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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8 (일)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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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309      
[사상] 유교-조선후기의 유교 (민족)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세부항목

유교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유교(참고문헌)

조선 후기는 밖으로부터 새로운 문물을 접하고 정치·문화적으로 변화와 충격을 받으면서 근대로 접어드는 복잡한 시대였다. 영·정조시대의 약 80년 간은 침체했던 국운을 쇄신해 융성을 도모했던 세종∼성종조에 비길 수 있는 문예 부흥기였다.

영조는 탕평책을 써서 당쟁을 완화시켰고, 정조는 규장각을 세워 당색과 계층에 관계없이 학자들을 모아 국정과 학술문화에 기여하였다.

영조조에는 ≪속대전≫·≪동국문헌비고≫·≪속오례의≫·≪속병장도설 續兵將圖說≫·≪국조악장≫ 등의 전적이 간행되었고, 선기옥형(璿機玉衡)과 측우기 같은 천문기상기구 및 각종 도량형이 정비되었다.

정조조에는 ≪대전통편≫·≪문원보불 文苑螺慮≫·≪동문휘고 同文彙攷≫·≪추관지 秋官志≫·≪탁지지 度支志≫·≪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해동농서 海東農書≫·≪전운옥편 全韻玉篇≫ 등 정치·경제·사회·문화·천문·지리에 걸쳐 다양한 문헌이 편찬되었다.

일반 학계에서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풍이 일어나고 있었다. 영조조에는 이익의 성호학파가 나왔고, 정조조에는 중국의 연경을 오가며 청조문화(淸朝文化)의 영향을 받아 북학파(北學派)가 형성되었다.

조선의 영·정조시대는 청나라의 옹정(雍正)·건륭(乾隆)의 융성기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당시 청나라에는 천주교와 자연과학 등 서양 문화가 들어와서 상당한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영·정조시대에는 실학과 함께 천주교가 들어와 남인 학자들을 중심으로 관심을 끌게 되었다.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서 비판하거나, 유교와 천주교를 절충해 이해하거나, 천주교를 신봉해 유교 의례를 거부하는 등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서학이 들어와 논쟁이 벌어지고 사회 문제화 되었던 것은 전 시대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현상이었다.

영·정조시대를 지나 순조로부터 철종대까지의 60여 년은 왕실의 인척에 의해 세도 정치가 행해졌던 어려운 시대였다. 순조는 11세, 헌종은 7세, 그리고 철종은 19세에 즉위하였다.

순조조에는 안동 김씨, 헌종조에는 풍양 조씨, 철종조에는 다시 안동 김씨 등이 세도를 부리는 동안 나라의 기강은 무너지고 국정은 극도로 황폐화되었다.

또한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 등 삼정(三政)의 문란은 민생을 곤궁하게 하였다. 순조 11년(1811) 홍경래(洪景來)의 난이 일어나고 철종 13년(1862) 진주민란이 일어나는 등 크고 작은 민란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도둑떼가 들끓었다.

한편 천주교의 신봉자들은 날로 늘어났다. 이승훈(李承薰)은 중국에서 세례를 받은 후 1784년에 귀국해 이벽(李檗)·권철신(權哲身)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정조 15년(1791)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은 상제(喪祭)를 폐하고 신주를 불사름으로써 일어났던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처형되었다.

순조조부터는 대규모의 교옥(敎獄)이 일어났다. 순조 때의 신유사옥(1801)과 헌종 때의 기해사옥(1839)이 그것이다. 김대건(金大建)은 헌종 11년(1845)에 마카오에서 신부가 되어 돌아와 그 다음 해에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는 계속 번졌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정약용(丁若鏞)과 김정희(金正喜) 같은 대실학자가 탄생했고, 위정척사와 척양척왜를 주장하는 이항로(李恒老) 및 그를 계승한 화서학파(華西學派)가 형성되었다.

고종·순종조의 약 60년간은 조선 말기의 풍운이 겹치는 시대였다. 1910년 급기야 국권을 빼앗기는 비극을 맞게 되었다. 고종이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이 섭정을 시작하는 등 정세가 변화무쌍하였다.

고종 3년의 교옥, 병인양요(1866), 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 강화도조약(1876), 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 영국의 거문도 점령(1885∼1887), 동학란의 발생과 갑오경장(1894), 청일전쟁(1894∼1895), 을미사변(1895), 아관파천(1896), 대한제국의 성립(1897), 러일전쟁(1904), 을사조약(1905), 고종퇴위(1907) 등 여러 사건이 있어났다.

