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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1-23 (일) 22:43
분 류 사전2
ㆍ조회: 446      
[조선] 영조 행장 4 (실록)
영조 행장 4

(앞에서 이음)

왕께서는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시어 모든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을 얻으셨으니, 효(孝)ㆍ경(敬)ㆍ근(勤)ㆍ검(儉)ㆍ공(公)ㆍ서(恕)가 임금의 덕 중에서 큰 것이다. 왕께서는 어려서 인현 왕후(仁顯王后)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셨다. 바야흐로 5세 때에 손수 금원(禁苑)의 온갖 꽃을 따서 술을 만들어 후(后)께 바치시니, 후께서 감탄하여 말씀하기를, '효제(孝悌)는 본디 타고나는 것이거니와, 어찌 그리 숙성한가?' 하셨다. 숙묘(肅廟)께서 편찮으신 7년 동안에 좌우에서 돕고 구원하는 일을 왕께서 친히 하고 밤에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시는 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하루 같으니, 숙묘께서 늘 말씀하기를, '기특한 아이다. 어찌 잠이 없는가?' 하셨다. 인원 왕후(仁元王后)를 섬기신 것은 등극(登極)하고 기사(耆社)에 들어가신 뒤일지라도 늘 왕자(王子)이었을 때와 같으셨다. 나아가 뵐 때마다 공수(拱手)하고 질추(疾趨)하며, 시좌(侍坐)하면 허리를 굽히고 머리를 숙이며, 물음이 있으면 소매로 입을 가리고서 답하며, 물건을 갖추어 뜻을 기쁘게 하여 드리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어기지 않으셨다. 국구(國舅)인 경은 부원군(慶恩府院君)의 집에도 매우 넉넉하게 물건을 보내어 후의 마음을 기쁘게 하되 또한 조정(朝政)에는 간여하지 않게 하시니, 인원 왕후께서 늘 말씀하기를, '누가 주상을 내 소생이 아니라고 생각하겠는가?' 하셨다. 경묘(景廟)를 섬기신 것도 숙묘를 섬기신 것과 같고 선의 왕후(宣懿王后)를 섬기신 것도 인원 왕후를 섬기신 것과 같았으므로, 사람들이 형제 사이인지 수숙(嫂叔) 사이인지 알 수 없을 만하였다. 크고 작은 향사(享祀)에는 반드시 친히 나아가고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극진하여 신명이 양양(洋洋)히 위에 임하신 듯하셨다.

선원전(璿源殿)이 궁중에 있으므로 절제(節祭)ㆍ탄일제(誕日祭)ㆍ기일제(忌日祭)가 있으면 왕께서 으레 몸소 제물을 살피고 선부(膳婦)를 경계하여 정결을 극진히 하게 하셨다. 선조(先朝)에서 즐기시던 햇것이 있으면 반드시 먼저 전(殿)에 바치고서야 드셨는데, 찬선(饌膳)을 맡은 자가 일찍이 송이[松栮]를 바치자, 왕께서 말씀하기를, '전에 바쳤는가?' 하시매, 대답하기를, '때가 아직 일러서 바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왕께서 말씀하기를, '아직 바치지 않고서 내가 먹게 하는 것은 내 정성스러움과 공경스러움이 모자라기 때문이니, 너를 어찌 꾸짖겠는가?' 하고 물리치고 들지 않으셨다. 춘추가 매우 높아져서도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기일(忌日)을 당하면 소식(素食)하고 재거(齋居)하며 탕약(湯藥)까지도 드시지 않았다. 향사는 몸소 하지 못하더라도 제삿날에는 반드시 재계(齋戒)하여 마음을 바르게 하고 새벽까지 중정(中庭)에서 노복(露伏)하였다가 제사가 끝난 것을 듣고서야 그치셨다. 만년에 경희궁(慶熙宮)으로 옮겨 계셨는데, 궁의 북쪽에 있는 영취정(暎翠亭)이 육상궁(毓祥宮)과 아주 가까웠다. 왕께서 아침과 저녁마다 소여(小輿)를 타고 이르러 사당을 바라보고 노복하여 혼정 신성(昏定晨省)을 갈음하고 눈물을 흘리고 돌아오셨는데, 한추위와 한더위에도 그만두지 않으셨다. 일찍이 꿈에서 숙묘를 모셨는데, 숙묘께서 간지(簡紙)를 가져오라고 명하셨으나 미처 드리기 전에 깼으므로 이때부터 다시는 간지에 글을 쓰지 않으셨다. 춘추가 높고 병환이 깊어졌을 때에도 늘 《시경(詩經)》의 육아(蓼莪)ㆍ척호(陟岵)의 시(詩)를 외시고 외고 나면 목이 메어 눈물이 줄줄 흐르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효성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일념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극진히 하지 않으신 것이 없었다. 그러므로 종이에 '천(天)' 자가 있으면 손으로 스스로 깨끗이 씻고 남이 밟고 무엄하게 하지 못하게 하셨다. 보통 대화 때에도 말이 하늘에 미치면 반드시 존경을 더하고 말씀하기를, '임금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고 신하는 임금을 대신하여 일을 다스리니, 임금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은 신하가 임금을 공경하는 것과 같아야 한다.' 하셨다.

