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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31 (월)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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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738      
[조선] 효종 행장 1 (실록)
효종 대왕 행장(行狀) 1

효종 선문 장무 신성 현인 대왕 행장

국왕의 휘(諱)는 호(淏)이고 자(字)는 정연(靜淵)으로 인조 대왕(仁祖大王)의 둘째 아들이고 원종 대왕(元宗大王)의 손자이다. 모비(母妃) 인열 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서평 부원군(西平府院君) 한준겸(韓浚謙)의 딸인데, 향교동(鄕校洞)의 잠저(潛邸)에서 기미년1126) 5월 22일 해시(亥時)에 왕을 낳았다. 이날 저녁 흰 운기(雲氣) 세 가닥이 침실(寢室)로 날아 들어와 서쪽 편 창 사이에 엉겨 있었는데 연기 같으면서도 연기가 아니었다. 한참 있다가 흩어졌는데 이를 본 사람들은 이상하게 여겼다.

왕은 태어난 지 4, 5세에 성품과 도량이 활달하여 우뚝하게 거인(巨人)의 뜻을 지녔다. 놀이를 할 때에도 범상하지 않은 일이 많았고 걸음걸이도 반드시 법도가 있었다. 철따라 나는 과일을 처음 보면 먼저 반드시 양전(兩殿)께 바친 뒤에야 맛보았으므로 양전이 항상 "우리 집의 효자(孝子)이다." 하였다. 매일 새벽이면 번번이 먼저 일어나 양전에 문안하고 이어 좌우에서 모셨다. 양전이 복용(服用)하는 모든 물품을 시어(侍御)하는 사람이 장배(藏排)함에 있어 정제(整齊)되지 않은 경우가 있으면 왕이 반드시 직접 정제하였다. 아무리 미세한 일일지라도 바르지 않은 것을 싫어함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양전과 인헌 왕후(仁獻王后)가 함께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여 돌보아 중하게 여기는 것이 특별히 융숭하였다.

5세가 되자 글을 배웠는데 권면하지 않아도 부지런히 하였으며, 다른 아이들이 글읽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권면하여 부지런히 배우게 하였다. 항상 전사(前史)를 읽다가 인륜상 잔인한 부분에 이르면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천성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8세 되던 병인년1127) 에 봉림 대군(鳳林大君)에 봉해졌고 신미년1128) 에 가례(嘉禮)를 행하였는데, 왕비(王妃)는 고(故) 우의정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 장유(張維)의 딸로 대족(大族)이요 법가(法家)였다. 을해년1129) 12월에 인열 왕후가 승하하자 왕이 사제(私第)에 있으면서 중문(中門) 밖의 악실(堊室)1130) 에 거처하였으며, 상례(喪禮)를 법제대로 극진히 집행하여 과일을 먹지 않았고 시어하는 사람은 복례(僕隷) 두어 사람뿐이었다. 슬퍼하는 것이 절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것이 독실하였으므로 차탄하면서 열복(悅服)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년1131) 상기(祥朞)를 마치자마자 갑자기 큰 난리를 만났다. 인조(仁祖)가 왕에게 명하여 인평 대군(麟坪大君)과 함께 먼저 강도(江都)로 가게 했는데, 가다가 중로(中路)에 이르러 사세가 더욱 위급해져 대가(大駕)가 남한 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는 왕이 밤에 두서너 명의 노복과 함께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그러나 중도에서 어찰(御札)을 받고 이어 강도로 들어갔다. 밤에 천상(天象)을 살펴보면서 시사(時事)를 점쳤으며 주야로 동쪽을 바라보고 연모(戀慕)했는데, 침식(寢食)할 때를 당할 적마다 행재소의 제반 사정이 서글픔을 생각하여 눈물을 흘렸다. 행궁(行宮)의 소식을 탐문하기 위해 지니고 있던 금백(金帛)을 내어 무사(武士)를 모집하여 누차 파견했으나 길이 막혀 들어가지 못했는데, 그 가운데 단지 2인만이 도달하였다. 그중 하나는 궁노(宮奴)였는데 어찰(御札)을 받들고 돌아왔으므로 모두들 지성(至誠)이 감응된 소치라고 하였다.

정축년1132) 정월 강도가 함몰당하였고 2월에 소현 세자(昭顯世子)와 함께 인질(人質)로 심양(瀋陽)에 갔다. 북행(北行)을 떠나면서부터 대궐(大闕)을 연모하는 회포가 더욱 간절했는데 인조 대왕에게 편안하지 못한 체후(體候)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하는 기색이 얼굴에 나타났고 기거(起居)에 대한 의절(儀節)에 말이 미치면 눈물이 먼저 흘러내렸으므로 곁의 사람들도 감동하였다. 소현 세자와 같은 관사(館舍)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형제 사이의 정성과 우애가 지극하였으므로 간간이 난처한 일이 있었어도 정성을 다하여 주선하여 기미가 밖으로 드러나는 경우가 없었으며 화기 애애하여 사람들이 이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청(淸)나라 사람들이 산해관(山海關)을 공격할 때 소현 세자와 함께 동행하려고 하자 왕이 아문(衙門)에 극력 말하여 자신이 대신 가게 해달라고 청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도 간절하고 측은하였기 때문에 청나라 사람들도 감동하여 중지하였다. 그 뒤에도 번번이 자신이 가기를 청하였는데 소현 세자와 함께 간 경우도 두 번이나 되었다. 갑신년1133) 봄 청나라가 북경(北京)으로 들어갔고 을유년 봄에 소현 세자가 본국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안 있어 병을 앓다가 죽었다. 왕이 계속하여 본국으로 나오니, 인조가 나라에 장군(長君)이 있는 것은 사직의 복이라는 것으로 이에 대신과 여러 경재(卿宰)들에게 순문(詢問)하여 드디어 책정(策定)하여 세자로 세우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면서 서로 경하(慶賀)하였다. 왕이 처음에 명을 듣고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장(疏章)을 올려 간절히 사양하니, 인조가 답하기를,

"네가 총명하고 효우(孝友)스럽기 때문에 특별히 형이 사망하면 아우에게 미친다는 예법을 쓴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연마하여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 하였다. 다시 사양하니 또 답하기를, "나의 뜻이 먼저 결정되었고 순모(詢謀)가 모두 같았으니, 너는 굳이 사양하지 말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도심(道心)을 지켜라." 하였다.

왕이 심양에 있을 적에 관상을 보는 사람이 왕을 보고서는 은밀히 서로 말하기를, "참으로 임금 노릇할 사람이다." 했었다. 연경(燕京)에 들어가서 하루는 피곤하여 누워 있노라니 갑자기 오색(五色) 운기가 침실에 가득 서리면서 벽 사이로 거북 한 마리가 머리를 내어 놓고 있었는데 몸체가 매우 컸다. 왕은 꿈인가 의심하여 자세히 보니 꿈이 아니었다. 이때에 이르러 관상보는 사람의 말이 사실임이 증험된 것이고 거북 또한 앎이 있었던 것인 듯하다.

9월 27일이 연길(涓吉)이었으므로 유사가 궁의(宮儀)와 장위(仗衛)를 갖추어 잠저(潛邸)에서 맞이하여 인정전(仁政殿) 뜰에서 책례(冊禮)를 거행하였으며 빈궁(嬪宮)은 내정(內庭)에서 책보(冊寶)를 받았다. 다음 달 선성(先聖)을 배알하고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하였는데,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박사(博士)의 자리로 나아가 《대학(大學)》을 강하면서 한참 동안 토론하니, 빙 둘러서서 보는 사람들이 모두 열복하였다. 이에 하령(下令)하여 심양에서 온 우양(牛羊)을 모두 관서(關西)에 주어 공용에 보태게 하였다.

왕은 본디 학문을 좋아하였는데 외부(外傅)에 나아가면서부터 학업이 더욱 증진되어 일찍 경사(經史)를 통달하였다. 그리하여 북행(北行)의 곤경을 겪으면서도 학문에 뜻을 두지 않은 적이 없어 새벽녘까지 가물거리는 등불 아래에서 글을 읽는 것을 폐하지 않았는데 그 책은 곧 《서전(書傳)》이었다. 글 읽는 소리를 들은 사람은 흠탄(欽歎)하여 마지않았다. 연경에 들어가기에 이르러서는 청나라가 자기들이 노획한 금옥(金玉)과 금수(錦繡)를 나누어 보내주었으나 왕은 이를 사양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그 대신 우리 나라의 포로를 돌려달라." 하니, 청나라 사람들이 의롭게 여겨 따랐다. 오직 경적(經籍)과 고금의 서사(書史)에만 유념할 뿐 그 이외의 특이한 보배와 진기한 재화는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그래서 돌아올 때의 행리(行李)가 유독 깨끗하였다.

춘위(春闈)에서 덕을 배양하면서는 날마다 빈료(賓僚)들을 가까이하여 삼조(三朝)1134) 의 여가에는 부지런히 학문을 강마하였다. 그리하여 궁관(宮官)으로 하여금 《서전》의 무일편(無逸篇), 《시전》의 칠월장(七月章), 옛 잠명(箴銘) 등의 글을 가져다가 병풍에 쓰게 하여 펼쳐 놓고 항상 보았다.

기축년1135) 5월 초에 인조(仁祖)가 매우 위독하자 왕이 손가락을 베어 피를 내어서 올렸고 승하함에 이르러서는 맨땅에 거처하면서 가슴을 치고 통곡하였으며 수장(水漿)을 입에 대지 않았다. 예관(禮官)이 사위(嗣位)에 관한 예절을 아뢰니 왕은 차마 못하겠다는 것으로 거절하였다. 대신과 근신이 다시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삼사가 잇따라 아뢰고 대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庭請)한 뒤에야 비로소 허락하였다. 행례(行禮)하는 날은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다가 예관이 다시 청한 뒤에야 나왔는데 눈물을 비처럼 쏟았다. 시신(侍臣)과 백관들도 모두 오열하면서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선정전(宣政殿)의 동쪽 협문(夾門)을 걸어서 나아갔는데, 통례(通禮)가 소여(小輿)를 탈 것을 청하였으나 물리쳤다. 인정문(仁政門) 어좌(御座) 앞에 이르러서는 오래도록 서 있으면서 올라가지 않자 대신이 예조 판서에게 뒤따라 나아가 오르기를 청하게 한 연후에야 올라갔다. 예(禮)를 파하고 나서는 걸어서 인정전으로 들어갔는데, 들어가자마자 통곡 소리가 밖에까지 들렸다. 간원이 계청(啓請)하기를, "졸곡(卒哭) 전에 시조(視朝)하는 것을 한결같이 옛 규례에 의거하여 행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정례(情禮)에 있어 차마 하지 못하겠다." 하였다. 누차 청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저궁(儲宮)께서 졸곡 전에 서연(書筵)에서 입는 복색에 대해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도(經道)는 만세의 상법(常法)이기 때문에 한때의 일 때문에 문득 권도(權道)를 쓸 수는 없는 것인데, 더구나 효제(孝悌)의 도리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나는 말세(末世)에서 순전히 권도만 쓰는 것을 증오한다." 하고,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9월에 발인한 뒤 정원이 능에 행행하는 것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답하기를, "어제 교외(郊外)에서 영여(靈輿)를 바라보면서 안력(眼力)이 다할 때까지 그러고 있으니 조금쯤 시간이 가는 아픔이 풀렸었는데, 멀리 가버려 가리워지니 다시는 바라볼 데가 없었다. 돌아옴에 전우(殿宇)가 적요하여 믿고 의지할 데가 없으니, 조금이나마 이런 회포를 위로받을 수 있는 것은 단지 다시 산릉에 나아가 망극한 슬픔을 극진히 하는 것뿐이다. 이제 이 계사를 보건대 어찌 오늘날만 슬프기 때문일 뿐이겠는가. 실은 천지와 함께 끝없는 슬픔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극력 청하여 정지시켰다. 반우일(反虞日)에는 서교(西郊)에서 맞이하여 곡(哭)하였는데 미천한 하인들도 모두 통곡하였다.

