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4-28 (월) 19:04
분 류 사전2
ㆍ조회: 4486      
[조선] 조선시대의 정치 (민족)
정치(조선시대의 정치)

관련항목 : 외교, 정치사상

세부항목
정치
정치(고대의 정치)
정치(고려시대의 정치)
정치(조선시대의 정치)
정치(근ㆍ현대의 정치)
정치(참고문헌)

1. 조선의 건국과 양반관료제의 성립

고려 후기에 원의 부마국으로 전락됨으로써 야기되었던 사회적 혼란과 국가적 위기는 공민왕(1351∼1374)의 반원운동과 개혁정치를 통하여 일단 극복의 길을 찾을 수 있었다.

원이 쇠망하고 명(明)이 흥기하는 중국대륙에서의 정세변화에 대응하면서 이루어진 이 변혁은 비상수단으로 부원배 세력을 제거하고 군사행동을 감행하여 원에 빼앗겼던 영토를 수복함으로써 고려의 국가적 자주성을 회복시킬 수 있었다.

아울러 당시 격심하였던 사회적 모순과 혼란을 바로잡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하였는데, 이것은 원의 간섭기에 꾸준히 시도되었던 개혁활동의 확대 발전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신흥사대부(新興士大夫)의 세력성장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주로 향리 자제로서 새로이 수용된 성리학(性理學)을 신봉하며 과거로 관료에 진출한 그들은 자연히 권문세족과 상반되는 사회적 처지에 놓여 있었는데,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추진되는 상황 아래 뚜렷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였다.

또한, 공민왕대부터 대외관계의 긴장 속에 군사행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병흥(兵興)의 시대를 당하여 무장(武將)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들은 대부분 권문세족 출신이지만, 미미한 가문 출신도 없지 않았는데, 동북면 출신의 신흥무장 이성계(李成桂)는 탁월한 무재와 친병조직(親兵組織)을 통하여 많은 전공을 세우면서 두드러진 존재로 부각되고 있었다.

복잡한 내외의 정세를 배경으로 하여 야기된 위화도회군은 정국의 근본적 재편성을 초래하여 권문세족을 대표하는 최영(崔瑩)의 몰락과 우왕의 폐위를 가져온 반면, 이성계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과 신흥사대부 세력의 급격한 부상을 낳게 되었다.

이어서 조준(趙浚)ㆍ정도전(鄭道傳) 등 사대부 개혁론자들의 주도 아래 전제개혁운동이 전개되어 과전법(科田法)의 성립을 보게 되었는데, 이것은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이 무너지고, 신흥사대부 중심의 새 경제질서가 수립됨을 뜻하는 것이다. 이어서 역성혁명(易姓革命)의 형식을 빌려 이성계를 태조로 하는 조선왕조가 개창되었다(1392).

결국, 공민왕의 개혁정치로부터 시작된 정세의 변화가 신흥사대부와 신흥무장의 정치적 성장과 새로운 왕조의 성립으로 귀결된 셈이다. 그러나 조선의 건국은 일찍이 무신란으로 표출된 고려사회의 모순과 부마국체제 아래 축적된 혼란과 폐단을 해결하고 수습하려는 몸부림의 결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새로이 성립된 조선은 사상적으로 억불양유(抑佛揚儒)를 표방하고, 대외관계면에서 명에 대한 사대정책(事大政策)을 취하였다. 그리고 양반(兩班)이 주도하는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정비함으로써 앞 시대의 고려와는 구분되는 새 정치질서를 수립하였던 것이다.

우선, 조선이 양반사회로 규정되는 의미를 살핀다면, 조선 건국에 주도적 역할을 한 사대부들은 새 왕조에서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양반관직을 차지하고 관리로서 특권을 향유하게 된다. 양반이라는 말이 문반이나 무반의 관직을 획득할 수 있는 신분층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넓혀졌고, 따라서 이와 같은 양반이 지배세력을 이루는 조선을 양반사회라고 하게 되었다.

조선의 양반은 신라의 진골귀족이나 고려의 문벌귀족과 마찬가지로 특권층이었고, 가문을 단위로 세습성이 강하였지만, 수적으로 보아 훨씬 많았으며, 따라서 그 사회적 기반도 더욱 넓었다. 그러므로 관리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과거를 통하여 격심한 경쟁에서 이겨야 하였다. 조선시대에 음서제의 범위가 좁아져 문벌만 가지고 출세하기 어려웠던 것은 바로 그러한 때문이었다.

