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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3 (일) 22:32
분 류 사전2
ㆍ조회: 664      
[조선] 영조 행장 1 (실록)
영조실록 총서

대왕의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인데, 숙종 원효 대왕의 아들이고 경종 선효 대왕의 아우이다. 어머니는 육상궁(毓祥宮) 숙빈(淑嬪) 최씨(崔氏)이고, 숙종 대왕 20년 갑술년1) 9월 13일 무인에 창덕궁(昌德宮) 보경당(寶慶堂)에서 탄생하였다. 기묘년2)에 연잉군(延礽君)에 봉(封)해졌고, 경종 대왕 원년(元年) 신축년3)에 왕세제(王世弟)로 책봉(冊封)되었으며, 갑진년4)에 즉위(卽位)하여 병신년5)에 승하(昇遐)했으니, 왕위(王位)에 있은 지가 52년이고 수명은 83세였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1책 401면
[분류] *왕실-종사(宗社) / *왕실-국왕(國王)

[註 1] 갑술년 : 1694.
[註 2] 기묘년 : 1699 숙종 25년.
[註 3] 신축년 : 1721.
[註 4] 갑진년 : 1724.
[註 5]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출전 : 영조실록 총서


영조 대왕 행장(行狀)

행장(行狀)에 이르기를, "영종 대왕(英宗大王)께서 승부(升祔)되신 뒤 일곱째 달 갑진(甲辰)에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신들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하교하기를, '아! 우리 선왕의 성덕(盛德)ㆍ대업(大業)을 지금은 신민(臣民)이 알고 뒤에는 사책(史冊)에 실릴 것이므로 본디 행장에 기대할 것은 아니나, 바깥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궁중의 일을 나 불곡(不穀)19589)이 말하지 않으면 대저 누가 널리 밝힐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 불곡이 성왕의 공렬(功烈)을 깊이 사모하여 만기(萬幾)의 여가에 유사(遺事) 예순 여섯 가지를 모아 적었다. 아! 너희 태사(太史)인 신하들은 훈계(訓戒)ㆍ모유(謨猷)를 널리 찾아서 차례대로 찬술(撰述)하여 행장을 만들어 《실록(實錄)》 뒤에 붙이라.' 하시매, 신(臣) 서명응(徐命膺)이 머리를 조아리고 대답하기를, '감히 명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왕(王)의 성(姓)은 이(李)이고 휘(諱)는 금(昑)이고 자(字)는 광숙(光叔)이며 현종 대왕(顯宗大王)의 손자이고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둘째 아드님이시다. 화경 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가 숙종 20년 갑술(甲戌) 9월 13일 무인(戊寅)에 창덕궁(昌德宮)에서 왕을 낳았는데, 그 사흘 전에 홍광(紅光)이 동방에 뻗고 백기(白氣)가 그 위를 덮었었다. 이날 밤에 궁인(宮人)이 꿈에 흰 용(龍)이 보경당(寶慶堂)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보경당은 바로 왕께서 탄강(誕降)하신 실(室)이다. 왕께서는 나시면서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듯한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 겨우 걸음을 배웠을 때에 숙종께 나아가 뵈면 반드시 무릎을 모아 바르게 앉고 숙종께서 물러가라고 명하지 않으시면 하루 해가 다 가더라도 어려워하시는 빛이 없으므로, 숙빈이 왕께서 오래 꿇어앉았느라 발이 굽을세라 염려하여 넓은 버선을 만들어서 힘줄과 뼈를 펼 수 있게 하였다. 무릇 글씨와 그림 따위는 다 배우지 않고도 잘하시어 필묵(筆墨)을 가지고 노실 때마다 빼어난 풍채가 사람들의 눈을 감동시켰다. 숙종께서 그 천성(天成)을 아름답게 여겨 시를 지어서 총애하셨다. 6세에 연잉군(延礽君)으로 봉하고 9세에 군수(郡守) 서종제(徐宗悌)의 딸을 맞아 달성 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삼고 19세에 출합(出閤)하셨다. 숙종께서 헌명(軒名)을 양성(養性) 이라 내리고 또 친히 화압(花押)하여 주셨다. 경자년19590)에 숙종께서 승하하시고 경종(景宗)께서 즉위하셨는데 편찮으신 지 오래 되고 사속(嗣續)도 바랄 수 없으므로, 이듬해 정언(正言) 이정소(李廷熽)가 상소하여 조종(祖宗)의 고사(故事)를 인용하고 저위(儲位)를 미리 세워서 인심을 매어 두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대신(大臣)에게 명하여 의논하게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金昌集)ㆍ좌의정 이건명(李健命)ㆍ판부사(判府事) 조태채(趙泰采) 및 육경(六卿)과 양사(兩司)의 장관이 구대(求對)하여, 자성(慈聖)께 고하여 일찍 대계(大計)를 정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뭇 신하에게 명하여 합문(閤門) 밖에 물러가 기다리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다시 불러들여 자성의 수찰(手札)을 보이셨는데, 거기에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혈맥(血脈)이며 선대왕(先大王)의 골육(骨肉)으로는 주상(主上)과 연잉군이 있을 뿐이니 어찌 다른 의논이 있겠는가?' 하셨으므로, 신하들이 다 눈물을 흘리며 물러갔다. 드디어 왕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고 군부인 서씨를 세제빈(世弟嬪)으로 책봉하였으나 왕께서 상소하여 사양하니, 경종께서 답하기를 '이미 입년(立年)19591) 이 지났어도 사속이 없고 또 기이한 병이 있으니, 나라의 일을 생각하면 베풀 만한 계책이 없다. 자성께 우러러 여쭈고 뭇사람의 뜻을 굽어 따라서 중대한 저위를 맡기니, 소심(小心)하게 삼가서 나라 사람의 희망에 부응하라.' 하셨다. 그때 마침 적신(賊臣) 유봉휘(柳鳳輝)가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중곤(中壼)을 다시 맞으신 지 겨우 수년인데 약시중을 드시느라 근심하고 황망하시고 이어서 양암(諒闇)19592) 에 계셨으니, 사속은 논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제 보력(寶曆)19593)이 한창이시고 중곤의 연세가 겨우 성년을 지나셨으니, 앞으로 자손이 번창하는 경사는 전국에서 바라는 것입니다. 혹 양궁(兩宮)에 병환이 있어서 탄육(誕育)에 방해된다면 보호하는 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치료하는 일은 무엇이고 극진히 할 것인데, 즉위하신 원년에 이런 일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처음에는 이 정소를 시켜 상소하여 청하게 해서 마치 시험하여 보는 듯하였고, 밤이 이미 깊었는데 등대(登對)하여 힘껏 청하되 들어가 여쭈기를 청하고 나서 바로 나와 선포하기를 청하여 문득 시키고 독촉하는 것과 같았으니, 신하의 예(禮)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무진년19594) 전하께서 탄생하셨을 때에도 후사를 세우는 일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신하들이 아직 수년을 기다려 볼 것을 말하였습니다.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이러해야 할 것인데 이제는 황급하고 경솔하니, 인심이 의혹하는 것이 오래 되어도 진정되지 않습니다. 바라건대 이제부터는 모든 행사에 대하여 신충(宸衷)19595)에서 결단하여 위복(威福)이 아래로 옮겨지게 하지 마시고 이어서 대신 이하가 우롱하고 협박한 죄를 바루게 하여서 나라 사람에게 답하소서.' 하였다.

경종께서 조정(朝廷)에 하교하기를, '일월(日月)처럼 밝으신 선대왕께서 내게 후사가 없는 것을 매우 염려하셨고 이제 내 병이 아들을 바랄 수 없으므로, 공경히 부탁을 받고서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다. 일전에 대간(臺諫)이 상소한 것은 종사(宗社)를 위하여 국본(國本)을 정하는 일이므로 바로 선대왕의 성려(盛慮)와 내 뜻에 맞거니와, 자성께 우러러 여쭈어 이미 국본을 정하였으니 참으로 종사의 끝없는 복이다. 유봉휘가 상소하였는데, 이는 어떤 사람인가? 경들은 논하여 아뢰라.' 하셨다. 대신과 삼사가 유봉휘를 국문(鞫問)하여 왕법(王法)을 바루게 하기를 청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으나 곧 고쳐서 멀리 귀양보내게 하셨으므로, 대신ㆍ재신(宰臣)ㆍ삼사ㆍ정원(政院)ㆍ종신(宗臣)ㆍ관학생(館學生)이 전에 청한 것을 고집하여 더욱 힘껏 청하였다.

이때 적신 조태구(趙泰耉)가 우의정으로서 근기(近畿)에 있었는데, 문득 차자를 올려 효묘(孝廟)께서 저위(儲位)를 이으실 때에 고(故) 상신(相臣) 이경여(李敬輿)가 상도(常道)를 지킨 논의를 인용하고 유봉휘는 충성하므로 때려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에 앞서 숙종께서 승하하셨을 때에 조문하러 온 칙사(勅使)가 황제의 분부가 있었으므로 세자(世子)와 아우와 자질(子姪)도 아울러 위문하고 싶다고 말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이 거절하고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조태구가 상소하기를, '상국에서 행하는 것은 실례가 되는 것이고 배신(陪臣)이 그것을 받는 것은 혐의를 무릅쓰는 것이니, 왕자(王子)와 종신(宗臣)들이 어찌 감히 이 일을 편안하게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고 왕을 원망하여 꺼리는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차자를 올려 유봉휘를 구제하는데 힘을 남기지 않으므로, 삼사가 말소리를 같이하여 조태구의 죄를 논하고 우선 삭출(削黜)하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왕께서 다시 상소하여 굳이 사양하였으나 경종께서 위로하여 타이르시는 것이 아주 극진하였으므로, 왕께서 9월에 비로소 인정전(仁政殿)에서 책보(冊寶)를 받으셨는데 보추(步趨)ㆍ진지(進止)가 모두 규도(規度)에 맞았다. 주연(胄筵)을 열어 《소학(小學)》ㆍ《강목(綱目)》을 강독(講讀)하셨는데, 뜻이 어렵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하여 문답하느라 밤을 새우고 낮에 이어도 싫증 내지 않으시고 말하기를, '궁료(宮僚)는 벗이다. 벗이 선행(善行)을 책망하려면 반드시 정지(情志)가 유통하고서야 그 말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일찍이 《심경(心經)》과 필묵(筆墨)을 겸설서(兼說書) 조현명(趙顯命)에게 내리시고 말하기를, '설서가 성심으로 개도(開導)하였으므로, 백금(伯禽)ㆍ양자(襄子)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효묘(孝廟)의 큰 뜻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궁위(宮闈)의 화기(和氣)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근습(近習)을 진중히 가리는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고, 견우과당도(牽牛過堂圖)를 벽에 건 데에 관한 말을 내가 잊지 않았다. 대저 말하였어도 잊는다면 곧 말을 버린 것이다. 하치않은 물건으로도 잊지 않는 뜻을 보이고 《심경》으로 심학(心學)을 권한 데에 보답한다.' 하셨다.

