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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1 (월) 13:11
분 류 사전1
ㆍ조회: 4047      
[조선] 조선 전기의 토지제도 (민족)
토지제도(조선전기) 조선 전기의 토지 제도

관련 항목 : 과전법

세부항목

토지제도
토지제도(상대 : 삼국 시대)
토지제도(통일신라시대)
토지제도(고려시대)
토지제도(조선전기)
토지제도(조선후기)
토지제도(개항이후)
토지제도(광복이후)
토지제도(참고문헌)

1. 과전법

과전법은 조선 초기의 기본적인 토지법이다. 고려 왕조가 멸망하기 직전의 상황을 보건대 당시의 토지 지배 관계는 극도로 문란한 상태에 있었다. 전시과제도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지가 오래되었으며, 이에 대신하여 혼란한 경제 질서를 극복하고 새 질서의 기초가 될만한 토지 지배의 제도적 장치는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있었다.

소수의 탐욕한 권력자들이 부정한 방법으로 농장을 확대하여 광대한 면적의 토지를 소유한 반면에, 일반 관리나 수많은 농민들은 토지를 상실하여 처지가 매우 어렵게 되어 있었다. 이에 1388년(우왕 14) 5월에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대권을 장악한 이성계와 그를 총수로 받들어 결집한 신진 사류파(新進士類派)들은 “제도(諸道)의 사전을 혁파하여 민생을 탕화(湯火) 속에서 건져야겠다.”라는 명분을 내걸고 전제 개혁인 사전 혁파를 단행하는 작업의 제일보를 내딛게 되었다.

신진 사류파들은 우선 우왕을 폐하고 창왕을 세우는 동시에 왕으로 하여금 교서(敎書)를 내리게 하여 전제 개혁인 사전 혁파의 구체적 의안을 상정하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왕실과 왕실을 지지하는 보수파 관료들은 존망의 위급한 고비에 서게 되었다. 따라서 전제 개혁의 실시를 둘러싸고는 개혁파와 보수파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는데, 개혁파인 신진 사류들이 보수파의 반대를 누르고 전제 개혁을 단행해야 한다는 대원칙이 국가의 방침으로 결정되었다(1388년 7월∼1389년 4월).

이러는 사이에 조정에서는 각도에 양전사(量田使)를 파견하여 토전을 개량(改量)하는 작업에 착수하고(1388년 8월), 또 급전도감(給田都監)이 설치되는 등(1388년 10월) 기본적인 개혁 작업이 구체적으로 진행되었다. 과전법 제정이 정식으로 선포된 것은 1391년(공양왕 3) 5월의 일이지만, 그 전해인 1390년 9월에는 새로운 전적(田籍)의 작성 작업이 일단 마무리를 짓게 되어 공사의 구전적은 시가에서 불태워 없애버렸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과전법이 발효됨으로써 왕실과 왕실을 지지하는 보수파 세력의 경제적 기반은 단번에 무너지고 말았다. 고려 왕조는 과전법이 실시된 다음해인 1392년 7월에 멸망하고, 새로이 제정된 이 토지법은 신왕조 조선의 경제 질서를 통제하는 법적 장치가 되었다.

과전법 규정의 내용을 살펴보면, 왕년의 공·사 전적을 일제히 조사, 정리하여 능침전(陵寢田)·창고전(倉庫田)·궁사전(宮司田)·군자시전(軍資寺田)·사원전(寺院田)과 외관의 직전(職田), 그리고 향리·진척·역리·군장(軍匠) 등에 지급할 잡색위전(雜色位田)을 설정하되, 원래 규정의 결수에 과부족이 있을 경우에는 원래의 규정대로 복구하여 지급하였다는 대원칙을 먼저 수립하였다.

과전법의 지급 규정안에는 보이지 않지만, 군자위전(軍資位田) 이외에 풍저창위전(豊儲倉位田:국용)·광흥창위전(廣興倉位田:녹봉)과 경중각사위전(京中各司位田) 등이 초기에 한때(세종대 이전) 있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다음에 과전에 관한 지급 규정이 보이는데 이 규정에 의하면 과전은 기내의 토지로서만 지급하도록 급전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왕실을 호위하는 양반 관인층은 시·산(時散)을 막론하고 제1과(재내대군, 문하시중) 150결, 제2과(재내부원군, 검교시중) 130결, ……제17과(동·서 9품) 15결, 제18과(권무·산직) 10결의 토지를 과등에 따라 각각 받도록 되어 있다.

