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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8 (일) 20:13
분 류 사전2
ㆍ조회: 3862      
[사상] 유교-조선중기의 유교 (민족)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세부항목

유교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유교(참고문헌)

조선조 창건 170년이 지난 선조조에 이르면서 새로운 국면이 전개되었다. 명종 말년 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이 쫓겨나 죽음을 당함으로써 정세가 급변하고, 을사사화 이후의 피죄인들이 소방(疏放)되었다. 명종 21년(1566)에는 정여창의 남계서원(籃溪書院)에 사액했고, 이황이 상경하였다.

선조가 즉위(1567)하면서 사림 정치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선조의 즉위 년 8월 을사사화 이래 피죄되었던 유희춘(柳希春)·노수신(盧守愼) 등을 서용했고, 이듬해에는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서하였다. 또한 남곤에게 주어졌던 관작을 삭탈하고 현량과를 복설(復設)하였다.

이황이 일시 대제학에 취임했고, 제왕지학의 진수로서 ≪성학십도≫를 제진하였다. 1569년에는 이이의 ≪동호문답≫이 제진되었고, 1570년에는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의 역명신원(逆名伸寃)이 전개되는 등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선조 즉위 년을 전후해 이황·김인후·성수침·조식·이준경 등 석학숙유(碩學宿儒)들이 죽음에 따라 국기(國基)를 튼튼히 할 새로운 인재가 요청되었다.

이이는 ≪경연일기≫에서 “아조(我朝)가 입국한 지 거의 200년에 달해 중쇠기(中衰期)가 되었는데 권간(權姦)들의 혼탁한 영향이 심해 오늘에는 마치 노인과 같이 원기가 다해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성상이 나타나셨으니 이때야말로 다스려지느냐 망하느냐의 기로에 서 있는 것입니다. 만약 이때에 발분진흥하시면 우리 나라는 억만년 무한한 행복이 될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궤멸에 이르러 구해낼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또한 〈상퇴계선생서 上退溪先生書〉에서 “국가가 고질에 빠진 지 20여년 남짓 모두 인순(因循)하여 조금도 개혁함이 없습니다. 오늘날 백성의 힘이 이미 다했고 나라의 저축도 비었으니, 만약 경장을 하지 않는다면 나라는 어려워질 것입니다.”라고 당시의 상황을 지적하였다.

선조 이후 사림 정치가 열려 재래의 의리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조선 초이래 훈구파가 주류를 이루던 시대와 훈구 대 사림의 시대를 지나, 사림이 완전한 지배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선조조 처음 30년간은 서둘러 경장하지 않으면 국가의 장래를 보장할 수 없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러나 선조 8년(1575) 사림은 동서로 갈라지고, 이이의 중재는 수포로 돌아갔다. 사대부들이 국가적 위기를 절감하지 못하고 민생과 국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명나라·일본 등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던 임진·정유의 왜란으로부터 조선은 많은 폐해를 입었다.

선조 말년과 광해군에 걸쳐 전후복구에 힘쓰면서 변동하는 국제 관계에 대응했다. 한편 무너진 문묘를 다시 세웠고(1602), 종묘를 중건했으며(1608), 사림의 숙망이었던 오현(五賢 :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의 문묘종사도 성취하였다.

이이가 죽은 뒤 국정은 붕당 정치의 양상을 띠었다. 선조조와 광해군 때 중심 세력이었던 동인(東人)들은 남인·북인으로 갈라졌고, 나중에는 대북·소북으로 파당을 지었다.

임진왜란의 후유증이 사라지기 전에 여진족은 후금(後金)을 세워(1616) 명나라와 대립했고, 조선은 명나라를 위하여 출병하게 되는 등 외교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또한 광해군의 멸륜난상과 인조반정(1623), 이괄(李适)의 난(1624), 그리고 10년을 사이에 두고 일어난 정묘호란(1627)과 병자호란(1636) 같은 국가적 위난이 몰아닥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관군(官軍)과 명군의 정규군에 더해 선비들이 이끄는 의병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했지만, 병자호란 때에는 항복과 항전의 의견이 대립해 국논을 통일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몰락했고, 서인은 반정의 참여여부에 따라 공서(功西, 또는 勳西)와 청서(淸西)로 구분되었다. 그 뒤 정치적 갈등으로 노서(老西)와 소서(小西)로 갈리기도 했지만,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다시 하나가 되었다.

효종과 송시열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던 북벌 계획은 효종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현종대에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서인과 남인간의 예송(禮訟)이 일어나 당쟁이 격화되면서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였다.

유교는 의례를 매우 중시한다. ≪국조오례의≫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오복제도(五服制度)는 상당히 복잡해 애매한 부분이 있을 때 논의해 결정해야 했다. 그런데 그것이 학술적인 차원을 넘어 정쟁의 도구가 되기도 하였다.

숙종조 50년 간 당쟁은 치열해졌다. 숙종도 일관성을 잃어 궁중(宮中)·부중(府中)에 많은 분규와 참화를 빚었다. 수많은 선비가 있었지만 옥석(玉石)을 가리지 못해 수난을 겪었다.

남인은 청남(淸南)과 탁남(濁南)으로 나누어졌고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분열하였다. 숙종 말년에는 노론이, 경종대에는 소론이 집권하였지만 경종 초년의 임인옥은 조선조 중기의 말미를 더욱 어지럽게 만들었다.

이런 국난을 구제하기 위한 많은 노력 또한 있었다. 조선조 중기에는 유학의 도를 밝혀 선현을 추모하고 후학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서원이 세워졌다.

주세붕(周世鵬)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효시로(1542), 이황이 서원을 중시해 국가의 지원을 받도록 함에 따라 크게 번창하였다.