이러한 난국에 대해 당시의 지성들은 크게 두 가지 입장으로 나뉘어졌다. 보수적 의리학파는 주권 수호를 위해 이념적·정치적으로 외세를 배격했고, 개화파는 국제 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자강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에 나타났던 유교사상의 실학적 입장과 의리학적 입장, 그리고 양명학이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후기 실학은 성호학파·북학파, 그리고 정약용과 김정희의 사상으로 나누어 고찰할 수 있다.

① 성호학파: 이익은 기호학파 남인 학자로서 18세기 실학의 최대 사상가였다. 그는 평생을 학문에 종사하였다. 유교의 경전과 성리학 및 예학에 일가견을 가졌고, 경세치용의 실학을 중심으로 양명학과 서학에 이르기까지 고금중외(古今中外)의 학문에 폭넓은 관심을 보여 ≪성호사설≫을 비롯한 수많은 논저를 남겼다.

그는 유교의 경전인 ≪근사록≫·≪심경≫·≪가례≫ 등 주요 문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질서(疾書)’라는 명칭의 방대한 논술 속에 담았으며, ≪사칠신편 四七新編≫이라는 성리서를 찬술하기도 하였다.

이익은 이학(理學)에 있어서는 이황을 존숭해 ≪이자수어 李子粹語≫라는 퇴계선집을 냈고, 경세적 무실론에서는 이이를 높이 보았다.

그러나 선유의 설을 참고하면서도 자기의 독자적 견해를 가지고 서술하였다. 특히 그의 저술인 ≪곽우록 藿憂錄≫에서는 토지제도와 관련해 영업전(永業田)을 논하는 등 정치·군사·경제·교육 및 기타 현실 문제를 전반적으로 비평하고, 구체적 제안을 제시하였다.

그는 ‘삼얼(三椧)’의 폐해를 들어서 존군억신(尊君抑臣)의 전제주의, 인재 등용에서의 문벌주의, 그리고 문사(文辭) 위주의 과거제도를 비판하였다.

이익은 서학과 관련해 천당지옥설과 같은 종교적 신앙을 부정했지만, 수양론이나 윤리사상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서양의 자연과학과 정밀한 학술에 대해서도 찬탄하였다.

이익은 전통적인 것과 새로운 것을 모두 포용하면서 백과사전적인 폭넓은 지식을 추구하였다.

이익의 후학들은 보다 개방적 자세를 취하였다. 안정복(安鼎福)은 ≪동사강목 東史綱目≫·≪열조통기 列朝通紀≫·≪고사지리 考思地理≫를 지어 우리 나라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하는 등 후기 실학자의 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는 경사(經史)를 근본으로 주자학에 조예가 깊었고, 이황을 높이 존숭하였다. 스스로 말하기를 “공맹의 말은 왕조의 법령과 같고, 정주의 말은 엄사(嚴師)와 칙려(勅勵)와 같으며, 퇴계의 말은 자부(慈父)의 훈계와 같다.”고 하였다. 또한 ≪천학고 天學考≫와 ≪천학문답 天學問答≫을 지어 천주교에 대해 비판하는 입장을 보였다.

신후담(愼後聃)도 일찍이 〈서학변 西學辨〉을 지어 전통 유학의 입장에서 천주교 교리서인 ≪영언여작 靈言起勺≫·≪천주실의 天主實義≫·≪직방외기 職方外記≫ 등을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조선 후기에 있어서 서학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서로서는 최초의 것이며, 대서학 논쟁사의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한편 이익의 학풍을 계승하면서도 천주교에 기울었던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의 제자 권철신과 종손 이가환(李家煥) 같은 학자들은 천주교인이 되었고 신유사옥 때 순교하였다.

또한 정약용과 그 형제들은 이익 문하의 신서파(信西派)들과 교유하였다. 정약용의 매부가 이승훈(李承薰)의 아우 치훈(致薰)이며, 형인 정약현(丁若鉉)의 사위가 황사영(黃嗣永)인 점으로 보아 성호학파의 한 계통이 천주교와 깊은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② 북학파: 북학파란 18세기 후반에 사행(使行)으로 연경에 오가며 청조 문물에 자극을 받아 북학론을 폈던 일군의 소장층 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주로 노론 계통이었는데 특히 정조의 총애 속에서 활발한 학문 활동을 전개하였다.