이때에 경묘(景廟)께서 병환이 더욱 심하셨는데, 만기(萬幾)를 수접(酬接)하시느라 심화(心火)가 올라도 깨닫지 못한다는 뜻을 여러 번 사륜(絲綸)에 보이셨으므로, 나라에 충성한 생각을 가진 자들은 왕께서 서무(庶務)에 참결(參決)하여 성로(聖勞)를 분담하기를 바랐고, 재신(宰臣) 이태좌(李台佐)가 조정에서 호조 판서(戶曹判書) 민진원(閔鎭遠)에게 이런 때에 대리(代理)하는 일을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고, 사대부(士大夫)가 사사로이 서로 수작할 때에도 그 말이 한 입에서 나오듯이 같았다. 그러나 김일경(金一鏡) 이라는 자는 사람됨이 흉악하고 도리에 어그러진 행실이 많고 이로운 것을 보면 부끄러움을 잊는 자인데, 이사상(李師尙)ㆍ윤취상(尹就商) 등 세상에서 배척받고 버려진 자와 깊이 서로 결탁하여 허여하고 환자(宦者) 박상검(朴尙儉)ㆍ문유도(文有道)와 궁인(宮人) 석렬(石烈)ㆍ필정(必貞)을 서로 통하여 궁중의 응원으로 삼았다. 그런데 왕께서 영명(英明)하시기 때문에 그 간사한 정상을 다 아실세라 염려하여 드디어 외정(外庭)에서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어붙이고서 무릇 대리를 말하는 자를 문득 반역으로 몰므로, 뭇 신하들이 두려워 움츠리고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이해 10월에 집의(執義) 조성복(趙聖復)이 상소하여 신하들을 인접(引接)하고 정령(政令)을 재결할 때에 세제(世弟)를 불러들여 옆에서 모시고 참여하여 듣고 일에 따라 익히기를 선조(先朝) 정유년19596)의 고사(故事)와 마찬가지로 하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그 말을 옳게 여기시고 드디어 하교하기를, '나는 10여 년 동안 기이한 병이 있거니와, 정유년에 청정(聽政)을 명하신 것은 선조에서 정섭(靜攝)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내 몸을 돌볼 겨를이 없었는데, 등극하고부터는 증세가 더욱이 깊어졌다. 세제는 장년이고 영명하므로 청정하게 하면 국사를 맡긴 데가 있어서 내가 안심하고 조섭할 수 있을 것이니, 이제부터 모든 국사를 세제를 시켜 재단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날 밤에 적신 최석항(崔錫恒)이 입직(入直)한 승지(承旨)ㆍ옥당(玉堂)과 함께 구대하니, 성명(成命)을 거두셨다.

적신 한세량(韓世良)이 상소하여 조성복에게 형벌을 줄 것을 청하기를,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습니다. 세제를 시켜 임조(臨朝)하게 하기를 직접 청하지는 않았더라도 참여하여 듣는 것은 임조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신하로서 감히 남몰래 천위(天位)를 옮길 생각을 품었으니, 죄가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도승지(都承旨) 홍계적(洪啓迪)이 한세량의 소(疏)는 지의(指意)가 흉패(凶悖)하다고 말하고 양사가 따라서 한세량을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기를 청하고 다시 잡아다 국문하여 엄히 묻기를 청하였다. 경종께서 시임(時任)ㆍ원임(原任)인 대신과 2품(品) 이상 및 삼사에 명하여 빈청(賓聽)에 와서 모이게 하고 하교하기를, '저위(儲位)를 일찍 정한 것은 본디 대리시키려 한 것인데 이미 자성께 여쭈었으니, 전에 하교한 대로 거행하라.' 하셨다. 그래서 왕께서 네 번 상소하여 힘껏 사양하고 대신 이하가 예합(詣閤)하여 구대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하였으므로,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전정(殿庭)에서 호소하여 대리하라는 명을 거두기를 청한 것이 모두 사흘이나 되었다. 경종께서 또 하교하기를, '내가 병이 있어도 수응(酬應)할 수 있다면 어찌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요즈음 심화가 하루에도 자주 일어나므로 좌우를 시켜 전례를 살펴서 거행하게 하는데, 좌우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 세제를 시키는 것이 옳은지를 경들이 생각하여 우리 형제가 고통을 나누어 망하려는 나라를 지키게 하라.' 하셨다. 영의정 김창집ㆍ좌의정 이건명ㆍ영부사(領府事) 이이명(李頤命)ㆍ판부사 조태채 등이 연명(聯名)으로 차자를 올리기를, '모든 국사를 모두 재단하라고 명하셨으니 이것은 국조(國朝)에 없던 일이므로 중외(中外)에서 놀랍게 여기고 의혹합니다. 신들이 만 번 주륙(誅戮)을 당하더라도 감히 받들 수 없습니다마는, 작은 일을 나누어 다스리는 것으로 말하면 정유년에 재정(裁定)한 것이 이미 있으니, 전하의 신하로서 어찌 감히 경거(輕遽)함에 구애되어 모두 어기겠습니까?' 하였다.

그런데 차자(箚子)가 올라가니, 조태구가 시골에서 달려와 선인문(宣仁門)으로 들어가 구대(求對)하였으나, 정원(政院)에서, '대각(臺閣)에서 바야흐로 조태구의 죄를 논하므로 조태구는 구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여 물리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금 뒤에 사알(司謁)이 명을 전하여 조태구를 입시(入侍)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정원ㆍ삼사(三司)를 입시하게 하고 다시 명을 전하여 시임ㆍ원임인 대신과 중신(重臣)ㆍ재신(宰臣)을 입시하게 하셨는데, 입시하니, 전후의 하교를 모두 거두어 거행하지 말게 하셨다. 물러가서 삼사에서 아뢰기를, '신하들을 인접(引接)할 때에는 정원을 거치는 것이 3백 년 동안 내려온 정규(定規)인데, 이제 조태구는 어느 길을 거쳐서 품지(稟旨)하였습니까? 이 길이 한 번 열리면 이 뒤에 북문(北門)의 변이 있더라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니, 승전색 사알(承傳色司謁)을 잡아다 문초하여 엄히 핵사(覈査)하소서.' 하니, 경종께서 윤허하셨다. 양사(兩司)에서 다시 조태구가 평소에 환시(宦寺)와 교통한 죄를 논하고 극변(極邊)에 멀리 귀양보내기를 청하였으나, 답하지 않으셨다.

12월에 적신(賊臣) 김일경(金一鏡)ㆍ박필몽(朴弼夢)ㆍ이진유(李眞儒)ㆍ이명의(李明誼)ㆍ정해(鄭楷)ㆍ윤성시(尹聖時)ㆍ서종하(徐宗廈) 등 7인이 연명으로 상소하였는데, 거기에 '복합(伏閤)19597)ㆍ정유(庭籲)가 사흘에 이르렀습니다. 기사년19598)의 대신(大臣)은 한나절 정청(庭請)하였어도 오히려 정조(鄭造)ㆍ윤인(尹訒)ㆍ정인홍(鄭仁弘)과 같은 죄로 배척하였으니, 저들도 양기(梁冀)ㆍ석현(石顯)ㆍ왕망(王莽)ㆍ조조(曹操)와 같은 주벌(誅罰)을 면하기 워낙 어려울 것입니다. 바라건대 명지(明旨)를 내려 역적 조성복과 네 명의 흉적을 모두 법으로 결단하소서.' 하고, 드디어 말을 맺기를, '자신에게 나라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대신이 사력(死力)을 다하는데, 대각인 자가 감히 음기(陰機)라는 따위 말로 억지로 죄안(罪案)을 만드니 그 마음쓰는 것이 흉악하고도 참혹합니다.' 하였는데, 조태구를 가리킨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니, 사대신(四大臣)이 대명(待命)하였고, 이날 밤에 승지ㆍ삼사ㆍ경재(卿宰)ㆍ장신(將臣)이 혹 파직(罷職)되기도 하고 출송(黜送)되기도 하였으며, 김일경이 이조 참판(吏曹參判)이 되고 박필몽ㆍ이진유ㆍ이명의 등이 삼사가 되고 윤취상이 훈련 대장(訓鍊大將)이 되었다. 얼마 안가서 박상검이 문유도ㆍ석렬ㆍ필정과 함께 왕께서 조현(朝見)하는 청휘문(淸暉門)을 닫아 막아서 왕을 모해하는 것이 더욱 급해졌으므로, 왕께서 밤에 궁료(宮僚)를 불러 출합(出閤)하고 사위(辭位)하려 하셨는데, 보덕(輔德) 김동필(金東弼)이 그 불가함을 힘껏 아뢰었다. 이튿날 대비(大妃)께서 빈청(賓廳)에 봉서(封書)를 내리기를, '저사(儲嗣)를 정한 것은 선왕의 유교(遺敎)를 받든 것이고 주상(主上)께서 친히 작호(爵號)를 쓰셨고 내가 또 대신에게 하교하였는데, 불행히 궁인(宮人)ㆍ환시(宦寺)가 양궁(兩宮)에서 결탁하였다. 전에 내가 주상과 함께 궁인을 불러 꾸짖어 일렀는데도 궁인이 감히 흉패(凶悖)를 부렸으니, 이는 반드시 당률(當律)이 있을 것이다. 경들도 우리 주상과 동궁을 보호하여 3백 년의 종사를 지키고 우리 선왕의 유교를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 하셨다. 그래서 대신과 2품 이상과 정원과 삼사가 구대(求對)하여 논하니, 박상검ㆍ문유도ㆍ석렬ㆍ필정이 모두 처형되었다.

무릇 왕께서 저위(儲位)에 계신 동안에 간흉(奸凶)이 안팎으로 결탁하였으므로 옛 임금들이 어려워하던 처지에 놓이셨으나, 왕께서는 낯빛과 말에 나타내지 않고 응대하는 데에 도리가 있어서 마침내 궁위(宮闈) 안에 화기가 애연(藹然)하게 하셨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왕께 성덕(聖德)이 있는 줄 알았다. 임인년19599) 9월에 왕께서 치학(齒學)19600)하셨다.

갑진년19601) 8월에 경종의 병환이 위독해졌다. 당초 이광좌(李光佐)가 약원 도제조(藥院都提調)이었을 때에 성후(聖候)가 오래 낫지 않고 있을 때에 이공윤(李公胤)이 의업(醫業)에 종사하여 나라 안에서 이름났기 때문에 드디어 이공윤에게 주부(主簿)를 제수하여 약원에 들어와 약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이종윤은 사람됨이 도리에 어그러지고 경망하여 계묘년19602) 여름부터 날마다 준공제(峻攻劑)를 썼으나 조정에서는 이공윤이 선의(善醫)라 하여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성후가 더욱 위독해졌어도 이광좌가 곧 의약청(議藥廳)을 설치하지 않았는데, 왕께서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경종께서 약을 견디시는지 알려고 경종께서 한 술을 드시면 왕께서도 한 술을 드시고 두 술을 드시면 또한 두 술을 드셨으며 울면서 이공윤에게 말씀하기를, '참 원기가 날로 떨어지니 지금이 어찌 제 소견을 세울 때이겠는가? 급히 인삼과 부자(附子)로 양기를 회복해 드리라.' 하였으나, 이광좌와 이공윤은 전의 소견을 고집하고 끝내 인삼과 부자를 많이 쓰지 않았다.

경종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애훼(哀毁)가 도를 지나셨고 뭇 신하가 사위(嗣位)를 청하여도 물리치고 따르지 않으시므로, 대신ㆍ삼사ㆍ정원ㆍ종친ㆍ문무 백관(文武百官)이 여러 번 아뢰었으나 윤허받지 못하였다. 왕대비(王大妃)께서 수찰(手札)로 권하시고서야 왕께서 비로소 면복(冕服)을 입고 인정문(仁政門)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슬피 울부짖고 자리에 오르지 않으시며, 개복(改卜) 때에 행례(行禮)하여 왕대비 김씨를 대왕 대비(大王大妃)로 높이고 왕비 어씨(魚氏)를 왕대비로 높이고 빈(嬪) 서씨(徐氏)를 왕비로 올렸다. 왕께서 책보(冊寶)를 받으시려 할 때에 환시ㆍ궁인 중에 아직 박상검ㆍ필정의 무리가 많아서 방자하게 헐뜯는 것이 부도(不道)하고 보록(寶盝)을 섬돌 모퉁이에 던지는 소리가 어좌(御座)까지 들렸으나, 왕께서 못 들은 체하셨다. 아침ㆍ저녁의 곡전(哭奠)에는 반드시 친히 임하셨는데, 일찍이 풍비(風痺)를 앓아 침을 맞으시므로 약원에서 침은 상측(喪測)을 꺼린다 하여 곡림(哭臨)을 중지하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듣지 않으셨다. 여가에는 만기(萬幾)에 부지런하여 조금도 쉬지 않으시므로,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근로가 너무 지나친 것은 몸을 보호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기름진 땅의 백성이 재주가 없는 것은 안일하기 때문이고 메마른 땅의 백성이 모두 재주가 있는 것은 근로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삼대(三代)의 임금은 근로로 다스렸거니와, 안일로 다스렸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하셨다.

