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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19:05
분 류 사전2
ㆍ조회: 5050      
[근대/현대] 근현대의 정치 (민족)
정치(근ㆍ현대의 정치)

관련항목 : 외교, 정치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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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고대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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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근ㆍ현대의 정치)
정치(참고문헌)

한국 근ㆍ현대정치사를 종합적이고도 체계적으로 인식하기 위하여 여기에서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먼저 거론하기로 한다. 한 가지는 인식방법론으로 일종의 절충적인 방법으로서 사적 구조론의 논리를 전개시키려고 한다.

사적 구조론의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더 이상 논의하지 않겠지만, 다만 베버(Weber,M.)적인 인식과 마르크스주의적인 성격을 종합하여 보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 한 가지는 한국 근ㆍ현대정치사의 100여 년을 시기별로 구분하여 살펴보려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여기에서는 경제사회적 성격과 정치체제적 변화를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단계화하기로 한다.

제1기:아시아적 전제통치의 몰락(조선 후기), 제2기:제국주의 영향(대외적 개항시기), 제3기:식민지 침탈기(일본의 식민지통치체제기), 제4기:분단체제기(광복 이후)이다.

이와 같은 시기 구분은 단지 인식적인 편의만을 전제로 하기보다는 각 시기는 그 시기만의 특징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다른 전제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먼저 이들 각 시기의 사회 경제적 성격과 경제적 사회관계로서의 계급구성문제, 그리고 정치체제에서의 연관문제를 함께 고찰하기로 한다.

1. 아시아적 전제통치의 몰락

조선왕조의 후기에 접어들면 새로운 정치사회적 변혁을 예고하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러한 조짐이 등장하게 된 것은 대체로 1800년대 초기부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짐이 나타나기 이전의 시기까지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의 정치사적 특징으로서는 다음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그 하나는 아시아적 전제군주국가적 속성이며, 다른 하나는 일종의 준 가산관료제적 체제였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속성이 서로 결속되어 조선왕조체제의 특이성을 조성하였다고 지적할 수 있다. 먼저 아시아적 전제군주제의 내용에 대해서 살펴보면, 그 중요한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아시아적 전제군주제는 중국과 그 주변 국가의 왕조체제에서 찾아볼 수 있는 통치양식이다.

② 아시아적 전제군주제는 통치구조의 위계성을 체계화하고 있으며, 그 최고정점에 국왕이 자리한다. 국왕의 전제권에 대해서는 어떠한 세력으로부터도 제약을 받지 않는 절대권을 향유한다.

③ 국왕의 전제권을 보장하는 중요한 기관으로 민간인 관료체제, 무력적인 군사체제, 그리고 종교적 이데올로기의 세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④ 국왕의 전제권을 보장하여 주는 이들 세 영역은 힘의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행사를 차단하게 되는 사회적 견제를 제도화하고 있기 때문에, 오직 국왕에 대한 상호 충성경쟁에 치중하게 된다.

⑤ 국왕ㆍ관료ㆍ신민의 3자관계에서 신민은 오직 경제적 가치의 창출과 국왕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⑥ 국왕의 절대권은 국토를 국왕의 개인적 사유지로 규정하며, 관료는 단지 국왕이 분여하는 녹봉으로 경제적인 생활을 유지한다.

한편, 준 가산관료제의 의미는 가산관료제국가의 기본적인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 왕실의 재정과 국가의 재정 사이의 미분리적 현상으로서, 이는 곧 국왕의 경제적 지배권의 절대적 성격을 의미한다.

국가예산과 왕실경비가 미분화되어 있다는 사실은 국왕이 곧 국토의 핵심이며, 국왕을 위한 신민의 존재를 강조하는 것이다. 왕조의 관리는 단지 왕실, 특히 국왕 개인에 충성을 바치는 일종의 가신적 의무관계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의 기본적인 정치구조는 위에서 지적한 두 가지 성격에 의해서 전반적인 윤곽이 파악될 수 있다. 조선왕조체제는 유럽에서 쉽사리 발견될 수 있는 봉건제적 군주와는 기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봉건제적 군주는 봉건영주라는 중요한 국왕 견제적 사회세력에 의한 부단한 도전하에 있었기 때문에, 사회변동의 경제적 안정과는 달리 정치적인 불안정이 쉽사리 조성될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봉건체제하의 군주가 행사하였던 권력의 자기 제약성이나 군주절대권의 견제적 성격을 아시아적 전제군주제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왕조 사회는 바로 이 점에서 다른 사회가 보여주는 변혁적인 정치화의 과정을 스스로 제약받는 한계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왕실의 절대적인 권위는 최소한 몇 가지 제도적 보장에 의하여 강화되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성리학의 군신관계의 정신적 가치체계였다.

국왕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은, 국왕의 무능이나 부도덕까지도 문제시될 수 없는 윤리적 가치체계로 정립되었다. 국왕은 바로 정신세계의 유일적 절대자로서의 현세성을 가지고 있었다.