조선 양반사회는 역시 신분제사회였고 귀족제의 속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조선을 양반관료국가라고 하는 까닭을 이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조선이 양반관료체제를 완비하기까지 상당한 과정을 거쳤다.

태조(1392∼1398)가 새 왕조를 개창하였지만, 그것을 확고한 기반 위에 올려놓은 것은 태종(1400∼1418)이었다. 정도전을 비롯한 개국공신 일부를 숙청하고 권력을 장악한 그는 사병혁파(私兵革罷),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실시, 새 수도인 한양(漢陽)의 건도 등 주요 사업을 통하여 왕권을 강화시키고 새로운 통치체제를 가다듬었다.

이어서 세종(1418∼1450)은 집현전(集賢殿)을 설치하여 민족문화 발전에 획기적 업적을 쌓는 한편, 4군6진을 개척, 영토를 확장시키고, 고제(古制)의 연구를 통하여 문물제도의 정비에 큰 진전을 가져왔다.

세조(1455∼1468)는 조카인 단종(1452∼1455)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하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였던 군주이지만, 부국강병책을 쓰면서 조선의 국가조직과 통치체제를 정비하여 그것을 만세불역(萬世不易)의 법전(法典) 속에 담고자 하여 ≪경국대전≫을 편찬하였으며, 이것이 성종(1469∼1494) 때에 여러 번 수정을 거쳐 반포되었다.

이와 같이, 조선 건국 후 약 100년간에 걸쳐 여러 왕의 적극적 시책에 힘입어 그 정치체제가 정비되고, 그것이 ≪경국대전≫의 반포로 일단락되지만, 그 내용은 중앙집권적 양반관료국가의 모습을 띠는 것이었다.

조선의 정치기구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기관인 의정부(議政府)와 중추적 정무기관인 육조(六曹)였다. 고려시대의 재추회의와 도평의사사를 뒤잇는 의정부는 영의정(領議政)ㆍ좌의정(左議政)ㆍ우의정(右議政)의 3정승이 합의하여 국가 중대사의 처결에 절대적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육조의 지위가 높아지고 육조직계제에 의하여 주요 정무가 육조와 왕 사이에 직접 보고되고 하달되는 체계가 굳어지면서 육조의 중요성이 커지고 의정부는 자문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국가의 모든 정무는 이(吏)ㆍ호(戶)ㆍ예(禮)ㆍ병(兵)ㆍ형(刑)ㆍ공(工)의 육조의 소관이었고, 육조는 각기 정연한 관료체계에 의하여 업무를 분담하게 하였다. 이와 같은 육조의 권능 강화는 합의제의 기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의 왕은 전제군주로 절대적 권위를 지니고 군림하는 존재였다.

고려시대에 무신란 이후 왕권이 위축되었던 경우에 비하여, 조선 초기에는 강력한 왕권이 행사되었는데, 유능한 왕들이 나오고 육조직계제와 같은 정치체제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간원(司諫院)이 독립된 간쟁기관으로 성립되고 삼사(三司)의 언관기능이 강화되었으며, 왕은 어릴 때부터 유교교육에 순치되어 납간(納諫)이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되었던 상황 속에서 왕권은 커다란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왕은 절대적 위치에서 만기(萬機)를 재결하는 존재로 표방되면서도 실제로는 양반관리의 수장(首長)으로서 존재하였던 것이니, 조선시대에 정2품 이상의 고관을 대감(大監)이라 한 데 대하여 왕을 상감(上監)이라 부른 것도 이 점을 시사하여 준다. 이러한 조선 정치체제의 기반은 중앙집권적 지방통치에 의한 대민수취(對民收取)에 있었다.