한편 지역 사회의 미풍양속을 이루고자 향약이 권장되었다. 이황의 〈예안향약〉, 이이의 〈서원향약〉과 〈해주향약〉이 만들어졌다. 서원과 향약은 성리학을 전파하고 민풍(民風)을 순화하는 데 많은 공헌을 하였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사회가 변동함에 따라 새로운 학풍이 대두하였다. 이이의 문하에 조헌(趙憲)·김장생(金長生) 같은 인물이 나와 기호학파를 형성했고, 이황의 제자 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조목(趙穆)·정구 등은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초기 실학자인 한백겸(韓百謙)·이수광(李邈光)·유형원(柳馨遠)·박세당(朴世堂)도 당대의 인물들이고, 이익(李瀷)도 숙종조에 태어났다. 양명학의 소질을 갖춘 최명길(崔鳴吉)과 장유(張維), 그리고 양명학의 태두인 정제두(鄭齊斗)도 당시의 인물이다.

성리학적 의리학파였던 조헌·김상헌(金尙憲)·송시열, 예학자였던 김장생·김집(金集)·박세채(朴世采)·정구·정경세(鄭經世) 등이 있었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과 관련해 권상하(權尙夏)·이간(李柬)·한원진(韓元震)·이휘일(李徽逸)·이숭일(李嵩逸)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학파에 따라 여러 분야로 세분화되었다. 조선 중기의 유학사상과 학풍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이의 학문적 특징과 사상사적 위치이다. 이이는 이황보다 35년 뒤에 태어났다. 이이가 30세를 전후해 진출할 때는 명종 말년과 선조 초년이었다. 명종시대까지의 조선 전기를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그는 정몽주 이래 조광조와 이황으로 내려온 의리파의 도맥(道脈)을 존숭하고, 국초 이래 사공파의 공적을 흡수해 그 이념성과 현실성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이이황·성혼(成渾)·송익필(宋翼弼) 등과 교류하며 학문과 도의를 논하였다.

철학적으로는 서경덕의 주기론(主氣論)과 이황의 이존설(理尊說)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이통기국(理通氣局)’과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내놓았다.

이기(理氣)를 분석해 현상으로서의 ‘소연(所然)’과 근저로서의 ‘소이연(所以然)’을 밝히고, 양자를 동시에 긍정해 이기불가리(理氣不可離)의 묘처(妙處)를 드러내었다.

이황은 사단칠정을 이발(理發)·기발(氣發)의 호발(互發)로 보아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을 분속(分屬)시켰지만, 이이는 ‘칠정(七情)’과 ‘기발’의 개념을 보다 확충적으로 파악해 사칠 및 인심·도심을 모두 그 속에 포함시켰다. 인간의 신체적 활동과 이성 및 심령의 작용이 현실을 떠나 있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의 관계에 대해서도 본연지성이 기질지성을 매개로 사단지정(四端之情)이 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이론적 바탕 위에서 개인의 기질 변화와 사회 개혁의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는 우국지성(憂國之誠)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사회개혁에 대한 많은 상소문을 올렸다. 또한 ≪동호문답≫·≪격몽요결 擊蒙要訣≫·≪성학집요≫·≪학교모범 學校模範≫·≪만언봉사 萬言封事≫·≪경연일기≫ 등을 저술해 교학과 치세의 귀감이 되었다.

조선조 성리학은 이황·이이를 배출한 16세기에 절정을 이루었다. 이황은 단순히 주자학을 답습하지 않고 이존설을 주장해 인간의 본래적 존엄성을 내적 성찰의 방법을 통해 천명하였다.

이이는 이러한 인간적 고귀성을 사회적으로 실현하는 방도를 제시하였다. 이이의 우인(友人)으로서 성혼과 송익필을 들 수 있다. 이이의 성리학 연구는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증대되었다.

성혼은 독실궁행하는 도덕 실천에 근기(根基)를 두었으며, 송익필은 예학에 밝아 ≪예문답 禮問答≫·≪가례주설 家禮註說≫을 지었고, 성리학 관계 논문인 〈태극문 太極問〉을 지었다. 이이는 오직 송익필 형제만이 그 당시 성리학을 올바로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세 사람의 교류에 힘입어 이이의 제자들 중에는 일찍이 성혼과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도 많았다. 이이·성혼·송익필 문하에는 조헌·김장생·김집·안방준·김상헌·송시열·송준길·박세채·권상하·김창협·이간·한원진·조성기(趙聖期)·임영(林泳) 등이 있었는데 나중에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둘째 이황의 문하와 조식 문하이다. 이황은 을사사화 이후 조정과 관직을 떠나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제자들 중에는 입조해 벼슬한 이도 많았다.

그 중 유성룡은 재상으로서 임진왜란을 치러내기도 했고, 김성일은 부제학과 경상도관찰사에 이르렀다. 또한 정구는 대사헌이 되었고, 이황을 오래 사사한 조목은 늦은 나이에 공조참판을 지냈다.

나중에 유성룡 계통은 병산서원(屛山書院)을 중심으로 병파(屛派, 또는 屛論)를, 김성일 계통은 호계서원(虎溪書院)을 중심으로 호파(虎派, 또는 虎論)를 형성하였다.

병파는 정경세를 거쳐 유진(柳袗)―유원지(柳元之)로 이어졌고, 호파는 장흥효(張興孝)를 거쳐 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이상정(李象靖)―유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졌다.

그 밖에도 퇴계학파로서 정경세 등의 예학이 발달하였다. 영남의 남인계로서 유성룡·김성일 이외에 정구와 장현광의 유파로서 ‘사소분파(四小分派)’를 이루었다.

