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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8 (일)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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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459      
[현대] 한국의 현대 사회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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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연합국에 항복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는 동시에 우리 민족도 35년간의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다. 이러한 조국 광복의 이면에는 온 민족의 꾸준한 항일 독립 운동이 그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에서 우리 민족은 항일 운동을 계속했고, 해외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와 무장 독립군이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항쟁이 광복과 독립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광복이 우리의 자력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여기에는 일제에 대한 연합군의 승리라는 타력이 게재되어 있었다. 광복의 이러한 성격이 광복 이후의 현대사를 규정짓는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다. 광복 직후 미ㆍ소 양군의 분할 점령과 군정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고, 좌우익의 대립 속에 결국 남북한에 두 개의 독립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국토와 민족이 분단되고 말았던 것이다.

광복 직후에 가장 먼저 정치 활동을 시작한 것은 여운형(呂運亨) 등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건국 준비 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해 치안을 유지하는 등 준정부(準政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중국에 있는 임시 정부에 대한 지지를 명분으로 건국 준비 위원회와 대립하면서 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건국 준비 위원회의 후신인 조선 인민 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모두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만이 38선 이남에서의 유일한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과거 총독부의 체제를 그대로 유지시킴으로써, 한국인 가운데 친일분자들이 미군정에 참여해 그 세력을 온존시키게 되었다.

기회를 보고 있던 민족주의 계열에서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약칭 한민당)을 결성하고 미군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점차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미국에서 활약하던 이승만(李承晩)과 중국으로부터 김구 등 임시 정부의 요인들이 잇따라 귀국하고, 박헌영(朴憲永)이 조선공산당을 재건하자 좌우익의 대립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한 가운데 조만식(曺晩植)을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 계열과 네 갈래의 공산주의 세력, 즉 박헌영의 노선에 따르는 국내파와 소련군을 따라 입국한 김일성 (金日成) 등 갑산파(甲山派) 및 소련파, 그리고 중국 연안에서 조선 독립 동맹(朝鮮獨立同盟)을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귀국한 연안파(延安派)가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 문제를 둘러싸고 우익은 반탁을, 좌익은 찬탁을 각각 주장하면서 양측은 격렬하게 충돌하였다. 북한에서는 반탁을 주장하던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이 소련에 의해 거세되었고, 남한에서는 찬탁을 주장한 좌익 진영이 대중의 지지를 결정적으로 상실하게 되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한국에서 좌우익의 대립을 더욱 첨예화시켰을 뿐 아니라 남한에서는 우익이, 북한에서는 좌익이 각각 우세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46년에는 남한에서 우익측의 김규식(金奎植)ㆍ안재홍(安在鴻)과 좌익측의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좌우 합작 운동이 추진되었으나 곧 결렬되고 말았다. 좌우 합작 운동의 실패는 1947년 무렵부터 시작된 동서 냉전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으로, 이 때부터 미국은 한국에서의 신탁통치를 사실상 포기하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하였다. 유엔에서는 한국에서 인구 비례에 의한 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정했고, 이를 소련이 거부함으로써 결국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실시되었다.

남한 단독 선거가 남북의 영구적인 분단을 초래할 것을 우려한 김구ㆍ김규식 등은 남북 협상을 시도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남북협상파가 대거 불참한 가운데 총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이 압승을 거두었다. 제헌 국회가 소집되고 헌법이 제정되었으며, 이 헌법에 따라 국회에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이 초대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소련군의 후견 아래 민족주의 계열과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고 소련파 및 연안파 공산주의자들과 연합해 정권을 장악하였다. 1948년 9월에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國)을 수립하였다.

남북의 분단과 대립은 한국 전쟁을 초래하였다. 북한은 광복 직후부터 소련의 원조를 받아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정부수립 이후 중국이 공산화되고 미국의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는 등 남침에 유리한 상황이 전개되자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감행하였다.

서울이 3일 만에 함락되는 등 초기에는 군사력이 우세한 북한이 제주도와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국토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전세는 역전되어 국군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38선부근에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전쟁이 일어난 지 3년 만인 1953년에 당시의 전선을 휴전선으로 하는 휴전이 성립되었다.