이에 앞서 숙종 말년부터 경종 4년에 이르는 동안은 다 편찮아서 경연(經筵)과 차대(次對)를 행하지 못하셨는데, 왕께서 공제(公除)하고 나서는 곧 강행(講行)하셨다. 선을 권하고 악을 간한 승지(承旨)에게 상주어 언로(言路)를 열고 호피(虎皮) 대신 바치는 면포(綿布)를 폐지하여 민력(民力)을 펴게 하며, 여염집을 함부로 차지하는 일을 매우 금하고 옥에 갇혀 지체되어 있는 자를 소방(疏放)하며, 경외(京外)의 관원을 구임(久任)하여 성적을 요구하시니, 한 가지 영(令)이 나올 때마다 사방에서 눈을 씻고 기대하였다. 마침 천둥의 이변이 있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글을 지어 정원에 내려서 구언(求言)하는 교서(敎書)를 대신 짓게 하셨는데, 거기에 대략 말하기를, '자신을 닦기를 잘하지 못하였는가? 마음을 비우고 받아들이는 것이 극진하지 못하였는가? 자신을 봉양하는 것이 지나치게 사치하였는가? 신하를 대우하는 것이 성실하지 못하였는가? 어진 사람이 초야에 있어도 쓰지 못한 일이 있는가? 곤궁한 백성이 원통한 마음을 품어도 아뢰지 못한 일이 있는가? 조정이 화평하지 못하여 천기(天氣)를 손상하였는가? 사의(私意)가 마구 유행하여 공의(公議)를 막았는가? 아! 너희 근밀(近密)19603)은 나를 대신하여 교서를 지어 널리 직언(直言)을 구하라. 말이 지나쳐도 내가 죄주지 않을 것이다. 아! 백성의 고통이 바야흐로 급하고 당습(黨習)의 다툼이 날마다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내 잠자리가 어찌 편안하겠는가? 조정의 신하는 곧은 사람을 쓰고 굽은 사람을 버리며 방백(方伯)인 신하는 출척(黜陟)을 오직 밝게 하여 네 직무를 삼가서 위로 하늘의 경고에 답하라.' 하였다. 정원에서 대신 짓지 말고 내리신 사륜(絲綸)을 중외에 포고(布告)하기를 청하였다. 그런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글이 졸렬하니 다시 대신 지어야 하겠다.' 하시매, 정원에서 다시 말하기를, '신들이 대신 지으면 반드시 왕언(王言)만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어려워하는 일을 다시 요구하는 것은 예(禮)로 부리는 도리가 아니니 그 말대로 하라.' 하셨다.

12월에 경종 대왕을 의릉(懿陵)에 장사하였다. 처음 복릉(卜陵)할 때에 왕께서 반드시 대비께 여쭈어 윤허를 받아야 결정하셨다. 국내(局內)에 있는 모든 백성의 전택(田宅)은 유사(有司)에 신칙(申飭)하여 후한 값을 주고 물러가게 하여 원망이 없게 하셨다. 이때 경자년19604)의 대상(大喪)을 겪은 지 얼마 안 되었어도 유사가 오히려 궁중의 고사(故事)를 몰라 거행하는 데에 헷갈렸는데, 왕께서 크고 작은 일들을 남김없이 고증하여 가르쳐 주어 반드시 성신(誠信)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어그러지지 않게 하셨다.

원년(元年) 을사(乙巳)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되, 방백에게 신칙하여 농사 시기를 빼앗지 말게 하시고, 사폐(辭陛)하는 수령(守令)은 문득 소견(召見)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고 경계하셨다. 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좁아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 넓지 못한데, 구신(舊臣)을 죄다 물리쳤으므로 조정에서 벼슬하는 자가 예전만 못하니 내가 매우 한스럽다. 바야흐로 해가 바뀌었으므로 만물과 함께 봄을 같이해야 할 것이니, 귀양간 사람을 대신과 금오(金吾)로 하여금 경중을 참작하여 소석(疏釋)하게 하라.' 하셨다. 당초 김일경(金一鏡) 등 역적들이 상소하여 연명으로 차자를 올린 사대신(四大臣)을 배척하여 양기(梁冀)ㆍ석현(石顯)ㆍ왕망(王莽)ㆍ조조(曹操)에 견주고 나서 스스로 양립(兩立)할 수 없는 형세임을 알고 일대(一隊)를 일망 타진하여 그 부리와 싹을 끊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시정(市井)의 무뢰한 사람 목호룡(睦虎龍)을 추기어 상변(上變)하게 하여 드디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대신과 그 족당(族黨)을 죄다 죽이고 친지(親知)를 연좌시켜 팔도에 두루 편배(編配)하고는 이어서 맹약(盟約)하고 반사(頒赦)하였다. 그 교문(敎文)은 김일경이 지은 것인데, 일을 인용하여 말을 만든 것이 모두 흉패(凶悖)를 극진히 하여 칠적(七賊)이 상소한 사연과 안팎이 되고 선왕을 무함하여 성궁(聖躬)에도 미쳤으므로 사람들이 다 근심하고 분개하였으나 김일경ㆍ박필몽(朴弼夢)의 기염을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전년 겨울에 정언(正言) 이의천(李倚天)이 상소하여 논하니, 왕께서 드디어 김일경ㆍ목호룡을 국문(鞫問)하여 처형하고 법대로 노적(孥籍)하였으며, 박필몽 등 육적(六賊)은 당초에 관직을 삭탈한 뒤에 모두 위리 안치(圍籬安置)하였으나, 무고 당한 사람들은 미처 소석하지 못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경상도의 사인(士人) 김인수(金麟壽) 등이 상소하여 선정신(先正臣) 송시열(宋時烈)을 도봉 서원(道峰書院)에 다시 향사(享祀)하고 또 선정신 권상하(權尙夏)의 관작(官爵)을 회복시키기를 청하였는데, 이 또한 김일경 등이 출향(黜享)하고 삭탈(削奪)한 것이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문(斯文)의 시비는 유림(儒林)에 달려 있고 조정에 달려 있지 않으니, 해조(該曹)를 시켜 그 관작을 회복하도록 하라.' 하셨다.

이달에 왕께서 의릉(懿陵)에 거둥하려 하셨는데, 날씨가 아직 매우 추우므로 약원(藥院)에서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기를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우로(雨露)가 이미 땅을 적시고 군자가 이를 밟으면 반드시 경동(警動)하는 마음이 생긴다.」 하였는데, 더구나 인산(因山) 때에 따라가지 못한 나이겠는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고 알릉(謁陵)하고 돌아오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었는데, 유사가 압슬형(壓膝刑)을 시행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한 문제(漢文帝)는 육형(肉刑)을 없애고 당 태종(唐太宗)은 명당도(明堂圖)를 보고 오장(五臟)이 등에 걸려 있다 하여 드디어 태배법(笞背法)을 없앴고 아조(我朝)의 세종(世宗)께서도 태배법을 없애셨는데, 더구나 오형(五刑)에 없는 압슬형이겠는가? 영구히 없애라.' 하셨다.

3월에 우의정(右議政) 정호(鄭澔)가 사대신이 원통하게 죽은 정상을 말하니, 왕께서 명하여 복관(復官)하고 치제(致祭)하고 증시(贈諡)하게 하였다. 이만성(李晩成)ㆍ홍계적(洪啓迪)ㆍ김운택(金雲澤)ㆍ김민택(金民澤)ㆍ이홍술(李弘述)ㆍ조성복(趙聖復) 등도 모두 복관하게 하고 고(故) 찬선(贊善) 이희조(李喜朝)도 증시하게 하셨다. 일찍이 소대(召對) 때에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완곡하게 간(諫)하고 넌지시 간하는 것은 본디 신하가 임금을 바로잡는 요체이나, 임금으로부터 말하면 신하가 바른 말로 간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완곡하고 넌지시 하는 데에 구구하게 만든다면, 또한 매우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은둔하여 있는 어진 사람을 뽑고 지사(志士)를 구하여 경연관(經筵官)을 채우라고 명하셨는데, 장차 불러들여 고문(顧問)에 갖추려 하신 것이다. 우의정(右議政) 민진원(閔鎭遠)이 왕께 아뢰기를, '궁인(宮人)을 반드시 내비(內婢)에서 뽑고 양가(良家)까지 해가 미치지 않은 것은 선조(先朝)의 덕정(德政)입니다. 이제 이따금 양가에 해가 미친다 하니, 과연 그렇습니까?' 하자, 왕께서 놀라 말씀하기를, '이제 액정(掖庭)을 조금이라도 내보내려고 하는데, 당 태종의 방출(放出)을 본받지는 못하더라도 어찌 더 뽑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양가의 딸은 그 부모가 어렵게 겨우 기른 것인데, 하루아침에 깊은 궁중에 유폐(幽閉)하는 것은 인정(仁政)이 아니다.' 하고, 당장 명하여 중관(中官)을 잡아다 문초하고 궁노(宮奴)를 결장(決杖)하여 정배(定配)하게 하셨다.

5월에 형조(刑曹)에서 제도(諸道)의 강도죄(强盜罪)를 핵사(覈査)하여 아뢰니, 왕께서 형관(刑官)에게 말씀하기를, '살리기를 좋아하고 죽이기를 싫어하는 것은 사람이 누구인들 이런 마음이 없겠는가? 기한(飢寒)에 몰리고 침어(侵漁)에 괴로워서 이 지경에 빠지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이니, 다 내 가르침이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경들은 불쌍히 여기고 기뻐하지 말며 짐작하여 빨리 판결하여 옥에 오래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크게 가무니, 왕께서 하교하여 구언(求言)하고 사직(社稷)에 친히 기도하여도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장차 북교(北郊)에서 다시 친히 기도하시려 하는데,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전례가 없으니 남교(南郊)로 개정하소서.' 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선농단(先農壇)에 특별히 제사하였는데,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성을 기울이고 정결을 다하여 북교에서 기도하셨다. 관제(祼祭)하고 나서 빽빽한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 비가 죽죽 내려서 면복(冕服)이 죄다 젖었으나 왕께서 규(珪)를 잡고 더욱 공손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용의(容儀)를 잃지 않으시니,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모두 흠탄(欽歎)하였다.

8월에 충청도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고(故) 충신(忠臣) 홍익한(洪翼漢)ㆍ윤집(尹集)ㆍ오달제(吳達濟) 등의 묘석(墓石)을 세우게 하시고, 성조(聖祖)께서 일찍이 세 충신에게 전토(田土)를 내리셨으나 유사가 인순(因循)하여 오래 되어도 주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신칙(申飭)하여 죄다 주게 하셨다.

동11월(冬十一月)에 삼남(三南)에 기근이 들었는데, 왕께서 궁납미(宮納米)를 줄여서 진휼(賑恤)에 보태고 말씀하기를, '선조에서는 북관(北關)의 공은(貢銀)이 있었으므로 흔히 은으로 진휼에 보탰으나, 이제는 은이 베[布]로 바뀌었으므로 선조의 유의(遺意)를 본받으려 하여도 할 수 없다.' 하셨다.

