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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01 (목) 21:54
분 류 사전2
ㆍ조회: 3675      
[삼국] 고구려 (두산)
고구려 高句麗

졸본(卒本) 지방에서 일어나 한반도 북부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무대로 하여 발전한 고대국가.

I. 개관

전설에 따르면 BC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佳江:渾江) 유역에 건국하였다고 한다. 고구려는 일찍이 기마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여 졸본 지방에서 일어나 동방 침입의 요로인 퉁거우[通溝]로 옮긴 뒤 낙랑군과 임둔군(臨屯郡)의 교통로를 단절시키는 등 한족(漢族)과의 투쟁과정에서 강대해졌다.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된 이후 현도군(玄郡)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태조왕(太祖王:재위 53∼146) 때부터 강력한 대외발전을 꾀하였다. 태조왕은 현도군을 쳐서 푸순[撫順] 방면으로 축출하였고, 요동군(遼東郡)과 낙랑군(樂浪郡)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하였으며, 임둔군의 옛 땅에 자립한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복속시켜 동해안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는 왕위의 형제상속제를 확립하여 고대국가체제를 갖춤으로써 고구려의 실질적인 시조가 되었다.

고국천왕(故國川王:재위 179∼197)은 왕위의 부자상속제(父子相續制)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동천왕(東川王:재위 227∼248) 때는 중국의 위 ·오(吳) ·촉(蜀) 3국의 대립시기였는데, 이때 동천왕은 요동군의 실권자 공손 연(公孫淵)과 통교하고 위나라를 견제하는 등 국제적 안목을 넓혔으나, 242년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다가 관구 검(毌丘儉)의 반격을 받아 서울인 환도성(丸都城)까지 함락되었다.

봉상왕(烽上王) 때는 선비족인 전연(前燕)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두 차례 받는 등 위기를 겪다가 313년 미천왕(美川王:재위 300∼331) 때는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과 대방군을 정복,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lll. 영토확장과 전성기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재위 371∼384) 때 불교 공인과 태학(太學) 설립(372), 율령(律令) 반포(373) 등으로 국가체제 정비와 정치적 안정기반이 구축되었다. 이와 같은 단계에서 즉위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은 정복 군주로서 백제의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였고, 신라 내물왕(奈勿王)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後燕)을 쳐서 요동(遼東)을 차지하고 숙신(肅愼)을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장수왕(長壽王)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제도의 정비와 대외정책의 확대 등으로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는 중국의 남 ·북조(南北朝:北魏 ·宋)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수도를 고조선의 문화 유산지인 평양으로 천도하여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고 국력을 신장시켰다.

남하정책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羅濟同盟)을 체결하였다. 472년(개로왕 18) 백제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의 남침을 막기 위해 군사를 청하기도 하였다. 장수왕의 남하정책의 목표는 한강 유역이며, 그 요충지는 충주(忠州) 지방이었다. 475년 결국 그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蓋鹵王)을 패사(敗死)시켜 고국원왕(故國原王)의 한을 풀고 아산만(牙山灣)까지 진출, 한강 유역을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熊津:공주)으로 옮기고,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장수왕의 뒤를 이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494년 부여(夫餘)를 복속시켜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지배하고 중국과 자웅(雌雄)을 겨루었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와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가 당시의 광대한 판도를 밝혀주고 있다.

lV. 수 ·당과의 투쟁

6∼7세기 초의 정세를 보면, 589년 나제동맹이 체결되고 신라 진흥왕(眞興王)이 북진정책을 취하였으며, 위(魏) ·진(晉) ·남북조로 분열된 중국을 589년 수나라가 통일함으로써 고구려는 요동(遼東)에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아시아의 정세는 돌궐(突厥) ·고구려 ·백제 ·일본을 연결하는 남북 진영과 수(隋:후에는 唐)나라와 신라가 연결하는 동서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상태에 놓였다.

고구려 영양왕(陽王)은 진흥왕의 북진 정책으로 한강 유역 및 함경도 일대를 상실하자 남하정책을 포기하고 서진정책(西進政策)을 단행, 요서(遼西) 지방을 공격함으로써 수나라와 충돌하였다.

