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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7 (목)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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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행장 2 (실록)
숙종 대왕 행장  2

(앞에서 이음)

경오년19978)에 서흥현(瑞興縣) 일대에 전염병이 크게 번지니, 왕이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예관(禮官)을 보내 본현(本縣)의 사단(社壇)과 경내(境內)의 명산(名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6월에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왕세자(王世子)를 책봉(冊封)하였다. 10월에 장렬 왕후(莊烈王后)를 종묘(宗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삼남(三南) 지방과 경기(京畿) 각 아문(衙門)의 무진년19979) 이전의 결딴난 증미(拯米)19980) 6천여 석을 탕감(蕩減)해 주었다.

야대(夜對) 때 강(講)을 마친 다음 선온(宣醞)을 명하고, 손수 사운시(四韻詩)를 써서 여러 신하들에게 보였는데, 이르기를, '막막한 천지 한이 없는데,[天地茫無垠] 이 한 몸은 너무나도 작구나.[眇然有一身] 타고난 성품은 본래 착한 것,[秉彝本自善] 물욕이 유혹해서 진성(眞性)을 잃게 되네.[物誘乃亡眞] 마음잡고 놓는 것은 호리(毫釐)에서 판가름나고,[操舍毫釐判] 성인(聖人)과 미치광이는 잠깐 사이에 이루어지네.[聖狂俄頃臻] 사심(邪心)을 막는 것은 경(敬)만한 것이 없고,[閉邪莫若敬] 사욕(私慾)을 극복하면 날마다 덕이 새로와진다.[克己日維新]' 하였다. 이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화답(和答)해 올리도록 하였다.

신미년19981)에 우의정(右議政) 김덕원(金德遠)이 그 전에 환시(宦侍)에게 전해 들은 것으로 내수사(內需司)의 일을 진달(陣達)하였는데, 그 말이 선조(先朝)에 관련되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마땅히 환관(宦官)이나 궁첩(宮妾)들은 이름을 모르는 사람을 쓰라.」고 하였다. 내조(內朝)와 외조(外朝)는 옛부터 사이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으므로, 원래 마땅히 서로 더불어 수작하거나 선조(先祖)를 평론(評論)할 수 없는데, 이런 말을 가지고 또 진달하였으니, 지극히 터무니가 없다. 김덕원을 파직(罷職)하라.' 하고, 곧이어 내시부(內侍府)에 명을 내려 그 환관의 이름을 지워버리고 아울러 그 자서(子婿)들의 적(籍)까지 삭제해 버리게 하였다.

어제(御題)로 반유(泮儒)19982) 에게 책문(策問)으로 시험을 보이고 한 방(榜) 모두 급제(及第)를 주었다.

정릉(貞陵)을 전알(展謁)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19983) 의 사당에 들어가 손을 들어 읍(揖)하였다. 이어 날을 가려 제사를 지낼 것을 명하였다. 그리고 동남(東南)쪽의 사당이 훼손된 곳을 즉시 보수하도록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이번에 지나는 길에 여기에 들른 것은 실로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응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무사(武士)들을 격려하고 권장하기 위한 것이다. 아! 그대 여러 장수들은 부디 나의 이러한 의도를 체념하고 더욱 충의(忠義)에 힘써 왕실을 보위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단(射壇)에 주필(駐蹕)하고 관병(觀兵)한 뒤 다시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였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이담명(李聃命)이 보리 이삭이 두세 갈래 혹은 너댓 갈래로 난 것을 아름다운 상서라 하여 봉진(封進)하니,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삼남(三南) 지방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호조(戶曹)에 바칠 세태(稅太) 1만 2백여 석과, 쌀 9천 5백 60여 석, 선혜청(宣惠廳)에 바칠 쌀 3만 4천 5백 60여 석을 탕감해 주고, 삼남(三南)에 주진곡(賙賑穀) 10만여 석을 이전(移轉)하여 주었다.

친히 천자문(千字文)의 서문(序文)을 짓고 세자(世子)에게 이것으로 진강(進講)하게 하였다. 이때 각 영문(營門)의 군졸(軍卒)들을 징발하여 강도(江都)에 돈대(墩臺)를 쌓았는데, 중사(中使)19984) 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기를, '너희들이 직접 판삽(版鍤)19985) 을 잡고 있으니 노고(勞苦)가 실로 많다. 나의 애처롭게 여기는 마음이 어찌 다만 송제(宋帝)가 서쪽으로 원정한 장졸(將卒)들을 걱정한 정도일 뿐이겠는가?19986) 이에 나의 뜻을 선유하는 것이다.' 하고, 이어서 석뇌(錫賚)19987) 를 더하였다. 또 어주(御酒) 60병을 하사하면서 말하기를, '비록 모두에게 두루 미치지는 못하겠지만 대개 또한 투료 음하(投醪飮河)19988) 하는 뜻이다.' 하였다. 또 수령(守令)들에게 명하기를, '군졸 중에 만약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민간(民間)에서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으면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이어서 선비를 시험하고 여러 유생들에게 회유(誨諭)하기를, '상서(庠序)와 학교(學校)를 만들어 사방(四方)의 선비를 양성하는 까닭은 대개 바른 학문을 강마(講磨)하고 선(善)을 택해서 자신을 닦으며, 인륜(人倫)에 근본을 두고 물리(物理)에 밝게 하고자 함이니, 어찌 단지 글이나 짓고 녹(祿)이나 구하게 하려는 것이겠는가? 옛날 전손(顓孫)19989) 이 녹을 구하는 방법을 묻자, 공자(孔子)께서, 「말에 허물이 적고 행동에 뉘우침이 적으면 벼슬은 그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참으로 능히 학문이 넓고 선택이 정밀하며 조수(操守)가 간요(簡要)하다면 벼슬은 구하지 않아도 절로 찾아올 것이다. 가만히 살펴 보건대, 근래에 선비들의 습속이 옛날같이 않아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단정하여 정치의 방법에 밝게 통달한 사람은 적고, 문사(文詞)를 숭상하고 녹리(祿利)를 추구하는 자들만 넘실대니, 이것이 어찌 조종(祖宗)의 학문을 진흥시키고 인재를 양성하신 본뜻이겠는가? 옛적에 안정(安定) 호공(胡公)19990) 이 소주(蘇州)와 호주(湖州)의 교수(敎授)가 되었을 적에 부지런히 바르게 계칙(戒勅)하니,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이 보통 사람들과 판이하였다. 더구나 지금은 훌륭한 여러 선비들이 지척에 있고 위와 아래의 정(情)과 뜻이 막힘없이 통하니, 유액(誘掖)하고 격려하는 바가 어찌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의 훈계를 공경히 들어서 가슴에 간직하고 잃지 말라.' 하였다.

임신년19991) 에 군신(群臣)들에게 교칙(敎飭)하기를, '백성들의 괴로움을 찾아 묻고,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학업을 권면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옛날에 서쪽 오랑캐가 큰 개를 바치자 군석(君奭)19992) 이 글을 지어 무왕(武王)을 경계하였다. 이번에 연신(筵臣)들이, 「이상한 물건을 물리치고 검소한 덕을 밝히라.」고 누누이 진달(陣達)하니, 내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기고 그 주청을 옳게 여기는 바이다. 이제 은서피(銀鼠皮)로 만든 어구(御裘)를 내려 주니, 상방(尙方)으로 하여금 불사르게 하라.' 하였다.

연신(筵臣)들에게 말하기를, '조송(趙宋)19993) 은 인후(仁厚)로 나라를 세웠지만 그래도 장리(贓吏)를 용서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장법(贓法)이 엄중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법(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그 해독을 입으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사마씨(司馬氏)는 문지(門地)19994) 를 앞세우고 재예(才藝)를 뒷전으로 하였으니, 실로 인재를 선택하는 방도가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세상도 또한 그러하여 전적으로 문벌(門閥)로 사람을 뽑으니, 이 때문에 재능이 있는 사람을 잃는 한탄이 있다.' 하였다.