영사전(永思殿)에서 삭망(朔望)과 절일(節日)에 행례(行禮)할 때는 반드시 몸소 행하였고 혹한기나 한더위에도 정지한 적이 없었다.

경인년1136) 가을에 가서 장릉(長陵)을 살펴보고 나서 엎드려 슬픔이 다하도록 통곡하였는데 찬례(贊禮)가 중지하기를 청하여도 중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오르내리는 즈음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신묘년 6월 부묘(祔廟)한 뒤 진하하는 것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臺臣)과 뭇신하들이 옛 규례를 원용하여 매우 간절하게 행할 것을 청하였으나 끝내 사양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 태묘(太廟)를 개수하여 벽을 바르고 있었는데 유사가 잘 판비(辦備)하지 못한 탓으로 즉시 완공하지 못했으므로 열성(列聖)들의 신위(神位)를 이안소(移安所)에 오래도록 유치했었다. 왕은 영령을 편안히 모실 수 없는 것을 두렵게 여겨 감히 편안히 거처하지 못하고 전랑(殿廊)에 내려가 앉아 도로 봉안(奉安)할 때까지 기다리려 하였다. 정원이 도로 전상(殿上)으로 올라갈 것을 계청하니 답하기를, "태묘의 신령이 편안한 뒤에야 과궁(寡躬)도 편안할 수 있다. 지금 묘주(廟主)가 밖에 있는데 어떻게 감히 마음놓고 편안히 거처할 수 있겠는가." 하고, 묘주를 봉환(奉還)한 연후에 전상으로 올라갔다.

임진년1137) 에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인주(人主)가 혹 병고(病苦)가 있으면 모르지만 병고가 없으면 마땅히 국전(國典)에 의거하여 직접 사시(四時)에 올리는 제사를 행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예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에게 이르기를, "과거 조종조에는 매년 조종의 능침(陵寢)을 전알(展謁)했는데 정례(情禮)로 헤아려 보건대 이는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이에 봄 2, 3월과 가을 7, 8월에 돌려가면서 전알하는 것을 영원히 항식(恒式)으로 정하게 하였다.

정유년1138) 에 《시전》의 육아편(蓼莪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시(詩)는 성정(性情)에 근본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으로 하여금 감발(感發)하여 징창(懲創)하게 하는 것인데, 《시전》을 읽다가 여기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오열하게 되어 한 글귀를 읽을 적마다 목소리가 처연(悽然)하게 된다." 하였다. 사의(辭意)가 정성스럽고도 측은하였으므로 좌우의 신료들이 모두 부복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이 선조(先朝)를 받들어 깊이 사모하는 정성이 이러하였다.

왕의 효도와 우애는 하늘에서 타고난 것으로 전고에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실로 필사(匹士)로는 증자(曾子)ㆍ민자(閔子)와 같고 제왕(帝王)으로는 순(舜)임금ㆍ문왕(文王)과 같았다. 대비(大妃) 조씨(趙氏)에게 숙환이 있었는데 임금의 봉양이 극진하고 위호(衛護)가 고루 갖추어졌던 탓으로 평안할 수가 있었다. 또 외진 곳에 거처하는 것은 겨울이나 여름에 마땅하지 않다는 것으로 새로 전우(殿宇)를 지어 만수(萬壽)라는 액자(額字)를 내리고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여 모셨으며 뜻과 음식을 겸하여 극진히 봉양하였다. 국전(國典)에 대비에게 상수(上壽)할 때 베푸는 연회를 풍정(豊呈)이라고 하는데, 왕이 한 번 거행하려 했으나 흉년이 들어 백성이 지친데다가 천변(天變)이 겹쳤으므로 거행하려다가 도로 중지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정유년 겨울 대략 연의(宴儀)를 갖추어 진연(進宴)이라 이름하고 만수전에서 대비에게 상수하였는데, 의식은 간략했지만 예법을 잘 갖추었고 화기 애애했으므로 중외(中外)가 모두 기뻐하였다.

이해 가을 왕이 효릉(孝陵)에 행행하여 전알하였는데 소현(昭顯)의 분묘가 멀지 않았기 때문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려 하다가 이윽고 하교하기를, "지난번 꿈에 소현의 안색이 매우 기뻐하는 것이 평소와 같았으나 우연일 수 있다고 여겼었다. 그런데 이제 또 꿈에 나타나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낼 수 없다고 말을 했더니 나의 손을 잡고 슬픈 안색을 지었다. 꿈을 깨고 나서도 황연(怳然)한 것이 평상시와 같아서 슬픈 감회를 형상하기 어려웠다. 해가 짧기는 하지만 나의 회포를 풀고 싶다." 하고, 전알한 뒤 종관(從官)을 가려 데리고 가서 몸소 전제(奠祭)를 지냈다.

인평대군(麟坪大君) 이요(李㴭)와는 어릴 때부터 잘 적에 반드시 이불을 같이 덮었고 하루도 차마 떨어져 지내지 못하였다. 장성하여서도 잠시 서로 떨어져 있게 되면 그때마다 그리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였으며 금중(禁中)을 출입하는 것도 아침 저녁 할 것 없이 수시로 하게 하였다. 매양 조가(朝家)에 사신(使臣)이 모자랐기 때문에 진사(陳謝)하는 중한 일을 부득이 대군(大君)에게 수행하게 하였는데 그러다 보니 자주하는 것을 면하지 못하였다. 대군이 떠날 때에는 안타깝게 손을 놓는 한스러움을 지녔고 돌아올 때에는 영접하는 사개(使介)를 멀리 압록강 밖에까지 보내어 법온(法醞)과 친찰(親札)로 위로하였다. 상봉(相逢)하면 배로 기뻐하여 희비(喜悲)가 겸하여 극진하였는데, 상체(常棣)1139) 의 화락한 즐거움도 그 지극한 정을 견주기에는 부족하였다.

병신년1140) 여름에 인평 대군이 마침 참판 오정일(吳挺一)의 집에 도착했을 때 어떤 조사(朝士) 하나가 술에 취하여 무망(誣妄)스런 말을 했는데, 군수 서변(徐抃)이 전해진 이야기를 듣고 드디어 고하기를 "인평 대군이 소를 잡아 놓고 사람들을 모으고 있는데 일을 헤아릴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하였다. 왕이 진노하여 직접 국문했는데 서변은 장하(杖下)에서 죽었고 그 말을 전한 사람은 찬출(竄黜)시키니, 유언(流言)이 종식되었다. 인평이 무술년1141) 봄부터 병을 앓아 점점 고질이 되었는데 왕이 주야로 사람을 시켜 문안하고 의약(醫藥)을 보내는 것이 길에 잇달았었다. 하루는 임금이 직접 임어하여 보았는데, 가인(家人)의 예(禮)로 접견하니, 인평이 감동하여 침중한 병에서 갑자기 소생되는 것 같았다. 이로부터 조금 차도가 있는 것이 여러 날이었는데 5월 13일 병이 갑자기 위독해져 급함을 알리니 왕이 소여(小輿)를 타고 창황하게 곧바로 나아갔고 근신(近臣)들은 걸어서 따라갔다. 왕이 임어하여 이름을 불렀으나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시신을 어루만지며 길게 호곡(號哭)하니 눈물이 샘물처럼 솟았다. 시위(侍衛)하는 신하들도 오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때 무더위가 한창이었으나 곁에 앉아 잠시도 떠나지 않았고 죽도 먹지 않았으며, 비를 무릅쓰고 잇따라 임어하여 염습(斂襲)하는 자리에도 직접 임하였다. 성복(成服)과 입관(入棺)에서부터 빈소(殯所)ㆍ발인(發靷)은 물론 묘지에 장사지내는 데 이르기까지 모두 대내(大內)에서 마련하고 관(官)에서 준비하였다. 그 부인(夫人)이 잇따라 죽었는데 그때에도 처음 죽었을 때부터 하관(下棺)할 때까지 부의(賻儀)를 넉넉하게 주었으며 대군(大君) 때와 마찬가지로 중관(中官)을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숭선군(崇善君) 이징(李澂)과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潚)은 인조 대왕의 후궁(後宮) 조씨(趙氏)의 소생인데, 그 어미가 악역(惡逆)을 저지르고 징이 또 거듭 역적의 공초(供招)에 거론됨을 인하여 조정의 의논이 매우 준열했으므로 절도(絶島)에 폐치되어 있었다. 왕이 억지로 공의(公議)를 거스를 수는 없었으나 그들이 오랫 동안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장기(瘴氣)에 손상당할까 염려하는 골육의 정을 생각하는 것을 끝내 스스로 그만둘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병신년 여름 서울의 집으로 돌아오게 하였으며 그들을 자주 대내(大內)에 출입하게 함으로써 친친(親親)의 은혜를 보였다. 숙(潚)은 관례(冠禮)를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금중(禁中)에서 관례를 행하였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훈계하여 가르쳐 글읽기를 권면하였으며 사여(賜與)하는 물품은 선조(先朝) 때에 견주어 차이가 없었다. 그들의 작위를 회복시켜 주라고 명하니, 삼사가 달이 넘도록 집요하게 간쟁하고 대신들도 불가하다고 했기 때문에 드디어 정지하였으나 왕은 이를 한스럽게 여겼다.

기해년1142) 봄 정월에 대신들을 나오게 하여 유시(諭示)하기를, "인평 대군의 상(喪)을 당함으로부터 동기(同氣)가 끝내 적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니 슬픈 감회가 더욱 간절하다. 입알(入謁)하는 사람은 모두 몸에 장복(章服)을 입었는데 징ㆍ숙만이 백의(白衣)로 나아와 알현하니, 마음이 매우 서글프다. 내가 그들의 벼슬을 회복시켜 주고 싶어서 경들과 의논하려는 것이다." 하고, 인하여 탄식하면서 눈물을 머금으니 뭇신하들도 서로 눈물을 닦으면서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하여 다시 봉작(封爵)할 것을 명하였다.

