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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5-02 (금)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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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고구려 (브리)
고구려 高句麗

삼국시대 고대국가 가운데 하나. 기원 전후 시기에 성립하여 한반도 북부와 만주 일대를 무대로 존속하다가 668년에 멸망하였다.

개관

초기의 고구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지도성립과 발전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의 독로강 및 동가강 일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 지역은 깊은 계곡과 산이 많고 하천 연변에 좁은 평야가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청동기·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이러한 계곡과 평야에 '나'(那)라고 부르는 단위 정치체들이 다수 성립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정치세력의 존재는 BC 128년경에 위만조선에 불만을 품고 한(漢)에 투항한 예군(濊君) 남여(南閭)가 거느린 28만여 명의 집단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물론 이 집단은 하나의 강력한 결집력을 갖는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 정치체들의 느슨한 연맹체였다.

그런데 한나라의 고조선 침략과정에서 고구려지역에도 BC 107년 현도군이 설치되었다. 현도군의 설치는 다른 3군현보다 1년 뒤의 일인데, 이것은 이 지역 토착세력의 저항으로 인한 것이었다. 따라서 한에 의한 현도군의 설치·운영은 처음부터 큰 어려움이 많았다. 결국 고구려족의 거센 저항으로 현도군은 BC 75년에 흥경(興京)·노성(老城) 방면으로 중심지를 옮기게 되었다.

현도군 소속 3현 중에 수현(首縣)으로서 고구려현이 보이는데, 이를 통해 BC 1세기 무렵에 이미 '고구려'란 이름이 존재했고, 그 세력이 이 지역의 중심적 세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때 고구려란 국가가 성립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아마도 고구려족에 의해 각 지역에서 정치체가 성립되었고, 그들이 종족적으로 결집되어가고 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들 각 지역의 단위정치체들이 바로 나(那) 집단들이었으며, 이들은 점차 소국으로 발전했다.

이 소국들은 서로간의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보다 큰 세력으로 결집되어갔고, 최후로 남은 다섯 세력집단이 연맹하여 고구려 국가를 구성하였다. 이러한 연맹체적인 고구려 국가의 성립은 늦어도 현도군을 축출한 BC 1세기경에는 달성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 고구려 연맹체의 주도권은 송양 집단의 소노부가 장악했으나, 곧 부여지역에서 뒤늦게 이동해온 주몽 집단의 계루부에게 연맹장의 위치를 넘겨주게 되었다. 주몽 집단은 한군현과의 투쟁에서 중심적 역활을 수행하며 연맹체의 주도권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는 1세기 태조왕대에 이르러 나부체제(那部體制)를 통해 고구려족 전체를 통솔하는 보다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다. 태조왕 이전까지만 해도 아직 주변에는 고구려 연맹체 안으로 통합하지 못한 다수의 나국(那國:소국)이 존재했으나, 태조왕 때 조나(藻那)·주나국(朱那國) 등을 최후로 흡수·통합하면서 5부체제를 확립하였다.

5부체제 안에서 각 부의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대외적인 무역권·외교권을 박탈하여 고구려 왕이 이를 관장하였다. 현도군과의 교역에서 고구려 왕이 관장한 책구루(溝婁:현도군 경계에 세운 성)의 존재가 이를 증명한다. 나아가 대내적 자치권도 일정하게 제약되어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리들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만 했다. 각 부의 독립성이 그만큼 축소되었고, 고구려 왕의 통솔력이 상당한 정도로 강화된 것이다.

태조왕대 5부체제의 구축으로 고구려는 국가의 면모를 일신하면서 국력이 강화되었다. 태조왕이 일명 '국조왕'(國祖王)으로 불리거나 시조왕을 뜻하는 '태조'(太祖)란 이름을 갖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태조왕 이후 고구려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내부갈등이 심화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중앙집권력이 강화되었다. 그리하여 고국천왕대 이후부터는 부(部)의 명칭도 고유한 호칭이 아니라 단순히 방위의 명칭으로 점차 바뀌어져갔다. 또 왕위계승도 형제상속에서 벗어나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었다.

한편 이와 같은 지배체제의 정비와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에 따라 군사동원력이 확대됨으로써 대외적인 팽창도 크게 이루어졌다. 먼저 농산물·해산물 등 물자가 풍부한 동옥저·동예 지역을 복속시킴으로써 고구려지역의 취약한 경제적 기반을 보강했다.