또 강관(講官)에게 말하기를, '공자(孔子)ㆍ맹자(孟子)ㆍ정자(程子)ㆍ주자(朱子)는 모두 이름을 휘(諱)하면서 유독 증자(曾子)에 대해서는 이름을 휘하지 않으니, 옳은 일이겠는가? 모두 휘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왕이 말하기를 '옛날 태종조(太宗朝)에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일을 벽(壁) 위에 그려 놓을 것을 명하였고, 성종(成宗)은 역대(歷代)의 본보기로 삼을 만하고 경계로 삼을 만한 것들을 골라서 병장(屛障)에 그리도록 명하고,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시(詩)를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는 대개 아침 저녁으로 관람(觀覽)하여 권선 징악에 대비(對備)하려고 하였던 것이니, 어찌 자손이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 나는 전대(前代)의 본받을 만한 선(善)으로 제요(帝堯)가 어진이를 신임하여 선치를 도모한 것과 제순(帝舜)이 노래를 지어 칙명한 것19995) 과 하(夏)나라 우왕(禹王)이 방울을 매달아 놓고 간언(諫言)을 구한 것19996) 과 상(商)나라 탕왕(湯王)이 상림(桑林)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한 것19997) 과, 중종(中宗)19998) 이 덕으로 상상(祥桑)을 없앤 것19999) 과,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은택이 마른 해골에까지 미친 것20000) 과, 무왕(武王)이 단서(丹書)로 계칙을 받은 것20001) 과, 선왕(宣王)이 간언(諫言)에 감동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한 것을 뽑아서 8폭(八幅) 병풍을 모사(摹寫)해서 만들고, 또 경계할 만한 악(惡)으로 태강(太康)이 사냥하며 즐기다가 덕망을 잃은 것과, 한(漢)나라 성제(成帝)가 시리(市里)에 미행(微行)한 것과, 애제(哀帝)가 아첨하는 사람을 사랑하여 어진이를 죽인 것과, 영제(靈帝)가 서저(西邸)에서 관직을 판매한 것과, 진(晉)나라 무제(武帝)가 양거(羊車)를 타고 잔치에서 노닌 것과, 당(唐)나라 현종(玄宗)이 재물을 긁어모아 사치한 것과, 의종(懿宗)이 성내어 간하는 신하를 유배시킨 것과, 송(宋)나라 휘종(徽宗)이 간적(奸賊)을 임용(任用)한 것 등을 뽑아서 또한 8폭 병풍을 만들어 좌우(左右)에 놓아 두고 성찰(省察)의 자료로 삼고자 한다. 주문(主文)의 신하에게 각각 율시(律詩)를 지어 병풍 머리에 써서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하(夏)나라 우왕(禹王) 시절에는 백성들이 호호(皡皡)20002) 하였는데도 오히려 당우(唐虞)만 못하다고 깊이 스스로 각박하게 꾸짖었으며, 심지어 수레에서 내려와 죄인을 보고 울기까지 하였다. 나는 여기에 대해 일찍이 세 번 반복하여 흠탄(欽歎)해 마지않았다. 지금 세속(世俗)은 타락하고 백성의 습속은 퇴패한 나머지 어버이를 사랑하고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전연 알지 못하고, 인륜에 어긋나고 상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날로 달로 붙어나고 있는데, 호서(湖西)에서 또 자식을 살해하는 변고가 생길 줄이야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아! 아버지는 자식에게 자애롭게 하고 자식은 아버지를 사랑하니, 이것은 하늘에서 부여한 떳떳한 성품이다. 저들이 비록 어리석을지라도 또한 반드시 본래의 성품을 잃어버리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차마 못할 짓까지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이유없이 그렇게 되었겠는가? 보잘것없는 나 소자(小子)가 일찍이 덕(德)과 예(禮)로 인도할 줄 알지 못하고, 단지 법제(法制)와 형벌(刑罰)만으로 그들이 죄를 멀리하기를 구차하게 기대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스스로 사랑하지 않고 가볍게 법을 범(犯)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갈수록 날로 강상(綱常)은 무너져서 나라는 뒤따라 위망(危亡)한 지경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과매(寡昧)가 스스로 책망하고 마음 아프게 여기는 바가 어찌 다만 대우(大禹)가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과 같을 뿐이겠는가? 그러나 조종(祖宗)의 깊은 사랑과 큰 은택이 사람들의 살갗에 젖어 있음을 생각하건대, 무릇 우리 백성들이 누가 흥기하고 감동하지 않겠는가? 아! 너희들 크고 작은 백성들은 나의 십행(十行)의 사륜(絲綸)이 오로지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음을 체념하고, 착한 마음을 감발(感發)시켜 각자 격려하며 나의 교유(敎諭)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올해 회양(懷襄)20003) 의 참혹함은 옛적에 없던 일이다. 여러 도(道)에서 엄사(渰死)20004) 한 사람이 거의 6백 명이란 많은 수에 이르렀으니, 무엇이 이보다 놀랍고 비참하랴? 비록 관례대로 휼전(恤典)의 명을 내리긴 하였으나 별도로 은혜를 베풀지 않을 수 없으니, 죽은 사람들 중에 신역(身役)을 다 바치지 못한 사람이 있으면 모두 탕감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눈이 내린 뒤 추위가 기승을 떠는데, 저들 궁성 밖에서 숙위(宿衛)하는 군졸(軍卒)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견뎌내는지 염려스럽다. 입직(入直)한 군사는 대내(大內)에서 이미 술과 음식을 대접했으나, 안과 밖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내자시(內資侍)로 하여금 더운 술을 대접하게 하고, 사재감(司宰監)으로 하여금 마른 안주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계유년20005) 에 목릉(穆陵)에 거둥하여 그 길로 건원릉(健元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수찰(手札)로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고, 곧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기읍(圻邑)의 춘수미(春收米)를 가을까지 기다려 물려 받도록 하고, 양주(楊州)의 정묘년20006) 조의 환상(還上) 중에서 거두지 못한 것은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또 진휼청(賑恤廳)에 호(戶)마다 소미(小米)20007) 한 말씩을 주라고 명하고, 의사(醫司)로 하여금 약리(藥理)를 아는 사람을 골라 보내 호서(湖西) 지방의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료(救療)하도록 명하였다.

후릉(厚陵)에 전알한 다음 송도(松都)에 주필(駐蹕)하고 관원을 보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능(陵)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정몽주(鄭夢周)와 서경덕(徐敬德)의 서원(書院)에도 모두 제사지낼 것을 명하고, 경덕궁(敬德宮)20008) 의 목청전(穆淸殿)에 비(碑)를 세웠다. 만월대(滿月臺)에 친림(親臨)하여 문과와 무과를 베풀고, 겸하여 무재(武才)를 시험하였다. 승지(承旨)에게 부로(父老)들을 효유(曉諭)하라고 명하고,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과 각 아문(衙門)에서 칙수(勅需)로 빚낸 것들을 탕감해 주었다. 그리고 선혜청(宣惠廳)의 쌀 1천 석을 내어 지나온 각 고을에 나누어 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고도(故都)에 친림(親臨)한 것은 천 년에 한 번 있는 것이다. 이에 어제시(御製詩) 세 수를 내리니, 세종조(世宗祖)의 고사(故事)에 의해 입시(入侍)한 우상(右相)으로 하여금 기문(記文)을 짓게 하되, 전말(顚末)을 갖추어 싣고 판(板)에 새겨서 남문(南門)의 문루(門樓)에 걸게 하라.' 하였다. 문수 산성(文殊山城)을 축조하였다.

갑술년20009) 에 헌릉(獻陵)을 전알(展謁)하고, 승지에게 부로(父老)들을 불러모아 민간(民間)의 고통(苦痛)을 물어보라고 명하였다. 경신년20010) ㆍ신유년20011) 두 해의 미처 봉입(捧入)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특별히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였다. 이때 간사한 소인들이 멋대로 정권을 농락하여 흉도(凶徒)들을 유혹하고 위협해서 무옥(誣獄)을 일으켰다. 밤낮 단련(鍛鍊)20012) 하여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화(禍)가 호흡지간에 닥쳤는데, 왕이 그 간사한 정상을 살피고 특별히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주모(主謀)한 대신 민암(閔黯)과 국문(鞫問)에 참여한 의금부(義禁府)의 당상관(堂上官)을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했다. 그리고 드디어 훈련 대장(訓鍊大將) 이의징(李義徵)의 병부(兵符)를 빼앗아 신여철(申汝哲)로 대신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난 기사년20013) 의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나도 모르게 절로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곤픽(悃愊)20014) 을 살피지 못하고 어진 보필을 잘못 의심하여, 급기야 은례(恩禮)가 쇠하고 답답한 마음을 펴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일찍이 깊은 밤중에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궁구하던 끝에 환히 깨닫고 크게 후회하면서 자나깨나 고민해 온 지 어언 몇 년이 되었다. 이번에 윤음(綸音)을 환발(渙發)20015) 하여 곤위(壼位)를 다시 바르게 하니, 이는 천리(天理)의 공정함을 회복하고 종사(宗社)의 은밀한 도움에 힘입은 데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6월 1일에 다시 중궁(中宮)의 책례(冊禮)를 거행하였다. 고묘(告廟)하고 하례를 받았으며, 중외(中外)에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회태(回泰)20016) 하여 중곤(中壼)이 복위(復位)되었으니, 백성들에게 두 임금이 없는 것은 고금(古今)의 공통된 의리이다. 장씨(張氏)의 왕후(王后) 인수(印綬)를 회수하고 이어 희빈(禧嬪)이란 구작(舊爵)을 내려 세자(世子)에게 정성(定省)20017) 하는 예를 폐하지 않게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내가 생각하건대, 임금과 신하는 아버지와 아들과 같으니 무슨 말을 숨기겠는가? 아! 증자(曾子) 어머니의 어짊으로도 투저(投杼)20018) 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옛부터 처리하기 어려운 바로서 부자(父子)의 사이만큼 어려운 것이 없고, 쉽사리 감동(感動)하는 바도 또한 부자의 사이보다 더 쉬운 것이 없었다. 애당초 세자를 세우던 날 유위한(柳緯漢)의 상소가 갑자기 튀어나왔고, 또 「질병이 있어야 비로소 책봉(冊封)한다.」는 등의 설이 있었다. 내가 전대의 역사에 대해 대략 이미 열람(閱覽)했으므로, 틈을 엿보아 공동(恐動)하는 수단이 언제나 이러한 곳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나의 병통이 항상 거칠고 사나운 데 있었으니, 지난날 처분(處分)이 정도에 지나쳤던 것도 오로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일찍이 조용하고 한가할 때 가라앉은 마음으로 찬찬히 살펴보고 스스로 생각하기를, 「오늘 세자를 세운 것은 종사(宗社)의 큰 계획이고, 오늘날의 신하들은 대대로 녹(祿)을 받는 구신(舊臣)이니, 만약 패리(悖理)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다른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렇다면 유위한의 흉계(凶計)는 실현된 것이 아니며 여러 신하들의 본심은 드러나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것으로 항상 후회한 것은 신명(神明)도 아는 바이다. 또 가만히 저들 무리의 짓거리를 살펴본다면, 사정(私情)을 따르고 공도(公道)를 무시(無視)하며 도리에 반대되고 윤리를 거역하는 일이 아닌 것이 없으니, 결코 함께 나라일을 처리할 수 없다. 이제 하늘이 그들의 마음을 유도하여 그들이 군부(君父)를 기만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들려 한 계획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이러한 때를 당해 만약 전도(顚倒)될 것을 염려하고 확청(廓淸)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과실을 알면서도 과실을 고치지 않는 것이다. 오늘날 지난일을 경계하고 뒷일을 삼갈 방도는 바로 마땅히 사의(私意)를 아주 끊고 의심과 막힘을 통렬히 제거하며, 마음을 열고 성의를 보여 불휘(不諱)20019) 의
문을 개방하고 충직(忠直)한 의논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유신(維新)하여 태평(太平)을 이루기를 기약하는 것이 국가의 복(福)이다. 아! 그대 군공(群工)들은 공경히 들으라.' 하였다. 또 기사년20020) 에 죽음으로 간(諫)한 오두인(吳斗寅)ㆍ박태보(朴泰輔) 등에게 관작을 증직하고 정려(旌閭)하라고 명하고, 뒤에 강가에 사당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 화란을 선동하고 명의(名義)를 범한 자들을 처형하고 귀양보냈는데, 차등이 있었다. 그뒤 또 하교하기를, '이제부터 나라의 제도로 만들어 빈어(嬪御)는 후비(后妃)에 오르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영소전(永昭殿)에 거둥하여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고, 문성공(文成公) 이이(李珥)와 문간공(文簡公)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복향(復享)하였다. 경기(京畿)의 유생(儒生)들이 두 현신(賢臣)을 복향할 것을 상소로 청하였으므로, 그 일을 예조(禮曹)에 내리니, 대신(大臣)에게 순문(詢問)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두 현신의 도학(道學)을 내가 모르는 바 아니나, 처음에 정인(正人)을 해치는 무리들에게 속고 가려져 출향(黜享)시키기에 이르렀으므로, 내가 항상 뉘우치고 한스럽게 여겨 왔다.' 하고 즉시 거행할 것을 명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박세채(朴世采)의 건의로 인해 '대고(大誥)20021) 에 의거하여 교문(敎文)을 짓고 붕당(朋黨)을 타파(打破)하라.'는 뜻으로 중외(中外)에 효유(曉諭)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이어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였다.