전국을 8도로 나누고 그 아래에 300여 개의 부ㆍ목ㆍ군ㆍ현을 설치하여 각각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파견함으로써 유례가 드물게 철저한 지방통치를 수행하여, 일반 백성으로부터 공세(貢稅)와 부역(賦役)을 수취, 양반국가의 경제적 기초로 삼았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조선 양반관료국가의 정치체제는 전대(前代)에 비하여 한층 더 세련되고 정돈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2. 사림정치와 사화ㆍ당쟁

조선건국 후 약 100년 동안은 새로이 양반사회의 기틀이 잡혀지고 양반관료정치가 이루어진 시기였다. 새 지배세력으로서 위치를 굳힌 양반들이 정돈된 관료조직을 운용하면서 조선의 정치를 이끌어갔다. 강력한 중앙집권체제가 수립되었으며, 사회적 안정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실용성을 지니는 찬란한 민족문화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는 새로운 조선왕조체제가 잡혀가는 초창기였고, 세조의 찬탈 같은 커다란 갈등과 부조리가 파생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이 효과적인 양반관료정치를 펼쳐 나가면서 부국강병을 달성함으로써 국가적으로 크게 고양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종대 이후 사림세력(士林勢力)이 대두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 국면에 들어선다.

이때까지 정치를 주도한 양반들은 이미 보수적 처지에 놓인 훈구세력(勳舊勢力)이었는데, 종래 지방에 세력기반을 지니던 재야의 문인ㆍ학자들이 사림으로서 새로운 양반관리가 되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이다. 이들 사림세력은 향촌에 중소지주로서의 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고, 고려 말에 이미 사족(士族)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하여 양반으로 진출할 자격을 지녔던 것이다.

그 동안 성리학에 침잠하여 사장(詞章:시가와 문장)보다는 경학(經學)을 중시하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내세워 스스로의 도덕적 수양과 공도(公道)의 실현에 깊은 관심을 지닌 채 정치의 표면에 나설 기회를 기다려 왔다. 특히, 길재(吉再)의 손제자인 김종직(金宗直)이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던바, 성종 때에 훈구세력의 비대한 권력을 견제하려는 왕이 정책적으로 그들을 대거 등용함으로써 사림세력 대두의 단서가 열렸다.

이렇게 해서 사림세력이 진출하여 마침내 정계를 석권하게 되거니와, 이것은 훈구세력의 퇴장을 뜻하는 큰 변화이지만, 동시에 의리지학(義理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유교정치의 심화와 양반관료체제의 세련화를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림세력이 성장하여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까지 훈구세력과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거듭되었고, 그것이 무참한 사화(士禍)로 나타나고는 하였다. 사화란 사림세력을 이루는 신진의 사류(士類)들이 화를 당하여 죽거나 유배당한 정변으로 연산군(1494∼1506) 때의 무오사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이것은 역사편찬의 기본자료가 되는 사초(史草)에 세조의 찬탈을 비판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실은 것을 빌미삼아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었다.

곧 이어서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중종(1506∼1544) 때에는 기묘사화가 일어났던바, 유교적 도덕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아 향약(鄕約)의 실시와 현량과(賢良科)의 설치를 위하여 힘쓴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몰락을 가져온 기묘사화는 훈구세력이 사림세력에 가한 또 다른 일대타격이었다.

그 뒤 명종(1545∼1567)이 즉위하면서 을사사화가 일어나지만, 끝내 선조(1567∼1608) 때에는 사림세력이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이처럼 사림세력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서원(書院)의 발달과 향약의 실시에 힘입은 바 컸다. 선현(先賢)에 대한 봉사와 교육의 두 가지 기능을 가지는 서원은 이 무렵에 각 지방에서 사림세력의 주도 아래 설립되어 증가하여 갔는데, 향촌에서의 사림세력의 기반을 확고히 하는 구실을 하였다.

향약(鄕約)은 유교적 덕목을 향촌사회에 널리 보급시켜 일반 백성들을 교화시키려는 것이었고, 그 보급운동을 앞장서서 추진한 것이 바로 사림세력이었던만큼 향약의 확대 보급은 그들의 정치적 성장과 긴밀히 연관되었던 것이다.

사림세력의 지배 아래 정치운영방식에도 새로운 모습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공론(公論)을 중시하여 지배층의 여론을 널리 수렴해서 정치에 반영시키고자 한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이미 성종 때부터 삼사의 언론활동이 활발하여지고, 경연(經筵)에서의 정치에 대한 토론이 활기를 띠게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경향이었는데, 이에 이르러 두드러진 양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로는 신진기예한 유신(儒臣)들의 적극적인 정치적 주장이 삼사를 통하여 수합되고, 그것이 삼사의 상소와 그에 대한 처리과정을 거쳐 귀결점을 찾는 형식을 취하였다. 이와 동시에 합의제에 입각한 의정부의 기능이 강화되고, 뒤에는 비변사(備邊司)가 설치되어 중신들의 합의에 따라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결정함으로써 정치운용에서 독단성을 배제하려 하였던 것도 마찬가지의 경향이었다고 하겠다.

