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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0 (일) 16:31
분 류 사전2
ㆍ조회: 2481      
[고대] 고대의 조세 (민족)
조세(고대)

세부항목

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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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조선후기)
조세(개화기이후)
조세(광복이후)
조세(현황 및 평가)
조세(참고문헌)

우리 나라에 있어서 조세의 기원은 삼국시대에 당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실시한 조ㆍ용ㆍ조의 제도라고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 원형은 이미 삼국 성립 이전의 공납관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공납관계는 고대국가의 형성기에 있어서 정복종족과 피정복종족 간의 지배관계에 의하여 생긴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는 옥저에 맥포(貊布)ㆍ어물ㆍ식염, 그 밖의 해산물을 납공하게 하였으며, 또 아름다운 여자를 징발하여 비첩으로 삼아 노복처럼 사역시켰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정복종족의 맹아형태에 있어서 옥저족의 부여에 대한 공납, 읍루 및 예맥족의 고구려에 대한 공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공납물자는 정복국가의 강력한 공권력의 발동에 기인한 것으로서 주로 정복국가의 물질적 기초로, 또는 그 국가권력의 유지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공납관계는 정복종족의 피정복종족에 대한 지배관계에서 생긴 조세의 원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의 조세제도인 조ㆍ용ㆍ조에 있어서 조(租)는 전(田)에 부과되는 전조(田租)를, 용(庸)은 신(身, 丁)에 부과되는 인두세를, 그리고 조(調)는 호(戶)에 부과되는 호세를 각각 의미한다.

조ㆍ용ㆍ조를 고려시대에는 ‘조(租)ㆍ포(布)ㆍ역(役)’, 그리고 조선시대에는 ‘조(租)ㆍ역(役)ㆍ공물(貢物)’이라고도 하였다. 신라ㆍ고려 및 조선시대의 조세제도가 모두 그 명칭과 내용에 다기한 변천은 있었지만 이 조ㆍ용ㆍ조를 기본적으로 해서 체계화된 것이다.

그런데 대체로 조ㆍ용ㆍ조 3세 가운데 조가 재정수입의 대종을 이루어왔다. 그러므로 재정의 기초는 토지생산물에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경제의 발전이 유치한 단계에서는 토지가 주요한 생산수단이었고, 따라서 백성들에게는 농업이 주요한 수입의 원천이었으며, 권력자도 농업생산물에 의하여 의식(衣食)하였고 집권자가 그 존엄을 유지하고 법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재원도 주로 토지생산물에서 찾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편, 농민들에게는 토지의 경작권을 주어 생활을 보장하는 동시에 전조(田租)ㆍ신용(身庸)ㆍ호조(戶調)를 수납하게 하여 국가기관의 재정적 기초를 확립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역대의 토지정책은 아무리 민중의 생활향상을 표방하였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는 재정수입의 확보와 그로 인한 집권국가의 유지ㆍ강화에 그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역대의 조세제도는 토지제도와 직결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있어서 전조는 토지생산물, 즉 곡물로써 납부하는 현물세이며, 인두세인 신용은 부역노동의 물납형태로서 직물로 납부하는 경우가 가장 많았고, 호세인 호조는 전조의 부과세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이것은 곡물로 납부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1. 고구려

고구려는 여러 종족의 통제자로서 정복국가를 형성한 후 국가의 물질적 기초를 확립하고 공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세제도를 확립하게 되었다. 즉, 신용은 포 5필씩을 부과하였고, 호조는 곡물 5섬씩을 부과하였다.

극빈자인 유인(遊人)에 대하여는 3년에 한 번씩 납세하도록 하되 그것도 10인을 1조로 하여 세포(細布) 1필만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전조는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나누어 1등은 매호에 1섬, 2등은 7말, 3등은 5말을 각각 부과하였다. 이것은 대체로 조ㆍ용ㆍ조의 조세체계임을 알 수 있다.

이 밖에 형벌에 의한 재산의 몰수도 재정수입의 일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요컨대 당시 국가재정의 유일한 기초는 조세였지만 근대적 의미의 일정한 조세제도는 없었고 공권력 내지 과세권의 발동 여하에 따라 어느 정도까지는 빈부의 차등에 따른 신축성 있는 조세제도였다.

2. 백제

백제의 조세형태도 물납세였으며, 이는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결정되었다. 백제의 조세제도는 고구려의 그것과 거의 같았다. 그 구체적인 예를 들면 조세는 포(布)ㆍ견(絹)과 같은 직물과 마사(麻絲) 및 미곡 등을 매년의 풍흉에 따라 차등 있게 납부하게 하였다. 과세대상은 물론 농경지였으나 세율에 관해서는 오늘날 알 길이 없다.

이상은 전조에 관한 것이지만, 호조에 관해서도 ≪삼국사기≫의 “고이왕 15년 봄과 여름에 가뭄이 들어 겨울에 기근이 일어나매 창곡을 풀어 구제하고 또 1년간 전조와 호조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호조제가 있었음이 입증된다.

그리고 당시의 조세제도의 한 체계로서의 요역은 일반 백성의 부담으로서 강제되었기 때문에 인두세로서의 신용제는 이 요역제의 물납형태로서 필연적으로 존재하였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와 같이 백제의 조세제도는 고구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조ㆍ용ㆍ조 바로 그것이었다.

3. 신라

신라의 조세체계도 고구려나 백제와 마찬가지로 조ㆍ용ㆍ조를 근간으로 하였다. 전조에 있어서는 토지의 생산물인 곡물과 직물의 원료 등 현물세였다. 전조의 과세대상은 물론 농경지였겠지만 그 면적은 경묘제(頃畝制)와 결부제(結負制)를 병용한 것이었다. 그리고 호조제가 있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내물왕 42년 7월에 북쪽 변경인 하슬라(지금의 강릉) 지방에서 가뭄과 누리〔蝗〕가 있어 연사(年事)가 나쁘고 기근이 일어나 죄수를 특사하고 1년간 전조와 호조를 면제하여 주었다.”는 기록이 이를 명백히 입증하여 주고 있다.

끝으로 요역제는 신라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행하여진 조세의 특수형태로서 산성의 축조, 궁궐의 수축 등에 많은 인원이 동원되었다. 예컨대, “자비왕 11년 9월에 하슬라 사람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이하(泥何:일명 泥川이라고도 함)에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하고 있다. 일종의 인두세로서의 신용제는 요역제의 물납형태에 불과한 것이었다.

4. 통일신라

삼국시대의 고구려ㆍ백제 및 신라에 있어서는 모두 조ㆍ용ㆍ조의 부과 및 징수가 조세제도의 대강이었던 것이다. 삼국통일 이후의 조세체계도 역시 조ㆍ용ㆍ조였다. 그러나 이 시대의 특징은 균전제도와 다소의 관련을 맺는 전조(田租)ㆍ정역(丁役)ㆍ호공(戶貢)이었다.

농민들이 점차 농노적 신분으로 바뀌어지고 봉건제도가 성숙함에 따라 생산력은 일층 발전하였으나 거기에 수반된 토지국유제하에서의 왕족ㆍ귀족ㆍ관료ㆍ토호 및 사원 등에 의한 방대한 토지의 사유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국가재정의 파탄을 가져왔던 것이다. 왜냐하면 종래에는 국가의 예민(隷民)으로서 조세와 요역을 담당하여 온 일반 농민들이 이제는 개개의 지주에게 예속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황하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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