장령(掌令) 김호(金灝)가 속히 동원(東垣)의 누각(樓閣)을 허물 것을 상소로 청했는데, 이것은 바로 반궁(泮宮)에 행차할 때 대내(大內)에서 올라가 관첨(觀瞻)하는 곳이다. 우악한 비답을 내려 가상하게 여기고, 이어 고비(皐比)20022) 를 하사해 포상하였다.

을해년20023) 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의 사당을 전배(展拜)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사묘(私廟)를 전배하니 감창(感愴)이 어찌 한이 있으랴? 제사를 받드는 사람은 한 자급(資級)을 올려 주고 그 장자(長子)에게는 벼슬을 제수하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하기를, '내가 일찍이 《송사(宋史)》를 읽다가 악무목(岳武穆)20024) 의 일에 이르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대를 뛰어넘어 서로 감동되는 것을 느꼈다. 그를 영유현(永柔縣)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당에 함께 배향하여 백대(百代)의 풍성(風聲)을 수립(樹立)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왕이 친히 남교(南郊)에 나아가 비를 빌고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어공(御供)을 줄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였으며, 8도(八道)의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주진(賙賑)에 힘을 쏟아 민간에 효유(曉諭)하게 하였다. 또 내수사(內需司)의 쌀ㆍ포(布)ㆍ녹비(鹿皮)ㆍ단목(丹木)ㆍ백반(白礬) 및 은자(銀子) 1천 냥을 진휼청(賑恤廳)에 내려 주었다. 함흥(咸興)에 이른바 본궁(本宮)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바로 태조(太祖)의 잠저(潛邸)로서 익조(翼祖) 이하 네 분 대왕의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영흥(永興)도 또한 그러했으니, 대개 한(漢)나라 원묘(原廟)20025) 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다. 신덕 왕후(神德王后)를 추부(追祔)한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두 궁(宮)에는 미처 다 봉안하지 못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의 진백(陳白)에 의하여 즉시 거행하라고 명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서 내려보냈다. 그리고 본관(本官) 본전(本殿)의 참봉(參奉)을 제관(祭官)으로 차정(差定)하고, 별감(別監) 차지(次知)가 제사지내던 관례를 폐지시켰다.

병자년20026) 에 8도(八道)의 감사(監司)에게 하교하기를, '금년은 바로 병자년이다. 지나간 해를 돌이켜 보고 우리 백성들의 일을 생각해 볼 때 더 심함이 있다. 창과 칼이 난무하는 어지러운 때일지라도 오히려 재난을 피하여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으나, 지금은 8도에 대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므로, 어느 곳에서도 살아남기를 바랄 수 없게 되었다. 감사와 수령은 모름지기 나의 뜻을 체념(體念)하여 각별히 주진(賙賑)을 더하도록 하라. 만약 재리(財利)를 빙자하여 백성들의 죽음을 서서 구경만 하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들을 노륙(孥戮)하여 결단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도적을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오로지 체포하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지 말고 반드시 먼저 위로하여 따라오게 하여 안정시키고 모이게 하라. 그리고 또 농사는 천하(天下)의 근본이니,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백성들의 축말(逐末)20027) 을 금하고, 힘들여 논밭을 가꾸도록 하여 가을에 수확을 얻을 수 있게 하라.' 하였다.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곡제(祈穀祭)를 거행하였다.

요적(妖賊) 이홍발(李弘渤)이 여러 불령(不逞)한 무리들과 더불어 은밀히 모의하여, 세자(世子) 외가(外家)의 묘소(墓所)에 흉예(凶穢)한 물건을 묻어 두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신여철(申汝哲)의 집안 종의 호패(號牌)를 훔쳐다가 그 곁에 떨어뜨려 놓았다. 그리고는 묘지기로 하여금 주워 오게 한 뒤 급히 강오장(姜五章)을 사주해 장주(章奏)를 올려 고하게 하였다.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구문(究問)할 것을 명하자 단서가 약간 드러났는데, 채 구핵(鉤覈)하지 않아 영의정(領議政) 남구만(南九萬)과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참국(參鞫)한 여러 신하들과 함께 청대(請對)하여 진달(陣達)하자 모두 석방하여 보냈다. 삼사(三司)에서 극력 간쟁하니, 다시 국청(鞫廳)을 설치할 것을 명하여 이에 죄인이 밝혀지고 여러 역적들이 복주(伏誅)되었다.

창릉(昌陵)을 전알하고 이어 순회 세자(順懷世子)의 묘소에 나아갔다. 지나는 길에 인조(仁祖) 잠저(潛邸) 때의 별서(別墅)에 들러 비각(碑閣)을 수직(守直)하는 사람을 둘 것을 명하였다. 영희전(永禧殿)에 전알하고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는데, 세자(世子)가 따라갔다. 태묘(太廟)를 전알하였는데, 고례(古禮)를 처음으로 시행하여 중궁(中宮)과 세자빈(世子嬪)이 수행해 묘현례(廟見禮)를 거행하였다.

강도(江都)의 수령(守令)이 진소(陳疏)하기를, '내년 1월 22일은 바로 청(淸)나라 사람이 성(城)을 함락시킨 날입니다.' 하니, 충렬사(忠烈祠)에 제사를 내리고, 성 밖에다 땅을 다듬어 제단(祭壇)을 설치해 나라를 위해 죽은 이와 전쟁에 죽은 사민(士民)에게도 모두 제사를 내리라고 명하였다.

정축년20028) 에 왕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에게 말하기를, '백성들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려 있다. 한(漢)나라 때는 고을을 제일 잘 다스리는 사람이면 관질(官秩)을 승진시켜 탁용(擢用)하였다. 우리 나라의 순리(循吏)를 장려하여 등용하는 방도가 옛날에 미치지 못하는데, 간혹 진휼(賑恤)을 잘하여 초자(超資)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또한 옛날과 같지는 않다. 경(卿)은 부디 사람을 선택하는 데 유의하여 실효가 있도록 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도신(道臣)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선유(宣諭)하기를, '부디 밤낮으로 강구(講究)하고 형편에 따라 일을 하되, 만약 변통(變通)에 관계되는 것이 있다면 즉시 치주(馳奏)하도록 하라. 서토(西土)20029) 와 북관(北關)20030) 의 기근(饑饉)이 예사롭지 않은데, 혹 죄가 특별히 강상(綱常)에 관계되는데도 묻어 두거나, 자신이 지극한 원한을 품고 있는데도 풀지 못하는 일이 있어 그런 것인가? 각별히 찾고 물을 것이며, 아울러 백성의 고통과 함께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봄을 맞이하여 권농(勸農)하는 것」은 《예기(禮記)》에 기록되었고, 「근본에 힘쓰고 백성들이 축말(逐末)하는 것을 금하는 것」은 《한사(漢史)》에 실려 있다. 지금 8도(八道)에 거듭 흉년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으니, 춘궁(春窮)의 진대(振貸)를 진실로 그만둘 수 없겠지만, 권농이 가장 시급한 일이 된다. 여러 고을에 신칙(申飭)하여 권농하는 것이 부지런한가 아니한가를 가지고 전최(殿最)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하교하기를, '하늘이 상란(喪亂)을 내리시어 기근(饑饉)이 거듭 닥쳤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길바닥에서 굶어죽는 자가 즐비하니, 마음이 아프고 눈에 참담한지라 차마 말할 수가 없다. 아! 이번에 아비가 자식을 죽인 일이 생겼으니 윤상(倫常)이 무너졌고,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었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진 것이다. 백성이 용과 뱀으로 변하여 곳곳에서 무리를 불러모으니, 이것이 어찌 본래의 성품이 악(惡)해서 그런 것이겠는가? 내가 감싸주고 보호하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이러한 지경에 이르게 만든 것이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한탄하며 임금 노릇이 즐겁지 않다. 지금 온 땅이 시뻘겋게 타들어 가고 많은 백성들이 훌쩍이며 울고 있다. 상림(桑林)에서 대신 희생(犧牲)이 되고 스스로 몸을 불사르려는 정성이 간절하지만,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여 하늘을 바라보면 어슴푸레할 뿐이니, 오늘날 나라일은 정신이 없는 지경이라 할 수 있다. 옛날 임진년20031) 에 나라가 어지러워진 나머지 굶어죽은 시체가 날마다 쌓여만 가니, 선조(宣祖)께서, 「그들보다 먼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구나.」라고 하교까지 하셨는데, 지금 소자(小子)의 심정이 바로 선조의 그 당시의 심정이다.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하여 더욱 공경하고 조심할 것이니, 정부(政府)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하도록 하라. 아! 오늘날 조정의 의논은 분열이 극도에 달하였다. 각자가 문호(門戶)를 세우고 경알(傾軋)이 습성을 이루어 다른 사람의 조그마한 과실을 들으면 마치 기화(奇貨)나 얻은 듯 가지와 마디가 거듭 생겨나고, 반복해서 고질(痼疾)이 되어 화해를 기약할 수가 없다. 심복(心腹)이 먼저 무너지고서 그 나라가 어지럽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군주와 신하가 한자리에 모여 정성스럽게 계회(戒誨)하면서도 한결같이 느슨하여 망국(亡國)의 대부(大夫)가 되는 것을 달갑게 여긴다면 이것이 무슨 도리(道理)이겠는가? 《주역(周易)》의 감괘(坎卦)에 이르기를, 「겹겹이
둘러싸인 토굴 속에 포로가 있다. 그 마음이 성실하고 행실도 가상하다.」 하였다. 이와 같이 험난하고 어려운 날 그 마음이 성실하지 않은데, 오히려 어찌 고난을 벗어나 형통함을 이루기를 바라겠는가?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나의 훈계를 분명히 듣고 너희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가져 「한발의 재난을 우연한 것이다.」, 「당론(黨論)은 타파(打破)할 수 없다.」고 하지 말고 삼가 공경히 받들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보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사직단으로부터 환궁(還宮)할 때 금오(金吾)의 앞길에 연(輦)을 멈추고 죄수들을 소결(疏決)하였다. 죄수들이 어가의 앞에 나와 엎드리니, 왕이 그들이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형상을 보고 가엾이 여기며 말하기를, '하늘이 백성을 내실 그 애초에야 무엇이 달랐겠느냐? 그런데도 지금 저들은 다 귀신 꼴이 되었으니, 참혹하도다. 하(夏)의 우왕(禹王)이 죄수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이 진정 그러했겠구나!' 하였다. 또 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宣祖)께서 계사년20032) ㆍ갑오년20033) 두 해의 흉년 때 어공미(御供米)를 내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셨다. 지금도 또한 참작해 어공미를 덜어내어 율도(栗島)의 굶주린 백성을 먹이는 물자에 보태게 하라.' 하고,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관서(關西)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무지개의 변괴로 인해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였다. 임경업(林慶業)의 관작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고, 제사를 내렸다.