재이(災異)를 당하면 정성을 다하여 경계하고 감선(減膳)하고 구언(求言)하고 자신을 반성하고 자책(自責)하셨다. 경인년19706) 봄 객성(客星)이 나타났을 때에 왕께서 밤에 편집신(編輯臣)과 운관 사력(雲觀司曆)을 불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강구하고 저녁마다 월대(月臺)에서 측후(測候)하고 말씀하기를, '백성과 나라에 재앙을 옮기지 말기 바란다.' 하셨다. 이렇게 사흘 동안 하시니 객성이 사라졌다. 혹 바람이 사납거나 비가 심하면 밤이라도 반드시 옷을 입고 관을 쓰고 앉으시며 때때로 혼자 말씀하기를, '내게 무슨 허물이 있어서 하늘의 경고가 이러한가?' 하고, 잠을 못 이루고 근심하며 앉아서 아침까지 기다리셨다. 날이 가물어 비를 빌 때에는 대행시킨 적이 없고 친히 규(圭)를 잡아 정성이 반드시 감통되게 하려 하셨다. 그러므로 임자년19707) 이후로는 거의 친히 비시지 않은 해가 없었고 비시면 으레 비를 내렸으므로 큰 풍년이 들었으니, 사책(史冊)에 이루 다 쓸 수 없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관원을 보내어 대행시키셨으나 또한 반드시 궐정(闕庭)에서 노복(露伏)하여 비가 내린 다음이라야 비로소 연침(燕寢)으로 돌아가셨고, 혹 비가 내리지 않으면 옷을 벗고 맹렬한 볕을 쬐며 말씀하기를, '어찌 내 몸을 태우지 않겠는가?' 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경스러우시다 하였다.

왕께서 즉위하신 처음에 이미 한추위와 한더위 때에 강일(講日)을 늘리고 낮에는 반드시 해질 때까지 계속하고 밤에는 문득 새벽 종이 울 때까지 계속하고 능행(陵幸)ㆍ친경(親耕)하신 뒤에도 피로하여 게을리하거나 그만두지 않으셨다. 바야흐로 춘추가 칠순이 되어서도 삼복(三伏) 날에 아침ㆍ낮ㆍ저녁 세 번의 강석(講席)을 열어 토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요양하실 때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 글자를 가리지 못하셔도 친히 《소학》ㆍ《대학》을 외어 강독하고 한 달에 여섯 번 소대(召對)하여 신하를 만나고 국사(國事)를 재결하며 크고 작은 일을 버려 두지 않으셨다. 혹 묘모(廟謨)가 적으면 조용히 민간의 고통과 궁부(宮府)의 고사(故事)를 논하시어, 소대가 파하고 해가 이미 저물었는데도 시인(寺人)이 다시 당(堂)에 촛불을 붙이게 하셨다. 그리고 승지(承旨)가 장소(章疏)ㆍ계장(啓狀)을 가지고 들어오면 왕께 아뢰는 말을 듣고 판비(判批)를 불러 줌에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으며, 물러갈 때에는 야루(夜漏)가 4고(四鼓)ㆍ5고를 알렸으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부지런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성품이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온갖 완호(玩好)에 욕심이 없으셨다. 보위(寶位)에 오르셔서는 거친 베 옷을 입고 흰 베 관을 써서 풍속을 바꾸려 하셨다. 거처하시는 궁궐의 벗겨진 벽 칠과 이지러진 창영(窓楹)과 해진 보연(黼筵)ㆍ포석(鋪席)을 해가 지나도 고치지 않아서 유사(有司)가 수리하기를 청하여도 윤허하지 않으셨다. 집경당(集慶堂)에 연거(燕居)하시되 해진 병풍 두어 개로 안팎 청마루를 가려서 소박하고 좁기가 청수(淸修)한 선비의 집만도 거의 못하였다. 일찍이 선조(先朝)의 침전(寢殿) 옆에 초가 하나를 짓고 그 안에서 글을 읽고 고사(故事)를 추술(追述)하려 하셨으나 마침내 민력(民力)을 거듭 번거롭힌다 하여 그만두셨다. 입으시는 것 중에서 오직 곤면(袞冕)ㆍ법복(法服)은 제도를 살펴서 아름답게 하고 그 나머지 중의(中衣)ㆍ철릭[貼裏] 따위는 이따금 빨고 기워 입고 겨울에 매우 춥더라도 갖옷을 입으신 적이 없으므로, 왕을 모시는 뭇 신하도 감히 갖옷을 껴입지 못하였다. 