북학파는 재래의 도학 일변도의 전통에서 벗어나 보다 시야를 넓혀 외래 문화를 수입해 이용후생의 실용적 학풍을 진작하고, 관념적이며 중세기적인 독단을 버리고 자연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사고방식을 수용하였다.

또한 ≪춘추≫의 의미를 재해석해 중국 중심의 중화주의로부터 벗어나 지역적 차이를 두지 않고 개별적 자주성을 존중하였다.

홍대용(洪大容)은 ≪담헌서 湛軒書≫에서 북학파의 새로운 사고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경전을 해석할 때 주자설만을 취해 유일하고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지 않고, 다양한 해석을 포용해 탐구자의 기본 자세와 자유로운 학문 방법을 주창하였다.

학문에서도 의리학을 근본으로 하되, 경세(經世)와 사장(詞章)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 세 가지는 상보적 관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공자와 주자를 존숭하면서도 왕수인을 높이 평가하였다.

홍대용은 과학적 사고방식, 자주적 역사의식, 실용적 학술의 중시, 선진문물의 섭취 등 진취적 태도를 취했던 북학파의 선구였다.

박지원(朴趾源)은 ≪열하일기≫·〈양반전〉·〈허생전 許生傳〉 등에서 그의 사회 의식과 경제 의식을 보여준다. 그는 시대적 모순을 풍자하면서 일체의 형식주의적 허위를 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성인들이 한갓 옛 글만 읽고 있을 것이 아니라, 농공상 등 민생에 필요한 것이면 청조의 것이라도 충분히 배워올 것을 주장하였다.

박지원은 정덕·이용·후생의 삼덕에 대해, “이용을 이룬 다음에 후생을 할 수 있고, 후생한 다음에 정덕을 이룰 수 있다.”고 하여 사회적·경제적 여건의 조성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이를 위하여 특히 농업과 공업의 진흥책을 제언하였다.

박제가(朴齊家)는 ≪북학의 北學議≫에서 청조의 문물을 빠짐없이 소개하고, 이용후생의 정신을 보다 정밀하게 구체적으로 기술하였다. 부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농공상을 모두 진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밖에도 이덕무(李德懋)·유득공(柳得恭)·이서구(李書九) 등의 논저에서도 실학적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학파의 청조 문물에 대한 개방적 태도는 단순히 정치적으로 청국과 우호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북학파는 중국의 전통 문화를 계승·발전시켰던 청나라의 실제적 우수성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다.

청나라는 문화적으로 이미 성리학을 비롯한 유교의 자원을 폭넓게 활용하고 있었다. 청나라 문물의 수입은 성리학의 부정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실제적 유학의 추구를 의미하였다. 박지원의 ≪연행록 燕行錄≫과 ≪북학의≫ 서문을 보면 중국의 전통 문화를 발전시켰던 청나라의 문명에 대한 북학파의 인식을 알 수 있다.

청나라에는 전통적 성곽·궁실·인민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정덕·이용·후생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주정장주(周程張朱)의 학문이 보존되었고, 한당송명(漢唐宋明)의 양속미제(良俗美制)가 계승되었다.

비록 청나라는 오랑캐 민족이었지만, 중화문화(中華文化)를 계승하고 서양의 과학 기술 등을 수용해 나라를 부강하게 하였다. 따라서 북학파는 중화문화를 존중하는 가운데 실용적 태도를 중시했다고 판단된다.

③ 조선 말기의 실학사상(정약용과 김정희)

정약용은 조선 후기 최대의 실학자로 불린다. 그의 학문 규모와 방대한 저술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할만하다. 그는 기호학파 남인으로 성호계통의 신서파(信西派)이고, 그의 여러 형제들이 순교하거나 귀양살이하였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천주교와 깊은 관련이 있다. 육경사서(六經四書)의 경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했고, 1표2서(一表二書 : 經世遺表·牧民心書·欽欽新書)를 지어 운용의 학을 기술하였다.

〈오학론 五學論〉에 보이듯이 그는 도·불은 물론 공자와 맹자를 제외한 유교의 어느 학파에도 심열성복(心悅誠服)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한편 서학에 대한 자발적 비판은 보기 어렵다.

그의 방대한 저술은 경학에 관한 것이 제일 많고, 정치 조직·지방 행정·형정(刑政) 등에 관한 경세론, 그 밖에 의학·농학 및 기타 과학 기술에 관한 것이 있다.

