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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7-01 (월)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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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377      
[조선] 조선 후기의 토지제도 (민족)
토지제도(조선후기) 조선 후기의 토지 제도

세부항목

토지제도
토지제도(상대 : 삼국 시대)
토지제도(통일신라시대)
토지제도(고려시대)
토지제도(조선전기)
토지제도(조선후기)
토지제도(개항이후)
토지제도(광복이후)
토지제도(참고문헌)
     
16세기에 접어든 이후부터 토지소유의 편재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상대적으로 자영소농민의 몰락이 그만큼 현저히 진전되었다는 사실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15세기 후반에 이미 “기현(畿縣)의 백성으로서 밭을 갈아 곡식을 먹을 수 있는 자는 모두 세가의 노비·반당(伴貴)이며 그 나머지는 땔나무를 팔아서 겨우 살아간다.”고 전해질 만큼 소농민들의 토지소유는 침식을 당하고 있었다.

서울의 재상가(宰相家)들이 농촌에서 전택(田宅)이나 물력(物力)이 있는 자들과 서로 짜고 그들을 반당으로 삼아 토지의 겸병에 광분하였기 때문이다. 16세기에 들어서는 형세가 더욱 더 급진전하였다. 1518년(중종 13)에는 토지소유의 편재를 타개하는 방법으로 정전법(井田法)·균전법(均田法)을 실시하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하였다. 주장의 요지는 ≪중종실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어진 정사는 반드시 경계(經界)를 바로 잡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 읍 안에 수백 결씩 땅을 가지고 있는 자가 있으니 이대로 5, 6년만 지나면 한 읍의 땅은 모두 5, 6명의 수중으로 들어갈 것이다. 이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는가. 지금 이 땅들을 고르게 분배하면 이야말로 선왕이 남긴 정전법의 뜻이 될 것이다.”

“부호한 백성은 한 집에 쌓인 곡식이 1만 석도 되고 5, 6천 석도 되며, 파종하는 씨앗만도 200여 석이나 된다. 천지간의 온갖 재화와 물건은 반드시 가 있어야 할 곳이 있어야 하는 법인데 어찌 한 사람에게만 모여 있을 수 있겠는가. 한 읍에서 2, 3명이 갈아먹고 나면 나머지는 경작할 땅이 없다. ……지금 이러한 균전법을 실시하면 자기의 소유를 갈라서 남에게 주는 것이 되니 원망이 비록 없지 않겠지만 백성들은 혜택을 입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의는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수용될 수 없었다. 결국 도시귀족과 재지향호들에 의한 대토지겸병이 강력히 진행되는 과정에서 영세소농민은 경작지를 상실하여 몰락의 길을 걷는 심각한 사태가 이에 뒤따랐다. 이리하여 부강자들의 농장이 확대되었다.

농장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경작지가 수백 결에다가 삼수백가(三數百家)를 넘는 전호를 거느렸다. 이들 전호의 경우 대개 양정(良丁)을 모입하여 노복이라고 가칭한 축들인데 본래 신분상으로는 양인이었다. 이들은 농장주(主戶)에 대하여 협호라는 형식으로 부속되어 있는 예속농민이었다.

농장 내부의 생산관계를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으나 도시귀족들의 농장에서도 양인전호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양인전호와의 합작에 의한 병작경영이 앞으로 주류를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대체로 확실해 보인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지주와 전호의 소작관계에 입각한 지주적 토지지배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제법 안정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징적으로 남아 있던 직전법도 1557년(명종 12)에는 없어졌다. 16세기 후반기에 확립되는 사림파 정치권력은 그들의 경제적 토대인 지주적 토지지배의 성장과 결코 무관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전제로 하여 탄생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농장의 확대로 인하여 무전실토(無田失土)의 농민이 많이 늘어 소작제가 팽창한 것은 사실인데, 전국의 총 경작면적 중에서 소작제에 의하여 경영되는 토지와 농민이 자작하는 토지가 어느 쪽이 더 비중이 높았는지 정확한 것은 알 수가 없다.