밤에도 이부자리를 깔지 않고 때때로 목침을 베고 곤히 주무시면 궁인(宮人)이 왕의 몸에 한기(寒氣)가 닥칠세라 염려하여 작은 이불을 덮어 드렸다. 국법에는 내선부(內膳夫)가 하루에 다섯 번 왕의 찬선(饌膳)을 바치게 되어 있으나 왕께서는 하루에 세 번 찬선을 드시고 찬선도 배불리 드신 적이 없으므로 궁중에서 드디어 낮과 밤 두 번의 찬선을 폐지하였다. 그 밖에도 풍성하게 즐기는 것을 경계하고 줄이는 것을 힘쓰신 것이 흔히 이와 같았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왕께서 검소하시다고 하였다.

왕께서 일찍이 말씀하기를, '임금의 정사는 궁위(宮闈)에서 비롯해야 한다.' 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환관(宦官)ㆍ궁녀(宮女)와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고례(古例)로는 파조(罷朝) 뒤에 크고 작은 공사를 혹 환관을 시켜 와내(臥內)에서 읽어 아뢰게 하였으나, 왕께서 환관이 이 때문에 국사(國事)를 몰래 익혀 조정(朝政)에 간여할세라 염려하여 밤이 깊었더라도 반드시 승지를 불러서 읽어 아뢰게 하셨다. 일찍이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예전에는 환관 10여 인도 오히려 많다고 여겼는데, 이제는 1백여 인이 넘는다. 많으면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너는 알라.' 하셨다. 신하를 만나면 늘 진심을 옮기고 무릇 죄가 있으면 처음에는 견책(譴責)이 매우 엄하였더라도 서용(敍用)한 뒤에는 예전처럼 신임하여 쓰시어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았다.

신축년ㆍ임인년의 화를 당하신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바야흐로 동궁에 계실 때에 교리(校理) 조문명(趙文命)이 봉사(封事)하니, 경묘께서 삼당(三黨) 뒤에 탕평(蕩平)으로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왕께서 그 말씀에 열복(悅服)하여 마음에 새기셨다. 등극하셔서는 맨 먼저 탕평론을 주장하는 두세 신하를 발탁하셨는데, 흠잡는 말이 좌우에서 갈마들었으나, 왕께서 끝내 굽히지 않고 신임하였으며 그 중에서 지론(持論)이 세찬 자가 있으면 으레 배척하여 쓰지 않으셨다. 늘 선묘(宣廟)의 어제시(御製詩)의 '신하들이 오늘 이후에도 어찌 다시 동인ㆍ서인을 계속하겠느냐?'는 구(句)를 외고 말씀하기를, '이것이 우리 가법(家法)이다. 누가 감히 방해하겠는가?' 하셨다. 일찍이 인원 왕후의 상을 당하셨을 때에 왕께서 글을 만들어 세신을 보전하고 나라를 편안히 하는 계책을 극진히 말씀하고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효소전(孝昭殿)에 고하게 하고 말씀하기를,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멀리 주공(周公)이 금등(金縢)에 보관한 일을 본뜨고 가까이 조변(趙抃)이 분향하고 하늘에 고한 일을 본뜨기 위한 것이다.' 하셨다. 이 때문에 물과 불처럼 서로 나뉘어 싸움이 잇달던 때일지라도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하고 형살(刑殺)을 없애며 50년 가까이 내려오다가, 임진년19708) 에 척당(戚黨)의 일이 일어나니 왕께서 김귀주(金龜柱)를 매우 엄하게 벌하셨다. 세손에게 말씀하기를, '조당(朝黨)도 오히려 세도(世道)의 근심거리가 되는데, 더구나 척당이겠는가? 금하지 않으면 앞으로 하늘에 사무치게 될 것이다. 나는 늙었으니 미처 보지 못하겠으나, 네게는 뒷날의 근심거리이다.' 하셨다. 생각이 깊고 염려함이 깊기가 이러하셨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공평하시다 하였다.

