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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2-02-19 (화)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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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663      
풍납토성 관련 신문기사 (한겨레신문)
“풍납토성 백제토기 성립은 2-3세기”

한겨레신문 / 2002년 1월 14일 (월) 13:39

한성 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 왕성으로 유력시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토기는 제작기술 유형에 따라 5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발전양상으로 볼 때는 3단계 구분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또한 이 토기들을 X선 회절분석을 거쳐 경도(굳기), 소성도(구운 온도), 색조, 흡수율 등을 종합 검토한 결과, 이른바 백제토기는 새로운 제작기술이 도입되고 기종이 눈에 띄게 다양화하는 단계인 서기 2-3세기 중반 무렵으로 생각된다는 견해도 아울러 제시됐다.

이는 풍납토성 남쪽 1㎞ 지점에 자리한 몽촌토성에 대한 지난 80년대 발굴 성과를 토대로 구축된 '백제토기 성립은 3세기 중,후반 이후'라는 기존 학계 통설을 1-2세기 가량 앞당긴 것으로 새로운 논쟁을 촉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97년 풍납토성 주거지에 이어 99년 풍납토성 성벽을 직접 발굴한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 최성애씨는 최근 한양대대학원에 제출한 석사학위 심사통과 논문 '풍납토성 토기의 제작유형과 변화에 관한 일(一)고찰'에서 이같이 주장했다.

그는 종전 백제토기 연구가 토기의 기술적 특성에 관한 구체적 고찰없이 개별 기종에 대한 (형식) 분석에만 치중, 이를 토대로 '백제토기'를 인식하고 편년(연대)을 설정함으로써 문제를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이는 몽촌토성 발굴을 토대로 성립된 '백제토기설'을 정면 비판한 것이다. 최씨는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몽촌토성보다 훨씬 이른 시기 및 광범위한 시기에 걸쳐 더욱 다양한 기종을 출토한 풍납토성 토기를 제작기술 유형이라는 측면에서 분류를 시도했다.

그 결과 형식, 기능 등에 따라 14개군(群) 30개 기종으로 일단 분류된 풍납토성 토기는 제작기술에 따라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 △연질 타날문 토기 △연질 무늬없는 토기 △회색 경질 토기 △회청색 도질 토기의 5가지 유형으로 설정됐다. 이 토기들은 다시 시기별 발전 양상에 따라 연질→도질→경질의 3단계로구분이 가능하다고 논문은 지적했다.

또 토기가 지하에서 출토되는 층위별 분포를 볼 때 풍납토성 토기는 맨아래층에서는 청동기시대 무늬없는 토기와 크게 다를 가 없는 풍납동식 무문토기 일색을 이루다가 2층에서는 새로운 제작기술을 도입한 다양한 토기가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지표면에서 가까운 3-4층으로 계속되고 있으며 나아가 섭씨 1천도 이상 온도로 구운 토기가 자주 나온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런 성과를 볼 때 이른바 '백제토기'는 새로운 제작기술이 도입되고 그에 따른 각종 토기가 등장하는 풍납토성 제2기로 보아야 하며 그 시기는 주거지를 비롯한 다른 유적과 관련성을 고려할 때 2-3세기 무렵이라고 최씨는 주장했다.

(서울/연합뉴스)

“풍납토성은 재론여지 없는 백제 왕성”

한겨레신문 / 2001년 11월 23일 (금) 14:32

한강이 북쪽으로 돌아흐르는 평야지대에 거대하게 쌓아올린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백제 왕성이며 이것이 처음 축조된 시기는 기원 전후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 97년 이래 풍납토성 발굴에 참여해온 신희권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사는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 주최로 23일 개막된 '동아시아 1-3세기의 주거와 고분' 국제학술대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신씨는 '1-3세기 한강유역 주거와 백제의 형성'이라는 발표문을 통해 발굴 결과 풍납토성은 "축조기법으로 볼 때 중심 토루를 중심으로 안팎에서 비스듬히 판축토루를 덧붙여 나가는 방식이 중국 고대 도성 성곽에 비견될 만하며 출토유물 또한 기존에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으로 지목된 몽촌토성을 훨씬 능가한다"고 말했다.

