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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7-06 (일)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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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2275      
[고대] 고조선 (한메)
고조선 古朝鮮

한국 최초의 국가(國家). 요하(遼河)와 대동강(大同江) 유역에 있었던 고조선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국가로 형성되었으며, 한(漢)의 침입으로 말미암아 BC 108년에 멸망하였다.

[역사]

<성립>

고조선은 BC 2333년 단군왕검(檀君王儉)에 의해 세워졌으며, 단군은 고조선의 정치적 지배자였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단군은 제정일치시대(祭政一致時代)의 군장(君長)이었고, 이러한 군장들이 하느님의 자손임을 주장하면서 한 시대의 사회를 이끌어 온 지도이념으로서의 원시종교가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단군은 1908세의 수(壽)를 누린 끝에 아사달(阿斯達)에 숨어 산신(山神)이 되었다고 하는 고조선의 건국신화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주(周) 초기 은(殷)나라 사람 기자가 조선을 다스렸다는 내용의 전승은 고려 중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記)》를 비롯한 고래의 문헌에서 오랫동안 계승되었다. 즉 은나라가 망할 때 기자가 망명하여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견해가 있는데 기자조선은 대개 북중국의 난하유역에서 평양(平壤)으로 이동하였거나 요하 서쪽의 대릉하유역(大凌河流域)에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와 같이 단군신화와 고조선에 대한 연구는 저마다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

고조선은 지금의 평양으로 추정되는 수도 왕검성(王儉城)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여러 군장 국가들과 연합, 하나의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요하유역을 중심으로 중국의 전국칠웅(戰國七雄)의 하나인 연(燕)과 맞서고 있던 고조선세력은 요동(遼東)으로 침투해 오는 연의 세력에 점차 밀리게 되었는데 연의 소왕(昭王;재위 BC311∼BC 279)의 시대에 연의 장수 진개(秦開)에 의해서 고조선의 서역(西域)이 공취당하여 이곳에 요동군(遼東郡)이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 요동군은 연에 이어 진(秦)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진이 중국을 통일한 지 10여 년 뒤에 다시 혼란이 거듭되자 한(漢)에 의해 중국은 재통일되었다. 진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하여 중국의 연·제(齊)·조(趙)로부터 고조선으로 흘러들어온 유이민(流移民)의 수는 수만명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또 한제국 치하의 연지방이 소란해지자 연으로부터 고조선지방으로 망명하여 오는 자가 더욱 늘어났다.

<멸망>

진·한 교체기 동안 중국으로부터 고조선지방으로 많은 유이민이 들어왔는데, 이 때 연왕의 부하인 위만(衛滿)이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여 왔다. 고조선의 준왕(準王)은 북쪽의 변경(邊境)을 수비하겠다는 그의 약속에 따라 그에게 그 지방을 봉하여 주었다.

위만은 북방 수비의 임무를 맡고 있는 동안 유이민 집단의 세력을 키워서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지방의 지배자가 되었으며, 준왕은 남하하여 <진국(辰國)>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고 칭하였는데 이 시기는 대체로 BC 194년에서 BC 108년 사이이다.

그런데 위만이 조선으로 올 때 상투를 틀고 조선옷을 입었던 점으로 보아 조선인이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 준왕을 몰아내고 새 왕조를 세웠을 때 그는 여전히 국호를 <조선>이라고 하였으며 《사기(史記)》에 나오는 위만조선의 관직명에도 비중국적인 요소가 보이므로 위만조선은 단군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로써 위만조선은 중국인의 식민지 정권이 아닌 고조선인의 세력을 기반으로 한 연맹왕국적인 정권이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점차 세력이 강대해진 고조선은 우거왕(右渠王) 때 진(辰) 등의 여러 나라가 한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간에서 무역의 이익을 독점하려 함으로써 한나라와의 충돌을 자아내게 되었다.

이에 한나라는 몽골로부터 만주로 뻗어오는 흉노(匈奴)가 위만조선과 연결하는 경우 그 위협이 두려워 BC 128년에는 고조선에 예속되어 있던 예(濊)의 땅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였으나 예인(濊人)의 반항으로 2년 뒤에 철폐하였다. 이와 같이 고조선과 한나라의 대립관계는 조선 장수를 살해하고 달아난 섭하(涉何)를 조선군이 보복적 살해를 함으로써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 사건을 계기로, BC 109년 한나라의 무제(武帝)가 6만의 육군과 7천의 수군을 파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침공해 오자 1년간 저항하였으나 BC 108년 고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었다.

[제도]

<정치>

고조선은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아래 제정일치시대의 최고통치자인 단군왕검을 중심으로 한 신권정치(神權政治)를 이루었으며 점차 연맹왕국으로 성장하여 갔다. 《위략(魏略)》에 의하면 BC 4세기경에 조선의 후(侯)가 중국의 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는데, 왕을 칭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지배자의 칭호가 달라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사회가 분명한 국가형태를 갖추게 된 것을 선포하는 정치적 변화였던 것 같다.