왕께서는 잠저(潛邸)에 오래 계시어 여염의 어려움과 백성의 괴로움과 위항(委巷)ㆍ황야(荒野)의 아주 작은 일도 모두 두루 아셨고, 저위(儲位)를 이어받게 되어서는 경전(經傳)을 널리 강구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라는 것을 환히 아셨다. 무릇 공민(貢民)ㆍ시민(市民)ㆍ경종민(耕種民)ㆍ판상민(販商民)ㆍ군보민(軍保民)에 대하여 그 굶주리고 배부르고 춥고 따뜻한 것을 모두 상세히 살피셨으므로 감면하는 정령(政令)이 내려지지 않은 해가 없었다. 혹 유사(有司)가 경비 때문에 어려워하면 왕께서 으레 '어찌 기부(肌膚)를 아끼랴?' 하신 숙종의 말씀을 외고 분부를 내려 은혜를 베푸셨으므로, 즉위하신 50년 동안에 감면하신 것이 무려 수백만이었다. 처음에 북관(北關)의 백성 중에는 교제전(交濟錢) 때문에 처자를 팔고 목매어 죽은 자가 있었다. 마침 왕께서 어사를 보내어 안렴(按廉)하게 하셨는데, 백성이 길을 막고 울며 말하기를, '돌아가서 우리 임금께 아뢰어 적자(赤子)의 뜻이 부모께 전달되게 하여 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어사가 그 말대로 돌아와 아뢰니, 왕께서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리며 말씀하기를, '내가 일찍이 임금이 넓고 큰 집 안에서 고운 모전(毛氈)을 깔고 옥식(玉食)을 후하게 누리되 가난한 백성 집의 정상을 살피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였거니와, 어찌 우리 풍패지향(豊沛之鄕)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였겠는가? 내가 폐단을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고묘(高廟)에 들어갈 낯이 없을 것이다.' 하고, 당장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다. 그 밖에 고할 데 없는 자가 왕께 호소하여 그 생명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병신년19709) 봄에 왕의 환후가 더욱 위급하였다. 이때에 제주(濟州)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어사를 보내어 진구(賑救)하게 하셨으나, 왕께서 염려를 놓지 못하여 간절하게 이르는 꿈결의 말씀이 다 제주에 관한 일이었다. 그 백성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시는 것이 지극한 정성에서 나온 듯하였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이 다 왕께서 어지시다 하였다.

왕께서 이미 이 여섯 가지 덕을 갖추고서 이것으로 정치의 근본을 세우는 상도(常道)를 삼아 성헌(成憲)을 살피고 유폐(流弊)를 고치고 서옥(庶獄)을 삼가고 국용(國用)을 넉넉하게 하셨으니, 또한 모두가 여섯 가지 덕을 상법(常法)으로 삼은 것이다. 이 때문에 춘추가 높을 때까지 보위를 누리시고 나라 안이 평안하며 신하는 대대로 그 녹(祿)을 누리고 백성은 그 이(利)를 즐겼다. 무릇 조야(朝野)에 늙은이가 태반이었는데 이 가운데 또한 1백 세를 넘은 자가 있었으니, 어찌 인사(人事)가 아래에서 닦여져 천운(天運)이 위에서 응한 것이 아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대덕(大德)은 반드시 수(壽)를 얻고 반드시 위(位)를 얻고 반드시 녹(祿)을 얻는다.' 하였는데, 왕께서 이에 가까우실 것이다.

