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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4-18 (목)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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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고려 시대의 불교 (민족)
불교(우리나라 불교:고려시대의 불교)

세부항목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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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고려시대의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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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우리나라 불교:근대의 불교)
불교(우리나라 불교:현대의 불교)
불교(참고문헌)

삼국을 통일하여 강대한 국가를 형성했던 신라도 그 말기에 이르러서는 정교(正敎)가 어지럽게 되었고, 이러한 혼란기에 후백제와 태봉의 두 나라가 새로이 일어나서 다시 삼국이 병립하게 되었다.

태봉의 왕 궁예(弓裔)는 불교에 대한 믿음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다. 그가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된 뒤에는 팔관회를 비롯한 많은 불교 행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하고 두 아들을 청광보살(靑光菩薩)ㆍ신광보살(神光菩薩)이라고 이름하였을 뿐 아니라 스스로 20여 권의 경을 지어 강설하기도 하였다. 후백제의 왕 견훤(甄萱) 역시 궁예에 못지않은 불교 신자였다.

이와 같이 후삼국은 모두 불교를 숭상하였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의 태조 왕건(王建)도 불교를 숭상하여 국가적으로 크게 보호, 장려하였다. 태조는 불교와의 인연이 매우 깊었던 사람이다. 그는 불교를 크게 신봉하였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출생을 전후해서부터 청년기에 이르기까지 도선(道詵)의 명성을 들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고려를 건설하고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것이 오직 불교의 힘에 의해서라고 믿었다. 이와 같은 태조의 태도와 신념은 결과적으로 고려 전체의 불교를 왕성하게 하고, 또 국가의 종교를 불교로 결정지었던 것이다.

[고려 초기의 불교]

(1) 태조의 봉불(奉佛)

왕위에 오른 태조는 나라의 번영을 위해 더욱 불교 옹호에 힘쓰는 한편, 많은 사탑을 세우고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즉위년인 918년에는 팔관회를 열어 연례 행사로 삼았고, 919년에는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뒤 성내에 법왕사(法王寺)ㆍ자운사(慈雲寺)ㆍ왕륜사(王輪寺)ㆍ내제석원(內帝釋院)ㆍ사나사(舍那寺)ㆍ천선원(天禪院)ㆍ신흥사(新興寺)ㆍ문수사(文殊寺)ㆍ원통사(圓通寺)ㆍ지장사(地藏寺) 등 열 개의 큰 사찰을 세웠으며, 낡고 허물어진 사찰과 탑 등을 다시 고치도록 하였다.

921년에는 오관산에 대흥사(大興寺)를 세우고 고승 이엄(利嚴)을 맞아들여 사사하였고, 922년에는 왕의 옛집을 헐고 광명사(廣明寺)를 창건하였으며, 일월사(日月寺)를 짓기도 하였다. 923년에는 사신이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가져온 오백나한화상(五百羅漢畵像)을 해주의 숭산사(崇山寺)에 안치하였고, 924년에는 외제석원(外帝釋院)ㆍ구요당(九耀堂)ㆍ신중원(神衆院)ㆍ흥국사(興國寺) 등을 창건하였으며, 927년에는 지묘사(智妙寺)를 세웠다.

928년에는 중국에 갔던 홍경(洪慶)이 돌아오면서 대장경(大藏經) 일부를 싣고 예성강에 이르렀을 때 친히 나아가서 맞이하여 제석원에 안치하였으며, 929년에는 인도의 삼장법사인 마후라(摩憂羅)가 왔을 때도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여 구산사(龜山寺)에 있게 하였다. 930년에는 안화선원(安和禪院)을 세워 선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938년에는 인도 마가다국의 대법륜보리사(大法輪菩提寺)의 밀교 계통 승려 홍범(弘梵)이 ≪갈마단경 珏磨壇經≫을 가지고 고려로 옴으로써 고려 밀교 의식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940년에는 천호산에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고 낙성화엄법회(落成華嚴法會)를 열었을 때 왕이 친히 소문(疏文)을 지었을 뿐 아니라, 낡은 신흥사(新興寺)를 수리하고 무차대회(無遮大會)를 개설하여 연례적 행사로 삼게 하였으며, 제5왕자를 출가시켰다.

943년 태조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친히 십조(十條)의 훈요(訓要)를 지어 다음 왕들의 본보기가 되게 하였는데, 제1조에 불법을 신봉하고 불사를 일으킬 것을 강조하였고, 제2조에는 도선이 정한 곳 이외에는 함부로 사찰을 세우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와 같이 고려 왕조는 집권 초기부터 불교를 중시하여 외면상 불교 국가를 형성하였고, 더할 수 없는 불교 전성 시대를 이룩하게 되었지만, 고려인들이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적 신앙과 지리 도참 신앙 쪽으로 치우치게 된 것도 이미 태조 때부터 비롯된 것이다.