국왕의 권위와 왕조체제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였던 또 다른 요소는 엄격한 사회신분에 의한 반상제도이다. 세습적인 신분제도는 철저한 위계질서를 강조하였으며,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구속성은 절대적이었다. 피지배계급에 대한 엄격한 통제는 왕실과 양반 지배세력에 대한 복종만을 세습화시켰다.

마지막으로 당시의 국왕과 왕실의 지배체제를 강화시키고 지속시킬 수 있었던 요소로서는 단순반복적인 사회경제제도 때문이었다. 농경사회의 속성은 경작방법의 단순반복에 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왕실과 지배세력의 수요에만 극히 한정적으로 공급의 기능을 담당하였던 상공업은 확대재생산이 사실상 금압되었다. 따라서, 전반적으로 농업생산에서 축적되는 잉여가치는 상업으로의 전환이나 공업에로의 투자와 같은 형태를 보여줄 수 없었다.

극히 단순한 확대재생산이 농업을 일정 영역으로 하여 반복되었기 때문에 쉽사리 퇴적자본으로 소실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의 이와 같은 성격은 최소한 국내적인 사회여건에서는 정체성의 오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정도로, 일종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한 특징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특징은 흔히 식민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정체성의 논리, 즉 후진사회의 속성을 내면화하였다기보다는 발전의 가능성을 억압하였던 지배통치구조의 의미에서 파악되어야 하며, 바로 이 점에서는 발전적 가역성(可逆性:본래의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성향)의 내면적 속성을 무시하는 논리로 이어질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발전적 가역성은 국왕과 지배계급의 억압체제가 부과하는 정체적 안정성에 의해서 정치적 내면으로 관류하게 되었다.

발전적 가역성의 속성은 피지배계급적 차원의 한 요소라면, 지배계급의 정체적 안정성 사이에 격심한 길항관계(拮抗關係:동등한 힘으로 서로 버티는 관계)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왕조 말기 사회의 가장 중요한 시대적 의미는 이처럼 서로 다른 두 갈래의 사회구조적 성격이 조우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말기에는 흔히 지적되고 있는 것처럼 다음 몇 가지의 사실 때문에 피지배계급의 발전적 가역성이 분출될 수밖에 없는 자기한계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지적할 수 있는 요소는 지배계급에의 격심한 대립 갈등관계가 왕실의 위약을 가속화시켰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적 가치체계에 입각하였던 지배체제였기 때문에 호문숭상이 널리 만연되어 있었다.

유자(儒者) 계층의 확장은 사림정치의 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한정된 관직과 녹봉으로는 유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었다. 권세를 장악한 기호파나 도전적 성격을 추구하였던 영남파 사이에는 초기만 하여도 건국의 국가적 위세에 의하여 도전적 성격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반기 이후부터 사림파의 욕구는 거세게 분출되었고, 그것은 결과적으로 관직 점유를 중심으로 하는 사화ㆍ당파 등의 대립현상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점차 왕권을 특정 당파의 보호막으로 이용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통치적 성격은 왕권에 대한 제약으로 이어졌다.

조선왕조의 이러한 성격은 후기로 접어들면서부터 외척의 등장에 의한 이른바 세도정치에 의하여 사실상 왕권의 극소화현상이 나타나고 말았다. 세도정치는 외형상 왕권체제지만 실제 권력의 행사는 특정 가문에 의하여 전단되었다. 이들 가문은 왕실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외척으로 권문세가의 지위를 구축하였다.

이들은 당시 통치의 기본성격이었던 관직점유를 자의적으로 전횡하였다. 조선왕조에서의 관직은 후기에 이르면 일종의 민중수탈체제적 기능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외척의 발호와 삼정의 문란은 왕권을 극도로 약화시켰다. 농민들은 지방의 관아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발전적 가역성은 농민에게 있어서 기존 체제에 대한 격심한 반감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그들의 공격대상은 왕실 그 자체보다는 권문세가와 지방의 관직자였다. 그만큼 당시 농민들의 정치의식의 미분화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외척의 세도정치가 철종 이후 고종에 이르러 대원군의 섭정으로 종식되게 되었다. 대원군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반동적인 왕권강화로 지향하였다.

시대적인 상황이나 국내적인 성격은 정치체제의 변혁을 요청하였지만, 대원군의 통치는 외국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성리학의 화이관(華夷觀)에 의하며 척사위정을 고집하였다. 그 결과 강대국의 제국주의적 침탈에 의하여 과해지고 있었던 영향력을 시기적으로 유예할 수 있었다.

또한, 국내의 농민저항과 천주교 전래, 그리고 동학의 만연에 대해서는 전통적인 금압조처의 강화로 대응하였다. 억압과 통제, 그리고 왕권의 권위확보를 당연한 귀결로 생각하였다. 대원군의 이러한 통치는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왜냐하면, 외척의 발로를 단절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것으로도 일반 농민의 오랫동안의 원성을 해결하여 주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사회개혁이나 창조적인 통치에 의한 농민의 지지가 아니라, 오랜 억압에 대한 농민불만의 대상을 제거함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반사이익을 대원군 통치 초기에서는 확보할 수 있었다.