12월에 환장암(煥章庵)에 갈무리되어 있던 의종 황제(毅宗皇帝)의 어묵(御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명나라가 재조(再造)하여 준 은혜는 영구히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점점 오래 되면 인심이 버릇되어 예사로 여기기 쉬우니, 우리 성조께서 대의(大義)를 천명하지 않으셨다면 동토(東土)의 백성이 어찌 존주(尊周)의 의리를 알겠는가?'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남한(南漢)에 있는 현절사(顯節祠)에 치제(致祭)하고 또 강도(江都)에 있는 충렬사(忠烈祠)에 제사하고, 또 통제영(統制營)에 있는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사당에 제사하고 또 화양동(華陽洞)에 있는 문정공(文正公) 송시열(宋時烈)의 사당에 제사하게 하셨다. 곧 만동묘(萬東廟)에 사액(賜額)한 어묵(御墨)을 돌에 새기게 하고 그 아래에 친서(親序)하셨는데, 그것을 인쇄하여 문정공의 손자에게 내리고 석본(石本)을 내부(內府)에 갈무리해 두게 하셨다. 일찍이 야대(夜對) 때에 날씨가 매우 추우므로 승지(承旨)가 와내(臥內)에 유신(儒臣)을 불러들여 강독(講讀)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인정은 그믐에 가까워지면 게을러지기 쉽거니와,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면 정신을 떨쳐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2년 병오(丙午) 춘정월(春正月)에 상참(常參)과 경연(經筵)을 거행하면서 왕세자(王世子)에게 명하여 서연(書筵)을 열게 하셨다. 구례(舊例)로는 한추위와 한더위에는 양연(兩筵)을 멈추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왕께서 하교하기를, '대우(大禹)는 촌음(寸陰)을 아꼈으니 뭇사람은 분음(分陰)을 아껴야 할 것이다. 이제 정월이 이미 시작되었는데 어찌 날이 따뜻해지기를 기다리겠는가?' 하셨다. 상신(上辛)에 사직(社稷)에서 친히 기곡(祈穀)하시고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으셨다.

2월에 왕께서 삼남(三南)의 황정(荒政) 때문에 하교하기를, '예전 선조(先朝) 때에 영동 감진 어사(嶺東監賑御史)가 기민도(飢民圖)를 올렸는데 바로 어제시(御製詩)가 있었다. 내가 일찍이 그 그림을 펴 보니 굶어 죽은 자와 쓰러진 자와 허둥지둥 죽을 마시는 자가 눈앞에 있는 듯하였는데, 이제 삼남의 백성도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설진(設賑)한 고을의 백성은 한 해의 적곡(糴穀)을 감면하고 그 다음 가는 것은 반을 감면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종묘(宗廟)의 경종실(景宗室)을 더 세우는 일이 끝났는데, 종신(宗臣)이 상소하기를, '태조(太祖)께서 비로소 종묘를 세우셨는데 이제에 이르러서 중건(重建)한 것은 경사이니, 칭경(稱慶)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한마음으로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삼가 지켜서 깊은 인애(仁愛)와 두터운 은택이 백성의 피부와 골수에 스며 젖게 하는 것이 성대한 행사보다 훨씬 낫다. 어찌하여 칭경하겠는가?' 하셨다.

추8월(秋八月)에 사간(司諫) 이병태(李秉泰)가 임금의 과실을 가리켜 아뢴 것이 매우 절실하고 정직하였는데, 왕께서 호피(虎皮)를 내려 장려하셨다.

9월에 명하여 고(故) 부제학(副提學) 권변(權忭)에게 증시(贈諡)하게 하셨다. 권변은 숙종 중년(中年)부터 영달하는 길에 대하여 생각을 끊었는데, 사대부들이 그 풍채를 존경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동10월(冬十月)에 경종 대왕(景宗大王)과 단의 왕후(端懿王后)를 태묘(太廟)에 부제(祔祭)하였다. 예(禮)가 끝나고 왕께서 돌아와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진하(陳賀)를 받고 세 가지를 백관에게 칙유(飭諭)하셨는데, 첫째는 붕당(朋黨)을 징계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치를 경계하는 것이고 셋째는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11월에 왕께서 문묘(文廟)에 참배하여 작헌(酌獻)하고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친히 선비들을 책시(策試)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나라를 다스릴 인재를 얻어 겉치레만 화려한 풍속을 없애고 문산(文山)19605)의 정충(精忠)을 본받게 하려 하니 각각 실속을 힘써 내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셨다.

3년 정미(丁未) 춘정월(春正月)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에서 기곡(祈穀)하려 할 때에 하교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기곡하는데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재전(齋殿)까지 걸어가시는데, 승지들이 연(輦)을 타시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듣지 않으셨다. 고향에 돌아가 어버이를 뵈려는 유신(儒臣)이 어버이가 앓는다고 휴가를 청하였는데, 왕께서 말씀하기를, '참으로 앓는다면 인정이 워낙 그래야 마땅하겠으나, 병이 없는데 병이 있다고 하였다면 임금에게 고하는 것이 성실하지 않을 뿐더러 아들의 도리로서도 어떠하겠는가?' 하고, 그 말을 여고(予告)로 고치라고 명하셨다.

3월에 경연(經筵)에 특진(特進)하는 무신(武臣)에게 명하여 각각 문의(文義)를 설명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한 무신이 문의를 설명하였다가 승지의 찰추(察推)를 받았는데, 이때부터 특진하는 무신이 서로 경계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므로 이 명이 있었다. 이때 은거하던 어진 선비로서 경연관(經筵官)에 뽑힌 자가 죽었는데, 연신(筵臣)이 증관(贈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살았을 때에도 작록(爵祿)으로 매어 두지 않았는데, 죽은 뒤에 어찌하여 반드시 증관해야 하겠는가?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고 본도(本道)를 시켜 상장(喪葬)을 돕게 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좌의정(左議政) 홍치중(洪致中)이 경외(京外)의 전화(錢貨)가 다하였다 하여 돈을 주조(鑄造)하여 보태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돈을 주조하는 폐단은 돈이 귀한 것보다 훨씬 더하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4년 무신(戊申) 춘3월(春三月)에 영남(嶺南)의 역적 이인좌(李麟佐)ㆍ정희량(鄭希亮) 등이 모반하였는데, 왕사(王師)가 물리쳐 평정하였다. 이에 앞서 역적 김일경(金一鏡)ㆍ목호룡(睦虎龍)이 처형되고 박필몽(朴弼夢) 등 여러 역적이 죄다 위리 안치(圍籬安置)되었으므로, 그 무리가 스스로 역절(逆節)이 천지 사이에 용납되기 어려움을 헤아리고 박필몽의 종부제(從父弟) 박필현(朴弼顯)과 김일경의 아들 김영해(金寧海)와 목호룡의 형 목시룡(睦時龍) 등과, 김일경ㆍ박필몽의 심복인 심유현(沈維賢)이 기사년19606) 에 죄로 죽은 사람 민종도(閔宗道)ㆍ이의징(李義徵)의 아들ㆍ손자 및 실지(失志)하여 나라를 원망하는 자와 체결하고 흉언(凶言)을 터무니없이 떠벌리어 인심을 속여 현혹하였다. 그리고 이인좌ㆍ정희량을 추대하여 원수(元帥)로 삼고 이유익(李有翼)ㆍ이하(李河)를 모주(謀主)로 삼고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사성(李思晟)은 관서(關西)에서 앞장서 난을 일으키고 총융사(摠戎使) 김중기(金重器)ㆍ금군 별장(禁軍別將) 남태징(南泰徵)은 안에서 화응(和應)하기로 약속하고 이달 20일에 서울을 침범하여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坦)을 추대하려고 뱀ㆍ지렁이처럼 모여 얽혀서 화를 빚은 지 자못 오래 되었으나 조정에서는 까마득히 몰랐다.

이때에 이르러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가 용인(龍仁)에 물러가 사는 중에 이웃 사람 안박(安鑮)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적정(賊情)을 알고 급히 달려 들어와 고하고 수원 부사(水原府使) 송진명(宋眞明)이 이어서 또 상변(上變)한 사람을 형틀을 채워 압송하였다. 왕께서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 오명항(吳命恒)을 사도 도순무사(四道都巡撫使)로 삼고 박문수(朴文秀)ㆍ조현명(趙顯命)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보좌하여 경영(京營)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성(安城)ㆍ죽산(竹山)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 문죄(問罪)하게 하고, 이여적(李汝迪)ㆍ박동추(朴東樞)를 계원장(繼援將)으로 삼아 경영의 군사와 개성(開城)의 마군(馬軍)을 거느리고 도순무의 후원이 되게 하고, 장붕익(張鵬翼)을 진어 대장(鎭禦大將)으로 삼아 북한성(北漢城) 아래에 진쳐서 서우(西憂)를 막게 하였다가 곧 김중기를 갈음하여 총융사를 삼아 수원에 출진(出鎭)하게 하였다. 정찬술(鄭纘述)을 포도 대장(捕盜大將)으로 삼고 이정제(李廷濟)를 경기 감사(京畿監司)로 삼아 한강 동작진(銅雀津)을 방수(防守)하게 하고, 김동필(金東弼)을 경략사(經略使)로 삼아 개성부(開城府)와 남한(南漢)의 군사를 나누어 용인 등 여러 요로(要路)를 차단하게 하였다. 유척기(兪拓基)를 양주 목사 겸 동로 진어사(楊州牧使兼東路鎭禦使)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고암(鼓巖)에 나아가 지키게 하고, 김재로(金在魯)를 충추 목사 겸 호서 안무사(忠州牧使兼湖西安撫使)로 삼아 조령(鳥嶺) 등 요처를 제압하게 하였다. 권업(權)으로 권첨(權詹)을 갈음하여 충청 감사(忠淸監司)로 삼고 이광덕(李匡德)으로 정사효(鄭思孝)를 갈음하여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삼고 황해 감사(黃海監司) 김시혁(金始㷜)이 3천의 군사를 거느리고 동선령(洞仙嶺)을 막아 지키게 하고, 병사(兵使) 원백규(元百揆)가 친기위(親騎衛) 3백 인을 거느리고 청석령(靑石嶺)을 막아 지키게 하였다가 이사성이 잡힌 뒤에 군사를 파환(罷還)하게 하였다. 박사수(朴師洙)를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로 삼아 안동(安東) 등 좌도(左道)를 돌아다니며 위유(慰諭)하고 소모(召募)하게 하고, 윤순(尹淳)을 감호 제군사(監護諸軍使)로 삼아 영애(嶺隘)를 살피고 군사를 나누어 방수하게 하고, 송인명(宋寅明)을 대사간 비국 제조(大司諫備局提調)로 삼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일을 의논하게 하였다.

