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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11 (토)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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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70      
[고려] 무신정권=무인정권 (브리)
무인정권 武人政權

고려 시대 무인들이 집권하여 이끌었던 정치 체제.

1170년(의종 24) 정중부ㆍ이의방ㆍ이고 등 무인들이 정변을 일으켜 문신들을 대량으로 살육하고 정권을 장악한 뒤, 1270년(원종 11)까지 약 100여 년 간 지속되었다.

무인들은 정권을 장악한 뒤에도 이전과 같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정치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외형적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으나, 실제로는 몇 가지 주목할 만한 현상들이 나타났다. 바로 이러한 현상들은 무인 정권기를 특징지어주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무인 집권기에 이르면서 국가의 공병(公兵) 조직이 제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그 대신 도방(都房)ㆍ서방(書房)과 같은 기구들을 통하여 사병(私兵) 조직이나 가신(家臣) 집단이 당시 권력자들을 중심으로 조직화되었고, 그것이 무인 정권을 지탱해주는 물리적ㆍ인적 기반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면서 이전의 재추(宰樞) 체제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중방(重房)ㆍ교정도감(敎定都監) 등과 같은 무인들의 독자적인 정치 기구를 통하여 국가의 주요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제도 장치를 통하여 무인 집권자들은 1명의 국왕(의종)을 살해하고 2명의 국왕(명종ㆍ희종)을 폐위시키는 등 당시 정치적 실권을 독점했다.

한편 고려 초기 이래 관료들의 물적 기반이 되었던 전시과 체제가 붕괴되고, 농장의 발달 등 대토지 소유 현상이 광범위하게 전개되면서 토지 탈점과 겸병이 횡행했다. 이러한 변화는 무인 정권이 성립한 직후부터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들로, 한국사에서 12세기 말에서 13세기 말의 1세기간을 무인 정권기로 구분할 수 있는 독특한 역사 현상이었다.

무인 정권의 시기 구분

고려 시대에 약 1세기간 지속되었던 무인 정권은 당시 무인 집권자의 정치 행위와 방식, 독자적인 정치 기구의 존재 유무, 정권의 계승 형태나 지속성 등을 고려할 때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제1기는 이고(1170~71)ㆍ이의방(1171~74)ㆍ정중부(1174~79)ㆍ경대승(1179~83)ㆍ이의민(1183~96)이 집권했던 약 30여 년 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은 무인 집권자들의 빈번한 권력 투쟁과 그것으로 인한 집권자의 잦은 교체, 문신들의 반무인란 등으로 정권 자체가 안정 국면을 유지할 수 없었다.

이 시기 정치 운영의 중심 기구는 이전에 무반의 합의 기구였던 중방이었으며, 무인들은 문무 교차제(文武交差制)에 입각한 외관 파견, 감무(監務)의 대량 파견 등의 시책을 펴나갔다. 이를 계기로 무반 출신들이 정계에 대량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특히 지방에 파견된 외관들을 통하여 자신들의 물적 기반을 확보해갔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무자비한 대민(對民) 수탈을 자행했다. 그결과 서북 지역에서 일어난 조위총(趙位寵)의 봉기, 중부 지역에서 일어난 망이ㆍ망소이(亡伊亡所伊)의 난과 같은 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제2기는 1196년(명종 26)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이후 최이ㆍ최항(1249~57)ㆍ최의(1257~58)의 최씨 가문 4대가 집권했던 약 60여 년 간이었다. 제2기는 무인 정권 100년 중 가장 안정된 체제를 구축한 전형적인 무인 정권기였다. 제1기의 중방에 대신하여 교정도감이라는 권력 기구를 통하여 그들의 정치 권력을 유지시켜 나갔으며, 이 기구는 무인 정권이 끝날 때까지 무인 집권자들의 중심적인 권력 기구가 되었다.

한편 최씨 정권은 자신들의 신변 보호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도방을 통해 사병을 조직했으며, 정방을 통해 관리들의 인사를 전단(專斷)했다. 이러한 권력기구는 당시 최씨정권을 장기간 지속시킨 제도 장치였으며, 무인 정권의 전형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예가 되었다.

한편 무인 정권 성립 직후부터 폭발한 농민 항쟁을 강압적으로 진압한 최씨 정권은 곧이어 원나라와의 40여 년에 걸친 지루한 전쟁을 수행했다. 1231년(고종 18) 강화도 천도는 원과의 장기적인 전쟁 수행과 정권 유지라는 2가지 목적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강화도 천도는 최씨 정권에 대한 민의 이탈을 가속시켰다. 그것이 원과의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한 요인이 되었으며, 결국 최씨 정권의 몰락뿐만 아니라 무인 정권의 종식을 가져오게 한 원인이 되었다.