정구의 문하에서는 이후경(李厚慶)·서사원(徐思遠)·황종해(黃宗海)·허목(許穆) 등이 나왔고, 장현광의 문하에서는 김응상(金應相)·정극후(鄭克後)·유진 등이 나왔다. 퇴계학파는 대개 남인계열이 되었다.

은일한 산림처사로 기개와 절의로 의연한 풍모를 보여 주었던 조식 문인들 중 다수가 정계에 진출하였다. 동인이 남·북으로 갈릴 때 북인에는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최영경(崔永慶)·정여립(鄭汝立)·이산해(李山海)·이이첨(李爾瞻)·홍여순(洪汝諄)·남이공(南以恭) 등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그 가운데 조식의 문인이 많았다.

북인은 남인에 비해 정치적 입장이 강경해 낭패를 보기도 했지만, 정치적 수완도 뛰어났다. 북인 계열은 선조·광해군 시대를 거치며 정치적으로 활동적이며 과감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이황과 조식은 정치현실에서 물러나 있었지만, 인조반정 이전까지 그들 문하의 제자들이 정계에 진출해 남인·북인의 시대를 형성하였다.

셋째 조선 중기의 의리사상과 충렬정신이다. 조광조·이황을 거쳐 이이에게 이어진 성리학적 정신을 바탕으로 사회적 부조리를 비판하고, 외침에 저항하는 의리학파의 충렬 정신이 두드러졌다.

고려 말 정몽주의 충절, 조선 전기의 의리파, 사육신·생육신의 절의파, 사화기 시절 사림의 도학정신 등이 의리파의 범주에 속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당시의 의병 활동도 그러한 정신에서 이루어졌다.

“춘추시대에는 의로운 전쟁이 없었다.”고 하듯이 의리는 기본적으로 전쟁을 거부한다. 동양의 유교적 전통에서는 무고한 전쟁에 대해서 연합군을 형성해 토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과 명나라가 비록 대국과 소방(小邦)의 구별(分)은 있었지만 인도를 높이고 불의를 물리쳐야 한다는 춘추의리의 이념에 있어서는 같았다. 화이론이나 존주론(尊周論)의 근본 정신도 여기에 있다.

조선 중기 임진왜란을 당해 조선이 국내외적으로 응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의리학에 연원하였다.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의 의병 활동과 저항 정신에서, 그리고 효종대의 북벌론과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서 의리학을 볼 수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9년 전 정병 10만을 양성하자는 이이의 주장이 있었지만, “아무런 일이 없을 때 병사를 양성하는 것은 화를 키우는 것(養禍).”이라고 하여 거부되었다. 또한 5·6년 전부터 왜란에 대비하도록 극간한 조헌은 길주(吉州)에 유배되었다.

조선 군대는 장비와 훈련 면에서 왜군을 당하기 어려웠다. 당시 일본에서는 100년의 전국시대를 끝내고 10도(十島)를 통일했었고, 도요토미(豊臣秀吉)는 단련된 군대를 이끌고 인도까지 정벌할 야망를 품었다고 한다.

조선은 개전 초부터 군사적으로 열세였지만, 불멸의 애국혼을 발휘하였다. 부산진첨사 정발(鄭撥)과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충천의 기개로써 항전하며 위국진절(爲國盡節)의 의기를 보여주었다.

전국 각지에서는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군(義軍)이 일어났다. 영남의 곽재우(郭再祐), 호서의 조헌, 장흥의 고경명(高敬命), 광주의 김천일(金千鎰), 보성의 임계영(林啓英), 담양의 김덕령(金德齡), 연안의 이정암(李廷目), 봉산의 김만수(金萬壽), 중화의 김진수(金進壽), 평양의 양덕록(楊德祿), 경성의 이붕수(李鵬壽) 등의 의병은 승군(僧軍)이나 관군과 연합하면서 각지에서 항전하였다.

이들 모두는 유명·무명을 가릴 것 없이 겨레의 의기(義氣)를 실증한 충렬정신의 화신이자 민족혼의 정화였다.

조헌의 경우 임진왜란을 앞두고 국내외의 대국(大局)을 간파해 백방으로 대응책을 제시하였다. 그는 국내적으로 자주 정신을 고취해 왜란에 대비하도록 하고, 국제적으로 춘추정신에 입각해 중국 및 동남아시아 제국과의 연합군을 형성해서 일본을 포위할 것을 건의하는 등 탁월한 선견지명을 보여주었다. 나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장으로서 왜적과 싸우다가 칠백의사와 더불어 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

고경명은 임진외란 중에 3부자가 함께 전사하였다고 한다. 또한 안방준(安邦俊)은 ≪항의신편 抗義新編≫과 ≪임진록≫을 찬술하였다.

인조 14년(1636)에 돌발한 병자호란으로 이듬해 정월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의 성하지맹(城下之盟)을 맺었다. 청나라와 군신의 의를 맺는 11개 조항의 항복 조건을 받아들였고, ‘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워야 하였다.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은 인질이 되었고, 주전론을 주장했던 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홍익한(洪翼漢) 등 삼학사는 심양으로 잡혀가서 죽었다.

청나라에 대해 조선의 임금은 9층 단하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을 청해 민족적 치욕을 당했지만, 전세의 상황은 항전이 어려웠다.

명나라를 치기 위한 청나라의 출병요구에 반대했던 김상헌과, 명나라와 내밀하게 통교하였던 최명길은 각각 심양으로 잡혀가 구금되었다. 최명길은 인조 23년(1645)에야 소현세자·봉림대군과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항복은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청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행했지만, 실제로는 명나라를 은혜로 알고 청나라를 원수로 여기는 숭명배청의 경향이 굳어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22만 군을 조선에 파견함으로써 국세가 기울어 청나라가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나중에 효종은 북벌 계획을 추진했지만, 10년 만에 죽게 되자 계획으로 그치고 말았다.