다 왕께서 뭇 방책을 수합하여 결단하고 기회를 타서 승리를 취하되 털 하나가 끼어들 틈이 없게 하셨으므로 나라 사람이 의지하여 편안하였다. 왕사(王師)가 미처 떠나기 전에 적이 밤에 충청 병영(忠淸兵營)에 들어가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을 죽였다. 그래서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과 이봉상의 편비(褊裨) 홍임(洪霖)이 적을 욕하며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왕께서 남연년을 사나운 바람에도 쏠리지 않는 굳센 풀이라고 칭찬하였다. 곧 명하여 병조 판서(兵曹判書)를 증직(贈職)하고 그 여문(閭門)에 정표(旌表)19607)하고 이봉상의 아들 이한필(李漢弼)과 남연년의 아들 남덕하(南德夏)를 기복(起復)19608)하고 그 품계(品階)를 올려 종군(從軍)하여 원수를 갚게 하시니, 사람들이 다 떨쳐 일어나 힘쓰려고 생각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장전(帳殿)에 나아가 수인(囚人)을 국문(鞫問)하실 때에 좌우를 물리고 송인명(宋寅明)을 불러 비밀히 말씀하기를, '아까 수인이 이사성을 끌어댔을 때에 시위(侍衛)하던 선전관(宣傳官) 이사필(李思弼)이 황급히 나갔는데, 이 자는 이사성에게 무슨 관계가 되는 자인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종부제(從父弟)입니다.' 하였다. 이날 저녁에 궐직(闕直)하였기 때문에 이사필을 잡아 가두고 이사성이 처형되기에 이르러 이사필을 군전(軍前)에 효시(梟示)하였다. 이사성은 평소에 재주가 있다고 일컬어졌으므로 조정에서 금오랑(金吾郞)을 보내어 잡게 하고 나서도 변이 있을세라 의심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관서의 수령(守令)이 이사성이 제집에 보낸 글을 올렸는데, 모두 잗달고 부녀(婦女)에 관한 말이었다. 왕께서 기뻐하며 '걱정 없다.' 하셨는데, 말씀이 끝나기 전에 금오랑이 이사성을 잡아서 이르렀다. 무릇 왕께서 시기에 알맞게 헤아리시는 것이 흔히 이러하였으므로 군사(軍事)를 조치하는 데에 빠뜨리시는 것이 없었다. 왕사가 안성ㆍ죽산에 이르러 적을 만나 마른 나무를 꺾고 무너진 것을 당겨 쓰러뜨리듯이 한 번 북을 쳐 사기를 떨쳐서 죄다 섬멸하고 적의 괴수 이인좌 등을 함거(檻車)에 실어 서울로 보냈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황선(黃璿)이 격문(檄文)을 보내어 성주 목사(星州牧使) 이보혁(李普赫)을 우방장(右防將)으로 삼아 군사를 경계하여 합천군(陜川郡)에 들어가 적병을 엄습하여 공격하게 하여 참획(斬獲)이 매우 많았고, 선산 부사(善山府使) 박필건(朴弼健)을 좌방장(左防將)으로 삼고 곤양 군수(昆陽郡守) 우하형(禹夏亨)이 군사를 거느리고 박필건의 군사에 속하여 우지령(牛旨嶺)에 웅거하게 하여 적의 우두머리 정희량ㆍ이웅보(李熊輔)의 머리를 베었으므로, 여러 적이 멀리서 바라보고 절로 무너졌다.

그래서 흉역(凶逆)이 죄다 평정되니 드디어 명하여 파병(罷兵)하고 귀농(歸農)하게 하셨다. 오명항이 군사를 거느리고 돌아오니, 왕께서 남문루(南門樓)에 나아가 헌괵(獻馘)을 받고 차등을 두어 논공(論功)하였으니 운대(雲臺)19609)에 초상을 그리고 철권(鐵券)19610)을 내려 주었다. 이어서 시위(侍衛)하는 장사(將士)에게 하유(下諭)하기를, '너희들 중에 친속이 흉역이거나 오래 사귄 친구가 흉역인 자가 있더라도 그 모의를 몰랐으니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생각을 품지 말라. 내가 덕이 부족할지라도 어찌 면유(面諭)하고서 어기겠는가?' 하시매, 장사가 모두 느껴 울었다. 이달 왕께서 세자와 함께 숙빈(淑嬪)의 묘(廟)에 참배하셨을 때에, 잠저(潛邸)에서 부리던 가까이 모신 구사(丘史)가 묘 안에서 잠시 뵙고 문안드리려 하였다. 그런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상차(上箚)하기를 '예(禮)에 어그러지게 뵈는 것을 동궁(東宮)에게 보여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니, 왕께서 칭찬하고 곧 명하여 진문(陣門) 밖으로 몰아 내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정릉(靖陵)에 거둥하실 때에 길을 치느라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고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백성이 국법을 업신여기고 임금이 다니는 길가에 장사지내는 것은 죄이다. 그러나 백성의 무덤을 무너뜨리는 것이 어찌 임금의 정치이겠는가?' 하고, 드디어 지방관(地方官)에게 벌을 내렸다. 이때 대풍(大豊)이 들었으므로 대왕 대비와 왕대비께 진연(進宴)하고 나이가 여든 이상인 조정의 신하와 나이가 아흔 이상인 서민에게 술ㆍ쌀과 어육(魚肉)을 차등을 두어 내리셨다.

동10월(冬十月)에 왕께서 장차 대향(大享)을 친히 행하려 하는데 마침 편찮으시고 날씨도 매우 추우므로 대신이 대행(代行)을 청하였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예전에 명나라 인종 황제(仁宗皇帝)가 병을 견디고 친향(親享)하였는데 땀이 옷에 배고 병이 나았다 하니 또한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친향하셨다. 그런데 신관(晨祼)부터 망예(望瘞)19611)까지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애연(藹然)하여 승강(昇降)하고 보추(步趨)하시는 것을 바라보면 신(神)과 같았다.

5년 기유(己酉) 춘정월(春正月)에 하교하여 농사를 권하고 수령(守令)에게 신칙(申飭)하여 백성에게 종자와 양식을 도와 주게 하셨는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았다. 왕께서 바야흐로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부르려 하시는데, 한 간관(諫官)이 은례(恩禮)가 너무 지나침을 말하니, 왕께서 노하여 말씀하기를, '이것은 임금이 은거하여 있는 어진 선비를 경시하는 마음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고 드디어 벌을 내렸다. 이때 왕께서 양역(良役)의 폐단을 바로잡는 일에 마음을 단단히 쓰셨는데, 일을 맡은 자가 경용(經用)을 채울 길이 없는 것을 괴로워하니, 왕께서 하교하기를, '신하들은 나에게 천박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내 정사는 오히려 느슨하다. 또 한 문제(漢文帝)가 전조(田租)의 반을 줄여 준 것이 전후에 잇달았던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절약하였기 때문이다. 나라에 참으로 여유가 있다면 한 백성에게 두 필(匹)인들 어찌 감면하기 어렵겠는가? 궁전(宮田) 중에서 정제(定制) 이외에 면세된 것은 모두 세를 내게 하고 각 아문(衙門)ㆍ서원(書院)의 위전(位田)19612)도 이와 같이 하라.' 하셨다. 이윽고 정신(廷臣)에게 하유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궁중에서 고계(高髻)19613) 를 좋아하면 사방에서는 높이가 한 자가 된다.」 하였으니, 본뜨는 선례가 있다. 예전에 우리 선조(宣祖)께서는 이불과 바지가 다 목면포(木綿布)이었으므로 궁중에서 아름다운 일로 전해 온다. 나는 본디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또 성조(聖祖)를 본받으므로 상방(尙方)을 시켜 흑포립(黑布笠)을 짓게 하였다. 대저 금주(金珠)ㆍ금수(錦繡)는 우리 나라의 재화가 아닌데 나라 풍속이 이처럼 좋아하니, 어찌 황금이 흙 값과 같게 할 수 있겠는가? 늙은 신하는 그만이겠으나, 나이 젊은 신하는 뒷날에 반드시 내 뜻이 조금 펴진 것을 볼 것이다.' 하시매, 우의정(右議政) 이태좌(李台佐)가 말하기를, '공자(孔子)가 「천승(千乘)의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는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한다.」 한 것이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오늘 한 가지 선정(善政)을 행하고 내일 한 가지 선정을 행하면 비운(否運)을 태운(泰運)으로 돌리기가 어찌 어렵겠습니까? 다만 앞으로 나가는 데 날랜 자는 뒤로 물러나는 데도 빠르니, 이것도 성심(聖心)이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착하다. 내가 동궁에 있을 때에 궁료(宮僚)가 경계를 아뢰면 듣기 싫어한 적이 없거니와, 경의 말이 내 병통을 절실히 맞혔으니, 마음에 두고 잊지 않겠다.' 하셨다.

3월에 조정에서 무신년의 난을 겪은 지 얼마 안되었으므로 모든 흉역(凶逆)의 근족(近族)을 직임에 거의(擧擬)하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진(晉)나라의 왕도(王導)는 왕돈(王敦)의 근족이 아니었는가? 이전에 죄인의 공초에 이름이 나온 자는 흑백을 가려 석방하라. 더구나 국법이 죄를 연좌하지 않는데도 여러 비슷한 죄목 속에 놓은 것은 왕정(王政)에 어그러지니, 이제부터 등용하라.'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친히 종묘의 하향(夏享)을 행하실 때에 재전(齋殿)에 들어가 하교하기를, '경외(京外)의 백성이 다 조종(祖宗)의 백성이나, 서울 백성은 경작하지 않고 양잠(養蠶)하지 않으므로 부모를 섬기고 처자를 기르는 데에는 다 공미(貢米)에 의지하고 있다. 그런데 유사(有司)인 자가 내가 임문(臨門)하고 주교(駐橋)하여 하유한 것을 본받지 않고 한갓 비용을 아끼려고 마음먹으니, 어찌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데에 미치는 도리이겠는가? 유사에 신칙하여 내가 태묘(太廟)에 들어가 느낌을 일으킨 것을 저버리지 말게 하고 또한 팔도(八道)ㆍ양도(兩都)로 하여금 첫봄에 하교한 것을 성실히 따르게 하라.' 하셨다.

5월에 호조(戶曹)에서 북관(北關)에 은광(銀礦)을 설치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당(唐)나라 어사(御史) 권만기(權萬紀)가 은을 캐기를 청하니 태종(太宗)이 「수백만 민(緡)을 많이 얻는 것이 어찌 한 어진 인재를 얻는 것만 하겠느냐?」고 하였으니, 제왕의 체모가 있다 하겠다. 그만두어서 예전에 당 태종 만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하게 하지 말라.' 하셨다.

추9월(秋九月) 탄일(誕日)에 유신(儒臣)이 《금감록(金鑑錄)》을 본떠 경계를 아뢰니, 왕께서 《근사록(近思錄)》을 내려서 상주셨다.

12월에 숙종(肅宗)의 묘(廟)를 받들어 세실(世室)에 들였는데, 시임(時任)ㆍ원임(原任)인 대신들의 청을 따른 것이다. 6년 경술(庚戌)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동국통감(東國通鑑)》을 강독(講讀)하셨는데, 연신(筵臣)에게 말씀하기를, '공자가 《춘추(春秋)》를 짓되 반드시 천자(天子)를 높인 것은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다하는 의리를 바르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려(高麗)는 일찍이 송(宋)을 신하로서 섬겼으니, 휘종(徽宗)ㆍ흠종(欽宗)의 이름을 국사(國史)에 직서(直書)한 것이 옳겠는가? 우리 나라는 효묘(孝廟)ㆍ성고(聖考)께서 존주(尊周)하신 이후로 한 모퉁이에 있는 청구(靑丘)만이 대명 일월(大明日月)을 보전하였으니, 너희들은 선조(先朝)의 대의(大義)를 잊지 말라.' 하셨다. 이에 앞서 찬집청(纂輯廳)을 설치하고 대제학(大提學) 이덕수(李德壽)에게 명하여 《숙묘보감(肅廟寶鑑)》을 짓게 하셨는데, 이때에 이르러 올리니, 왕께서 여러 번 느껴 울며 계술(繼述)을 잘할 것을 스스로 힘쓰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영릉(寧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여주(驪州)ㆍ이천(利川) 사이에 이따금 여기(癘氣)가 있었다. 그러나 뭇 신하가 여기를 말하면 임금의 마음을 편하게 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드디어 다른 일을 핑계하여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말리니, 왕께서 꾸짖기를, '너희들은 성현의 글을 읽었고 벼슬이 경악(經幄)에 있는데 부인네가 꺼리는 것으로 임금에게 권하니, 내가 부끄럽게 여긴다.' 하셨다. 대신과 삼사(三司)와 2품(品) 이상이 서로 따라서 힘껏 다투었으나, 왕께서 끝내 듣지 않으시고, 지나는 길에서 경작하는 백성에게 신칙하여 다들 파식(播植)을 그치지 말게 하며 말씀하기를, '이 또한 경작을 시찰하는 뜻이다.' 하셨다. 회란(回鑾) 때에 광주(廣州)에 이르러 서장대(西將臺)에 올라 성조(聖祖)의 지사(志事)를 느끼고 부앙(俯仰)하며 크게 탄식하셨다.