왕께서는 두 아드님을 두셨는데, 효장 세자(孝章世子)는 좌의정(左議政) 조문명(趙文命)의 딸을 빈(嬪)으로 맞았는데 후사가 없고, 장헌 세자(莊獻世子)는 영의정(領議政) 홍봉한(洪鳳漢)의 딸을 빈으로 맞았는데 실로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를 낳으셨다. 갑신년19710)에 명하여 우리 사왕 전하를 효장 세자의 후사로 삼았고, 왕께서 태묘(太廟)에 부제(祔祭)되실 때에 효장 세자를 진종 대왕(眞宗大王)이라 추존(追尊)하고 효순 현빈(孝純賢嬪)을 효순 왕후(孝純王后)라 추존하여 태묘에 동부(同祔)하였는데, 다 왕의 유명(遺命)에 따른 것이다.

이제 사왕 전하께서 신(臣)을 학문이 없다 하지 않으시고 유사(遺事)에 따라 정리하여 행장(行狀)을 만들라고 명하시니, 신은 황공하여 굴러 떨어질 듯하여 책임을 다할 방법을 모르겠으나, 혼자 가만히 듣건대, 제왕(帝王)의 대절(大節)은 오직 마땅한 사람에게 종사를 부탁하는 것일 뿐이라 한다. 그러므로 우사(虞史)가 요전(堯典)을 만들되 순(舜)에게 전위(傳位)한 일을 반복하여 상세히 말한 것이 한 편(篇) 중에 반이 되는데, 세상에서 우사를 일컬어 천고(千古)의 사신(史臣)의 근본으로 삼는 것이 이 때문이다. 신은 감히 경묘께서 왕에게 오로지 맡기고 왕께서 전하에게 오로지 맡기신 것을 한 편의 위아래에 실어서 요전의 단례(斷例)를 따라 들은 바를 존중한다." 하였다.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 지어 바쳤다.

[태백산사고본]
[영인본] 44책 543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註 19589] 불곡(不穀) : 왕후(王侯)의 겸칭.
[註 19590]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19591] 입년(立年) : 30세.
[註 19592] 양암(諒闇) : 임금이 여묘살이하는 것.
[註 19593] 보력(寶曆) : 임금의 나이.
[註 19594] 무진년 : 1688 숙종 14년.
[註 19595] 신충(宸衷) : 임금의 뜻.
[註 19596] 정유년 : 1717 숙종 43년.
[註 19597] 복합(伏閤) :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 조신(朝臣) 또는 유생(儒生)들이 대궐문 밖에 이르러 상소(上疏)하고, 임금의 재가(裁可)가 날 때까지 엎드려 청하던 일.
[註 19598]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599]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600] 치학(齒學) : 세자가 국학에서 나이의 순서에 따라 예양(禮讓)하는 것. 여기에서는 입학하는 것을 뜻함.
[註 19601]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19602] 계묘년 : 1723 경종 3년.
[註 19603] 근밀(近密) : 임금의 측근.
[註 19604]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19605] 문산(文山) : 문천상(文天祥)의 호.
[註 19606]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607] 정표(旌表) : 선행을 칭찬하여 여러사람에게 알리는 것.
[註 19608] 기복(起復) : 기복 출사(起復出仕)의 준말로, 상중(喪中)에는 벼슬하지 않는 것이 관례(慣例)이나 국가의 필요에 따라 상제의 몸으로 벼슬자리에 나오게 하는 일.
[註 19609] 운대(雲臺) : 후한(後漢) 명제(明帝)가 전세(前世)의 공신(功臣)을 추념하여 장수 28인의 초상을 그리게 한 대(臺)의 이름. 운각(雲閣).
[註 19610] 철권(鐵券) : 공신(功臣)에게 나누어 주던 녹권(錄券). 겉에는 이력과 은상(恩賞)을 기록하고, 속에는 면죄(免罪)와 감록(減錄)의 수를 새겼는데, 글자를 속에 파서 넣었기 때문에 철권이라 함. 좌부(左符)는 공신(功臣)에게, 우부(右符)는 내부(內府)에 두었다가 감합(勘合)하였음.
[註 19611] 망예(望瘞) : 제사를 끝마치고 축문과 폐백을 파묻을 때 헌관(獻官)과 집사(執事)가 이를 지켜보던 일을 말함.
