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4 (수) 11:36
분 류 사전1
ㆍ조회: 3431      
[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1 (민족)
과거(조선시대) 조선시대의 과거 1

관련항목 : 문과, 무과

세부항목

과거
과거(고려시대)
과거(고려 말 조선 초의 과거)
과거(조선시대) 1
과거(조선시대) 2
과거(과거제도의 개혁론)
과거(과거의 영향과 의의)
과거(근대화와 과거제도의 폐지)
과거(참고문헌)

[개요]

조선 시대 과거에는 소과ㆍ문과ㆍ무과ㆍ잡과의 네 종류가 있었으며, 또한 정기시(定期試)와 부정기시(不定期試)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에 한 번 열린 식년시 하나밖에 없었으나, 수시로 열린 부정기시는 증광시(增廣試)ㆍ별시(別試)ㆍ알성시(謁聖試)ㆍ정시(庭試)ㆍ춘당대시(春塘臺試) 등이 있었다. 이 중 식년시와 증광시는 소과ㆍ문과ㆍ무과ㆍ잡과가 모두 열렸으나, 별시ㆍ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는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시험 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들면 처음에는 모든 시험을 식년(子ㆍ卯ㆍ午ㆍ酉) 정월에서 5월 사이에 거행하였다. 이로 인하여 향시인 초시에 합격한 자들이 서울에 올라와 복시에 응시하는 데 기간이 촉박하였고, 또 농번기에 수험생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농사에 방해되는 일이 적지 않았다. 그리하여 1472년(성종 3) 초시를 식년 전해인 상식년(上式年) 가을에, 복시를 식년 봄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편, 조선 시대 1437년(세종 19) 이후부터 과거시험의 장소를 1소(所)와 2소로 나누어 고시한 점이 특이하다. 이는 송대에 시관(試官)의 자제들을 따로 모아 시험한 별두장(別頭場)을 본뜬 것으로서, 1소시관의 자제나 친척 등의 상피인(相避人)을 2소로 보내고, 반대로 2소시관의 자제를 1소로 보냄으로써 과거의 공정을 기하는 동시에, 부자가 한 시험장에서 실력을 다투는 비례(非禮)를 피할 수 있는 이점이 있었다. 그러나 이 분소법(分所法)은 불편함도 적지 않았다. 다 같은 시험인데도 시험장소에 따라 시관이 다르고 시험문제가 달라서 수험생의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조선 시대의 고시관은 여러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는 복수시관제(復數試官制)로서 상시관(上試官)ㆍ참시관(參試官) 수인과 감시관(監試官) 1인이 임명되었고, 전시의 경우 대독관(對讀官) 3∼5인(3품 이하), 독권관(讀卷官) 3인(2품 이상)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시관은 고려시대의 지공거와 같은 권한을 가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제한된 소임만을 하게 되었다.

[소과]

소과에는 생원시와 진사시가 있었는데, 다 같이 초시ㆍ복시 두 단계의 시험에 의하여 각기 100인을 뽑아 생원ㆍ진사의 칭호를 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와 같은 소과를 감시ㆍ사마시라고도 하였고, 또 생진과라고도 하였다. 고시 과목은 생원시의 경우 사서의(四書疑) 1편과 오경의(五經義) 1편으로 정해졌으나, 정조 때 오경의 중에서 춘추의(春秋義)를 빼고 사경의만 시험 보이는 것으로 바뀌었다.

진사시의 경우는 부(賦) 1편, 고시(古詩)ㆍ명(銘)ㆍ잠(箴) 중 1편으로 정해졌지만, 실제로는 명ㆍ잠이 출제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시험 시기는 식년시를 예로 든다면, 소과 초시는 상식년 8월 하순에, 복시는 식년 2월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다. 소과 초시에는 한성시(漢城試)와 향시가 있었다. 한성시는 서울 및 경기도의 수험생 (경기도 수험생은 선조 38년 경기도의 향시가 폐지된 이후부터 응시하게 됨)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며, 시험장소는 대체로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 비천당(丕闡堂)으로 하는 것이 상례였다.

각 시험장마다 한성부낭관과 4관(四館)의 7품 이하관 3인이 녹명(錄名)을 담당하고, 정3품 이하 1인이 상시관, 2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처음에는 진사 초시ㆍ생원 초시 각각 100인을 뽑았으나, 경기도 향시를 없애고 경기도 수험생을 함께 고시하게 된 뒤에는 각각 130인을 뽑았다.

향시는 8도에서 도 단위로 실시하였다. 그 중 경기도 향시는 1603년(선조 36)에 폐지되었다. 향시도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경기ㆍ충청ㆍ전라ㆍ경상도는 좌ㆍ우도, 평안ㆍ함길도는 남ㆍ북도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다만, 인구가 적은 강원ㆍ황해도만은 나누지 않고 한 곳에서 고시하였다. 시험 장소는 일정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소속 읍 중에서 윤번으로 정하였다.
향시시관은 감사가 문과 출신의 수령이나 교수 중에서 골라 상시관 1인과 참시관 2인을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협잡이 많아서 1553년(명종 8)부터는 경관(京官:조선시대 서울에 있던 각 관아의 관원 및 개성ㆍ강화ㆍ수원ㆍ광주 등의 유수)과 도사(都事)를 상시관으로 보내기로 하였다.