낙선군(樂善君)은 빙례(聘禮)를 치르지 않았으므로 예조에 명하여 배필(配匹)을 간택하게 하였다. 대신(大臣)이 본가(本家)로 하여금 듣고 본 것을 종부시(宗簿寺)에 보고하여 알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형제 두 사람이 서로 의지하여 거처하고 있는데 어디서 듣고 본 것이 있어 보고하여 알릴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결국 예조로 하여금 택정(擇定)하게 하여 행례(行禮)하였다. 그의 누이 동생은 옹주(翁主)로서 그 어미를 도와 흉한 짓을 하였으므로 백관과 삼사가 율에 의거하여 조처할 것을 청하였으나 왕은 차마 법을 가하지 못하고 사죄(死罪)를 용서하여 외방으로 옮겨 보냈는데 대우를 매우 후하게 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또한 석방하여 돌아오게 한 다음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였으며 노비와 전토도 아울러 모두 도로 내주어 의식(衣食)의 욕구를 충족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진괴(珍餽)를 계속 내려서 은혜롭게 돌보는 것이 변함이 없었다.

역강(逆姜)은 소현 세자의 빈(嬪)으로 계속 악독한 짓을 자행하다가 스스로 하늘의 벌을 자초함으로써 선조(先朝)에 죄를 얻었으므로 그 자녀들을 해도(海島)에 옮겨 안치시켰었는데 왕이 딱하게 여겨 방환시켰다.

또 윤3월에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징ㆍ숙 등에게는 이미 관작을 회복시켜 관대(冠帶)를 하고 출입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매우 기쁘게 여기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이 있는데, 소현 세자의 자녀들은 그 어미의 일 때문에 아직도 선적(璿籍)에 소속되지 못하고 있으나 어린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내가 매우 슬프게 여긴다. 그들이 좌죄(坐罪)된 것도 본디 징ㆍ숙과 다를 것이 없는데, 더구나 선왕(先王)의 하교에 ‘형의 자식을 너의 자식처럼 여기라.’고 한 내용이 있는데이겠는가. 내가 항상 이 말을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이제 징ㆍ숙과 똑같이 은혜를 베풀어 고르지 않다는 탄식이 없게 함으로써 우리 선왕께서 내리신 분부를 저버리지 않고 싶은데, 경들의 의견은 어떠한가?" 하니, 군신들이 모두 지당하다고 하였다. 임금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교하기를, "작호(爵號)를 써서 내리도록 하겠다. 오늘 첨의(僉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매우 기쁘다. 내가 소현(昭顯)과 동시에 북행(北行)하여 험난한 이역 땅에서 어렵고 위험한 지경을 모두 겪었는데 늘 좌우에서 이끌어 주면서 주야로 떠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동쪽으로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인사(人事)가 갑자기 덧없이 되어버리고 불량한 사람이 이어 변을 야기시켰다. 선조(先朝)의 성명(成命)을 경솔히 고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항상 아프게 여기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영령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에서 어찌 한스러움이 없었겠는가." 하고, 인하여 한참 동안 오열하였다. 그리하여 소현 세자의 자녀들이 모두 복작(復爵)되었다. 아들은 경안군(慶安君)에 봉하고 딸 둘은 군주(郡主)에 봉했는데, 때 맞추어 시집 장가 보냈고 제택(第宅)과 의복(衣服)을 갖추고 하사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경안군과 군주들을 대내(大內)로 불러들여 가까이 두고 다독거려 사랑했으며 거처와 음식을 공주(公主)와 차이가 없게 하였다. 부위(副尉)는 인접하는 이외에 혹 금원(禁苑)으로 불러들이기도 하는 등 시우(視遇)가 또한 부마(駙馬)와 구별이 없었다.

친족에게도 돈독하고 화목하게 하여 은뢰(恩賚)가 널리 흡족하였다. 능원대군(綾原大君) 이보(李俌)는 인조 대왕의 아우인데, 존경하여 우대하는 것이 특이하였으며, 그의 서자(庶子)인 영신정(靈愼正) 이형(李瀅)을 특별히 사옹원 부제조에 제배하였다. 이조가 자급(資級)이 맞지 않는다는 것으로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숙부(叔父)의 나이가 많아 마음을 기쁘게 해드릴 것이 달리 없다." 하고, 이에 가자(加資)하여 제수하라고 명하였다. 능원군의 부음(訃音)이 들리자 소복(素服)을 입고 애림(哀臨)하였으며 인정과 예문을 모두 극진히 하였다.

인흥군(仁興君) 이영(李瑛)ㆍ정신 옹주(貞愼翁主)ㆍ정휘 옹주(貞徽翁主)가 죽었을 적에도 모두 3년 동안 녹봉을 지급하였다. 정인 옹주(貞仁翁主)는 그의 아들 안산(安山)의 수령인 홍언(洪琂)을 따라가 있다가 군아(郡衙)에서 죽었는데, 그 집이 도성(都城)에 있기 때문에 발인(發靷)하여 돌아오자 그 집에다 빈소(殯所)를 차리게 하여 특이한 은수(恩數)를 고르게 내렸다. 이들은 모두 선조(宣祖)의 자녀이다.

학문에 대해서는 이미 대요(大要)를 습득하였는데 도심(道心)을 지키라는 전교(傳敎)를 받드는 데 이르러서는 더욱 근신(謹愼)을 가하여 잠시도 감히 잊은 적이 없었다. 즉위한 이래 하루에 세 번 여는 경연을 부지런히 하여 추위나 더위를 이유로 폐한 적이 없었다. 기축년1143) 10월에 처음 경연에 나아가 《중용(中庸)》 서문을 강하였는데 읽어 가다가 편말(篇末)에 이르러서는 주자(朱子)의 이름을 휘(諱)하면서 강관(講官)에게도 휘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안자(顔子)ㆍ증자(曾子)ㆍ자사(子思)ㆍ맹자(孟子)ㆍ정자(程子)ㆍ주자(周子)의 이름을 아울러 휘하였다.

경인년1144) 이른 봄에 바야흐로 미령한 증후(症候)가 있어 연신(筵臣)이 우선 정강(停講)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열고 학문을 논란하는 데에서 들을 만한 것이 많다. 그리고 심한 통증이 없는데 어떻게 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바로 6월을 당하여서도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임어하니 연신(筵臣)이 과로로 건강이 손상될까 우려하여 또 하루에 한 번씩 진강(進講)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본디 병을 많이 앓아서 겨울철 혹독한 추위에는 사세가 자주 경연을 열기가 어렵겠기에 이런 때에 자주 경연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또 11월에 우선 경연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하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혹한기가 닥치면 내가 사세를 살펴 조처하겠다. 우선은 자주 품하지 말라." 하였다. 왕이 일찍이 《시전》을 강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시전》을 정지하고 《서전》을 강하였으니, 택우(宅憂) 때문이었다. 아침과 낮에는 《서전》을 강하고 저녁에는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하였는데,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주강(晝講)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경연을 연 지 이미 오래인데도 아직 대신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군신이 서로 만남에 있어 어찌 정례(定例)가 있겠는가. 나는 대신(大臣)과 간신(諫臣)을 모두 경연에 입참하게 하고 싶다. 만나는 것이 드물면 정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하였다. 《대학연의》를 진강하면서 ‘이단(異端)을 공부하면’이라는 장(章)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이때에는 석불(釋佛)의 해가 양주(楊朱)ㆍ묵적(墨翟)보다 심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는 도교(道敎)는 행하지 않았는데 당(唐)나라의 임금은 연단(鍊丹)하다가 죽은 경우도 있다. 송 진종(宋眞宗)은 이미 그것이 그른 것인 줄 알았으면서도 미혹됨을 면치 못했으니, 이 점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왕이 이단(異端)을 싫어하는 것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삭서(朔書)1145) 를 써서 올린 내용에 불가(佛家)의 용어를 쓰는 것은 정원에 명하여 엄금하게 하였다.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옛 사람의 말에 학문을 하면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했으니 학문의 공효가 어찌 작다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의 걱정은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못한 데 있는 것이다. 인주(人主)의 일신은 공격받는 데가 많은 법이어서 더욱 유념해야 될 곳이다." 하였다.

또 이르기를, "대우(大禹)의 덕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제일 먼저 극근 극검(克勤克儉)을 일컬었으니, 제순(帝舜)이 후세에 전한 교훈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는 난리를 겪은 뒤로 상하가 모두 걱정하면서 경황이 없는 중인데 사치를 일삼고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였다. 우공장(禹貢章)을 강할 때 유신(儒臣)에게 이르기를, "우임금의 근로(勤勞)가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으면서 창업(創業)한 임금과 견주어 볼 때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우임금이 근로한 것만 못합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몸소 수많은 전쟁을 겪은 임금 또한 근로하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마음에는 그래도 자신을 위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임금에 이르러서는 조금도 천하에 대해 사심(私心)을 품은 것이 없으니, 이 점이 어려운 것이다." 하였다. 일찍이 이르기를, "한휴(韓休)가 정승이 되자 현종(玄宗)이 그의 외모가 수척한 것을 탄식했었으니 마음으로 싫어했던 것을 알 수 있다." 하였으며, 《대학연의》를 강할 때 왕이 이르기를, "한 선제(漢宣帝)는 쉽게 얻을 수 없는 임금인데도 어찌하여 환관(宦官)에게 추기(樞機)를 맡겼단 말인가. 원제(元帝)가 본디 소망지(蕭望之)를 소원하게 대하여 내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마침내 석현(石顯)에게 속고 말았다. 소망지의 죽음을 듣고 밥을 먹지 않고 눈물을 흘렸으면서도 석현 등이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자 그들의 죄를 바루지 못한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일찍이 경연에 임어하여 개탄하기를, "사람들이 항상 하는 말이 우리 나라 사람들은 으레 겁이 많다고 하였다. 정축년1146) 토산(兎山)의 일을 가지고 살펴본다면 군졸들이 정예롭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실은 좋은 장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듣건대 이광(李廣)은 군중(軍中)에서 밤에 조두(刁斗)를 치지 않고 척후병을 멀리 보내어 적정(敵情)을 탐지했다고 하였다. 병자 호란때 장수가 된 자들이 이 점을 전혀 몰랐던 탓으로 신경원(申景瑗)은 이미 잘 싸우지도 못하면서 잘 피하지도 못하였으니, 우리 나라 장수들은 진실로 이웃 나라에 견주어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리고 문관은 글을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고 무관은 무예를 숭상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는 것으로 국가에서 취하는 것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서 문관으로서 무변(武弁)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으레 경시당하기 일쑤이지만 무관으로서 서생(書生) 같은 사람인 경우에는 바야흐로 용납받고 있다. 따라서 무관으로서 말달리기를 좋아하면 반드시 광패(狂悖)스럽다고 지목하니, 풍조가 괴이하기 그지없다. 양호(羊祜)나 두예(杜預)처럼 가벼운 갖옷에 느슨한 띠를 띤 사람을 다시 볼 수가 없으니, 지금 세상에 무관으로서 서생처럼 생긴 자가 어떻게 전진(戰陣) 사이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임진년1147) 11월 주강에 다사편(多士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강관(講官)에게 이르기를, "오늘 주강에 임어해서야 더욱 재이(災異)의 경고를 크게 두려워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다. 덕을 밝히고 제사를 삼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더욱 안으로 마음에 부끄러운 점이 있다." 하고 또 이르기를, "옛 사람이 이른바 나라를 망치는 길이 하나뿐이 아니라고 했는데 이 말에 진실로 이치가 있다. 명(明)나라가 망한 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숭정 황제(崇禎皇帝)의 일을 중국 사람들에게 들어보면 모두들 ‘밖으로는 유전(遊畋)과 안으로는 원유(苑囿)의 오락이 없었다.’고 했으니, 나라를 망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결국 복망(覆亡)하기에 이른 것은 명찰(明察)이라는 두 글자에 대해 그 방법을 극진히 하지 못한 것에 연유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논하여 본다면 진실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의 흥망이야 진실로 논할 것이 없다 하더라도 오늘날에 이르러 국사가 이러하니, 끝에 가서는 어떻게 될지 몰라 나의 마음이 타는 것만 같다." 하였다.

