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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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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499      
[조선] 조선의 지방행정제도 (민족)
지방행정제도(조선의 지방행정제도)

세부항목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고대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고려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조선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근대이후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일제강점기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미군정기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대한민국의 지방행정제도)
지방행정제도(참고문헌)

[조선]

조선의 지방제도는 다른 제도와 마찬가지로 고려의 지방제도를 이어받아 발전시켜 나가는 방향으로 정비되어 갔다. 먼저 명실공히 지방행정의 최고단위로서 자리잡게 되는 도의 정비과정을 보면, 제3대 태종 말년에 종래의 동북면(東北面)ㆍ서북면(西北面)을 각각 함길도(咸吉道)ㆍ평안도(平安道)로 개편해, 일원적인 팔도체제(八道體制)를 갖추게 되었다.

즉, 전국을 경기ㆍ충청ㆍ전라ㆍ경상ㆍ강원ㆍ황해ㆍ함경(咸鏡, 永安)ㆍ평안의 8도로 구획하고, 장관으로 각각 관찰사(종2품)를 두게 되었다. 그리고 도 밑에 부ㆍ대도호부ㆍ목ㆍ도호부ㆍ군ㆍ현의 행정구획을 설치하고, 장관으로 부윤(府尹, 종2품)ㆍ대도호부사(정3품)ㆍ목사(牧使, 정3품)ㆍ부사(종3품)ㆍ군수(郡守, 종4품)ㆍ현령(縣令, 종5품) 또는 현감(縣監, 종6품) 등의 수령을 파견하였다.

이들 수령의 품계는 종2품에서 종6품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있었으나, 제도상 평시에는 모두 병렬적으로 다같이 도 장관인 관찰사의 관할 아래 있었다. 다만 이들 수령이 진관체제에 의해 전시(戰時)에 대비해 겸대(兼帶)하는 군사직으로써 위아래의 계통이 서 있었을 뿐이었다.

한편, 당시의 수도였던 한성부(漢城府)와 옛 수도였던 개성부(開城府)는 중앙에서 직할하는 경관직(京官職)으로 삼아 제도상으로 지방관제와 구별하였다. 그리고 후기에는 왕실 호위의 필요상, 광주(廣州)ㆍ강화(江華)ㆍ수원(水原)도 이에 준해 경관직으로 편제하였다.

중앙에서 지방관을 파견하는 지방행정단위는 현까지였고, 그 아래로는 지방의 자치적 조직으로 면(面) 혹은 방(坊)ㆍ사(社), 그 밑에 이(里)ㆍ촌(村)ㆍ동(洞) 등이 있었다.

한편, 고려말까지 존속했던 향ㆍ부곡 등의 특수행정구역이 1413년(태종 13)의 지방제도 개편으로 제도상 소멸되었다. 이것은 한국사회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이다.

도의 장관인 관찰사(감사)는 품계ㆍ임기ㆍ권한 등으로 보아, 명실상부한 도의 최고 행정책임자였다. 관찰사는 종2품관, 임기는 1년간(뒤에 2년간)으로서 임기 동안 한 도의 행정ㆍ사법ㆍ군사관계 업무를 통할하고, 도내 수령을 감독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관찰사는 처음에 도내의 민정(民政)과 군정(軍政) 중 민정만을 맡아보았으나 태종 이후 병마절도사를 감독하게 되고, 이어서 병사(兵使)ㆍ수사(水使)를 겸하게 되었다. 또, 감영(監營)이 있는 곳의 부윤(府尹)이나 목사(牧使)를 겸하는 경우가 많게 되면서 권한이 더욱 커져갔다.

관찰사의 지방행정 보좌관으로는 경력(經歷)ㆍ도사(都事)ㆍ판관(判官) 등이 있었으며, 이 밖에 기술직의 심약(審藥, 종9품)ㆍ검률(檢律, 종9품) 등이 있었다.

수령 중 가장 품계가 높은 것은 종2품의 부윤으로서 관찰사와 격이 같았으며, 관찰사가 이를 겸하기도 하였다. 부윤을 둔 곳은 평양ㆍ경주ㆍ함흥ㆍ의주ㆍ광주 등이었다. 대도호부사는 안동ㆍ강릉ㆍ영변ㆍ창원ㆍ영흥 등에 두었다.

목사는 대개 행정구획의 명칭이 주(州)로 되어 있는 곳 약 20군데에 두었다. 목사는 원래는 정3품직이지만, 보다 높은 품계를 가진 사람이 임명되는 경우도 있어 정2품일 경우에는 영목사(領牧使), 종2품일 경우에는 판목사(判牧使)라고 하였다.

도호부사는 흔히 부사로 약칭되던 수령으로서, 전국의 약 80군데에 두었다. 군수도 약 80군데에 두었다. 현령은 큰 현의 수령으로서 약 30군데, 현감은 작은 현의 수령으로서 약 140군데에 두었다.

