寺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 전해지고 있다.

근년에 월주(月珠)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약 500m 밖에 위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普濟樓)·미륵전·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僧堂)·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22호인 노주, 보물 제23호인 석련대, 보물 제24호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 보물 제26호인 석종,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 보물 제28호인 당간지주, 보물 제828호인 석등, 보물 제827호인 대장전 등이 있다.

이 중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전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아난(阿難)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方等戒壇)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방등계단 앞에는 1998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일주문은 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하였으며,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法要:법회의식)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현존하는 당우로는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中香閣),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送大香閣)이 있다. 또한 1999년에 금산사 내의 성보문화재를 보관 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경내에 지었다.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庭中塔:법당 앞 뜨락의 탑)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산내 암자]

① 심원암(深遠庵):금산사에서 동북쪽으로 1.5㎞ 지점에 있다.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인법당과 산성각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암자이기 때문에 연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원암의 북쪽 산정 0.5㎞ 지점에는 보물 제29호로 지정된 북강삼층석탑(北崗三層石塔)이 있다.

② 용천암(龍天庵):금산사의 동쪽 기슭 1.8㎞ 지점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지금의 본당인 관음전과 요사는 1974년에 중건한 것이다. 산세가 용이 비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용천암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법당 자리는 용의 혀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③ 청련암(靑蓮庵):금산사에서 1.5㎞ 거리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정유재란 이전에는 청사굴(靑社窟)이라고 불렀다. 1959년 극락전과 삼성각, 그리고 두 동의 묘사(廟祠:제사를 모시는 사당)로 구성되어 있는데, 1962년 대법화보살이 중창했다.

④ 부도전(浮屠殿):금산사의 동쪽 0.2㎞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혜덕왕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남악당선사(南嶽堂禪師)의 부도 등 모두 12기의 부도와 2기의 비석이 있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新增東國輿地勝覽,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金山寺誌(金映遂), 韓國의 寺刹 11-金山寺-(韓國佛敎硏究院, 一志社, 1977), 전통사찰총서⑧­전북의 전통사찰­(사찰문화연구원, 1997).

<김위석>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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