무인년20034) 에 친히 문회 서원(文會書院)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려 주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여러 도(道)에 선유(宣諭)하여 진대(振貸)하고 권농(勸農)하게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국가(國家)가 불행하여 동인(東人)ㆍ서인(西人)을 표방(標榜)한 이래 백 년이 되었는데, 날이 갈수록 고질(痼疾)이 되고 있으니, 한탄스러움을 금할 수 있겠는가? 우리 나라는 좁고 작은데다 문벌(門閥)을 숭상하여 사람을 등용하는 길이 이미 협소하다. 그런데 한쪽이 진출하면 한쪽은 물러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또 대부분 막혀 있으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그 근원을 미루어 생각해 보건대, 실은 내가 대공 지정(大公至正)한 도리로 위에서 표준을 세우지 못하여 이렇게 된 것이므로, 내가 나 자신을 책망하며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바야흐로 따스한 봄이 돌아와 화기(和氣)가 애연(藹然)하니, 시절과 함께 모두 새로와질 때가 어찌 바로 지금이 아니겠는가? 그대들 여러 신하들은 마음을 씻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날 하던 것처럼 하지 말고 함께 나라를 다스려 나갈 계책에 힘쓰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인주(人主)는 백성의 부모가 되는 것이니, 백성들의 굶주림은 자신의 굶주림과 같다. 더구나 지금 굶어죽은 사람이 날마다 저자 거리에 쌓여가는데도 구원하지 못하니, 어찌 가슴 아픔을 금할 수 있겠는가? 진휼청(賑恤廳)으로 하여금 특별히 제휼(濟恤)을 더하게 하고, 다시 여러 관청에 신칙(申飭)해 착실히 시신(屍身)을 묻어주어 나의 슬퍼하고 애통해 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서(湖西)에 보냈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춘당대(春塘臺)에 행차하여 문과ㆍ무과를 시험하여 뽑았으며, 대신(大臣)을 보내어 여단(癘壇)에 제사지내게 하였다.

단종(端宗)을 추복(追復)하여 제주(題主)20035) 할 때 왕이 장차 친림(親臨)하려고 하니, 부제학(副提學) 조상우(趙相愚)가 전염병이 극심하다며 친히 거둥하는 것을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왕이 특별히 그를 파직시키고, 정원(政院)의 복역(覆逆)에 답하기를, '나의 소신(所信)이 사리에 통하고 있다고 스스로 믿어왔는데, 무식한 말이 논사(論思)하는 곳에서 나왔으니, 경계하고 꾸짖는 조처는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하였다. 또 옥당(玉堂)의 차자(箚子)에 답하기를, '옛 사람 중에 전염병이 아주 극성을 떨어 사망자가 계속 생기는데도 혼자 남아서 떠나지 않은 사람20036) 이 있었다. 부로(父老)들이 전염병에 감염되지 않은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는데, 능히 감염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더구나 인주는 천승(千乘)의 존귀한 몸으로 국가(國家)의 막대 막중한 의례(儀禮)에 당면하여 전염병을 두려워한 나머지 감히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이에,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은 비록 간절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고 한다면, 이것은 일개 필부(匹夫)의 소신보다도 못한 것이다. 조상우는 도리어 아녀자나 하는 짓을 본떠 먼 조상을 추모하는 지극한 정성을 이해하지 못하니, 사리에 통한 군자(君子)가 조용히 살펴본다면 반드시 나의 말을 옳지 않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0037) 에 하교하기를, '나라의 운수가 불행하여 4년 동안 큰 흉년이 들었고, 죽을 뻔하다 살아난 사람들은 다시 전에 없던 무서운 전염병에 걸렸다. 서쪽 변방에서 시작하여 8도(八道)에 두루 번져, 마을에는 온전한 집이 없고 백 명에 한 명도 치료되지 못했다. 살아남는 백성이 없다면, 나라는 장차 어디에 의지할 것인가? 이 때문에 근심스럽고 조급하여 먹어도 쉬어도 편안하지가 않다.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렸으나, 신(神)은 나를 돌아보지 않고 신령한 감응은 더욱 까마득하기만 하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으니 백성들이야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아! 난로(鑾輅)20038) 를 타고 봄을 맞이하니, 화창한 기운이 애연(藹然)하여 초목과 곤충이 모두 우로(雨露)의 은택에 휩싸여 있는데, 온 동토(東土)의 억만(億萬) 백성들은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져 있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인가? 안으로는 경조(京兆)와 밖으로 도(道)를 다스리는 신하들은 각별히 칙유(勅諭)를 더하여 약품을 공급해 구료(救療)하고 시신(屍身)을 거두어 묻어주도록 하라. 근신(近臣)을 나누어 보내되, 제단(祭壇)을 설치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고, 민망하고 측은히 여김을 보여주어 조금이나마 번민하고 원통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대신(大臣)이 '문종조(文宗朝)의 직제학(直提學) 원호(元昊)는 단종(端宗)의 상복(喪服)을 입고, 제수(除授)하는 명령에 나가지 아니하였으니, 충의(忠義)가 육신(六臣)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아뢰니, 특별히 정려(旌閭)할 것을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김시습(金時習)의 절의(節義)는 지금의 백의(伯夷)입니다.' 하니, 즉시 증직(贈職)하고 제사를 내릴 것을 명하였다. 친히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집에 임하여 문병(問病)하고, 초상(初喪)이 나자 곡림(哭臨)하였다. 김응하(金應河)와 이순신(李舜臣)의 자손으로 입조(立朝)한 자를 수령(守令)으로 차송(差送)하고, 그 제사를 폐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현덕 왕후(顯德王后)의 아버지 권전(權專)의 관작(官爵)을 회복시켜 줄 것을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를 내려줄 것을 빌었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경진년20039) 에 춘당대(春塘臺)에 나가서 관무재(觀武才)하고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겨울에 천둥이 친 변괴 때문에 대신(大臣)과 2품(二品)이상의 관원과 삼사(三司)를 명소(命召)하여 각자 재앙을 그치게 할 방도를 진달하게 하였다. 여러 도(道)의 처음부터 파종(播種)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특별히 대동미(大同米)를 감하여 주었고, 양서(兩西) 지방의 대동미가 없는 곳에는 대동법(大同法)의 관례대로 재량해 감면해 주었다. 계성묘(啓聖廟)를 명륜당(明倫堂)의 곁에 세울 것을 명하였다.

신사년20040) 이제묘(夷齊廟)의 편액(扁額)을 써서 내렸는데 '청성(淸聖)'이라 하였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특별히 어필(御筆)로 사액(賜額)하여 오로지 천년 뒤 존경심을 일으키는 뜻을 표현한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사직단(社稷壇)에 거둥하여 비가 내리기를 빌었다. 하교하기를, '옛적에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초옥(楚獄)에 함부로 처리된 것이 많다 하여 밤에 일어나 방황하다가 친히 낙양(洛陽)의 감옥에 나아가 판결해 내보낸 것이 많았다.20041) 지금 금오(金吾)에 시수(時囚)20042) 가 매우 많으니, 막히고 답답한 기운이 어찌 위로 하늘의 조화를 범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가뭄을 걱정하는 때를 당하여 마땅히 비상한 조처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연(輦)을 타고 금오를 지나며 친히 가서 녹수(錄囚)20043) 하였다.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여 구언(求言)하였으니, 정전(正殿)을 피하고 상선(常膳)을 줄였다.

8월 14일에 왕비(王妃)가 창경궁(昌慶宮)의 경춘전(景春殿)에서 승하(昇遐)하니, 시호(諡號)를 인현(仁顯), 능호(陵號)를 명릉(明陵), 전호(殿號)를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대신(臺臣)이 약(藥)을 의논한 여러 의관(醫官)들을 죄줄 것을 청하자, 왕이 말하기를, '옛 사람이 이르기를,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 있다.」 하였다. 사람의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하늘에 달려 있지 않음이 없는데, 하물며 제왕(帝王)의 존귀함이겠는가? 지금 전적으로 여러 의관들만 책망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 일이겠는가? 옛적에 당(唐)의 의종(懿宗)은 공주(公主)가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다 하여 의인(醫人)을 죽였고, 황명(皇明)의 마황후(馬皇后)는 붕어(崩御)할 적에 「함부로 죽이지 말라.」고 일러 경계하였으니,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가? 내가 일찍이 이것을 내전(內殿)에게 말했더니 나의 말에 깊이 감복(感服)하였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친히 무고옥(巫蠱獄)을 국문(鞫問)하여 여러 역적들이 복법(伏法)되었다. 역종(逆宗)20044) 이항(李杭)이 국모(國母)를 모해(謀害)한 정상이 이미 갖추어지니, 특별히 경전(磬甸)하라 명하고 또 거두어 장사지내 주라고 하였다. 하교하기를, '지금 내가 종사(宗社)를 위하고 세자(世子)를 위해 이처럼 부득이한 일을 하는 것이다. 내가 어찌 즐거이 하겠는가? 희빈(禧嬪) 장씨(張氏)를 자진(自盡)하게 하였으니, 아아! 세자의 정사(情事)를 내가 어찌 염려하지 않겠으며, 여러 신하들의 춘궁(春宮)을 위한 간곡한 정성을 또한 어찌 알지 못하겠는가? 생각에 생각을 더하고 또 깊이 생각해 보았지만,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런 처분을 버리고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에 나의 뜻으로 좌우(左右)에 유시(諭示)한다.' 하였다.

