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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21 (일)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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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140      
[삼국/남북국] 신라의 제도 (민족)
신라(제도)

관련항목 : 남북국시대, 삼국시대

세부항목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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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참고문헌)

1. 골품 제도

골품 제도는 6세기초 신라 조정에 의해 법제화된 이래 삼국통일을 거쳐 멸망에 이를 때까지 4백여 년간 거의 변함없이 신라의 정치와 사회를 규제하는 대본(大本)으로서 기능, 작용하였다. 이 제도는 개인의 혈통의 존비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이라든지 가옥의 크기, 의복의 빛깔, 우마차(牛馬車)의 장식 등 사회생활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특권과 제약을 가하였다. 따라서 세습적인 성격이나 제도 자체의 엄격성으로 보아 흔히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비교되고 있다.

[형성과 계통]

본래 골품제도는 신라가 팽창하는 과정에서 복속된 성읍국가 혹은 연맹 왕국의 지배층을 중앙집권적인 지배 체제 속에 편입, 정비할 때에 등급을 매기기 위한 하나의 기준, 원리로서 제정된 것이었다. 그런데 원시 씨족 제도 내지 족장층의 사회적 기반을 해체하지 못한 채 집권화의 방향으로 나갔던 까닭에 등급 구분의 원리는 혈연적ㆍ족적인 유대를 토대로 하였다.

골품제도는 처음 왕족을 대상으로 한 골제(骨制)와 왕경 내의 일반 귀족을 대상으로 한 두품제(頭品制)가 별개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던 듯한데, 법흥왕 때에 두 계통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골품제도는 성골(聖骨)과 진골(眞骨)이라는 두 개의 골과 육두품부터 일두품에 이르는 여섯 개의 두품을 포함해 모두 8개의 신분으로 나누어졌다. 다만 골품제도가 ≪삼국사기≫ 직관지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정연한 신분체계로 형성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기간에 걸친 사회성층의 결정화(結晶化) 과정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골과 진골]

성골은 김씨 왕족 중에서도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최고의 신분이었다고 하는데, 진덕여왕을 끝으로 하여 소멸하였다. 진골도 성골과 마찬가지로 왕족이었으나, 처음에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다고 하며 성골이 소멸되자 김춘추 때부터는 왕위에 올랐다. 그뒤 신라의 멸망 때까지 모든 왕들은 진골이었다. 이처럼 같은 왕족이면서도 양자가 구별된 이유는 뚜렷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한편, 진골 중에는 김씨 왕족 이외에 전 왕족이자 중고시대의 왕비족으로도 생각되는 박씨족이나 혹은 신라에 의해 병합된 비교적 큰 국가의 왕족들에게도 부여되었다. 즉, 본가야의 왕족이나 고구려의 왕족출신인 보덕국왕(報德國王) 안승(安勝)은 모두 김씨성을 받고 진골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비록, 이들은 ‘신김씨(新金氏)’라 하여 본래의 신라왕족과는 구별되었지만, 진골 대우를 받음으로써 김씨 왕족과도 통혼할 수 있게 되었다.

[두품제]

진골 아래의 여섯 개의 신분은 뒤에 가면 크게 상하 두 계급으로 구별되었다. 즉, 6두품ㆍ5두품ㆍ4두품은 하급귀족으로서 관료가 될 수 있는 신분이었으나, 3두품ㆍ2두품ㆍ1두품은 일반평민과 다를 것이 없게 되었다. 물론, 관료가 될 수 있는 계급이라도 그 특권이 모두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진골 바로 다음가는 신분인 6두품은 일명 ‘득난(得難)’이라고 불린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좀처럼 얻기 어려운 귀성(貴姓)이었다.

여기에는 본래의 신라국을 형성한 여섯 씨족장 가문의 후예와 신라의 팽창과정에서 복속되어 왕경 6부에 편입된 여러 성읍국가의 지배층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영(令)을 장관직으로 하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이나 혹은 6정ㆍ9서당 등 주요 군부대의 지휘관인 장군이 될 수 없었고, 그 아래의 차관직이나 부지휘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그들 가운데는 관리나 군인이 되는 길을 포기하고 유학자 혹은 승려가 되는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원효(元曉)와 같은 위대한 승려나 최치원(崔致遠)과 같은 뛰어난 문학자는 모두 6두품출신이었다. 한편, 5두품과 4두품은 6두품에 비해서 보다 낮은 관직을 얻는 데 불과했다. 3두품ㆍ2두품ㆍ1두품은 시간이 흐를수록 세분된 의미를 잃어 평인(平人) 혹은 백성이라 통칭되었다.