또한, 태조는 일찍부터 경유(慶猷)와 충담(忠湛) 등을 왕사로 삼고 현휘(玄暉)를 국사로 삼았으며, 이엄ㆍ여엄ㆍ윤다(允多)ㆍ경보(慶甫)ㆍ희랑(希郎) 등 많은 고승들을 우대하였다. 또 그는 신라가 9층탑을 세워 삼국을 통일한 옛일을 본받아서 개성에는 7층탑, 평양에 9층탑을 세워 통일의 대업을 이루고자 하였고, 무려 500개에 달하는 사찰과 총림(叢林)ㆍ선원(禪院)ㆍ불상ㆍ탑 등을 3,500여 개나 세웠다.

태조 때의 선승 중 이엄은 태조의 부름을 받고 사나내원으로 나와 왕사가 되었고, 경보는 고려에 조동종을 전하였으며, 긍양은 924년에 귀국하여 태조ㆍ혜종ㆍ정종ㆍ광종 등 4대에 걸친 왕의 자문에 응하였다. 또한 현휘는 924년에 국사가 되었고, 여엄은 역시 조동종의 선풍을 일으킨 승려였으며, 찬유는 경주를 중심으로 선림(禪林)을 일으켰는데 광종으로부터 국사가 될 것을 종용받기도 하였다. 동리산파 출신인 윤다는 태조의 빈례(賓禮)를 받았고, 충담은 당나라에서 율(律)을 공부한 뒤 귀국하여 왕의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태조 때의 불교는 왕 자신의 열렬한 불교 존숭에 따라 크게 성황을 이루었으며, 특히 선문의 팽창은 두드러진 특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라 말부터 일기 시작한 선종 계통의 많은 선승들은 태조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고려의 지배 세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크게 활동하였다.

그러나 태조는 당시의 새로운 불교의 한 계통인 선종에만 유의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 불교인 교종에도 관심을 기울여 불교계의 조화를 도모하였다. 전통적 불교 의식의 부활이나, 교종사원의 개축ㆍ건립 등이 그것이었다. 그러나 전통 불교인 교종과 혁신 불교인 선종의 대립은 종식될 수 없었고, 그 사상적 과제를 해결하게 된 시기는 제4대 광종 때에 이르러서였다.

(2) 태조 이후의 불교

태조의 숭불호법(崇佛護法)의 정신은 그 뒤를 이은 모든 왕들에게 면면히 계승되었다. 제2대 혜종은 재위기간이 2년밖에 되지 않아 이렇다 할 만한 업적은 보이지 않지만, 현휘(玄暉)ㆍ절중(折中) 등 많은 승려들의 탑이 이때에 세워졌다. 제3대 정종은 선왕인 태조가 숭불하던 것을 전승하여 불교를 더욱 발전시켰다.

정종은 10여 리나 떨어져 있는 개국사로 친히 걸어가서 불사리(佛舍利)를 안치하기도 하고, 곡식 7만 섬을 여러 사찰에 헌납하기도 하였으며,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여 불경을 공부하도록 권장하였다. 불명경보와 광학보는 현재의 장학재단과 같은 것으로서, 그 기금은 나라에서 마련하고 기구와 운영은 각기 큰 사찰에 일임하여 불교학자를 길러 내도록 하였다.

제4대 광종은 대보은사(大報恩寺)를 궁궐 남쪽에 세우고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태조와 그의 왕비인 유씨(劉氏)의 원당(願堂)으로 삼았다. 또한 왕비 유씨의 복을 빌기 위하여 숭선사(崇善寺)를 새로 짓기도 하였다.

958년에는 쌍기(雙冀)의 건의에 따라 과거를 채택하였다. 이에 준하여 승과(僧科)를 새로 두어 대덕(大德)ㆍ대사(大師)ㆍ중대사(重大師)ㆍ삼중대사(三重大師)ㆍ선사(禪師)ㆍ대선사(大禪師) 등의 선종법계(禪宗法階)와 대덕ㆍ대사ㆍ중대사ㆍ삼중대사ㆍ수좌(首座)ㆍ승통(僧統)의 교종 법계도 만들었다. 승려의 국가 고시 제도인 승과에는 종선(宗選)과 대선(大選)이 있었다.

종선은 총림선(叢林選)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각 종파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여기서 합격하면 대선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일종의 예비고사였다. 국가에서 실시하는 본고사 대선은 크게 선종선(禪宗選)과 교종선(敎宗選)으로 나누어졌는데, 선종선은 주로 광명사(廣明寺)에서, 교종선은 주로 왕륜사(王輪寺)에서 실시되었다. 이 승과는 고려 말까지 내려왔고, 조선 시대에는 중기에만 실시되었다.

960년에는 오월왕 전숙(錢瞞)이 사신을 보내어 천태론소(天台論疏)의 교전과 그 밖의 불전을 구하였다. 이에 제관(諦觀)이 천태 관계 문헌들을 가지고 송나라에 가서 의적(義寂)을 만나 중국천태종을 다시 일으키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함으로써 고려의 문화적 위신을 크게 떨쳤다. 그리고 제관은 ≪천태사교의 天台四敎儀≫를 저술하여 중국승려들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또, 963년에는 귀법사(歸法寺)를 세우고 균여(均如)로 하여금 머물게 하였고, 일종의 구급 기관으로서 현재의 재해 대책 본부와 같은 상설 기관인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였다.