소작농민은 지주에 대하여 지대를 부담하는 중세적 농민이다. 고려 전시과 체제하의 농민은 대체로 고대적 농민인 것같이 이해되거니와 조선시대의 농민이 중세적 농민으로 성장한 것은 하나의 큰 사회적 전진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려 중기 이후 농장을 중심으로 성취된 사적 토지지배관계의 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직전이 폐지된 이후 왕족이나 관료에 대하여 토지를 지급하는 제도는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왕족이나 관료의 대부분은 이미 광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으므로 국가로부터 그들에 대한 토지의 지급이 끊어져도 그렇게 큰 타격을 입지 아니하였다.

농장은 귀족 계층의 경제 기반으로서 확고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농장은 날이 갈수록 발전하여 토지의 소유 및 경영에 있어 중심적인 문제가 되었다. 이러한 형세는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큰 변화없이 그대로 계속되었다. 1592년(선조 25)의 일본인의 침입과 1636년(인조 14)의 만주족의 침입은 농장의 확대를 격화시킨 매우 큰 요인이 되었다. 7년간 계속된 일본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국토는 참혹할 정도로 황폐화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다.

전전(戰前)의 전국의 경작지는 150여만 결이었는데 전쟁 직후에는 30만 결로 격감하였으며, 그 복구는 부진하여 전전의 상태를 완전히 회복할 수가 없었다. 전후 형편이 가장 좋았던 19세기 초엽에도 경작지는 전전의 상태를 회복하지 못한 145만여 결에 불과하였다. 이것은 경작지의 격감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국가재정은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전후의 시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방의 강화였다. 국방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군사비가 필요하였는데 이것을 조달할 재원이 막연하였다. 전전에는 군량을 비롯한 일체의 군사비는 내외의 군자창고(軍資倉庫)에 의하여 일원적으로 경영되었으나, 전후에는 국가의 세입이 격감하였으므로 군사비의 조달을 군자창고에 기대할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방법이 강구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결과 나타난 것이 둔전의 경영이었다. 둔전은 국가기관이 그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직접 경영하는 토지이다. 이러한 종류의 토지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전에도 있었으나, 그것이 급격히 확대되어 커다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은 전후의 일이다.

전후 국가의 가장 중요한 군사기관인 훈련도감이 처음으로 둔전을 설치하여 그 수입으로 군량 및 기타의 군사비를 조달하였고, 그 뒤에 국가의 각 기관이 또한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둔전을 설치하였다. 군사기관 이외에 최고의 행정기관인 의정부와 기타의 일반 행정기관도 둔전을 설치하였다.

둔전은 얼마 안가서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그 양이 매우 방대하게 되었다. 보통 전자를 영문둔전(營門屯田)이라 하고, 후자를 아문둔전(衙門屯田)이라고 하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양자를 합칭하여 아문둔전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둔전은 처음에는 전재(戰災)로 인한 유망민을 모집하여 그들에게 농구·종자·식량 등을 제공하고 전화(戰禍)로 인하여 황폐화된 토지를 개간한 것이었으나, 뒤에는 일반 민전을 이른바 자원에 의한 모입민전(募入民田)의 형식에 의하여 둔전으로 편입하는 일도 있었고, 또 압력을 가하여 헐값으로 일반 민전을 매입하는 경우도 있었다.

둔전의 경영은 황무지를 개간하였을 경우나 혹은 일반 민전을 매입하였을 경우에는 둔전의 소유주인 국가기관과 그것을 경작하는 농민이 수확의 절반씩을 분배하는 병작반수 방식을 취한 듯하다. 부분적으로 기관의 둔전은 소속 군인들에 의하여 경작되는 경우도 있었고, 또 행정기관의 둔전은 소속 노비에 의하여 경작되는 일도 있었다.