각급 수령의 임명에 있어 일반적으로 수령도 해당 품계에 있는 사람만이 임명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품계가 높고 직이 낮으면 행(行)이라 칭하고, 품계가 낮고 직이 높으면 수(守)라고 칭하던 행수법(行守法)이 많이 적용되었다. 지방관의 임기는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관찰사는 1년간(뒤에는 2년간), 수령은 5년간(뒤에는 3년간)을 원칙으로 하였다.

관찰사와 수령은 중앙관제를 본떠 이(吏)ㆍ호(戶)ㆍ예(禮)ㆍ병(兵)ㆍ형(刑)ㆍ공(工)의 6방(房)으로 나누고, 사무는 토착의 이속(吏屬)들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6방 중에도 이방ㆍ호방ㆍ형방이 중심이 되어 그 수리(首吏)를 3공형(三公兄)이라고도 하였다.

특히, 호방의 수석인 호장(戶長)은 수령이 없을 때에는 그 직무를 대행하기도 하였다. 이 이속을 아전(衙前)이라고 하였다. 이 아전들은 지방 말단의 행정실무를 담당하면서 여러 가지 부정을 자행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부정은 국가에서 그들에게 보수를 지급해주지 않은 데에도 그 원인이 있었다. 한편, 위에서 말한 이속 이외에 군관(軍官)ㆍ포교(捕校) 등 경찰관계업무에 종사하던 이속들도 있었다.

한편, 수령의 지방행정을 보좌하는 기관으로 향소(鄕所)가 있었다. 향소의 향임(鄕任)에는 지방의 토착 유력자인 향반(鄕班)이 임용되었다. 향임은 중앙정부에 소속된 관리가 아니라, 지방 유지로서의 지식과 영향력을 바탕으로 하여 지방행정에 도움을 주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향소는 조선 초기에 한때 수령과 대립해 중앙집권에 역행하는 경향이 있어 폐지된 적도 있었다. 그러나 1489년(성종 20)에는 이를 개혁해 좌수(座首)ㆍ별감(別監) 등의 임원을 두게 하여 그 체제를 정비하였다.

향소는 수령에 다음가는 관아라 하여 이아(貳衙)라고도 하였다. 임원을 향임, 혹은 감관(監官)ㆍ향정(鄕正)이라 했는데, 주ㆍ부에는 4, 5인, 군에는3인, 현에는 2인을 두는 것이 통례였다.

지방의 사인(士人) 신분층 중에서 나이 많고 덕망 높은 사람을 좌수로, 그 다음 사람을 별감으로 선거해 수령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 임기는 대개 2년인데, 수령이 바뀌면 다시 선출할 수도 있었다. 향임도 6방을 나누어 맡았다. 좌수가 이방과 병방을, 좌별감이 호방과 예방을, 우별감이 형방과 공방을 맡는 것이 통례였다.

향소의 제도가 가장 발달하고 또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곳은 영남지방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안동이 유명하였다. 이곳에서만은 중앙의 고관을 역임한 사람도 향임을 맡았다고 한다.

향소와 아울러 주목되는 것으로, 경재소(京在所) 혹은 경소(京所)라는 기관이 있었다. 지방의 연고자가 서울에 있으면서 서울과 지방간의 연락을 꾀하는 동시에 향소와 함께 수령을 견제하기도 하였다. 임원으로는 당상(堂上)ㆍ별감 등이 있었다.

위에서 말한 향소와 경재소가 양반 신분층을 중심으로 운영된 데 대해 향리 신분층이 운영하는 연락기관으로 서울에서 지방관청의 편의를 돕는 경저리(京邸吏), 혹은 경주인(京主人)이라는 것이 있었다. 또한, 각 지방관청과 감영을 연락하는 영저리(營邸吏), 혹은 영주인(營主人)도 있었다.

한편, 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지방의 자치적 기능을 담당한 것으로 향약(鄕約)이 있었다. 조선 중기 이후에 향소의 활동이 부진하자 이를 보강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 향약이었다.

향약은 일찍이 중국 송대(宋代)부터 지방민을 교화하기 위해 제정, 실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의 향약을 받아들여 실시한 것은 조광조(趙光祖)가 집권하고 있던 1517년(중종 12)부터였다. 이 때의 향약 주석(注釋)에 의하면, 임원인 도약정(都約正)은 유향소(留鄕所)의 좌수, 부약정(副約正)은 유향소의 별감이라는 데에서 향약과 향소와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그 뒤 향약의 성과는 지방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1556년(명종 11) 이황(李滉)이 세운 〈예안향약 禮安鄕約〉, 1571년(선조 4) 이이(李珥)가 세운 〈서원향약 西原鄕約〉, 1577년에 역시 이이가 세운 〈해주향약 海州鄕約〉 등을 거치면서 이들 명현들의 영향력에 힘입어 조선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향약은 향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나, 향소처럼 행정적인 성격의 기구는 아니었다.