외방에서는 그 지방의 한량관리(閑良官吏:일반 병사가 아니라 지방에 거주하는 유력 향호층)에게 군전(軍田)을 지급하되 본전(本田)의 다소에 따라서 10결 혹은 5결을 각각 지급한다. 이 밖에 공신들에게는 공신전이 지급되었다. 이상이 과전법에서 규정된 가장 기본적인 급전시책에 관한 항목들이다.

공사천(公私賤)과 공상(工商)·무격(巫覡)·창기(倡妓)·승니(僧尼) 등의 신분에 대해서는 본인은 물론 자손에게도 급전을 금하는 신분적 제한이 가해졌고, 또 구례에 따라 평안도와 함경도 양계의 토지는 별도의 취급을 받아 군수(軍需)에만 충당하였다.

이상을 요약하면, 과전법은 능침·창고·궁원 등 왕실관계의 기관과 국가의 여러 관사(官司), 그리고 군인·서리·향리·공장(工匠) 등 각종 직역의 부담자에 대하여 일정한 기준에 따라 토지를 지급하여 그 수확의 일부를 취득하게 하는 분급 수조지에 관한 제도였다. 분급 수조지의 지급을 받는 대상자들 가운데 가장 중요시된 것은 과전을 받는 관료층들이며, 새로이 제정된 과전법은 주로 이들 관인층과 그 동반자인 대군(大君) 등 궁정 귀족들의 유복한 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재정 시책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과전법의 제정 과정에서 당국이 가장 깊은 관심을 베푼 것은 과전을 넉넉히 책정하여 관인층을 우대하고, 군자시위전(軍資寺位田)을 충분히 설정하여 군량을 풍부하게 확보하는 일이었다. 처음 방침은 외방의 이속이나 군장은 물론이요 공사의 천인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국가의 공역(公役)을 집행하는 자에게는 일정한 토지를 지급해야 한다는 매우 적극적인 자세였는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천인에 대한 급전은 금지되고, 나머지 외역전(外役田)·잡색위전 따위도 다만 고려시대의 전례에 따라 지급한다는 식으로 후퇴하고 말았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보아도 당시 당국자들이 이 방면의 후생 시책에 대해서는 큰 열의가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과전법 제정에 착수하면서 선언한 “민생을 탕화 속에서 건져야겠다.”는 공약은 이리하여 하나의 구호에 그치고 말았다.

과전법이나 전시과나 그것이 국가재정의 토대가 되는 기본적 토지법이라는 점에서는 하등의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 토지법의 내부구조를 비교해 본다면 서로 상당한 차이가 있었음이 발견된다. 우선 주목되는 것은 과전법하의 전객(과전의 경작자 내지 경작권자)의 성격 문제이다.

과전법의 규정안에는 전주와 전객의 관계를 규제한 항목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는데, 전주가 전객의 토지를 침탈하거나 전객이 토지의 경작을 고의로 포기하는 등 기타의 방법으로 전주에게 손해를 입히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규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주가 전객의 소경전을 침탈하면 1부(負)에서 5부에 이르기까지는 태(笞) 20으로 정하고, 매 5부에 한 등급을 가하여 죄가 장(杖) 80에 이르면 직첩(職牒)은 거두지 아니하되, 1결 이상이면 그 정(丁)은 다른 사람에게 체수하는 것을 허가한다. 전객은 그 소경전을 가지고 함부로 팔거나 별호인(別戶人)에게 주지 못하며, 전객이 경작지를 과다하게 점거하여 고의로 황폐하게 하였을 경우에는 전주가 그 땅을 임의로 처분하는 것을 청허한다. 여기서 말하는 전주는 과전을 지급받아 수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분급수조지의 전주 즉 관인층을 의미하며, 전객은 과전으로 지정된 토지 즉 민전의 주인을 의미한다.