968년(광종 19)에는 국사ㆍ왕사의 이사제도(二師制度)가 시작되었다. 광종은 홍화사(弘化寺)ㆍ삼귀사(三歸寺)ㆍ유암사(遊巖寺) 등의 절을 창건한 뒤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고, 탄문(坦文)을 왕사로 삼았으며 974년에 혜거가 죽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광종은 서로 싸우고 있던 각 종파의 정리에 노력하던 중, 특히 당시 불교계의 가장 큰 과제였던 선교의 융합에 유의하였다.

그 통합의 사상 체계로서 교종의 입장에서 선종을 포섭하는 천태종과 선종의 입장에서 교종을 흡수하고 유학사상이나 노장사상까지도 통합하는 사상체계인 법안종(法眼宗)의 도입에 크게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기풍 아래, 천태종에서는 제관과 중국천태종의 16대조가 되어 중국천태종의 부활에 크게 기여한 고려승려 의통(義通) 등이 배출되었다. 법안종에서는 지종(智宗) 등 36인이 중국에 파견되는 등 크게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광종의 사망에 이은 개혁의 중단으로 말미암아 일련의 통합운동은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광종 이후에는 다시 보수적인 불교가 지배적인 위치에 오르게 되었지만, 광종의 선교통합운동은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가장 높이 평가할 만한 정책 중 하나이다. 이는 위로는 원효의 통불교운동(通佛敎運動)에 이어지고 아래로는 의천과 지눌의 불교통합운동에 연결된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 것이다.

제6대 성종은 불교사원 세력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하여 집을 버리고 사원으로 만드는 것을 금하였으며, 팔관회와 연등회도 폐지시켰다. 그러나 988년에는 정월과 5월과 9월의 삼장월(三長月)에 도살을 금하였을 뿐 아니라, 991년에는 승려 36명을 송나라에 보내어 유학하게 하였으며,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들여오는 등의 치적을 남긴 것으로 보아 불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화엄(華嚴)에 조예가 깊었던 정토사의 탄문(坦文)을 스승으로 모시기도 하였다.

제7대 목종은 또다시 불사(佛事)를 크게 일으켜 진관사(津寬寺)ㆍ숭교사(崇敎寺)ㆍ시왕사(十王寺) 등의 원찰(願刹)을 창건하였다. 제8대 현종은 성종에 의하여 폐지되었던 연등회와 팔관회를 다시 부활시켰다. 그리고 거란의 침입으로 왕이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였으므로 송악은 거란병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때에 현종이 신하들과 함께 불력(佛力)을 빌려 적을 물리치고자 대장경판을 각인(刻印)하여 부인사(符仁寺)에 보관하였다.

초조대장경이라고 불리는 50축(軸)의 경문이 조각되었고, 10만 송(頌)의 거란장경(契丹藏經)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의천(義天)은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계획은 이미 성종 때에 송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관본대장경(官本大藏經)을 가져와 고유의 남북이장(南北二藏)과 거란장(契丹藏)을 교합(校合)함으로써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밖에도 현종 때에는 많은 불사가 이루어졌다. 경주 황룡사의 탑을 수리하고, 중광사(重光寺)ㆍ대자은현화사(大慈恩玄化寺)ㆍ봉선홍경사(奉先弘慶寺)ㆍ혜일중광사(惠日重光寺) 등을 창건하였다. 또 궁중에서는 ≪인왕반야경≫을 자주 강설하였으며, 1019년에는 3,200여 명의 도승(度僧)과 함께 10만여 명을 반승(飯僧)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이 시기에는 승려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식을 공양하는 반승이 연례 행사로 베풀어졌다.

또한 역대 왕들은 자주 보살계(菩薩戒)를 받았으며, 왕자 넷이 있으면 그 중 하나를 출가하도록 하여 더욱 불교를 숭상하였다. 백좌도량(百座道場)ㆍ금강경도량(金剛經道場)ㆍ소재도량(消災道場)ㆍ천제석도량(天帝釋道場)ㆍ마리지천도량(摩利支天道場)ㆍ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등을 여러 사찰에 개설한 것은 모두가 당시 외적을 물리치려는 호국적ㆍ주술적 신앙심에서 말미암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불교 행사와 아울러 대장경의 간행 및 많은 사찰과 탑의 건립 등도 이러한 국난을 극복하려는 호국적인 신앙심과 직결되는 것이다.

1043년(정종 9)에는 굉확선사(宏廓禪師)가 안심사(安心寺)의 동남쪽에 24개의 대사찰을 세우고 3,000여 명의 승려를 이끌고 선문을 크게 진흥하였다. 또 경행(經行)이라는 의식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개경의 거리를 세 갈래로 나누어서 ≪반야경≫을 메고 가면 법복을 입은 승려들이 보행독송(步行讀誦)하고, 그 뒤를 감압관(監押官)과 백성들이 따랐다. 또 왕의 생일을 맞이하면 전국의 각 사찰에서는 기복도량(祈福道場)을 개설하였다.