[변천]

골품 제도는 본래 8등급으로 구분되어 있었으나, 성골이 소멸하고 또한 평민들의 등급구분이 없어지게 된 결과 진골ㆍ6두품ㆍ5두품ㆍ4두품ㆍ백성의 5등급으로 정리되었다. 4두품은 834년(흥덕왕 9)에 제정된 거기(車騎)ㆍ기용(器用)ㆍ옥사(屋舍)에 대한 사용 제한규정에서 보면 백성과 같은 규제를 받고 있어 점차 백성층과 동질화된 듯하다.

카스트제도와 마찬가지로 골품제도도 최고신분인 성골ㆍ진골은 엄격히 지켜졌으나, 4두품 이하의 하층신분은 상당한 시간에 걸쳐 계급의 이동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평민이라고 하더라도 일단 골품제도에 편입된 사람들은 왕경에 사는 사람만으로 제한되어 있었던 만큼 지방의 촌락민과는 같이 논할 수 없는 우월한 존재였다.

왕경 사람들은 지방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골품제도는 이를 합법화하기 위한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배타적인 신분제도였다. 다시 말해 지방민은 노예나 부곡민(部曲民) 등 천인 계층과 더불어 골품제도에 포섭되지 않는 이른바 탈락계층이었다.

[정치적 규제]

여러 골품은 정치적ㆍ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에 차등이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규정이 정치적 진출에 대한 것이었다. 즉, 골품제도는 신분에 따라 일정한 관직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규정한 관등의 상한선을 설정함으로써 결국 정치적 진출을 규정하였다. 신라의 관등제도는 골품제도와 마찬가지로 법흥왕 때에 완성되었는데, 왕경인에 대한 경위제도(京位制度)와 지방민에 대한 외위제도(外位制度)의 이원적인 체계로 구성되었다.

그 뒤 삼국 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외위 제도를 폐지하고 경위 제도로 일원화하면서, 진골은 최고 관등인 이벌찬(伊伐飡)까지, 6두품은 제6관등인 아찬 (阿飡)까지, 5두품은 제10관등인 대나마(大奈麻)까지, 4두품은 제12관등인 대사(大舍)까지로 각기 승진의 한계를 정하였다. 그런데 집사부의 장관직인 중시나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의 장관직인 영은 제5관등 대아찬 이상만이 취임할 수 있었으므로, 결국 장관직은 진골귀족의 독점물이었다.

6두품은 차관직에 오르는 것이 고작이었고, 5두품과 4두품은 각기 제3등 관직인 대사와 그 이하 관직인 사지(舍知)ㆍ사(史)에 한정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이와 같은 원칙은 주요 군부대ㆍ지방관직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었다.

[사회적 규제]

골품 제도는 정치적 규제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규제 또한 엄격하였다. 원칙적으로 같은 신분 내에서만 결혼이 가능했으므로 최고 신분에 속하는 사람들은 배우자를 구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진덕여왕이 혼인하지 않은 이유가 왕실 안에서 성골 신분의 남성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충분히 가능한 상상이다. 또한, 같은 진골이라도 김씨 왕족은 뒤에 왕경으로 이주해온, 신라에 의해 병합된 조그만 나라의 왕족 후예와의 혼인을 꺼리는 관습이 강하였다.

이외에도 거처할 수 있는 가옥의 크기에까지 적용되었다. 834년의 규정에 따르면 진골의 경우라도 방의 길이와 너비가 24척(尺)을 넘지 못하며, 6두품ㆍ5두품ㆍ4두품은 각기 21척ㆍ18척ㆍ15척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또한, 옷빛깔에서는 제5관등인 대아찬 이상, 제9관등인 급벌찬(級伐飡) 이상, 제11관등인 나마(奈麻) 이상, 제17관등인 조위(造位) 이상이 각기 자색(紫色)ㆍ비색(緋色)ㆍ청색(靑色)ㆍ황색(黃色)의 복장을 하였다. 이는 진골ㆍ6두품ㆍ5두품ㆍ4두품에 각기 상응하고 있다.

이 밖에도 우차의 자재 및 장식, 일상생활용기들이 골품에 따라 각기 다르게 규정되어 있었다. 결국 이 같은 골품제사회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고 있던 것은 최고의 특권을 누리고 있는 진골이었다.