민전은 일정한 사람의 소경전으로서 토지대장에 등록된 땅이며, 민전주는 소경권자(所耕權者), 즉 경작권의 주체를 말하는 것이다. 과전으로 편성된 민전은 민전의 주인이 직접 경작하여 전객의 자격으로 10분의 1을 전주에게 지불하는 경우도 있고, 또 민전의 주인이 직접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노비나 기타 노동력을 이용하여 소작을 시킨 다음 역시 소출의 10분의 1을 전주에게 조의 형식으로 지불하는 방식도 있었다.

후자일 경우 전주에게 지불되는 조(租)는 본래 국고에 바쳐야 할 지세에 해당하는 것이며, 소작관계에서 형성되는 분반수익의 소득은 지대에 해당한다. 이럴 경우라도 과전의 전객(민전주)는 소출의 10분의 4에 해당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다(10분의 5에 해당하는 지대에서 10분의 1에 해당하는 조의 부담을 공제한 부분).

과전법에서 말하는 전주와 전객의 관계는 하나의 의제적인 토지소유주와 현실적·실질적 토지소유주와의 관계를 표현한 것인데, 전주 즉 과전을 받은 자가 의제적 소유주이며, 전객 즉 민전주가 현실적·실질적 소유주임은 더 거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전객은 고의로 경작의무를 태만히 하여 전주에게 손해를 입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소경전에 대한 권리가 침해되는 일은 없다.

전시과의 양반전 즉 과전은 이미 지적한 대로 그것이 어떤 지목의 토지 위에 설정되어 있었는지 그 실정이 애매하여 많은 이론(異論)들이 대립되어 있는 터이지만, 현재로서는 지대의 수취가 성립하는 소작경영지에 설정되었으며, 그 땅을 경작하는 전호는 지대를 부담하는 소작농민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이 소작농민이 소작만으로 생계를 세운 몰락농민인지 혹은 영세소농민이 자작을 하면서 일부 소작을 겸해서 생계를 보충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아마 대부분의 경우 후자에 해당하였으리라고 생각한다.

하여튼 전시과의 양반전은 대개의 경우 특정한 소작경영지에 설정되어 거기서 수취되는 조(租:양반전의 조)는 지대로서 구현되는 것이었는데, 과전법의 과전은 일반 민전 위에 설정되어 거기서 수취되는 조는 민전주가 국고에 부담하는 지세와 같은 구실을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공전(국고에 조를 바치는 민전)과 사전(과전) 사이에 고려 시대와 같은 차율수조(差率收租)가 적용될 필요는 없었다.

공전·사전은 이미 등질적(等質的)인 토지로 화하였으므로 과전을 공전만이 설정되어 있었던 하삼도에 이급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설명하기는 퍽 어렵지만 농민적 토지소유의 보편적 성립이라는 문제와 무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농민적 토지 소유의 성립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는 앞 장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거니와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역시 휴경농법이 채택된 휴경농지의 양적인 비중관계라고 이해된다. 과전법이 제정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휴경농법이 가지는 경제사적 의미는 전시과시대에 비해서 거의 문제가 되지 않으리 만큼 감축되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시과 체제하에서는 자영 소농민이 보유하는 경작지 안에는 생산성이 매우 불안정한 휴경농법에 의존하는 농지의 비중이 퍽 높았다고 생각한다. 자력이 풍부하고 우수한 농기구와 농우를 많이 비축하여 영농조건이 탁월하게 앞선 일부 소수의 특권층이 가진 농지를 제외하고는 일반 소농민들의 경작지는 대부분 휴경농법의 제약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직 저급한 농경기술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대부분의 소농민들은 그러한 조건하에서 자기의 보유경작지를 경영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양반전이나 궁원전·사원전 같은 것을 소작하면서 생계를 꾸려 나갔는데, 양반전의 전신은 영농조건이 탁월하게 우월한 신진특권층의 사적 소유지에 그 계보가 연결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신진특권층들이 많은 자력을 투자해서 잘 가꾸어둔 질이 좋고 생산성이 높은 농지가 전시과제도의 창설에 즈음하여 대부분 신진특권층으로 구성된 양반관료들의 전시과(과전)으로 편성되었으리라는 것은 당연히 상정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과전법이 성립된 시기에는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농업기술의 발달과 이것을 전제로 한 사회생산력의 발전 등으로 인하여 농민의 경작지와 특권귀족층의 소유지 사이에 생산성의 안정도라는 관점에서는 큰 차이가 없어졌다. 물론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서 용익가치(用益價値)에 차이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것은 수등이척이라는 특수한 결부법을 고안하여 조절하였으므로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다.

