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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7-24 (목) 05:47
분 류 사전2
ㆍ조회: 5839      
[조선] 이익 (브리)
이익 李瀷 1681(숙종 7)~1763(영조 39).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형원(柳馨遠)의 학문을 계승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을 대성했다. 독창성이 풍부했고, 항상 세무실용(世務實用)의 학(學)에 주력했으며, 시폐(時弊)를 개혁하기 위하여 사색과 연구를 거듭했다. 그의 개혁방안들은 획기적인 변혁을 도모하기보다는 점진적인 개혁을 추구한 것으로 현실에서 실제로 시행될 수 있는 것을 마련하기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실학사상은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한 후대 실학자들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자신(自新), 호는 성호(星湖).

생애

그의 가문은 남인 계열이었다. 증조할아버지 상의(尙毅)는 의정부좌찬성을, 할아버지 지안(志安)은 사헌부지평을, 아버지 하진(夏鎭)은 사헌부대사헌을 지냈다. 그가 태어난 바로 전 해인 1680년(숙종 6) 남인정권이 무너지고 서인이 재집권하는 경신대출척이 일어나, 남인이었던 아버지도 진주목사로 좌천되었다가 곧 다시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그는 이 유배지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1682년 아버지가 유배지에서 죽은 후 어머니 권씨는 선영이 있는 안산의 첨성촌(瞻星村)으로 이사했고, 이후 그는 이곳의 성호장(星湖莊)에서 평생을 지내게 되었다. 둘째 형인 잠(潛)에게 글을 배웠다. 처음 학문에 뜻을 두어 〈맹자〉·〈대학〉·〈소학〉·〈논어〉·〈중용〉·〈근사록〉을 읽고, 다시 〈심경〉·〈주역〉·〈서경〉·〈시경〉을 거쳐 정주(程朱)와 퇴계(退溪)를 탐독하여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1705년 증광시에 응시하여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이름을 적은 것이 격식에 맞지 않아서 회시에는 응시할 수 없었다. 이듬해 둘째 형 잠은 진사로서 장희빈(張禧嬪)을 옹호하면서 노론집권당을 공격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려, 국문 끝에 장살(杖殺)당했다. 이익은 이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아, 과거를 완전히 단념하고 두문불출하며 독서에 전념했다.

이후 셋째 형 서()와 사촌형 황(況)에게서 수학했다. 1715년 어머니를 여의고 복상이 끝난 후에는 노비와 집기 일체를 종가(宗家)에 돌리고 약간의 토지만으로 생계를 이었다. 1727년(영조 3) 학명이 알려져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사양하고 성호장에 묻혀 저술에만 몰두했다. 1763년에는 노인을 우대하는 제도에 따라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12월 83세의 일생을 마쳤다.

그가 삶을 영위한 시기는 18세기 전반기로서,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말미암은 피폐가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못한 때였다. 나라의 재정은 궁핍했고, 황폐된 전지(田地)가 복구되는 과정에서 궁방전·아문둔전·영문둔전, 그리고 양반의 대토지 소유가 새로이 전개되면서 지주전호(地主佃戶) 제도가 본격적으로 발전했다.

또한 동서분당이 남인·북인·노론·소론의 사색당쟁으로 발전되고, 다시 노론의 일당독재가 굳어지는 추세 속에서 정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지고 감사·수령의 가렴주구가 심화되었다. 이로써 농민의 광범한 몰락이 현저하게 전개되었다.

이익은 이 시기에 관직의 길을 절연하고 평생을 초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다. 그는 "글만을 읽고 성인(聖人)의 도리만을 말하면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하는 방책에 대하여 연구하지 않는다면, 그 학문은 개인생활에 대해서는 물론이거니와 국가적 관계에서도 무용한 것"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그의 학문의 성격을 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철학사상

그의 철학사상에는 치열한 비판적 태도가 깔려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한 글자라도 의심하면 망발이라고 하고, 찾아보고 대조만 해도 범죄라고 한다. 주자의 글에 대하여도 이러하니 하물며 고대의 경전에 대해서이랴.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학문은 고루와 무지를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에게 유익한 것이라면 반드시 옛 것만을 본볼 필요가 없고, 사업에 유해하다면 옛 것이라도 준수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여 주자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했다.

가장(家狀)에 의하면 "선생은 의양(依樣:모방)을 싫어하고 자득(自得:독창)을 요체로 삼았으니, 경문주설(經文注說)에 대해서 의심이 되면 꼭 깊이 사색해서 그 문제가 해결되면 빨리 적어두고,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두고두고 생각해서 해답을 얻은 다음에야 그만두었다"고 한다.