나아가 중국 군현에 대한 조직적인 대규모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때의 대외진출은 영토팽창이라기보다는 물자와 인민에 대한 약탈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물론 고구려의 대중국투쟁이 용이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242년(동천왕 16) 고구려는 요동과 낙랑군을 연결하는 교통로의 요충지인 서안평(西安平)을 기습 공격했다가,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毋丘儉)의 역습을 받아 수도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동천왕이 동옥저로 피신하는 등의 곤경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때의 타격으로 고구려의 대외활동은 한동안 위축되었다.

전성기의 고구려. 브리태니커백과사전 지도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와 대외팽창

4세기에 접어들어 고구려는 그동안의 사회발전으로 집권적 국가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다.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사회분화가 확대되면서 나부체제는 해체되어갔으며, 중앙집권력이 강화되었다. 5부의 지배자들은 중앙귀족으로 편입되었고, 부민들은 국가의 공민(公民)으로 편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국력을 기른 고구려는 중국이 5호16국시대의 혼란기로 접어들자 본격적인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313년( 미천왕 14)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하여 한반도 안에서 중국 군현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비옥한 농경지대인 이 지역의 확보는 고구려의 국가발전에 중요한 경제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어 고구려는 요동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선비족의 모용씨(慕容氏)가 세운 전연(前燕)과 치열한 각축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2차례 전연의 침입을 받아, 342년(고국원왕 12)에는 수도가 함락되는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요동 진출이 용이하게 이루어지지 않자 고구려는 남쪽으로 정복활동의 방향을 돌렸으나, 새롭게 성장하는 백제와 대결하다가 371년에는 평양성 전투에서 고국원왕이 전사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미천왕 이후의 대외팽창이 서와 남에서 좌절되고 오히려 커다란 위기에 처하게 되자, 고구려는 국가체제의 정비와 새로운 지배질서의 구축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소수림왕 때의 율령 반포·태학 설립·불교 수용 등이 그것이다.

불교의 공인은 보편적인 정신세계의 통일을 위한 노력이며, 율령의 반포는 일원적인 지배질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제도적 개혁이었다. 또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제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보다 안정되고 강력한 집권적 지배체제를 세울 수 있었다.

다음 광개토왕· 장수왕 연간의 비약적인 발전은 이러한 토대 위에서 가능하였다. 광개토왕 때 고구려는 서쪽으로 후연을 제압하여 요동을 장악했고, 동북으로는 숙신과 동부여를 정복하여 남만주 일대를 차지하였다. 또 남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 일대까지 세력을 뻗쳤다.

이어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하고 본격적인 남진책을 추구하여 한반도 중부 일대를 완전히 손에 넣었다. 광대한 영토를 개척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지배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강대해져 동북아시아에서 일대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그리하여 '광개토왕릉비'와 '중원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스스로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중국이 남북조로 나뉘어 대립하였고 북방에서 유목국가인 유연(柔然)이 세력을 떨쳤으며, 동방에서 고구려가 또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5세기 중반 이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고구려도 남북조나 유연과 다각도로 외교관계를 맺으면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며 발전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물론 중앙아시아 지역과도 교류함으로써, 문화적으로 다양한 제반 문물을 수용하면서 독자적이고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후기의 변동과 멸망

6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새로운 변화의 국면을 맞게 되었다. 먼저 대내적으로는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장기간에 걸쳐 귀족세력 사이에 치열한 정쟁이 계속되었다. 이 과정에서 안장왕과 안원왕이 피살되고 많은 귀족들이 숙청되었으며, 일부 세력이 외국으로 이탈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귀족세력의 어느 한 파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일정한 타협 아래 귀족연립체제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주서 周書〉 고구려전이나 〈한원 翰苑〉의 고려기(高麗記)에 "최고 관직인 대대로(大對盧)가 3년마다 선임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귀족들이 각기 병사를 동원하여 싸우며, 왕이 이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이러한 귀족연립체제는 말기까지 계속되는데, 이는 최후의 집권자였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군사를 일으켜 반대파 귀족들을 숙청하고 정권을 장악한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대내적인 정국의 변화 속에서 고구려는 대외적으로도 여러 차례 위기를 맞게 되었다. 먼저 551년(양원왕 7)에는 백제와 신라가 동맹하여 고구려의 혼란한 내분을 기회로 한강 유역을 기습 공격하여 백제가 하류지역을, 신라는 상류지역을 차지하였다.