과전법에서 과전이 일반농민들의 경작지(민전) 위에 설정될 수 있었던 배후에는 농민들의 토지소유관계에 그만한 커다란 성장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전시과 제도에서는 과전이 수전자의 당대에 한하여 지급되도록 되어 있었으며, 본인이 사망하면 국가에 일단 환수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수전자가 사망한 뒤에는 그 유가족들에 대한 생계대책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전시과법은 일반 전시과와는 별도로 공음전시과를 설정하고, 또 한인전·구분전 등을 마련하여 일반 전시과의 미비점을 보완하는 형식으로, 아직 사환(仕宦)하지 못한 5품 이상 고급 양반의 자식이나 연립할 자손이 없는 양반·군인의 처와 형제가 없이 고아로 남게 된 양반의 미가여자(未嫁女子)에 대하여 일정한 액수의 토지를 지급하였다.

과전법에서는 본인이 사망하여도 그 유족이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명목으로 일정 정도 과전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가 있었다. 수전자가 사망한 뒤 그 처가 자식을 두고 수절하는 경우에는 망부(亡夫)의 전과(田科) 전액을 수신전 명목으로 전수받고, 자식이 없이 수절할 경우에는 반액을 받는다. 처가 없을 경우에는 자식이 아비의 전과 전액을 휼양전의 명목으로서 전수받고, 20세가 되면 본인의 전과에 따라 갱정되었다. 이와 같이 과전법은 제도 그 자체 안에 꽤 강한 세습상속의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었다.

공신전(功臣田)은 물론 상속이 허용된 토지였다. 자식이 부모의 전토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규정도 보이는데 이것은 상속이 허용된 공신전의 경우거나 혹은 수신전 같은 것이 자식에게 전수되는 경우를 말하는 것이라고 이해된다.

과전의 전부 혹은 일부를 남에게 줄 수도 있었는데 이럴 경우에는 미리 관청에 신고하여 허가를 받아야 하였다. 수전자가 후계자 없이 사망할 경우나 혹은 맡은 바 의무를 다하지 못하였거나 범법을 하였을 경우에는 그 토지를 몰수하거나 수전할 자격이 있는 제3자로 하여금 진고체수(陳告遞受)하게 하였다. 이상이 과전법의 기본적인 윤곽이다.

과전법에서도 전국의 토지는 크게 나누어 공전과 사전으로 구분되었다. 공전은 국가에 세를 부담하지 않는 무세지이며, 사전은 세를 부담하는 유세지였다. 공전이거나 사전이거나 조는 모든 토지에 매결 30두씩 부과되었다. 세는 조(租)와는 달리 그 액수(1결 2두)가 퍽 경미한 것이며, 조(1결 30두)의 15분의 1에 불과하였다. 이 유세지가 사전이며, 이에 대하여 무세지는 공전이었다.

무세지인 공전은 창고전·궁사전·공해전·늠급전(鹿給田)·아록전(衙祿田) 등이며, 유세지인 사전은 과전, 군역전(軍役田), 외역전, 진·역·원·관·지장전(津驛院館紙匠田) 같은 것이었다. 군자전(軍資田)에 관해서는 세의 유무를 잘 알 수 없다. 유세지에서 거둔 세는 녹봉에 충당되었으므로 녹과위전(祿科位田) 또는 녹전이라고도 불렀다.

이 밖에 광흥창위전이 있고, 또 국용의 재원으로서는 풍저창위전이 있었다. 양창위전은 경중각사위전과 더불어 무세지인 공전에 해당하는 것이었는데, 세종 때의 개혁으로 국용전(國用田)이라 고쳐 불렀다. 본래 무세지 안에는 공신전과 사사전(寺社田)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태종 때의 개혁으로 유세지로 개편되었다.