도학 또는 성리에 대해서는 주자와 퇴율을 절충해 이해했지만, 기본적으로 성리학의 이론 체계에서 벗어나 보다 경험주의적인 접근을 보였다. 경학의 전개에서도 양명학적 해석 방법을 원용하였다.

정약용은 천주교의 이해를 바탕으로 경전 속의 상제사상(上帝思想)을 농도있게 서술함으로써 유교를 종교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정약용이 보는 상제는 ‘하천지총(荷天之寵)’의 인격천(人格天)이자 ‘영명주재지천(靈明主宰之天)’으로서, 성리학 태극이나 다른 무엇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영명무형지체(靈明無形之體)를 부여받았으니, 그것이 도심이고 도심의 소리가 곧 하늘의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정약용은 정치사상에서 민주·민권 의식을 고취하였다. 모든 사람이 양반이 됨으로써 양반이 없어져야 할 것이라든가, 임금을 정함에 있어서도 하향적 권위주의(上而下)를 지양하고, 상향적으로 뽑아올리는 것(下而上)이 원리에 맞는 것이라고 하는 등의 민주주의적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인식은 정약용에게 이미 근대적 정신이 깃들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정희는 일찍이 박제가를 사사하였다. 그는 연경에 가서 청대 실학의 거유이며 고증학의 대가인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남으로써 학문적 자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김정희의 학문적 범위는 경학·사학·시문으로부터 금석·고증·서화를 포함해 매우 광범위하였다. 성호계통의 학문을 이어받은 정약용이 천주교의 소양을 갖춘 대학자였다면, 김정희는 통유(通儒)이면서도 불교적 소양을 겸하고 있었다.

완당 김정희에서 실학의 주지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이다. 그는 과거의 전통적 학문을 배제하는 입장이 아니라, 각기의 진수를 올바로 파악해 상보적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그의 학문을 가리켜 한송절충론(漢宋折衷論) 또는 한송불분론(漢宋不分論)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는 의리지학과 고정지학(考訂之學)을 동시에 취하였다. “학문하는 도리는 한학과 송학의 경계를 반드시 나눌 것이 없고, 정현(鄭玄)과 왕필(王弼), 정자와 주자의 장단을 비교할 필요도 없으며, 주자·육상산·설문정(薛文靖)·왕양명의 문호를 다툴 것도 아니다. 다만 심기를 편안히 가라앉히고 널리 배우고 독실히 배우는 가운데, 오로지 ‘실사구시’라는 한 마디에 힘써 행해야 한다(實事求是說).”고 하였다. 그러나 학문에는 선후본말이 있다고 보아 고증을 수단으로 의리를 목적으로 삼았다.

이와 같이 김정희는 모든 학문에 개방적이면서도 공허한 이론(空疎之術)이나 선입견(先入之言)을 배제하고, “오직 실사에서 옳은 것을 구하는” 자세를 취하였다.

김정희의 사상은 한국 실학의 방법론을 매우 의미 있고 완미(完美)하게 귀결시킨 탁견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전통을 널리 포용하면서도 예를 중시하고 전인성(全人性)을 추구했던 완당 김정희의 실학은 근본 유교의 본지에 상당히 접근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조선 후기 실학자로 일찍이 경사에 밝고 한송(漢宋)을 함께 존숭했던 ≪존주휘편 尊周彙編≫의 저자 성해응(成海應)과, 말기에 ≪기측체의 氣測體義≫를 써서 유교 이론을 경험론적으로 재구성함으로써 근대적이며 실증적인 정신을 발휘했던 최한기(崔漢綺)를 꼽을 수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역사·지리·어문·금석 등 과거에는 묻혀 있던 국학 분야를 탐구해 수많은 저술을 내었다. 역사 방면으로 안정복의 ≪동사강목≫, 한치윤의 ≪해동역사≫, 이긍익의 ≪연려실기술 燃黎室記述≫이 있다.

지리에는 이중환의 ≪택리지≫, 정약용의 ≪강역고 疆域考≫, 성해응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어학에는 신경준의 ≪훈민정음운해≫, 유희의 ≪언문지 諺文志≫가 있다.

금석학에는 김정희의 ≪금석과안록 金石過眼錄≫이 있고, 농림생물에는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정약전의 ≪자산어보 玆山魚譜≫가 있다. 의학에는 정약용의 ≪마과회통 麻科會通≫, 이제마(李濟馬)의 ≪동의수세보원 東醫壽世保元≫ 등이 있다.