그는 독창적 사고와 정밀한 논리적 사고를 중시했다. 그는 "천지 사이에 차 있는 것은 기(氣) 아닌 것이 없다"라고 하여, 기 중심의 철학사상을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와 기는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사물을 이루고 그것이 세계의 시원으로 된다고 하여, 이기이원론적(理氣二元論的) 입장을 견지했다. 나아가서 이와 기의 선후 문제에서 이의 능동적·근원적·주재자적 역할을 인정함으로써, 이황(李滉)의 철학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또 정신과 지각은 육체적인 기관에 의존한다는 인식론을 전개했다.

그의 철학사상에는 자연과학 사상이 그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고 주장하여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을 부정했으며 지전설(地轉說)도 제기했다.

정치사상

그는 "임금이 없이도 백성은 혹 그 몸을 기를 수 있지만, 백성이 없으면 임금도 없는 것이니, 이것으로 보면 백성의 은혜가 임금의 그것보다도 더 중한 것"이고, "나라를 이롭게 한다는 것은 백성을 이롭게 한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정치를 논하는 자는 누구나 다 우선 백성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라고 하여 민본사상과 애민사상을 주장했다.

그는 당쟁의 가장 혹심한 피해자였으므로 당쟁문제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당쟁은 진정한 국론의 시비가 가려지지 못하게 하여 내정의 문란을 초래하고, 나아가서는 외환을 막지 못하는 화난(禍難)을 초래할 것이라고 하면서 당쟁을 경계했다. 그는 당쟁의 근원적 원인이 이해를 위한 쟁투에 있다고 보았다. "여기 이(利)가 하나고 사람이 둘이면 2당이 생기고, 이가 하나고 사람이 넷이면 바로 4당이 되는 것이니, 이는 고정되어 변함이 없는데 사람만이 더욱 늘어나면 여기 십붕팔당(十朋八黨)으로 분열되지 않을 수가 없다", "붕당은 부귀를 욕구하는 데에 말미암는다. 당을 해도 이익이 없으면 어떻게 붕당이 있겠는가", "이해가 절실하면 당은 뿌리가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지속되면 당의 결합이 공고하게 되는 것은 필연의 형세이다"라고 했다.

당시 양반은 목표가 오로지 벼슬아치가 되는 것이었다. 벼슬이 있으면 부가 따르기 때문이었다. 벼슬자리는 500여 개밖에 안 되는데, 정기적인 과거 합격자만도 항상 2,330명 수준은 유지되고, 여기에 부정기적인 과거합격자까지 합치면 벼슬자리 하나에 약 8대1의 경쟁이 된다고 파악했다.

따라서 당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과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관리로서의 능력이 있는 사람을 엄격하게, 그리고 숫자를 줄여서 선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양반의 생활방식과 사고방식을 근본적으로 개혁하여 그들도 농업과 상업에 종사하여 생활을 다스려 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사상

경제제도에서는 토지제도가 가장 핵심적인 관건이라고 생각했다. "왕도정치는 토지의 분배를 올바르게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허사이다", "사람은 귀천이 없이 재물에 의존하는데, 재물은 토지에서 생산된다. 따라서 정치에서 토지제도보다 더 큰 것은 없다"라고 하여, 토지제도 개혁이 사회경제적 폐해를 극복하는 기본 고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경제적 문제가 "부자는 끝없는 토지를 차지하고 있으나 가난한 사람은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다. 따라서 부자는 점점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진다"는 토지소유에서의 양극분화에 있다고 파악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책으로 균전제(均田制)를 주장했다. 한 농가의 기본적 토지 규모를 영업전(永業田)으로 정하고, 그 규모 이내의 토지는 일체 매매를 금지하며, 그 규모 이상의 토지만 관청에 보고하여 허가를 받은 다음에 매매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여러 해를 지나면 가난한 자는 점차 토지를 사들이고, 부유한 자는 점차 토지를 팔아서 결국 각 농가의 전지의 규모가 서로 균등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즉 그의 전제개혁사상은 당시의 봉건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봉건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개량하려는 것이었고, 실현 방법에서도 봉건국가의 법률에 의존하고 지배계급의 양심에 호소하는 것이었다.

세제개혁도 구상했는데 잡다한 가렴잡세를 폐지하고 1/10의 단일세를 시행하며, 지주전호관계에 있는 전지에서는 제도적으로 지주가 전세를 납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농민들에게 사실상의 조세로 되어 있던 환자제도를 기본적으로 개혁하여, 농민들 자신에 의하여 운영되는 사창제도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들의 조세부담을 줄이기 위해 봉건국가의 중앙관청과 지방관청을 대폭적으로 축소하며, 왕실의 지출도 일정한 한도로 제도적으로 제한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재화(財貨)의 생산에 큰 관심을 기울였는데, "재화를 생산하는 데에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생산자를 많게 하고 놀고 먹는 자를 적게 하며 제조는 급속히 하고 소비는 천천히 하는 데 불과하다"라고 했다.

