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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4-24 (일) 01:13
분 류 사전2
ㆍ조회: 268      
[근대] 수신사 (두산)
수신사 修信使

개항 이후 일본에 파견한 외교 사절.

1876년(고종 13) 강화도 조약 이전까지 일본에 파견한 사절인 통신사(通信使)를 근대적 의미에서 고쳐 부른 것이다. 통신사가 주는 입장에서의 외교 사절이라면 수신사는 받는 입장에서의 외교 사절이라고 할 수 있다.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 거부정 책으로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외교 관계가 강화도 조약으로 재개되면서 일본은 초대 외교의 형식을 취하여 조선에게 사신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조선 정부는 회사(廻謝)의 뜻으로 사행을 결정하고 예조 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정사(正使)로 한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수신사 일행 76명은 1876년 4월 4일 서울을 출발하여 29일 일본 기선 고류마루[黃龍丸]를 타고 부산을 떠났다. 이튿날 시모노세키[下關]에 도착한 뒤 약 2개월간의 시찰을 마치고 윤 5월 7일 부산에 돌아와 6월 1일 서울에 도착, 고종에게 복명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예정에 없던 일왕(日王)과의 접견식을 가지고 태정대신(太政大臣) 산조 사네토미[三條實美]와 이토히로부미[伊藤博文]ㆍ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등 일본 정계의 초대연을 받는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며, 원로원ㆍ의사당을 비롯하여 육군성ㆍ해군성ㆍ내무성ㆍ문부성ㆍ대장성과 경시청ㆍ개척사 및 육해군의 군사 시설과 훈련 상황, 박물관ㆍ소방 훈련 등 일본이 자랑하는 근대화된 모든 시설을 관람하는 외교 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사행이 떠날 때까지 국내 여론은 일본에 대해 경계하는 편이었으나 김기수의 견문기인 《일동기유(日東記游)》 《수신사일기》를 보면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신사 김기수 일행의 일본관과 왕에게 올린 복명별단(復命別單)은 고종과 명성황후, 그리고 정부로 하여금 근대화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대일관계, 나아가서는 국제 정세에 관심을 갖게 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한편 일본은 수호조약에 이은 세목의 협정에서 조선 정부와 난처한 문제에 부딪쳤다. 즉, 일본은 하나부사[花房義質]를 내세워 부산에 이어 원산ㆍ인천의 개항을 강요하는 한편, 부산의 관세 배상, 미곡 금수의 해제 등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일본측의 기만적 술책에 의해서 개항 이후 강제되어 온 무관세 무역의 개정을 위한 정세(定稅)와 일본 상인들의 미곡남출(米穀濫出)을 금지하는 방곡, 그리고 인천 개항 요구와 관련된 대안 등을 마련하고, 일본의 물정을 탐색하기 위하여 1880년 수신사로 김홍집(金弘集)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요 현안은 일본측의 회피로 성과를 거둘 수 없었다. 그 대신 이들은 일본의 극진한 대접 속에서 일본 정부의 각 기관과 근대적 시설을 견학,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동향을 살피고 강력한 개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김홍집은 일본 체류 중 주일청국 공사관의 참찬관 황쭌셴[黃遵憲]과 여섯 차례에 걸친 필담을 통해 세계 대세와 개혁 정책의 실무적 문제, 조선 외교의 진로 등에 대해 논의하였다. 황쭌셴은 회담 내용을 《조선책략(朝鮮策略)》으로 정리하여 김홍집에게 주었다.

이 책은 조선이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면 "친중국(親中國) 결일본(結日本) 연미국(聯美國)"의 외교 정책을 써야 하며, 서양의 여러 나라와 수호통상하여 산업과 무역의 진흥을 꾀하고 서양의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김홍집의 보고를 토대로 대신 회의를 거쳐 조선 정부는 적극적인 개방 외교의 개화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내용이 알려지면서 반근대적 척사 사상에 젖은 양반 유생들로부터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1881년 영남 유생 이만손(李晩孫) 등이 소두가 되어 올린 만인소(萬人疏)와 그 뒤 강원 유생 홍재학(洪在鶴) 등의 복합상소 등 척사 상소 운동을 벌여, 김홍집을 비롯한 척신과 대신들의 실정을 공격하였다. 이처럼 척사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서 일본의 여러 부문에 걸쳐서 근대화 정책을 조사, 연구하기 위하여 1881년 1월 11일 박정양ㆍ어윤중 등 젊은 양반 자제 38명으로 구성된 조사 시찰단(朝士視察團)을 파견하였다. 이어 10월 25일 김윤식의 인솔 아래 학도(學徒)ㆍ공장(工匠) 등으로 편성한 영선사 38명을 천진에 파견하여, 청나라의 근대식 무기 제조와 근대식 군사 제도에 대한 실제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이러한 일본에 의한 수신사 초대 외교는 조선 정부에게는 세계 정세나 근대 문물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통해 조선의 봉건 지배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 기구의 일부를 친일파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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