이 전쟁으로 남북한 모두 엄청난 인명피해와 건물ㆍ도로ㆍ산업 시설 등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을 뿐 아니라, 민족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어 남북한의 분단이 고정되었다. 전쟁 후에는 남북한이 각기 경제 재건을 통한 체제 경쟁에 힘을 기울이는 과정에서 남북한 모두 독재 체제가 성립되었다.

정부 수립과 함께 출범한 이승만 정권은 처음부터 지지 기반이 확고하지 못했다. 과거 미군정에 의해 온존된 친일 세력을 그대로 이어받아 권력 기반을 삼았을 뿐 아니라, 경제 정책, 그 가운데서도 특히 토지 개혁을 제대로 추진하지 못해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전쟁 직전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이승만 지지 세력이 참패를 당하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당선된 것은 이러한 상황에 기인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 반공을 구실로 자신의 독재 체제를 강화하였다. 1952년에 피난 수도 부산에서 자유당(自由黨)을 조직하고 정치 파동을 일으켜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켰으며, 그 개헌안에 의한 선거에서 제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 ’는 내용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1956년의 제3대 대통령 선거와 1960년의 제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승만과 자유당 정부는 정권을 연장하기 위해 정ㆍ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극심한 부정 선거를 자행했으며, 야당과 언론을 탄압하는 등 독재화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띠어갔다. 이러한 독재 정치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기대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이것이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제4대 정ㆍ부통령 선거에서의 부정을 계기로 폭발해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4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북한에서도 한국 전쟁 이후 김일성의 1인독재체제가 강화되었다. 1951년부터 남로당(南勞黨)계열에 대한 숙청을 시작해 1955년에 박헌영을 처형함으로써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을 완전히 제거하였다. 1956년에는 소련에서 일어난 스탈린 격하 운동의 여파로 연안파와 소련파가 중심이 되어 김일성의 1인 독재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을 계기로 이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이 때부터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대한 개인 숭배가 고조되고 주체 사상이 대두하였다.

4월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고 허정(許政)을 수반으로 하는 과도 정부에서 내각 책임제 개헌이 이루어졌다. 선거를 통해 민주당 정권(民主黨政權)이 수립되어 제2공화국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 대통령에는 윤보선(尹潽善)이, 총리에는 장면(張勉)이 각각 선출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내부에서 구파(舊派)와 신파 (新派)가 대립하여 정치적 혼란을 초래했고, 4월혁명 이념의 구현이나 자유당 정권 하에서의 부정ㆍ비리에 대한 단호한 조처를 취하지 못하였다. 불만을 품은 학생과 시민들이 다시 거리로 뛰쳐나와 연일 가두시위가 계속되는 등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러한 혼란은 국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표출된 것이었으나 당시 이러한 국민적 욕구를 수용할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존재하지 않아 수습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혼란을 구실로 1961년 5월 16일에 군사혁명(정변)이 일어남으로써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새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朴正熙)ㆍ김종필(金鍾泌) 등 혁명 주체 세력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대통령 중심제 개헌안을 국민 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그리고 1963년 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을 창당하고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야당인 민정당(民正黨)의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뒤이어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승리를 거두어 공화당 정부가 수립되고 제3공화국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공화당 정부는 출범 직후 한일 협정(韓日協定)과 월남 파병 문제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야당을 비롯한 학생ㆍ지식인ㆍ언론ㆍ종교인 등의 범국민적인 반대에 봉착하였다. 계엄령을 선포해 반대세력을 탄압함으로써 이 때부터 이미 독재화의 경향을 띠기 시작하여 학생ㆍ지식인 등 국민들의 비판과 저항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당 정부의 경제 성장 정책은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정권의 정통성 확립에 일조를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67년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신민당(新民黨)의 윤보선 후보에게 또다시 승리해 제6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공화당이 압승을 거두었다.