그리고 구성이나 규칙 등도 각 지방의 향약마다 달랐다. 그러나 선행(善行)이 있는 사람은 지방관을 거쳐 조정에까지 알리게 하고, 악행(惡行)이 있는 사람은 처벌하게 하는 등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향약은 주현(주縣)을 단위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지방에 따라 소규모의 향약으로 적용의 지역적 범위를 좁혀서 동약(洞約)ㆍ동계(洞契) 등이 실시된 곳도 많았다.

주현의 밑에 있었던 면ㆍ사ㆍ방의 장(長)은 풍헌(風憲)ㆍ약정(約正)ㆍ집강(執綱)ㆍ면임(面任)ㆍ방수(坊首)ㆍ방장(坊長)ㆍ사장(社長)ㆍ검독(檢督)ㆍ도평(都平)ㆍ이정장(里正長)ㆍ관령(管領) 등 그 명칭이 많았고, 또 그 아래의 동ㆍ이ㆍ촌의 장도 존위(尊位)ㆍ약수(約首)ㆍ동수(洞首)ㆍ동장(洞長)ㆍ이정(里正)ㆍ두민(頭民)ㆍ좌상(座上)ㆍ영좌(領座)ㆍ통수(統首) 등 호칭이 여러 가지였다.

이들이 하던 일은 주현의 행정명령을 백성들에게 알리고, 특히 조세의 납부를 지휘하는 등 지방관청의 심부름이 주였다. 중앙에서 파견하는 지방관은 주현까지여서, 면 이하는 지방자치적인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향소의 좌수ㆍ별감의 천거에 의해 수령이 임명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행정 계통상으로는 수령보다는 향소 또는 향약의 관할 아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은 처음에는 호칭에도 나타나 있듯이, 지역의 덕망 있는 사람이 추대되어 백성들을 교화하면서 자치(自治)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뒤에는 지방관청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아 이를 회피함으로써 점차 그 질이 떨어지게 되었다.

한편, 서울인 한성부는 성안을 동ㆍ서ㆍ남ㆍ북ㆍ중(中)의 5부로 나누고, 그 밑에 방을 두었는데 처음에는 52방, 뒤에는 49방으로 바뀌었다. 지방의 이(里), 서울의 방 아래에는 오가작통(五家作統)의 조직이 있었다. 5호(戶)를 1통(統)으로 하고 통주(統主)를 두었다. 지방은 5통을 이로 하고, 몇 개의 이로써 면을 만들었다.

지방의 각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을, 서울의 각 방에는 관령(管領)을 각각 두었다. 그 설치 목적은 주로 호구(戶口)를 파악하고, 또한 이웃끼리 서로 돕는 자치적인 조직을 갖추자는 데 있었다.

이제 조선시대 지방제도의 특성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이때에 군현제도가 철저하게 실시되었음에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 고려시대 이래 중앙의 직접 지배권 밖에 있던 속군현이나 향ㆍ부곡 등을 모두 중앙의 직접지배를 받는 군현으로 개편함으로써 제도상 완전히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아울러 고려시대의 다원적이던 지방통치조직을 팔도관찰사제(八道觀察使制)로 일원화한 것도 중앙집권적 체제정비와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 조선시대의 주ㆍ부ㆍ군ㆍ현 등 지방행정구획의 차등은 취락의 대소, 인구의 다과, 전결(田結)의 광협 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통례였으나, 상벌적(賞罰的)인 성격의 명호변경도 없지 않았다.

가령 어떤 지방에서 역적이 나오거나 반란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 해당 지방의 명호가 부에서 군으로, 군에서 현 등으로 격하되었고, 이와 반대로 왕비의 출신 고을 등은 그 읍호(邑號)가 승격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도명(道名)까지 바뀌는 일도 있었다. 이것은 읍호가 행정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중앙권력에 의해서 정치적 조종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셋째, 관찰사ㆍ수령 등 모든 지방관에 대한 통제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처음에 관찰사의 임기를 1년간으로 제한한 것은 장기간의 재임으로 지방세력화하는 것을 미연에 막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또한, 수령은 그의 본향(本鄕)이나 전장(田莊)을 가지고 있는 지방에는 부임할 수 없게 했고, 관찰사와 수령과의 사이에도 상피제(相避制)를 적용해 같은 도에 족친(族親)의 동시 부임은 법적으로 금하였다. 이같은 조처는 모두가 토착세력화를 막자는 것이었다.

넷째, 토착세력이라 할 수 있는 향리에 대해 견제책과 아울러 포상책이 마련되어 있었다. 가령 비행을 저지른 향리는 원악향리 (元惡鄕吏)로서 가차없이 처벌함으로써 그들의 발호를 막은 반면, 향리로서 문무과나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사람, 특별한 군공(軍功)을 세운 사람 등에게는 집안의 향역(鄕役)을 면제해주는 특혜를 베풀어주었다.

요컨대, 조선의 지방제도는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를 실현시키고자 하는 집권층의 의지가 강력하게 반영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조선의 지방제도는 시기에 따라 부분적으로 다소의 변경은 있었지만, 그 기본원칙은 말기까지 지켜지고 있었다.

<하현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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