임진·병자의 양난 동안 흥기했던 의리사상은 송시열에 의해 계승되었다. 기호학파였던 송시열은 당대의 거유(巨儒)이자 사림의 종장이었다. 그는 정몽주와 조광조를 비롯해 이황과 이이를 모두 존숭하였다. 성리학과 예학에도 밝았다. 만년 노·소로 나뉘어 있던 당쟁의 와중에서 기사환국 때 유배되어 사사되었다.

효종의 총애를 받아 북벌 계획에 참여한 적도 있었던 송시열은 의리지학을 중시하였다. ≪주자대전≫에 비길만한 대작 ≪송자대전≫을 남겼는데, 그 안에는 의리학에 관련된 위국순절한 인물들에 대해 상당 부분 기술되어 있다.

예를 들면, 정몽주의 신도비와 조광조의 능주정암선생적려유허비, 박팽년의 회덕박선생유허비, 성삼문의 홍주성선생유허비 및 연산성선생유허비를 지었다.

임진왜란에 즈음해 조헌의 중봉조선생행장, 이순신의 남해노량이공묘비, 송상현의 천곡송공상현신도비명, 신립의 도순변사증영의정신공묘갈명, 권율의 도원수권공묘표음기를 지었다.

병자호란과 관련해 김상헌의 석실서원묘정비 및 석실김선생묘지명, 윤집의 교리증부제학묘갈명, 홍익한의 장령홍공묘갈명, 윤집 등 3인의 〈삼학사전 三學士傳〉, 임경업(林慶業)의 〈임장군경업전〉 등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숙종 30년(1704)에는 충청북도 화양동에 송시열의 유명(遺命)으로 만동묘를 지어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임금 의종을 추념해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모두 조선 후기까지 계속되었다.

연호에서도 사사(私事)에서는 모두 청나라의 것을 쓰지 않고 명나라의 마지막 연호를 써서 ‘숭정후모년(崇禎後某年)’으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당시 조선인의 반청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조선조 의리학의 전통은 송시열에 이르러 다시 확증되면서 후세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넷째 조선 중기에는 ‘예학의 시대’라 할 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많은 논저가 나왔다. 임진·병자 양 난을 전후해 무너진 기강과 사회 질서를 바로잡고 순후한 민풍을 일으키는데 예학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성리학적 정신이 국가의 혼란기에 의리학적 행동으로 나타났듯이 일상 생활에서는 행동을 바르게 하는 예를 통해 실현되었다.

조선을 건국하는데 예전(禮典)이 중요한 역할을 했고, 국초부터 예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수행되었다. 고려 말에 정몽주가 ≪주자가례≫를 여행(勵行)케 하여 불교식 법속을 유교 의례로 바꾸도록 하는 데 중요한 몫을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사례를 중시하여 관례(冠禮)·혼인·상제·가묘 등을 논술하였다. 그 뒤 그는 ≪경국대전≫을 비롯, ≪대전통편≫과 ≪대전회통≫등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는 국초부터 ≪주자가례≫를 간행하고 의례상정도감(儀禮詳定都監)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국조오례의≫를 찬정하였다. 이는 뒷 날 예송이 일었을 때 논의를 판정하는 준거가 되었다.

성리학파로서 저명한 학자들은 대부분 예학과 관계가 있었다. 권근의 ≪예기천견록 禮記淺見錄≫을 필두로 김인후·이언적·이이·송익필·이항복(李恒福)·유성룡·김성일 등은 모두 예에 관한 논저를 남겼다.

17세기에 들어들면 이황의 문인 정구와 이이의 문인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로서 쌍벽을 이루었다. 예학의 대종(大宗)으로 일컬어지는 김장생은 이이로부터 성리학을, 송익필로부터 예학을 배웠다. 저술로서는 ≪가례집람 家禮輯覽≫·≪의례문해 疑禮問解≫·≪상례비요 喪禮備要≫(校正本)·≪가례편람 家禮便覽≫이 있다.

그의 학문은 아들 김집과 송시열에게 전해졌다. 김집의 학은 송준길·유계(兪棨)·이유태(李惟泰)·윤선거(尹宣擧)를 거쳐 윤증(尹拯)으로 계승되었다.

송시열의 학은 이단하(李端夏)를 거쳐 김원행(金元行)·박윤원(朴胤源)·권상하·한원진 등에게 전수되었고, 그것은 다시 송능상(宋能相)·이의조(李宜朝)·김창협·이재(李縡)로 연결되었다. 송준길로부터 민유중(閔維重)이, 그 밖에 김상헌으로부터 박세채가 나왔다.

정구는 ≪오선생예설 五先生禮說≫·≪예기상례분류 禮記喪禮分類≫·≪가례집람보주 家禮輯覽補註≫·≪오복연혁도 五服沿革圖≫·≪심의제도 深衣制度≫ 등을 지어 이황 문하의 예학 대가가 되었다.

정구를 거쳐 장현광·허목·황종해(黃宗海)·이론(李論) 등이 나왔으며, 유성룡의 후계로서는 정경세를 거쳐 정종로(鄭宗魯)·조호익(曺好益) 등의 예론가가 배출되었다.

조선조 후기까지 예학은 계속 탐구되어 성호학파(星湖學派)와 북학파(北學派), 그리고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실학자에 이르기까지 매우 중요한 저술을 남기고 있다.

유교는 일상 행위를 통해서 떳떳한 이치를 드러낸다고 믿었기 때문에 ‘예’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유교의 13경 가운데 ‘삼례(三禮)’에 해당하는 ≪주례≫·≪의례≫·≪예기≫ 등의 예경(禮經)이 있다.