3월에 나홍언(羅弘彦)이 폐출(廢黜)된 종실(宗室) 이해(李垓)와 이기(李圻)를 추대하려고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해와 기는 경신년19614) 에 죄로 죽은 반역한 종실 이정(李楨)과 이남(李枏)의 종손(從孫)이고 기사년19615) 에 죄로 죽은 사람 민취도(閔就道)의 외손(外孫)이며, 나홍언은 무신년19616)의 역적 나숭곤(羅崇坤)ㆍ나숭대(羅崇大)의 친속이고 역적 정사효(鄭思孝)의 우서(友壻)19617) 이다. 《삼강행실(三綱行實)》ㆍ《이륜행실(二倫行實)》 등 서적을 팔도에 반포하고 명하여 인쇄하여 널리 펴서 백성이 보고 느끼게 하라 하셨는데, 두 서적은 다 세종(世宗) 때에 지은 것이다. 이때 북관(北關)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御史)를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게 하고 또 독운 어사(督運御史)를 영남(嶺南)에 보내어 포항창(浦項倉)의 곡물을 도련포(都連浦)로 날라 바닷길로 가서 구제하게 하고 태복(太僕)19618)의 목장 중에서 일굴 만한 땅은 백성에게 일구도록 허가하셨다. 그래서 북관의 백성이 한 사람도 버려져 야위지 않았다.

하5월(夏五月)에 왕께서 《숙묘보감》을 보다가 숭인전(崇仁殿)ㆍ무열사(武烈祠)에 치제(致祭)하였다는 글에 이르러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우리 동방이 오랑캐의 풍속을 면한 것은 기자(箕子)의 팔조(八條)가 있는 데에 힘입은 것인데, 보록(寶錄)이 아니면 잊을 뻔하였다.' 하고, 드디어 예관(禮官)을 보내어 숭인전ㆍ무열사에 치제하게 하고 곧 명하여 악 무목(岳武穆)19619) 의 《정충록(精忠錄)》을 구입하여 바치게 하셨다. 이에 앞서 무신년의 역적 최필웅(崔必雄)이 망명하였다가 환관(宦官)에게 잡혀서 바쳐졌는데, 왕께서 환관에게 상주되 녹훈(錄勳)은 윤허하지 않으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筵臣)이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중관(中官)을 책훈(策勳)하는 것은 그 버릇을 길게 할 수 없다.' 하고, 끝내 윤허하지 않으셨다.

6월에 선의 왕후(宣懿王后) 어씨(魚氏)께서 훙서(薨逝)하시니, 왕께서 갑진년19620)과 마찬가지로 거상(居喪)하셨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지나친 예(禮)라 하시고 대신(大臣)ㆍ중신(重臣)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역대의 임금을 두루 보면 능히 계체(繼體)가 중하다는 것을 아는 자가 드물다.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후왕(後王)이 계체가 중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7년 신해(辛亥) 춘3월(春三月)에 왕께서 《주례(周禮)》를 강독(講讀)하다가 사구(司寇)는 방금(邦禁)을 맡는다는 글에 이르러 말씀하기를, '금(禁)이라는 것은 미연에 막는 것이다. 이제 추조(秋曹)19621)ㆍ경조(京兆)19622)ㆍ백부(柏府)19623)에서 수속(收贖)만을 힘쓰고 범하는 자가 많지 않을세라 염려하니, 방금을 설치한 것이 참으로 그런 것이겠는가? 신칙하라.' 하셨다.

하5월(夏五月)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남교(南郊)ㆍ북교(北郊)에서 두루 기도하매 문득 비가 내렸으나 줄기차지 않으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또 흉년이 들겠으니 진휼(賑恤)할 방도를 의논하라.' 하셨다. 대신이 돈을 주조하여 경비를 대충하고 그 곡물을 저축하였다가 진휼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다. 곡물은 관가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는 것이다. 굶주린 뒤에 진휼하는 것이 어찌 미리 백성에게 흩어 주어 백성이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이 넉넉하면 임금이 누구와 함께 넉넉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이를 말하는 것일 것이다.' 하시매, 신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고 칭선(稱善)하였다.

추8월(秋八月)에 장릉(長陵)을 교하(交河)에 옮겼다. 이에 앞서 옛 장릉에 뱀ㆍ살무사가 많다는 말이 있으므로 왕께서 대신에게 명하여 살펴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므로 왕께서 드디어 옮기기로 뜻을 정하였다. 옮기는 날에 구릉(舊陵)에 거둥하셨다가 신릉(新陵)에 따라가 크고 작은 일들을 몸소 감독하시고, 일을 마치고 나서 하교하기를, '백성이 노고하였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어찌 사냥이 아닌데 백성이 감히 노고를 말하라 할 수 있겠는가? 교하(交河)ㆍ파주(坡州)ㆍ양주(楊州)ㆍ고양(高陽) 네 고을 백성의 공세(貢稅)ㆍ조포(調布)는 반을 줄이고 우졸(郵卒)은 묘당(廟堂)을 시켜 은혜를 베풀게 하라.' 하셨다. 당초 구릉의 송백(松柏)은 다 효묘(孝廟)께서 손수 심으신 것인데, 왕께서 그 종자를 가져다 손수 신릉에 부리고 말씀하기를, '내가 영릉(寧陵)의 손때를 느낀 것처럼 내 자손이 내 손때를 느끼게 하려는 것이다.' 하셨다.

9월에 연신(筵臣)이 《오례의(五禮儀)》에 탄일(誕日)의 진하(陳賀)가 있는데 왕께서 탄일의 진하를 받지 않는 것은 지나치다고 말하니,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정자(程子)가 「부모가 없는 사람은 생일에 슬픔이 훨씬 더할 것이라.」 하였다. 내가 세종 성조(世宗聖祖) 때와 같을 수 있다면 어찌 진하를 사양하겠는가? 동궁에 있을 때에는 사양하고 오늘날에는 받는 것이 옳겠는가?' 하고, 끝내 따르지 않으셨다. 이에 앞서 경연관(經筵官) 양득중(梁得中)을 불러서 이르렀는데, 거지(擧止)가 촌스럽고 대답하는 것이 매우 데면데면하여 쓰기에 맞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다 웃었으나, 왕께서 후하게 예우하여 보내셨다. 이때에 이르러 연신이 다시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산야(山野)의 사람은 이러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 없다. 귀하게 여겨야 하고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소홀히 하면 아마 다른 사람들이 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셨으므로, 왕의 치세를 마칠 때까지 한번도 그 흉을 말하지 않았다. 동12월(冬十二月)에 삼복(三覆)을 행하였는데, 하교하기를, '당 태종(唐太宗)은 범상한 임금이지만 정관(貞觀) 동안에 옥이 비어 까치가 나무에 집을 지었는데, 과인(寡人)은 임어(臨御)한 지 7년이 되어도 덕행(德行)으로 교화를 베푼 것이 없어서 경외(京外)의 여수(慮囚)는 그 수가 열이 넘으니, 거의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미치지 못하여 그런 것이다. 아! 방백(方伯)은 나의 부덕(否德)을 말하지 말고 선화(宣化)를 삼가 힘쓰고 신유(申諭)를 공경히 하라.' 하셨다.

8년 임자(壬子) 춘정월(春正月)에 명하여 숭령전(崇靈殿)ㆍ숭덕전(崇德殿)을 수리하고 근신(近臣)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전조(前朝) 왕씨(王氏)의 후손을 등용하게 하셨다. 숭령전은 단군(檀君)의 사당이고 숭덕전은 고려 왕의 사당이다. 이때 5도(道)에 큰 흉년이 들었으므로 왕께서 여러 번 묘당에 신칙하여 진휼을 의논하게 하셨으나 오래도록 좋은 계책을 얻지 못하니, 왕께서 꾸짖기를, '경들이 백성을 내 형제 자매라고 생각하고 모든 백성을 위한 정사를 늘 학문하는 선비처럼 의심 없는 것은 의심을 두고 의심 있는 것은 의심을 없앤다면 어찌 구제하지 못할 것이 있겠는가? 이제 이처럼 세월만 보내니, 슬픈 우리 백성만 아래에서 괴로움을 받는다.' 하시매, 뭇 신하가 다 부끄러워하고 빌었다. 이때에 이르러 5도를 진휼하는데 유사(有司)가 죽을 만들어 서울 백성을 먹이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건량(乾糧)을 주어서 돌아가 처자와 같이하게 하라.' 하셨다.

3월에 삼남(三南)에 신칙하여 길에 있는 굶어 죽은 주검을 관가에서 거두어 묻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 왕께서 차대(次對)를 행하셨을 때에 신하들이 진휼을 의논하면서 다투어 마지않음을 대간(臺諫)이 말하니, 왕께서 조용히 말씀하기를, '천지가 서로 통하고서야 만물이 이루어지고 상하가 서로 믿고서야 모든 일이 다스려진다. 진 시황(秦始皇)은 주(周)나라 말기의 무너지고 느슨해진 것을 징계함에 형법(刑法)으로 바로잡았으나 뭇 신하가 죽음을 면하는 데에도 여유가 없었으니, 어느 겨를에 서로 믿겠는가? 화기(和氣)가 없어 상하가 원망하고 어그러졌으므로 2세(二世)에 이르러 망하였다. 한 고조(漢高祖)는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징계하여 너그럽고 간약한 것으로 구제하였기 때문에 조의(朝儀)가 엄하지 않아서 검(劍)으로 기둥을 치는 자까지 있었으니, 숙손통(叔孫通)이 예를 제정하게 되어서야 황제가 귀한 줄 비로소 알았다 하였다. 진(晉)ㆍ당(唐)부터 아조(我朝)까지는 다 문식(文飾)이 실질보다 나았거니와, 지금에 이르러서는 임금과 신하 사이가 거의 막혔으므로, 내가 여유 있는 것을 덜어서 모자라는 것을 채우려 하니, 이는 굽은 것을 바로잡다가 바른 데를 지나치는 폐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신(臺臣)이 차대에 같이 들어오는 것은 자리만 갖추려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규찰(糾察)을 겸하는 것이니, 이제부터 일에 따라 살펴서 드러내라.' 하셨다.