때마침 고구려의 서부 국경선에서도 북제(北齊)가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오고, 이어 신흥세력인 돌궐(突厥)이 유연을 격파하고 동쪽으로 밀려오면서 고구려에 적극적인 공세를 가하고 있는 상황이라, 고구려는 미처 남쪽을 돌볼 여력이 없어 신라와 밀약을 맺고 한강 유역에 대한 신라의 지배권을 인정하였다.

이에 기름진 한강 하류지역을 탐내던 신라는 동맹국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유역을 독차지하였으며, 이어 관산성전투에서 백제군을 대패시킴으로써 새로운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세변동으로 고구려는 더이상 한반도에서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없게 되었으며, 이후 삼국 간의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한편 6세기말에 들어 대륙의 국제정세는 급격히 변동되었다. 580년 북주를 뒤이어 건국된 수(隋)나라가 589년에는 남조 진(陳)나라를 정복하여 300여 년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중국에 통일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그동안 다원적이었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는 붕괴되었다.

수나라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로의 재편을 기도했다. 먼저 유연을 대신하여 북방을 차지하고 있던 돌궐을 격파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켰다. 이어서 요동지역으로 힘을 뻗치게 되니 고구려 세력권 안에 있던 거란족이 동요하여 그 일부가 수나라에 귀속하는 사태가 일어났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부터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고구려는 세력이 현실적으로 미쳐오게 됨에 따라 적극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8년(영양왕 9)에 고구려군은 요서지방을 선제 공격했고, 이에 분노한 수의 문제(文帝)는 대군을 파견했으나 요하도 건너지 못하고 패퇴하고 말았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煬帝)도 고구려가 돌궐과 손을 잡고 수를 견제하려고 시도하자, 612년에 100만이 넘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후에도 2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이 계속되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내는 전쟁의 여파로 일어난 내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 색인 : 고구려의 대중국전쟁).

수나라 멸망 후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唐)이 건국되자 고구려는 다시 당과 대립하게 되었다. 초기에는 양국이 일시적으로 평화관계를 지속하기도 했으나, 당나라가 돌궐을 복속시키자 상황이 달라졌다. 당나라도 수와 마찬가지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세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이때 고구려에서도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고 대당 강경책을 추구하게 되면서 고구려와 당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한편 고구려와 백제의 양면공격에 시달리던 신라는 당과 군사동맹을 맺게 되고, 이로 인해 당과 신라의 동맹세력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을 시도하게 되었다. 645년(보장왕 4) 당 태종에 의한 고구려 침공은 안시성전투의 패배로 실패했으나, 그뒤에도 당군의 산발적인 공격이 계속되면서 고구려의 국력은 피폐해졌다.

660년에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백제가 멸망하자, 고립된 고구려는 멸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연개소문이 죽은 후 그 아들들의 내분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결정적으로 약화되어, 668년에 마침내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고구려 왕실계보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정치체제

관등제도

초기의 고구려는 5개의 부가 연맹한 형태로서 부체제가 정치운영의 기본구조였다. 즉 중앙정부는 계루부 왕실을 중심으로 각 부의 수장층으로 구성되어 왕권의 통제를 받고 있었으나, 각 부는 여전히 독자적인 정치체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성격은 초기 관계조직(官階組織)에 반영되었다. 왕은 중앙의 관계조직으로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鄒加)·주부(主簿)·우태(優台) 등을 거느리고, 그 아래에 하급 관원으로서 사자(使者)·조의(衣)·선인(先人) 등을 두고 있었다. 이중 패자·우대 등에는 중앙정부에 참여한 각 부의 가세력(加勢力)이 임명되었다.

그리고 고추가는 왕실을 구성한 계루부의 왕족이나 전왕족이었던 소노부(消奴部) 및 왕비족인 절노부(絶奴部)의 대가(大加)를 우대하는 관직이었다. 각 부의 대가들도 자기 소속의 사자·조의·선인 등의 관인을 별도로 거느리며 부를 통괄하고 있었다. 물론 각 부 관인들의 명단을 중앙에 보고해야만 되었고, 또 왕 소속의 사자·조의·선인과는 위계는 같지만 동열에 설 수 없었다.