계사년1148) 주강에 군진편(君陳篇)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군진(君陳)의 책임이 중대한데도 계고(戒告)한 내용은 단지 효우(孝友)만을 일컬었으니, 사람의 행실 가운데 어찌 이 두 글자에 더 보탤 것이 있겠는가." 하고, 고명편(顧命篇)을 강할 때는 명왕(明王)은 항상 위태롭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을 지녔다고 언급된 대목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임금은 작은 한몸으로 억조 창생의 위에 처하여 있으니 무사(無事)할 때를 당하여서도 어찌 어렵게 여기고 두렵게 여기는 마음이 없을 수 있겠는가. 《서전》에도 ‘두려워하지 않으면 두려운 일을 당하게 된다.’고 했는데, 어찌 옳은 말이 아닌가." 하였다.

갑오년1149) 봄 저녁에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노기(盧杞)가 안진경(顔眞卿)을 살해하고 이규(李揆)를 찬출(竄黜)시킨 일에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소인(小人)은 매우 간교하여 반드시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술수를 부린다. 노기가 덕종(德宗)을 어린 아이처럼 여겼는데도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가 혼암(昏暗)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사서(史書)를 읽는 것은 장차 이를 거울로 삼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의 군신은 극력 힘써서 뒷사람들로 하여금 오늘날을 보기를 당나라 때 노기가 덕종을 보듯이 하는 일이 없게 해야 된다." 하였다. 여름에 《시전》 패풍(邶風)의 북문(北門)으로 나아갔다는 장(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어진 사람이 숨는다면 이는 진실로 임금의 수치이기는 하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다고 모두 뒤돌아보지 않고 가버린다면 이는 신하의 도리에 있어 또한 불가한 일인 것 같다. 이는 모두 군신이 마땅히 살펴야 될 곳이다." 하였다.

을미년1150) 봄 주강에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이 되자 왕이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할 적에 조정의 신하 가운데에는 사절(死節)한 사람이 하나도 없고 따라 죽은 사람은 내관(內官) 하나뿐이었으니, 진실로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명나라의 법제를 살펴보건대 사람으로 하여금 무기를 잡고 시위하게 하고서 신하들이 일을 아뢰는 것이 마음에 맞지 않으면 박살하였고, 또 동ㆍ서창(東西廠)을 설치하여 환관들에게 주관하게 하였기 때문에 천하의 일이 모두 여기를 경유하여 나가게 되어 있었다. 그 소위를 추적하여 보면 나라가 망한 것이 너무 늦었다." 하였다. 진풍(秦風)의 황조장(黃鳥章)을 강하는 데 이르러서 왕이 이르기를, "이 편(篇)을 살펴보면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정사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사람에게 차마 하지 못하는 마음은 자연히 가슴 속에서 발하여지는 것인데, 잔인하게 신하로 하여금 두려워하면서 광중(壙中)으로 들어가게 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그리고 인정으로 미루어 보더라도 자기는 죽는 것을 싫어하면서 다른 사람은 기탄없이 죽이는 것이 수십 명이나 되었으니, 다른 것이야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보화(寶貨)를 매장하는 것은 죽은 사람에 유익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도리어 그 때문에 참화(慘禍)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여후(呂后)의 무덤이 오욕을 당하고 진황(秦皇)의 무덤이 도굴당한 것이 모두 여기에 연유된 것이다. 한 문제(漢文帝)는 검약하게 했기 때문에 유독 이런 참화를 당하지 않았고 광무제(光武帝)의 수릉(壽陵) 제도는 겨우 빗물만 흐르게 했을 뿐이니, 어찌 후세에서 본받을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진풍(陳風)의 주림장(株林章)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필부(匹夫)일지라도 패악(悖惡)스러운 것이 이러하면 목숨을 보전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더구나 임금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문왕(文王)의 교화가 강한(江漢) 지방에까지 파급되었었는데 쇠할 때에는 제후(諸侯)가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여름에 칠월편(七月篇)을 강하면서 도교(道敎)의 치성함에 대해 논급했는데,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좌교(左敎)가 없으니 진실로 흠탄(欽歎)할 만한 일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는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한 힘인 것이다. 내가 《송사(宋史)》를 살펴본 적이 있었는데, 이항(李沆)이 정승으로 있을 때에 입대(入對)할 적마다 우려스러운 재이(災異)의 일을 극언(極言)하면서 황제가 듣기 싫어해도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자 이항이 말하기를 ‘황제의 춘추가 한창 왕성하여 지기(志氣)가 방자해지기 쉬운데 만일 걱정스럽고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을 날마다 아뢰어 그 마음을 움직이게 하지 못하면 반드시 멋대로 방탕해지는 걱정이 있게 될 것이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했는데, 참으로 훌륭한 말이다. 예로부터 임금은 국가가 평안하고 부유하며 해내(海內)에 걱정이 없게 되면 교만하고 방자하고 음란하게 되어 혹 좌도(左道)에 빠지기도 하고 혹 전공(戰功)을 힘쓰기도 하고 혹 일예(逸豫)에 젖기도 하여 몸도 죽고 나라도 잃은 경우가 비일 비재하였으니,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6월에 《시전》의 상체장(常棣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우애(友愛)의 정이 극진한 연후에야 군신 부자(君臣父子)가 모두 올바른 도리를 행할 수 있는 것이고 붕우(朋友)의 의리에 대해서도 신의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대학(大學)》에 이른바 ‘후하게 해야 될 데에다 박하게 하는 사람치고 박하게 해야 될 데에다 후하게 하는 경우가 있지 않다.’고 한 것이 또한 이런 뜻인 것이다. 형제 사이에 박하게 하면서 남에게 후하게 할 사람은 있지 않은 것이다. 형제 사이에 잘 화목하게 지내지 못하는 사람을 지성으로 계도(啓導)한다면 어찌 감동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 아무리 무지하고 완악한 소민(小民)일지라도 본성을 인하여 계도한다면 절로 귀화(歸化)될 것이다. 형제 사이에 서로 쟁송(爭訟)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모두 국가의 교화가 행해지지 않은 까닭인 것이다. 이 어찌 심히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겨울 10월에 주강(晝講)을 할 때 연신(筵臣)이 아뢰기를, "한 애제(漢哀帝)가 초년(初年)에 위살(威殺)을 행한 것은 선제(宣帝)가 한 것을 본받아서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예로부터 그런 경우 그와 똑같은 재능은 없으면서 그가 한 일을 본받아서 하면 애제(哀帝)의 꼴이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다." 하였다. 연신이 또 장량(張良)이 홍구(鴻溝)의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해 논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론(士論)은 곧 만세에 변치 않는 경상(經常)의 도리인데, 유자(儒者)의 기상(氣象)에 의거하여 장량에게 모든 것을 완벽히 갖추기를 책임지우려 하기 때문에 불의(不義)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장량의 뜻은 오직 원수를 갚는 데에만 있었으니 어느 겨를에 상도(常道)를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세상 사람들은 의리가 그 가운데 들어 있는 줄 모른다." 하였다. 범증(范增)의 일을 논하는 데 이르러, 왕이 이르기를,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는 것인데 항우(項羽)의 공을 도와 이루려 하였으니 의제(義帝)를 어떤 위치에 두려는 것이었는가? 마침내 강중(江中)의 추악한 이야기1151) 를 남김으로써 흰 옷을 입고 조문(吊問)하는 군대를 일으키게 했으니, 이는 한왕(漢王)이 천하를 낚을 수 있는 미끼를 만들어 준 것이다. 따라서 범증은 그 결과를 생각할 줄 모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한왕이 국을 나누어 달라고 한 이야기1152) 같은 것은 차마 입으로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어떻게 얼굴을 들고 천하에 군림(君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론이 송(宋)나라에 언급되자 왕이 이르기를, "만고에 가장 애석한 것으론 송 고종(宋高宗) 같은 경우가 어디 있겠는가. 악비(岳飛) 같은 장군이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했으니, 이것만도 이미 잘못이다. 그런데 또 어찌하여 기필코 살해하기에 이른 뒤에야 그만둔단 말인가." 했는데, 임금의 말은 너무도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운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 윤길보(尹吉甫)의 일을 논하자 왕이 이르기를, "하늘이 한 세상에 인재를 내는 것은 한 세상의 일에 충족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후세에 또한 한 세상에 쓰일 길보 같은 이가 혹 있게 될 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반드시 내정(內政)이 잘 닦여진 뒤에야 외적을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니, 지금의 급선무는 인심을 얻는 데 요점이 있다." 하였다.