풍납토성 축조시기와 관련해 그는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졌음이 분명한 1토루에서 기원 전후에 유행하는 이른바 풍납동식 무문토기 출토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으로 보아 빠르면 기원전 1세기, 늦어도 기원후 2세기 이전에 등장했다"고 지적했다. 신씨는 이어 "1토루를 덮고 있는 2차, 3차 성벽도 1토루와 축조시기가 그다지 차이가 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풍납토성은 적어도 서기 200년 무렵에는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축조가 완료됐다"고 주장했다.

이런 견해는 백제는 서기 3세기 중.후반 고이왕 때에야 제대로 된 국가체제와 영역을 갖추었다는 기존 한국학계 통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최근에도 풍납토성 발굴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낸 보고서나 발굴단 주축 멤버인 신희권씨가 발표한 몇 편의 논문을 통해 이날 발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주장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을 둘러싼 학문 외적인 여러 '압력' 때문에 풍납토성 발굴보고서나 학계에서는 풍납토성 문제, 특히 이것이 백제 왕성인지 아닌지에 대한 접근은 대단히 우회적이거나 간접적으로 표현되는 경향이 짙었다. 그러나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신씨는 "풍납토성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백제 초기 왕성"이라는 말로 한성도읍기 백제 왕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쟁에 사실상 종지부를 찍으려 시도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맥락에서 신씨는 또한 풍납토성 축조시기에 대해 그동안 내세우던 '3세기 무렵 축조 완료'라는 막연한 연대관을 버리고 기원 전후 무렵에 초축이 이뤄졌고 늦어도 서기 200년 무렵에는 지금과 같은 거대한 성곽이 완성됐다고 분명한 선을 그었다.

풍납토성이 한성백제 왕성이라는 데 대해서는 관련 학계에서 대체로 받아들이는 추세지만 축조 시기에 대해서는 백제가 이른바 고대국가에 돌입한 시기가 언제인가라는 문제와 맞물려 격렬한 논쟁을 유발할 것으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풍납토성은 BC 1세기에 건설된 계획도시'

한겨레신문 / 2001년 7월 24일 (화) 09:12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 백제왕성으로 지목되는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나 다름없었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 일시에 많은 사람이 밀려들면서 건설된 일종의 계획도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로써 풍납토성은 만주지방 부여(혹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온조집단이 남쪽으로 내려와 기원전 18년 무렵 마한의 서북쪽인 한강유역 땅 100리 가량을 얻어 백제를 세웠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강하게 뒷받침하는 고고학적 증거로 평가된다.

이런 사실은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가 지난 97년 풍납토성 안쪽 동남쪽 일대 대규모 재건축아파트 터를 발굴한 성과를 담아 최근에 펴낸 「풍납토성Ⅰ」 보고서를 통해 확연해졌다. 보고서에 따르면 풍납토성의 경우 거의 똑같은 입지조건을 지닌 인근 경기 하남 미사리 및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과는 달리 신.구석기시대나 청동기시대 유적.유물이 단 1종도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풍납토성 일대가 선사시대에는 황무지였음을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들어서면서 적갈색무늬없는토기를 사용하는 집단이 갑자기 등장해 각종 유적과 유물을 남기기 시작한다.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에서도 지하 가장 밑바닥에서 확인되고 있고, 따라서 이곳에 가장 먼저 정착한 집단이 남긴 것으로 주목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는 유적 곳곳에서 대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풍납토성의 이런 사정은 1999년 이래 지난해까지 대대적인 발굴이 있은 풍납토성 안쪽 한복판 경당지구도 마찬가지였다. 경당지구 또한 청동기시대 이전 선사 유적과 유물은 거의 없고 적갈색무늬없는토기로 시작되는 유물층이 확인됐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 출토 유물중 시기가 가장 빠른 적갈색무늬없는토기 출현 빈도에 특히 주목하고 있다. 양이 적다면야 풍납토성에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서서히 사람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풍납토성에서 확인되는 적갈색무늬없는토기의 양이 너무 많다. 따라서 연구소측은 풍납토성에 이 토기가 다량 등장하는 기원전 1세기 무렵 정착촌 혹은 신도시 건설 같은 대변혁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풍납토성과 마찬가지로 한강을 바로 옆에 끼고 있으며 같은 충적평야지대에 자리잡은 인근 미사리와 암사동 유적에서는 기원전 3천-4천년 무렵 신석기시대 유적과 유물을 비롯해 곳에 따라 청동기시대 유적도 확인되고 있어 뚜렷한 대비를 보인다. 풍납토성이 또 하나 특이한 점은 한성이 고구려군에 무너지는 서기 475년을 고비로 그 이후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유적과 유물 또한 거의 없다는 점이다.