다음으로는 이상적인 도학정치(道學政治)를 지향하였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사림들은 먼저 나라를 다스리는 왕을 어진 존재로 하기 위하여 왕에게 성군을 본받도록 끊임없이 요청하였고, 정치에 임하는 자는 도덕적 수양을 쌓은 군자이어야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 군자를 자처하였으며, 또한 백성들의 교화를 위하여 향약의 실시를 꾀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지치주의정치(至治主義政治)는 유교적 도덕이 구현되는 이상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림정치에서는 명분론과 보편주의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림정치의 바탕은 ≪경국대전≫에 입각한 양반관료체제였다. 물론, 육조직계제가 후퇴하고 비변사가 대두되는 등 중요한 변화가 있었지만, 정치기구가 그대로 유지되고 왕의 권능은 여전히 강력하였으며, 양반관료에 대한 인사행정제도는 더욱 주도면밀하게 정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중앙집권적 지방통치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사림정치는 양반관료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의 정치를 폭넓고 활기차게 발전시킨 것으로, 성리학을 통하여 유교적 이념을 심화시킨 점에 특징이 있다고 하겠다.

사림정치가 전개되면서 계파간의 대립이 야기되어 붕당(朋黨)들이 나타나고, 마침내 그들 사이에 격렬한 권력투쟁, 곧 당쟁이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선조 때에 김효원(金孝元)과 심의겸(沈義謙)의 신ㆍ구대립으로 인한 동서분당(東西分黨)에서 시작하여, 곧 동인은 다시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갈라지고 뒤에 숙종(1675∼1720) 때에는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나누어졌으니, 이것들을 사색당파(四色黨派)라고 부른다.

이것들은 때에 따라 더 미세하게 갈라진 경우도 있거니와, 이와 같은 분당작용과 격렬하였던 정치적 대립의 원인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기본적으로는 관직의 보유가 절대적 의미를 가지는 조선 양반관료체제 사회에서, 관료에 나아가기를 희망하는 수많은 사림들 사이의 경쟁 각축과 언제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대립 투쟁이 함께 얽혀 야기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초 동인은 이황(李滉)의 문인이 다수였고, 서인은 이이(李珥) 계통의 인물들이 많았으며, 이황과 이이는 각각 성리학에서 주리파(主理派)와 주기파(主氣派)를 대표하면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와 견해를 달리하였다.

따라서 붕당의 발생에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였으리라 여겨지며, 이와 같이 학파의 대립이라는 양상을 띠게 되므로 당쟁은 각 지방의 서원을 근거지로 삼아 집요하게 오래 계속되었던 것이다.

당파간의 대립 갈등이 가장 심하였던 것은 현종(1659∼1674)으로부터 숙종을 거쳐 경종(1720∼1724) 때에 이르는 시기였다. 인조반정(1623) 이후 서인이 집권하였으나 남인 일부가 조정에 참여하여, 붕당들이 서로 비판하면서도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고, 이러한 상황이 효종(1649∼1659)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복제설(服制說)을 둘러싼 시비가 나타나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격화되다가 마침내 서인이 몰락하고 남인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 뒤 숙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또다시 남인이 물러가고 서인이 들어서는 경신환국이 이루어졌는데, 이 때에 남인의 영수 허적(許積)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다.

그 뒤에도 환국은 거듭되었으며, 그 동안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져 정세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격렬한 대립 투쟁 속에서 노론의 영수 송시열(宋時烈)도 죽어야 하였다. 숙종과 경종 때에는 왕비와 세자와 관련된 왕실문제가 개입되어 당쟁을 더욱 가열시켰던 것이다.

사림정치가 이루어지고 붕당이 발생하여 모순과 대립이 야기되는 가운데,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커다란 외침을 당하여 그에 대처하였다. 임진왜란의 경우, 전후 7년간에 걸친 일본 침입군과의 전쟁을 통하여 조선은 처음 열세를 보였으나, 명의 원군과 각지의 사림을 주축으로 한 의병들의 활약에 힘입어 끝내 격퇴시킬 수 있었다.