병신년1153) 정월에 《시전》의 백구장(白駒章)을 강하였는데, 왕이 그 주어(註語)를 읽으면서 이르기를, "이 주가 참으로 타당하다. 예로부터 군신(君臣) 사이는 뜻이 잘 맞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한신(韓信)이 초(楚)나라 사자(使者)의 유세에 대해서도 한 고조(漢高祖)가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는 등의 말로 거절하였다. 과연 말하면 들어주고 계획을 세우면 따라준다면 어진이가 어찌 떠나고 싶어할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학명장(鶴鳴章)의 주에 부드럽고 윤기 있는 옥(玉)과 거칠고 껄끄러운 돌이라는 등의 말이 있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이 말이 가장 절실하다. 중인(中人)의 성품은 환란을 당한 뒤에야 마음을 감동시켜 하고 싶은 기욕을 참아 내면서 자신이 잘하지 못한 점을 증익(增益)시키게 되는 것이다. 임금이 재이(災異)를 만나면 또한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만일 재이를 만나 삼가 두려워하기만 하고 하나의 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는 어른에게 꾸지람을 받고서 두려워 위축될 뿐인 것과 같으니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반드시 하는 일이 있은 뒤에라야 꾸지람에 답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한 가지 일을 행하고 내일 또 한 가지 일을 행하여 순서에 따라 점차로 행하여 가면서 유념하여 중지하지 않는다면 일을 성취시킬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언자(言者)들은 혹 하루 아침에 갑자기 큰 사업을 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는 결코 성취될 리가 없다." 하였다. 조강ㆍ주강ㆍ석강 이외에 수시로 다시 야대(夜對)를 하였는데, 간혹 체후가 미령하여 정전(正殿)에 나아가지 못할 경우이거나 혹 입시한 관원이 고르지 못할 경우에는 또한 때때로 편전(便殿)에서 소대(召對)하였다.

3월에 소대하여 《대학연의》를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소인(小人)은 혼암한 임금을 만나면 은폐와 기만을 멋대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명(英明)한 임금의 경우에도 혹 참언(讒言)에 미혹되었으니, 참언은 두려워할 만한 것이다. 이는 이른바 서서히 스며드는 참소와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호소인 것이다. 그렇지만 임금은 매사에 반드시 광명 정대하게 해야 되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좌우를 물리치고 말하는 것을 허락할 것이 있겠는가. 이것이 참언이 들어오게 되는 이유인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晋)나라의 제왕(齊王) 유(攸)는 바로 아우인데, 혜제(惠帝)의 혼암하고 용렬함이 만고에 견줄 데가 없을 정도였고 보면, 무제(武帝)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아우에게 물려주었어도 실로 종사(宗社)의 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참언을 믿고 도리어 의심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내어 끝내는 골육 상잔의 비극을 연출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나라가 스스로 망하기를 재촉한 것이다." 하였다.

정유년1154) 10월 《심경(心經)》을 진강했는데,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본원이 맑아져 인욕(人欲)이 다소곳해지면 도심(道心)이 자연히 배양될 것이다. 만일 이욕(利慾)에 얽매인다면 어떻게 이 마음을 보존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마음은 일신(一身)의 주재(主宰)이고 경(敬)은 또 일심(一心)의 주재인 것이다. 만약 함양하는 공부가 없다면 어떻게 만선(萬善)의 주재가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敬義)를 내외(內外)로 늘 간직하면 이 마음을 잠시 놓아두려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정일(精一)에 대한 이야기가 요(堯) 순(舜)에게서 나왔지만 요 순 이전에 이미 이런 의리가 있었던 것이고, 경의(敬義)에 대한 이야기가 공자(孔子)에게서 나왔으나 공자 이전에 이미 이런 도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무술년1155) 봄 왕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근래 《송사(宋史)》를 살펴보건대 영종(寧宗)ㆍ광종(光宗) 두 임금의 일은 참으로 통분스러웠다. 부자(父子) 사이의 천륜을 멸절(滅絶)시킨 것이 저와 같았으니, 송나라가 망한 것은 여기에서 그 기초가 조성된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당시의 국사는 다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는데 위학(僞學)이라는 두 글자가 선류(善類)들을 일망 타진하는 법문이 되었으니, 말하기도 참혹하다." 하고 연신에게 이르기를, "소인은 진실로 슬기로운 자가 없다. 그러나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자신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 간사한 짓을 멋대로 하여 나라를 그르치고 결국 나라가 망함에 따라 자신도 죽게 되는 것인데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송(宋)나라의 가사도(賈似道)ㆍ한탁주(韓侂胄) 같은 자들은 흉계를 멋대로 부리다가 악이 차게 되어 국사를 그르쳤는데 나라가 망하기도 전에 친족이 먼저 주멸되었으니, 그들의 계교가 교묘한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졸렬한 것이다. 송나라 때에 또 주자(朱子)를 참(斬)할 것을 청한 자가 있었는데, 예로부터 소인이 기필코 어진이를 해치려는 마음을 먹으면 못할 짓이 없는 것이 이와 같았으니, 아, 또한 참혹한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송나라에서 도학(道學)을 금한 것이 사죄율(死罪律)과 다름이 없었으니 통분스럽고 개탄스러워 말을 할 수 없을 정도이다. 원(元)나라는 비록 이적(夷狄)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도학을 숭상해야 된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포로들 가운데 유사(儒士)의 부류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석방하여 존대하였다. 그리하여 대성 문선왕(大聖文宣王)이라는 호칭을 공성(孔聖)에게 가하기에 이르렀으니 성인을 존숭하는 마음이 지극했다고 이를 만하다. 송나라는 중국(中國)이면서도 도학을 금한 것이 저와 같았고 원나라는 이적(夷狄)이면서도 도학을 숭상한 것이 이와 같았으니, 진실로 괴이한 일이다." 하였다. 남송(南宋)의 일을 논하면서 이르기를, "고종(高宗)이 악비(岳飛)ㆍ한세충(韓世忠)이 생존해 있을 적에 본토를 회복하지 못했으니, 그들이 죽은 뒤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었다. 효종(孝宗) 이후로는 일시적인 평안함만 추구한 지가 오래되어 상하가 태연스럽게 지냈으니 어떻게 분발하여 흥복(興復)할 수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주강(晝講)을 마치고 송준길(宋浚吉)이 나아가 아뢰기를, "근래 천변(天變)이 없는 때가 없는데 매년 이러하니 성심(聖心)의 계구(戒懼)가 아마도 한결같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왕이 답하기를, "사람의 마음은 한결같지 않으니 실로 찬선(贊善)의 말과 같다. 간혹 심상히 여겨 방과(放過)한 때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을 마치고 나서 명나라의 일에 언급되자 왕이 탄식하면서 이르기를, "숭정 황제가 망한 것은 실로 환관에 연유된 것이다. 그들을 주군(州郡)으로 나누어 파견한 것은 지방관의 선악(善惡)을 살피기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또한 그들의 사헌(私獻)을 이롭게 여겨서였던 것이다. 외방의 일을 은밀히 염탐하는 것이 실은 정도(正道)가 아닌 것인데 더구나 잡류(雜流)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송준길이 이어 백성의 고통을 구출하고 경연을 자주 열어야 된다는 내용으로 진달하니, 왕이 모두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였다.

정월에 경연에 임어하여 찬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나의 기질은 편협함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날마다 《심경》을 강하여도 마음의 병통을 쾌히 제거할 수가 없어 거조에 있어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 반드시 법가(法家)와 필사(拂士)가 좌우에서 보필해 준 뒤에야 허물이 적어지기를 기대할 수 있겠다. 내가 기필코 찬선을 오래 머무르게 하려는 것은 이 때문인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심경》을 강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가만히 있을 적에 항상 공경하고 말하지 않을 적에 항상 조심하면 언동(言動)을 기다릴 것도 없이 믿을 수 있게 된다고 하는 이 말이야말로 가장 음미하여 깊이 생각해야 될 곳이다. 그러나 그 요점은 힘써 행하는 데 있는 것이니, 그렇지 않으면 그 또한 거짓인 것이다." 하였다. 5월에 소대(召對)할 때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송 고종(宋高宗)은 경구(驚懼)하는 생각을 많이 품고 있었기 때문에 성취한 것이 볼 만한 것이 없었다. 그 당시 금릉(金陵)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하고 변경(汴京)에 머물기를 권하기도 했는데 변경은 그래도 두려워할 수 있는 곳이지만 금릉에도 끝내 한 걸음도 나아가 보지 못했다. 그의 경구하는 마음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종택(宗澤)ㆍ이강(李綱)ㆍ악비(岳飛)ㆍ한세충(韓世忠) 같은 이가 있었는데도 기용하지 못하고 말았다. 만일 효종(孝宗)이 이때의 세상에 태어나서 이 사람들을 기용했다면 하북(河北)을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듯하다." 하고 또 이르기를, "진회(秦檜)의 마음을 가장 알 수 없다. 정승이 된 뒤에 어찌하여 금(金)나라를 배반하지 않고서 전적으로 남방(南方)에만 뜻을 두었단 말인가. 한세충이 나귀를 타고 서호(西湖)에 노닌 일1156) 과 악비에 대해 막수유(莫須有)1157) 라고 한 말에 대해서는 송 고종(宋高宗)을 위하여 개탄스러움을 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11월의 소대(召對)에서 왕이 이판(吏判) 송시열(宋時烈)에게 이르기를, "송 신종(宋神宗)이 명도(明道)를 대하여 인재가 없음을 탄식하니, 명도가 말하기를 ‘지금이라고 또한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으나 신종은 결국 명도가 맡길 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몰랐다. 매우 개탄스러운 일이다."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명도가 삼대(三代) 때의 일을 가지고 진달하니, 신종이 말하기를 ‘내가 어떻게 감히 당할 수 있겠는가.’ 하자, 명도가 추연(湫然)히 ‘이는 사직(社稷)의 복이 아니다.’ 하였습니다. 명도의 마음은 이렇게 컸는데 신종의 뜻은 저렇게 작았으니, 맡길 만한 인물임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맡길 수 있었겠습니까." 하자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일에 대해 지금 사람이 추후 개탄하고 있는데 오늘날의 일에 대해 뒷사람이 다시 개탄한다면 어찌 크게 두려워해야 될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12월의 소대(召對)에서 송시열이 왕의 성품이 편협함을 논하면서 화평스럽게 하는 방도를 극진히 할 것을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경이 어찌 나의 병통을 모르겠는가. 나의 병통은 기질이 편협한 탓으로 바야흐로 노여워할 때에는 일의 시비를 모르는 지경에 이르기 때문에 중도(中道)에 맞지 않는 것이 있게 된다. 그래서 근일 이래로 노여워할 일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참음으로써 그 병통을 다스리고 있는데 밤중에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노여움이 점차 풀렸다." 하였다.