대원군 통치는 사실상 몇 가지의 문제점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 첫째는 성리학에 대한 존화사상의 상대적인 경시에 의하여(구체적으로 서원철폐와 같은 조처) 유생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다. 이들 유자 계층에 대한 대원군의 홀대는 자연히 조선왕조의 기본적 이데올로기인 성리학에 대한 정통성 부여에 한계를 의미하였다. 전체적으로 유자들의 저항은 그만큼 대원군 통치의 명분적 이념을 훼손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둘째는 대원군 통치는 일반 농민들에게도 점차 기대감을 무산시켰고 새로운 억압 수탈체제의 강화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삼정의 문란에 대신하여 각종의 부역이 강화되었고, 조세도 늘어났으며 농민에 대한 수탈은 오히려 조직적으로 행하여졌기 때문이었다. 농민들의 통치체제에 대한 불만은 자연히 왕조체제의 변혁으로까지 치달리는 속성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셋째는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비단 일본이나 미국 등 해양국가로부터의 심한 반발은 물론이고 청으로부터도 지지를 잃어가게 되었다.

이미 영미국가로부터 한낱 종이 호랑이로 취급받았던 청은 그 위세의 회복을 속방인 조선에서의 영향력 행사로 도모하려 하였다. 청의 이러한 시도는 대원군의 쇄국정책과는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세 가지 사정은, 엄격한 의미에서는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적 정황과 그것에 거역하면서 과거지향적 복고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던 대원군 통치와의 갈등을 필연화하였고, 그것은 결국 대원군의 몰락으로 종결되었다.

2. 제국주의 세력의 침투

대원군을 축출하고 국왕친정을 표면적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 정권을 장악하였던 민비세력(閔妃勢力)은 통치의 기본적 구도를 반(反)대원군적 성격의 강화에 두고 있었다.

대원군 통치의 성격이 왕권의 강화였다면 민비의 통치는 또 다른 세도가문의 발흥이었다. 이러한 성격은 전향적인 개혁이라기보다는 더 한층 과거지향적 복고의 성격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서는 반동적인 것을 넘어 반시대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 당시 이미 만기친제를 주장하면서 권력을 독점적으로 행사하였던 민비 일파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독자적인 세력으로써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내외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내부적으로는 이전의 대원군 세력의 도전은 물론이고, 농민들의 저항은 이미 조직적 성격을 보여주게 되었다. 또한, 외부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조선반도 진출이 가열화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정황에서 당시 고종의 통치는 외적인 강대국의 지원을 받는 것에서 탈출구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탈출구의 구체적인 대상이 바로 청(淸)이었다. 청에 의존하고 있었던 조선왕조의 권력기반은 일본ㆍ영국ㆍ미국 등 강대국의 관점에서는 이미 식민지 전락의 가능성으로 예고되고 있었다. 당시 제국주의적 강대국에게 있어서 조선은 침탈의 대상지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경우는 제국주의 국가로의 등장이 시기적으로 다른 국가에 비하여 늦었기 때문에, 이것을 만회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태평양의 진출에서 찾고 있었다. 미서전쟁(美西戰爭) 이후 필리핀의 영유는 그 방파제적 성격으로서 중국에 대한 문호개방을 요구하면서 조선왕조와의 통상조약의 체결을 시도하였다. 조선에서의 우월한 지위의 점유는 미국으로 하여금 태평양 국가로서의 가장 확실한 보루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영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양으로 남진하고 있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기 위하여 한반도가 가지고 있던 지정학적 가치는 그만큼 중요하였다. 러시아가 태평양으로의 남진의 발진기지로 한반도를 목표로 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정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이른바 후발 근대국가로의 등장을 조선에의 진출로 국제사회에 실증할 필요가 절실하였다. 이처럼 당시의 조선은 강대국의 식민지화의 일차적인 대상지였다.

이들 국가는 때로는 회유로, 때로는 통상을 조건으로, 그리고 때로는 무력적 위협으로 문호개방을 요구하였다. 강대국의 이러한 도전에 직면하였던 조선왕조는 사실상 아무런 구체적인 대응책이 없었다.

실제로 대응책을 강구하여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국내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은 대응양식이 주장되었다.

첫째는 이항로(李恒老)를 중심으로 한 척사위정론자들이었고, 둘째는 개화파의 주장을 들 수 있다. 농민들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반제ㆍ반봉건의 동학사상적 대응양식도 논의되고 있었다. 척사위정론은 성리학적 인식체계에서 연유된 화이관의 표출이다. 일체의 서구사상과 문물에 대한 강력한 배척을 주장하면서 오직 성리학적 전통사상만이 절대적인 가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이들 척사파들은 당시의 세계사적 상황에 대한 지식의 결여와 전통적 가치에 대한 강한 집착이 깔려 있었다.