[註 19612] 위전(位田) : 관청의 경비(經費)나 제사의 비용(費用)을 충당하기 위하여 설치된 토지. 위토(位土).
[註 19613] 고계(高髻) : 높은 상투.
[註 19614] 경신년 : 1680 숙종 6년.
[註 19615] 기사년 : 1689 숙종 15년.
[註 1961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9617] 우서(友壻) : 동서.
[註 19618] 태복(太僕) : 사복시(司僕寺).
[註 19619] 악무목(岳武穆) : 무목은 악비(岳飛)의 시호(諡號).
[註 19620] 갑진년 : 1724 경종 4년.
[註 19621] 추조(秋曹) : 형조(刑曹).
[註 19622]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註 19623] 백부(柏府) : 사헌부(司憲府).
[註 19624] 강희(康熙) : 청 성조(淸聖祖)의 연호.
[註 19625] 용만(龍灣) : 의주(義州).
[註 19626] 서전(西銓) : 병조(兵曹).
[註 19627] 탁지(度支) : 호조(戶曹).
[註 19628]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19629] 임자년 : 1732 영조 8년.
[註 19630] 신해년 : 1731 영조 7년.
[註 19631] 경조(京兆) : 한성부(漢城府).
[註 1963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633] 약제(禴祭) : 종묘의 여름 제사.
[註 19634] 임진년 : 1592 선조 25년.
[註 19635] 정묘년 : 1627 인조 5년.
[註 19636] 임자년 : 1732 영조 8년.
[註 19637] 구식(救食) : 일식(日食)이 있을 때 해가 먹히는 것을 구원하는 의식. 흉변(凶變)으로 생각하여 임금이 천담복(淺淡服) 차림으로 월대(月臺) 위에서 각사의 당상관(堂上官)과 낭관(郞官)을 거느리고 해와 달이 다시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하였으며, 좌우에 악기(樂器)를 벌려 놓으나 연주하지는 아니하였음.
[註 19638] 자목(字牧) : 고을의 수령이 백성을 사랑으로 다스림.
[註 19639]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640]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641]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9642] 법강(法講) : 경연(經筵).
[註 19643] 옥서(玉署) : 홍문관(弘文館).
[註 19644] 법연(法筵) : 경연.
[註 19645] 광(筐) : 폐백을 담는 죽기(竹器).
[註 19646] 정문(程文) : 과거를 보일 때 독권관(讀券官)이 채점을 하기 위하여 만들던 모범 답안지.
[註 19647] 거서(秬黍) : 검은 기장.
[註 19648]서합(噬嗑) : 《주역(周易)》에 나오는 괘(卦)의 하나로, “턱 가운데 물건이 있는 것을 서합(噬嗑)이라 한다.[頣中有物曰噬嗑]” 하였는데, 서로 물어 뜯는다는 뜻으로, 형옥 죄수(刑獄罪囚)의 상(像)임.
[註 19649] 경녈(黥涅) : 살을 째고 먹물로 죄명을 써 넣는 형벌.
[註 19650] 국자(國子) : 성균관(成均館).
[註 19651] 식(式) : 수레 앞턱에 가로 댄 나무에 의지하여 경례함.
[註 19652] 계유년 : 1693 숙종 19년.
[註 19653] 위포(韋布) : 성균관 유생.
[註 19654] 후원(喉院) : 승정원(承政院).
[註 19655] 구경(九經) : 아홉 가지 정치에 중요한 일로서, 《중용(中庸)》에 보면 몸을 닦는 것[修身], 어진 이를 높이는 것[尊賢], 친족을 친히 하는 것[親親], 대신을 공경하는 것[敬大臣], 신하를 체찰하는 것[體群臣], 서민을 돌보는 것[子庶民], 모든 공장(工匠)들을 오게 하는 것[來百工], 먼 곳 사람들을 회유하는 것[柔遠人], 제후를 따르게 하는 것[懷諸侯]이라 하였음.
[註 19656] 급암(汲黯) : 한대(漢代)의 간신(諫臣). 경제(景帝) 때에 태자 세마(太子洗馬)가 되고 무제(武帝) 때에 동해(東海)의 태수(太守)를 거쳐 구경(九卿)의 반열에 올랐음. 성정(性情)이 심히 엄격하여 직간(直諫)을 잘하여 무제(武帝)로부터 옛날의 사직(社稷)의 신하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음.