재집권에 성공한 박정희 대통령은 1969년 3선개헌을 강행해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3선 개헌에 따라 재출마가 가능해진 박정희와 신민당의 김대중(金大中) 후보가 1971년의 대통령선거에서 치열한 경합을 벌인 끝에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3선 개헌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었기 때문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에 박정희 대통령은 불안한 정국을 수습하고 장기 집권을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명분으로 내세워 10월 유신을 단행하였다.

19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은 전국에 비상 계엄을 선포한 가운데 유신헌법안을 국민 투표에 부쳐 통과시켰다. 새로운 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를 구성한 다음 여기에서 제8대 대통령에 선출되었으니, 이로써 제4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1978년에 또다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9대 대통령에 선출됨으로써 박정희 대통령의 영구 집권은 점차 실현되어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발전에 역행하는 10월 유신에 반대하는 민주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특히 1979년에는 부산과 마산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정치ㆍ사회적 불만이 고조되고 있을 때 10ㆍ26사태가 일어나 박정희 대통령이 저격당함으로써, 유신체제는 붕괴되고 18년 동안 계속된 박정희 정권은 종말을 고하였다.

공화당 정부는 반민주적 성격으로 인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았지만,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군사 혁명 직후부터 추진된 네 차례의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통해 한국경제는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정책은 성장에만 힘을 기울인 나머지 분배의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빈부의 격차를 심화시키고 사회 계층간의 갈등을 초래하였다. 또한, 공업 위주의 개발 정책은 필연적으로 농촌의 낙후를 초래하였다. 이 밖에도 정부 주도의 경제 정책으로 민간 부문의 자립성이 크게 상실되고 국가 경제의 무역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등 경제 구조가 취약해지는 부작용을 빚어내기도 하였다.

공화당 정부는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북한에 대해 적극적인 통일 정책을 추진하였다. 1970년 8ㆍ15선언으로 통일 기반의 조성을 위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것을 제의함으로써 남북 대화가 시작되었다. 1972년에는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되고 7ㆍ4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그 뒤 남북 대화가 결렬되었지만, 한국 정부는 1974년 북한에 대해 남북한 상호 불가침 협정을 제안하였고, 1979년에는 어떠한 전제조건이 없이 남북한 당국자 회의를 통해 통일 문제를 직접 토의할 것을 주장하는 등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10월유신이 단행된 직후인 1972년 12월에 주체 사상을 강조한 사회주의헌법을 제정해 김일성이 주석(主席)에 오르고 1인 독재와 개인 숭배를 더욱 강화하였다. 그리고 1980년에는 권력 구조의 개편이 이루어져 김일성의 장남인 김정일(金正日)이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하면서 부자 세습 체제가 성립되었다.

10ㆍ26 사태로 유신 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최규하(崔圭夏)가 제10대 대통령에 취임, 위기 관리 내각의 구실을 했으나, 사회 각계에서 유신 잔재 세력의 제거와 조속한 민주화 조처를 요구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폭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80년 5월에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정부는 비상 계엄을 확대하고 군대를 투입, 진압한 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家保衛非常對策委員會, 약칭 國保委)를 설치하였다. 국보위의 위원장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전두환(全斗煥)이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대통령 단임제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이 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되었다. 1981년 2월에는 대통령선거인단 선거에 이어 선거인단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여기에서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약칭 민정당)의 전두환 후보가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새로이 출범한 제5공화국 정부는 정의로운 민주 복지 국가의 건설이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과감한 체제 개혁을 표방하였다. 경제 정책에 있어서는 경제 성장과 물가 안정, 그리고 수출 증진에 주력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또한,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추진해 한국의 국제적 지위를 신장시켰으니, 그 단적인 표현이 1986년의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개최국으로 결정된 사실이었다. 그러나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가 자행되고 정경 유착이 심화되는 가운데 대형 금융 부정 사건이 일어났으며, 정치 체제문제와 관련해 학원과 재야를 중심으로 민주화 요구가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특히, 1987년 6월에는 군정 종식과 민주화, 그리고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민정당의 노태우(盧泰愚) 대통령 후보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6ㆍ29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따라 개헌이 이루어지고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야당인 통일민주당(統一民主黨, 약칭 민주당)의 김영삼(金泳三)후보와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 약칭 평민당)의 김대중후보가 후보 단일화에 실패함으로써, 민정당의 노태우 후보가 당선되어 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대통령선거에 이은 국회의원선거에서 여당인 민정당이 과반수의석 확보에 실패함으로써 국회는 평민ㆍ민주ㆍ신민주공화당(新民主共和黨, 약칭 공화당)과 함께 4당 체제로 운영되었다. 이는 여당의 일당 독재를 막고 의회 민주 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으나, 각 정당의 지지 기반이 지역적으로 편중됨으로써 지역 감정의 심화라는 새로운 정치ㆍ사회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제6공화국 정부는 새로운 개혁 정치의 의지를 표명하였다. 우선 군정에 대한 국민의 불만을 불식하기 위해 민간 주도형의 민주 정치를 실현하고, 지역 감정의 해소를 통한 국민 화합의 풍토를 조성하는 데 힘쓰며, 경제 발전과 사회 안정을 추구할 것임을 표명하였다. 1988년의 올림픽대회를 성공적으로 치루어 국력 신장의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 중국 및 소련 등 동유럽 공산권 국가와의 외교에 주력해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1990년에는 집권당인 민정당과 통일민주당(김영삼)ㆍ공화당(김종필)이 거대 여당인 민주자유당(民主自由黨, 약칭 민자당)으로 합당하였다. 이에 자극받은 야당은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약칭 평민당)이 신민당으로 개편되고, 1991년에 민주당 잔류파와 합당해 민주당을 결성함으로써 정계는 민자당과 민주당으로 나뉘게 되었다.