한편, 개화파의 경우는 당시의 세계사적 조류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문호개방은 물론, 근대화를 추진함에 있어서 서구 강대국가의 지원과 문물의 도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개화파의 이러한 주장은 일면의 타당성은 있을지 모르지만, 보다 구체적으로 당시의 강대국이 보여주었던 제국주의적 침탈을 고려한다면 적지 않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강대국의 지원은 결국 그들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 것이며, 서구의 근대적 문물의 수용은 그들의 주장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도서기론적 변용(東道西器論的變容)으로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모든 제도는 사상을 근간으로 할 때 비로소 의미 있는 결실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 사상과 근대적 제도는 결국 혼돈의 가중으로 떨어지고 만다. 다시 말하면, 당시 개화파의 주장은 식민지적 전락의 한 단계적 현상으로 인식될 수 있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주로 농민층에 의하여 주장되었던 동학사상은 정치적으로는 전통적 주체의식의 강력한 반체제적 저항의식을 그 밑에 깔고 있었다. 지주와 지배세력의 억압적 수탈에 저항하는 농민저항투쟁은 점점 격렬하게 전개되었으며, 그들의 생활에 직접 타격을 미치고 있었던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의 경제침탈에 저항하는 민족투쟁의 한 측면도 보여주었다.

다만, 이들 농민저항은 계급투쟁이라는 의식의 이행성과 시대적 상황의식의 부정확함에 의하여 왕조체제 그 자체를 완전히 전복시키려는 상태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동학농민운동은 일종의 ‘재크리난(亂)’의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척사위정사상ㆍ개화사상, 그리고 동학사상 등의 대외적 대응양식은 어느 면에서나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가능성을 결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주장은 국민적 의식의 분렬과 대립감까지 조성시킴으로써 일종의 적전 분연상태까지 보여주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당시의 왕조체제는 무정견의 형태로 무원칙하게 방치함으로써 식민지적 전락의 위험을 가속화할 수밖에 없었다.

왕조체제나 지배세력은 오직 정권의 유지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하다면 청의 세력에 의존하였으며, 또 다른 상황에서는 러시아에 의존하였고, 심지어 일본에까지 지원의 힘을 빌리려는 정권말기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하면, 당시 조선왕조는 국내 민중의 도전에 대해서는 그것을 통제할 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외국의 제국주의세력을 불러들여 그 힘으로 통제권을 행사할 정도였다.

그러므로 왕조 말기에 이르면 이미 조선반도는 제국주의적 열강의 지배체제의 예속성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러시아와 일본과의 전쟁이나 청과 일본과의 전쟁은 극동에서의 패자를 결정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 전쟁들의 귀결은 자연히 한반도의 식민지귀속국가를 규정하여 주는 결과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 있었음에 대하여 1880년대와 1890년대에 들어서면 주로 두 갈래의 계층에서 반식민지적 애국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 한 갈래는 당시 왕조의 하층관직을 차지하고 있던 개화파인사들로서, 이들에 의한 적극적인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각종의 민간계몽단체가 조직되었으며, 정부의 지원에 의하여 몇몇 근대적인 제도들, 예를 들면 학교와 신식군대 등을 조직하여 근대적인 사회로의 발전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역시 한계가 적지 않았다.

또 다른 한 갈래는 이전의 척사파의 유생들에 의한 저항이었다. 점차 식민지로 전락되어 가는 국가에 대한 신민적 열정이 의병활동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들의 의병운동은 그 초기단계에서는 일종의 근왕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척사파의 애국운동이 점차 일본에 의하여 조선반도에서 구축되었음과 동시에, 개화파에 의한 애국계몽운동도 역시 왕조체제의 억압에 의하여 그 활동을 탄압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조체제는 일본의 침탈에 의하여 식민지로 전락되었지만, 왕조의 지배세력의 주류에는 사회적으로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즉, 일본이 1910년 조선왕조를 강압적으로 식민화하였지만, 이것은 본질적 차원에서는 일본의 지배세력인 군국주의자들과 조선왕조의 지배세력 중에서 상당수의 인사들이 야합하여, 왕실의 지위를 일본 속국의 조선왕으로 전락시킴과 동시에 일반 민중을 식민화하는 특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식민지의 억압대상은 일반 민중이었고 그들을 억압하였던 세력은 왕조시대의 상당수의 지배세력과 일본의 식민지통치의 책임을 맡았던 군국주의자들이었다.

3. 식민지적 침탈과 민족운동

1910년부터 1945년까지 한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 통치를 받아야 하였다.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는, 다음 세 가지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첫째는 일본은 조선에 총독부를 설치하여 중요한 관직을 일본인으로 충원하였으며, 그들에 협조하였던 한국인에 대해서는 훈작과 상훈을 제공하였고 그 밖의 명예와 예우를 해주었다. 그러한 성격의 구체적인 사실이 바로 〈조선귀족령〉이었다. 친일세력에 대한 일정한 예우는 자연히 그들을 조선인에 대한 상층계급적 지배세력으로 잔존시켰다.