윤경회(輪經會)라는 모임도 자주 있었는데, 이는 때때로 관리들이 민폐를 끼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귀족문화의 융성과 아울러 귀족불교로서 크게 번성한 불교계에서는 점차로 사치와 타락의 기운이 일어나게 되어 불교의 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가게 되었다.

문종 10년(1056)에 내린 교서(敎書)에는 부역을 면하기 위한 무리들이 승려가 되어 재화를 모으는 데 급급하고, 밭 갈고 가축을 기르며 장사를 일삼을 뿐 아니라 사원에서 파와 마늘을 다지거나 술냄새를 풍기며, 승려의 속인 복장, 여염집 출입, 백성들과의 싸움 등을 지적하고 있어 그 당시 불교계의 일부가 얼마나 부패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불교의 모순은 일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의 유학자들도 사상적인 기반이 불교에 있었기 때문에 불교사상 자체보다는 사원세력의 부패를 지적하는 데 그치고 있다. 최충(崔食)을 비롯한 이름난 유학자 12명도 용흥사(龍興寺)ㆍ귀법사(歸法寺) 두 절에서 면학하여 널리 이름을 떨쳤었다. 또한 문종 때의 국사 정현(鼎賢)은 유가밀교(瑜伽密敎)를 통해 신이(神異)를 나타낸 승려로서 ≪금고경 金鼓經≫을 강하여 비오기를 빌기도 하였다.

선종ㆍ헌종ㆍ숙종 때의 불교는 의천(義天)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진다. 송나라에서 천태와 화엄학 등을 공부하고 1086년에 귀국하여 흥왕사에 머물게 되었던 의천은 흥왕사 내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여 나라 안에 널리 흩어져 있던 고서(古書)를 수집하고, 송ㆍ요ㆍ일본으로부터 불서(佛書)를 구입하여 1,010부, 4,740여 권의 속장경(續藏經)을 간행하였다.

그 뒤 조계산 선암사(仙巖寺)를 중흥하고 다시 홍원사(洪圓寺)ㆍ해인사 등을 거쳐 그를 위해 창건한 국청사(國淸寺)로 와서, 1097년(숙종 2) 처음으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강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1099년의 식년(式年)에 제1회 천태종 승선(僧選)을 가졌고, 1101년에는 국가에서 주관하는 천태종 대선(大選)을 행함으로써 의천이 개창한 천태종은 명실상부한 하나의 종파로서 공인되었다.

많은 제자 중 가장 뛰어났던 계응(戒膺)ㆍ혜소(惠素)ㆍ교웅(敎雄) 등은 천태종을 계승하여 그 발전에 힘을 기울였다. 이렇듯 의천이 활발한 교화를 펴고 있는 동안에도 고려의 불교는 좀처럼 정화되지 못하고 있었으며, 일부 승려들이 민심을 현혹하여 미신적 경향은 계속 증대되고 있었다. 광기(光器)는 음양서(陰陽書)를 위조하였다가 발각되어 형벌에 처하여졌고, 남녀 승려가 한데 어울려 만불회(萬佛會)라는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는 불사를 빙자한 유흥놀이였다.

또한 각진(覺眞)은 음양(陰陽)을 망발하며 백성들을 현혹시키다가 유배되었으며, 반승을 비롯한 숱한 기복불교적인 행사는 끊이지 않았다. 다만 여진족의 침략이 있었을 때 승려의 무리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이 조직되어 여진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으나, 별다른 효과는 거두지 못하였다. 예종 때에는 덕창(德昌)ㆍ담진(曇眞)ㆍ낙진(樂眞)ㆍ덕연(德緣) 등의 고승이 있었다. 담진은 왕사가 되어 선을 설하여 비오기를 빌었고, 또 빈번히 경행(經行)을 하였다.

궁중에서는 기복불교로 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멀리 떨어진 지방에는 뛰어난 선사(禪師)가 있었다. 벼슬을 버리고 뜻하는 바 있어 ≪설봉어록 雪峯語錄≫과 ≪능엄경 楞嚴經≫을 가지고 이름있는 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혼자 수도하여 불도를 깨달은 이자현(李資玄)은 고려시대 선학독립(禪學獨立)의 제일인자로서 지눌(知訥)에 앞선 선구자라고도 할 수 있다.

제17대 인종 때에는 전후 반승이 13회나 열렸었는데, 요망한 무리들이 이 틈을 타서 간악한 짓을 할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자는 묘청(妙淸)으로서 매우 괴이한 팔성당(八聖堂)을 궁중에 두게 하고, 서경천도를 주장하다가 1125년에는 서경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고려불교를 순수하게 이끌어갔던 학일(學一)ㆍ탄연(坦然) 등의 고승들은 있었다. 학일은 조사선(祖師禪)을 제창한 승려로서 예종의 지극한 존경을 받다가 국왕의 곁을 떠나 운문사(雲門寺)에서 많은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탄연은 인종 때에 왕사가 되고 예종 즉위 뒤에도 두터운 예우를 받았으나 70세에 단속사(斷俗寺)로 은퇴하여 종풍(宗風)을 크게 떨쳤던 선승이었다. 특히 그의 서법(書法)은 정묘하여 고려의 명필로서도 유명하였다.