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이 번성한 기간이 「삼국사기」가 기록하고 있는 한성 도읍기(기원전 1세기 이래 475년까지)와 겹치고 있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연구소가 풍납토성을 가장 강력한 하남위례성 터로 지목하는 이유도 이런 증거들때문이다.

“풍납토성은 몽촌보다 앞선 백제왕성”

한겨레신문 / 2001년 7월 20일 (금) 13:12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제11호)은 지난 10년 동안 백제왕성으로 유력시되던 인근 몽촌토성보다도 시기적으로 2단계나 앞선 백제왕성 즉, 하남위례성이 유력하다는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보고서가 20일 발간됐다. 지난 97년 토성 안쪽 2군데 재건축아파트 예정지에 대한 발굴성과를 정리한 이번 「풍납토성Ⅰ」 보고서는 국배판 2권에 총 1천2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1권은 본문과 도면을, 2권에는 관련 사진과 출토유물에 대한 몇 가지 자연과학 분석결과를 담고 있다.

보고서는 주거지 19기를 비롯한 유구 70여기와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 등 총 1천200점에 달하는 중요한 유물의 설명과 실측도면 1천300장 외에 발굴당시 광경과유물 출토 상황 및 유물 복원상태를 담은 사진 1천600장을 수록하고 있다. 연구소는 발굴결과 풍납토성에는 기원전 1세기 무렵에 이미 사람이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 침공으로 백제가 웅진으로 도읍을 천도하기까지 한성도읍기 백제 전기간을 표방하는 주거지와 유물이 다량 확인됐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이들 유적과 유물을 층위별로 모두 4단계의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즉, 가장 빠른 1기(기원전 1세기-기원후 2세기)는 풍납동식 무늬없는 토기와 3중 환호 유구가 대표적이며, 2기(2세기 전반-3세기 전반)에는 25평을 비롯해 평면 6각형 모양 움집 주거터 17기가 속하며, 3기(3세기 중반-4세기 중반)는 회청색 경질토기와 회청색 도질토기가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중국 도자류도 섞여 있다는 것이다. 475년 무렵까지인 마지막 4기는 발달된 토기가 다종 다양하게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로 미뤄 볼 때 풍납토성 제3기는 1980년대에 대대적으로 발굴된 몽촌토성 문화층 중에서도 가장 빠르다는 이른바 '몽촌1기'에 해당되며, 따라서 풍납토성은 몽촌토성보다 (축조)시기로 볼 때 2단계나 빠르다는 사실은 출토 유물뿐만 아니라 방사성탄소연대 측정결과로도 뚜렷이 확인되고 있다고 보고서는 덧붙였다.