제3기는 1258년(고종 45) 김준이 최의를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한 이후 임연(1268~70)ㆍ임유무(1270) 부자에 이르는 약 10여 년 간 이었다. 이 시기의 권력기구는 여전히 교정도감이었으나, 1258년 원과의 전쟁이 마무리되고 원의 철군과 고려의 원에 대한 친조(親朝)와 출륙 환도(出陸還都)를 둘러싼 양국간의 강화 과정에서 국왕을 중심으로 한 문신 세력들에 의해 마침내 1270년 무인 정권은 몰락했다.

무인란 발생의 원인

무인란이 발생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체로 전통적인 해석에 크게 의존해왔다. 그것은 조선 초기 역사가들이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무신에 대한 문신의 차별 때문에 무인란이 발생했다는 평가였다. 또한 그들은 무인란으로 성립한 무인 정권을 고려 사회 변동의 일대 분수령으로 이해했다.

이러한 평가는 무인 정권 이후를 문란하고 혼란된 사회로 서술하면서, 그러한 혼란을 수습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의 건국을 합리화하려는 당시 사대부 세력의 정치적인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무인란 발생의 원인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은 근대 역사학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발생 원인을 고려 전기 사회의 내부 모순에서 찾으려는 다소 진전된 시각을 보여주기는 하나, 그러한 내부 모순의 계기를 역시 문반ㆍ무반의 대립 구조에서 찾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문반과 무반의 알력과 대립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그대로 고수하는 입장도 있다. 한편 고려 전기 이래 무반 자신이 그들의 지위를 상승시켜왔고 그러한 내부적ㆍ자율적인 요인이 문반ㆍ무반의 대립과 갈등을 더욱 증폭시켰고, 그것이 무인란 발생의 원인이었다고 했다. 또한 군반제(軍班制)라는 군제의 모순이 무인의 지위 저하를 가져왔고, 그것이 무인란을 야기시켰다는 해석이나, 집권 문신 세력의 부패와 타락, 무인에 대한 천시가 무인란을 촉발시킨 계기가 되었다는 등의 시각이 바로 그러했다.

이상과 같은 해석은 문반과 무반의 대립, 나아가 문반의 무반에 대한 차별 대우가 무인란 발생의 원인이 되었다는 전통적인 해석을 기본 전제로 하여 그러한 대립이나 차별을 낳게 했던 계기를 고려 전기 사회의 내부 모순에서 찾고자 한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근본적으로 전통적인 견해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무인 정권의 역사적 평가

무인 정권에 대한 평가는 현재 다양한 갈래로 나타나고 있다. 앞에서 소개한 <고려사> 찬자들은 무인정권의 성립이 고려사회 변동의 주요한 분수령이 되었다는 전통적인 해석에 근거했다. 즉 무인 정권 이후 고려 사회는 혼란과 모순이 축적되어갔으며 그것을 계기로 제도적으로 점차 붕괴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다분히 조선 왕조의 건국을 합리화하기 위한 자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무인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는 현재에도 계승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국가의 공병 조직이었던 부병제의 붕괴와 함께 사병과 같은 지방 무사 집단의 등장, 농장과 같은 장원의 발생, 노예 신분의 동요와 같은 제현상이 무인 정권 이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입장은 무인 정권의 등장으로 한국사에서 중세 봉건제 사회가 성립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해석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한편 시대 구분론의 차원으로까지 진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무인 정권의 성립으로 고려전기 문벌귀족체제가 붕괴하고 농민ㆍ천민의 난 등으로 인하여 고려의 신분제가 크게 변질되었다는 점에서 무인 정권의 성립을 고려 사회 변동의 주요한 분수령으로 이해한 입장도 무인 정권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부류의 하나라 할 수 있다.

한편 무인 정권의 성립은 정치 지배 세력의 단순한 교체에 불과할 뿐이라는 입장도 있다. 예컨대 무인란 발생 이전인 12세기 초, 지배 세력이 가혹한 수취와 토지 탈점 등으로 인하여 대규모 유망이 발생하는 등의 사회 모순이 무인 정권 성립 이후에도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전형적인 무인 정권 시대를 열었던 최충헌이 권력을 장악한 후 사회 개혁책으로 제시한 봉사 10조(封事十條)가 제대로 시행되지 않았으며, 그가 지적한 당시의 사회 모순이 그의 집권 이후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무인 정권 이후 전개되기 시작한 농민 항쟁이 그가 집권한 후 신라 부흥 운동이라는 대규모 형태로 전개되었던 사실을 주요한 근거로 지적했다. 또한 원과의 전쟁 수행 과정에서 최씨 정권의 소극적인 항전 태도로 인하여 민심의 이반을 가져왔던 사실들이 무인 정권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를 유보하게 한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무인 정권에 대한 소극적인 평가는 종래의 적극적인 평가가 정치 제도 변화에 주목했던 데 비해, 사회 경제적인 모순 구조의 개혁 여부에 주목하여 내려졌다는 점에서 그 접근 방법이나 시각에서 양자 사이에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이 양자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앞으로 무인 정권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 한 걸음 앞서 다가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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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씨무인정권의 불교계 운용에 관한 연구 : 김광식,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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