임오년20045)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拜謁)하고,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10월 3일에 김씨(金氏)를 책봉(冊封)하여 왕비(王妃)로 삼았으니,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 김주신(金柱臣)의 따님이다.

계미년20046) 에 하교(下敎)하기를, '한(漢)나라 문제(文帝)는 해내(海內)가 편안한 때에도 언제나 조령(詔令)을 내려 곧 백성들을 진념(軫念)하였다. 더욱이 지금은 8도(八道)의 민생(民生)이 이제 막 굶주림과 전염병을 겪어 채 소생하지 못하였는데, 신역(身役)이 침노하여 지치게 만들고 있다. 바야흐로 봄이 되어 만물이 자라는데, 불쌍한 우리 죄없는 백성들만 유독 위망(危亡)에 떨어졌으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 마땅히 다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농사는 천하의 근본이니 흉년에는 권농(勸農)에 더욱 마땅히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유사(攸司)는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혹시라도 안일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라. 이어서 생각건대, 임금은 백성에게 있어서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관계와 같은 것이니, 자식에게 고질병이 있다면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이 어찌 서서 그 죽음을 바라보기만 하고 급히 구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생민(生民)의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런데도 하루 이틀 단지 시간을 미루어대는 것만 일삼아서 물불에 빠진 백성들을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으니, 내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이번 새봄부터 부디 조속히 변통(變通)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下敎)하기를, '편안할 때 위태로움을 잊지 않고, 미리 대비하면 근심이 없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급선무이다. 요즈음 보건대, 재이(災異)가 거듭 나타나 도성(都城)이 지척(咫尺)인 곳에서 범이 마구 나다니니, 범은 전쟁의 형상이다. 그 병졸(兵卒)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빨리 불우(不虞)의 일에 대비를 강구하게 하라.' 하였다.

모화관(慕華館)에 거둥하여 칙사(勅使)를 전송하고, 지나는 길에 무안왕(武安王)의 사당에 나아갔다.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무안왕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을 평소 깊이 사모하였는데, 칙사를 전송한 뒤 유묘(遺廟)가 시야(視野)에 들어왔다. 지금 와서 우러러 읍(揖)하니, 드넓은 심회(心懷)가 더욱 간절하다.' 하였다.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20047) 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이정청(釐正廳)을 설치하여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차출(差出)하고 양역(良役)의 변통(變通)을 관장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급히 할 만한 것은 급히 하고, 늦게 할 것은 늦게 하여 완급(緩急)에 각기 차례가 있게 하라. 일을 혹시 너무 급히 하면 폐단(弊端)이 생기지 않을 수 없으니, 생각을 두고 게을리하지 않으며 점차 다스려 나간다면 저절로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하였다. 기묘년20048)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와 각사(各司)의 노비(奴婢) 1만 1천여 구(口)의 도고(逃故) 공포(貢布)를 탕척(蕩滌)해 주었다. 친히 대정(大政)을 행하였다.

갑신년20049)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진대(賑貸)하였다. 그리고 이정청(釐正廳)의 여러 신하들에게 신칙(申勅)하여 지난날처럼 대충대충하지 말게 하였다. 해마다 2월에 바치는 궐내(闕內)의 뜰에 까는 솔잎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당초에 북한 산성(北漢山城)을 축조하고자 하였으나, 논의(論議)가 서로 달라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고 염희(恬憘)20050) 하며 세월만 보내니, 진실로 매우 답답하다. 그러니, 대계(大計)를 빨리 결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도성(都城)을 잘 보수하면 종사(宗社)가 여기에 있고 인민(人民)이 여기에 있으므로, 백성들이 각기 그 부모와 처자(妻子)를 위해 반드시 힘을 다하여 사수(死守)할 것이요, 또 적에게 제 무기를 빌려줄 근심도 없을 것이니, 계획을 정하여 수축(修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은 모두 바로 보장(保障)의 땅이니 끝내 버릴 수 없다. 남한 산성의 경우 연이어 수선(修繕)하였고, 강도의 경우 토성(土城)을 쌓은 것은 뜻한 바 있는데, 올해 겨우 쌓아놓으면 내년에 즉시 무너져 공력(功力)을 잇기가 어려우니, 내성(內城)을 견고하게 쌓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하였다.

사은사(謝恩使)가 연경(燕京)에서 돌아와서 해적(海賊) 장비호(張飛虎)의 일을 아뢰니, 왕이 말하기를, '고사(古事)로 보건대, 먼저 연호(年號)를 세운 자는 그 형세가 장구(長久)하지 못했다. 이 해적이 먼저 연호를 세웠으니, 그가 오래 가지 못할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태묘(太廟)에 나아가 비를 빌었는데, 세자가 아헌례(亞獻禮)를 행하였다.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으며,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고, 술을 금하였다. 친히 선농단(先農壇)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기묘년20051) 조의 거두지 못한 신포(身布) 1백 87동(同)과 쌀 2천 5백여 석(石), 돈 1천 5백여 관(貫)을 탕척(蕩滌)해 주었다. 수재(守宰)로서 장법(贓法)을 범한 무리는 양전(兩銓)에 기록해 보내 외직(外職)에 제수(除授)하지 말게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신(近臣)을 한강(漢江)과 저자도(楮子島)에 보내어 비를 빌게 하였다. 친히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을유년20052) 봄에 큰 눈이 왔다. 하교하기를, '옛부터 재이(災異)가 일어나는 것은 모두 인사(人事)의 과실에 연유한 것인데, 하늘에 인애(仁愛)하는 마음 아닌 것이 없다. 재앙을 만나고도 스스로 반성할 줄 모른다면 화란(禍亂)이 뒤따를 것이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지금 바로 늦은 봄철에 양기(陽氣)가 피어올라 온갖 초목이 죄다 싹을 튀우는데, 큰 눈이 며칠 동안 계속 내려 날이 춥고 쌀쌀하다. 봄 날씨가 겨울 날씨 같으니, 그 응험이 아름답지 못하다.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마치 봄철의 얼음을 밟고 건너는 듯하므로, 자신을 돌아보고 수성(修省)하기에 겨를이 없지만, 다만 생각건대, 지금의 간절하고 급박한 근심은 조정의 의논이 분열된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전후(前後)에 걸쳐 칙려(勅勵)한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왔으나, 누적되어 온 고질적인 병폐는 구료(救療)하기 쉽지 않으므로, 내가 몹시 답답하게 여긴다. 상하가 뇌동(雷同)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니, 이것을 군신(群臣)들에게 바라는 것은 아니다. 일을 의논할 때 각자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가부(可否)를 서로 도와 경알(傾軋)하는 습성을 통절히 버린다면, 조정(朝廷)이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아! 그대 신료(臣僚)들은 힘써 서로 공경하고 협력하는 데 힘을 다해 조금이나마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하라.' 하였다.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경녕전(敬寧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거행하였다.

병술년20053)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북관(北關)과 영동(嶺東)에 나누어 보내고 영동의 아홉 군(郡)의 대동포(大同布)를 특별히 감해 주었다. 한성부(漢城府)에 명해 전후(前後)의 굶어죽은 사람 가운데 땅에 드러난 해골(骸骨)을 묻어주게 하였다.

8월에 왕이 법전(法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받들어 헌수(獻壽)하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ㆍ무관(武官)이 해가 지도록 모시고 잔치하였다. 지난해에 군신(群臣)들이 왕이 즉위(即位)한 지 30년이 되었다며 휘호(徽號)를 올리고, 진연(進宴)하고 진하(陳賀)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이 겸읍(謙揖)하여 허락하지 않았다. 장보(章輔)들이 상소(上疏)하여 청하였으나, 심지어 언지(言志)의 글을 내려 '내가 덕이 없는 사람으로 큰 기업(基業)을 이은 지 이제 29년이다. 그동안 해마다 연이어 농사에 병이 들어 백성들이 죽마저 제대로 못 먹었다. 나라일이 매우 위급하고 천재(天災)가 날이 갈수록 또 더욱 심해지니, 칭경(稱慶)이란 말은 꺼내지 말고, 다만 스스로 밤낮으로 조심하라.' 하였다. 세자가 세 번이나 글을 올려 진청(陳請)하였으나, 그래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大臣)이 누차 청하여 마지 않으니, 단지 진하와 진연만 허락하되, 힘써 간약(簡約)함을 따라 외연(外宴)에는 여악(女樂)을 쓰지 말게 하는 것을 영원히 정식(定式)으로 삼게 하였다. 날짜를 잡아놓고 미처 행하지 아니하였는데, 풍재(風災)로 인해 특별히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가 이때에 와서 예(禮)를 거행했던 것이다. 하교하기를, '이번의 진연이 내가 어찌 즐겨 하겠는가? 춘궁(春宮)의 세 번에 걸친 상소와 공경(公卿)의 간청을 끝내 굳이 거절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이 예대(豫大)에 가까우니, 단지 부끄럽고 두려움만 더할 뿐이다. 연례(宴禮)를 이미 지냈으니, 마땅히 추은(推恩)의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사족(士族) 80세 이상과 상한(常漢) 90세 이상에게 가자(加資)하고, 부녀(婦女)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라. 기로(耆老)의 여러 신하 중 2품 이상에게는 별도로 의자(衣資)와 쌀ㆍ고기를 하사하고, 3품 이하에게는 쌀과 고기를 하사하도록 하라.' 하였다. 무인년20054) 이전의 미처 봉납(捧納)하지 못한 환상(還上)을 모두 탕감(蕩減)해 주고, 도하(都下)의 상한(常漢) 중 기로(耆老)로서 80세 이상인 사람 수백
명을 널찍한 곳에 모아서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성악(聲樂)을 갖추어 술과 고기를 대접하게 하였다.