둘째는 이른바 무단통치의 강압적 방법을 동원하였다. 헌병경찰제도를 통하여 군국주의적인 억압을 자행함으로써 “노예선에 대한 강압”을 그대로 자행하였다. 총독부의 시책에 어긋나는 민중에 대한 가혹한 규제는 철저한 억압 그 자체였다.

셋째는 일본의 조선식민지통치는 이른바 동화정책으로 일관하였다. 동화정책은 철저하게 조선의 민족적 일체성과 독자성을 말살시키면서 일본의 한 속령으로, 그리고 하층민으로 강제편입시키는 정책이었다.

조선에서의 역사교육의 금지는 물론이고, 그것의 왜곡과 날조는 마치 조선민족이 일본민족의 부속적 지류인 것처럼 논리화하였다. 언어와 문자에 대한 말살정책도 철저하게 이행되었다. 심지어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개명하게 하였다.

일본의 이러한 식민통치정책은, 일본이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등장함에 있어서 요청되는 경제적 약탈과 인력동원 등 일본제국주의의 침략과정의 희생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일본식민지통치는 다음과 같은 시대적 구분이 가능해지며, 이들 각 시기에서의 일본의 통치는 특징을 달리하였으며, 그것에 대응하는 민족투쟁양식도 다르게 나타났다.

① 제1기(무단통치기, 1910∼1919):국내외에서의 무장독립투쟁의 전개, ② 제2기(문화통치기, 1920∼1937):국내 민족운동의 민중계몽 지향적 문화민족운동과 이데올로기적 분열, ③ 제3기(전시통치기, 1937∼1945):국내 민족운동의 지하화이다.

위의 사실을 중심으로 하여 일제식민통치의 전 기간을 살펴보면, 일본의 제국주의적 세계전략에 따라서 식민지 지배양식에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억압적인 군사통치체제만은 불변의 요소였다. 이러한 일본의 통치에 저항하였던 민족운동도 각 시기마다 다르게 표출되었다.

초기에 일본의 무단통치하에서도 국내의 의병운동과 각종의 문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의 무력적인 저항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투쟁도 1910년대 말에 들어서면 국내투쟁은 여러 가지 제약을 받게 되었고, 그 결과 만주와 연해주에서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1919년에 3ㆍ1운동은 국내의 무장투쟁이 다소 소강상태를 보여주었던 시기에 발생하였다.

무저항민족운동의 양식을 택하였던 3ㆍ1운동은 당시 보수적인 장로세대에 의하여 주도되었던 최초의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저항이었다. 3ㆍ1운동은 강압적인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한 무저항민족운동의 한 표본이었다. 이 운동은 최소한 세 가지의 영향을 남겨주었다.

첫째로, 일본의 식민지통치방식에서의 변화였다. 3ㆍ1운동 이후 일본의 식민통치는 유화적인 변화를 보여주었으며, 일정한 범주 내에서의 집회와 결사도 허가하였다. 심지어 신문ㆍ잡지의 발간도 허가해 주었다.

둘째로, 국내의 민족운동에서 그때까지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장로세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청년층의 진보적인 사상운동이 민족운동의 한 양식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다.

1925년에 조선공산당이 결성됨에 따라 국내의 민족운동은 좌우의 양대세력으로 분리되고 말았다. 보수우파의 민족운동이 민중계몽에 의한 민족적 역량의 구축에 일차적인 목적을 두면서, 일본의 식민지통치자들에 대한 전체 민족적ㆍ단일적 결속에 의한 투쟁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좌파의 경우는 민족투쟁과 계급투쟁을 동질적인 차원으로 수용하였으며, 일본 당국자들에 대한 투쟁에 앞서서 민족내적 계급모순의 극복에 치중하였다. 다시 말하면, 민족 내에서의 지주와 자산가를 적대계급으로 간주하여 그들에 대항하는 계급적 투쟁을 강화하였다. 좌파의 이러한 성격은 어느 의미에서는 민족운동선상에서의 민족간의 분열을 가속화시키는 한 요인으로 기능하였다.

제2기에 들어서면 민족운동은 일시 신간회 조직에 의하여 좌우파의 연대성이 구축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시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주의운동의 하부조직체적 위치에 놓여 있던 조선공산당의 추수적(追隨的:뒤쫓아 따름)인 행동은 단일전선의 성격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던 신간회를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 뒤부터 우파의 경우는 주로 이전의 민족투쟁방법이었던 민중계몽과 인력양성에 주력하였으며, 좌파의 경우는 농민과 노동자에 직접 계급투쟁의식을 고창하는 사회주의운동으로 지하에 잠입하였다. 다만, 여기에서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3ㆍ1운동이 일어난 뒤부터 우파의 일부에서는 친일적인 변신이 자행되어 이른바 자치정부론이 대두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들 자치론자들의 친일적인 행각은 우파의 한계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셋째로, 해외독립운동에서의 단일전선적인 조직체의 모색이었다. 국권회복을 도모하여 만주ㆍ연해주 등지에서 군사적인 투쟁까지 감행하고 있던 독립운동은, 사상적인 차원에서나 운동의 계보에서는 대단히 심한 분파를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다양한 분파를 극복한 3ㆍ1운동은 단일적인 임시정부조직의 필요성을 절감시켰다. 그러한 필요성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전되었다.