598년(영양왕 9) 수나라 문제(文帝)는 수륙군(水陸軍) 30만으로 침입하였으나 고구려의 반격과 질병 ·풍랑으로 퇴각하였다. 그 뒤 수나라 양제(煬帝)는 돌궐족을 복속시킨 뒤, 612년 113만 대군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요동성(遼東城:遼陽)을 공격하였으나, 고구려군의 강력한 항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양제(煬帝)는 다시 약 30만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왔으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살수(薩水)에서 섬멸함으로써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이었다.

이로써 수나라는 618년 내란이 일어나서 망하고 당(唐)나라가 건국되었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와 대립하고 돌궐 등과는 내왕하였기 때문에 당나라 태종(太宗)이 즉위하면서 고구려에 침입하려는 야심을 보이자, 고구려도 다롄[大連]과 부여성(눙안)을 연결하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쌓기 시작하였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정권을 잡은 뒤부터는 당나라에 대한 태도가 더욱 강경하였고, 당나라와 연결한 신라를 백제와 더불어 자주 공격하였다. 한편, 당나라는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西域)을 평정하였으며, 고구려의 세력권 내에 있던 거란족을 꾀어 고구려를 배반하게 하는 등 침공태세를 갖추었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이적(李勣:李世勣) ·장량(張亮)을 앞세우고 30만 군으로 요하를 건너, 50만 석의 군량이 있는 요동성을 점령하여 전진기지로 삼고 안시성(安市城)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약 60일 사투(死鬪)하여 당나라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 뒤에도 당나라는 2차 ·3차(647년 ·648년)에 걸쳐 이적 ·우진달(于進達) ·설만철(薛萬徹) 등을 보내어 침입하였으나 실패하였다.

V. 정치제도

고구려의 정치적 기반으로는 소노부(消奴部) ·계루부(桂婁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의 5부족 연맹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처음에는 소노부에서 왕이 나왔으나 태조왕 때부터 계루부의 고씨(高氏)가 왕위를 대신하였다. 절노부는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왕비족으로 등장하였고, 전 왕족인 소노부, 왕족인 계루부 ·절노부의 대가(大加:嫡統大人)에게는 고추가(古雛加)라는 특별 칭호를 주었다. 이는 신라의 갈문왕(葛文王), 백제의 길사(吉師)와 같이 귀인(貴人)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초기의 관제는 왕 아래에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이하 주부(主簿) ·우태(優台) ·승(丞) 등의 관리가 있었고, 왕과 제가(諸加)는 사자(使者) ·조의(衣) ·선인(先人) 등의 가신(家臣)을 거느렸다. 평양 천도 이후 행정조직과 관등(官等)조직이 정비되어 수상인 대대로(大對盧) ·태대형(太大兄) 등 10여 관등이 정비되었고, 수상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선거로 뽑았다. 수상인 대대로는 대막리지(大莫離支) ·태대막리지(太大莫離支)라는 별칭이 있었다. 관등명을 보면 형(兄) ·사자(使者)가 붙은 것이 많았는데, 형은 연장자라는 뜻으로 족장의 자리를 계승한다는 의미이며, 사자는 지방의 조세징수자의 뜻을 의미하는 것이다.

행정구역은 중앙을 동 ·서 ·남 ·북 ·중(내)의 5부로 나누어 대가가 통치하였다. 지방행정구역은 5부의 연맹체가 5부의 행정구역으로 전환되었다. 각 부 밑에는 여러 성(城)이 딸려 있었다. 각 부의 장을 욕살(褥薩), 성(城)의 장을 처려근지(處閭近支) 또는 도사(道使)라고 불렀다. 이 지방장관은 관리와 군대를 거느리고 있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겸직하였다. 특수행정구역으로 평양성 ·국내성(國內城:通溝) ·한성(漢城:載寧)을 삼경(三京)이라고 하였다.

군사제도는 군사조직을 행정조직과 일치시켜 욕살 ·도사 들은 자기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국가에서 동원할 때는 군대 편성에 대모달(大模達) ·말객(末客) 등의 군관이 되어 지휘하게 하였다.