모입민전의 형식을 취하여 민전이 둔전으로 편입되었을 경우 처음에는 경작자들이 아마 종전에 그들이 민전의 소유주로서 국가에 바친 정도나 혹은 그 이하의 조를 부담한 모양이다. 이러할 경우 경작자의 부담은 병작반수에 비하여 훨씬 가벼운 것이었다.

원래 둔전에 편입된 민전은 그 조가 국가의 기관에 수납되었을 뿐이며, 본질적으로는 그 토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의 소유지였다. 그런데 뒤에 와서는 국가기관의 소유지같이 되어 본래의 소유자는 소작인과 같은 위치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리하여 둔전의 수확의 절반이 국가기관에 수취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것은 국가기관에 의한 일종의 강탈을 의미하는 것이다. 영문둔전과 아문둔전은 국가에 대한 조세·공부 등이 면제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국가의 군사기관과 행정기관이 둔전을 설정하여 대토지를 집적하고 있는 동안에 왕실 및 왕족들도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확장에 진력하였다. 본래 왕실에는 왕실 소유의 광대한 농장이 있었고 왕족들도 대부분이 큰 농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이 소유하는 광대한 토지도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들의 수입은 당연히 줄어들었다. 그들은 이 경제적 손실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후의 혼란기에 편승하여 광대한 면적의 궁방전(宮房田)을 새로 설정하였다.

전란으로 인하여 전국의 농토가 많이 황폐화하였음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왕실과 왕족, 기타 양반들은 ‘입안절수(立案折受)’의 명목으로 이 황무지를 불하받아 그들이 소유하는 거대한 재력을 배경으로 이 토지를 다시 개간하였다. 황무지는 본래 주인이 있는 땅이었으나, 왕실 및 왕족에 의하여 새로 개간된 이후부터는 이른바 궁방전의 명목으로 그들의 소유에 귀속되었다.

이 밖에 뒤에 내려와서는 일반농민의 민전을 헐값으로 매득하여 궁방전에 편입하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비교적 합리적인 방법이었으나, 불법적으로 농민에 압력을 가하여 그들의 경작지를 강탈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 국가가 특유(特有)하는 공전에 대한 조세수조권을 일정한 기간 동안 기한부로 이양받아 국가가 수취할 조세를 국가 대신으로 취득한 무토면세(無土免稅)가 있다.

이 토지에 대한 조세의 수취기한이 지나면 다른 토지에 대한 조세의 수취권이 부여된다. 그리하여 항상 방대한 면적의 공전이 궁방에 대하여 조세를 바쳤다. 이러한 토지도 궁방전으로 간주되었다. 이것은 사실 왕족들에 대하여 토지를 국가가 지급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왕족에 대한 토지의 공적 지급은 직전법의 폐지 이래 중단되어 있었는데, 궁방전의 설정으로 이것이 다시 재개된 셈이다. 궁방전은 물론 국가에 대한 조세 공부가 면제되는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영문둔전·아문둔전·궁방전의 설정은 임진왜란 이후에 나타난 조선토지제도사상 매우 주목할 중요한 지목이었다.

둔전·궁방전에서는 전주에 대한 조세의 부담이 국가에 대한 공적인 조세에 비하면 다소 가벼웠고, 또 연호노역(烟戶勞役)이 면제되는 특권이 있었으므로 일반농민은 물론 권력자들 중에서도 자기의 소유지를 영문·아문·궁방에 투탁하는 자가 많이 나타나서 영문둔전·아문둔전 및 궁방전은 점점 확대, 팽창하였다.

권력자는 자기의 토지를 투탁할 뿐 아니라 처음부터 영문·아문·궁방의 명의로 토지를 설정하여 그들에게 약간의 금곡(金穀)을 바치고 그보다 훨씬 더 무거운 국가의 공세(公稅)를 포탈하여 거대한 이득을 취하는 자도 많이 나타났다. 이러한 행존(行存)들은 토지소유의 실체를 매우 애매하게 만들어 뒤에 토지소유권 문제에 혼란을 일으켰다.