이러한 선사들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불교는 계속 타락상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특히 의종 이후 법문(法門)의 문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으나, 표면상으로는 경건한 불사들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왕은 1147년에 왕자의 출생을 기원하여 영통사에서 50일 동안 ≪화엄경≫을 강설하였고, 금은자화엄경 2부를 사경(寫經)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복자내시(卜者內侍) 영의(榮儀)가 국가기업의 흥망과 임금의 수명은 오직 기도를 부지런히 하는 데 달려 있다고 하여 왕을 미혹시켰고, 오랫동안 생명을 유지하려면 제석천과 관음보살을 섬겨야 한다고 해서 두 보살상을 그려 중앙과 지방의 사원에 널리 나누어 보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법회를 축성법회(祝聖法會)라고 하였다. 또 안화사(安和寺)에 제석수보살(帝釋須菩薩)을 새겨놓고 승려들을 모아 밤낮으로 쉬지 않고 보살의 명호를 외우도록 하고는 이를 연성법석(連聲法席)이라고 불렀다.

영의는 이와 같이 주술을 일삼으면서도 밤을 새우며 절하는 등 다른 승려로 하여금 천만일을 한계로 고행을 계속하도록 하였다. 왕이 주술적인 불사만을 좋아하였으므로 궁중의 뜰은 늘 승려들로 가득하였고, 대신들은 물론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절과 탑을 다투어 지었다. 사찰은 더욱더 화려하게 꾸며졌고 왕은 자주 사찰에서 대신들과 연회를 베풀었으며, 승려들도 이에 참여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이와 같은 일로 국고가 급격히 줄어들고 무신들이 차별을 받게 되자, 이의방(李義方) 등이 주동이 되어 무신의 난이 일어났으며, 왕은 거제로 쫓겨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무신이 집권한 명종 때에도 나라의 사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권신(權臣) 이의방 등은 권력을 남용하여 문신을 살육하였고, 살육을 간하는 관리들까지 욕보이는 등 그 횡포는 말할 수 없었으며, 국왕은 반승을 되풀이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1170년(의종 24)에는 이고(李高)가 승려 수혜(修惠)ㆍ현소(玄素) 등과 모의하여 반기를 기도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이의방에 의해 살해되었다.

1174년(명종 4)에는 귀법사의 승려 100여 명이 성문 북쪽으로 쳐들어가서 이의방 일파를 타도하려 하였으나, 사병까지 거느리고 있는 그에 의해서 수십 명이 죽음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에 중광사ㆍ홍호사ㆍ귀법사ㆍ홍화사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개경의 동문으로 모였으나, 문이 닫혀서 들어가지 못하게 되자 성밖의 민가를 불태우고 들어가서 이의방 형제를 죽이려 하였고, 이에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러한 일이 있은 뒤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금지하였으며, 개성 부근의 사찰을 약탈하고 불태우기까지 하는 불상사를 초래하였다. 마침내 이의방 형제는 승도들의 손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고, 그들의 세력을 타도한 승려 종참(宗蓚)과 정균(鄭筠)의 횡포가 다시 시작되었으나 그들 역시 반정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였다.

[고려 중기의 불교]

혼탁과 광란의 분위기를 정화하고, 바르고 참된 불교의 뜻을 선양하기 위해 의연히 일어난 뜻 있는 승려가 이 시대에는 많이 나타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승려는 지눌(知訥)이다. 그는 수도시절에 ≪육조단경 六祖壇經≫ㆍ≪화엄론≫ㆍ≪대혜보각선사어록 大慧普覺禪師語錄≫을 읽고 세 번을 크게 깨친 뒤, 송광산 수선사(修禪社)를 중심으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결성하여 새로운 선풍을 크게 떨쳤다.

그는 문도를 지도함에 있어 ≪금강경≫ㆍ≪육조단경≫ㆍ≪화엄경≫으로 강론하였고,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ㆍ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ㆍ경절문(經截門) 등의 3문을 열어 그들을 가르쳤는데, 이 전통은 현재까지 한국불교 선종의 근본이 되고 있다. 지눌은 성품이 근엄하였으나 자비로웠고, 불교의 율(律)을 엄격히 따랐으나 개차(開遮:열고 닫음)의 여유를 남겼으며, 참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하였으나 그것이 둘이 아님을 잊어버리지 않았다.

또한 선종의 승려로서 평생을 참선에 몰두하였지만 틈틈이 불경 읽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부처님 뜻을 전하는 것이 선(禪)이요 부처님 말씀을 깨닫는 것이 교(敎)라고 믿었기 때문에 선과 교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선종이다 교종이다 하고 싸우는 것은 부처님의 참뜻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설파하면서, 이 무의미한 논쟁을 매듭짓기 위해 선교합일(禪敎合一)을 주창하였고 정혜쌍수(定慧雙修)를 구현한 실천가였다.