Vl. 사회경제

3세기경 고구려의 총 호수는 3만 호, 지배계급 수가 1만여 명, 멸망 전의 총 호수는 69만 7,000이고, 성곽 수는 176에 달하였다. 지배층인 왕족과 관료는 정치 ·군사 ·교육 등을 담당하고 생산에 종사하지 않았으며, 농민 ·노비 등은 하호(下戶)라고 하여 생산에 종사하는 피지배층이었다.

삼국시대에는 고리대금업도 성행하여 평민을 노비로 몰락시키는 폐단이 생기자, 194년 고국천왕은 이를 막고자 을파소(乙巴素)를 등용하고 진대법(賑貸法)을 마련하여 빈민구제에 힘썼다. 부족국가시대의 제가회의(諸加會議)는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고구려 사회는 법률이 엄하여 반역자는 불로 태우고 목을 잘랐으며, 살인자와 전쟁에 패한 자는 목을 잘랐고, 도둑질을 한 자는 12배의 배상을 물렸으며, 우마(牛馬)를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조세제도(租稅制度)는 곡식으로 매호(每戶)에서 받는 조(租)와, 베[布]나 곡식으로 개인에게서 받는 인두세(人頭稅)가 있었다. 산업은 직조기술이 발달하였고, 일본에 전파된 물품과 기술을 보면 철공 ·종이 ·묵필 ·맷돌이며 모피류가 수출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역은 주로 남 ·북 중국 및 유목민족인 북방족들과 하였다.

Vll. 문화교육

고구려의 문화는 소수림왕(小獸林王) 때인 372년에 불교가 수입되고 이와 더불어 서역(西域)과 중국의 문화가 들어오면서 넓은 세계를 인식하게 되었으며, 373년에는 율령(律令)이 반포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372년에 설립되어 오경(五經) ·삼사(三史) 《삼국지(三國志)》 《문선(文選)》 등을 가르쳐 한학(漢學) 교육이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5세기 초에 지방에 둔 경당(堂)은 사립학교로 경전(經典)과 기마(騎馬) ·궁술(弓術) 등의 무술을 가르쳤다.

한학의 보급과 발달로 국사(國史)가 편찬되었는데, 《유기(留記)》(편찬자 ·연대 미상) 100권과, 600년(영양왕 11)에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의 《유기》 신집(新集) 5권 등이 편찬되었으나 전하지 않는다.

Vlll. 시가와 음악

고구려의 시가(詩歌)로는 유리왕(瑠璃王)의 《황조가(黃鳥歌)》, 법정사(法定師)의 《영고석(詠孤石)》, 을지문덕의 오언시(五言詩) 등이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에 전하며, 관(管) ·현(絃) ·격타악(擊打樂) 등 17종의 악기가 있었다. 왕산악(王山岳)은 양원왕(陽原王) 때 진(晉)나라 칠현금(七絃琴)을 개량하여 거문고를 만들었고, 100여 곡을 작곡하였다.

Vllll. 미술

고구려 예술의 특징은 와당(瓦當)의 귀신상(鬼神像)과 사신도(四神圖)의 벽화에서 볼 수 있듯이 힘과 정열이 넘치고 있는 점이다. 특히 미술은 고분(古墳:굴식돌방무덤)에서 그 대표적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무용총 ·수렵총 ·각저총(角抵塚) 등의 초기 벽화는 고졸(古拙)하고, 감신총(龕神塚) 등 중기의 그림은 섬세하며 사실적(寫實的)이고, 사신총(四神塚) 등 후기 벽화는 웅대하며 건실하다.

강서고분(江西古墳)에 그려진 사신도(四神圖)는 벽화 중에서 최우수 작품으로 흑 ·백 ·청 ·주홍 ·갈색 등으로 빛깔의 조화미는 물론, 힘과 패기가 넘치며, 쌍영총(雙楹塚)의 기마상(騎馬像) ·남녀입상(男女立像), 30여 인물행렬도와 풍속도는 당시의 풍속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X. 불교

고구려의 불교전래는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의 왕 부견의 명으로 순도(順道)가 불경(佛經)과 불상(佛像)을 가져왔고, 374년 동진의 승려 아도(阿道)가 들어와 불법을 전파하면서 시작되었다.