정해년20055) 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관무재(觀武才)하고 이어 문신(文臣)을 정시(庭試)하였다. 그때 마진(麻疹)20056) 이 기승을 떨어 사망자가 매우 많았다. 하교(下敎)하기를, '일찍이 무진년20057) ㆍ기사년20058) 에 온 집안 식구가 모두 죽은 경우에 대해 휼전(恤典)을 거행한 일이 있었다. 환(鰥)ㆍ과(寡)ㆍ고(孤)ㆍ독(獨)으로 의지할 데 없는 무리는 이번에도 또한 뽑아 내어 휼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고려(高麗)의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제사를 내려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일찍이 내가 한때의 희로(喜怒)로 인해 법을 받드는 아전을 함부로 죽였는데, 참회(懺悔)해도 소용이 없다. 그가 비록 미천했지만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대한 것이고, 받들던 바가 법(法)이었는데, 변수(駢首)20059) 하여 운명(殞命)하였으니 지금까지도 가엾이 여긴다. 그의 처자에게 미포(米布)를 넉넉히 주도록 하라.' 하고, 이어 중외(中外)의 관리들에게 감히 희로로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계칙(戒飭)하였다.

강연(講筵)에 나아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정(鄭)의 양소(良霄)가 집에 굴(窟)을 파고 밤새도록 술을 마시다가 마침내는 그 몸을 망쳤으니20060) , 술의 화(禍)는 옛부터 그러하였다. 「문왕(文王)이 소자(小子)20061) 와 유정(有正)20062) ㆍ유사(有事)20063) 에게 교훈하시기를, 항상 술을 마시지 말라고 교훈하자,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술을 마시되 다만 제사 때만 마시니 덕(德)이 있어 취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비록 술을 마시더라도 이 옛 훈계를 생각하여 경계할 바를 안다면 어찌 술의 해(害)가 있겠는가? 관리의 직책이 있는 자가 모여서 술을 마시면 직무(職務)를 포기하고 심한 자는 부모가 금하여도 그치지 아니하여 몸을 망치는 데까지 이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무자년20064) 에 왕이 시신(侍臣)에게 말하기를, '폐해를 개혁하려는 의논이 좋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이정청(釐正廳)의 경우를 보건대, 대저 변통(變通)한다는 것이 지극히 어려우니, 일의 이해(利害)를 반드시 확실하게 따져본 연후에야 바야흐로 변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약 날마다 개혁하여 성급하게 다스리기를 구한다면 이익은 없고 폐해만 또 더욱 심해질 것이니, 옛부터 잘 변통하지 못하고 번쇄(煩碎)하지 않은 경우는 있지 않았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생민(生民)의 기쁨과 근심은 수령(守令)에게 달렸으니, 수령은 신중하게 선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옛적에 당(唐)의 선종(宣宗)은 이행언(李行言)의 이름을 대궐의 기둥에 써붙여 놓았다.20065) 내가 일찍이 하나의 첩자(帖子)를 만들어 이름을 대주첩(代柱帖)이라 하고, 별도로 포폄(褒貶)을 받은 수령(守令)을 기록하여 때때로 상고로 열람하였는데, 다만 빠진 자가 없지 않으니, 전조(銓曹)로 하여금 순전히 포상을 받은 수령만 골라서 뽑아 써서 들이게 하라.' 하였다.

삼남(三南)에 전염병이 극심하게 번졌으므로 약물을 보내 구료(救療)하라고 명하였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친히 태묘(太廟)에 기도하고, 감선(減膳)하고 철악(撤樂)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통을 일찍이 스스로 점검하여 보니, 희로가 중도(中道)에 맞지 않고 언로(言路)가 열리지 못하고, 시조(施措)가 정당함에서 어긋나고, 실혜(實惠)가 미치지 못한 것이었다. 정부(政府)에서 널리 직언(直言)을 구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어가(御駕)가 남교(南郊)에 거둥하여 비를 빌었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근시(近侍)를 보내 쌍령(雙嶺)의 전사한 곳에서 제사지내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관동(關東)의 인삼(人蔘)의 폐단을 말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는데, 늘 변통(變通)하려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옛적에 송(宋)의 인종(仁宗)은 밤에 구운 양고기가 생각이 나도 주림을 참고 먹지 않았는데20066) , 하물며 그보다 더 큰 민폐(民弊)야 말해 무엇하랴? 내국(內局)으로 하여금 재량하여 감해 주게 하라.' 하였다.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는 변고로 인해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으며, 음우(陰雨)에 대비할 것을 신칙(申飭)하였다.

기축년20067) 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황일호(黃一皓)의 일은 온 세상에서 다만 그가 원통하게 죽은 줄로만 알고, 그가 사절(死節)한 줄은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지난해 황윤(黃玧)의 상(喪) 때 성상께서 사절한 사람의 아들이라 하여 상장(喪葬)에 소용되는 것을 제급(題給)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성감(聖鑑)이 보통 사람의 소견보다 아주 탁월하십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일이 존주(尊周)에 관계되었는데 끝내 참화(慘禍)를 입었으니, 특별히 증직(贈職)ㆍ증시(贈諡)하라.' 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기자(箕子)가 동방(東方)에 봉(封)해지자 8조(八條)의 가르침을 펼쳐 남겨진 교화가 수천 년 이래 없어지지 않고 있다. 일찍이 근시(近侍)를 보내 그 사당에 제사지내게 하였지만 세월이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 승지(承旨)를 보내 제사지내게 하고, 별도로 수호(守護)를 더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말하기를, '평양(平壤)을 수복(收復)한 뒤 선묘(宣廟)께서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후(前後) 승패(勝敗)의 다름을 물으니, 답하기를, 「먼저 온 북방(北方)의 여러 장수들은 오로지 오랑캐를 막는 전법(戰法)을 썼기 때문에 패배를 초래했고, 뒤에 온 장수들은 능히 척장군(戚將軍)20068) 의 왜구를 막는 전법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전승(全勝)하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선묘께서 그 책을 구득(購得)하여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연습하게 하였지만, 지금 살펴보건대, 활법(活法)20069) 이 없다. 상량(商量)하여 변통(變通)할 점이 없지 않으니, 병졸을 거느리는 신하로 하여금 활법을 강구(講究)하게 하라.' 하였다.

경인년20070)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기민(饑民)을 진휼하게 하였다. 이에 앞서 왕이 여러 달 위예(違豫)하다가 평복(平復)되니, 여러 신하들이 누차 칭경(稱慶)의 거행을 청하였다. 왕이 굳이 사양하다가 한참 뒤에야 억지로 따랐다.

4월 25일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세자(世子)가 술잔을 올리고, 종친(宗親)과 문관(文官)ㆍ무관(武官)들이 모시고 벌여서서 차례로 헌수(獻壽)하였다. 춘당대(春塘臺)에 거둥하여 관무재(觀武才)하고, 문과ㆍ무과를 시험해 뽑았다. 강원도(江原道)의 양전(量田)을 마친 다음 영서(嶺西) 지방의 수미(收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연신(筵臣)이 혹 '인재(人才)가 아주 적다.'고 말하면, 왕이 말하기를 '인재를 구하기 어려운 것이 어찌 말세(末世)여서 인재가 없기 때문이겠는가? 옛부터 창업(創業)한 임금은 모두 승국(勝國)20071) 의 인재를 등용하여 성공에 이르렀으니, 어느 시대인들 인재가 없겠는가? 다만 알아보지 못함으로 인해 쓰지 못할 뿐이다.' 하였다.

신묘년20072) 에 하교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왕이 입시(入侍)한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북한산(北漢山)에 성(城)을 쌓는 것의 편부(便否)를 진달하게 하니, 여러 사람의 의논이 한결같지 않았다. 왕이 말하기를, '계획은 비록 많더라도 결단은 혼자 하고자 한다. 도성(都城) 아주 가까운 곳에 이러한 천험(天險)의 땅이 있으니, 만약 지금 수축(修築)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전에는 샘물을 염려했지만 지금 들으니 샘물도 또한 풍족하다고 한다.' 하고 성을 쌓기로 결정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다 하여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칙려(勅勵)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지금의 고질적인 폐단으로 양역(良役)보다 심한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히 백성의 고통을 진념(軫念)하여 이제 막 변통(變通)하도록 하였는데, 한편 궐액(闕額)을 보충하고 한편 인족(隣族)을 침징(侵徵)하니, 결단코 왕자(王者)의 정사(政事)로 차마 할 바가 아니다. 신묘년20073) 이전의 군병(軍兵)과 노비(奴婢) 중 도망한 자들의 징포(徵布)를 모두 탕감(蕩減)해 주도록 하라.' 하였다.

임진년20074)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하고, 특별히 기전(畿甸)의 재해를 입은 고을의 춘수미(春收米)를 세 말씩 감해 주었다.

여름에 가뭄이 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망하기를, '나의 마음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 간절하지만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지 못하고 있다. 극기(克己)의 공부가 철저하지 못한 바 있고, 마음을 비워 받아들이는 도량이 넓지 못한 바 있어서, 기강(紀綱)을 진작(振作)시키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퇴폐와 타락의 근심은 더욱 심해지고, 실공(實功)에 힘쓰려고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허위(虛僞)의 습관은 오히려 많아지니, 모두 나의 과실이다. 정전(正殿)을 피하고 더욱 하늘을 공경히 섬기는 정성을 돈독(敦篤)하게 할 것이니, 마땅히 정부에서 직언(直言)을 널리 구해서 내가 미치지 못하는 점을 도와야 할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6경(六卿)의 우두머리에 있는 자가 과연 능히 용사(用捨)를 공정하게 하고 시비(是非)를 분명히 한다면, 관사(官司)는 적임자를 얻고 조정은 화정(和靖)해질 것이다. 방악(方岳)20075) 의 신하가 출척 유명(黜陟幽明)20076) 하는 것이 한결같이 공정한 마음에서 나오고, 절진(節鎭)의 장수가 항상 진루(陣壘)를 대한 것처럼 감히 게으르거나 소홀하게 하지 않는다면, 조가(朝家)에서 위임한 중임을 거의 저버리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효부(孝婦)가 원한을 품자 3년 동안 가뭄이 들었고,20077) 연신(燕臣)이 통곡(慟哭)하자 5월에 서리가 내렸다.20078) 만약 지극한 원한을 펴지 못한 자가 있으면 중외(中外)의 관원들은 상세히 살펴서 아뢰도록 하라. 옥사(獄事)를 판결하고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는 데 이르러서도 세력의 강약(强弱)을 보아 입락(立落)하지 말고, 한결같이 사실의 곡직(曲直)에 따라 처리한다면, 소민(小民)들이 거의 원통함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또 근래 사대부(士大夫)들의 풍습이 아름답지 못하고 염우(廉隅)가 너무 승(勝)하여 벼슬자리를 비워두는 일이 갈수록 심해진다. 옛날 임진년20079) ㆍ계사년20080) 병란(兵亂) 뒤 잿더미만 눈에 가득한 날 사대부들이 감히 노고(勞苦)를 말하지 못하고 다 연곡(輦轂)20081) 에 모여서 분
주히 직무를 수행하였는데, 지금의 사대부들은 이와 다르니 내가 실로 개탄스럽게 여긴다.' 하였다.