면세의 특권이 부여된 영문·아문·궁방의 토지의 확대는 당연히 국가의 조세수입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이들 토지의 제한과 정리, 그리고 과세 등이 오랜 기간을 통하여 여러 번 논의되었으나 결국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더욱 더 확대되었다.

영문·아문·궁방은 광대한 토지를 집적하였을 뿐 아니라 종래 일반 민간의 이익을 위하여 개방되어 있던 어장·산림 등의 자연부원(自然富源)과 또 염장(鹽場)을 점령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였다. 1807년경 당시에 있어 영문둔전과 아문둔전의 합계는 전국 경작지 145만6592결의 3.2%에 해당하는 4만6102결이었고, 궁방전은 2.6%에 해당하는 3만7926결이었다. 양자를 합치면 전국경작지의 약 6%에 해당한다.

궁방전·영문둔전·아문둔전에는 도장(導掌)이라는 관리인이 붙어 있었다. 이 관리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토지의 경작을 감독하고 그 토지에서 나오는 수확을 수취함에 있었는데, 그는 또한 중간착취자이기도 하였다. 도장뿐 아니라 그의 밑에 달린 중간착취자가 농민들 위에 개재하여 많은 폐단을 남겼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토지제도상에 나타난 또 하나의 주목할 현상은 양반관료, 지방행정의 실무자인 아전 및 지방유력자들의 대토지집적이 현저히 증진하였다는 것이다. 일본의 침략에 이어서 만주족이 침략해 오자 전쟁에 의한 혼란기가 오랜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이 혼란기는 탐욕스런 양반관료, 아전 및 지방유력자들에게 그들의 토지를 확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전란으로 인하여 피점령지의 토지대장은 거의 소실되었다. 적군의 점령을 면한 지역에 있어서도 토지대장은 많은 손상을 입었다. 이 토지대장이 소실 혹은 손상됨으로써 토지의 소유관계가 매우 애매하게 되었다. 토지대장은 다시 재작성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많은 부정과 협잡이 이루어졌다.

지방의 향호들이 전적의 손실에 편승하여 토지를 강점하고 농민은 땅을 빼앗겨 실농(失農)하기에 이르렀다. 또 권력자 중에는 국가에 대한 조세와 기타의 부담을 포탈하기 위하여 자기의 토지를 감량하여 보고하거나 혹은 토지대장에 등록하지 않는 이른바 음법(陰法)을 감행하였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전쟁 직후의 토지조사에 의하면, 전전의 전국경작지 면적이 150여만결이었던 것이 전후에는 30만 결 정도로 격감한다. 이것은 전쟁에 의한 경작지의 손상이 막대하였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지만, 또한 부당한 방법에 의한 토지의 은닉도 상당하였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권력자들은 여러 가지의 부정한 방법으로 그들의 토지를 확대하고 그 결과 더욱 더 많은 재부를 축적하였다. 그리고 그 재부의 축적은 또 그들의 토지를 확대하는 큰 요인이 되었다. 권력기관 및 권력자들의 대토지소유가 팽창한 반면, 조상 전래의 토지를 상실하는 농민의 수가 늘어났다. 농민의 손을 떠난 토지는 권력기관 혹은 권력자들에게 점유되었다.