하삼도(下三道)의 좌도와 평안남도에는 경시관(京試官), 하삼도의 우도와 강원ㆍ황해도 및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에는 도사, 함경남도에는 평사(評事)를 상시관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향시의 시취액수(試取額數)는 다음의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역별로 각기 차등이 있었다.

향시의 상시관은 합격자 발표가 있은 뒤 그 명단인 방목(榜目)을 작성하여 감사ㆍ예조ㆍ법사(法司) 및 4관으로 보냈다. 소과는 위와 같은 정규의 초시인 한성시ㆍ향시 이외 합제(合製)ㆍ공도회(公都會) 등 초시에 해당하는 각종 시험이 있어서 이에 합격하면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승보시는 성균관 대사성이 매월 1일과 15일 사학생도를 고시 1편, 부 1편으로 시험하고, 연말 점수를 계산하여 우수한 자 10인(뒤에 12인으로 늘어남)을 뽑아 소과복시의 응시 자격을 준 것이었다. 뒤에는 개성ㆍ수원ㆍ제주도에도 승보시를 두어서 유수 또는 목사가 그 지방의 유생을 시험하여, 개성ㆍ수원은 4인, 제주도는 2인을 뽑아 역시 소과복시의 응시 자격을 주었다.

합제는 사학생도들에게 과업(科業)을 권장하기 위하여 만든 것으로서, 제술(製述)ㆍ고강(考講)의 두 종류가 있었다. 제술은 사학의 학관(學官)이 1년에 네 번 시ㆍ부로써 고시하여 매회에 각 학당에서 5인씩 모두 80인을 뽑고, 이들을 성균관에 모은 후 관관(館官)과 학관이 다시 시험하여 8인(뒤에 16인으로 늘어남)을 뽑아 진사복시의 응시 자격을 준 것이었다.

고강은 사학의 학관이 역시 1년에 네 번 소학 또는 사서(四書)를 배송(背誦)시켜 매회에 각 학당에서 소학 5인, 사서 5인, 합계 소학 80인, 사서 80인을 뽑고, 이들을 성균관에 모아 다시 시험하여 소학 8인, 사서 8인을 뽑아 생원복시의 응시자격을 준 것이었다.

공도회는 매년 6월 서울에서는 3품 이하의 문신 3인이 사학생도들을 제술과 강경으로 시험하여 성적우수자 10인을 뽑고, 지방에서는 각 도의 감사가 문신수령 3인을 시관으로 임명하고 도내의 향교생도들을 역시 제술과 강경으로 시험하여 성적우수자 수인(하삼도는 5인, 기타의 도는 3인)을 뽑아 소과복시의 응시 자격을 준 것이었다. 그 뒤 개성ㆍ강화ㆍ수원ㆍ광주(廣州)에도 공도회가 생겨 유수 또는 목사가 제술ㆍ고강의 시험으로 수인을 뽑아 소과복시의 응시 자격을 주었다.

소과 복시는 각종 초시에 합격한 유생들을 식년 2월 또는 3월 서울에 모아 다시 고시하는 것으로서, 생원ㆍ진사 각 100인을 뽑았다. 복시 수험생들은 먼저 ≪소학≫과 ≪가례 家禮≫를 임문고강(臨文考講:강서시험의 하나. 책을 눈 앞에 펴 놓고 읽는 일)하는 조흘강(照訖講)에 합격해야만 녹명소(錄名所)에 녹명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을 학례강(學禮講)이라고도 하였다.

복시의 시험장도 1소를 예조, 2소를 성균관 비천당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 각 시험장마다 종2품 이하 2인이 상시관, 정3품 이하 3인이 참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진사시ㆍ생원시에서 각각 50인을 뽑았다. 이어 양소(兩所) 시관들이 입격시권(入格試卷)을 가지고 입궐하여 빈청(賓廳)에 모여 양소 합격자를 한 사람씩 맞바꾸어 가면서 등급을 매기되, 진사시ㆍ생원시별로 1등 5인, 2등 25인, 3등 70인으로 등급을 나누었다.

이어 합격자의 성명을 성적순으로 써서 국왕에게 보고하고, 또 따로 방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합격자 발표 후 길일(吉日)을 택하여 궁궐 뜰에서 방방의(放榜儀) 또는 창방의(唱榜儀)라는 의식을 거행하여 생원ㆍ진사들에게 합격증인 백패(白牌)와 주과(酒果)를 하사하였다. 이 의식이 끝나면 생원ㆍ진사들도 대과급제자처럼 유가(遊街:과거의 급제자가 座主ㆍ先進ㆍ친척들을 찾아보기 위하여 풍악을 울리며 시가를 행진하던 일)를 하였다.