태종의 개혁 이후 무세지인 공전과 유세지인 사전의 범주가 결정된 이래 공전과 사전은 조의 귀속과 세의 유무에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기타의 부담 관계인 조나 역역의 부담액에서는 하등 구별될 바가 없었다. 이리하여 공전·사전의 차이는 다만 형식상의 것에 불과하며, 어떠한 본질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시대 전시과 제도하에서의 공전·사전 관계에 대비하여 큰 변화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과전법하에서는 공전·사전을 등질적인 것으로 보려는 의식마저 나타나게 되었는데, 사전 가운데 과전(직전)과 군전이 점차 소멸됨에 이르러서는 공전·사전의 구분 그 자체가 불필요하고 무의미하게 되었다. 과전법은 흔히 자영소농민을 기축적 경제기반으로 삼는, 혹은 삼으려고 의도한 토지법이라 한다. 이러한 해석은 그런대로 타당성이 있다.

조선 초기의 토지 지배 관계를 경영적인 측면에서 크게 나누어 보면, ① 국가에 세역(稅役)을 부담하는 자유소농민(양민)이 직접 경영하는 자영(自營)형태, ② 주로 노비를 사역하여 경영하는 왕족·양반 등 토지 귀족의 농장형 형태, ③ 주로 지방의 토호인 부강자가 양민과 합작하여 경영하는 병작형 형태가 있었다.

이 세 가지 유형의 경영 중에서 처음에는 가장 비중이 크고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이 아마 ①의 유형에 속하는 소농민의 자영 형태였고, 가장 비중이 약한 것이 ③의 병작형 형태였을 것이다. ②의 농장형 형태도 주로 외거 노비를 부려 지대를 수취하는 경영 형태를 취하였다는 의미에서는 ③의 병작형 형태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었으나, 병작형 형태에 비해서는 여러 가지로 낡은 신분 관계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농장형 경영 형태는 지대를 수취하는 경영 형태로서는 매우 미숙하고 불안정한 것이었으므로 어차피 조만간 그 체질의 개선이 요청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었다. 과전은 경기도지역에 한하여 지급되었으며 소농민의 경작지 위에 설정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더러는 농장형 경영형태를 취하는 누대농사 위에 설정되는 일도 있었고, 또 병작반수의 경영 형태를 취하는 농지 위에 설정되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2. 병작반수와 농장의 부활

과전법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렇게 된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지급해야 할 과전의 재원인 토지면적은 늘 부족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과전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환자(仕宦者)의 수는 상대적으로 늘어나서 수급 관계의 균형을 맞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토지수수의 관리능력이 부족하였던 탓으로 일단 절급된 토지는 사실상 세습화하는 경향을 보였으므로 사태는 어렵게 진전되었다. 조정에서는 관료·귀족들의 줄기찬 촉진운동에 밀려 마침내 그 타개책으로 사전의 하삼도이급을 결행하게 되었다(태종 17년 7월, 1417). 이 조처로 인하여 기내의 과전·공신전·별사전·사사전 등에서 그 3분의 1이 충청도·전라도·경상도 등 하삼도로 이급되었다.

하지만 이 시책은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하고 불과 15년 만에 하삼도로 이급된 사전은 다시 경기도로 이환하게 되었다(세종 13년 1월, 1431). 그 이유는 예상한 대로 외방에서 사전을 중심으로 한 불법적 겸병의 징조가 나타나서 대토지집중의 경향이 뚜렷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사전의 하삼도 이급이 실패한 뒤에 제2의 타개책으로 수립된 것이 직전법(職田法)이었다(세조 12년, 1466). 이 직전법이란 산관(散官)에 대한 과전의 지급과 또 사망한 관료의 유가족을 위하여 설정한 수신전·휼양전 등을 폐지하고 오직 현직관료에 한하여 수조지를 지급해 주는 것이었는데, 이것도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실시한 지 채 4년이 못 되는 1470년(성종 1)에는 직전세(職田稅)라는 제도로 전환하게 되었다.

직전세라는 것은 해당 직전의 전조(田租)를 관수관급(官收官給)하여 직전을 받은 관료에게 해당액을 지급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관료에 대한 토지 분급 제도가 폐지되고, 그 대신 녹봉에 대한 일종의 가봉(加俸) 형식으로 직전세가 해당 관료에게 지급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직전세도 1557년(명종 12)경에는 폐지되어 없어졌거니와 하여튼 직전세의 성립을 계기로 하여 과전법은 무너진 것이나 다를 바 없게 되었다.