조선 전기의 면적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려운 형편이지만 조선 후기부터는 농업생산에 있어 자가경영보다는 소작제경영의 비중이 더 커지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농촌에 있어서의 토지경영은 아마 소작제 위주로 전화된 것 같다. 이것은 전국의 경작지 중에서 많은 부분의 토지가 일부 소수의 지주들 손에 집중되고 농민은 농토를 상실하여 차차 몰락해 가는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의 몰락현상의 과정에 있어서는 금속화폐의 일반적 통용이 또 큰 작용을 하고 있었다. 17세기 중엽 이후 금속화폐의 유통이 활발해지자 그것은 재래의 봉건적 자연경제를 점차로 해체시키고 농민들의 경제생활에 파괴적인 영향을 미쳤다. 금속화폐가 일반상품의 유통에 도입되자 그것은 농민의 소비생활을 크게 자극하여 그들의 빈약한 생계를 더욱 더 파탄으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주들의 고리대금업이 성행하고 그 희생이 된 농민들은 결국 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금속화폐가 재래의 자연경제의 농촌을 해체시키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주목할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다 할 권력의 배경이 없이 순수한 경제적 활동과 노력 경영적인 수완과 재능으로 부를 축적한 농촌 내부의 부농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국가기관 혹은 대지주의 토지를 비교적 헐한 지대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빌려 몰락한 농민의 유휴노동력을 고용해서 그 토지를 경작하고 기업적 경영을 통하여 큰 부를 축적하였다. 부농에 의하여 고용된 경작자는 일종의 임금노동자의 성격을 띤 농민으로서 이러한 농민이 농촌 내부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나타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들 경영형의 부농은 그들이 지주가 되어 지주형의 농업을 경영하는 일도 있기는 하였으나 대체로는 기업적인 농업경영을 통하여 부를 축적함에 더 큰 관심을 표시하였다. 이것은 확실히 근대적 농업경영의 한 맹아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있어서도 전국경작지의 면적에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민전이었다. 일반농민의 경작지뿐 아니라 소작제에 의하여 경영되는 양반·관료·지방유력자들의 소유지도 민전으로 간주되었다. 소작제에 의하여 경영하는 지주는 대개 양반 향호층이었다. 그러나 지주의 자격이 반드시 사회적 지위에 따라서 결정된 것은 아니다. 신분이 낮은 상민이나 심지어는 노예가 양반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여 납속수직(納粟授職)하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현저히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아마 조선 후기부터라고 생각한다.

민전의 소유자는 그들이 소유하는 토지의 양에 따라서 국가에 조세를 바치고 또 공부 역역, 그리고 기타 굉장히 많은 종류의 잡세를 부담하였다. 조세는 곡물로써 바치고 공부는 지방토산물로써 바쳤다. 그런데 17세기의 후반기에 대동법(大同法)이 보급된 이후부터는 종래 지방토산물로써 바치던 공부도 조세와 같이 곡물로써 바치게 되었는데, 이때 대체로 조세는 1결에 4두요, 대동미(大同米)는 1결에 12두의 비율이었다.

영문둔전·아문둔전·궁방전은 면부면세(免賦免稅), 즉 대동미 등의 잡부와 조세가 면제되어 있었다. 단, 영문둔전과 아문둔전은 18세기 후반기(영조 34년, 1758)부터는 면부(免賦)·출세(出稅)로 법제가 변하였는데, 이러한 법제의 변경이 어느 정도의 실효를 거두었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밖에 전기부터 내려온 지방관청에서 경영하는 관둔전(官屯田)·아무전(衙務田) 등과 교통의 중로(中路)에 설정된 역전·원전이 있었고, 학교전·능묘전·제전이 있었다. 이들 토지는 국가의 공적기관의 경비를 조달하기 위하여 설정되었으므로 면세의 특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명목의 토지들은 이른바 각종 면세전에 포함되는 것으로 이해되는데 이 각종 면세전은 그 양이 굉장히 방대한 것이어서 1807년(순조 7) 당시의 기준으로 전국토지의 8.2%에 해당하는 11만8584결이었다. 여기에는 전국토지의 약 6%에 해당하는 영문둔전·아문둔전·궁방전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양자를 합친 면세전의 액수는 전국토지의 14%를 능가한다.

면세·면역의 특전이 부여되어 있는 이러한 명목의 토지에는 세부(稅賦)의 포탈을 목적으로 많은 민전이 투탁되었다. 이러한 투탁전은 명목은 어떻든간에 실제적으로는 민전이었으므로 뒤에 내려와서는 소유관계에 많은 혼란이 생겨 소속이 불명한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사회는 19세기 후반기에 격동하는 근대화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고, 1910년에는 일본에 의하여 강제 병합되었다.

<강진철>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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