기해년1158) 2월의 소대에서 경(敬) 자에 대해 논하였는데 왕이 이르기를, "사람은 반드시 움직여야 할 때는 움직이고 고요히 있어야 할 때는 고요히 있은 뒤에야 공부가 바야흐로 전일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고요한 데에만 빠진다면 어떻게 그것을 경(敬)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4월의 소대에서 왕이 이르기를, "옛날의 임금은 부유하기로는 천하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재물을 축적할 것을 생각하였으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는가. 한 영제(漢靈帝)는 돈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짐이 사제(私第)에 있을 적부터 너를 사랑한 지 오래되었다.’ 하고는 벼슬을 팔아 돈을 거두어들임에 있어 못하는 짓이 없었다. 이렇게 사리에 어긋나게 들어온 돈이 사리에 어긋나게 나가는 것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일반 금수는 말할 것도 없지만, 용(龍)은 사령(四靈)의 장(長)인데도 가끔 미끼를 탐하다가 죽는데 이는 욕심에 연유된 것이다." 하였다. 《심경》을 강할 때부터는 송준길이 자주 시강(時講)하였는데, 무술년 겨울부터는 송시열도 교대로 나아가 시강하였다. 그리고 기타 유술(儒術)로 나온 사람들도 아울러 윤번으로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따라서 마음 공부에 진보되고 유익한 점이 많게 되었다. 왕은 성품이 편협하여 극복하기 어렵고 노여워할 때가 가장 극심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서 항상 깊이 반성해서 결국에는 수습하여 안배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일찍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이 착공(着工)에 절실한 것이니 의당 병풍을 만들어 좌우(座隅)에 두어야 한다고 여기고 옥당의 사신(詞臣)으로 하여금 베껴써서 들여오게 하였다. 그리고 당우(堂宇)의 문달(門闥)에다 경계하는 내용의 말을 게시했으며, 큰 글씨로 ‘마땅히 분음을 아껴 상제를 대한 듯이 해야 한다.[當惜分陰對越上帝]’는 여덟 글자를 써서 벽에다 붙였다. 재(齋)는 경의(敬義)라고 명명하고 합(閤)은 양심(養心)이라고 명명했는데 모두 스스로 경계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왕에게는 적사(嫡嗣) 한 분이 계셨는데 곧 우리 전하이시다. 인효(仁孝)가 일찍부터 드러났으므로 인조조(仁祖朝) 기축년1159) 봄에 세손으로 봉하였다. 그러다가 왕이 즉위한 3년 뒤인 신묘년1160) 가을에 세자로 봉하였는데, 왕이 매우 애지 중지하였으나 가르침은 엄절하여 궁료(宮僚)를 간택하여 날마다 경사(經史)를 강론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찬선(贊善)ㆍ진선(進善) 등의 관직을 유현(儒賢)에게 제수하여 돌려가면서 권면하고 계도하게 하였으므로 점차 고명한 경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궁관(宮官)들에게 하교하기를,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반복하여 진설(陳設)하되 고금의 득실(得失)과 여염의 이병(利病)에 대해서도 모두 인유(引喩)하여 깨닫게 하라. 제왕가(帝王家)의 자제들은 깊은 궁중에서 낳아 자라기 때문에 민간의 고통과 괴로움을 모르기 일쑤이니, 후원(後苑)에 벼를 심고 경운(耕耘)할 때 세자로 하여금 가서 보게 함으로써 백성의 일을 알게 하라." 하고 또 찬선 송준길에게 이르기를, "동궁(東宮)이 바로 학문을 할 때가 되었으니 찬선 같은 사람이 머물러 있으면서 마음을 다하여 보도(輔導)한다면 그 다행스러움이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왕이 신료(臣僚)들에게 보도하여 주기를 기대한 것이 매우 간절하였는데 어진이를 좋아하는 정성이 치의(緇衣)1161) 정도뿐만이 아니어서 존경하고 예우하여 초치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았다.

즉위 초에 전 참의 김집(金集), 전 지평 송준길(宋浚吉)ㆍ송시열(宋時烈), 전 자의(諮議) 권시(權諰)ㆍ이유태(李惟泰), 전 현감 최온(崔薀) 등이 제일 먼저 소명(召命)을 받고 나아왔는데 그들의 여식(旅食)의 어려움을 염려하여 쌀과 고기를 하사하고 포인(庖人)과 늠인(廩人)을 시켜 고기와 양식을 계속 보내게 하였다. 시열과 유태의 어미가 늙고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미찬(米饌)과 약물(藥物)을 보내주게 하였다. 또 김집을 예조 참판에 특배했는데, 이조에서, 예관은 반드시 문관을 쓰는 것이 법이라고 아뢰자, 왕이 이르기를, "옛 것을 상고하면서 글을 읽은 사람을 불러서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상규(常規)에 구애되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김집을 한 해 안에 이조 판서에까지 뛰어올렸는데 뒤에는 너무 늙었다는 것으로 판중추로 올렸다. 임금이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듣고는 유림(儒林) 영수(領袖)의 상사(喪事)를 애도하여 예장(禮葬)하게 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시열에게도 특별히 예조 참판을 제수하였는데, 준길과 함께 아경(亞卿)을 거쳐 서로 앞뒤로 이판과 병판이 되었다. 징벽(徵辟)에 부지런하여 가교(駕轎)를 타라고 명하였고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초구(貂裘)를 벗어주기에 이르렀으니, 지우(知遇)의 융숭함이 옛 시대에도 보기 드문 것이었다. 권시는 진선ㆍ집의를 거쳐 동부승지에 진배(進拜)되었고 곧이어 찬선이 되었다. 최온은 누차 대부(臺府)를 거쳐 승지로 뛰어 올려 제수하였다.

심광수(沈光洙)가 외간(外艱)을 당하자, 왕은 예전에 선생이었다고 하여 존문(存問)하고 약료(藥料)와 식물(食物)을 지급하였으며 상기(喪期)가 끝나자 헌직(憲職)을 거쳐 발탁하여 은대(銀臺)에 두었다. 허목(許穆) 또한 임하(林下)에서 일어나 지평ㆍ장령에 제수되었다. 조극선(趙克善)이 병들었을 적에는 털옷을 하사하여 덮어주고 내의를 보내어 구료했으며 그가 죽었을 때에는 호조의 낭관(郞官)으로 하여금 상사를 다스리게 하는 한편 날마다 중사(中使)를 보내어 보살피게 하였다. 그리고 의금(衣衾)ㆍ관염(棺斂)을 예(禮)를 갖추어 극진히 하였으며 관곽과 분묘에 드는 비용도 모두 관(官)에서 갖추어 주게 하였다.

유명(儒名)이 있는 사람은 모두 수소문하여 기용하였다. 이들을 돌보는 마음이 매우 우악(優渥)하여 유현을 숭상하는 성대함이 시종 한결같았다. 이는 삼대(三代) 이후에 있지 않았던 일이다.

선조(先朝)의 기로(耆老)인 훈구 대신에게는 예경(禮敬)이 융숭하고도 특이하였으며 은수(恩數)도 높고 중하였다. 나이 많은 달존으로 걸음을 잘 못 걷는 김상헌(金尙憲) 같은 경우에는 대궐에 들어올 적에도 견여(肩輿)를 타도록 명하였고 전상에 올라올 적에는 내관(內官)이 부축하게 하였다. 선조(先朝)에서 견벌을 받았더라도 그 정상이 용서할 만하고 재식이 쓸 만한 것이 이경여(李敬輿) 같은 경우에는 기용하여 의지하면서 수상에 제배하기도 하였다. 먼 변방에 유배되어 있는 사람이라도 본조(本朝)에서 죄를 진 것이 아닌 경우에는 수찰(手札)을 보내어 위유(慰諭)하고 문안과 괴유(餽遺)가 잇따랐으며 대군(大君)을 보내어 면려하여 결국은 사지(死地)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구마(廐馬)와 문표(文豹)를 내려주기도 하고 좋은 술과 맛난 음식을 하사하기도 하였으며 철따라 나는 산물과 제철 과실 등 특이하게 맛있는 것을 하사하는 것이 끊이지 않았다. 분묘(墳墓)를 성알(省謁)하겠다고 고하면 전의(奠儀)를 갖추 지급해 주었으므로 은택이 천양(泉壤)에까지 두루 미쳤으며, 휴가 받아 지방으로 나가면 방백(方伯)에게 하유하여 특별한 향유(餉遺)가 있게 하였다. 그리고 가끔 편전(便殿)으로 불러들여 술을 하사하여 권하기도 하였으며, 병이 들면 반드시 어의(御醫)를 보내고 내약(內藥)이 뒤따랐으며, 소회를 진달하면 흔연히 받아들여 시행하였고 또 반드시 선소(宣召)하여 마음을 열어 면유(面諭)하였으며,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모두 자문(諮問)한 뒤에 행하였다.

신서(臣庶)들에게 조림(照臨)함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라도 살피지 않는 것이 없었고, 이역 땅에서 죽음을 당한 경우에는 특별히 그 집을 구휼하였고, 다른 나라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는 경우에는 그 처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고, 부모의 봉양을 위해 걸군(乞郡)하는 경우에는 그들의 소원을 다 이루어 주었고, 어버이에게 병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구료하여 낫게 하였고, 자신의 병이 중한 경우에는 품계가 낮다고 하여 소홀히 하지 않았다. 재신(宰臣)으로서 시골에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경우에는 매달 녹봉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이고 죽음을 측은히 여기고 추증(追贈)하는 은전이 널리 서관(庶官)에게 가하여졌다. 관리가 되어 치적이 으뜸인 사람은 오래도록 기억하였고 죽은 뒤에도 잊지 않았으며, 편관(編管)된 사람이 부모의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놓아주어 분곡(奔哭)하게 하였으며, 국사를 위하여 죽었는데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사유(赦宥)가 그의 조카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

해마다 흉년이 들어 탁지(度支)에서 국고가 고갈되었음을 고하자 비국(備局)이 백관들의 녹봉을 감할 것을 청하고 정원도 이를 계속하여 아뢰고 대신(大臣)들도 거듭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첫째는 충신(忠信)으로 대하고 녹봉을 중하게 주라는 것은 성인(聖人)의 훈계인데 흉년이 들어 굶주리는 해에는 더욱 깊이 유념해야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어공(御供)을 줄이지 않은 것이 아직 많으니 다 줄인 다음 다시 의논해야 할 것인데 부비(浮費)는 모두 절감토록 해야 한다는 것이고, 셋째는 조종조 때에는 아랫사람을 대우하는 도리가 매우 돈독했는데 지금에 와서 너무 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결국 녹봉을 감하지 않았는데도 경비가 또한 지탱되었다. 이는 뭇신하를 내 몸처럼 여기는 극진한 뜻에서 나온 조처인 것이다.

제일 먼저 언로(言路)를 열어 말을 하도록 계도(啓導)하였으며 소장을 올려 폐단을 말하거나 잠언(箴言)을 올려 규풍(規諷)하는 사람이 있으면 호피(虎皮)나 표피(豹皮)를 하사하기도 하고 마장(馬裝)을 하사하기도 하였다. 홍문관의 학사(學士)는 홍문록에 기록된 사람을 쓰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말이 정직한 것을 가상하게 여긴 경우에는 죄를 사면시키고 곧바로 수찬에 제배하였으며, 과감하게 간쟁하는 사람은 삼사의 관원으로 자주 발탁 기용하기도 하는 한편 돌려가면서 교대로 인견하여 잘못을 규핵하는 책임으로 면려시켰다.