계사년20082) 에 하교하여 권농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였다.

즉위(即位)한 지 40년이 되었으므로 종묘에 고(告)하고 진하(陳賀)하였으며, 반교(頒敎)ㆍ반사(頒赦)하였다. 대신(大臣)과 문무(文武) 2품 이상이 빈청(賓廳)에 모여서 아뢰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전하(殿下)께서 사복(嗣服)하신 이래 성덕(聖德)과 홍업(洪業)으로서 마땅히 유양(揄揚)20083) 하고 크게 칭찬해야 할 것을 참으로 일일이 손꼽아 다 들 수가 없습니다. 단종(端宗)의 복위(復位)에서 성상의 효성이 더욱 빛이 났고, 곤위(坤位)가 거듭 바로된 데서 일월(日月)이 정명(貞明)하였습니다. 신종(神宗)의 망극(罔極)한 은혜를 추모하고, 효종(孝宗)의 「지통(至痛)하다.」는 하교(下敎)를 체념하여 단(壇)을 쌓아 향사(享祀)하자, 대의(大義)는 천하(天下)에 천명(闡明)되고 풍성(風聲)은 온 나라를 움직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는 실로 지극한 덕(德)과 크나큰 공(功)이 있었으므로, 군신(群臣)들이 우러러 존호(尊號)를 청하자, 처음에는 사양하시다가 끝내 받으셨습니다. 대개 어찌 옳지 못한데도 성조(聖祖)께서 구차스럽게 받으셨겠습니까? 신 등이 전하께 바라는 바는 또한 오직 성조께서 행하신 바를 따르는 데 있고, 감히 예대(豫大)의 설(說)을 만들어 성상(聖上)의 겸손을 지키시는 덕(德)에 누를 끼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해마다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곤궁하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있다. 비록 조종(祖宗)께서 이미 행했던 전례가 있다고는 하나 덕이 없는 내가 감히 바랄 바가 아니다. 결단코 윤허하여 따르기 어렵다.' 하였다. 이에 대신(大臣)이 누차 아뢰어 간청하고, 또 백료(百僚)를 거느리고서 대궐 뜰에서 호소하였다. 세자(世子)가 상소(上疏)하여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따르기를 청하고, 두 왕자(王子)가 여러 종친(宗親)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청하니, 왕이 뒤에 마지못해 따랐다. 군신(群臣)이 의논하여 존호(尊號)를, '현의 광륜 예성 영렬(顯義光倫睿聖英烈)'이라 올렸다.

하교하기를, '어약(御藥)에 쓰이는 생우황(生牛黃) 때문에 며칠 안에 수백 마리의 많은 소를 도살하였다. 비록 축물(畜物)이긴 하지만 마음에 측은하다. 도살을 5일까지 한하여 우선 정지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무재(武才)를 시험보였다. 정언(正言) 홍계적(洪啓迪)이 상소하여 논하기를, '금액(禁掖)20084) 안에서 노래하고 떠드는 소리가 있으니, 정성(鄭聲)20085) 의 훈계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만약 간신(諫臣)의 말이 아니었다면 이런 해괴한 일을 어찌 알았겠는가? 모여서 노래하고 떠든 자들을 조사해 내어 엄중히 징계하고, 구사(丘史)로서 궐정(闕庭)에 출입하는 자들을 모조리 엄금(嚴禁)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서 홍계적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여 포상하였다.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호남(湖南)에 보냈다. 하교하기를, '내탕(內帑)의 은자(銀子) 1천 냥을 호서(湖西)에, 8백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보내 진자(賑資)에 보태도록 하라. 그리고 강도(江都)의 쌀 1만 석(石)을 호남(湖南)에, 연해(沿海)의 곡식 1만 석을 제주(濟州)에 옮겨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겨울에 천둥이 울렸기 때문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구언(求言)하였다.

갑오년20086) 에 하교하기를, '진정(賑政)과 권농(勸農)을 바로 이때 신칙(申飭)해야 할 것인데, 질병(疾病)이 이와 같아서 친히 스스로 별도로 하유(下諭)할 수 없으니, 정원(政院)에서 문장의 문구(文句)를 만들어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와 유수(留守) 및 감진 어사(監賑御史)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때 성후(聖候)가 오랫동안 위예(違豫)한 가운데 있었는데, 약원(藥院)에서 물오리를 올리니, 왕이 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둥지를 엎지 않으며, 새끼와 알을 취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옛 성인(聖人)이 생육(生育)의 뜻을 취한 것이다. 이렇게 봄이 화창하여 만물(萬物)이 생육하는 때를 당해서 차마 상해(傷害)할 수가 없다. 병을 치료하는 데 절로 다른 방도가 있을 것이니, 어찌 꼭 이것을 취해야 하겠는가? 다시는 들이지 말라.' 하였다.

재차 제주(濟州)의 공인(貢人)을 차비문(差備門) 밖에 불러서 진정(賑政)과 백성의 고통을 상세히 물었다. 전염병이 극성을 떨고 있다는 말을 듣고, 약물(藥物)을 내려 보내 구료(救療)하게 하였다. 송조(宋朝)의 주염계(周濂溪)ㆍ장횡거(張橫渠)ㆍ정명도(程明道)ㆍ정이천(程伊川)ㆍ소강철(邵康節)ㆍ주회암(朱晦庵) 등 여섯 현인(賢人)을 성전(聖殿)에 승배(陞配)하고, 반교(頒敎)하였다. 9월 19일에 군신(群臣)들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을미년20087) 에 하교(下敎)하여 권농(勸農)하고, 굶주린 백성을 진휼(賑恤)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금부(義禁府)ㆍ형조(刑曹)의 당상관(堂上官)과 함께 빈청(賓廳)에서 회의(會議)하여 품지(稟旨)해서 체수(滯囚)를 재처(裁處)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도(珍島) 한 군(郡)에 10년 동안 흉년이 들어 남아 있는 백성들이 지탱하여 보전할 수 없다 하니, 해외(海外)의 피폐한 백성이 혹 원한을 품고 펴지 못한 나머지 위로 천화(天和)를 범해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찾아서 물어 아뢰게 하라.' 하였다.

병신년20088)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제주(濟州)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양전(量田)한 지 이미 오래 되어 경계(經界)가 바르지 않다.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왕정(王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한다.」 하였다. 반드시 8도(八道)에 풍년이 들어 한꺼번에 하기를 기다린다면, 끝내 기약이 없을 것이니, 이에 빨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짓고 제주(濟州)의 굶어죽은 사람들에게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예기(禮記)》 월령(月令)에, 「드러난 뼈를 가려 주고, 썩은 살을 묻어준다.」 하였으니, 대개 산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죽은 사람에게 미루어 미치는 것이다. 더구나 탐라(耽羅) 한 지역의 백성들이 전후로 굶어 죽은 자가 수천에 이른다 하니, 거두지 못해 들판에 뼈를 드러내 놓은 시신이 반드시 많을 것이다. 생각하건대, 나도 몰래 측은한 생각이 드니, 수신(守臣)으로 하여금 묻어주고 아뢰게 하라.' 하였다.

가뭄이 들자 하교(下敎)하여 자신을 책망하고, 군신(群臣)들을 훈칙(訓勅)하였다. 은자(銀子) 2천 냥을 기영(圻營)에 내려 주고 진자(賑資)에 보태 쓰게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계복(啓覆)20089) 을 행하지 않은 지가 3년이 되었다. 혹은 범죄(犯罪)가 지극히 중한데 법(法)을 집행하기 전에 경폐(徑斃)20090) 하기도 하고, 혹은 정리로 보아 용서할 점이 있는데도 한결같이 판결이 지체되기도 하므로, 작년에 이것을 염려하여 반드시 시행하고자 했지만, 나의 병 증세가 더하여 실행하지 못하였다. 올해는 결단코 시행하고자 한다.' 하고, 마침내 9월에 계복하여 그 계동(季冬)을 기다려 형을 집행하게 하였다.

정유년20091) 에 여러 도(道)의 감사(監司)들에게 하교하여 권농하고, 제언(堤堰)을 수리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병으로 앓는 동안에도 오로지 생각은 모두 백성에게 있다. 이 말은 입에만 올리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심복(心服)에서 나온것이다.' 하였다. 이때 왕이 여러 해 위예(違豫)했는데, 눈병과 다리의 마비 등의 증상으로 가장 괴로와하였다. 그래서 장차 온천(溫泉)에 목욕하려고 호서(湖西)의 수신(守臣)에게 하유(下諭)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묻고 행재(行在)20092) 에 장문(狀聞)하게 하였다.

3월에 온천에 거둥하여 경기(京畿)ㆍ호남(湖南) 두 도(道)의 나이 80세 이상인 자에게 사족(士族)과 상한(常漢)을 논할 것 없이 모두 가자(加資)할 것을 명하고, 감사(監司)와 차원(差員)ㆍ수령(守令)을 인견(引見)하여 백성의 고통을 찾아 물었다. 관원을 보내 송시열(宋時烈)ㆍ이귀(李貴)ㆍ김집(金集)ㆍ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의 묘소(墓所)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윤집의 사당을 세우고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진휼청(賑恤廳)의 당상관(堂上官)으로 하여금 재차 유개(流丐)20093) 를 갯가에 모아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환궁한 뒤 도신(道臣)에게 차원(差員)을 정해서 거처를 잃은 유개에게 계속 주도록 명하였다. 특별히 호서(湖西)의 병신년20094) 조의 대동미(大同米)를 결(結)마다 두 말씩 감해 주었다.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였다.