2. 정치 제도

신라의 정치 제도는 삼국 통일 직후인 신문왕 때에 최종적인 완성을 보게 되었으나, 연원은 마립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 시대의 정치 운영 방식이나 관제는 뒷날의 화백 제도(和白制度)와 관등 제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관등 제도를 예로 들어본다면, 6세기초 법흥왕 때에 비로소 정비되었으나, 관등의 원류를 소급해보면 연맹 왕국 시대에 이미 관직으로서 기능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1ㆍ2관등인 이벌찬과 이척찬(伊尺飡, 일명 伊飡)은 법흥왕 때 상대등직이 설치될 때까지는 수상에 해당하는 관직이었고, 제4관등 파진찬(波珍飡)은 본래 해관(海官) 혹은 수군(水軍) 지휘관을 가리키는 고유한 직명이었다. 물론 관등의 관직적 성격은 6세기 이래 왕권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지양되었으나, 완전하게 불식되지 않은 채 관직의 제도화를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법흥왕 이후 관등과 관직이 분리된 뒤에도 대사ㆍ사지 등 관등명칭은 집사부를 비롯한 주요 관부의 제3ㆍ4등 관직명칭으로 함께 쓰여졌다.

[중앙 행정 제도]

중앙의 통치조직을 보면 법흥왕 때부터 정비되기 시작해 516∼517년경에는 중앙의 제1급 행정관부로서는 처음으로 병부(兵部)가 설치되었으며, 531년에는 귀족회의 의장으로서의 상대등 제도가 채택되었다. 진흥왕 때인 544년에는 관리의 규찰을 맡은 사정부(司正府)가 만들어졌고, 565년에는 국가의 재정을 맡은 품주가 설치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행정기구 발달에 있어 획기적인 시기는 진평왕 때였다. 581년에는 인사행정을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 583년에는 선박과 항해를 담당하는 선부(船府)가 각각 창설되었다. 이듬해에는 공부(貢賦)를 맡은 조부(調府)가 품주로부터 분리, 독립했으며, 승여(乘輿)ㆍ의위(儀衛)를 담당하는 승부(乘府)가 설치되었다. 586년에는 의례와 교육을 담당하는 예부(禮部) 등이 창설되어 관제발달을 맞게 되었다.

580년대의 관제조직상의 특징은 새로운 관부의 창설 뿐만 아니라 각 관청간의 분업체제가 확립되고, 소속 직원의 조직화경향이 뚜렷하게 보여 일종의 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진덕여왕 때에는 김춘추 일파에 의해 당나라의 정치제도를 모방한 대규모 정치개혁이 단행되었다. 651년에 종래의 품주를 개편, 국왕직속의 최고 관부로서 집사부를 설치하고, 품주의 본래 기능은 신설된 창부(倉部)로 이관하였다.

또한, 입법과 형정(刑政)을 담당하는 이방부(理方府)가 설치되었는데, 667년(문무왕 7)에 또 하나의 이방부가 설치됨으로써 종래의 것은 좌이방부, 신설된 것은 우이방부로 고쳤다. 이와 동시에 예부와 사신접대를 담당하는 영객부(領客府)의 지위를 높였다. 개혁 작업은 김춘추가 즉위한 뒤에도 계속 추진되어 삼국통일 직후인 686년(신문왕 6)에 토목ㆍ영선(營繕)을 담당하는 예작부(例作府) 설치를 끝으로 일단 완성되었다.

이와 더불어 제1급 행정관부의 관원조직도 확충되었다. 종전에는 관원조직이 영ㆍ경(卿, 병부는 大監)ㆍ대사ㆍ사의 4단계였는데, 685년에 대사와 사의 중간에 사지를 신설함으로써 결국 5단계조직으로 완성되었다. 이와 같은 행정기구들은 신라 멸망 때까지 계속 유지된 것으로 보인다. 비록 759년(경덕왕 18)에 모든 관부와 관직의 명칭을 중국식으로 고친 일은 있었으나 귀족들의 반발로 776년(혜공왕 12)에 다시 본래의 명칭으로 환원되었다.

이처럼 행정기구 자체에는 변동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기능이나 위치는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9세기에 접어들면 종전의 내성(內省) 일국(一局)에 불과하던 어룡성(御龍省)이 승격, 독립해 일종의 섭정부(攝政府)로 등장하였다(801). 또한 국왕의 문필(文筆) 비서기관인 세택(洗宅)이 중사성(中事省)으로 승격해 집사성(執事省 : 執事部가 개칭됨) 장관인 시중(侍中 : 中侍가 개칭됨)을 견제하는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다. 특히 경문왕ㆍ헌강왕 때에는 문한(文翰)기구의 비중이 커지면서 서서원(瑞書院)ㆍ숭문대(崇文臺) 등에 학사(學士)ㆍ직학사(直學士) 제도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화백 제도]