보고서는 풍납토성 내부에서 확인된 주거터가 대체로 길이 10m, 폭 7m 안팎으로지금까지 확인된 백제시대 주거지로는 가장 큰 규모와 정형화된 틀을 이루고 있음은 물론 출토유물에서도 고급화된 기종의 토기류와 기와, 전돌 및 중국계 도자기가 다량 포함돼 있는 점으로 보아 풍납토성의 위상이 지금까지 확인된 다른 유적보다 월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금까지 그 위치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한성도읍기 백제왕성 하남위례성일 가능성이 한층 커졌다고 보고서는 추정했다. 이번 보고서가 발간됨에 따라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 아래 3세기 중.후반 고이왕 이전 초기사가 말살. 왜곡된 백제사는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해졌으며 특히 몽촌토성 발굴 성과를 기초로 3세기 중.후반을 출발로 삼았던 백제 토기편년 또한 붕괴됐다.

풍납토성에 대한 보고서로는 1967년 당시 서울대 김원룡 교수가 토성 북쪽에 판구덩이 8개에 대한 시굴 보고서가 있고 지난 97년 선문대 이형구 교수의 토성 전반에 대한 실측조사 보고서가 있을뿐, 정식발굴보고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지난 99년 동쪽 성벽에 대한 발굴성과를 담은 발굴보고서를 「풍납토성Ⅱ」라는 이름으로 올해 안에 펴낼 예정이며 풍납토성 축조시기 등에 대한 전반적인 검토는 이 두번째 보고서로 미뤘다.

(서울/연합뉴스)

풍납토성 해자 추정지 `발굴없는 고층건축'

한겨레신문 / 2001년 7월 13일 (금) 12:08

문화재청의 어이없는 판단착오로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사적 11호) 주변지역 중 해자가 있었을 곳으로 추정되는 성곽 바로 바깥쪽 일대에서 발굴없는 고층아파트 건축이 이뤄질 전망이다. 13일 문화재청과 서울시에 따르면 문화재위원회가 지난 4월 풍납토성 일대 소규모 건축행위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이후 재건축아파트를 비롯해 그동안 밀린 각종 건축허가신청이 잇따르고 있다.

이 중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99년 여름 발굴 조사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 바깥쪽과 인접한 풍납동 336 일대 강동연립, 409 일대 동산연립, 337 일대 우신연립등 세 군데의 재건축아파트 건축계획이 포함돼 있다. 아파트 건축이 추진되는 곳은 고대성곽 중 평지성 둘레에서 대부분 확인되는 해자가 있을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풍납토성은 해자 추정지역의 발굴이 없었던 데다 아파트건축이 추진되는동쪽 성벽 바깥쪽이 99년 문화재연구소가 절개 조사한 지점과 맞닿아 있어 발굴조사가 반드시 이뤄져야 할 곳으로 지적돼 왔다. 그러나 문화재청은 해자추정 지역 등 토성 일대 건축범위에 관련한 지난 5월2일자 서울시 질의에 대한 같은달 23일자 답변서에서 `공사 중 관계전문가의 입회 등'을 포함한 매장문화재 훼손 방지 방안을 내려보냈다.

기념물과장 전결처리된 이 답변서는 해자추정지역 건축범위에 대해 "건축허가시에는 사전에 신중한 검토를 통해 공사 중 관계전문가의 입회 등으로 매장문화재가 훼손되지 않도록 함은 물론 매장문화재 확인시 관계 전문가의 검토를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임"이라고 적었다.

더구나 기념물과는 답변서 작성에서 매장문화재 발굴문제를 관장하는 유형문화재과나 국립문화재연구소같은 관련 부서 혹은 관련 기관과 단 한 차례 협의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같은 답변에 따라 서울시는 문화재위원회 및 문화재청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는 '공사 중 관계전문가 입회' 방침으로 정하고 K대학 박물관과 이를 위한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공사 중 관계전문가 입회'란 터파기 공사를 하되 발굴 관련 전문가에게 공사 현장을 계속 감시케 한다는 것으로 엄밀한 의미의 발굴은 아니다.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안 문화재청은 매장문화재 훼손이 불가피하고 그 실효성이 의심받는 '관계전문가 입회'가 아닌 사전 발굴을 위해 서울시 등 관련 당국과 협의에 나서고 있다.