따라서 BC 3세기경에는 부왕(否王)과 그의 아들 준왕 등 강력한 왕이 등장하여 왕위를 세습하였으며, 그 아래 상(相)·대부(大夫)·장군 등의 관직을 두었다. 또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때의 관리 이름을 보면 조선상(朝鮮相) 노인(路人), 상(相) 한음(韓陰), 이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협 등 4명이 있었는데 <상(相)>은 고구려의 상가(相加)와 비슷하므로 부족장적 성격을 띤 것으로 보인다.

<사회·경제>

고조선사회는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한반도에 있어서 다른 어느 부족사회보다도 문화상의 발전이 현저히 앞서 있었다. 이러한 고조선사회의 일반 사회상을 알 수 있는 것으로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남아 있는 팔조법금(八條法禁)이 전한다.

그 가운데 현재 전해지고 있는 3가지조목은 ①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며 ② 사람을 상해한 자는 곡물로써 배상하게 하고 ③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원시적인 복수전투가 아니라 정치권력의 중재에 의해 싸움을 해결하는 사회의 법칙이며, 이로써 농경사회의 중앙집권적인 정치권력이 성립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법금은 미개사회에 공통되는 만민적인 성질을 띤 것으로, 이러한 금법을 통해서 고조선과 같은 부족연맹적인 사회에 있어서는 이미 권력과 부(富)의 차이가 생겨나서 모권사회(母權社會)로부터 부권사회(父權社會)로 이행, 가부장제적(家父長制的) 가족제도가 성립되고 재산에 대한 사유 관념이 생기면서 형벌노비도 발생된 것을 볼 수 있다.

철기의 사용과 더불어 경제적인 생활은 청동기시대보다 훨씬 발달하였으나 증가된 부는 사회지배층에 점유되어 빈부의 차이는 점점 확대되어 갔다.

[문화]

농경생활을 한 고조선시대는 청동기문화를 기반으로 성립되었다. 청동기문화의 유물로서는 청동검(靑銅劍)·청동모와 각종 말갖춤[馬具]·거여구(車輿具) 등이 있다. 그리고 뒷면에 특수한 기하학적 잔금무늬[細線紋]가 있고 2개의 꼭지가 달린 거울인 다뉴세문경(多紐細紋鏡)과 복식용으로서 허리띠에 쓰인 동물형띠고리〔動物形帶鉤〕도 있다.

이와 같이 고조선인들은 독특한 형식의 청동기를 변형·발전시켜 사용했는데 매우 예리하게 만들어져 세형동검(細形銅劍)이라 불리는 청동검과 청동꺾창[靑銅戈]은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양식으로 유명하다.

또한 대륙과 만주에 있어서의 정세변화에 따라서 일어난 중요한 사실은 철기문화(鐵器文化)의 전래이다.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나타나게 된 철기문화는 만주에서 다시 북방계 청동기문화와 섞이면서 한반도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중국의 철기문화와 이와섞인 청동기문화의 전래시기는 BC 4세기에서 3세기에 걸친 것으로 여겨진다.

그 문화가 한반도로 파급되어 온 경로는, 요동반도에서 한반도 서북부에 걸쳐 분포되어 있는 전국시대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 유적으로 미루어보아 압록강 중류를 거쳐 청천강·대동강 상류유역으로 들어와 한국 서북지방에 정착된 듯하다.

이러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철제농구를 사용함으로써 농업경제가 크게 발달하였으며, 철제무기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고조선 전역의 지배계급은 말이나 청동제마차를 타고 청동제뿐만 아니라 철제의 검(劍)과 투겁창 등 새로운 무기를 휘두를 수 있었고 석기에 대신해서 괭이·보습·낫 등 발달된 농구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철기문화의 보급은 고조선 지방사람들의 생활양식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주거를 한 움집 바닥에는 온돌장치를 하고 가옥은 지하 움집에서 지상의 목조가옥(木造家屋)으로 변해 갔다. 무덤의 축조도 달라졌는데 넓은 구덩이[土壙]에 시체를 묻는 널무덤[土壙墓]과 2, 3개의 항아리를 맞붙여서 널[棺]로 쓰는 무덤의 2가지 양식이 새로이 행하여졌다.

따라서 한국에는 한족(漢族)의 철기문화와 스키타이 계통의 청동기문화가 들어와 대동강유역은 금속문화(金屬文化)의 중심이 되었다. 이 두 계통의 금속문화는 계속 남하하여 종래의 민무늬토기문화[無紋土器文化]와 혼합되면서 일본으로 전파, 일본의 야요이문화[彌生文化]를 이루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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