그러나 신라의 정치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현상은 그것이 합좌제도(合坐制度)에 의해 운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신라에서는 이 회의체를 화백이라고 불렀는데, 기원은 연맹왕국시대의 정사당(政事堂) 혹은 남당(南堂)에까지 소급되고 있다. 하지만 화백제도가 비교적 뚜렷한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것은 의장인 상대등직이 설치된 이후부터의 일이다. 진골 귀족 출신의 대신이라 할 수 있는 대등(大等, 혹은 大衆等)으로서 구성되는 화백회의에서는 왕위의 계승과 폐위, 대외적인 선전포고, 기타 불교의 공인과 같은 국가의 중대한 일들을 결정하였다. 회의는 만장일치에 의해 의결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특히 중대한 국사를 의논할 때에는 왕경 사위(四圍)의 청송산(靑松山, 동쪽)ㆍ오지산(鱉知山, 남쪽)ㆍ피전(皮田, 서쪽)ㆍ소금강산(小金剛山, 북쪽) 등 이른바 영지를 택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합좌제도의 존재는 당시의 정치를 귀족연합적인 성격을 지니게 하였다. 특히, 이 귀족회의의 주재자로서의 상대등은 진골 중에서도 이척찬과 같은 높은 관등의 인물이 임명되어 귀족세력과 왕권 사이에서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을 가졌다.

즉, 상대등은 국왕의 교체와 거취를 같이함으로써 국왕과의 관계에서 권력과 권위를 서로 보완하는 존재였고, 귀족의 통솔자일 뿐 아니라 그 대변자요 대표자라는 독특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정당한 왕위계승자가 없을 경우에는 왕위를 계승할 제일후보자로 여겨졌다. 다만, 집사부의 설치를 계기로 국가의 정무를 분담하는 새로운 관부가 만들어지자 어느 관청에도 소속되지 않는 대등의 존재의의는 줄어들게 되었다. 특히 통일기에 들어와 전제왕권이 성립되면서 상대등으로 상징되던 화백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빛을 잃게 되었다.

그렇지만 합좌제적인 정치운영의 전통은 변형된 형태로나마 여전히 잔존하였다. 가령 집사부와 사정부ㆍ예작부ㆍ선부 등 몇몇 관부를 제외한 주요 관청의 장관직인 영이 대개 2명 이상의 복수로 되어 있는 점이라든지, 더욱이 이들 장관직이 겸직의 형태로 소수의 진골귀족에 의해 독점되어 있는 것은 통일기 신라의 정치가 기본적으로 합좌제도에 의해 운영되고 있던 것을 암시한다고 보여진다.

[지방 행정 제도]

지방의 통치 조직은 지증왕 때 점령지역의 확보책으로서 설치되었다. 즉, 505년에 신라는 지방제도로서 주군제도를 채택, 실시했는데, 군사상의 필요에 따라 때때로 중심을 이동할 수 있는 군정적(軍政的) 성격을 띠고 있었다. 큰 성에 설치한 주의 장관을 군주(軍主), 중간 정도규모의 성에 설치한 군의 장관을 당주(幢主)라 하였다. 뒤에 군주는 총관(摠管)ㆍ도독(都督)으로, 당주는 태수(太守)로 각각 바뀌었다. 한편, 작은 규모의 성이 바로 소성이었는데, 통일기에 들어와 현으로 개편되었고, 장관명칭은 현의 등급에 따라 현령 혹은 소수(小守)라 하였다.

6세기 중엽 신라의 사정을 기록한 것으로 짐작되는 ≪양서 梁書≫ 신라전에는 왕경 안에 여섯 개의 탁평(啄評), 지방에 52개의 읍륵(邑勒)이 있었다고 했는데, 이 읍륵을 군으로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군제도는 한꺼번에 전국적으로 실시된 것은 아니었다. 주만 하더라도 505년에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강원도 三陟) 1개가 설치되었고, 525년에 다시 사벌주(沙伐州 : 지금의 경상북도 尙州), 550년대에 신주(新州 : 지금의 경기도 廣州)ㆍ비사벌주(比斯伐州 : 일명 下州라고도 하며 지금의 경상남도 昌寧), 비열홀주(지금의 함경남도 安邊) 등이 차례로 설치되었다.