한편, 조정에서는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인쇄하여 합격자와 관계기관에 나누어 주었다. 생원ㆍ진사는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다가 문과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르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었다.
생원ㆍ진사의 자격만으로 관직을 얻기는 어려웠으며, 얻는다 하더라도 하급직인 능참봉ㆍ교수ㆍ훈도 등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생원ㆍ진사만 되어도 면역의 특권이 주어져서 사회적으로는 대우를 받았다.

[문과]

문과는 대과 또는 동당시(東堂試)라고도 하였다.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생원ㆍ진사가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조선시대 일반 유생인 유학(幼學)에게도 문과의 수험 자격이 주어졌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조선 시대는 학교와 과거의 독자성을 인정하여 양자를 이원적으로 병립시켰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명ㆍ청 시대에 학교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를 과거의 준비기관처럼 만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한편, 조선시대의 문과는 식년문과와 기타의 문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1) 식년문과(式年文科)

식년문과에는 초시ㆍ복시ㆍ전시의 3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이 중 초시ㆍ복시는 초장ㆍ중장ㆍ종장으로 나누어 고시하였다. 이를 동당삼장(東堂三場)이라 하는데, 1일의 간격을 두고 시취하는 것이 관례였다.

초시는 관시(館試)ㆍ한성시ㆍ향시가 있는데, 상식년 9월 초의 길일을 택하여 전국에서 일제히 실시하였다. 고시 과목은 초장에서 사서의ㆍ오경의ㆍ논(論) 중의 2편(뒤에 四書疑ㆍ義 1편, 논 1편), 중장에서 부ㆍ송ㆍ명ㆍ잠ㆍ기 중의 1편(뒤에 부 1편)과 표(表)ㆍ전(箋) 중의 1편, 종장에서 책(策) 1편을 각각 고시하였다.

관시는 성균관의 거재유생(居齋儒生)으로서 원점(圓點:오늘날 학점과 같은 것으로, 성균관 식당에 비치된 到記에 유생들은 식사시 참석하여 표식을 하게 되어 있는데, 아침ㆍ저녁 두끼를 참석하면 원점 하나로 계산해 주었다. 일종의 출석성적을 의미한다) 300점을 취득한 자들을 대상으로 하였으나, 300점 이상자가 시취 정원인 50인에 미달될 경우 50점 이상자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관시는 성균관원이 녹명을 담당하고 정3품 이하 3인이 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50인을 뽑았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과 달리 시험 장소가 성균관 한 곳이었으므로 시관의 상피인은 하는 수 없이 한성시에 응시하여야만 하였다.

한성시는 서울에서 실시한 것으로서 서울의 일반 유생과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관원이 주로 응시하였으나, 경기도 문과향시가 폐지된 뒤 경기도 유생에게도 응시자격이 주어졌다. 이 시험도 시험장을 2개 소로 나누어 고시하였는데, 1소는 예조, 2소는 성균관 비천당으로 하는 것이 관례였다. 각 시험장마다 한성부의 낭관 및 4관의 7품 이하 관 3인이 녹명을 담당하며, 정3품 이하 3인이 시관, 감찰 1인이 감시관이 되어 각각 20인을 뽑았으나, 경기도 유생을 함께 시험 보이면서부터 각각 30인을 뽑았다.

문과향시는 8도의 유생을 대상으로 각 도에서 소과향시가 끝난 뒤 같은 시관이 같은 시험장에서 고시하였다. 문과향시의 시취정원은 다음의 〔표 3〕과 같다. 문과초시 합격자 240인을 식년 봄에 서울에 모아 다시 고시하여 33인을 뽑는 것을 복시 또는 회시라 하였다. 문과복시의 수험생들도 먼저 ≪경국대전≫과 ≪가례≫를 임문고강하는 조흘강에 합격해야만 녹명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을 전례강(典禮講)이라고도 하였다. 문과복시의 고시과목은 초장이 강경시험으로서 문과 초시의 제술시험과 달랐고, 중장과 종장은 같았다.

따라서, 초장과 중장 및 종장은 시관과 고시 방법을 달리할 뿐 아니라 각각 따로 합격자를 발표하고 있어서, 사실상 별개의 시험이었다. 그 후 이를 구별하여 전자를 강경시(講經試), 후자를 회시라 하였다. 강경시도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1소는 서학(西學) 또는 동학(東學), 2소는 성균관으로 하는 것이 관례이었다.

수험생에게 사서삼경의 각 1대문(大文), 즉 7대문을 배송강경(背訟講經)의 방법으로 고시하였다. 처음에는 시관과 수험생이 마주 앉아 문답하였으나, 시관의 사사로운 정이 작용되는 폐단이 있다 하여 뒤에는 시관과 수험생 사이에 장막을 쳐서 서로 얼굴을 볼 수 없게 하고, 대간(臺諫)이 감시하게 하는 등의 격장법(隔張法)을 채용하였다. 배송강경에서 7대문 모두에 조(粗:강경시험은 通ㆍ略ㆍ粗ㆍ不의 4등급으로 나누어 채점하였다) 이상의 성적을 얻어야만 합격이 되어 중장과 종장의 수험자격이 주어진다.