둘째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의리사상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순조 때부터 고종이 즉위하기 전까지 60여 년은 세도 정치가 행해지고 민란으로 소요를 겪었으며, 천주교의 거듭된 교옥과 동학의 최제우(崔濟愚)가 처형당하는 등 나라 안팎으로 환란이 거듭되었다.

성호학파와 북학파의 시대를 거쳐 정약용과 김정희 같은 석학이 유배 중에 학문을 닦았던 것을 제외하곤 사상적으로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을 때 후기 성리학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홍직필(洪直弼)·임성주(任聖周)·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 등이 이 시대의 인물이며, 그 뒤를 이어 이진상(李震相)·전우·곽종석(郭鍾錫) 등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많은 학자들이 나왔다.

또한 서세동점(西勢東漸)과 한민족의 국가적 위기 앞에서 뚜렷한 이념과 행동으로 대응해 의리학의 학통을 이루었던 화서학파가 있었다. 이항로는 화서학파의 종사(宗師)였다. 그의 문하에서 김평묵(金平默)·유중교(柳重敎)·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과 같은 구국 항쟁의 선비들이 배출되었다.

19세기 성리학적 전통을 지켜온 조선은 정치적으로 서양과 일본의 위협을 받았고, 사상적으로 서학(천주교)과 부딪쳤다. 이러한 현실에 대응하는 성리학자의 태도 역시 다양하였다.

실학파가 청나라와 교섭하면서 경세치용과 이용후생의 주장을 폈고, 한말에는 개화파가 그 정신을 계승하면서 서양 및 일본의 발달된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의 자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외부로부터의 위압과 이들 개화파의 주장에 의해 조선은 결국 문호를 개방하였다. 또한 일본 및 구미제국과 외교 관계를 맺으면서 국가 체제를 근대적으로 변경시키고 있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갑신정변―갑오경장―을미사변―을사조약 등으로 마침내 국권은 상실되었고, 개화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김옥균(金玉均)은 상해에서 피살되었다. 유길준(兪吉濬)은 국권 상실 이후 죽었고, 박영효(朴泳孝)는 일본국 후작을 거쳐 귀족원 위원이 되었다.

비록 〈유교구신론 儒敎求新論〉의 박은식(朴殷植)은 3·1운동 후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했지만, 결국 개화파의 노력은 결국 국권 상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한편 화서학파는 유교의 의리사상에 입각해 외민족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고자 노력하였다. 화서학파의 기본 논리는 척사위정과 척양척왜였다. 이항로는 〈벽사록변 闢邪錄辨〉을 썼고, 문인 유중교와 김평묵은 ≪송원화동사합편강목 宋元華東史合編綱目≫을 편찬하였다.

이항로는 서세(西勢)로 말미암은 문화적·사상적 위협과 군사적·경제적 침략에 근본적으로 항거할 것을 주창하였다. 그는 서양의 정치 군사적 침략뿐만 아니라, 천주교를 반윤리적·반국가적 사상으로 배척하였다.

1839년의 기해사옥과 1866년의 병인양요를 경험한 적 있었던 이항로는 ≪일성록≫에서 말하기를, “서양인들이 들어와 사학(邪學)을 전파하는 이유는 자기의 동정자를 심어놓고, 그들과 표리상응해 우리 나라의 허실을 정탐하고, 후에는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아름다운 우리의 풍속을 진창 속에 쓸어 넣고, 우리의 재물을 약탈해, 한량없는 탐욕을 채우려는 데 있다.”고 하였다.

또한 “만약 교통의 길이 한번 열리면 2∼3년에 전하의 백성은 서양화되지 않는 자가 거의 없을 것이요……상인들이 가지고 있는 서양물건을 찾아내서 이를 거리에서 불태우고, 그 뒤 무역하는 자에 대해서는 외적과 교통하였다는 형률로 시행하게 하오(호군 이항로 진시무).”라고 말하였다.

그 뒤 1871년(고종 8)에는 신미양요가 발생해 외세의 파고(波高)는 더욱 높아지고 시대의 상황이 급박하였다. 김평묵과 유중교의 척양론(斥洋論)은 더욱 강경하였다.

유중교에게 양이(洋夷)는 이적(夷狄) 보다 못한 금수와 귀매(鬼魅)였다. 그는 〈어양론 禦洋論〉에서 “사단(四端)의 덕과 오품(五品)의 윤(倫)과 예악형정의 교(敎)야말로 사람이 사람 되고 나라가 나라 되는 까닭이며 천하가 천하 되는 근거이다.……이것이야말로 인도이며 서양의 가르침은 금수의 도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갑신년의 변복령(變服令)에 대해 그것이 군령(君令)이라 하더라고 좇을 수 없다고 하였다.