한편, 주군제도와는 별도로 왕경을 모방해 특수행정구역으로서 소경을 설치하였다. 소경은 처음 514년에 아시촌(阿尸村 : 위치에 대하여는 安康ㆍ咸安ㆍ義城 등이 있음)에, 557년에는 국원(國原 : 지금의 충청북도 忠州)에, 다시 639년에는 하슬라(何瑟羅 : 지금의 강원도 江陵)에 각각 설치하였다. 이들 소경에는 왕경 6부의 진골을 비롯한 주민들이 이주하기도 하였다. 소경은 주군이 군정적 거점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데 비해 주로 정치적ㆍ문화적 중심지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한편으로는 주군을 견제, 감시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관은 사신(仕臣 : 일명 仕大等)이라 하여 중앙에서 파견되었다. 다만, 삼국통일 이전의 소경제도는 전국적으로 체계 있게 정비되지는 못하였다.

[통일에 따른 지방 제도의 개편]

이와 같은 지방 통치 조직은 삼국통일에 따른 영토의 확대로 개편, 확대, 정비되었다. 이 작업은 685년에 9주ㆍ5소경제도로 완성되었다. 9주는 중국의 옛 우왕(禹王) 때의 제도를 모방한 것으로, 신라ㆍ백제ㆍ고구려의 옛 땅에 각기 3개의 주를 설치하였다. 주 밑에는 전국에 117∼120개의 군과 293∼305개의 현을 두었다.

한편, 5소경은 대체로 국토의 동서남북중의 방향에 맞추어서 정비되었다. 이는 왕경이 동남쪽 한끝에 너무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충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통일기의 지방통치조직의 변화는 이 같은 각급 행정단위의 증가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주군제도는 종전의 군정적 성격이 현저하게 줄어든 대신 행정적 성격이 강화되었다.

이는 군현에 파견되는 외관(外官) 중에 학식 있는 사람을 등용한 데서 엿볼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신라가 약 1세기 동안 생사를 건 전쟁 끝에 삼국통일을 달성함으로써 비로소 안정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끝으로 주ㆍ군ㆍ현과 소경 밑에는 촌(村)ㆍ향(鄕)ㆍ부곡(部曲)이라는 보다 작은 행정구역이 있었다. 촌은 양인이 사는 몇 개의 자연촌이 합쳐져서 이루어진 이른바 행정촌이었는데, 그 지방의 토착세력가를 촌주(村主)로 임명해 현령과 상수리(上守吏)의 통제하에 촌락행정을 맡도록 하였다. 한편, 향ㆍ부곡은 촌과는 구별된 듯한데, 그 사유는 확실히 알 수 없다.

3. 군사 제도

신라에서는 처음에 왕경 6부의 소속원을 군인으로 징발해 이른바 6부병을 편성, 왕경을 수비하도록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6세기에 들어와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로 발전함에 따라 국왕은 전국적인 군대의 총사령관으로서 강력한 군사지휘권을 갖게 되었다. 국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귀족출신의 무장을 대신 파견해 싸우게도 하였다. 국왕지휘하의 부대편성의 구체적인 모습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독립된 단위부대를 흔히 군기(軍旗)의 뜻을 가진 당(幢)이라고 불렀던 것만은 확실하다.

[6정의 설치]

신라의 군사제도는 삼국간의 항쟁이 격화된 진흥왕 때부터 본격적으로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544년에 종래 왕경 주위에 배치되어 있던 6개의 부대를 통합해 대당(大幢)을 편성했는데, 이는 중고시대 군사력의 기본이 되는 6정의 효시가 되었다.

그 뒤 550년대에 영토의 비약적인 확장과 더불어 점령지에 주를 설치하고, 주마다 군단을 설치한 결과 종전의 대당 이외에 상주정(上州停 : 《삼국사기》에는 뒤에 貴幢으로 개편되었다고 했으나, 실은 귀당은 한동안 상주정과 병존했던 별개의 군단으로 생각됨)ㆍ신주정(新州停 : 漢山停의 전신임)ㆍ비열홀정(比列忽停 : 牛首停의 전신임)ㆍ실직정(悉直停 : 河西停의 전신임)ㆍ하주정(下州停 : 完山停의 전신임) 등 모두 6정이 편성되었다.

6정 군단은 주치(州治)에 배치되어 주의 이동과 함께 소재지가 이동되었다. 대당을 제외한 5개의 정은 모두 지방민을 징발해 편성된 부대로 생각된다. 한편, 6정 외에 비중이 큰 군단으로는 법당(法幢)이 있었는데, 확실한 창설연대를 알 수 없다. 또한, 국왕을 시위하는 군사조직으로 624년(진평왕 46)에 시위부(侍衛府)가 조직되었다.

이들 부대의 병사들은 군인이 되는 것을 괴로운 의무이기보다는 오히려 명예로운 권리로 생각해 전투에 임해서 목숨을 돌보지 않고 용전하였다. 삼국 통일 이전에는 이 같은 핵심 부대 외에 귀족 무장이 개인적으로 군대를 가려 모아서 편성한 이른바 소모병(召募兵)이 있었다.