한편, 사림파(士林派)가 많이 진출한 성종 때에 강경론이 우세해지자 1478년(성종 9)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여 강경만으로 인재를 뽑게 하였으며, 이듬해부터는 명경과를 따로 열지 않고 식년문과에 포함시켜 뽑도록 하였다. 이것은 초시ㆍ복시를 막론하고 사서오경의 강경으로만 고시하는 것으로서, 초시에서는 구략(九略) 이상을 뽑고, 복시에서는 칠통이략(七通二略) 이상을 뽑되, 그 인원이 식년문과 초시와 복시의 정액에 포함되게 하였다.

그러나 전시만은 명경과도 제술을 시험 보여 등급을 결정하였으며, 1479년 이후 명경과라는 별개의 과명(科名)은 없어지게 되었다. 더욱이 조선 후기 명경과를 별도로 설치하지 않게 된 뒤로는 명경생(明經生)도 제술생(製述生)과 함께 문과 초시에 응시해야 하였고, 복시에서는 강경시에 응시하여 칠통이략을 얻어야 하였다. 그리하여 명경과는 없어지고 식년문과 복시의 강경시가 명경시를 겸하게 되었다.

문과 초시의 초장 강경에 합격한 자들을 국초에는 시험장을 1ㆍ2소로 나누어 고시하여 1소에서 17인, 2소에서 16인을 각각 선발하였다. 그러나 후세에 내려와 강경시험이 까다로워져서 그 합격자의 수가 적어지게 되자 시험장을 두 곳으로 나눌 필요가 없어서 한 곳에 모아 고시하고 이를 회시라 하였다. 회시는 종2품 이하 3인이 상시관, 정3품 이하 4인이 참시관, 양사(兩司:사헌부ㆍ사간원)에서 각 1인이 감시관이 되어, 첫날에 중장인 부ㆍ송ㆍ명ㆍ잠ㆍ기 중의 1편(뒤에 부 1편), 표ㆍ전 중의 1편을 고시하고, 하루 지난 뒤 종장인 책 1편을 고시하였다. 그리고 초장ㆍ중장ㆍ종장의 종합 점수에 의하여 33인을 합격시켰다.

이 문과 회시에서는 이미 취득한 강경 점수만으로 합격이 예상되는 자를 동정(東庭)에 보내고 그 나머지를 서정(西庭)에 보내어 고시하였는데, 사서삼경 모두에 통을 취득한 14분(分:분은 점수로서 통이면 2분을 주는데, 사서삼경 즉 칠서가 모두 통이면 14분이 된다) 이상자를 동정에 보내는 것이 관례이었다.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시대에 이르러 알성시ㆍ정시ㆍ춘당대시 등 제술로써 고시하는 이른바 사과(詞科)가 자주 열리자 서울의 유생들은 사과, 그리고 지방의 유생들은 경과(經科:식년문과)에 응시하는 경향이 나타나 지방 유생들의 식년문과 진출이 활발하여졌다. 이에 따라 강경에서 14분 이상을 취득하는 자가 많아져서 1798년(정조 22)의 식년문과와 같이 강경 점수만으로 합격하는 자가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고 제술점수로 합격하는 자는 거의 없게 되었다. 이에 식년문과는 명경과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식년문과를 경과라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시는 회시 합격자 33인과 직부전시인(直赴殿試人)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고시해 등급을 정하는 것이었다. 전시는 신하인 시관이 쥐고 있던 급제결정권을 국왕이 직접 장악하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으로서 왕권강화를 위한 하나의 방책이었다. 전시의 상시관을 독권관, 참시관을 대독관이라 하였는데, 처음에는 2품 이상 3인을 독권관, 3품 이하 5인을 대독관으로 하였다. 그러나 뒤에는 의정(議政) 1인을 명관(命官), 종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정3품 이하 5인을 대독관으로 하였다.

고시 과목은 ≪경국대전≫에 의하여 대책(對策)ㆍ표ㆍ전ㆍ잠ㆍ송ㆍ제(制)ㆍ조(詔) 중의 1편을 고시하도록 하였으나, ≪속대전≫에서는 논ㆍ부ㆍ명을 더 보태어 10과목 중 1편을 고시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많이 출제된 것은 책이었다. 시험 문제는 국왕이 출제하는 일도 있었으나, 대개는 독권관이 출제하여 품정(襄定:여쭈어 의논하여 결정함)하는 것이 관례였다. 시험은 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가 끝난 뒤 수험생들이 답안지를 작성하여 제출하는데, 시권(試卷)은 국왕이 보도록 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해서(楷書:한자 서체의 한 가지)하여야만 하였다.

이와 같은 전시는 회시에서 뽑은 33인의 등급을 매기는 데 불과하였으므로 부정이 없는 한 떨어뜨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성편(成篇:答案을 완성시킴)하지 못하거나 전혀 문리(文理)에 통하지 않는 답안을 쓴 자의 경우 다음 식년의 전시에 다시 응시하게 하였다. 전시 합격자, 즉 식년문과의 최종 합격자는 정액이 33인이었는데, 이는 불교의 33천설(三十三天說)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최종합격자의 등급을 나누는 방법이 국초에는 일정하지 않았으나, 1460년(세조 12)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으로 등급을 나누기로 하였는데, 이후 이것이 정식이 되었다.