또한, 여진이 흥기하여 명을 멸망시키고 중원을 차지하는 과정중에 조선을 침입하고, 조선은 결국 굴복하여 화친을 맺게 된 것이 병자호란이지만, 이것이 조선왕조의 정치적 질서에 별다른 변화를 초래하지는 않았다. 동아시아세계를 뒤흔든 이 두 가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그 체제와 지위에 아무런 변화도 없었던 것은 그만큼 조선왕조의 국가체제가 강고하고, 사림정치와 그것을 뒷받침한 성리학이 무력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뜻한다고 하겠다.

또한, 붕당간의 대립이 가장 격렬하였던 숙종 때에, 농민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고, 국가재정을 충실히 하는 새로운 세법인 대동법(大同法)을 확립시켜 실시하게 되는 것도 사림정치의 일면을 보여주는 주목할 바인 것이다.

3. 세도정치와 민란

극도로 격심하여진 붕당간의 대립은 조선의 정치에 커다란 불안을 초래하였다. 특히, 숙종 때부터 경종 때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환국이 이루어지고, 그때마다 정치적 보복이 가하여져 많은 사람이 죽거나 유배당하고는 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이익(李瀷)과 같은 재야의 실학자들은 붕당론을 개진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였거니와, 당시 복잡한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왕위에 오른 영조(1724∼1776)는 탕평책(蕩平策)을 써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이미 세력을 굳혀 정치적 우위를 확보한 노론뿐만 아니라, 소론ㆍ남인 및 북인의 네 당파의 인물을 고르게 등용하여 격심한 정쟁을 지양하려는 것이 바로 탕평책이었는데, 대체로 온건한 편에 선 이들을 중심으로 완론(緩論)의 탕평을 이루어 어느 정도의 정치적 안정을 이룩할 수 있었다.

영조에 뒤이어 정조(1776∼1800)도 탕평책을 계속하여 썼지만, 척신세력의 배제와 의리(義理)ㆍ명절(名節)의 존중이 표방되는 가운데 준론(峻論)의 탕평이 이루어졌다.

그 동안 정치적 갈등이 간간이 여러 형태로 표출된 바 있지만, 전대에 비하여 영ㆍ정조대는 승평(昇平)의 시기로 간주되었으며, 그 바탕 위에서 규장각(奎章閣)을 중심으로 문화의 꽃이 피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탕평책은 붕당간의 대립과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숙종 이후의 가열된 정쟁은 공론의 수렴을 바탕으로 이상적인 도학정치를 지향하는 사림정치 자체를 파행으로 몰고 가서, 붕당 상호간에는 돌이킬 수 없는 불신의 늪이 자리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조제보합(調劑保合)을 위주로 하는 탕평책은 결국 미봉책에 지나지 않았다.

탕평책이 시행되고 있는 동안에도 이면적으로 붕당간의 대립은 엄존하였으며, 그 위에 시파(時派)와 벽파(僻派)의 대립이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 무렵 새로이 서양문물이 알려지고, 천주교가 전래되어 종교적 신앙의 대상으로 주목받게 되면서 성리학 지상주의를 표방해 온 조선양반사회에는 큰 파문이 일고 있었다.

유교적인 의식을 일체 거부하는 천주교에 대하여 국가에서는 사교(邪敎)로 규정하여 금지령을 내린 바 있지만, 남인 학자들 가운데에는 정권에서 소외된 상태에서 그에 접근하여 신봉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정조가 죽고 나이 어린 순조(1800∼1834)가 즉위하면서 조선의 정치는 새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다. 우선, 탕평책이 표방되면서 호도되었던 정치적 대립관계가 표출되고, 이념적으로 조선 양반사회를 위협하는 천주교에 대한 극단적인 경계심이 발로됨으로써 노론 벽파가 남인 시파를 제거하려는 목적을 담은 채 천주교도들에게 혹독한 박해를 가한 신유사옥이 발생하였다.