(서울/연합뉴스)

풍납토성 구덩이 한곳서만 토기뚜껑 217개체 확인

한겨레신문 / 2001년 5월 16일 (수) 14:28

한성시대(BC 18-AD 475년) 백제 왕성이 확실한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안쪽에서 확인된 경당지구의 대형 구덩이 한 곳에서만 굽있는 잔(고배.高盃) 113개체와 전형적 백제토기로 분류되는 세발달린토기(삼족기.三足器) 60개체가 쏟아진 것으로 확인됐다. 또 이들 고배나 삼족기를 덮는 데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뚜껑도 이 구덩이에서 모두 217개체라는 기록적인 수치가 집계됐다.

이와 더불어 전형적인 중국 제품으로 알려져 있고 지금까지 옛 백제 전역에서 손바닥 크기보다 작은 조각으로만 10점밖에 보고되지 않은 유약바른 도기인 시유도기가 동전무늬를 새긴 이른바 전문도기(錢文陶器)를 비롯해 온전한 모양으로 6점이나 복원됐다. 이런 사실은 재건축아파트 건축을 앞두고 경당지구 전체 2천300평 중 1천200평을 발굴한 한신대박물관이 이곳 출토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밝혀졌다.

경당지구를 발굴한 한신대 권오영 교수는 오는 18일 대전 한밭대 향토문화연구소(소장 심정보)가 풍납토성을 주제로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 이런 내용을 담은 경당지구 발굴 중간 성과를 학계에 보고할 예정이다. 권 교수가 대회 주최측에 미리 제출한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조사의 성과'라는 글에 따르면 지난 13일 이곳이 보존될 것을 우려한 일부 아파트 재건축조합원이 파괴해 버린 9호 대형 구덩이(길이 13.5m, 폭 5.2m, 깊이 3m)의 경우 출토 유물을 정리한 결과 고배 113개체, 삼족기 60여개체, 뚜껑 217개체를 확인했다.

이 수치는 지금까지 옛 백제 영역 각지에서 확인한 한성시대 출토 토기 전체를 합친 것과 맞먹는 것이어서 학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 더불어 이곳 9호 구덩이에서는 종전 고고학계에서 전형적인 백제토기의 출발점으로 잡았던 검은색이 도는 반질반질한 토기인 흑색마연토기와 장식성이 강한 대형뚜껑류, 입이 크게 벌어진 토기인 광구호 및 기와 조각이 다량 확인됐다.

이 구덩이는 '大夫'(대부)라는 글자가 적힌 토기를 비롯해 제사 등 신성한 의식에 희생물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12마리분 말머리뼈가 나와 초미의 관심을 끌었으나 지난해 파괴됐다. 권 교수는 전체 숫자가 집계되지는 않지만 현재 추산으로는 9호 구덩이에서만 모두 1천개체나 되는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성시대 대(對) 중국 무역 및 외교 관계를 밝혀 줄 중요한 유물로 평가되는 중국 서진시대 시유도기의 경우 현재까지 완형으로 6개가 복원되고 있으나 여기에 포함되지 않은 조각들이 수십개나 되고 문화유적 파괴사건으로 발굴이 중단된 상태이기 때문에 풍납토성 지하에는 얼마나 많은 이런 중국제 도기가 매장돼 있을지 추정조차 불가능하다. 어떻든 이런 성과만으로도 풍납토성이 한성시대 중심부였던 왕성이었음이 다시 한번 입증되고 있다.

이와 관련, 이번 풍납토성 학술대회를 주관하고 있는 심정보 한밭대 교수는 "고배나 삼족기 같은 유물이 풍납토성만큼 집중 출토된 곳은 내 경험으로는 부여 왕궁리 유적밖에 없다"면서 "이번 학술대회를 계기로 풍납토성은 한성시대 백제 왕성으로 확실히 자리매김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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