[기타의 문과]

식년문과 이 외에 증광문과ㆍ별시문과ㆍ외방별시ㆍ알성문과ㆍ정시문과ㆍ춘당대시문과 등이 있었다.

(1) 증광문과

즉위경(卽位慶)이나 30년 등극경(登極慶)과 같이 큰 경사가 있거나 작은 경사가 여러 번 겹쳤을 때 연다. 소과ㆍ문과ㆍ무과ㆍ잡과가 있었는데, 고시 방법은 식년문과와 같았다. 다만, 관시만은 1662년(현종 3)에 폐지되어 그 액수가 한성시의 1ㆍ2소에 보태어졌다. 시취 액수도 같아서 초시에서 240인, 복시ㆍ전시에서 33인이었다. 다만, 대증광시일 경우 액수를 늘려 초시에서 384인, 복시ㆍ전시에서 40인을 뽑았다.

고시 과목은 초시와 전시는 식년문과와 같았으나, 복시만은 달라서 초장에서 부 1편과 표ㆍ전 중 1편, 종장에서 책 1편을 고시하여 사서삼경의 강경이 없었다. 그러나 1759년(영조 35) 초시 합격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 이상을 뽑는 회강(會講)을 설치하였다. 시관도 초시ㆍ복시ㆍ전시를 막론하고 식년문과와 같았으나, 현종 때 관시를 폐지하고 그 액수를 한성부에 보태 준 뒤로는 한성시의 시관수를 늘려 각 시험장마다 종2품 1인, 정3품 이하 3인을 시관, 감찰 1인을 감시관으로 하였다.

(2) 별시문과

별시문과도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또는 10년에 한 번 당하관을 고시하는 중시(重試)가 있을 때 실시한 것으로 문ㆍ무 두 과만 열었다. 처음에는 일정한 시행 규칙이 없어서 그때마다 품정하여 실시하였으나, 영조 때 초시ㆍ전시 두 단계의 일정한 규칙이 생겼다.

초시는 전국의 유생을 서울에 모아 고시하는 것이 관례로서 처음에는 시험장을 3개 소로 나누었으나, 뒤에는 2개 소로 나누어 고시하여 300인 또는 600인을 뽑았다. 고시 과목은 초장에서는 논 1편, 표ㆍ전 중 1편, 부 1편 중에서 2제(題)를 윤정(輪定)하여 고시하고, 종장에서는 책 1편을 고시하였다. 시관은 식년문과 회시 때와 같았다. 초시가 끝나면 그 합격자에게 사서 중에서 추첨한 1서와 삼경 중에서 스스로 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 이상을 뽑는 회강을 실시하였다.

전시는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이 독권관, 정3품 이하 4인이 대독관이 되어 식년문과 전시와 같이 10과 중의 1과를 고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표ㆍ책이 출제되는 일이 많았고 그 다음이 부였다. 시취 액수가 일정하지 않아 많을 때는 30인을 뽑았으나, 적을 때는 3인에 불과하였다.

(3) 외방별시

1456년(세조 2) 왕이 평양에서 별시를 열어 문과 22인, 무과 1,800인을 뽑은 것이 그 시초이다. 이것이 전례가 되어 국왕이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김)하거나 능침(陵寢:임금이나 왕후의 무덤) 또는 온천에 갈 때 행재소(行在所:국왕이 머무르는 곳)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실시하여 합격자에게 급제를 주거나 문과전시에 직부(直赴)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이 밖에 국방상의 요지인 평안도ㆍ함경도에서 실시하는 서도과(西道科)ㆍ북도과(北道科)를 비롯하여 강화도ㆍ제주도ㆍ수원에서 실시하는 시재(試才)가 있었다. 이 외방별시는 문과와 무과만 열었으며,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다. 서도과는 임진왜란 이후 평안도에 어사를 보내어 시ㆍ부로 고시하여 1등에게 전시에 직부토록 하는 시재를 행하던 것이 1643년(인조 21)에 승격된 것이며, 북도과 역시 1664년(현종 5)에 승격된 것이다. 이것은 10년에 한 번 열렸으며, 시관은 중신을 보내어 상시관으로 하고, 참시관은 감사가 문신 수령 중에서 임명하였다.

고시 과목은 주로 부ㆍ표ㆍ책 중의 1편으로서 고시가 끝난 뒤 중신이 과차(科次: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성적의 차례)하여 시권을 봉한 채 서울로 보내면, 서울에서 그것을 뜯어 등급을 매긴 다음 홍패(紅牌)를 써서 보내어 시험장에서 발표하게 하였다. 선발 인원은 관례상 3인이었으나, 뒤에는 서도과를 청남(淸南)ㆍ청북(淸北), 북도과를 관북(關北)ㆍ관남(關南)으로 나누어 각각 2인 내지 3인을 뽑았다.