하교(下敎)하기를, '근래에 궐내(闕內)에서 술을 파는 자가 있다 하니, 일이 매우 놀랍고 해괴하다. 유사(攸司)로 하여금 형률을 상고하여 과죄(科罪)하게 하라.' 하였다. 왕이 왕위에 오른 지 사기(四紀)20095) 에 직접 만기(萬機)를 관장하고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부지런하여 밥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다. 그러다가 중신(中身)20096) 을 지나자, 나쁜 병이 끊이지 않으니, 지난 을유년20097) 에는 춘궁(春宮)에게 선위(禪位)하고자 하였다. 춘궁이 상소(上疏)하여 굳이 사양하고, 종친(宗親)ㆍ대신(大臣)ㆍ문무 백관(文武百官)으로부터 아래로는 방민(坊民)의 기로(耆老)에 이르기까지 분주히 다투어 간(諫)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성명(成命)을 정지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5년 동안 고질(痼疾)을 앓는 나머지 눈병이 더 심해졌다. 물건을 보면 더욱 어두워 수응(酬應)하기 점점 어려워지니, 나라일이 염려스럽다. 국조(國朝)와 당(唐)나라 때의 고사(故事)에 의해 세자로 하여금 청정(聽政)하게 하라.' 하였다. 세자가 진장(陳章)하여 극력 사양하니, 답하기를, '여러 해 동안 고질을 앓은데다 눈병이 또 심하여 사무(事務)가 지체되니, 병으로 앓는 동안 걱정이 대단하였다. 너에게 명하여 노고(勞苦)를 대신하게 하니, 이것은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이다. 네가 어찌 사양하겠는가? 아! 부탁(付託)하는 것이 지극히 무겁고 너의 책임이 지극히 크니, 이른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혹시라도 게을리하지 말라. 공경과 게으름의 구분에 따라 흥하고 망하는 것이 이에 나뉘어지니, 두려워하지 않으며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오로지 한 생각으로 시종 학문에 종사하라.」 하였으니, 너는 마땅히 노력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재차 올린 상소에 답하기를, '어제 비지(批旨)로 훈계(訓戒)한 말을 너는 공경하고 조심스레 받들어서 다시 사양하지 말라. 그리고 또 근일의 일은 처분(處分)이 바르고, 시비(是非)가 명백하여 백세(百世)
뒤라도 미혹되지 않을 것이다. 일이 사문(斯文)에 관계되니 생각건대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말하는 것이니, 너는 나의 뜻을 따라 혹시라도 흔들리지 말라.' 하였다. 이에 앞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양조(兩朝)에서 예우(禮遇)하던 유현(儒賢)이라 하여 왕이 빈사(賓師)로 대접했는데, 그 문도(門徒) 윤증(尹拯)이 역적 윤휴(尹鑴)에게 빌붙어 오래 전부터 송시열에게 이의를 제기하고자 하였다. 송시열이 윤증의 아버지인 윤선거(尹宣擧)의 묘문(墓文)을 찬술할 때 유양(揄揚)한 바가 그의 기대에 맞지 않자, 윤증은 이 일로 인해 유감을 품고 제 마음대로 고쳐서 물리쳤다. 또 송시열에게 보내는 의서(擬書)를 지어 죄상(罪狀)을 늘어놓으니, 이에 유림(儒林)은 분열되고, 조정의 의논은 마구 흩어져 반세(半世) 동안 윤증이 스승을 배반한 것을 당연한 도리로 여기는 데로 쏠렸다. 왕도 또한 그 일의 실상을 통촉하지 못하고, 일찍이 '아버지와 스승은 경중(輕重)이 있다.'고 하교(下敎)하였는데, 병신년20098) 에 이르러 묘문(墓文)과 의서(擬書)를 직접 얻어 읽어 보자 비로소 그 빙자하여 허구날조한 정상을 살피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아버지와 스승의 경중(輕重)에 대한 설(說)을 일찍이 이미 하교하였으나, 한 번 의서와 묘문을 상세히 본 뒤로 내가 깊이 의리(義理)를 연구하여 시비(是非)가 크게 정해졌으니, 후세(後世)에 할 말이 있게 되었다. 나의 자손된 자들은 모름지기 이 뜻을 따라 굳게 지키고 흔들리지 않아야 옳을 것이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또 비지(批旨)에다 춘궁(春宮)을 교유(敎諭)하니, 반복된 정녕(丁寧)한 가르침이 일성(日星)처럼 밝게 걸려 만세(萬世)에 연익(燕翼)의 계획을 남겨주었다. 사륜(絲綸)이 한 번 전파되자 사림(士林)이 모두 펄쩍 뛰며 경하하였다. 왕이 또 손수 화양(華陽)ㆍ흥암(興巖) 두 서원(書院)의 액호(額號)를 써서 걸게 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내렸다. 하교하기를, '인주(人主)가 현인(賢人)을 존경하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다면 거의 선비의 추향을 바로잡고 사설(邪說)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니, 나의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화양은 곧 송시열을 조두(俎豆)하는 곳이고, 흥암은 곧 송준길(宋浚吉)을 조두하는 곳이다.

무술년20099) 에 감진 어사(監賑御史)를 평안도(平安道)에 보냈다. 왕이 말하기를, '강봉서(姜鳳瑞)의 격쟁(擊錚) 때문에 「대신(大臣)에게 의논하라.」는 하교(下敎)가 있었는데, 내가 평소 강씨의 옥사(獄事)에 대해 마음속으로 항상 측은하게 생각하였다. 《주역(周易)》에 말하기를, 「착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경(餘慶)이 있고, 나쁜 일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여앙(餘殃)이 있다.」 하였다. 임창군(臨昌君)은 소현(昭顯)의 혈손(血孫)으로서 그 자손들의 번연(蕃衍)20100) 함이 당(唐)의 분양(汾陽)20101) 에 비길 만하니, 선인(善人)에게 복을 내리는 이치가 과연 분명하다. 이명한(李明漢)의 문집(文集)을 열람하다가 강석기(姜碩期)의 시장(諡狀)에 이르러 그가 어진 재상이었던 것을 알았고, 또 경덕궁(慶德宮)의 높은 곳에서 소현(昭顯)의 사당을 바라보고 그 신도(神道)의 외롭고 단출함에 서글픈 생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세 건의 일에 느낀 바 있어 드디어 절구(絶句) 셋을 지었다. 작년에 수상(首相)이 관작을 회복해 주는 일을 진달(陳達)했을 적에 마음에 망설이는 바가 있어서 능히 다 말하지 못하고 단지 관작의 회복만을 허락했는데, 대개 강석기가 화(禍)를 입었던 것은 단지 그 딸에게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옛적 을미년20102) 에 연신(筵臣) 이단상(李端相)이 김홍욱(金弘郁)의 원통함을 남김없이 말하였을 적에 효묘(孝廟)께서 한숨을 쉬고 탄식하셨지만, 「일이 선조(先朝)에 관련된 것이라서 감히 의논할 수가 없다.」고 하교하였었다. 그런데 그 뒤에 마침내 김홍욱의 관직을 회복해 주셨으니, 성조(聖祖)의 은미한 뜻을 알 수가 있다. 헌의(獻議)하는 여러 대신(大臣)들은 이 뜻을 알아 주었으면 좋겠다.' 하였다. 또 2품(二品) 이상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회의(會議)하게 하니,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원통하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왕이 말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정해졌고, 공의(公議)도 크게 같으니, 신리(伸理)의 은전(恩典)을 조속히 거행하도록 명하라.' 하였다.

이에 소현 세자빈(昭顯世子嬪)의 위호(位號)를 회복하고, 그 묘소를 봉(封)하였다. 강석기와 김홍욱에게는 제사를 내리고 증직(贈職)하였으며, 자손을 녹용(錄用)하였다.

하교하기를, '나의 병이 고질이 되어 계복(啓覆)에 친림(親臨)하는 것은 형세로 보아 할 수 없으니, 집마다 옥사(獄事)의 판결이 지체되어 유사(瘦死)20103) 할 뿐이다. 계복 역시 형인(刑人) 가운데 있으니, 변통(變通)의 방도가 없을 수 없다. 대벽(大辟)20104) 으로 처단(處斷)할 즈음에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움이 있으면 세자가 스스로 마땅히 면품(面稟)할 것이며, 지금부터 이후로 무릇 형인(刑人)의 공사(公事)에 관계된 것은 일체 동궁(東宮)에 입달(入達)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히 제문(祭文)을 지어 성황단(城隍壇)과 여단(癘壇)에 제사를 내렸다.

기해년20105) 에 태조조(太祖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성산(聖算)이 예순이 되었으므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내국 제조(內局提調) 이이명(李頤命)이 아뢰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향년(享年)이 일흔을 넘긴 것은 근고(近古)에 없는 일인데,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습니다. 비록 근거할 만한 것은 없으나, 고(故) 상신(相臣) 심희수(沈喜壽)와 김육(金堉)이 찬(撰)한 서문(序文)과 《선원보략(璿源譜略)》에 모두 그 일을 기록하고 있고, 또 본소(本所) 서루(西樓)의 제명(題名)한 곳에 사롱(紗籠)20106) 을 설치하여 봉안(奉安)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들은 바가 있어서 그러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집(李楫)이 상서(上書)하여 청한 일은 이미 고사(故事)에 근거하고 있고, 왕세자(王世子)의 희구(喜懼)하는 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병이 많아 쉰을 스스로 기약할 수 없었는데, 이미 쉰을 넘었으니, 항상 「태조께서 예순에 기로소에 들어가셨으니, 나도 만약 그 나이가 되어 성조(聖祖) 아래에 제명(題名)한다면 또한 거룩한 일이다.」고 생각해 왔다. 이제 세자(世子)가 이 일을 누차 청하니, 내가 그 희구하는 정을 생각하여 이에 허락하노라.' 하였다. 이에 기로소에 영수각(靈壽閣)을 세워서 어첩(御牒)을 봉안(奉安)하였다.

4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은술잔을 하사하였다. 또 음악을 내려 기로소의 여러 신하들이 물러나와 기사(耆司)에서 잔치를 벌였다.

하교하기를, '관무재(觀武才)를 혹은 2, 3년 간격으로 혹은 4, 5년 간격으로 하는 것이 고례(故例)였다. 그런데 내가 여러 해 동안 병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설행(設行)하지 못한 지 지금 10년이 되었다. 명관(命官)으로 하여금 대신해 거행하여 위열(慰悅)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9월에 왕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군신(群臣)의 진연(進宴)을 받았다. 삼남(三南)에 균전사(均田使)를 나누어 보냈다. 연령군(延齡君)의 상차(喪次)에 친히 곡림(哭臨)하였다.

(계속)

출전 : 숙종실록 부록 숙종 대왕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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