5월에 변무 주청사(辨誣奏請使) 낙창군(洛昌君) 이탱(李樘) 등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와 새로 수찬한 《명사(明史)》를 바쳤다. 이에 앞서 국조(國朝)의 종계(宗系)에 관한 일과 태조(太祖)의 득국(得國)에 관한 일과 인조(仁祖)의 등극(登極)에 관한 일이 전문(傳聞)이 잘못되어 다 《대명회전(大明會典)》 등 서적에 잘못 적혔으므로 열조(列朝)에서 여러 번 사신을 보내어 거짓을 밝히게 하였으나 죄다 바로잡히지 못하였다. 왕 7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청나라에서 강희(康熙)19624) 말년부터 왕홍서(王鴻緖)에게 명하여 《명사》의 열전(列傳)을 수찬하게 하였는데, 미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왕홍서가 죽으매 장정옥(張廷玉)ㆍ서건학(徐乾學) 등을 시켜 천하의 학문 있는 선비를 모아 본기(本紀)와 여러 지(志)를 이어서 수찬하게 하여 30여 년이 걸려서 이때에 이르러 끝나간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 이 기회를 넘기면 후회하더라도 어찌 미치겠는가? 빨리 이탱 등을 보내어 주청하게 하라.' 하셨는데, 이탱 등이 돌아오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거짓이 신사(新史)에서 죄다 밝혀졌다. 명하여 강화부(江華府)에 쌀 1천 석을 주어 조적(糶糴)하여 모곡(耗穀)을 취하여 천총(千摠)ㆍ파총(把摠) 이하의 사예(射藝)를 겨루고 상격(賞格)에 쓰는 비용으로 삼게 하셨다. 유수(留守) 윤유(尹游)의 청을 따른 것이다.

윤5월(閏五月)에 왕께서, 친히 '성묘를 높이고 사습을 바르게 하고 성실을 힘쓴다[尊聖廟 正士習 務誠實]'는 아홉 자를 쓰고 다시 윤음(綸音) 30줄을 만들어 근신(近臣)에게 명하여 태학(太學)의 유생(儒生)들에게 선유(宣諭)하고 또 선찬(宣饌)하게 하시니, 이튿날 태학의 유생들이 전문(箋文)을 올려 사례하였다. 드디어 명하여 대사성(大司成)을 구임(久任)시켜 성효(成效)를 책임지우셨다.

6월에 가물었으므로 왕께서 친히 사직(社稷)과 북교(北郊)에서 기도하셨으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하교하기를, '해마다 잇달아 크게 가물어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으니, 감선(減膳)만으로 어찌 자신을 책망하는 도리를 다할 수 있겠는가? 예전 진(晉)나라가 크게 가물었을 때에 현자(縣子)가 대답한 것이 재앙을 물리치는 요령을 얻게 되었거니와, 사흘 동안 천시(遷市)하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 얇은 옷을 입은 상번(上番) 군사에게 동옷[襦衣]을 지어 주라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시고, 지나는 고을의 부호(富戶)가 나타나는 대로 들어가 있게 하여 거리에서 얼고 굶주리지 않게 하라고 신칙하였다.

11월에 경기ㆍ삼남(三南)ㆍ영동(嶺東) 백성에게 미조(米租) 4만 5천 석을 내리고 부역과 공물 반년분을 줄이고 적모곡(糴耗穀)을 죄다 감면하고, 하교하기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서 왕이 되면 이를 막을 수 없다고 맹자(孟子)가 말하였거니와, 지금의 백성은 우리 조종의 백성인데, 더구나 성고(聖考)께서 백성을 돌보신 성의(盛意)는 내가 평소에 보고 들은 것임에랴? 해마다 잇달아 기근이 들어 저축이 없으나, 백성이 죄다 죽으면 곡물이 억만 섬 있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드디어 어사(御史)를 나누어 보내어 진정(賑政)을 살피고 선유(宣諭)하며 또 문무(文武)의 재능이 있는 자와 은거(隱居)하여 평소의 뜻을 지키는 선비를 찾게 하셨다.

9년 계축(癸丑) 춘정월(春正月)에 왕께서 하교하여 조정에 신칙(申飭)하여 정신을 모으고 재능 있는 자를 등용하고 옛날의 버릇을 버리고 본연의 공정을 넓혀서 해와 함께 모두 새로워지게 하셨다.

2월에 왕께서 시학(視學)하셨다. 당초에 문묘(文廟)에 작헌(酌獻)할 것을 명하셨는데, 우의정(右議政) 김흥경(金興慶)이 차자를 올리기를, '문묘에 작헌하면 으레 시사(試士)해야 하니 흉년에 행할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왕께서 답하기를, '한 고조(漢高祖)가 개창(開創)한 처음에 태뢰(太牢)로 선성(先聖)을 제사하였고, 우리 성조(聖祖)께서 용만(龍灣)19625) 에서 회란(回鑾)하여 땅을 쓸고 제단을 만들어 맨 먼저 선성을 제사하셨다. 이제 국가에 일이 많았고 또 삼년(三年)이 겨우 끝났는데 이 예(禮)를 버려둔 것은 8년이나 되었으니, 내 마음이 불만스럽지 않겠는가? 그러나 비용을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선성이 가르친 것인데, 이제 선성의 가르침을 어기면서 선성을 뵐 수도 없고 시사하는 비용 때문에 선성을 뵙지 않을 수도 없으니, 한결같이 《오례의(五禮儀)》의 시학례(視學禮)에 따르되, 술을 바치고 찬선(饌膳)을 바치는 것을 그만두어 간략하게 예를 행하고, 작헌하고 시사하는 예는 오는 가을로 물리라.' 하셨다. 왕께서 드디어 문묘에 이르러 친히 선성께 잔을 올리고 물러나 명륜당(明倫堂)에 나아가 《주례(周禮)》에 익숙한 조사(朝士)를 강서관(講書官)에 채우고 한 경서(經書)에 능통한 유생들과 함께 다 각각 진강(進講)하고 문의(文義)를 토론하게 하고 장의(掌議) 두 사람에게 《중용(中庸)》을 각각 한 부씩 내리셨다.

하4월(夏四月)에 왕께서 노심(勞心)하고 백성을 근심하여 감선(減膳)한 것이 오래 되었는데도 오래도록 회복하지 않으시므로 유사가 말하니, 왕께서 슬피 말씀하기를, '내가 좋은 음식을 대하면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여 좋은 음식을 굶주린 백성에게 두루 먹이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데, 더구나 문득 복선(復膳)을 의논할 수 있겠는가? 동지사(冬至使)가 가져온 문단(紋緞)을 죄다 진청(賑廳)에 내려 진자(賑資)에 보태라.' 하셨다. 유사가 백관(百官)ㆍ군병(軍兵)의 녹(祿)을 줄이고 쌀 대신 조를 주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잇단 기근은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인데 차마 혼자 좋은 음식을 누릴 수 있겠는가?' 하고 어공(御供)의 5분의 1을 줄이라고 명하시고, 연신(筵臣)을 돌아보고 말씀하기를, '이 백성은 조종께서 지성으로 사랑하고 돌보신 백성인데, 내가 조종께서 이 백성을 편안하게 하신 것을 본받지 못하니, 후세에서 나를 어떤 임금으로 여기겠는가?' 하셨다. 그래서 일을 맡은 자도 감히 정성을 다하지 않을 수 없었다.

5월에 왕께서 소대(召對)하여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는 벗 사이와 다르거니와, 벗 사이에도 선행을 요구하기 어려운데, 더구나 임금이겠는가? 부열(傅說)이 고종(高宗)에게 경계하기를, 「네 마음에 맞는 진언(進言)이 있거든 도리에 어그러지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고 네 마음에 거슬리는 진언이 있거든 도리에 맞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임금이 진언을 듣는 요령이다. 내가 신하들의 진언에 강개하고 격렬한 것이 있으면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 없지는 않으나, 일이 지난 뒤에 평온한 마음으로 생각하면 아닌게아니라 개연(慨然)히 유감스럽고 부끄러워진다.' 하셨다.

또 일찍이 주강(晝講) 때에 문의(文義)에 따라 하교하기를, '예전에 제영(緹縈) 이, 「죽은 자는 다시 살 수 없고 형(刑)을 받은 자는 다시 이어질 수 없다.」고 하였는데, 천년 뒤에도 그 말이 오히려 사람을 슬프고 상심되게 한다. 강학(講學)하는 도리는 옛일을 거울삼아 오늘의 일을 경계해야 하는 것인데, 토포영(討捕營)에서 도둑을 다스릴 때에 오로지 엄하고 혹독한 것을 숭상하여 이따금 옥석(玉石)을 가리지 않고 함께 불사르므로 접때 여러 번 경계하였으나 요즈음 다시 구습에 따라 잘못을 되밟으니, 아마 영장(營將)이 될 사람을 가리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서전(西銓)19626) 에 하유(下諭)하여 이제부터는 반드시 영장을 지낸 뒤에야 곤수(閫帥)에 의망(擬望)하게 하고 무릇 토포영에서 승복(承服)받은 무리는 경포청(京捕廳)에서 추조(秋曹)로 이송(移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순영(巡營)에 보내어 자세히 캐어 물어서 처결하게 하고 그대로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마침 국옥(鞫獄)이 있어서, 왕께서 친림(親臨)하여 죄수를 신문하셨는데, 안옥(按獄)하는 신하가 포청(捕廳)을 시켜 먼저 죄인을 신문하여 실정을 알아낸 뒤에 금오(金吾)에 올리게 하기를 청하니, 왕께서 처음에는 망설이셨는데, 안옥하는 신하가 굳이 청하니, 왕께서 마지못하여 따르셨다. 조금 뒤에 뉘우쳐 말씀하기를, '옥사(獄事)에는 체례(體例)가 있어 죄인은 추조에서 신문하여 금오에 올리는 것이 원칙인데, 이제 도둑을 다스리는 청(廳)이 도리어 역적을 다스리는 청이 되어 포청이 드디어 금오의 막부(幕府)가 되었으니, 이 길이 한번 열리면 앞으로 진신(搢紳)도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줄 나는 안다. 빨리 전에 명한 것을 거두어 뒷날의 본보기로 삼으라.' 하셨다.

6월에 왕께서 일로 말미암아 탁지(度支)19627) 에 이르기를, '절검(節儉)의 실체(實體)를 행하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다. 내가 대내(大內)에 있으면 옷은 모시로 하고 일산(日傘)은 명주로 하거니와, 동가(動駕)할 때에야 곤복(袞服)과 일산을 다 비단으로 하는데, 대개 동가할 때에는 본디 체모가 있기 때문이다. 아! 너희 유사(有司)는 이것을 잘 알아서 낭비를 막으라.' 하셨다.

추7월(秋七月)에 왕께서 장차 친향(親享)하려 하시는데, 대신이 날씨가 덥다 하여 대행할 것을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조상을 섬기는데 어찌 때를 가릴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셨다.

8월에 왕께서 하교하기를, '예전부터 형벌을 제정하는데에는 모두 그 법이 있으니, 법 외의 형벌은 혹 한때에 쾌한 것을 취할지라도 마침내 선왕께서 삼가고 불쌍히 여기신 뜻에 어그러진다. 내가 을사년19628) 에 이미 압슬형(壓膝刑)을 없앴고 임자년19629) 에 또 포청(捕廳)의 전주뢰형(剪周牢刑)을 없앴다. 이제는 낙형(烙刑)이 남았을 뿐이고 접때 친국(親鞫) 때에도 구습에 따라 썼으나, 육형(肉刑)ㆍ태배(笞背)는 오형(五刑)의 하나인데도 한제(漢帝)ㆍ당종(唐宗)이 오히려 없앴는데, 더구나 오형에도 없는 형벌이겠는가? 아! 금오는 영구히 낙형을 없애고 항령(恒令)으로 삼으라.' 하셨다.

동10월(冬十月)에 명하여 동문 밖에 제단을 설치하여 신해년19630) 에 굶어 죽은 주검을 찾아 제사하게 하셨다. 소대(召對) 때에 선찬(宣饌)하고 명하여 부모가 있는 자는 가지고 돌아가 주게 하셨다. 그래서 신하들이 앞다투어 가져다 소매 안에 채웠는데, 부모가 없는 자는 빈손으로 물러가니, 왕께서 슬퍼 목메시고 신하들도 모두 느껴 울었다.