다음으로 제주도 시재는 1623년(인조 1), 강화도 시재는 1626년, 수원 시재는 1692년(숙종 18) 각각 창설되었다. 이 지역에는 각각 어사 또는 승지를 보내어 시ㆍ부ㆍ표ㆍ책 중의 1편을 고시하여 그 시권을 봉한 채 서울로 가져오면, 대제학에게 과차하게 하여 성적우수자 2, 3인에게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주고, 차등자(次等者)에게는 분수, 즉 점수를 주었다.

(4) 알성문과

국왕이 문묘(文廟)에서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유생들을 고시하여 성적우수자 수인에게 급제를 준 것으로서, 문ㆍ무 두 과만 열렸다. 이처럼 국왕의 친림(親臨) 아래 거행되었기에 친림과라고도 하였다. 이 시험은 다른 시험과 달리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는 단일시(單一試)이고, 고시 시간이 짧은 촉각시(燭刻試)였다. 또한, 당일 급제자를 발표하는 즉일방방(卽日放榜)이었다. 때문에 알성문과는 시관의 수가 다른 전시보다 훨씬 많아서 독권관 10인, 대독관 20인이었다.

고시 과목도 간단하여 10과 중 1편을 고시하였는데, 채점에 시간이 걸리는 책은 피하고 채점하기 쉬운 표를 많이 출제하였다. 응시 자격은 처음에는 성균관 유생에게만 주었으나, 뒤에는 지방 유생에게도 주었다. 알성시는 다른 시험과 달리 녹명이 없었고, 친림과인 까닭에 상피제가 없어서 시관의 자제도 응시할 수 있었다. 급제자가 결정되면 창방의를 거행하고 신급제자에게 홍패와 말 등을 하사하였다. 알성시는 운이 좌우하는 과거이어서 요행을 바라는 무리들이 많이 모여들어 숙종 때의 경우 1만여 인, 영조 때의 경우 1만7000인 내지 1만8000인이 응시하기도 하였다.

(5) 정시문과

처음에는 매년 춘추에 성균관 유생을 시어소(時御所)의 전정(殿庭)에서 고시하여 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준 것이었으나, 1583년(선조 16) 정식 과거로 승격되었다. 정시도 국가에 경사 또는 중대사가 있을 때 실시된 것으로서 문과와 무과만이 열렸다. 정시문과도 알성문과와 마찬가지로 단일시이고 촉각시였다. 그리고 국왕이 친림할 경우 즉일방방(卽日放榜:지난 날, 과거를 보인 바로 그날에 급제자를 발표하여 홍패나 백패를 내려주던 일)하였다. 시관은 친림일 때는 알성문과와 같았으나, 문신에 명하여 시취할 때는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정3품 이하 4인을 대독관으로 하였다.

고시 과목도 간단하여 10과 중에서 1편을 고시하였는데 주로 표와 부가 출제되었으며, 시험 문제는 친림일 때는 어제(御題)가 많이 나오고, 문관에 명하여 시취할 때는 독권관이 출제하여 품정하였다. 이 시험도 알성시와 같이 상피제가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후세 시관의 협잡이 심하였다. 또한, 운이 많이 좌우하는 시험이어서 응시자 수가 매우 많아지게 되자 초시를 두자는 여론이 일어나, 1743년(영조 19)부터 정시문과는 초시ㆍ전시 두 단계의 시험으로 실시하였다.

초시는 전시 10일 전에 시험장을 세 곳으로 나누어 고시하고, 시관ㆍ감시관은 증광문과 초시와 같이 하며, 고시 과목은 부 1편과 표ㆍ전 중의 1편으로 하였으며, 시취 액수는 그때마다 품정하였다. 전시는 시관 및 감시관을 증광문과 전시와 같이 하되 친림일 때는 알성문과와 같이 하였고, 고시 과목은 10과 중 1편이었으며, 시취 액수는 그때마다 품정하였다. 이어 1759년 초시 합격자에게 스스로 원하는 1경을 배송시켜 조 이상자를 뽑는 회강도 실시하였다.

한편, 1844년(헌종 10) 지방유생의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초시를 서울과 각 도로 나누어 거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정시문과 초시의 향시는 각 도의 감영을 시험 장소로 하여 감사가 시취하게 하였는데, 부ㆍ표를 시험 과목으로 그때 그때 예조에서 품정한 액수만큼 뽑았다.

(6) 춘당대시문과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거나 또는 관무재(觀武才)라 하여 여러 군문의 무사들을 춘당대(창경궁)에서 친림하여 시재(試才)할 때 그 대거(對擧)로서 실시한 것인데, 1572년(선조 5) 처음으로 열렸다. 그런데 관무재의 대거일 경우 1783년(정조 7)부터는 문신의 고시와 유생의 고시를 번갈아 설행(設行)하는 것이 관례였다.