사람을 기용할 적에는 항상 양전(兩銓)을 단속하였는데 대간과 수령은 더욱 신중히 가리게 하였다. 명현(名賢)ㆍ양상(良相)과 충신ㆍ효자ㆍ청백리의 자손은 모두 녹용(錄用)하게 하였으며 절의(節義)를 포장(褒奬)하여 아름답게 여김으로써 퇴폐 풍속을 면려시켰다. 고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자손이 미미한 탓으로 묘도(墓道)에 묘표(墓表)조차 없다는 말을 왕이 듣고서는 본도의 방백으로 하여금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은 예로부터 충신으로는 조헌(趙憲) 같은 이가 없다고 여기고 그 자손들을 먼저 서용하라고 특명하였다. 고 우상 김상헌(金尙憲)을 영의정으로, 고 참판 정온(鄭蘊)을 판서로 추증(追贈)하였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를 간행(刊行)하였고 또 《경민편(警民編)》을 간행하여, 보고 감동을 느끼게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각도의 감사ㆍ병사ㆍ수사와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배사(拜辭)할 적에는 조용히 사대(賜對)하여, 관원을 출척시키고 백성을 어루만져 사랑하는 방도에 대해 자상하게 일러 주었다. 어사(御史)를 나누어 파견하여 여러 고을과 변진(邊鎭)을 염찰(廉察)하게 하고 선악의 정상을 알게 되면 그에 따라 상벌을 가하였다. 그리고 먼 변방의 병민(兵民)들은 왕화(王化)에 젖지 못했다는 것으로 함경 남북도와 평안도의 병사 및 양계(兩界)의 변방 수령은 간간이 문관(文官)으로 차견하였다. 백관들이 나태할 것을 염려하여 하교하기를, "잘하고 잘못하는 것은 재주이고, 부지런하고 부지런하지 못한 것은 뜻이다. 재주는 본래 얻기가 어렵겠지만 뜻 또한 부지런하지 않다면 장차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했는데, 모든 관사 가운데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벌을 내렸다. 또 하교하기를, "조정에서 먼저 기강을 확립하여 백집사(百執事)가 모두 자기의 직무에 부지런하다면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지금 백사(百司)가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고 있다. 좌기(坐起) 같은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닌데도 일체 폐기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우려스럽게 여긴다. 전곡(錢穀)의 직임은 더욱 자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도 아침에 임명했다가 저녁에 바꾸고 있다. 우리 나라는 집리(執吏)가 없으면 일을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는 매달 삭말(朔末)에 육조와 한성부ㆍ장례원은 각기 해사(該司)의 좌기한 일수(日數)를 써서 들여 오게 하라. 이에 의거하여 그 근만(勤慢)을 조사하겠다." 하였다. 이로부터 각사에서 좌기했는지 안 했는지를 매달 써서 아뢰게 되었다. 그 뒤 헌부에서 한 번만 좌기하자 하교하기를, "법관이 이렇게 하면 어떻게 백사(百司)를 규정(糾正)할 수 있겠는가." 하고, 전 대사헌 이하를 아울러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붕비(朋比)하는 습관을 매우 증오하여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신하들이 붕당(朋黨)을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작록(爵祿)에 대한 계교에 불과한 것이다. 과연 국사에 마음을 다하여 임금에게 중히 여김을 받는다면 부귀는 저절로 오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분주히 뛰어다니면서 영구(營救)할 필요가 있겠는가. 만일 그 정적(情迹)이 탄로가 나서 결국 죄려(罪戾)를 면하지 못하게 되면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나는 기필코 사문(私門)을 타파시키고 국사가 수거(修擧)되게 하고 싶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붕우(朋友)란 그 덕을 벗하는 것이다. 따라서 술자리에서도 의당 서로 선한 일을 하도록 책하는 도리로써 면려해야 되는 것인데, 지금은 모두 잡되게 친하는 것만을 일삼고 있다. 그리하여 조신(朝紳) 사이에도 각기 붕당을 만들어 잘못을 덮어줌으로써 함께 붕당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다." 하였다. 인견할 때 뭇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것은 나라를 망치는 길이다. 명(明)나라와 우리 나라의 혼조(昏朝) 때의 일이 멀지 않은 귀감이 된다. 지금 명공(名公)ㆍ대부(大夫)들에게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대신과 공경들은 다시 더욱 풍속을 면려하고 청백함을 숭상하도록 힘쓰라. 재능이 없더라도 청백한 사람이면 발탁해 기용하여 일세(一世)를 인도하게 해야 한다." 하였는데, 신하들을 계칙(戒飭)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윤대(輪對)를 할 적에는 각사의 폐단을 하문하였고 전강(殿講)을 할 적에는 문신과 사자(士子)들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수시로 어제(御題)를 내어 옥당(玉堂)ㆍ은대(銀臺)ㆍ춘방(春坊) 등에서 입직한 관원들에게 제술 시험을 보여 우수한 사람은 상을 주었다. 또 특별히 사신(詞臣)을 선발하여 사가 독서하게 하였는데 글을 읽기도 하고 짓기도 하게 했다. 간간이 춘당대에 나아가 직접 문무(文武)의 재능을 시험하였는데, 간혹 당일 방방(放榜)하기도 하고 면대하여 상물(賞物)을 지급하기도 하여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동(聳動)시켰다. 대사성을 잘 가리고 또 좨주(祭酒)를 설치하되 유현(儒賢)에게 이를 겸대하게 하여 《소학》을 가르치게 하였다.

을미년1162) 칠석(七夕)에 제생(諸生)들을 모아놓고 제술 시험을 보였는데 곧이어 새로 만든 은배(銀杯)를 태학에 하사하였고 인하여 관중(館中)의 많은 관원들과 입격(入格)된 제생들에게 술을 내려주었다. 또 임금의 서한을 내리기를, "구전(舊典)을 계속하기 위해 은배(銀杯) 2부(部)를 특별히 본관(本館)에 하사한다. 그것이 사치스럽기 때문이 아니라 오래 보존되기 바라서이고 술을 마시기 위한 때문이 아니라 화협하기를 바라서이다. 그대 사생(師生)들은 이 뜻을 밝게 드러내어 삼가 공경하여 어긋남이 없게 하기 바란다." 했는데, 이는 일세(一世)를 흥기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나온 것으로 미담(美談)이 되고 있다.

노인을 우대하는 의리는 상례를 뛰어넘어 위로 조신(朝臣)에서부터 아래로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수(壽)한 것으로 벼슬에 오른 사람이 전후 매우 많았다. 나이가 많아 80세에 이른 사람은 남녀 귀천을 막론하고 해마다 존문(存問)하고 쌀과 술 등의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했으며 90세와 1백 세가 된 경우에는 자급을 뛰어넘어 제수하고 명주와 솜을 더 주고 호역(戶役)을 면제시켰다. 이는 여생이 많지 않으므로 불쌍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더욱 깊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1백 세가 넘은 서인(庶人)이 있으면 액정서(掖庭暑)의 사람을 시켜 업어다가 전상(殿上)에 초치시키고 진수 성찬을 먹였으며 철따라 생산되는 물건도 끊이지 않게 보내주었다. 만수연(萬壽宴)이 있은 뒤 하교하기를, "사경(四境) 안에 있는 나의 백성들의 부모로서 나이가 늙었는데도 잘 봉양받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 한둘이겠는가. 이는 나의 책임이다. 중외로 하여금 쌀ㆍ반찬ㆍ술을 하사하여 나의 추기급인(推己及人)하려는 뜻을 몸받게 하라." 하였다. 측은하게 여기는 전지(傳旨)에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왕은 성품이 너그럽고 활달한데다가 매우 명석하고 신중하였기 때문에 옥사(獄事)의 판결에 의혹이 없게 하였다.

신묘년1163) 겨울 역적 허견(許堅)ㆍ김자점(金自點)의 옥사가 있을 때 왕이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직접 국문했는데 역적의 아들 김식(金鉽)이 승복하면서 곧바로 함께 모의한 무장(武將)을 끌어들였고 계속해서 사대부를 고발하는 등 널리 파급되었다. 왕이 문사 낭관(問事郞官)을 시켜 다시는 동당(同黨)에 대해 묻지 말게 하니, 이에 의구심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비로소 진정되었다. 김식이 말하기를, "일찍이 역관 이형장(李馨長)을 시켜 모사(謀事)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 운운했는데, 이때 형장이 연경(燕京)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국청에서 이를 비밀에 부친 채 발설하지 않았다. 다음해 3월에 형장이 의주(義州)에 도착했는데, 대신이 은밀히 청하여 급히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아오게 하니, 온 조정이 그로 인하여 화란이 초래될까 우려하였다. 이는 적역(賊譯)이 정역(鄭譯)과 서로 표리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왕은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엄히 국문하여 거열형(車裂刑)에 처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처음에 김자점의 적소(謫所)인 광양(光陽)으로 중사(中使)를 보내어 문서를 수색하여 오게 했으므로 조사(朝士)들의 간찰(簡札)과 곤수(閫帥)ㆍ수령 들의 서신이 모두 금중(禁中)으로 들어왔다. 그 내용에는 원망하는 말과 흉악스런 자취가 또한 환히 드러난 자도 있었지만 모두 안에 머물려 두고 내리지 않았다. 뒤에 연신(筵臣)이 이에 대해 아뢰니 왕이 답하기를, "볼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미 불태워 버렸다." 하였다. 이는 옥사가 번질까 저어해서였다. 대역(大逆)을 주참(誅斬)하고 나면 으레 하의(賀儀)가 있는 법인데, 왕이 이르기를, "원훈(元勳)이 반역(反逆)을 하였으니, 부끄러울 뿐 축하해야 할 의의가 없다." 하고, 드디어 받지 않았다.

서옥(庶獄)에 대해서도 삼가지 않는 것이 없었다. 일찍이 《서전》의 전형(典刑)을 게시한다는 대문(大文)을 읽으면서 이르기를, "‘어찌하여 후세에는 법망이 이리도 조밀하단 말인가.’라고 한 것은 송 태왕(宋太王)의 말이 아닌가." 하고, 여형편(呂刑篇)을 읽으면서는 또한 경신(敬愼)해야 한다는 뜻으로 형관(刑官)에게 면유(面諭)하고, 또 하교하기를, "형벌은 정치를 보조하는 도구이다. 성인(聖人)도 부득이 쓰기는 했지만, 반드시 지공 무사(至公無私)하여 한결같이 공평한 마음에 의하여 하였다. 그런 뒤에야 백성들이 손발을 둘 데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은 형을 받는 사람이 많은데도 실정을 자백하는 사람은 없으니, 정치를 보조한다는 의의가 너무도 없다. 간혹 1차의 형신을 받고 잇따라 치사(致死)되는 경우가 있으니 형벌을 가함에 있어 흠휼(欽恤)한다는 도리가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이리하여 형조의 당상들이 아울러 추고받고 감죄(勘罪)되었다.