이러한 각 부의 독자적인 관료조직의 존재는 초기 고구려 정치체제의 다원적·중층적 성격을 보여준다. 또 국내외의 중대사는 각 부의 대가들로 구성된 제가회의(諸加會議)에서 결정되었다. 이처럼 초기의 권력구조는 가연립체제로서, 왕은 그 대표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3세기말 이후에는 정복활동이 활발해지고 사회분화가 진전되면서 점차 부체제가 해체되고 일원적인 지배체제를 갖추어갔다. 이 과정에서 중앙의 정치조직이 개편되고 지방의 지배조직도 정비되었다. 먼저 중앙의 관계조직은 '형'(兄)계 관등과 '사자'(使者)계 관등이 분화되어 일원적으로 구성되었다.

형은 과거의 족장세력들이 중앙귀족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관등으로 분화·개편된 것이며, 사자는 본래 조세수취 등 행정실무를 담당한 관료로 성장한 세력을 여러 등급으로 나누어 개편한 것이다. 중기의 전제적 왕권은 이러한 일원적 관등제도에 기초한 관료체제의 운영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6세기 이후에 귀족연립정권이 성립되면서부터는 조의두대형 이상의 관등에 오른 귀족들이 국정을 장악했으며, 최고위직인 대대로는 3년마다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또 막리지(莫離支)라는 집권적 관직이 등장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도 후기 정치체제의 특징이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고구려 말기의 14관등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관직제도

초기에는 중앙에 좌보(左輔)·우보(右輔)나 국상(國相)·중외대부(中畏大夫)의 관직이 있어 국내를 통괄했으며, 지방은 대가들이 직접 지배하였다. 그러나 4세기 이후 집권적 지배체제가 갖추어지면서 중앙 관직체제도 확대·개편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무관으로는 군사령관에 해당하는 대모달(大模達)이 있어 조의두대형 이상이 취임했고, 그 아래에는 1,000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말객(末客)이 있어 대형 이상이 취임했다. 지방은 성(城)을 단위로 행정구역이 편제되었는데, 큰 성에는 중국의 도독에 비견되는 욕살(褥薩)이 있었고, 그 아래 성에는 자사(刺史)에 비할 수 있는 도사(道使)가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작은 성에는 가라달(可邏達)·누초(婁肖) 등의 지방관이 있었다.

사회구성

초기 고구려 사회의 기초단위는 읍락이었다. 읍락의 구성원은 호민(豪民)과 하호(下戶)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하호는 가난한 일반민(一般民)을 가리킨다. 여러 읍락을 지배하는 자는 가계층(加階層)이었다. 가계층은 세력의 크기에 따라 대가(大加)와 소가(小加)로 나뉘었는데, 이들은 수천에서 수백에 이르는 가호(家戶)를 지배했다.

〈삼국지〉 고구려전에는 "나라 안의 대가(大家)는 농사를 짓지 않고, 좌식자(坐食者)가 1만여 명이다. 하호가 식량과 고기와 소금을 날라와 공급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대가와 좌식자가 곧 고구려 지배층이었다. 이 지배층에는 다양한 부류들이 있었는데, 왕족 및 족장 출신, 전문 행정요원, 전사집단, 부유한 농민층이 포함되었다.

하호는 피지배층으로 이들에게 예속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생산력이 발전하고 사회분화가 진전되면서 읍락사회는 점차 해체되었다. 읍락의 구성원인 일반민도 다양하게 분화되면서 호민으로 성장하는 계층이 있는가 하면 자영농으로서 스스로의 가계를 영위하는 계층이 있으며, 토지를 잃고 빈농이 되어 용작(傭作)을 하는 계층도 있었다. 그중에는 귀족의 예속민이나 노비로 전락하는 자도 있었다.

이러한 분화에 따라 읍락사회는 해체되고, 이에 따라 읍락사회에 기반을 두고 있던 가계급의 지배력도 약화되었다. 이에 국가권력이 직접 일반민에게까지 미치게 되면서 일반민은 공민(公民)으로 편제되었다. 이들이 양인 농민층이었다. 집권적 지배체제는 이러한 광범위한 양인 농민층을 지배하면서 성립·유지될 수 있었다. 따라서 국가는 양인 농민층의 확보를 위해서 진대법을 실시하거나 각종 진휼제도를 베풀어 양인 농민층의 몰락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국가는 일반농민에게 일정한 부담을 부과했다.

