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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15 (토) 05:46
분 류 사전2
ㆍ조회: 2394      
[근대] 한국사9-일제강점기 역사 개관 (브리)
일제감점기 역사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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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한국을 합병한 뒤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육·해군 대장을 총독에 임명했으며, 헌병경찰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의 언동을 엄격히 통제했다. 그리고 신민회(新民會)의 간부들을 총독암살음모라고 날조하여 체포했다(105인 사건). 이러한 살벌한 억압정책 아래 토지조사사업을 통해 토지를 약탈하고, 산업과 금융을 독점적으로 지배했다. 이러한 고통 속에서 나라 안에서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해외에서는 국제적인 외교활동과 무장독립운동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독립운동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민족자결주의가 세계를 풍미하자, 이 원칙에 의하여 한국도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전민족적인 독립운동으로 번져나갔다. 3·1운동은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 기독교의 이승훈(李昇薰), 불교의 한용운(韓龍雲) 등 주로 종교계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종교기관과 교육기관을 통해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직업·성별·연령을 가리지 않은 온 국민의 운동이었다. 이것은 개화기 이후 성장해온 국민의 힘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일본의 무력에 의한 강압으로 독립을 쟁취하지는 못했지만, 상하이[上海]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제국의 복고가 아니라 대의제의 원칙에 입각한 정치형태를 가진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정부였고, 임시정부는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3·1운동 이후 일본은 세계의 여론에 눌려 문화정치를 실시한다고 했으나, 이것은 기만적인 표면적 완화일 뿐 식민정책의 근본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일본은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에 의한 식량의 약탈, 군수공업에 필요한 광산자원의 약탈, 일본 완제품의 상품시장, 중공업에의 투자에 의한 중국침략의 병참기지화 등 일본의 필요에 응하는 모든 정책을 수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에는 한국의 인적·물적 자원의 강제동원을 위하여 일본어 사용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여 민족말살정책을 시행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민족자본은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농민은 영세한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만주 등지로 이민했고, 노동자는 일본인 노동자의 절반밖에 안 되는 임금의 열악한 조건을 견뎌야 했다.

이러한 일본의 식민정책에 대항하여 국산품 사용을 권장하는 물산장려운동(物産奬勵運動)이나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를 자주 일으켰다. 물산장려운동이 민족자본 육성을 위한 기업가 중심의 운동이라면, 소작쟁의와 노동쟁의는 농민과 노동자에 의한 것이었다. 후자는 1925년에 조직된 조선공산당의 지도 아래 더욱 발전해갔다.

이리하여 민족운동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6·10만세운동(1926)이 있은 다음해인 1927년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동전선을 펼 필요를 느끼고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신간회는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 때 조사단을 파견하는 등 한국이 당면한 모든 문제에 대하여 통일적인 민족적 입장을 제시했다. 그러나 사회주의측의 주장으로 해산되었다.

한편 만주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하던 독립군은 각처에서 일본군을 괴롭혔는데, 그중에서도 1920년 홍범도(洪範圖) 등의 봉오동(鳳梧洞) 전투와 김좌진(金佐鎭)의 청산리(靑山里) 전투가 유명하다. 큰 피해를 입은 일본군은 만주의 한국인 부락들을 습격하여 많은 인명을 학살하기도 했다(庚申慘變). 그후 독립군부대는 러시아 등 각지로 흩어졌고, 만주사변(1931) 이후 만주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가자 독립군의 행동도 어렵게 되어 반만중국군(反滿中國軍)과 연합하여 투쟁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 임시정부 밑의 광복군에 통합되었는데, 광복군은 연합군과 협동하여 대일항쟁을 수행했다. 한편 김구(金九)의 애국단(愛國團)과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은 공포수단에 의한 항일투쟁을 기도하여, 훙커우 공원사건[虹口公園事件] 등이 일어났다.

이런 와중에 민족의 말과 글을 지키고 키우려는 주시경의 제자들로 조직된 조선어학회의 노력이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의 정신적 뒷받침으로 역사 속에서 민족정신을 찾으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박은식(朴殷植)·신채호 등이 대표적이다. 이에 대해서 현실적인 사회개혁에 주안점을 둔 유물사관적인 연구도 있었고, 또 진단학회(震檀學會)를 중심으로 실증적인 연구에 주력하려는 경향도 있었다.

<이기백(李基白)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사' 항목,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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