이러한 주장과 실천은 신라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나 무애(無碍)한 행동, 대각국사 의천의 교관병수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지눌의 출현은 부패 타락한 귀족불교의 탁류를 적어도 나라 안 심산유곡까지는 미치지 못하게 하였고, 우리 나라 불교의 청신한 명맥을 유지하는 데 중대한 계기가 되었다. 그의 제자인 요세(了世)ㆍ승형(承逈)ㆍ혜심(慧諶) 등은 지눌이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빛을 보지 못하였을 고려 중기의 고승들이다. 이들은 조계산 수선사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사상사에 큰 이정표를 세운 사상가들이다.

이들 중 요세는 참회와 백련사결사(白蓮社結社)로 이름을 떨쳤다. 그는 소년시절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36세에 지눌의 제자가 되었으나 끝내 천태종풍을 버리지 못하였다. 참의(懺儀)를 닦음에 있어 육신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도 53불(佛)에게 예배하기를 12번씩 하였으며, 남해산(南海山) 기슭에 80여 칸의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짓고 법화삼매(法華三昧)를 닦았다. 오로지 산 속에만 머물러 50년 동안 한번도 서울의 속진(俗塵)을 밟은 일이 없었다고 한다. 또 하루 일과로 그는 ≪법화경≫ 1부와 아미타불 1만 번을 염불하였다.

그러나 그가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던 시기에 중앙불교계에는 말할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1211년(희종 7)에는 최충헌(崔忠獻)이 무인정치로 왕을 폐립하고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여 권세를 남용하자 승도들은 이에 맞서 싸우는 등 혼란이 거듭되었고, 중국대륙에서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하고 있던 몽고족의 침입에 대비해서 격퇴를 기원하는 호국적 불사가 빈번하게 거행되었다. 신종은 거의 달마다 각종 도량(道場)을 열고 멸적(滅賊)을 기원하는 것을 조정의 일과로 삼았고, 희종도 소재도량(消災道場)ㆍ인왕도량(仁王道場) 등을 1년에 몇 차례씩 개설하였으며, 강종도 연생도량(延生道場)ㆍ성변소재도량(星變消災道場) 등을 거의 매월 개설하여서 적군의 격퇴를 기원하였다.

제23대 고종 재위 46년 동안에는 거란과 몽고의 침략으로 호국적인 기복불사가 더욱 성행하였다. 이 시기에도 각종의 도량을 개설하여 보살계를 받거나 담론법석(談論法席)ㆍ진병법석(鎭兵法席) 등의 모임을 가지고 연등회와 팔관회 등의 행사를 아울러 행하였는데, 그 모두가 호국적 불교에서 나온 의식이었다. 또한 앞서 현종 때 각간(刻刊)되었던 대장경판(大藏經版)이 1232년 몽고병에 의하여 소실되자, 고종은 1237년부터 1251년까지 16년 동안에 걸쳐 각장(刻藏)을 계속하여 재조대장경을 완성하였다.

현종 때에 대장경을 판각하여 외적을 물리쳤던 사실을 본받아 적병을 물리치고자 하였던 것이며, 국가적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모든 불보살(佛菩薩)의 가호를 빌기 위함이었다. 이 대장경은 우리 민족이 남긴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시대의 문호로 알려진 이규보(李奎報)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는 ≪능엄경≫ㆍ≪능가경 楞伽經≫ 등의 대승경전을 즐겨 읽었으며, 혜문(惠文)ㆍ각월(覺月) 등의 승려와 특별한 교우를 맺어 선도(禪道)에도 많은 흥미를 보였다.

또 승형과 혜심은 지눌의 문하에서 심요(心要)를 체득한 고승들로서 승형은 능엄선(楞嚴禪)으로 경기지방에서 현풍(玄風)을 떨쳤다. 승형은 지눌의 문하에서 공부한 뒤 청평산에 있는 이자현의 유적을 찾아 그의 〈문수사기 文殊寺記〉를 보고 ≪능엄경≫이 깨달음의 요로(要路)임을 느끼고 그곳에 머물면서 ≪능엄경≫을 공부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능엄경≫이 선가의 필수교과로서 존경받게 된 것은 승형에 의한 것이다.

혜심은 지눌이 가장 사랑한 수제자로서 지눌이 입적하자 그 자리를 이어 수선사 제2세가 되었으며, 크게 종풍을 진작하였다. 그는 고칙(古則) 1,125수와 여러 조사의 염송을 모아 ≪선문염송 禪門拈頌≫을 편찬하였다. 혜심은 이 책을 적극 활용하여 후진육성에 힘썼으며, 이로 인하여 고려불교는 역사적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 책은 교외별전(敎外別傳)의 내용을 고려인의 입장에서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높이 평가되며, 조계산문에서 대대로 중요한 교과서로 삼았을 뿐 아니라, 지금도 한국불교의 소의경전으로 채택되고 있다.

지눌과 혜심 이후 고려불교는 충렬왕대까지 수선사가 중심이 된 조계종에 의해서 다소 안정되어 있었다. 혜심의 뒤를 이은 수선사 제3세는 청진국사(淸眞國師)이지만 그의 생애는 전혀 전하지 않는다. 제4세 혼원(混元)은 1252년부터 5년 동안 수선사에 머물렀고, 제5세 천영(天英)은 고종ㆍ원종ㆍ충렬왕의 3대에 걸쳐 활동하였으며, 제6세 충지(食止)는 1286년부터 7년 동안 수선사 사주(社主)로 있으면서 지눌의 유궤(遺軌)를 한층 더 빛나게 하였다.

