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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14 (금) 13:11
분 류 사전2
ㆍ조회: 2280      
[중세] 한국의 중세사회 개관 (두산)
한국의 중세사회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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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세사회

10세기 초에 이르러 고대사회는 중세사회로 전환되어갔다. 918년 고려를 세운 왕건(王建)은 호족세력을 기반으로 후삼국(後三國)의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민족을 재통일하였다. 고려를 건국한 주체세력은 보다 능률적인 중국의 관제를 도입하고, 과거제도(科擧制度)를 마련하는 한편, 유교정치사상을 통하여 중앙집권 체제를 완성하였다.

또 이 때에는 사회적ㆍ문화적 혁신이 단행되어 민족의식이 강화됨으로써 3차례에 걸친 거란족의 침입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귀족 중심의 고려시대에는 신라보다도 문화의 폭이 크게 확대되어 지방호족이 문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였고, 불교문화와 유교문화가 융합되었다. 불교는 전기에 의천(義天)을 중심으로 천태종(天台宗)이, 후기에는 지눌(知訥)을 중심으로 조계종(曹溪宗)이 발달하였는데, 불교의 발달로 3차례에 걸쳐 대대적으로 대장경(大藏經)이 조판되었다.

또한, 과거제도가 실시되면서 한문학ㆍ역사학도 발달하였는데, 최승로(崔承老)ㆍ정지상(鄭知常) 등의 학자가 유명하였고,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는 현존하는 가장 오랜 역사책이다. 예술에서는 고려청자로 널리 알려진 공예 부문이 특히 발달하였다. 그릇 표면에 음각(陰刻)을 하여 무늬를 넣는 순수청자에 이어, 제작된 백토나 흑토를 그릇 표면에 새겨넣어 무늬를 나타내는 상감청자(象嵌靑瓷)는 고려에서 독특하게 발달한 작품이다.

한편 중세사회에서는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가 경제생활의 기본구조를 이루고 사회의 경제기반을 마련했는데, 특히 지배세력의 성격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성립되었다. 고려시대에는 귀족을 중심으로 전시과(田柴科)가, 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양반을 중심으로 과전법(科田法)이 실시되었는데, 모두가 지배층인 귀족이나 양반을 중심으로 토지가 분배되었고, 제도적으로는 토지 국유(國有)를 원칙으로 하여 지배층은 조세를 받을 수 있는 수조권(收租權)만 가지며 농민은 토지의 경작권만 가지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왕조가 동요하는 12세기 이래로 귀족들의 토지 사유화 경향이 나타나, 13세기에는 전국에 농장(農莊)이라는 대토지 소유제가 형성되었고, 그것은 소수 권문귀족(權門貴族)의 사유지였을 뿐만 아니라 면세(免稅)ㆍ면역(免役)의 특권을 누렸다. 농장의 소유주인 귀족들은 부재지주(不在地主)였으며, 농장의 경작은 전호(田戶)나 노비(奴婢)가 담당하였는데 이들의 위치는 농노(農奴)와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왕조의 과전법 체제하에서도 마찬가지로 농장의 소유주가 양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농장의 증대는 국가의 공전(公田)을 침식하였고, 따라서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다. 국가 재정의 궁핍은 왕조의 동요를 초래하여, 귀족정치의 혼란에 이어 나타난 무인집권, 그리고 밖으로 몽골[蒙古]과의 항쟁을 통하여 위기를 맞은 고려왕조의 붕괴를 재촉하였다.

귀족사회의 모순은 이미 1126년 이자겸(李資謙)의 난, 1135년 묘청(妙淸)의 난, 1170년 무신란(武臣亂)으로 나타나 마침내 60년에 걸친 변태적인 무인집권을 초래하였고, 뒤이어 몽골의 침입, 원(元)의 정치적 간섭이 행해졌다. 조선왕조는 이와 같은 내외의 시련을 해결하는 방향에서 출발하였다.

일찍이 14세기에 충선왕(忠宣王)과 공민왕(恭愍王)을 도와 개혁을 시도한 새 왕조의 주동세력인 사대부(士大夫)들은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사회의 융합을 꾀하는 한편,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추진하여 국가의 역량을 키우려 하였다.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 개혁의 주도세력인 사대부들은 양반이란 명목하에 정치ㆍ사회의 주도 계층으로 성장하면서 지배 신분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15세기에는 태종(太宗)ㆍ세종(世宗)ㆍ세조(世祖)를 중심으로 권력구조가 개편되고 중앙집권체제가 강화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세종 때에는 국토가 압록강ㆍ두만강까지 확장되었다. 또 산업발전과 실용적 학문의 발전으로 민족문화가 크게 피어났으며, 그 중에서도 1446년(세종 28) 반포된 훈민정음, 즉 한글은 민족문화의 새 장을 열었다.

그러나 15세기의 이같은 개혁운동은 14세기 붕괴 직전에 이른 중세사회를 재편ㆍ강화하려는 움직임으로써, 고려와 조선의 교체는 중세사회 내부에서의 변혁 이상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모순과 한계를 지니고 있던 조선왕조는 16세기 이래 다시 동요되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의 모든 면에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때에 임진왜란(壬辰倭亂)ㆍ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커다란 외적 시련을 맞아 17세기에는 그 수습에 힘쓰는 한편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고식적이고 미봉적인 타결책은 역사의 새로운 방향과 부합되지 못하였다.

특히 왜란으로 인한 농촌사회의 피해는 극도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란 이전에 이미 불붙은 당쟁(黨爭)은 더욱 격화되어 전체 양반사회를 분열과 침체에 빠뜨렸고, 전통적 신분체제를 크게 와해시켜 갔다. 한편 농촌사회에서는 농장이 계속 확대되어 대부분의 농민들은 소작전호(小作田戶)의 위치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농업 기술과 상업적 농업의 보급으로 부(富)를 얻을 수 있었던 일부의 농민들은 자작농(自作農)과 소작농(小作農)을 겸하거나 경영형 부농(經營型富農)으로 성장하여 종래와 같은 봉건적 지배를 점차 탈피해갔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양반지배층은 성리학(性理學)을 교조적(敎條的) 이데올로기로 여기고 있었다.

고려시대의 불교에 대신하여 조선시대의 양반 사대부들이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해 수용한 성리학은 16세기에 이르기까지, 다시 말하면 중세사회 체체 내에서는 사회개혁과 사회체제의 정비를 위해 긍정적 기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서원(書院)을 중심으로 융성한 성리학은 형이상학적 국면으로 발전하여 이황(李滉)ㆍ이이(李珥)와 같은 철학자를 배출하였고, 윤리적 측면이 강조되어 예학(禮學)으로 전화(轉化)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래로 기존 사회질서의 변화로 인하여 사회적인 기능을 상실하자, 성리학의 전근대성(前近代性)을 탈피하려는 새로운 사상체계인 실학(實學)이 대두되었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대한민국-역사'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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