다음으로 김조순(金祖淳)이 왕비의 아버지로서 정치권력을 독점하게 되고 그의 일족인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고위관직을 두루 차지하여 영달함으로써 그들이 정권을 농단하는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勢道政治)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종전에도 외척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이 적지 않았지만, 이 경우는 왕의 권능이 영락(零落)된 상태에서 왕비를 매개로 그 일족이 정치를 독점하는 특이한 양상을 띠는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세도정치는 헌종(1834∼1849) 때에는 그 모후의 친족인 풍양 조씨(豊壤趙氏)를 주인공으로 삼아 전개되었고, 철종(1849∼1863) 때에는 다시 안동 김씨가 왕비가 되어 그들에 의한 세도정치가 이루어졌다.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는 노론이었지만, 각기 그들 일족만이 배타적으로 정권을 독점하였던 것인데, 사림정치가 격심한 정권투쟁으로 와해된 뒤에 특이한 조건 아래 성립된 세도정치는 조선의 정치발전 과정을 통하여 커다란 후퇴요, 반동이었다.

세도정치 아래 정치기강은 극도로 문란하여졌고, 국가의 통치체제도 크게 해이하여졌다. 이러한 상태에서 양반 지배층의 불법적 수탈이 자행되었다. 영조 때에 국가는 대민시책으로 균역법(均役法)을 시행함으로써 농민들의 조세부담을 경감하여 준 바 있으나, 그 뒤 세도정치가 행하여지는 가운데 3정의 문란으로 수취체제는 극도로 혼란해지고, 그를 통하여 지방관의 유례 드문 대민수탈이 자행되었던 것이다.

그 동안 조선사회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체제가 크게 동요되고 있었다. 몰락한 양반들이 속출하면서 잔반(殘班)으로서 불만세력을 이루는가 하면, 일부 농민이 부(富)를 축적하여 지위를 향상시키고 노비가 해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사회적 변화 속에서 세도정치의 계속과 양반 지배층의 점증하는 대민수탈은 역사 발전의 대세에 역행하는 것이었으며, 이러한 모순은 결국 민란(民亂)의 발생을 결과하였다. 농민들의 불만으로 인한 반란의 징후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최초의 대규모 민란은 순조 때에 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홍경래(洪景來)의 난이었다.

이것은 잔반들의 주도 아래 이 지역의 상인과 농민들이 참여한 대대적인 반란으로, 한때 청천강 이북의 대부분을 그 지배 아래 넣을 정도였다. 결국, 관군에 의하여 진압되고 말았지만 그 충격과 후유증은 심대하였다.

뒤이어 철종 때에는 경상도 지방에서 진주민란이 일어났다. 이것은 지방관의 악행과 수탈에 항거하여 농민들이 대규모의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역시 그 파급범위가 넓었고, 기세가 맹렬하여 조선의 조정에 커다란 타격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민란은 세도정치에 대한 반항이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조선 양반지배체제에 대한 강한 부정을 뜻하는 것이었으며, 조선의 정치가 심각한 국면에 들어섰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고종(1863∼1907)이 즉위하고, 흥선군(興宣君)이 대원군으로 피봉되어 과감한 개혁정치를 하였다. 조선사회의 피폐와 청(淸)에서의 아편전쟁으로 표출된 서구 제국주의 침투에 대한 깊은 우려와 위기의식이 팽배된 가운데, 대원군은 그 동안 누적된 양반사회의 폐단을 시정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개혁을 강력히 추진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폈다.

이 개혁정치는 조선이 근대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시도된 뜻깊은 움직임이었고, 그 결과는 앞으로 전개될 새로운 정치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민현구>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정치' 항목
   
윗글 [인취사] 충남 아산 인취사 생태기행 "극락정토로세"
아래글 [사상] 유교-조선후기의 유교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780 사료 [조선] 호패법 이창호 2002-06-10 4884
779 사전2 [고대] 단군신화 (한메) 이창호 2003-07-06 4616
778 사찰 [금산사, 법주사]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1 이창호 2001-05-12 4551
777 뒤안길 [고려] 태조 왕건의 가족들 이창호 2001-04-05 4524
776 사전2 [조선] 조선의 지방행정제도 (민족) 이창호 2003-04-28 4512
775 사찰 [인취사] 충남 아산 인취사 생태기행 "극락정토로세" 이창호 2001-07-27 4501
774 사전2 [조선] 조선시대의 정치 (민족) 이창호 2003-04-28 4486
773 사전2 [사상] 유교-조선후기의 유교 (민족) 이창호 2004-03-28 4309
772 시대 [근세] 4. 근세 사회의 성격 (지도서) 이창호 2001-04-05 4288
771 사전2 [고려] 고려 (브리) 이창호 2003-05-10 4191
12345678910,,,8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