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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11-05 (화) 01:27
분 류 사전2
ㆍ조회: 1779      
[조선] 탕평비 (민족)
탕평비(蕩平碑)

탕평비. 조선후기인 1742년 영조가 자신의 탕평책을 중외에 표방하여 경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비. 영조 자신이 친서하여 이를 비에 새겨 성균관의 반수교 위에 세운 것이다. 성균관대학교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1742년(영조 18) 영조가 자신의 탕평책을 중외에 표방하여 경계하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비. 영조 자신이 친서하여 이를 비에 새겨 성균관의 반수교(泮水橋) 위에 세운 것이다.

영조는 왕세제시절에 당쟁의 폐해를 직접 경험하였기 때문에 즉위하자마자 당쟁의 조정에 힘을 기울였다. 1725년(영조 1) 1월 당쟁의 폐를 통언(痛言)하면서 붕당을 조성하는 자는 종신토록 금고(禁錮)하여 국정에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였다.

1727년에는 노론의 장기집권에서 오는 폐단을 제거하고자 노론의 강경파를 출척(黜斥)하고 소론을 등용하였으며, 또 양파의 조정에 유의하여 노론의 영수와 소론의 영수를 친히 불러 융화를 주선하였다. 이어 왕은 각 파의 온건론자를 등용하여 탕평책을 펼쳐나갔다.

탕평책의 하나로 청요직의 자리에 각 파의 인물을 균형있게 등용하여 서로 견제하게 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정책을 펼쳐나가자 어느 정도 탕평정국을 이루었고, 이에 따라 이제는 정계에서 밀려난 남인·소북 등의 인물도 등용하게 되었으며, 심지어는 어느 당파에 대한 인물을 가리지 않고 능력에 따른 인재등용도 가능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42년에는 자신의 탕평정책을 알리고 열의를 과시하기 위하여 유학의 본산이며 관학의 최고학부인 성균관유생들에게 경계문구를 새긴 탕평비를 성균관 반수교 위에 세웠다.

왕은 ≪예기≫에 있는 구절 중 “신의가 있고 아첨하지 않는 것은 군자의 마음이요. 아첨하고 신의가 없는 것은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弗比 乃君子之公心 比而弗周 寔小人之私意.)”라고 친서하여 비에 새겨 성균관에 세웠던 것이다. 현재 성균관대학교내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禮記, 韓國史-近世後期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5).

<강주진>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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