충지 이후 수선사의 법맥을 이은 이로는 제10세 만항(萬恒)의 이름이 알려져 있다. 제7ㆍ8ㆍ9세의 사주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는데, 이는 원나라의 고려 지배기간중 수선사의 활동에 관한 기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것과 함께 생각할 때, 수선사의 위치가 몽고의 분열정책에 의하여 새로 생겨난 다른 많은 결사들과 동등한 계위로 격하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충렬왕 때에 조계산 수선사 이외의 지역에서 활약한 가장 두드러진 승려로 일연(一然)과 혜영(惠永)이 있었다. 일연은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그의 저서 중 ≪삼국유사≫는 우리 나라의 종교사적인 고사들을 주체적인 입장에서 수록하여 후세에 구체적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또한 혜영은 화엄교학을 천명함으로써 높이 평가받고 있을 뿐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그 명승이 널리 알려진 고승이었다.

한편, 고려 왕실의 기복적 미신의 폐풍은 지눌ㆍ혜심 등의 교화를 통해서 일시적으로 저지를 당하는 듯하였으나 선(禪)의 종지가 하근기 중생에게는 어렵다는 점 때문에 다시 기복적 불교가 성행하였다. 또한 지눌의 법맥을 잇는 수선사 중심의 활동이 점차로 그 힘을 잃어갔고, 몽고의 강한 영향권에 속했던 13세기 말∼14세기 초까지의 불교계는 승려도 사찰의 수도 많았고 불사(佛事)도 빈번히 거행되기는 하였으나, 불교의 진면목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었다.

충렬왕 때의 승려들은 형식상 사회적 우대를 받았지만 뇌물을 주고 선사 또는 수좌(首座)가 되는 예가 허다하였으며, 심지어는 승려의 상당수가 취처(娶妻)하는 한심한 상황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충렬왕 때를 기점으로 사(社)라는 이름이 붙은 사찰 중심의 결사(結社)가 많이 생겼다. 이는 수선사와 같이 사찰명인 동시에 그 사찰을 중심으로 수행을 위해 모이는 신도단체의 이름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았다.

[고려 후기의 불교]

몽고족의 지배하에서 자주적인 발전역량을 상실했던 고려의 불교계는 충렬왕 이후 타락과 분열ㆍ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다행히 충렬왕 때까지는 지눌로부터 시작된 건전한 불교기풍이 그의 제자들의 직접ㆍ간접적인 영향 아래 하나의 일관된 맥락으로 이어졌지만, 제26대 충선왕으로부터 제30대 충정왕 때까지의 고려는 철저한 이민족의 압제 밑에서 민족문화 불모의 터전이 되고 말았다.

이 시대에도 고승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과 기력을 잃은 지배자들은 이미 나라와 백성을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멸망이 임박한 원나라의 쇠잔한 기력에 간신히 이끌려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충선왕 때에는 만승회(萬僧會) 등의 기복행사 위주의 신앙이 성행하였고, 충혜왕은 방종하기 짝이 없었으며 술사(術師)들의 말을 믿어 실덕(失德)이 심한 무자격자였다. 충목왕과 충정왕 때에는 왕의 위엄도 사상도 볼만한 것이 없는 시대였다.

이 시대의 고승으로는 충숙왕 때에 왕사와 국통을 역임한 정오(丁午)와 왕사 혼구(混丘), 국통 무외(無畏), 그리고 조계산 수선사 제10세 만항(萬恒)과 중국 원제(元帝)의 총애를 받은 의려(義旅), 그 밖의 왕사 조형(祖衡)ㆍ조륜(祖倫)ㆍ뇌묵(雷默)과 인도승인 지공(指空) 등이 있었다.

이 중 혼구는 충렬왕ㆍ충선왕ㆍ충숙왕의 3대에 걸쳐서 존경을 받았던 고승으로서 성품이 단정하고 엄하였으며 천성이 자상하여 그 친척이 모두 소미타(小彌陀)라고 불렀다 한다.

1326년(충숙왕 13) 3월에 원나라를 거쳐서 고려로 들어온 인도승 지공은 개경과 금강산 등에 머물면서 고려불교계에 새로운 기풍을 불러일으켰다. 자안(子安)은 법주사(法住寺)ㆍ국녕사(國寧寺)ㆍ민천사(旻天寺) 등에 있으면서 유식학을 크게 폈을 뿐 아니라 ≪심지관경소기 心地觀經疏記≫ 등을 지어 많은 강사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경론장소 經論章疏≫ 92권을 펴내기도 하였다.