본래 종교적 제의(祭儀)에서 유래했던 예는 규범화되어 인간 생활의 풍속·관습·범식(範式)이 되었다. 이러한 고대적 습속으로서의 예 개념을 혁신시켰던 유교의 예는 타율적 구속력에 의존하기 보다 인간의 자율적 주체성에 호소한다.

때문에 예는 보편적 경험을 토대로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절문(節文)’이며 인정에 맞는 ‘의칙(儀則)’이라고 하였다.

공자는 안회(顔回)가 인을 물었을 때 ‘극기복례(克己復禮)’라고 하였다. 인의 마음은 예의 실천으로 나타난다고 볼 때, 인은 정신이요 예는 그것을 담는 그릇이다.

유교의 특징인 구체적 현실성은 인간의 진실된 마음을 담을 수 있는 예법을 필수적으로 요청하였다. 가정과 국가,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를 성립시키는 도리로서의 예는 인간 생활을 잠시도 떠날 수 없다고 보았다.

마음은 진실해야 하고 표현 방법은 적합해야 한다. 인과 예는 내외본말의 관계이며, 진실성과 합리성은 예의 바람직한 실상이다.

유교의 의례에는 관혼상제의 사례가 있다. 그 중에서도 상례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었다. 상례에는 오복제도가 있어서 친소(親疎)에 따라 그 복제와 상기(喪期)가 5가지로 구분된다. 생자와 망자의 관계에 따라 인정이 다르고 친소경중(親疎輕重)의 차이에 따라 충정(衷情)의 표현 방법이 달랐다.

상례는 동양의 뿌리깊은 종법 사회를 유지시키는 원리였다. 의례의 생활화는 곧 유교가 완전히 뿌리내림을 뜻한다. 오복제도는 그 원리가 간단하지만 그 적용은 복잡 다양하였다.

이른 바 조선 중기의 예송에서도 문제의 초점은 예제의 내용상의 혼돈에 있지 않고, ‘대통(大統)’과 ‘적통(嫡統)’을 어떻게 관계지을 것인가에 있었다.

예송은 정치적 당쟁으로까지 이어졌지만, 정신과 형식의 균형 조화를 존중하는 유교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이념 논쟁이기도 하였다. 예학은 학술적 연구를 통해 조선인의 사습(士習)과 민풍이 훈습되고 미풍양속을 이루는 계기였다.

다섯째 조선 중기에는 실학사상이 대두하였다. 우리 나라 실학의 전성기는 영정조 이후지만 이미 중기에 들어서면서 실학의 풍이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이수광·허균(許筠)·유형원, 그리고 박세당 등이 그러한 인물이다.

유교는 “고명(高明)을 다하되 중용을 말미암는다(極高明而道中庸).”고 했듯이 일상적 현실을 떠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실학의 성격을 띤다. 주자학에서도 노불(老佛)을 공허하다고 비판하고 자신들의 학문을 실학이라고 하였다.

유학이 수기치인과 경세제민을 근본으로 하는 점은 어느 학파를 막론하고 공통적이었다. 조선조 학풍의 기조를 이루었던 주자학은 순수철학과 사회철학의 양면이 있었다. 전기에는 정주(程朱)의 성리철학이 크게 발달했고, 후기에는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이용후생을 위주로 한 실학이 발달하였다.

영조조의 오광운(吳光運)은 유형원의 ≪반계수록 磻溪隨錄≫ 서(序)에서 실학의 필요성과 그 사상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그는 서문에서 “도덕은 하늘에 근원하고 정제(政制)는 땅에 근본하는 것이니, 하늘만을 스승으로 하여 땅을 알지 못하거나 땅을 스승으로 하여 하늘을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옳으리오.”라고 하면서 주체적인 인륜 도덕과 사회적인 정치 제도를 ≪주역≫의 건곤(乾坤)이나 형상형하(形上形下)의 도기론(道器論)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삼대(三代)에는 천·지와 도·기가 분리되지 않았지만 주말(周末) 이래로 도와 기가 함께 무너졌는데, 기가 더욱 심하게 무너졌다고 하였다.

정주와 같은 대현이 나와 삼대의 다스림에 뜻을 두었지만 먼저 도를 밝히기에 급했기에 힘쓸 겨를이 없었다고 하였다. 또한 훗날의 군자가 정주자(程朱子)의 학문을 보완해 기에 힘쓰기를 다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논의는 재래의 도덕주의와 이기심성론에 치중했던 정주학적 학풍에 대한 반성이며, 당시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해야 한다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한 것이었다.

한백겸(韓百謙)은 ≪동국지리지≫와 ≪기전고 箕田考≫를 지어 실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수광은 그의 ≪지봉유설≫에서 무실론(懋實論)을 펼치고 천주학과 양명학까지를 포함, 서학과 중국 문물을 다양하게 소개하는 등 실학적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세당은 주자학에 얽매이지 않고 경전을 해석하였다. 특히 그는 ≪노자도덕경≫과 ≪장자남화경≫ 등 노장에 대한 주석서를 포함해 ≪색경 穡經≫과 같은 농서도 지었다. 또한 홍만선(洪萬選)은 ≪산림경제≫를 써서 농예(農藝)·의약·구황(救荒)에 관한 저술을 남기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도 지적하듯이 조선 중기에 무실적 태도를 가장 뚜렷이 보였던 사람은 이이와 유형원이었다. 이익은 “국초 이래로 식무(識務)한 이는 오직 이율곡과 유반계 이공(二公)뿐이었다.”고 하였다.

이이와 유형원은 모두 성리학적 배경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이론은 공허하지 않고 이기와 인심도심을 밀접한 관계에서 파악하였다.