이 부대는 비록 당이라고 불리지는 않았으나 실제는 당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이와 같은 소모병은 583년에 서당으로 편성되었는데, 그 뒤 625년에는 다시 낭당이 설치되어 점차 증가하는 추세에 있었다.

[화랑 제도]

또한, 6정 군단의 보충을 목적으로 한 군사조직에 화랑도(花郎徒)와 같은 청소년단체가 있었다. 화랑도의 원류는 성읍국가시대 촌락공동체 내부에서 발생한 청소년조직으로 생각되는데, 진흥왕 때 대규모의 군단이 편성될 때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는 조직으로 개편된 것이었다. 화랑도는 단순한 군사조직은 아니었다. 화랑집단은 원광법사의 세속오계(世俗五戒)에서 볼 수 있는 충(忠)과 신(信) 등 사회윤리 덕목을 귀중하게 여기면서 수련을 쌓았다.

그 결과 삼국통일을 이룩하게 되는 7세기 중엽까지의 1세기 동안 국난기에 적합한 시대정신을 이끌어갔으며, 특히 무사도의 현양(顯揚)에 이바지한 바 컸다. 화랑출신인 사다함(斯多含)ㆍ김유신ㆍ김흠운(金欽運)ㆍ관창(官昌) 등의 무용담은 신라 무사도의 귀감이 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역사가인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 花郎世記≫에서 화랑도를 평해 “현명한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서 솟아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다.”고 한 것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9서당ㆍ10정 제도]

삼국통일 후 신라의 군사제도는 큰 변화를 겪었다. 즉, 중앙군으로서 9서당, 지방 주둔군으로서 10정, 기타 많은 부대가 편성되었다. 이 같은 개편은 대체로 문무왕ㆍ신문왕 때에 이루어졌다. 9서당의 특징은 신라사람 이외에도 백제와 고구려의 피정복민을 포함해 구성된 군단이라는 점에 있다. 즉, 신라민으로는 종전의 서당과 낭당을 각각 개편해 두 개의 군단을 편성하고, 672년에 조직한 장창당(長槍幢)을 693년(효소왕 2)에 비금서당(緋衿誓幢)이라 개칭하면서 9서당에 포함시켜 도합 3개의 군단을 조직하였다. 백제민으로는 전후 2개의 군단을 조직했으며, 고구려민으로는 3개 군단, 그리고 말갈민으로 1개 군단을 조직하였다.

고구려민으로 구성된 3개 군단 중에는 유민으로 만들어졌던 보덕국의 성민(城民)으로 구성된 군단이 2개 포함되어 있다. 결국 9서당은 피정복민으로 조직된 군단의 수가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했는데, 신라통일기의 최대군단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중요한 군사력이었다. 한편, 10정은 9주에 각각 하나씩 정을 둔다는 원칙 아래 고루 배치하였다. 다만, 한주(漢州)에는 국경지대에 위치했고, 지역 자체도 넓었기 때문에 2개의 정을 배치하였다. 10정은 국방상의 견지에서만이 아니라 지방의 치안을 확보한다는 의미에서도 중요한 군사조직이었다.

한편, 9주 가운데 특히 다섯 주에 배치된 군대로 5주서(州誓)가 있었다. 이는 기병집단이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리고 국경지대에는 3변수당(邊守幢) 등 여러 군사조직이 배치되기도 하였다.

4. 경제 제도

신라 시대의 경제 제도는 기록이 매우 불충분해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토지 제도]

토지 제도를 보면, 6세기 이래 중앙집권적인 귀족국가의 성장에 따라서 ‘전국의 모든 국토는 왕토(王土)요, 모든 국민은 왕신(王臣)’이라고 하는, 이른바 왕토사상이 대두해 모든 토지와 국민이 국왕에게 예속되었다. 그렇지만 모든 토지가 국왕에 의해 독점된 것은 아니었다. 관직과 군직을 독점한 귀족들은 국가에 대한 공로로 식읍(食邑)ㆍ사전(賜田) 등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받았고, 그들이 사적으로 소유하는 토지의 면적은 증가되어 갔다.