11월에 평안 감사(平安監司) 권이진(權以鎭)이 아뢰기를, '압록강을 파수(把守)하는 군졸은 겨울이면 철파(撤罷)하는 것이 고례(古例)입니다. 전 감사 송진명(宋眞明)이 성교(聖敎)를 받아 창설하였으나, 얼음 얼고 눈이 내릴 때에 입김으로 언 것을 녹이다가 사람이 상할세라 염려되니, 폐지하소서.' 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겨울에 얼음이 얼면 바로 파수할 때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례가 아닌데 파수하는 군졸 중에 혹 얼어 죽는 자가 있으면 이는 스스로 내가 사람을 죽이는 길을 여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 폐지하라.' 하셨다. 이때 대신(大臣)과 종신(宗臣)이 체례(體例)를 다투어 서로 하리(下吏)를 가두었는데, 잘못이 대신에게 있으므로 왕께서 종신을 옳게 여기고 대신을 그르게 여기셨다. 그래서 대신이 정고(呈告)하고 벼슬을 갈아 주기를 바랐는데,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조정의 체모를 존중하는 방법에 어그러진다고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사람이 누구인들 허물이 없겠는가? 고치는 것이 귀하다. 내가 대신을 공경하는 도리를 잘못하였다.' 하고 드디어 종신을 파면하고 대신을 돈면(敦勉)하며 다시 서로 공경하는 의리로 종친부(宗親府)와 조정에 경계하셨다. 곧 예관(禮官)을 도산 서원(陶山書院)에 보내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을 치제(致祭)하고 명하여 도산 서원을 그려 바치게 하셨다.

12월에 왕께서 풍현증(風眩症)을 앓는데도 오히려 기무(機務)에 부지런하여 한밤이 되도록 주무시지 않으므로, 연신(筵臣)이 왕께 건강을 해치는 일을 절제하시기를 권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내가 보니 선조(先朝) 말년에 편찮으신 중에도 만기(萬機)를 수응(酬應)하시어 조금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니 감히 스스로 안일할 수 있겠는가?' 하시었다. 조금 뒤에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처음에는 부지런하다가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임금들의 통환(通患)인데, 당명황(唐明皇)이 개원(開元)과 천보(天寶) 때에 판이하게 두 사람이 된 것이 그 중에서도 가장 심한 것이었다. 예전에 우리 세종(世宗) 때에 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짓게 하신 것은 성의(聖意)에 까닭이 있다.' 하고, 명하여 그 서적을 널리 구하여 바치게 하셨다. 소대(召對)하여 《육선공주의(陸宣公奏議)》를 강독(講讀)할 때에 왕께서 수심에 잠겨 말씀하기를, '예전에 고(故) 좌상(左相) 이집(李㙫)이 나에게 이 글을 강독하기를 권하고 고 상신(相臣) 홍치중(洪致中)ㆍ조문명(趙文命)도 말하였는데, 그 뜻은 대개 내 도량이 좁기 때문에 이 글을 빌려서 받아들이는 도량을 개발(開發)하려 한 것이다. 대저 여조겸(呂祖謙)은 한낱 학문하는 선비인데, 능히 《논어(論語)》로 말미암아 그 기질(氣質)을 변화하였다. 내가 이 글을 강독하고 도량을 넓히지 못한다면, 어찌 이 글을 저버리는 것일 뿐이겠는가? 또한 세 정승을 저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세 정승은 이미 죽어서 내가 이 글을 강독하는 것을 미처 보지 못하였으니, 상심되고 슬프다.' 하셨다. 드디어 친히 30여 줄의 윤음(綸音)을 지어 정부(政府)에 명하여 구언(求言)하여 임금의 궐실(闕失)을 보완하고 유루(遺漏)를 수습하게 하셨다. 곧 여러 도에서 세말(歲末)에 효행이 뛰어난 선비를 천거하게 하고 서울에는 그렇게 시키지 않으셨으니 한 안팎의 도(道)가 아니기 때문이며, 경조(京兆)19631) 에 명하여 여러 도에서 한 것처럼 세말에 천거하게 하셨다. 이에 앞서 왕께서 연신에게 말씀하기를, '내가 신축년19632) 에 저위(儲位)를 잇고부터 개연(慨然)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흰 베로 만든 관(冠)을 쓰고서 세도(世道)를 만회하려 하였으나, 근일 이래로 일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삭감하는 것을 정사(政事)로 삼을 뿐이니, 그 유폐(流弊)가 장차 사신(史臣)이 나날이 기록할 것이 없게 만들고야 말 것이다. 어찌 내가 전일에 뜻을 세운 것이 잘못이겠는가? 대저 나라를 망치는 근본은 바로 사치이다. 그러나 사치를 없애고 검약을 숭상하는 것도 오직 임금이 어떻게 이끄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 내가 아첨을 좋아하면서 뭇 신하를 시켜 충직하라고 한다면 행해질 수 없을 것이고, 내가 비단옷을 입으면서 뭇 신하를 시켜 무명옷을 입게 한다면 또한 행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 근본을 바르게 하고 그 근원을 바르게 하여 힘을 헤아려 점점 나아가면 바랄 수 있을 것이다.' 하셨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하교하기를, '예전에는 달군 돌 위에서 기장을 굽고 돼지고기를 갈라서 먹었어도 귀신을 공경할 수 있었고, 짐승을 날로 먹고 그 피를 마셨어도 존비(尊卑)를 분변할 수 있었으며, 궁실(宮室)의 지붕을 띠로 이고 섬돌을 흙으로 만들었어도 백성을 다스리고 가르칠 수 있었는데, 삼대(三代) 이후로 인문(人文)이 번성하고 사치가 번성하였으나 오히려 근세와 같지는 않았다. 바야흐로 혼인할 나이가 지나도 혼인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달이 지나도 장사(葬事)하지 못하는 것도 사치 때문이며 조상을 제사하되 예(禮)대로 하지 않는 것도 사치 때문이다. 대저 풀이 쏠리면 바람이 부는 것을 알고 그림자가 바르면 표준(表準)을 안다. 그러므로 필서(匹庶)는 조사(朝士)를 본뜨고 조사는 귀척(貴戚)을 본뜨고 귀척은 왕궁(王宮)을 근본 삼으니, 내가 어찌 감히 사치를 싫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상방(尙方)의 직금방(織錦坊)을 이제부터 영구히 철폐하고 다시는 설치하기를 청하지 말라.' 하셨다.

10년 갑인(甲寅) 춘정월(春正月)에 팔도의 감사(監司)와 양도(兩都)의 유수(留守)에게 명하여 널리 《농사집성(農事集成)》을 인쇄하여 고루 민간에 반포하여 세종 때에 백성을 이끌어 근본을 힘쓰게 하신 성의(盛意)를 알게 하도록 하셨다. 친히 기곡제(祈穀祭)를 행하시느라 이미 서계(誓戒)하였는데, 마침 국옥(鞫獄)이 있으므로 제사를 지내고 국문(鞫問)하라고 명하셨다. 홍문관(弘文館)에서 차자를 올려 국옥의 체례(體例)를 엄히 하는 방도에 어그러짐을 말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백성을 위하여 농사를 비는 것이 도리어 중대하지 않은가?' 하고, 마침내 따르지 않으셨다. 제사를 지내고 이튿날에 명정문(明政門)에서 조참(朝參)을 행하고 이미 죽은 군민(軍民)의 정포(丁布)를 면제하고서야 비로소 친히 국문하셨다. 한 죄인이 죄가 없으므로 드디어 용서하여 놓아 주라고 명하셨는데 옥에서 나가서 죽으니, 왕께서 뉘우쳐 말씀하기를, '내가 죄 없는 자를 죽였다. 사관(史官)은 내 허물을 써서 후세의 임금이 거울삼아 경계하게 하라.' 하셨다. 곧 비변사 제조(備邊司提調)를 각도의 구관 당상(勾管堂上)으로 나누어 차출하여 맡은 도 안의 풍흉(豊凶)과 폐단을 살피고 방백(方伯)과 미리 강구하여 일을 처리하게 하셨다. 왕께서 바야흐로 차대(次對)를 행하실 때에 까치가 와서 우사(右史)의 모석(毛席)을 쪼았는데, 왕께서 탄식하며 말씀하기를, '미물도 모석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을 알 것인데 오히려 쪼는 것은 굶주림에 몰렸기 때문이다.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입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어 길에서 쓰러지니, 저 미물과 다르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경조(京兆)와 제도(諸道)의 방백에게 신칙(申飭)하여 농사를 권하고 안정시키며 백성을 어지럽히는 정사(政事)를 없애고 환과 고독(鰥寡孤獨)과 폐질(廢疾)이 있는 자를 찾아서 돌보게 하셨다.

2월 왕께서 장차 의릉(懿陵)에 거둥하시려 할 때에 국옥(鞫獄)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뭇 신하가 거둥을 멈추기를 청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송 태조(宋太祖)는 와탑(臥榻) 곁에서 다른 사람이 코를 골며 졸았어도 가기를 꺼리지 않았다. 다행히 나는 바야흐로 한 나라에 군림하여 경들을 신하로 삼았으니, 어찌 꺼릴 것이 있겠는가?' 하고 듣지 않으셨다.

3월에 친히 대보단(大報壇)에 제사하고 양 경리(楊經理)의 사당에 관원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게 하셨다.

하4월(夏四月)에 친히 약제(禴祭)19633) 를 행하셨다. 이 뒤로는 무릇 같은 일로서 여러 번 보이는 것은 다 쓰지 않는다.

5월에 왕께서 《이충정주의(李忠定奏議)》를 강독하고 곧 명하여 의군정(議軍政)ㆍ교차전(敎車戰) 두 차자(箚子)를 삼군문(三軍門)의 대장(大將)에게 반시(頒示)하게 하셨다. 곧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공평하되 밝지 못하면 어진 사람을 어리석게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을 어질게 여길 것이고, 밝되 공평하지 못하면 어진 줄 알더라도 등용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줄 알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니, 쓰고 버리는 분별이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 하셨다.

6월에 고(故) 참의(參議) 안방준(安邦俊)이 지은 《항의신편(抗義新編)》을 바친 자가 있었는데, 왕께서 조헌(趙憲)이 임진년19634) 에 창의(倡義)한 일을 보고 감탄하여 마지않고 조헌의 사당과 칠백 의총(七百義塚)에 사제(賜祭)하고 다시 양남(兩南)의 감영(監營)에 명하여 조헌이 손수 고증한 《조천록(朝天錄)》과 일기(日記) 등 서적을 인쇄하여 금산(錦山)ㆍ옥천(沃川) 두 서원(書院)에 나누어 내리게 하셨다.

추9월(秋九月) 왕께서 각도의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에게 신칙하여 신역(身役)을 도피한 백성을 불러다 안주시키고 막 돌아온 자는 조세를 줄이고 요역(徭役)을 면제하여 소생시킬 방도를 다하도록 힘쓰게 하셨는데, 《시경(詩經)》 보우편(鴇羽篇)을 강독하고서 감흥(感興)하셨기 때문이다.

11년 을묘(乙卯) 춘정월(春正月)에 진주 부사(陳奏副使) 박문수(朴文秀)가, 고(故) 병사(兵使) 양무공(襄武公) 정봉수(鄭鳳壽)가 정묘년19635) 에 적을 물리친 일을 말하고 또 명나라에서 내려 준 은패 표문(銀牌票文)을 바치니, 왕께서 한참 동안 감탄하고 정봉수를 치제(致祭)하고 그 후손을 등용하셨다.

(계속)

출전 : 영조실록 부록 4번째기사 영조 대왕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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