[註 19657] 현주(玄酒) : 물.
[註 19658] 기해년 : 1719 숙종 45년.
[註 19659] 포은(圃隱) : 정몽주(鄭夢周)의 호.
[註 19660] 상용(商容) : 은(殷)나라 때 사람. 주왕(紂王)의 대부(大夫)로서 주왕에게 직간(直諫)하다가 폄출(貶黜)되었음.
[註 19661] 비간(比干) : 은대(殷代)의 사람.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인데, 주왕의 악정(惡政)을 간하다가 피살되었음.
[註 1966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663]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664] 양옥(梁獄) : 양왕(梁王)의 옥사(獄事). 한(漢)나라 경제(景帝)가 제위(帝位)를 아우인 양왕(梁王)에게 전수(傳授)하겠다는 대화를 들은 대신들이 부자 상전(父子相傳)의 약조를 들어 반대하였는데, 이에 양왕이 사람을 시켜 원앙(袁盎) 등 여러 의신(議臣)들을 죽였음. 경제가 이에 전숙(田叔)에게 양왕의 죄안(罪案)을 조사하게 하였는데, 전숙이 말하기를, “양왕의 일은 묻지 마소서. 바른 대로 말하면 처단해야 되고, 처단하면 태후(太后)의 마음이 상할 것입니다.” 하니, 양왕의 신하 몇 사람에게만 죄를 돌려 처단하였음.
[註 19665] 무신년 : 1728 영조 4년.
[註 19666] 정책 국로(定策國老) : 당(唐)나라 때 경종(敬宗)부터 선종(宣宗)까지 그 폐립(廢立)을 환관들이 마음대로 행하고 국가의 원로로 자처하였으므로 정책 국로라 하였음.
[註 19667] 문생 천자(門生天子) : 당나라 말기에 환관들이 정권을 전횡하여 천자 보기를 시관(試官)이 문생을 보듯이 하였으므로 문생 천자라 하였음.
[註 19668] 접혈(蹀血) : 금정 접혈(禁庭蹀血)의 준말로, 대궐의 뜰에 유혈이 낭자하여 그것을 밟고 건널 정도였다는 뜻. 당(唐)나라 고조(高祖)가 정자 이건성(李建成)을 태자로 세웠는데, 이건성이 당나라 건국에 공이 많았던 아우 이세민(李世民)이 자기 자리를 넘볼까 염려하여 미리 제거하고자 하니, 이세민이 군사를 동원하여 현무문(玄武門)으로 들어가 이건성을 죽였음. 이때의 처참했던 상황을 《자치통감(資治通監)》에서 '접혈 금정'이란 말로 묘사했는데, 아우가 형을 잔인하게 죽이고 왕위를 차지했다는 뜻을 내포함.
[註 19669] 행배(行盃) : 한(漢)나라 때 대장군 곽광(霍光)의 아내인 곽현(霍顯)이 태후(太后)로 하여금 술을 장만하게 하고는 이어 천자(天子)를 폐하려고 도모한 일을 말함.
[註 19670] 수진(袖珍) : 소매 안에 넣어 다닐 수 있도록 작게 만든 책.
[註 19671] 기성(箕城) : 평양(平壤).
[註 19672] 태상(太常) : 봉상시(奉常寺).
[註 19673] 불면(黻冕) : 슬갑(膝甲)과 갓. 모두 제복(祭服).
[註 19674] 을해년 : 1695 숙종 21년.
[註 19675] 번영(繁纓) : 제후(諸侯)의 마식(馬飾).
[註 19676]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677] 갑신년 : 1704 숙종 30년.
[註 19678] 숭정(崇禎) :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註 19679]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註 19680] 울창(鬱鬯) : 울금향(鬱金香)을 넣어 빚은 향기 나는 술로, 제사의 강신(降神)할 때 썼음. 울창주(鬱鬯酒).
[註 19681] 장망(長望) : 관원(官員)을 추천(推薦)할 때에 다수(多數)의 후보자를 선정(選定)하는 것. 대개 3인의 후보자를 추천함.