물론, 임시정부는 그 구성인자 사이의 불협화와 주장ㆍ이념간의 격차로 초기부터 분열이 되풀이되었지만, 단일적인 망명정부의 형식을 취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민족독립운동은 1930년대 중반기 이후 세계대전의 발발에 의하여 식민지 당국자들의 격심한 통제로 국내의 민족투쟁은 극히 예외적인 투쟁사례를 제외하고서는 철권압제하에 떨어지게 되었다.

당시의 국내상황에서나 국외관계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 가중은 민족운동의 자체적 한계로 대두되었으며, 특히 친일세력의 발호는 1940년대 초에 들어서면서부터 징병제도 등에 의한 민족말살정책이 일본에 의하여 철저하게 자행되었다.

4. 미군정기의 정치적 혼돈

‘해방’으로 표현되는 1945년 8월의 일본 패망과 미군의 한반도 진주 등 국내상황의 변화는 급격한 정치사회적 변혁을 조성시켰다. 이러한 혼돈은 몇 갈래의 중첩된 사실 때문에 조성되었다.

먼저 국내의 각 정파세력들 사이의 격심한 분열 때문이었다. 당시 국내의 중요한 정치세력은 여운형(呂運亨) 중심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송진우(宋鎭禹)와 김성수(金性洙) 중심의 한국민주당계,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이라는 3분현상을 보여주었다.

이들 정파들 사이의 대립과 갈등은 주로 외국의 강대국에 대한 선호적 연계성과 국가수립 이후의 정권장악 등에 대한 이해의 갈등에서 빚어지고 있었다. 또한,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던 미주지역의 이승만계(李承晩系), 중국에서의 김구계(金九系), 소련 등지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의 3분현상도 이러한 국내정파의 갈등을 상승시켰다. 이처럼 격심하게 분열된 각 정파간의 대립은 민족독립의 가능성과 국제적인 호기를 상실하게 하였다.

단일적인 민족투쟁기관의 활동이 결여되어 있고 국민적인 카리스마의 구체적인 활동과 미래지향적 이념의 미정립 등은 해방의 시점을 또 다른 민족수난의 상황을 예비하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다. 특히, 당시 전승국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의 극동정책에서의 의견차이는, 국내정파의 분열과 때를 같이하여 38도선에 의한 국토분단으로 자행되었고, 남북한에서 각각의 군정을 실시하는 등 분단고착화를 조성시켜 가고 있었다.

미군의 한반도 진주는 그에 협력하였던 보수우파세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남한에서 미군정청을 개설하였다. 미군정청은 먼저 국내의 부분적 치안권을 행사하고 있던 여운형의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배척하였으며, 미군정청만이 남한의 유일합법적 정부라고 선언하였다.

미군정청은 일본총독의 관리들에 의한 행정의 지속을 명령함으로써 해방군의 위치를 스스로 포기함과 동시에 점령군의 성격을 드러내었다. 남한에서 미군정청의 통치는 억압과 혼돈의 가중을 심화시켰다. 억압의 상황은 이념적인 분야에서는 더욱 더 격심하였다.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탄압은 가중되었다. 그 대신에 이전의 친일파에 대해서는 포섭의 자세를 취하였기 때문에 민족투쟁의 상황을 역전시키게 되었다.

혼돈의 경우도, 미군정청의 시행착오와 행정의 미경험은 사회혼돈의 가속화를 가져왔다. 아사자의 속출, 치안행정의 부재, 급격한 물가고 등은 민생의 생존을 위협하였다. 해방의 상황에서 빚어졌던 이와 같은 현상은 결국 다음의 몇 가지 상황에서 빚어진 결과라 할 수 있다.

첫째로, 민족지도세력의 능력적 한계 때문이다. 이른바 민족지도자로 자처하였던 인사들 가운데 사실상 강대국 추수의 사대주의적 인사들이 상당수 있었기 때문에 미군과 소련의 한반도 진주에 대하여 해방의 의미를 부여하고 말았다.

민족적 의지는 이들을 점령군으로 규정하여 민족독립의 기정화로 지향하여야 함에도 그러한 의식과 행동이 따르지 못하였다. 그 결과 미군의 진주를 대환영하였고 소련군의 해방군으로서의 위치 부여에 부심하는 작태를 보여주었다.

둘째로, 민중의 민족적 의식의 한계였다. 지도자들의 문제와 함께 일반 민중이 보여주었던 지나친 파당의식과 추종적 굴종의식이 결국 분단체제의 고착까지 수용하는 결과가 되고 말았다.

셋째로, 어느 의미에서는 한반도에서의 분단과 투쟁의 혼돈을 조성시킨 기본적 원인의 제공자는 미국과 소련이었다. 이들의 극동외교정책에 의하여 한반도는 재식민화의 상황으로 전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945년에서 1948년의 분단체제의 형성까지 약 3년간 한반도에서의 미군과 소련의 점령정책은 기본적으로 민족주의세력의 소진과 사대주의세력의 발흥을 조성시켰던 계기가 되었다.