고구려 후기에 일반농민은 국가에 대해 인세(人稅)로 포 5필과 곡식 5섬을 바쳤으며, 빈부에 따라 3등급으로 나뉘어 가호마다 조(租)를 차등있게 바쳤다. 또 15세 이상의 일반농민은 역(役)의 부담을 져서, 군대에 차출되거나 각종 노역에 징발되었다.

고구려 사회의 최하층민은 노비였다. 이들은 귀족들의 중요한 경제적 기반이 되었는데, 전쟁포로·형벌·채무·매매 등에 의해 노비가 되었다. 고구려에서는 특히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에 따라 전쟁포로가 주된 노비의 공급원이 되었으며, 그외 반역죄를 지은 자의 가족, 도둑질하고 이를 변상할 수 없는 자의 자녀, 남의 소나 말을 죽인 자도 노비가 되었다.

한편 고구려의 대외적 팽창에 따라 흡수된 피정복집단이 집단예민으로 존재하였는데, 이들도 고구려의 사회발전과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에 따라 점차 일반민으로 편제되었다. 그러나 거란이나 말갈 등 이종족 집단은 말기까지도 집단예민으로 존재하면서 고구려에 공납을 바치거나 군사적으로 동원되었다.

종교·사상

선교

초기 고구려 사회의 사상과 신앙은 선교(仙敎)였다. 그중에서도 고구려의 건국 신화(주몽설화)에 잘 나타나 있는 천신사상(天神思想)은 초기의 지배이념으로 기능했다. 초기 고구려에서는 매년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을 성대하게 열고, 주몽신과 그 어머니인 유화신을 제사지냈다. 이러한 전통사상은 뒤에 들어온 불교·도교와 결합하였다.

불교

372년(소수림왕 2) 전진(前秦)에서 순도(順道)가 불경과 불상을 전함으로써 공식적으로 수용되었다. 그러나 그전에도 사실상 요동 등지에는 불교가 유포되고 있었다. 소수림왕대의 공식적인 불교의 수용은 최초의 전래라기보다는 지배이념으로서 공인된 정치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불교는 특히 왕실에 의해 크게 환영을 받아 이후 여러 사찰이 건립되고, 광개토왕대에는 평양에 9개 사찰이 한꺼번에 창건되기도 하였다.

고구려에 전래된 불교는 중국의 북조불교, 즉 '왕즉불'(王卽佛) 사상을 내세우는 불교였다. 이는 왕을 현세의 부처로 인식하는 불교로, 고대국가의 왕실 권위와 지배체제의 확립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고구려 사회에서 불교가 널리 퍼지고 이해가 깊어지면서 불교철학의 수준도 높아졌다. 5세기말에는 승랑(僧郞)이 중국으로 건너가 삼론종(三論宗)의 대가로 활약하였으며, 평원왕 때 의연(義淵)은 중국에 가서 삼론에 관한 많은 이론을 배워왔다.

또 고구려의 삼론학은 일본에 전달되어 큰 영향을 주었다. 영류왕 때 혜관(慧灌)은 일본에 건너가 삼론종의 개조(開祖)가 되었으며, 도징(道澄)도 '공'(空) 사상을 전하였다. 한편 고구려 후기에는 모든 중생이 불성(佛性)을 갖고 있음을 강조하는 열반종(涅槃宗)이 널리 퍼져 당시 유행하던 도교와 대립하였다.

특히 보덕(普德)은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에 불만을 품고 백제로 건너가 열반종을 크게 퍼뜨렸다. 고구려의 불교는 삼론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많은 승려가 중국에서 이름을 떨치거나 일본에서 활동하였다. 이는 고구려 후기에 도교가 성행하여 불교를 압도한 것과 관련이 깊다.

