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24 (월) 12:05
분 류 사전2
ㆍ조회: 952      
[조선] 조병세 (브리)
조병세 趙秉世 1827(순조 27)~1905

한말의 문신·순국열사.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치현(穉顯), 호는 산재(山齋). 아버지는 홍천현감 유순(有淳)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급제, 사관(史官)이 되어 1864년(고종 1) 실록청 도청낭청(都廳郎廳)으로서 〈철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1874년 함경도암행어사, 1877년 대사헌이 되고 이듬해 호조참판에 임명되고 동지사은부사(冬至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한성부좌윤을 거쳐 승지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의주부윤, 다시 대사헌을 지냈다. 1887년 공조판서를 거쳐 1889년 우의정에 오르고 1893년 2월 좌의정이 되었으나 이후 정치적 변동이 크게 일어나자 잠시 정계를 떠나 가평에 은퇴했다. 1896년에는 총호사(摠護使)가 되었고 민비 국장 때 만장제술관(輓章製述官)으로 참여했으며 뒤에 다시 원로대신으로서 중추원의장과 의정부의정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으로 활동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에 항거하기 위하여 79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상경하여, 을사5적의 처형을 주청(奏請)하려고 했으나 처음부터 일본군의 방해로 고종과의 면담이 거절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1월 26일 심상훈(沈相薰)· 민영환(閔泳煥)·이근명(李根命)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궁중에 들어와 5적을 처형하고 새로 충량(忠良)한 사람을 뽑아서 외부대신에 임명하고 각국 공사와 협의하여 5조약을 파기할 것을 상소했다.

또한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 및 5개국 공사에게 각각 글을 보내어 독립과 영토보존의 원조를 요청하고 조약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각국 공사들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고종도 듣지 않고 다만 물러가라고 하자 다시 대한문(大韓門) 앞에서 고종의 허락을 받기 전에는 궁중을 물러가지 않겠다고 하면서 거적을 깔고 계속해서 을사조약의 파기를 주장하다 일본헌병에 강제연행되었다.

이후 민영환이 대신 소두(疏頭)가 되었으나 민영환도 잡혀 평리원(平理院)에 연금되었다가 특명으로 풀려난 뒤 비분을 참지 못해 29일 자결했다. 가평 향제(鄕第)에 강제 추방되었으나 30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표훈원(表勳院)에서 여러 사람과 다시 상소했다. 또다시 일본군이 가마에 태워서 강제 추방하자 가마 안에서 음독하여 조카 민희(民熙)의 집에 당도하여 죽었다.

이때 각국 공사관에 독립의 권리를 회복시켜 주도록 요청하는 투서와 함께 국민들에게는 충의로서 독립의 기초를 다질 것을 촉구하는 유서를 남겼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윗글 [민족] 한민족 (민족)
아래글 [조선] 이인영 (민족)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420 사전2 [고려] 묘청 (한메) 이창호 2010-09-04 949
419 사전2 [조선] 사창 (브리) 이창호 2008-04-14 949
418 사전2 [조선] 민종식 (두산) 이창호 2003-03-28 948
417 사전2 [고려] 예종 (두산) 이창호 2010-09-03 947
416 사전2 [고려] 묘청 (두산) 이창호 2010-09-04 944
415 사전2 [고려] 숙종 (민족) 이창호 2010-09-03 944
414 사전2 [고려] 척준경 (민족) 이창호 2010-09-01 944
413 사전2 [조선] 허위 (한메) 이창호 2003-03-23 944
412 사전2 [조선] 숙종 행장 3 (실록) 이창호 2011-01-27 943
411 사전2 [고려] 척준경 (브리) 이창호 2010-09-01 939
1,,,31323334353637383940,,,8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