관료의 생계 기반이 되는 토지분급제도인 과전법이 이와 같이 허물어지는 사태에 대해서 관료측으로부터 어떤 특별한 저항이나 반발이 일어난 일은 없다. 관료층은 대개 과전에서 얻는 수입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별개의 다른 경제적 기반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형세는 병작반수의 발달, 농장의 부활이라는 모습을 갖추어 유지되었다.

병작반수는 수확을 분반하는 소작제 일반과 별 차이가 없는 개념이다. 이러한 소작관행은 이미 오랜 옛날부터 존재했던 것인데, 이것이 하나의 폐습으로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과전법 성립 이후의 일이다. 병작반수는 크게 나누어 ‘유전자유고형(有田者有故型)’과 ‘초납유망형(招納流亡型)’의 두 유형이 있었다. 전자는 상고(喪故)·병고(病故) 및 기타의 사고로 인하여 노동력이 부족하였던 탓으로 가까이 사는 이웃이나 족친(族親)과 합작하여 소작경영을 하는 것이고, 후자는 이미 널리 토지를 점거한 부강자 특히 지방의 향리·품관들이 몰락한 유망민을 초납하여 대규모의 소작 경영을 하는 것이었다.

유전자유고형은 농촌사회에서 흔히 있는 상호부조의 협력관계로 간주되어 별로 비난을 받지 않았으며, 세조 때에는 민간의 상사(常事)로 여겨질 만큼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서 초납유망형은 당시 농촌경제질서를 파괴하는 불법적 경영으로서 몹시 지탄을 받았다. 그 이유는 지방의 향호들에 의하여 전호로 영입된 이들 몰락유망민들이 지주인 향호의 두터운 보호를 받으면서 국가의 부역을 포탈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고려 말기 농장의 악폐가 재현될 조짐이 명백히 나타나 있었다. 이런 유형의 병작반수는 자영소농민을 기축적인 경제기반으로 삼아야 할 과전법 체제하에서는 당연히 금지되어야 할 일이었다. 정부에서는 병작의 금법을 강화하기 위하여 토지의 매매도 금지하였다. 그런데 얼마 안가서 병작반수의 금법은 환·과·고·독·무자식·무노비(鰥·寡·孤·獨·無子息·無奴婢)의 경우에 한하여 부분적으로 풀리기 시작했다가, 그 뒤 금법 자체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또 토지의 매매는 완전히 공인되고 말았다.

본래 병작의 금법은 자영소농민을 보호하는 취지에서 구상된 것이었는데, 이들 자영소농민이 안정된 생활을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못하는 이상 입법의 취지에 걸맞는 성과를 기대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과전법의 제정으로 고려 말의 사전이 혁파되어 문란한 토지질서가 바로잡히고, 그 결과 농민생활도 어느 정도 향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의 농촌실정을 보면 농민들의 생계안정을 위협하는 모순요인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농민들에 대한 국가의 가혹한 수탈, 농민들의 이토(離土) 유망, 부강자들에 의한 진황지의 강점 혹은 억매(抑買)를 전제로 한 토지겸병의 급속한 진전 등 온갖 악순환이 반복되는 과정에서, 한편으로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지만 노동력이 부족한 지주가 존재하고, 한편으로는 노동력은 있으나 경작할 토지가 없는 농민들이 존재하는 이상, 토지의 병작경영을 금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조율(租率)은 10분의 1로 고정되어 전호에게 10분의 5의 소작료를 지불하여도 지주는 수확의 10분의 4에 해당하는 수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구조하에서 병작 경영을 금지해 보아야 아무 효과가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병작반수는 국초 이래 팽창일로를 걸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전을 거듭해 왔는데, 세조 때를 거쳐 예종 때에 이르는 사이에 더욱 더 발달하여 마침내 국가에서도 병작경영을 공인하고 각 읍의 둔전에 병작반수경영을 도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과거에 금기시되어오던 병작반수는 국가로부터 공인을 받은 합법적 경영형태가 되었다(1469년).