그러나 1992년에는 정주영(鄭周永)이 통일국민당을 만들어 3당체제로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고, 결국 민자당의 김영삼이 당선되었다. 1993년의 김영삼 정부는 과거 32년간의 군사 정권에서 벗어난 문민 정부로 국민들의 커다란 기대 속에 출범하였다. 김영삼 정부는 '변화와 개혁', '세계화ㆍ국제화', '역사 바로세우기' 운동 등의 기치를 내걸고 '청와대 점심 칼국수'라는 서민 대통령의 풍모를 내비쳐 국민들의 갈채 속에 신한국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개혁 정치에 착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의 5년간의 치적은 국민들에게 실망만을 안긴 채 실정으로 끝났다. 한국의 경제는 종래의 고도 성장에서 후퇴하고 역사상 유례없는 불황에 처했고 종래의 군사 독재에 대신해 '신권위주의'가 지배하였다.

민자당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1996년 신한국당으로 개명해 분위기를 일신하고,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임하였다. 그래서 1995년 김종필이 창당한 자유민주연합(약칭 자민련)과 김대중이 결성한 새정치국민회의(약칭 국민회의)의 3당 체제로 개편되어 1997년 15대 대통령선거의 정치 구도가 형성되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은 대통령 후보를 경선으로 선출, 이회창(李會昌)이 후보로 뽑혔다. 국민회의는 김대중이 추대되고 신한국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李仁濟)가 국민신당을 만들어 입후보하였다. 이 사이에 정당간에 이합집산이 진행되어 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으로 통합되어 조순(趙淳)은 이회창과 합류했고, 자민련의 김종필은 내각제개헌을 전제로 김대중과 연대하였다.

제15대 대통령선거는 이회창ㆍ 김대중ㆍ 이인제의 3파전으로 이루어져 김대중의 승리로 끝났다. 1998년에 새로이 출범한 김대중 정권은 헌정 50년사상 처음으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룩된 정권 교체였다. 이것은 한국 민주주의의 승리이며 그 만큼 한국 사회가 성숙했음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 정권의 전도는 결코 낙관만은 할 수 없다. 1997년 12월의 금융위기에 따른 IMF(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를 벗어나기 위한 과감한 경제 정책의 추진, 또 여소야대의 국회, 김종필과의 약속에 따른 내각제 개헌 등 불안한 정치 구도 등을 문제점으로 안고 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은 평양을 직접 방문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6ㆍ15선언을 합의하는 성과를 이루었다. 또 그 동안의 한국의 인권과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변태섭>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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