도교

624년(영류왕 7)에 당(唐)나라로부터 공식적으로 전래된 기록이 보이나, 사실은 고구려 중기 이래 크게 유행하였다. 고구려 벽화고분에서는 장생불사를 상징하는 천인·신선의 모습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이는 도교가 일찍부터 고구려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물론 이러한 도교는 전통적인 산악신앙·신선사상 또는 샤머니즘 등과 결합하여 유행하였다. 특히 연개소문이 집권한 이후 국가적으로 도교가 크게 장려되어 불교와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유교

고구려의 집권체제를 유지하는 중요한 사상으로 중시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 태학을 세워 중앙귀족의 자제들에게 유교를 교육하고 이들을 관료로 양성하였다. 또 지방에는 경당(堂)이 있어 젊은이들이 모여 독서를 하거나 활쏘기를 익혔다. 이곳에서는 오경(五經) 등의 유교경전이나 사기 등의 역사책, 문선(文選) 등의 문학책 등을 읽혔다.

문화

미술

고구려 미술의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고분벽화를 들 수 있다. 이는 당대 동아시아의 문화유산 중 가장 뛰어난 것의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지금까지 80여 기의 벽화고분이 발견되었는데, 대부분 수도였던 평양과 지안[輯安] 일대에 집중되어 있다.

고구려의 벽화는 처음에 중국의 영향을 받았으나 점차 독자적인 표현기법과 내용을 갖게 되었으며, 백제·신라·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벽화의 내용이 초기에는 무덤 주인공의 초상과 생전의 생활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풍속도가 주류였으나, 후기에는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의 일종인 청룡·백호·현무·주작의 사신도를 주로 그렸다. 그외 벽화에는 신선·비천·괴수·해·달·별자리·수목·건축물 등과 각종 문양이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대표적인 벽화고분으로 안악3호분·덕흥리벽화고분·쌍영총·무용총·각저총·강서대묘 등이 있다.

문학·음악

고구려의 문학으로는 왕자 호동(好童)이나 온달(溫達) 등 역사적 인물을 다룬 설화문학을 꼽을 수 있으며, 시가문학으로서는 유리왕이 지었다는 〈황조가〉와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군 우중문에게 지어 보냈다는 오언시가 전해지고 있다. 한편 고구려의 악곡으로는 '지서가'(芝栖歌)와 '지서무'(芝栖舞)가 전해진다.

또 고구려에 일찍부터 중국이나 서역의 악기와 악곡이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왕산악(王山岳)은 중국의 칠현금을 개량하여 현학금(거문고)을 만들고, 100여 곡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이 현학금은 뒤에 신라에 전해졌다. 당시 고구려에서 쓰인 악기는 고분벽화에서 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한 고구려의 음악은 일본에도 큰 영향을 주어 '고려악'으로 전해졌다.

역사편찬·비문

한학의 보급과 발달에 따라 역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진전되어 〈유기 留記〉 100권이 만들어지고, 영양왕 때에는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이 〈유기〉를 정리하여 〈신집 新集〉 5권을 편찬하였다고 한다. 고구려 때 만들어진 비문으로는 지안[輯安]의 광개토왕릉비와 중원의 고구려비가 현재 전해지고 있다. 특히 광개토왕릉비의 문장과 서체는 매우 뛰어나서 당시 고구려 한학의 수준을 엿보게 한다. 한편 한자의 음과 훈을 빌어 우리말을 기록하는 표기법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뒤에 신라에 전해져 이두로 발전하였다.

과학·기술

고구려의 과학·기술로는 천문기상학·금속제련술·건축술 등이 주목된다. 고구려는 농업사회였으므로 천문기상학이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였다. 대표적인 유산으로는 1,464개의 별을 282개의 별자리로 표시한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를 들 수 있으며, 그외 고분벽화에도 많은 별자리 그림이 남아 있다. 또 건축술도 발달하여 중국 척(尺)과는 다른 고구려 척이 사용되었고, 백제·신라·일본에까지 전해져 널리 쓰였다.

성곽축조술은 삼국은 물론 조선시대까지도 그대로 계승되어 한국식 성곽축조의 한 양식이 되었으며, 도성 건설에서도 평양성 유적을 보면 도시구획 등에서 매우 높은 수준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628년 당나라에 봉역도(封域圖)를 보냈다는 기록에서 고구려에서 지도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금속제련기술도 높은 수준에 올라, 고구려의 금과 은은 당시에 가장 우수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철생산과 철제품의 제작은 무기·생산도구 등 국력의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적으로 힘을 기울인 사업이었다. 또 고분벽화에는 지레의 원리를 이용한 용두레우물·디딜방아·수레 등의 그림이 보이고 있는데, 이를 통해 고구려의 생활과학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임기환(林起煥)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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