이이는 많은 소문(疏文)을 지어 경장론 및 경세론을 폈다. 그의 제안대로 3년 간 실시해 “나라가 진흥하지 않고 백성이 편안해지지 않고 군대가 정예로워지지 않을 때에는”, “끓는 가마에 넣고 도끼로 버히는 형벌을 내리더라도 사양치 않을 것”이라고 격절(激切)히 논의하였다(萬言封事 및 陳時弊疏).

유형원은 그의 ≪반계수록≫을 통해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쇄신할 것을 주장하는 일종의 ‘국가론’을 전개하였다.

≪반계수록≫은 전제(田制)·교선(敎選)·임관(任官)·직관(職官)·녹제(祿制)·병제(兵制) 등 거의 모든 제도를 망라해 당장 시행할 수 있도록 기술하였다. 그의 저술은 매우 종합적이고 체계적이며, 후세에 실용적·실증적 학문을 여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여섯째 양명학의 이해와 사상적 영향이다. 조선조는 유교로 나라를 세웠고, 주자학은 조선시대를 통해 정신 문화와 사회 제도의 기반이 되었다. 유교와 주자학은 국시가 되었으며 도·불은 물론 다른 학문에 대해서도 유교와 주자학에 배치되면 용납되지 않았다.

이와 같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하여 재래의 침체를 타파하고, 격치성정(格致誠正)과 수제치평(修齊治平)의 도를 펼치려고 하였다.
한편 양명학은 불교의 선학에 가깝다고 판단되어 당시의 사회 통념에 의해 배척당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은 선학(禪學)이라고 비판받던 육구연(陸九淵)에 대해 불교의 선학과 다르다고 변호했지만, 조선시대의 학자들의 일반적 인식은 전혀 달랐다.

이이만 해도 불교는 외구(外寇)와 같아서 뚜렷이 알 수 있지만, 육학(陸學)은 반드시 공맹과 효제(孝弟)를 일컫는 까닭에 마치 간신이 나라를 그르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왕수인(王守仁)은 중국 명대 유학인 양명학의 창시자로서 주자학과 대립하는 뚜렷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육구연과 왕수인이 모두 문묘에 종사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육왕학이 인정받을 수 없었음은 물론, 오히려 명나라의 문묘종사는 조선 사신들의 힐난을 받았다.

그러나 양명의 학설이 조선에 전래된 것은 상당히 빨랐다. 왕수인과 제자들의 문답인 ≪전습록 傳習錄≫이 중국에서 간행된 것은 1518년이었는데 3년 뒤인 1521년(중종 16) 박상(朴祥)과 김세필(金世弼) 사이에 주고받은 글 가운데서 양명학을 선학으로 보아 비평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또한 이황과 같은 대가가 〈전습록논변〉을 지어 양명의 ‘친민설(親民說)’·‘심즉리설(心卽理說)’·‘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 등을 논해 배척함에 따라 양명학은 우리 나라에 들어오면서부터 설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학문과 인품이 온건하고 포용력이 있는 이황으로서도 이단사설(異端邪說)에 대해서는 매우 엄중하게 경계하였다. 그리고 조목·유성룡 등 후학들은 사설(師說)에 의거하여 양명학을 계속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양명학은 수입 초기부터 영남·기호를 막론하고 주관주의철학으로 인식되어 거부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사정이 달랐다. 명나라의 사신으로 온 황홍헌(黃洪憲)은 양명학자였고, 임진왜란 때 명군의 경리(經理)인 만세덕(萬世德)은 육구연과 왕수인을 문묘에 종사하도록 종용하기도 하였다.

조선에서도 양명학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유성룡에 의하면, 당시 남언경(南彦經)으로부터 배운 사람들 가운데 양명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요(李瑤)는 그 한 사람으로 선조와의 대화에서 양명학의 주지(主旨)를 설명했고, 선조 역시 상당히 호의를 가지고 요점을 간취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성룡도 이론적으로는 양명학을 비판하였지만 “양명의 설은 상산(象山)과는 다르다. 대개 양명은 ‘운용처(運用處)’가 많이 있다.”고 하여 양명학을 일부 인정하였다.

이이도 육학(陸學)의 선학적 경향과 그 폐단에 대해 비평했지만, 육학이나 양명학 자체를 적극적으로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이이는 명나라 사신 황홍헌에게 준 〈극기복례설 克己復禮說〉에서, “소방(小邦)의 사람이 식견이 고루해 오직 정주(程朱)의 설을 지킬 뿐 다른 도리로써 펴나가지 못하고 있으니, 비록 움 속에서 벗어나려 해도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 전문(全文)을 참조하면 정주의 설을 근본으로 하면서도 타학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조선 중기에는 양명학에 대한 비평이 계속되면서도, 한편으로 국내외의 자극과 관심으로 인해 양명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조선 중기 17세기 전반에 활약한 인물 가운데 양명학에 대한 이해와 견식을 가지고 영향을 받았던 선비로서 장유와 최명길을 들 수 있다. 이수광·허균·조익(趙瀷)·이시백(李時白) 등은 중국을 오가며 양명학을 이해했고, 학설과 생활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장유는 ≪계곡만필 谿谷漫筆≫에서 당시 조선의 학문이 정주학에 편중되어 있고, 형식으로만 흐르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는 중국에는 정학(正學)·선학(禪學)·단학(丹學)이 있고 정주를 배우는 자와 육왕을 배우는 자가 있어서 들어가는 문이 하나가 아니라고 하면서, 조선의 학자들이 활발하지 못함을 한탄하였다.