15세기 말기에 가까운 이 무렵에는 품관·향리 등 지방의 향호뿐 아니라 왕족이나 양반 등 도시귀족들도 그들의 농장 안에서 꽤 널리 병작제경영을 확대해 나가고 있었을 것이라고 인정된다. 벌써 사회의 대세가 병작제를 가장 합리적이며 일반적인 경영 형태로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도시귀족들의 농장에서는 노비들의 노동력으로 농사를 짓는 노비제 경영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조선의 왕조 혁명에 즈음하여 많은 구왕조 계열의 권력자들의 토지가 몰수되었다. 고려 왕조 치하에서 농장의 형식으로 대토지를 소유하던 보수파 관료인 반혁명파들은 신왕조 성립 이후에 대부분 정계에서 숙청을 당하고 가산이 몰수되었다.

정치적 숙청을 면한 사람들도 부정한 방법으로 남의 토지를 탈점하여 설정한 농장은 대개 몰수되었다. 몰수된 토지는 혁명파 신흥 귀족들 사이에서 적당히 재분배되었다. 구왕실 소속의 토지가 구왕조의 소유에서 신왕조의 소유로 넘어갔을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흥 귀족들의 대토지 사유인 농장이 형성되었다.

혁명이 일어나서 신왕조의 터전이 굳어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명목의 공신들이 책봉되어 방대한 공신전·별사전이 지급되었는데, 특히 왕의 근친이나 측근에게 수시·수의로 사급된 별사전은 수조지로서가 아니라 토지 그 자체를 지급받은 예도 많고, 또 이 별사전은 지급하는 지역이 과전과 같이 반드시 기내에만 한정된 것도 아니다.

토지 자체로 사급된 별사전은 상속이 인정되고 국가에 대한 납조가 면제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으므로 이런 토지가 집적되어 수전자의 농장으로 화하였다. 공신전·별사전이 아니더라도 신왕조에 영합하여 관료로 포섭된 양반들은 본래부터 집안 가산으로 소유한 땅들이 많이 있었는데, 이런 땅 중에는 누대농사라고 불려진 것도 있었다.

병작은 금지되었지만 이 땅들이 합법적으로 소유한 노비들에 의하여 경작되는 이상 국가는 그들의 토지소유에 간섭을 하거나 제약을 가하는 일이 없었다. 이러한 것이 바탕이 되어 도시귀족들의 농장이 형성되는 경우도 많았다. 도시귀족들의 농장이 주로 노비의 노동력으로 경작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노비들의 자기경영부문을 부인하는 경영 형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노비 사역형 토지 경영은 솔거노비를 부려 직영하는 형태도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 외거노비에 경영을 맡겨 그들로부터 일정한 지대를 수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도시귀족들의 농장이건 지방향호들이 병작의 양식으로 경영하는 토지이건간에, 토지지배의 목적이 지대수취에 있었다는 점에서는 본질적인 차이가 없었다. 다만 도시귀족들의 농장일 경우에는 경작노동의 부담자가 신분적으로 예속성이 강한 노비였다는 점에서 병작전호에 비해서는 여러 가지로 열악한 조건하에 있었다. 우선, 노비들은 지대 이외에 신공의 부담이 첨가되어 있었으며, 지대부담도 양인전호에 비하여 더 무거웠을 가능성이 있다. 이와 같은 외거노비의 독립적 경영에서의 불안정한 조건은 그들의 생산 활동에 있어 늘 마이너스의 기능을 하는 저해요건이 되었다.

같은 지대의 수취를 목적으로 하는 토지 지배이면서도 노비를 부리는 도시귀족들의 농장은 경영상 이 같은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농장이 병작제 경영과 서로 대등한 경쟁을 하여 생산력 수준에서 크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변혁의 체질 개선이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다.

도시귀족들의 농장에서는 노비제 경영을 주로 하면서도 부차적인 형태로서는 빈궁한 양인농민에게 소작을 시켜 지대를 받는 병작제 경영도 서로 병행되고 있었는데, 농촌사회에서 병작제 경영이 급속히 진전되고 확대됨에 따라 도시귀족의 농장에서도 병작제 경영의 비중이 차츰 커져 가는 추세에 있었을 것으로 인정된다.

이 문제는 앞으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에 의하여 더 깊이 검토되어야 할 일이지만 과전법이 사실상 무너지고 자영 소농민이 당시의 경제구조 안에서 기축적 기반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 이후부터는, 병작제가 몰락한 자영소농민들을 흡수하여 점차 토지경영의 주류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을 것이다.

<강진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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