또 ≪석가여래행적송 釋迦如來行蹟頌≫ 776구(句)를 지어 각 구절마다 주해를 붙인 뇌묵(雷默)은 오로지 암자에만 머물러 ≪법화경≫을 송하며 아미타불을 염하고, 불경을 서사(書寫)하는 것을 일과로 하여 20년을 보냈다고 한다. 공민왕대에는 복구(復丘)ㆍ보우(普愚)ㆍ신돈(辛旽)ㆍ혜근(慧勤) 등이 왕사로 임명되어 왕을 보필하며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는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들 중 신돈은 수도승 또는 학승으로보다는 공민왕의 정치개혁을 도운 정치가였으므로 다른 승려들과는 그 성격이 다르나, 나머지 세 고승들은 고려불교의 끝을 장식한 사상가요 수도승으로서, 특히 배불정책 밑에서 조선불교의 맥락을 잇게 하는 초석이 된 점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들이다. 조계산 천영의 제자인 복구는 21세에 승과(僧科)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뒤 오로지 수도에 힘쓰면서 명리를 바라지 않았지만, 공민왕의 즉위와 함께 왕사로 책봉되어 적지않은 감화를 왕에게 미쳤다.

보우는 임제종(臨濟宗)을 도입하여 선문(禪門)의 새로운 조류를 형성하였고 고려 말의 불교계에 생기를 불어넣은 점에서 한국불교사상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고승이다. 보우는 1348년에 귀국하여 여러 차례 공민왕의 부름에 불응하다가 1356년에 왕사가 되어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면서 왕도의 누적된 폐단, 정치의 부패, 불교계의 타락 등에 대하여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을 한양으로 옮겨 인심을 일변하고 선문구산을 일문(一門)으로 통합하고 종파의 이름을 ‘도존(道存)’이라 할 것을 건의하는 등 정교(政敎)의 혁신을 도모하기를 주장하였으나, 그 뜻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가 지은 〈태고암가 太古菴歌〉ㆍ≪태고집 太古集≫ 등에는 그의 깊은 경지와 구세(救世)의 큰 뜻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보우와 동시대의 사람으로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고려 승려로는 경한(景閑)과 나옹이 있다. 경한은 무심선(無心禪)을 제창한 보기 드문 고승으로서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이라고 알려지는 ≪불조직지심체요절 佛祖直指心體要節≫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나옹은 일찍부터 많은 이적을 남겼고 1371년에는 왕사가 되었다. 우주를 각계(覺界)로 삼고 만유를 불신(佛身)으로 보며, 천지일월산천초목(天地日月山川草木)을 법(法)과 심(心)으로 풀이하는 것이 지눌을 거쳐 원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적 맥락을 이루고 있으며, 그의 염불관(念佛觀)ㆍ정토관(淨土觀)도 역시 그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이들 고승들 중 보우의 밑에서는 혼수(混修)ㆍ찬영(粲英) 등이 나왔으며, 나옹의 밑에서는 자초(自超)ㆍ축원(竺源)ㆍ법장(法藏) 등의 고승들이 나와서 조선 초기 불교의 명맥을 잇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배불(排佛)의 움직임이 크게 나타나고 있었다. 1352년(공민왕 1)에 이색(李穡)은 비교적 온건한 어조이기는 하였으나 왕에게 불교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중세 이후 불교도의 수가 더욱 늘어났으나 오교양종(五敎兩宗)은 명리를 구하는 소굴이 되었으며, 큰 냇가 깊은 산골에 절 없는 곳이 없을 정도가 되었으니 나라의 백성 중 놀고 먹는 자가 많아져서 지식 있는 사람들이 모두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그는 이제현(李齊賢)과 더불어 불교에 조예가 깊은 불교신자로 널리 알려져 있어 극단적인 배불론자가 될 수는 없는 사람이었지만, 다소의 몰지각한 승려들과 왕실의 지나친 맹신 현상에 대해서는 묵과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우도 공민왕의 왕사가 되었을 때 선문 구산의 폐를 말한 것은 이색이 지적한 사실과 관계가 없지 않은 것이었고 이와 거의 같은 시기의 일이었다.

1361년 어사대에서는 승려의 무리가 과부나 외로운 여자를 꾀어 머리를 깎아 비구니를 만들고는 함께 거처하면서 음욕을 함부로 하고 불사(佛事)를 권해 풍속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보고를 한 일이 있다. 이로부터 몇 해 뒤에 배불론자인 정도전(鄭道傳)은 이론과 실제 두 가지 면에서 대대적인 불교 배척 운동을 펴기에 이르렀다. 그의 불교 배척 논의는 상당히 일반적인 편견에 좌우된 느낌이 있어, 전적으로 상대방을 납득시킬 만한 것은 못 되었지만 부분적으로는 타당하였다. 특히 당시의 불교 이해 및 실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다.

공민왕 말기에는 '태조구세지상(太祖九世之像)'이라는 것을 만들어 태조의 전신(前身)을 아홉 가지로 말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바로 전에는 어느 절의 소였고 죽은 뒤에는 보살이 되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하여 김자수(金子粹) 등에 의하여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 불교도들의 윤리적 타락에 관한 비판은 전법판서(典法判書) 조인옥(趙仁沃)에 의해서도 신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그 주된 내용은 욕심을 적게 해야 하는 교(敎)를 믿는 자들이 금욕(金欲)ㆍ정욕(情欲)을 더욱 밝히고 있다는 데에 집중되고 있다.

<이기영>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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