남한에서는 친미주의자들의 결집이 나타났으며, 북한에서는 친소공산주의자들의 철저한 통제가 자행되었다. 구체적으로 남한에서의 친미사대주의자들의 결집은, ① 다수의 미주유학생과 미주지역 거주자, ② 국내의 보수우파의 일부, ③ 일본 총독부기관에 근무하였거나 협조하였던 친일세력들에 의하여 핵심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세력은 자연히 공산주의자와 순정민족주의자들에 대한 대결관계에 설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은 남한의 전역에 걸쳐서 미군정에 저항하는 합법적ㆍ비합법적 투쟁을 전개하였다.

물론, 박헌영의 이러한 투쟁은 민족적인 성격보다는 친소적인 소련의 지령에 의하여 자행된 것이기 때문에 또 다른 사대주의적 발로였다. 박헌영의 남조선노동당에서 전개하였던 일련의 비합법적 투쟁은 맹동주의의 성격까지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속성은 결국 일개 정파의 정권탈취라는 기본적 성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해방’의 상황에서 논의되었던 중요한 쟁점은, ① 친일파 제거문제, ② 토지개혁문제, ③ 정부수립문제였다. 먼저 친일파 제거문제만 해도 미군정은 자체적인 점령정책으로 인하여 이들을 비호하였으며, 심지어 이들로부터 지원까지 받는 연대적 우군의 성격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군의 이러한 남한점령정책은 한국의 민족운동에는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하였으며, 그 뒤 일부 사대주의자들의 지속적인 발로를 가능하게 하였다.

토지개혁의 문제는 당시 8할이 농민이었던 남한사회에서는 가장 중요한 과제의 하나였다. 농민의 지주에 의한 수탈의 비인간적인 대우는 더 이상 이러한 제도의 존속을 용납할 수 없었다. 농민들의 욕구는 그만큼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자들은 그 정책의 기본적 성격이 남한에서의 보수세력의 보호육성에 있었기 때문에, 이를 소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남한사회를 격심한 계급갈등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마지막으로 정부수립의 문제는, 사실상 남한에서의 각 정파간의 타협은 물론이고 그것에 기인한 남북한간의 단일정부가 수립되어야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남한에서의 각 정파간의 대립 갈등은 미군정에 의하여 오히려 고취되는 면도 없지 않았다.

때로는 좌우합작을 종용하면서, 때로는 미군정청 입법의원을 통하여 보수우파의 지원을 도모하였는가 하면, 남북협상까지 시도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난조는 당시의 상황을 극도로 혼란 속에 떨어지게 하였다.

그 당시 이미 북한에서는 소련점령군사령관의 휘하에 소련계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형식적으로는 인민위원회제도를 취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철두철미한 공산당 일당지배체제를 공고화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스크바 삼상회의의 결정은 단지 한반도문제에 대한 책임전가의 의미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모스크바삼상회의와 연이어 시작된 미소공동위원회의 실패는 결국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에 이관시켰다.

당시 국제연합은 미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내세우면서 남한단독정부의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러한 결정은 국내의 보수세력에게는 정치적 승리를 의미하였다.

1948년 5월 10일의 제헌국회의원의 선거와 7월의 헌법제정, 그리고 1948년 8월 15일의 대한민국 건국선포는 이러한 국내외적인 과정에서 치러졌던 결과이기도 하였다. 남한단정론의 제기와 때를 맞추어 북한에서도 단독정부수립의 형식적 절차를 마침으로써 마침내 남북한간의 분단체제가 들어서게 되었다.

이러한 분단체제는 궁극적으로 미국과 소련의 강대한 원심력에 의하여 전개되었던 민족분열이었고, 순정민족주의자들의 패배를 의미하였으며,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국에서의 민족주의세력의 쇠진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5. 이승만의 권위주의통치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념적으로는 정통적 민족세력의 가치체계를 기반으로 하였다. 정통적 민족세력은 국내에서의 우파민족세력과 국외의 상해임시정부계의 법통을 계승한 것으로, 이념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였다.

제헌국회에서 제정된 대한민국헌법에서는 한반도에서의 유일합법정부로서의 법통을 강조하였으며, 이것은 곧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전체 민족성원의 열망을 총결집하였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대한민국의 헌법에서는 또한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은 정치형태로서는 공화제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주의의 지향을 의미하였다. 이와 같이, 대한민국의 이념적인 지향은 민족주의ㆍ민주주의 및 경제적 발전을 추구함으로써 근대적 시민사회를 지향하였다. 이와 같은 이념적 지향은 구체적인 정치권력의 구조화과정에서는 몇 가지의 변화를 보여주었다.