매양 혹한기와 혹서기가 되면 승지를 보내어 전옥(典獄)을 점검하게 하여 먼저 죄가 가벼운 죄수는 방면시키게 하고 금부와 형조로 하여금 즉각 소결(疎決)하게 하였다. 세시(歲時)에 임하여서도 이렇게 하였다. 외방의 감사가 혹 형벌을 남용하여 사람을 죽게 한 경우가 있으면 이미 지난 일이라는 것으로 다스리지 않은 적이 없이 반드시 나문(拿問)한 뒤에 죄주었다.

임진년1164) 겨울 교형(絞刑)에 처해야 될 죄인은 으레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는 말을 듣고 이에 하교하기를, "죽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자못 율명(律名)의 본의가 못 된다. 내가 매우 참혹하게 여기고 있으니 형관으로 하여금 살펴서 조처하게 하라." 하였다. 이로부터 응당 교형에 처할 사람은 목매어 죽였다. 형조가 이미 삼복(三覆)을 거치고 난 다음 죄인들을 율(律)에 의거해 처단하려 할 때, 왕이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따뜻한 기운이 봄 같고 장맛비가 그치지 않고 있으며 짙은 안개가 사방에 꽉 끼어 있으니, 나의 마음이 송구스럽다. 사수(死囚) 10여 명을 모두 오늘 복법(伏法)시키려고 하는데, 삼복(三覆)의 의언(議讞)을 거쳤어도 미진한 점이 있는가 우려스러워 다시 경들에게 묻고 싶다." 하니, 신하들이 모두 찬성하였으므로 다시 의언하였다. 그리하여 특별히 두 명에게 사형을 감해주었다.

갑오년1165) 12월에 사관(史官)이 명을 받들고 전옥을 살핀 다음 서계하기를, "죄수 가운데 8명은 의상(衣裳)이 홑옷이고 얇은 것이 더욱 극심했습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이렇게 추운 계절에 나의 백성이 법금에 저촉되어 추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밥도 배부르게 먹지 못하고 옷도 몸을 가리지 못하고 있으니, 내가 불쌍하고 딱하게 여겨 회포를 가눌 수가 없다. 해조(該曹)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어 주게 하고 또 땔감과 숯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또 모든 도에 유시하여 각 고을의 죄수들에게 땔감과 숯을 두루 지급하여 얼어 죽는 걱정을 면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승지에게 이르기를, "누차 형벌에 신중을 기하라는 하교를 내렸는데도 중외의 신료(臣僚)들이 잘 봉행하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곤수와 수령 등이 형장(刑杖)을 남용하여 사죄(死罪)가 아닌데도 목숨을 잃는 경우가 있으니,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중한 것이기 때문에 사죄를 범했더라도 오히려 재복(再覆)ㆍ삼복(三覆)을 거쳐 의논하면서 차마 갑자기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더구나 한때의 노여움 때문에 지나치게 써서는 안 될 형장을 가하여 사람을 죽게 만드니, 국법으로 볼 때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는가. 의당 팔도의 곤수 이하 여러 장령(將領)들과 수령들에게 하유를 전하여 멋대로 형장을 쓰지 말게 함으로써 조정에서 흠휼(欽恤)하는 뜻을 알게 하라." 하였다.

정유년1166) 겨울 당진(唐津) 사람 이정(李珽)의 무고(誣告)가 있었을 적에 설한(雪寒)이 바야흐로 혹독했었는데 호우(湖右)의 사민(士民)으로서 체포된 사람 가운데 춥고 배고픈 백성들이 많았었다. 왕은 공사(供辭)를 한번 보고는 곡직을 환히 분변하여 고발한 자를 주참하고 무고당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게 하였으며 유사로 하여금 추위에 떠는 사람은 옷을 입혀 주게 하고 사람마다 모두 가면서 먹을 양식을 지급해 주게 하니, 모두들 머리를 조아리며 감축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갔다. 전후의 무옥(誣獄)을 모두 즉시 통쾌하게 결단하여 연루되어 억울함을 당하는 걱정이 없게 하였다.

누차 변란을 겪어 사율(師律)이 실추되어 문란해졌으므로 인조조(仁祖朝)에 영장(營將)을 설립했었으나 곧 파하고 행하지 않았었다. 왕은 선조(先朝)의 옛 제도를 다시 설치하는 것이 옳다고 하고 이에 양호(兩湖)의 오영(五營)과 영남 좌우도의 모든 진(鎭)에 각각 영장을 설치하여 관할 내의 군졸을 통제하게 함으로써 일이 있기 전에 대비하는 것을 전일하게 하였다.

훈국(訓局)의 무장(武將)과 포병(砲兵)도 전에 비해 액수를 증가시켰고, 어영(御營)의 군졸도 부오(部伍)를 나누어 교대로 상번하게 하여 각기 조리가 있게 되었으며, 삼남(三南)의 편오(編伍)에게도 복호(復戶)해 주게 하였다.

각시 노비(各寺奴婢)에 대해 추쇄(推刷)를 행하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도망하거나 물고(物故)된 허실을 전연 분별할 수 없어 그저 빈 장부만 걸어두고 있을 뿐이어서 누락되어 빠진 것이 매우 많았다. 왕은 고헐(苦歇)이 고르지 않으면 법령을 의거할 데가 없게 된다는 이유로 을미년1167) 에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추쇄하였다. 그리고 어사(御史)를 보내어 조사했는데, 양민(良民)이 되어 있는 경우는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세월이 오래되었으면 탕척시켜 주었으며, 원통한 사람이 진소(陳訴)하면 상세히 살펴서 억울함을 풀어 주었으며, 한 호(戶)에 정(丁)이 많은 경우에는 헤아려 감하여 주고 쌀이나 베 등 그곳의 토의(土宜)에 따라 받아들이게 하였다. 남중(南中)은 받아서 각주에 유치하여 두고 군수에 지급하여 쓰게 하였으며, 서로(西路)는 받아서 경용(經用)에 이바지하게 하였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의 급선무는 근본을 힘쓰는 것이므로 늘 하교하기를, "과거에 연경(燕京)과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에 농사짓는 일을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관개(灌漑)에 쓰이는 것으로는 수차(水車)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우리 나라는 전연 이 제도를 모르고 있다. 그 제도를 이제 조당(朝堂)에 내리니 편리 여부를 살펴 외방에 전포(傳布)시킴으로써 농사를 권면하는 데 일조가 되게 하라." 하였는데, 이는 한인(漢人)의 제도였다. 공주 목사 신속(申洬)이 농서를 편찬하여 판각한 다음 인쇄하여 진상하니, 가상히 여겨 포장(褒奬)하고 상을 주었다. 그리고는 해조에 명하여 많이 인쇄하여 널리 유포시키게 하였다.

민폐의 제거에 힘썼고 매양 능(陵)을 살필 때가 되면 더욱 부지런히 돌보아 유념하였다. 경인년1168) 가을 장릉(長陵)에 행행하려 하면서 하교하기를, "산릉에 배알하지 못한 지 2년이 되어가고 있어 상로(霜露)의 감회를 가눌 수가 없다. 따라서 이번의 행행이 있게 되었으나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흉년이 들고 백성들이 피로한 상황인데, 더구나 삼사(三使)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는가 하면 또 중국 사신이 나온다는 선성(先聲)이 있다. 내가 걸어서 갔다 올 수는 없겠지만, 민력을 수고롭게 하고 민재를 허비해 가면서 도로와 교량을 닦고 만들게 할 수 있겠는가. 해읍의 수령은 대가(大駕)를 인도(引導)하지 말고 감사는 거느리는 사람을 간략하게 하여 양식을 싸가지고 가게 하라. 이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법으로 제재를 가하겠다." 하고, 이어 대신 이하에게도 스스로 마른 양식을 가지고 가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치지 못하게 하였다. 대가가 신원(新院)에 이르렀을 때 선전관을 나누어 보내어 종신들이 머물러 있는 곳을 살펴보게 했는데, 각 고을의 인리(人吏)를 부리고 공궤(供饋)를 받는 사람도 있었고, 시위하는 군병들이 전지를 밟고 다녀 곡식을 손상시킨 경우도 있었다. 가까운 능에 행행할 때에는 대주정(大晝停)ㆍ소주정(小晝停)을 진설하지 말고 한 곳에만 진설하도록 명하였다.

백성들의 굶주림과 전염병을 구휼할 적에는 타는 불을 끄는 것같이 하였다. 기축년1169) 북도(北道)에서 전염병을 앓아 사망하는 사람이 서로 잇따랐다고 치계(馳啓)하니, 납제(臘劑)ㆍ청소(淸蘇) 및 각종 좋은 약재를 보내어 치료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또 온 도내에 흉년이 들었는데 육진(六鎭)이 더욱 극심하다고 아뢰니, 이에 영동(嶺東)의 곡식을 옮겨 가게 하라고 명하였으므로 배로 운송하는 역사(役事)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부역을 크게 줄였고 내수사에 공납하는 물품도 모두 견감시켰으므로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없었다. 경인년에 여항(閭巷)에 전염병이 크게 치성하자 동서의 활인서에 엄히 계칙하여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게 하였으며, 관에서 미곡을 지급하여 먹이는 한편 의사(醫司)로 하여금 이성구고환(二聖救苦丸)을 많이 제조하여 요절하는 것을 구제하게 하였다.

양서(兩西)와 기전(畿甸)에 참역(站役)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창고의 곡식을 풀어서 삼로(三路)의 참 가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어 진구하게 하고 관에서 요미(料米)를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내수사의 미포(米布)ㆍ피물(皮物)과 그에 소속된 염분을 민조(民曹)에 내주어 백성의 세금을 가볍게 해 주었다. 내국(內局)의 부용향(赴蓉香)은 국휼(國恤)이 있을 때까지 쓰지 말게 하였으며, 또 내공(內供)하는 술을 감하여 5일에 한 병씩만 바치게 하고 구급에만 쓰게 하였다. 이때 우황(牛黃)의 값이 날개 돋힌 듯이 치솟았으므로 이를 공납하는 고을의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내의 제조의 계달을 인하여 우황ㆍ웅담은 아울러 그 숫자를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인삼도 임시로 감하게 하였는데, 상ㆍ중ㆍ하 3품을 정하여 상품은 따로 한 상자를 담아서 어약(御藥)으로 공급하게 하고 중품은 사여(賜與)하는 데 쓰게 하고 하품은 원중(院中)에서 구급을 요할 때 쓰게 하였기 때문에, 도로 물리는 경우가 아주 적어 외방에서 크게 다행으로 여겼다. 그리고 방물(方物)의 진헌도 2년까지 받지 않게 하였다.

신묘년1170) 세자의 가례(嘉禮)를 행할 적에는 회례연(會禮宴)을 중지하게 하였으며, 드디어 내명부(內命婦)ㆍ외명부(外命婦)의 상(床)에 진설하는 꽃송이 1백여 가지를 감하게 했으며, 다른 것도 비용을 감한 것이 매우 많았다.

(계속)

출전 : 효종실록 효종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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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