또한, 일반 관료들은 녹읍을 지급받았는데, 수급자가 토지로부터 일정한 양의 조를 받을 뿐 아니라, 그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노역에 동원할 수 있는 권리도 함께 부여받은 듯하다. 그러나 삼국 통일 후 토지제도는 크게 변화하였다. 즉, 687년에 관료들에게 관료전을 지급하고, 2년 뒤에는 녹읍을 폐지, 대신 세조(歲租)를 지급하였다. 관료전과 세조는 다만 조의 수취만을 허락한 것으로 생각되며, 관직에서 물러나면 국가에 반납해야 하는 성질의 토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개혁은 귀족들의 토지지배와 결부해 인간에 대한 지배를 제한하려는 취지에서 나온 획기적인 조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이 너무나 컸고, 한편 이를 억누를만한 국가권력이 쇠퇴해 757년에는 녹읍을 부활하였다. 물론, 이 때 관료전과 세조는 폐지되었다. 하지만 귀족 관료들은 부활된 녹읍 이외에도 광대한 사유지를 소유해 국가권력이 퇴조를 보이기 시작한 하대에는 독자적인 사병을 거느릴만한 재산을 축적해갔다.

한편, 전제왕권의 전성기였던 722년(성덕왕 21)에는 농민에게 정전(丁田)을 지급했는데, 이는 정(丁)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한 토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자들 가운데는 이를 당나라의 균전제(均田制)와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혹은 농민들이 본래부터 자영하고 있던 농토의 소유를 국가에서 인정해 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통일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크게 피폐해졌고, 더욱이 고리대자본의 성행으로 몰락하고 있던 농민층을 구제하기 위한 일시적인 대책으로 단행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농민을 전통적인 촌락공동체적 결집에서 분리시키지 못한 당시의 상황을 보면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나라(奈良) 쇼소인(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신라 통일기의 서원경(西原京 : 지금의 충청북도 淸州지방) 지방 촌락 장적(帳籍)에 의하면, 촌에는 관모전답(官謨田畓)ㆍ내시령답(內視令畓)ㆍ마전(麻田) 등이 할당되어서 촌민들에 의해 경작되었으며, 촌주는 촌주위답(村主位畓), 촌민은 연수유답(烟受有畓)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보이는 연수유답이 정전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으나, 그보다는 농민들의 자영농토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세 제도]

조세제도 또한 토지제도와 마찬가지로 편린만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도 고구려ㆍ백제와 같이 자영농민에게 조세ㆍ공부와 역역(力役)을 부과했는데, 그 세액은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일찍부터 품주(일명 租主)가 설치되어 국민으로부터 조세를 받아 국가 재정을 관할한 것을 보면 6세기경에는 이미 부세(賦稅) 행정체계가 확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정치제도에서 설명한 것처럼 651년에 품주가 집사부로 확대, 개편되었을 때 창부는 이에서 분리, 독립되었다. 한편, 584년에 설치되어 공부를 담당하던 조부의 실무관료조직이 이 때 확립되었다. 이처럼 7세기 중엽에는 조세와 공부를 담당하는 관청조직이 완성단계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쇼소인 소장 〈신라장적〉에서 보듯이, 통일기에는 촌락의 뽕나무〔桑〕ㆍ잣나무 〔栢子木〕ㆍ호도나무〔楸子木〕등에까지 과세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고구려ㆍ백제와 마찬가지로 토지에 대한 지배 이상으로 농민의 노동력에 대한 지배에 관심이 컸다. 신라의 역역제(力役制)에 관심이 쏠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신라에서는 대체로 15세 이상의 남자에게 일정한 기간의 방수(防戍)나 축성(築城)ㆍ축제(築堤)와 같은 역역에 동원하였다. 최근에 발견된 영천의 청제비(菁堤碑)나 혹은 경주 남산의 신성비(新城碑) 비문을 통해 구체적인 일면을 알게 되었다.

즉, 청제비에 의하면, 536년에 영천의 청제를 수리할 때에 7천명에 달하는 이른바 장작인(將作人)이 차출되었는데, 이들은 25명을 한 조로 하여 모두 280개의 작업분단으로 편성되어 공사책임자인 장상(將上)의 지휘 아래 사역노동에 동원되었다. 또한, 신성비의 비문에 의하면, 591년에 남산성을 개축해 신성을 쌓을 때 전국적인 규모의 촌락민이 차출되어 2백여 개의 작업분단으로 편성되어 촌의 세력가의 책임 아래 사역노동에 동원되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노동력에 대한 관심은 삼국통일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신라장적〉에서 볼 수 있듯이, 촌의 인구를 성별ㆍ연령별(6등급)로 파악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매 촌락에서 동원할 수 있는 정수(丁數)를 쉽게 파악하기 위해 호(戶)를 인위적으로 편성한 위에 이른바 계연(計烟)을 산출하고 있는 것 등은 그 단적인 증좌라 할 수 있다.