즉, 5ㆍ10선거에서 상해임시정부계 일부 인사들의 불참 및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등과 좌파의 선거 거부 등은 민족성원의 총의적 결집에 문제를 제기하였다. 당시 이들의 선거불참은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였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남북한의 이질체제를 조성시키게 될 것이라는 주장에 근거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들의 주장은 이념지향적이고 관념적인 성격을 보여주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이미 그 당시 38도선 이북에서는 소련의 붉은 군대의 강압적인 통제하에 공산주의정권이 가동하고 있었으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공산화가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5ㆍ10선거의 불참세력은 현실상황에 대한 인식보다 당위성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한 셈이었다.

또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권력의 구조화과정에서 몇 가지 문제를 던져주었다. 첫째 친일파세력에 대한 완전한 숙정을 단행하지 않았으며, 둘째 식민지시대의 사회적 성격을 근원적으로 변혁시키지 않았고, 셋째 미국의 영향을 차단시킬 수 없었다는 점이다. 즉, 첫째의 친일파들은 광복 후 한때 몸은 숨겼지만, 이승만의 등장을 기화로 하여 북한의 공산주의자와의 대결에서 그들의 지원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부분적으로 합류할 수 있었다.

둘째의 사회의 근원적 변혁은 일종의 전근대적 사회구조, 특히 지주ㆍ소작 관계라든가 전통적 지배체제의 온존 등을 완전히 변혁시켜 사회가치의 공정한 재배분이 요청되었지만, 이 점에서는 보수우파세력의 정치권 합류로 인하여 일종의 부분적 개량으로 시종되었다. 이 점에서 사회적으로는 전근대적 권위구조의 지속으로 이행되었다.

셋째의 미국의 영향은 이승만 정부에서는 행정의 실무책임자나 권력구조의 핵심인사들 중 상당수가 미국에서 수학하였던 친미적 인사로 충원되었다. 그 결과 중요한 정치행정제도들, 가령 군사ㆍ경찰ㆍ교육 제도 등은 미국제도를 모방하였으며,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를 미국지향적인 것으로 변모시켰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행정체제는 민주주의적인 성격보다는 권위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민주시민적인 정치문화의 결여, 일부 지도체계의 충원의 한계, 민족분단상황 등에 의하여 ‘위로부터의 통치’라는 지배양식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공산군의 기습적인 남침에 의하여 보다 더 강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시체제라는 상황적 여건이 이승만지배체제를 권위주의체제로 귀결시켰으며, 이러한 성격은 마침내 1960년 4월혁명에 이르기까지 경직적으로 심화되었다.

6. 소결론

한국의 근ㆍ현대 정치사를 지난 100년의 기간 동안 고찰하였을 때, 그것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를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경제적 토대의 발전과 정치적 상부구조 간의 역전관계의 성격을 지적할 수 있다. 대부분의 통설적인 논리에 의하면 경제적 토대가 상부구조로서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결정론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한국의 근ㆍ현대 정치사에서는 오히려 정치적 성격이 경제적 토대변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찾아볼 수 있다.

② 한국 근ㆍ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정치상황의 결점은 국제관계의 상황에 의하여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의 지정학적 성격도 있었지만, 역사적으로 주변의 강대국에 의하여 격심한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조성된 민족적 주체성의 한계를 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③ 한국 근ㆍ현대사에서 민족주의적 지도세력과 영향력의 한계를 찾아볼 수 있다. 민족주의 정치세력의 영향력 한계는 결국 분단지향적 인사들의 강대국 추수노선에 의하여 민족주의세력을 억압하고 심지어 강대국의 종속적 상황까지 수용하는 일면도 보여주었다.

④ 한국 근ㆍ현대사에서 민중 계층의 성장이 극도로 위축되었기 때문에 왕조체제하의 신민적 수동성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위로부터의 억압체제가 사회제도적 성격으로 고착되었기 때문에 일반 민중영역에서의 자발적인 성장이 그만큼 제약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이 점에서 민중 부분의 자기세력강화에 의한 지배세력에 대한 도전은 결과적으로 지배세력으로 하여금 권위주의체제적 성격을 가속화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곧 해방시기까지 한국의 정치사에서 실제적인 중요한 결정은 한국민족의 내재적인 민족ㆍ민중 역량의 결집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강대국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하여 자행될 수 있는 속성을 지속화시켰다.

⑤ 한국의 근ㆍ현대 정치사에서 실제 정치과정은 통합과정의 의미보다는 배척과정의 성격이 강하게 지배하였다. 다양한 사회세력과 정파들을 통합적으로 조정하기보다는 이들 정파들을 분리하고 배척함으로써 순수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정치과정에서의 격심한 대결이 민중부분과는 단절된 채 지배세력간에 자행됨으로써 한정된 정치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특징을 보여주게 되었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할 때 한국의 근ㆍ현대 정치사의 기본적 성격은 조선왕조시대의 아시아적 전제정치와 준 가산관료제적 성격이 그 뒤 일본식민지통치에서의 군국주의적 식민체제를 거쳐서 해방의 시점에서는 일종의 ‘권위주의체제’의 성격으로 전락됨으로써 마침내 분단체제라는 민족적 비극을 조성하게 되었다. →외교, 정치사상

<진덕규>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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