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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14 (금) 05:28
분 류 사전2
ㆍ조회: 1864      
[근대] 민족의 독립 운동 개관 (한메)
민족의 독립 운동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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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수난과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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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수난과 저항]

<일제의 식민지 정책>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본의 불법적인 수단에 의하여 강점된 후 45년의 8ㆍ15에 이르기까지 한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을 강점한 일제는 1906년 2월 이래의 통감부(統監府)를 조선총독부로 고치고, 일본 육군대장 출신인 데라우치 마사요시〔寺內正毅〕를 초대 조선총독으로 하였다. 초대 총독제를 보면, 총독은 일본 천황에 직속되어 데라우치는 헌병경찰에 의한 무단정치(武斷政治)를 실시하였다.

즉 무력지배의 본거로 중앙에 경무총독부(警務總督府)를 두어 경무총감에 주한헌병사령관을 임명하고 그 밑의 각도 경찰부장에는 각도의 헌병대장을 겸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결사(結社)와 정치적 집회는 물론, 옥외에서 행하는 비정치적인 집회까지도 금지하였고, 식민지지배에 비타협적인 인사는 이른바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하여 검거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을 위압하고자 일반 관리나 학교의 교원들까지 제복과 칼을 착용케 하였다. 일제는 한국인의 지식이 향상되어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비판하고 독립사상이 싹터 독립을 주장하게 될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식민지 교육만을 강요하여 보통교육과 실업교육만 허락하였다.

한편 일제의 식민지 조선에 대한 경제정책의 특징은 식량ㆍ공업원료의 공급지 및 상품판매 시장으로서의 식민지적 경제로 재편성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차적으로 토지수탈을 위한 토지조사사업(1905∼18)을 강행하였고, <회사령(會社令)>을 시행하여 민족자본의 발전을 억제하였다.

<3ㆍ1운동>

일제의 무단통치에 반발하여 서울에서 폭발한 19년 3월 1일의 독립만세시위는 평양ㆍ개성ㆍ원산ㆍ함흥 등의 주요 도시를 거쳐 주변의 농촌으로 번져 갔다. 그리고 3월 10일을 전후해서는 남한 일대로 파급되어, 5월 말까지 전국 230개의 부ㆍ군에서 200여 만 명의 사람들이 1500여 회의 만세시위에 참가하는 대민족운동으로 발전하였다. 3ㆍ1운동은 비록 독립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으나, 이 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민족공동의 의사를 온 세계에 알리고, 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역량을 보여주어 세계 각국으로 하여금 한민족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특히 3ㆍ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은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에 이르렀다. 즉 민족운동의 형태는 보다 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활동으로 발전하고 혹은 사회운동과도 연결되어, 새로운 내용을 지닌 독립운동으로 성장하여 갔다. 요컨대 3ㆍ1운동은 민족운동사상 위대한 공헌과 전통을 남긴 운동이었다. 3ㆍ1운동은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한국민족의 새로운 각성을 일으켜, 이후의 거듭되는 민족운동의 원천이 되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

일제는 무력으로 3ㆍ1운동을 진압하고서, 국제적인 여론에 밀려 문화정치를 표방하였으나, 이는 표면적인 현상의 변경일 뿐 내용에 있어서는 오히려 한민족의 근대적 성장을 근본적으로 탄압하고, 아울러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는 고도의 통치방식으로서 하나의 기만적 회유책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는 1920∼34년에 걸쳐 산미증산계획 아래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자국내의 정치가 파쇼화의 길을 걸으면서, 대외 침략전쟁수행을 위하여 한국을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하였다.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한 인적ㆍ물적 수탈과 탄압을 가중시켰고 이에 상응하여 한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하려 하였다. 한국어의 사용금지와 한국사 교육의 금지 및 창씨개명을 강요하였다.

<항일무장투쟁>

1931∼45년 사이에 일제가 식민지 조선에서의 파쇼지배체제를 강화하고, 아시아 여러 민족에 대해 무자비한 침략전쟁을 감행한 것은 한민족의 독립운동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그렇지만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이러한 객관적 정세의 불리함을 역으로 이용하여 무장투쟁의 전열을 정비하는 한편, 민족연합전선을 결성하여 민족국가건설의 방략을 구체적으로 모색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김구(金九)의 지도 아래 애국단원들이 침략의 원흉들을 직접 공격하는 의열활동을 전개하면서부터 활기를 되찾았다. 이봉창(李奉昌)은 비록 실패하기는 하였지만 도쿄[東京]에서 일왕(日王)에게 폭탄을 투척하였고(1932.1), 윤봉길(尹奉吉)은 상해에서 폭탄을 던져 시라가와〔白川〕대장 등 10여 명을 살상하였다(1932.4). 그리하여 1920년대에 침체되었던 임시정부에 대한 국내외의 신망은 점차 회복되어 갔다.

그렇지만 일제의 중국침략이 본격화하자, 임시정부는 전황에 따라 국민당정부와 함께 난징〔南京;1932〕ㆍ항저우[杭州;1932]ㆍ자싱[嘉興;1935]ㆍ전장[鎭江:1937]ㆍ창사[長沙;1937]ㆍ광둥[廣東;1938]ㆍ류저우[柳州;1938]ㆍ치장[?江;1939]ㆍ충칭[重慶;1940] 등지로 근거지를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김원봉(金元鳳)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와 함께 좌우익의 통일전선으로 기존의 광복군 전력을 강화하였으며 일부의 병력은 인도와 미얀마전선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김좌진(金佐鎭)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 이범윤(李範允)의 의군부, 김성극(金星極)의 광복단 등이 청산리전투에 참여하였고, 김좌진의 피살 후 이청천(李靑天)이 한국독립군을 거느리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최동오(崔東旿)ㆍ양세봉(梁世奉)의 조선혁명군, 좌익계열인 김무정(金武渟)ㆍ김두봉(金枓奉)ㆍ박효삼(朴孝三)의 조선독립동맹 산하 조선의용군 등이 후자창〔胡家莊〕전투 등을 통해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이 밖에 소위 갑산파(甲山派)라고 불리는 김일성(金日成)ㆍ최용건(崔鏞健)ㆍ김책(金策) 등이 1930년대 중반 이후 만주와 함경북도 갑산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훗날 소련 극동군과 연결되었다고 한다. 해외의 독립운동세력들은 일제가 도발한 만주침략, 중ㆍ일전쟁, 태평양전쟁의 전기간을 통하여 끊임없이 일본군과 무력항쟁을 벌였다. 독립군들이 활약하였던 객관적 조건은 지극히 열악하였다. 그들은 독립운동세력이 있던 현지 사정에 따라, 중국국민당이나 중국공산당 또는 소련공산당의 간섭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불충분한 장비와 보급 때문에 때로는 영하 40℃를 오르내리는 혹한 속에서 맨몸으로 전투에 임하였다.

식민지 조선이 일제의 파쇼지배하에서 신음하던 암흑기에, 민족의 자력해방을 목표로 삼고 끝까지 무력으로 대항하였던 독립군의 존재는 항일민족운동의 본류를 이루는 것이었다.

출전 : [한메디지탈세계대백과 밀레니엄], 한메소프트, 1999 '대한민국-역사' 항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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