[수공업의 발달]

수공업은 농민들이 그들에게 부과된 마포ㆍ견ㆍ사마(絲麻) 등을 생산하기 위해 가내수공업의 형태를 띠고 발달하였다. 그러나, 관청과 왕실 및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물품과 특히 외국과의 교역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해내는 관영수공업의 생산부문이 보다 발달하였다. 관영수공업은 왕궁 내에 설치되었음직한 관영공장에서 전문 공장(工匠)과 노비들에 의해 추진되었다. 이 같은 관영사업장을 통솔하는 행정부서가 내성(內省) 산하에 많이 설치된 것을 보면 물품의 종류는 다양했으며, 수량 또한 막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직관지(職官志)에 보이는 이러한 관청 가운데는 고급 견직물을 생산하는 조하방(朝霞房)ㆍ금전(錦典)ㆍ기전(綺典), 특수모직물과 가발을 생산하는 모전(毛典), 직물의 염색을 담당하는 염궁(染宮), 각종 철물을 주조하는 철유전(鐵鍮典), 각종 칠기를 생산하는 칠전(漆典), 가죽의 제조를 담당하는 피전(皮典), 각종 식탁가구를 제작하는 궤개전(机槪典), 각종 도기와 제기ㆍ와전(瓦塼)을 제작하는 와기전(瓦器典), 각종 장식물을 제작하는 물장전(物藏典), 금ㆍ은ㆍ옥ㆍ세공품을 제작하는 남하소궁(南下所宮), 각종 행사에 사용되는 천막을 제작하는 급장전(給帳典) 등 매우 다양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제작되는 물품 중 조하주(朝霞紬)ㆍ조하금(朝霞錦)ㆍ가발ㆍ해표피(海豹皮)ㆍ금대은(金帶銀)ㆍ주옥 (珠玉) 등은 신라의 특산품으로서 당나라에 수출되었다.

[상업의 발달]

수공업의 발달은 자연히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490년에 왕경에 시장을 열어 사방의 물품을 유통하게 한 것은 신라에 공영시장(公營市場)이 출현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 뒤 509년에는 왕경에 동시(東市)가 설치되었고, 시장을 감독하는 관청으로 동시전(東市典)이 설치되었다. 삼국 통일 후에는 왕경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또한 상품생산이 크게 늘어남에 따라 695년에 서시ㆍ남시를 더 두었으며, 감독 관청도 설치하였다. 이와 같은 경시(京市) 이외에도 지방의 성읍 중심지나 혹은 교통의 요지에는 이른바 향시가 생겨나서 수요자와 공급자가 모여 주로 물물교환의 형태로 각자의 욕망을 충족하였다.

[대외 무역의 발달]

수공업의 발달과 귀족사회의 번영은 또한 대외무역을 촉진시켰다. 신라의 대외무역은 조공이나 예물 교환형식으로 행해지는 공무역과 사절단의 수행원과 상인들이 사사로이 행하는 사무역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대상 국가는 중국 특히 당나라이었으며, 그밖에 일본이 있었고 신라 말기에는 아라비아 상인들까지 신라에 와서 교역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통일 이전의 소규모의 대외무역이 통일기에 들어와서는 문물교류의 확대와 더불어 점차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9세기에 들어오면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해상교통이 손쉽게 되었다. 또한 중앙 정치 무대로의 진출이 막혀버린 지방세력이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마침 당나라의 지방통제력이 약해진 데 힘입어 민간의 사무역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사무역이 공무역을 압도하게 되었다.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는 한국 서남해안에 출몰하는 해적을 퇴치한 뒤 중국ㆍ일본과의 사무역에 종사해 단기간 내에 거대한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견당매물사(遣唐買物使)의 인솔하에 교관선(交關船)을 당나라에 파견했으며, 일본에는 회역사(廻易使)라는 이름의 무역사절단을 파견해 신라ㆍ당나라ㆍ일본 사이의 국제적 무역을 주도하였다.

당시 신라인의 내왕이 빈번한 산둥반도나 장쑤성(江蘇省) 같은 곳에는 신라인의 거류지가 생겼다. 이를 신라방(新羅坊)이라 불렀고, 이를 관할하기 위한 신라소(新羅所)라는 행정기관까지 설치되었다. 이들은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사원을 세우기도 했는데, 장보고가 산둥성 원덩현(文登縣) 적산촌(赤山村)에 세운 법화원(法花院)이 가장 유명하였다. 한편, 일본과의 교역이 번성해지자, 일본은 812년에 지쿠젠(筑前 : 지금의 九州 福岡縣 북서쪽)에 신라어학생(新羅語學生)이라는 통역생을 두었으며, 대마도(對馬島)에 신라역어(新羅譯語)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기동>

출전 : [디지털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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