그는 ‘정학’과 ‘정주’를 말하면서도 양지설(良知說) 및 지행합일설 등 양명학을 옹호하였다. 그는 양명학의 본지가 한갓 정태적 관념론이 아닌 용공실처(用功實處)와 성찰확충(省察擴充)의 동적 세계에 있음을 밝히고, 양명이야말로 또 하나의 길을 개척한 사람(別立門徑)이라고 하였다.

최명길은 병자호란을 당했을 때 온몸을 바친 애국적인 인물이다. 후일 남구만(南九萬)은 신도비를 써서 생사와 훼거(毁擧)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나라와 백성을 구해낸 그의 충성과 재주와 용기를 칭찬하였다.

최명길의 평생 행적은 그의 수많은 소차(疏箚)에 반영되어 있고, 그의 사상적 편린(片麟)이 문집의 서한과 잡저 가운데 보인다. 그는 당시의 학인들과 다름없는 학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양명학으로부터도 사상적 영향을 받았다.

병자호란이 끝난 뒤 아들 후량(後亮)이 청나라 심양으로 인질로 잡혀갔고, 후일 자신도 잡혀가게 되었다. 그는 멀리 있는 아들에게 양명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를 통해 비록 영어(囹圄)중에 있더라도 수양하고 자립해 마음의 본체로써 진리를 체증(體證)할 것을 간곡하게 권하였다.

자기 스스로도 “평생에 조우한 환난을 당함이 하나 둘이 아니었지만 바로 그것에 힘입어 큰 낭패에 이르지 않았다.”고 적고 있다.

아들에게 준 사신(私信)이기는 하지만 “양명의 글에 이르기를(陽明書云)”, “양명의 고명으로서도 이와 같은 근심이 있었는데 하물며(以陽明之高明 猶有是夏 況)……”라고 하여 그의 사상이 양명학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병자호란의 와중에서 생사와 영욕을 돌보지 않고 국가적 환란을 돌파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인식론적 차원을 넘어 주체적인 판단과 행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정신은 치양지(致良知)·지행합일·사상마련(事上磨練)을 주지로 하는 양명철학에 힘입은 바 크다.

양명학을 본격적으로 연구해 양명학의 태두가 된 학자는 정제두이다. 그는 88세의 생애를 오직 학문에 종사하였다. 학덕이 높아 조야의 존경을 받았고 조정으로부터 30여 차례나 부름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는 소론가(少論家)에 속하였지만 당쟁과 관계없이 진리 탐구에만 전념하였다. 박세채·최석정·윤증·민이승(閔以升)·박대숙(朴大叔)과 같은 사우들이 양명학에 경도(傾倒)함을 충고·비판하였지만 끝내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기의 학문 세계를 성취하였다.

그는 이미 성리학적 지식을 습득했음에도 불구하고, 양명학의 주지를 음미해 이룩한 자신의 철학적 규준에 의거해 정주와 퇴율의 이기심성설을 근본적으로 재비평하였다.

특히 정제두는 사서오경을 깊이 연구하여 양명학을 주안(主眼)으로 새로운 해석을 내렸다. 또한 천문·역법·지리·조석(潮汐)·병학(兵學)·의학에 이르기까지 실제적 방면에서도 학문을 논하였다.

경학을 근본으로 박실(樸實)한 학문에 종사했던 그의 학풍은 후기 실학의 한 축이었던 하곡학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사회적으로 공인되지 않았던 한국 양명학은 중국의 양명학과 달리 선학의 풍을 띠지도 않았고 반주자(反朱子)를 표방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실사(實事)와 실공(實功)을 중시했던 점에 그 특징이 있다.

일곱째 조선 중기의 후반에 인물성동이론 및 인간의 미발심체(未發心體)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조선 중기에 겪었던 국내외적 환란으로 실학·예학·의리학·양명학 등이 현실지향적 성격을 띤 학문이 성행했지만, 그와 동시에 인간의 주체적 위상과 심성의 본질에 대한 논의도 전개되었다.

‘인물성동이론’과 ‘미발심체’에 관한 논쟁은 추상적이며 공소한 이론이라고 비평받기도 하지만, 성리학적 심성론이 심화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성리학은 우주 만물과 인간 만사를 원리적으로 해명하려 시도한다. 특히 한국 성리학은 인성론(人性論)을 중요시하였다.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인성(人性)의 문제를 더욱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그 첫째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의 동이 문제로 나타났고, 둘째가 미발(未發) 시의 심성문제로 깊어졌다.

인물성동이론은 ≪중용≫ 수장(首章)과 ≪맹자≫‘생지위성(生之爲性)’에 대한 주자의 주석에서 발단되었다. 이른바 ‘건순오상(建順五常)’ 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성이 사람과 동물에게서 같은 형태로 나타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문제였다.

호락논쟁으로 불리는 인물성동이론의 본격적 논쟁은 권상하의 문인이었던 한원진과 이간의 입장 차이에서 시작되었다. 동론과 이론을 주장하는 자들의 거주지가 달랐는데 이에 따라 호론(湖論)과 낙론(洛論)이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호락논쟁에서 이간은 인물성 동론을, 한원진은 인물성 이론을 폈다. 이들의 주장이 완전히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성리학 안에서의 차이일 뿐이다. 양론은 모두 인간만이 ‘정통(正通)’한 기운 또는 오행의 ‘수기(秀氣)’를 갖추었다는 기본 입장에는 차이나지 않는다.

호락론에서 성론(性論)의 차이는, 성(性)이 기질에 내재적인가 초월적인가에 있다. 이간은 성의 초월적 측면에서 ‘이통성(理通性)’을 지적해 동론을 주장했고, 한원진은 성의 내재적 측면에서 ‘기국성(氣局性)’을 지적하여 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들의 변론은 성리학에서 불명확하였던 부분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간은 ‘천명·오상·태극·본연’은 그 이름이 각기 다르지만, 모두 일원(一原)의 이(理)에 근본하기 때문에 내용상 동일한 것으로 보았다. 인간와 천지만물이 오상을 보편적으로 구비하기 때문에 인·물의 성은 같다고 하였다.