문과와 무과만 열렸으며 알성문과와 같이 친림과로서 단일시이고 촉각시였으며 즉일방방하였다. 시관과 고시과목도 알성문과와 같았으며, 시취 액수는 그때마다 품정하였는데, 가장 많은 때는 15인이고 가장 적을 때는 3인이었다. 이 시험도 친림과로서 상피제가 적용되지 않았으며, 또한 운이 급락을 좌우하였기에 많은 응시자가 몰렸다.

기타의 각종 고시에는 절제(節製)ㆍ현량과(賢良科)ㆍ황감과(黃柑科)ㆍ전강(殿講)ㆍ도기과(到記科)ㆍ통독(通讀) 등이 있었다. 절제는 1월 7일(人日製), 3월 3일(三日製), 7월 7일(七夕製), 9월 9일(九日製 또는 菊製)의 절일(節日)에 성균관 유생을 고시하여 1등에게 문과전시 또는 회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주고, 차등인(次等人)에게는 급분(給分:본수 즉 점수를 주는 것)한 것으로서 절일제(節日製) 또는 반제(泮製)라고도 하였다.

4개의 절제 중 국초부터 시행된 삼일제와 구일제가 뒤에 생긴 인일제 및 칠석제보다 격이 높아서, 의정부와 6조의 당상이 참석하여 실시하고 1등에게 문과전시에 직부할 특전을 주었으나, 인일제와 칠석제는 관ㆍ각의 당상만이 참석하여 실시하고 1등에게는 문과회시에 직부하는 특전밖에 주지 않았다. 격이 높은 삼일제ㆍ구일제를 과제(課題), 그리고 인일제ㆍ칠석제를 상순윤차(上旬輪次)라 하였다. 뒤에는 국왕의 특명이 있으면 지방 유생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부여하였다.

고시 과목은 10과 중의 1편이었는데, 주로 시ㆍ부ㆍ표 중에서 출제되었다. 그러나 영조 및 정조시대 서울 유생에게는 표, 지방 유생에게는 부를 내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1등도 1744년(영조 20)부터는 서울 유생에게 1인, 지방 유생에게 1인을 각각 뽑았다. 절제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급락이 결정되었기에 많은 응시자들이 모였다.

황감과는 매년 12월 제주목사가 특산물로 진상한 감귤 등을 성균관ㆍ사학 유생들에게 나누어 줄 때 어제(御題)를 내려 고시한 것으로서 1641년(인조 19) 처음 실시되었다. 이것도 뒤에는 국왕의 특명이 있으면 지방 유생들에게도 응시 자격을 주었다. 고시 과목은 절일제와 같았으며, 1등 1인을 급제시켰다. 그러나 1748년(영조 24)부터는 서울 유생 1인, 지방 유생 1인을 각각 급제시켰다.

전강은 1470년(성종 1) 선정전(宣政殿)에서 성균관 유생들을 고강한 데서 비롯되지만, 이것이 제도화된 것은 영조 때 만들어진 ≪속대전≫에 의해서였다. 전강의 대상은 성균관ㆍ사학 유생으로서 매년 2ㆍ4ㆍ6ㆍ8ㆍ10ㆍ12월의 15일 아침까지 도기(到記:일종의 출석부)에 올라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이 성명ㆍ주소ㆍ희망하는 경서를 적어 내면 국왕이 그 중에서 생원ㆍ진사 4, 5인, 기재생(寄齋生) 2, 3인, 사학 각 1인을 점찍어 고강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런데 희망 경서가 뒤에는 지정경서로 바뀌었다.

시관은 의정 1인, 종2품 이상 2인, 정3품 이하 3인이었는데, 의정 1인이 명관(命官)이 되어 고시할 때와 국왕의 친림 아래 고시할 때가 있었다. 명관고강(命官考講)일 경우 순통(純通)은 문과회시에 직부하게 하고, 통은 2분, 약은 1분의 점수를 주었다. 그러나 친림고강일 경우 순통은 문과전시, 통은 문과회시에 직부하게 하고, 약은 1분의 점수를 주었다.

도기과는 정조 때 만든 것으로 일명 원점과(圓點科)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성균관ㆍ4학 유생에 대한 특별시험으로 도기에 의거하여 원점 30점 이상을 딴 자들을 시취하였다. 이 시험은 춘도기(春到記:1월 1일부터 7월 말일까지의 도기)와 추도기(秋到記:8월 1일에서 연말까지의 도기)에 의하여 춘추로 두 번 실시하였다.

시험은 강경과 제술로 나누어 실시하였는데, 유생들은 희망에 따라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응시하였다. 강경ㆍ제술의 각 1등에게는 문과전시에 직부할 수 있는 특전을 부여하였다. 통독은 해마다 성균관 대사성이 서울과 지방의 유생들을 제술과 강경으로 11회 고시하고, 그 분수를 통산하여 성적우수자 10인을 뽑아 식년문과 복시에 직부할 자격을 준 것이다.