강화도조약에 즈음해 김평묵은 일본은 양인(洋人)의 앞잡이 이었고, 이제 양인과 다를 바 없다고 하였다. 그는 척화론(斥和論)을 펴다가 지도(智島)로 유배되기도 하였다.

최익현과 유인석에 이르면, 사상적 논의의 단계를 지나 행동적 의거의 단계에 이른다. 최익현은 임진왜란 직전 조헌이 그랬던 것처럼 도끼를 들고 대궐에 나아가 “왜의 구적(寇賊)은 과연 어떻게 보는 것이 바로 아는 것인가? 양적(洋賊)의 앞잡이임을 아는 것이다. ……오늘날 왜인이 오는 것을 보면 양복을 입고 양포(洋砲)를 쓰며, 양선(洋船)을 타고 다니니 이것은 다 왜양(倭洋)이 일체라는 명백한 증거이다.”고 하며 5가지 조목을 들어 상소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일본에게 약세인 상태에서 그들과 화의를 한다는 것은 눈앞만 보는 고식적 계책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교역을 하면 상대방의 공업 생산품을 우리의 원자재와 교역하게 될 것이고 이러한 교역은 우리의 경제적 파탄을 일으키게 된다.

셋째 일본은 겉으로는 왜이지만, 실제는 양적이니 이들과 교류하면 천주교가 들어와 백성들이 사학에 빠져 인륜이 무너지게 된다.

넷째 왜인들이 상륙하면 우리 재물과 부녀를 짓밟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된다. 다섯째 병자호란 때의 굴욕적 화평은 청나라가 중국의 법도를 따랐기에 우리 나라를 보존할 수 있었으나, 일본은 재화와 여색만 알고 의리를 모르는 금수이므로 경우가 전혀 다르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일본과의 화의는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 것이라고 논파했고, 그 이후에 발생할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욕을 규탄하였다.

갑신정변과 갑오경장, 을미사변과 을사조약으로 연결되어감에 따라 최익현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비판하고 일본의 배반을 규탄해 의병을 일으켰지만, 대마도로 붙들려가 단식으로 항거하다 순국하였다.

유인석은 조선은 이미 국가 위기에 직면했다고 보아 그 대응 방법으로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첫째 의병을 일으켜 역당(逆黨)을 깨끗이 쓸어내는 것(擧義掃淸), 둘째 떠나가서 옛 제도를 지키는 것(去之守舊), 셋째 목숨을 버려 뜻을 이루는 것(致命遂志)으로 되어 있다. 그는 중국·소련 등 국내외에 기지를 만들어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인석은 ≪우주문답 宇宙問答≫에서 “남의 나라를 뺏으려면 먼저 남의 마음을 빼앗는 것이다. 마음을 빼앗으면 토지를 빼앗는 것은 어렵지 않다.”고 하여 민족의 자주 정신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다.

또한 “일본은 항상 서법(西法)을 가지고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이니, 먼저 열모(悅慕)하는 마음을 얻어서 개화하고, 개화함으로써 독립하게 하나니, 독립이란 보호를 뜻하고 보호는 합방을 뜻하는 것이다. 대개 시작할 때에는 이(利)로써 유인하고 끝에 가서는 위압으로써 강압하는 것이니, 겉으로는 서법의 이름을 빌리고 안으로는 무한한 욕심을 부리는 것이다.”라고 비판하였다.

유인석은 13도의군도총재(十三道義軍都總裁)가 되었고, 나라를 잃자 고종을 모셔다가 망명정부의 수립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만주에서 항일전을 펴면서 국권 회복을 위해 진력하다가 서거하였다.

최근세의 한국은 서양이 침투하면서 대혼란의 시대를 겪었다. 이러한 격변기를 맞이해 조선 후기의 실학과 의리학 그리고 근대 의식이 단합된 역량으로 포용·승화되었더라면 새로운 철학을 창출하고 나라 발전을 이룩해 민족의 앞날을 개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망은 성취되지 못한 채 역사는 흘렀다. 이제 후세들은 선조들의 저력과 가능성을 거울삼아 남아 있는 과제들을 풀어야 할 것이다.

<이동준(李東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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