[註 19682] 홍문록(弘文錄) : 홍문관(弘文館)의 교리(校理)ㆍ수찬(修撰)을 임명하기 위한 1차 선거(選擧) 기록. 먼저 7품 이하의 홍문관원(弘文館員)이 뽑힐 만한 사람의 명단을 만들면 부제학(副提學) 이하 여러 사람이 모여 적합한 사람의 이름 위에 권점(圈點)을 찍는데, 이것을 기록하는 것을 홍문록이라고 함. 관록(館錄). 본관록(本館錄).
[註 19683] 한림 소시(翰林召試) :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후보자에 대한 특별 시험. 적임자를 선정하여 상주(上奏)하면, 왕명으로 불러 위원(委員)을 시켜 시(詩)ㆍ부(賦)ㆍ논(論)ㆍ책문(策問) 등 시험을 보여 합격한 자를 임용하는 것.
[註 19684] 을사년 : 1725 영조 원년.
[註 19685]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686]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687] 병오년 : 1726 영조 2년.
[註 19688] 장(場) : 제사하는 곳.
[註 19689] 경자년 : 1720 경종 즉위년.
[註 19690] 우주(虞主) : 궁중에서 우제(虞祭)를 지낼 때에 쓰는 뽕나무 신주(神主).
[註 19691] 운관(雲觀) : 관상감(觀象監).
[註 19692] 결채 가요(結彩歌謠) : 죽은 임금이나 왕비의 신주(神主)를 종묘(宗廟)로 모실 때 행하는 행사. 성균관(成均館)의 유생(儒生)ㆍ기생 등이 각각 색종이를 길 좌우에 화려하게 장식하고 가요를 올리며 돌아간 임금이나 왕비의 덕을 칭송함.
[註 19693] 경자년 : 1720 숙종 46년.
[註 19694] 고사(故事) : 경(耿)과 박(亳)은 은(殷)나라의 도읍으로, 은나라 제17대 왕 반경(盤庚)이 비가 많이 내려 경의 제방이 무너져 물이 넘치게 되자 박으로 도읍을 옮기었는데, 탕임금의 덕화를 따라 탕임금이 베풀었던 정치를 다시 베풀어 제후들이 사방에서 조회(朝會)하고 상도(商道)가 부흥되었다는 고사(故事).
[註 19695] 인일제(人日製) : 인일인 음력 정월 초7일에 가절(佳節)이라고 하여 보이는 과거(科擧). 성균관(成均館) 유생이 주대상임.
[註 19696] 단주(丹朱) : 요(堯)의 아들. 부질없이 놀기를 좋아하고 포학스런 행동을 하여 불초(不肖)했으므로, 제위(帝位)를 순(舜)에게 전한 고사(故事)에서 나온 말.
[註 19697] 등준시(登俊試) : 조선조 세조(世祖) 때에 특별히 베푼 과거. 세조 12년(1466) 7월에 종친과 경재(卿宰) 이하의 문관(文官)으로서 자원하는 사람을 시험보게 하였는데, 이때 중추부 판사(中樞府判事) 김수온(金守溫) 등 12인을 선발하였으며, 그 뒤 9월에 무과 등준시(武科登俊試)에서 최적(崔適) 등 모두 51인을 선발하였음.
[註 19698] 계사년 : 1773 영조 49년.
[註 19699] 이비(吏批) : 이조(吏曹)에서 주청하여 임금의 비답(批答)을 받은 벼슬.
[註 19700] 병비(兵批) : 병조(兵曹)에서 무관의 벼슬을 골라서 뽑는 일.
[註 19701] 온실수(溫室樹) :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의 명신(名臣)인 공광(孔光)은 경학(經學)에 더욱 밝았으며, 퇴청(退廳) 후 형제 처자들과의 사담에 조정의 일은 절대 말하지 않았음. 혹자가 장락궁(長樂宮) 안의 온실전(溫室殿)에 어떤 나무들이 있느냐는 물음에 잠잠하게 있다가 다른 화재로 돌려 대답하며, 궁중의 일을 외부에 누설하지 않았음.
[註 19702] 신축년 : 1721 경종 원년.
[註 19703] 임인년 : 1722 경종 2년.
[註 19704]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19705]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19706] 경인년 : 1770 영조 46년.
[註 19707] 임자년 : 1732 영조 8년.
[註 19708] 임진년 : 1772 영조 48년.
[註 19709] 병신년 : 1776 영조 52년.
[註 19710] 갑신년 : 1764 영조 40년.

출전 : 영조실록 부록 4번째기사 영조 대왕 행장(行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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