그 구체적 방법은 관리의 숫자와 과거합격자의 수를 줄이고, 노비세습제도를 크게 개혁하여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해방하며, 집약농법과 토지의 개간을 장려하여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고, 사치를 배격하며, 근검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러한 논리의 연장선상에서 화폐의 통용을 반대했다. "돈은 말하자면 무용한 도구에 특히 적당한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서, 이것은 재화를 유용하게 활용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라고 하여, 돈을 유통수단으로서 인정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돈의 유통이 고리대를 촉진시키고 상품화폐관계를 크게 발전시켜서 많은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고 있었다. 이에 "10년 후에는 돈을 폐지한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공부(貢賦)는 돈으로 납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라고 하여, 화폐를 폐지하고 곡식과 포목을 유통수단으로 할 것을 주장했다. 이것은 소농·빈농을 경제적 몰락으로부터 구제하려는 목적이었으나, 당시의 역사적 추세에 거슬리는 시대 역행적인 것이었다.

이익의 정치·경제 개혁사상의 기본적 성격은 봉건적 전제주의와 양반통치제도 및 봉건적 토지소유의 횡포와 화폐유통으로 인한 소농·빈농의 몰락을 저지함으로써, 모두가 근로하며 함께 사는 자영농민경리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역사사상

이익은 종족 중심의 화이론(華夷論)에서 점차 문화 중심의 화이론으로 전이(轉移)되고 있었던 17세기 후반의 역사사상을 계승하여 그것을 한걸음 더 진전시켰다. 그는 국가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면서 모든 나라는 중국 중심의 '천하'(天下)에 소속된 존재가 아니라 각기 하나의 독자적 유기체를 이루고 있다고 인식하여, 중국 중심의 '천하'사상을 부정했다.

종래에는 중국 중심의 '천하'가 하나의 '역사적 세계'로서의 유일한 '천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중국에서만 '정통'(正統)이 있었는데, 이제 조선이 분절화된 하나의 유기체로서의 '역사적 세계'이기에, 조선에도 '정통론'이 적용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것이 ' 삼한정통론'(三韓正統論)이었다. 따라서 그는 조선 사람이 〈동국통감〉은 읽지 않고 중국의 사서(史書)만 읽으며, 중국 사서의 조선 기사로써 조선 역사를 저술하는 것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사대주의적 역사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또 종래 외이(外夷)라 하여 멸시했던 요(遼)·금(金)·원(元)에도 예악(禮樂)이 갖추어져 있고, 거기에서도 성인(聖人)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하여 전통적인 화이론을 크게 부정했다. 이처럼 조선을 비롯한 각 개별국가의 독자성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힘으로써 민족의식의 싹을 틔웠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운동이 선승악패(善勝惡敗)의 도덕률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세(時勢)에 의하여 움직여진다고 했다. 이처럼 시세가 역사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이므로, 역사상의 각 시대는 각기 고유한 특징을 가진다고 파악되었다. 시세는 어떠한 형태의 법칙도 없이, 그리고 인간의 주체적 의지나 행위에 관계없이 전혀 우연적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파악되었다. 따라서 역사 사실에의 의미부여의 영역에서는 다시 도덕률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가 비록 역사학을 유교적 도덕률에서 완전히 자립화시켜 독립된 학문으로 확립시키지 못했으나 민족의식의 싹을 틔우고, 근대적 역사학을 일단 출발시킴으로써, 한국에서 근대적 역사인식을 성립시켰다고 할 수 있다. 저서로는 〈성호선생문집〉·〈성호집속록〉·〈성호사설〉·〈곽우록 藿憂錄〉 등이 있다.

<참고문헌>

성호 이익의 철학사상연구 : 김용걸,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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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호이익연구 - 인간 성호와 그의 정치사상 : 한우근,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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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학의 역사관 - 이익과 정약용을 중심으로 〈벽사이우성교수정년퇴직기념논총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하〉 : 정창열, 창작과 비평사, 1990
이익의 사론과 한국사이해 〈한국학보〉 46 : 한영우, 일지사, 1987
성호 이익과 연암 박지원의 한전제 토지개혁 사상 〈이원순 교수 화갑기념 사학논총〉 : 신용하, 교학사, 1986
실학파의 신분관 - 성호의 사농합일론 〈한국사상〉 15 : 김용덕, 한국사상연구회, 1977
성호의 새로운 사론 〈백산학보〉 8 : 송찬식, 백산학회, 1970
성호 이익의 부정적 화폐론 - 이조사회 해체과정의 일측면적 고찰로서 〈역사학보〉 48 : 원유한, 역사학회, 1970
성호 이익 〈창작과 비평〉 4 - 2 : 정석종, 창작과 비평사, 1969
성호 이익 연구 - 그의 경제사상 〈진단학보〉 20 : 한우근, 진단학회, 1959

<정창렬(鄭昌烈) 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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