위의 각종 시험의 경우 합격자에게는 문과전시나 회시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거나 문과 초시에 분수를 가산해 주는 급분의 특전을 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직부생(直赴生)의 경우 처음에는 식년시에만 응시하게 하였으나, 뒤에는 증광별시ㆍ별시ㆍ정시에도 응시할 수 있게 하였다. 직부전시생은 사실상 급제와 다름없는데도 바로 급제시키지 않은 것은 한두 사람의 문과급제만으로 반드시 문과와 무과에서 갖추어야 하는 창방의를 거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직부전시생은 합격자 발표 때도 방말(榜末)에 붙여서 별도로 발표하는 것이 관례였다. 직부회시생은 각종 문과의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복시가 없는 별시ㆍ정시의 경우 초시에 응시해야 하였지만, 시험만 칠 뿐 합격은 이미 기정사실로 되어 있었다. 급분유생(給分儒生)은 식년문과 초시에 분수가 가산되어 합격률이 높았기 때문에, 일반 수험생들의 불평이 많아져서 역시 정원 외로 계산하였다. 따라서, 급분도 직부회시와 다름없는 특전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급분유생도 처음에는 식년문과 초시에만 응시하도록 하였으나, 뒤에는 증광문과ㆍ별시문과ㆍ정시문과 초시에도 응시하게 하였다.

[문신의 각종 고시]

문신의 승진을 위한 시험으로 중시ㆍ문신정시(文臣庭試)ㆍ문신중월부시법(文臣仲月賦試法)ㆍ문신전강(文臣殿講) 등이 있었다. 중시는 10년에 한 번씩 시행되는 정기시험으로 당하관 이하의 문신을 대상으로 시험하였는데, 문과와 함께 무과도 열렸다. 그 대거(對擧)로서 문ㆍ무과 별시도 실시되어 처음에는 정년(丁年)에 열었으나 뒤에는 병년(丙年)에 여는 것이 상례였다.

고시 과목은 그때마다 품정하였으나 대개 표ㆍ책 중의 하나를 시험보였다. 국왕이 친림하여 의정 1인, 정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정3품 당상관 4인을 대독관으로 임명하여 시험을 치렀다. 시취 액수도 그때 그때 품정하였으나, 가장 많은 경우 19인, 가장 적은 경우 3인이었다.

합격자는 을과 1ㆍ2ㆍ3등으로 나누었는데, 장원 1인은 4등급, 2ㆍ3등은 3등급, 을과 2등은 2등급, 을과 3등은 1등급씩을 특진시켜 주되 정3품 당상관까지를 승진 상한으로 하였으며, 참하관(參下官)은 모두 참상관(參上官)인 6품으로 승진시켰다.

문신정시는 1463년(세조 9) 정3품 당하관 이하를 책으로 시험한 데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특명에 의하여 수시로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1663년(현종 10)부터는 춘당대에서의 관무재 때 문신정시와 유생정시(儒生庭試:춘당대시를 이름)를 번갈아 여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고시 과목은 증광문과 전시와 같았으나, 율시(律詩)를 하나 더 보태어 품정하였으며, 고시관은 의정 1인, 정2품 이상 2인을 독권관, 종2품 4인을 대독관으로 임명하였다. 시취 액수는 보통 5, 6인 정도였고, 많으면 11인이나 되었는데, 장원의 경우 정3품 당하관으로서 자궁(資窮:근무연한이 찬 것)인 자는 당상관, 참상관은 당하관, 참하관은 참상관으로 승진시켜 주었고, 나머지는 모두 상을 주었다.

문신중월부시는 4중삭(四仲朔:2ㆍ5ㆍ8ㆍ11월)에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시ㆍ부ㆍ표 등을 시험 보여 1등으로 합격한 자에게 진급의 특전을 주는 것이었다. 이 시험은 국초에는 성행하였으나, 중엽 이후 거의 유명무실하여졌다. 문신전강은 3품 이하의 문신들에게 각각 1경을 지정하여 전공하게 한 뒤 이를 국왕 앞에서 배강하는 시험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5경 등을 번갈아 시험보게 함으로써 문신들의 경학공부를 권장하였는데, 영조 및 정조시대에 가장 성행하였다. 문신전강 역시 1등합격자에게 진급의 특전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상을 주었다.

(계속)

<조좌호>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문학] 한문소설 (민족)
아래글 [조선] 족보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930 사전1 [회화] 북종화 (민족) 이창호 2002-10-14 3581
2929 사전1 [역사] 중세사회 (두산) 이창호 2002-04-24 3467
2928 사전1 [역사] 한국사의 시대 구분 (민족) 이창호 2002-04-28 3462
2927 사전1 [현대] 한국의 현대 사회 (민족) 이창호 2002-04-28 3458
2926 사전1 [문학] 한문소설 (민족) 이창호 2002-10-24 3453
2925 사전1 [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1 (민족) 이창호 2002-04-24 3431
2924 사전1 [조선] 족보 (민족) 이창호 2002-08-12 3398
2923 사전1 [조선] 조선 개화기의 역사적 성격 (민족) 이창호 2002-06-16 3396
2922 사전1 [조선] 조선 후기의 토지제도 (민족) 이창호 2002-07-01 3376
2921 사전1 [근대] 근대사회 (한메) 이창호 2002-10-23 3374
12345678910,,,30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