한원진은 이에 반해 ‘천명의 이’는 형기(形氣)를 초월한 것이고, ‘오상의 성’은 기질로 인해 이름 붙인 것이므로 인·물의 성은 서로 다르다고 하였다.

이간은 본성이 초월적·근원적이어야 한다고 보았고, 한원진은 성의 개념은 기(氣)를 말미암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다고 보았다. 이간은 본연지성이 부여되는 일원처(一原處)에서 인물성의 동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기질의 정통편색(正通偏塞)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인·물의 기질적 차이는 인정하였다.

한원진의 경우 성(性)이란 형기를 초월한 이(理)와는 달리 이가 기에 ‘떨어져 있는 것(墮在)’을 일컫는 것이므로, 기를 떠나서는 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기의 편전으로 인해 인성과 물성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인성은 인·의·예·지·신의 오상을 완전히 갖추고 있지만, 물성은 그렇지 못해 미소(微少)하거나 전무하다고 보았다.

한원진의 주장이 인물성의 차이를 주장하지만, 인성과 물성이 유래한 궁극적 근원은 ‘일원무대(一原無對)’의 ‘태극천명(太極天命)’이라고 한 점에서 이간의 일원지리(一原之理)와 다르지 않다.

이간은 일원이체(一原異體) 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주장하고, 한원진은 초형기(超形氣)·인기질(因氣質)·잡기질(雜氣質)이라는 성삼층설을 주장했지만 양자 모두 일원만수(一原萬殊)라는 공통적 인식을 깔고 있다.

또한 호락논쟁에서는 성리학의 기본 명제인 순선(純善)한 본연지성과 선악을 겸한 기질지성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간은 본연지성이 구극적 원리인 천도나 태극지리(太極之理)와 동일한 것이며, 인간의 본성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였다.

형이상의 이(理)인 본연지성은 마치 ‘도(道)’가 ‘기(器)’에서 생하거나 ‘태극’이 ‘음양’에서 생하지 않듯이 “성리의 선은 심기(心氣)에 근원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선(性善)을 현실화시키는 것은 성리 자체에 있지 않고 심기(心氣)의 선악에 관련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심(心)이 부정한데 성이 스스로 중(中)하거나, 기(氣)는 불순한데 이가 스스로 화(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이간은 순수 형이상의 성리를 근본으로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오히려 형이하의 심기를 요구하고 있다.

또한 이간에 의하면,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모두 외물에 의해 촉발되지 않은 미발지성(未發之性)이다. 미발에도 깊고 얕음(深淺)이 있다.

깊은 것은 허령불매(虛靈不昧)하고 담연허명(湛然虛明)한 명덕본체(明德本體)의 본연지심이기 때문에 ‘중저미발(中底未發)’이라고 부른다.

반면에 얕은 것은 기품(氣稟)에 구애되어 혼매잡요(昏昧雜擾)한 기질지심이므로 ‘부중저미발(不中底未發)’이라고 부르고 있다. 즉 이발(已發)의 정(情)으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발시의 순선한 본연지심과 선악을 모두 겸한 기질지심으로 분류하였다.

이간은 인성을 논할 때 선악을 모두 겸한 기질지성 보다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본연지성(本然之性)을 인간의 진정한 본성으로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미발시의 허령불매한 본연지심(本然之心)을 중시해 확보하려고 하였다.

한원진의 경우도 이간과 마찬가지로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이 모두 마음의 미발 상태인데, 본연지성은 순선하고 기질지성은 선악을 겸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한원진은 이(理)와 기(氣)는 분리될 수 없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은 두 개의 성이 아니라는 전제에 철저하였다. 허령(虛靈)한 마음(心)의 이(理)만을 가리키면(單指) 본연지성이고, 마음에 있는 기품(氣稟)의 청탁미악(淸濁美惡)을 겸하면(兼指) 기질지성이라고 보았다.

허령한 마음의 본연지성은 성범을 막론하고 동일하지만, 성인과 범인의 차이가 있는 것은 심의 허령에 기인하지 않고 기품에 연유한다고 생각하였다.

기품의 부제(不齊)에 구애받는 것이 중인(衆人)이고, 그것에 구애받지 않아 본래적 허령상태의 본연지성을 드러내면 성인이라고 보았다.

실질적으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것은 기질의 청탁미악인 까닭에 한원진은 선악을 겸한 기질지성의 현실성에 즉해 선을 회복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한원진은 단지(單指)·겸지(兼指)·분간(分看)·합간(合看)·불리(不離)·부잡(不雜) 등의 방법으로 미발심체의 이론을 보다 논리적으로 구성하였다.

이상과 같이 조선 중기에 제기된 인물성동이론은 김창협·김창업(金昌業) 형제·이재(李縡)·윤봉구(尹鳳九)·이현익(李顯益)·박필주(朴弼周) 등 많은 학자들에게서 자유롭게 토론됨으로써 하나의 학풍을 이루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임성주(任聖周)와 기정진(奇正鎭)을 거쳐 전우·곽종석(郭鍾錫) 등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에 걸쳐 성리학의 주요 논점이 되었다.

호락논쟁이 진행되고 있을 무렵 영남학파에서는 이휘일(李徽逸)과 정시한(丁時翰)이 인물성상이론(人物性相異論)을 주장했고, 이승일과 이식은 구동론(俱同論)을 주장하였다. 이와 같이 기호·영남을 막론하고 인물성에 대한 다양한 이론이 전개되었다.

<이동준(李東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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