고국양왕(故國壤王:재위 384∼391) 때는 영(令)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도록 권장하였고, 광개토대왕 때인 392년에는 평양에 9개의 절을 지었으며, 395년에는 동진의 승려 담시(曇始)가 들어와 활발히 전도하였다. 평원왕(平原王) 때 승려 의연(義淵)은 위(魏) ·제(齊)나라의 양대 고승인 법상(法上)에게 불교사를 배웠다.

영류왕(榮留王) 때 혜관(慧灌)은 625년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개조(開祖)가 되었고, 평원왕 때 담징(曇徵)은 일본의 호류사[法隆寺]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으며, 지묵 ·맷돌 등을 전하였다. 특히 혜량(惠亮)은 신라에 들어가 진흥왕 때 국통(國統) ·주통(州統) ·군통(郡統)의 교단조직에 공헌, 초대 국통이 되었으며, 영양왕 때 보덕(普德)은 연개소문의 도교(道敎) 장려로 백제에 들어가 열반종(涅槃宗)을 개창(開創)하였다. 고구려에서 유행된 종파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인 삼론종이었다.

X l. 도교

고구려의 도교(道敎) 전래에 관한 기록은 624년(영류왕 7) 당나라 고조 이연(李淵)이 도사(道使)를 파견하여 도법(道法)을 강론하도록 한 것으로 되어 있다. 643년 보장왕(寶藏王) 때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책으로 숙달(叔達) 등 도사 8명이 입국하였다. 이때 불교를 탄압하였으므로 보덕이 백제로 망명하는 등 불교세력이 쇠퇴하였다.

X ll. 풍속

고구려인은 검소 ·청결하고 상무적(尙武的)이며 기사(騎射)에 능하였다. 가옥은 왕궁과 관청 ·사원 등에만 기와를 덮고, 일반 민가는 초가(草家)였으며 온돌을 사용하였다. 귀족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고 하여 깃[羽]과 금으로 장식한 비단으로 된 관을 썼으며, 관리는 등급에 따라 복색(服色)이 다르고 무사(武士)는 절풍(折風)이란 건을 썼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은 치마를 입었으며, 남자는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통넓은 바지를 입었고 상투를 틀었다.

상류층에서는 바둑 ·투호(投壺) ·축국(蹴鞠) 등 대륙식 오락을 즐겼고, 하류층에서는 무도 ·음악 ·석전(石戰) ·씨름 등을 즐겼다. 장례(葬禮) 풍속은 껴묻거리를 관 속에 넣는 후장(厚葬)의 풍속이 있었다. 특히 10월에는 시조신(始祖神)을 모시는 동맹(東盟)이란 제전을 열어 부족의 전통을 재확인하고 결속을 강화하였다.

X lll. 멸망

668년(보장왕 27) 나 ·당 연합군과의 싸움에 패함으로써 주몽 이래 700여 년을 이어온 고구려 왕조는 막을 내렸다. 당시의 내정은 70여 년에 걸친 수 ·당나라를 비롯한 거란 ·신라와의 투쟁으로 인한 인적 ·물적 손실은 많은 국력을 소모시켰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독재는 민심을 혼란시켰고, 666년 연개소문이 병사한 후 남생(男生) ·남건(男建) ·남산(男産) 세 아들의 불화로 지도층이 분열되었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는 12성(城)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고, 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는 등 내분이 심화되었다.

이러한 기회를 이용한 나 ·당 연합군은 668년 김인문(金仁問)이 이끈 27만의 신라군과 이적 ·설인귀(薛仁貴)가 이끈 당나라 군사 50만으로 평양성을 공격 ·함락시켰다. 이때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설인귀로 하여금 통치하게 하였고, 고구려의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 42주(州)로 나누어 지배하는 한편, 2만 8200호를 당나라로 강제 이주시켰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엔싸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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