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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02 (일)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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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914      
[성씨] 안동권씨 (계림군파홈)
안동권씨(安東權氏)

안동권씨의 시조 권행(權幸)은 본래 신라왕실의 후예로 본명이 김행(金幸)이다.

[안동권씨대동백계도]의 기록을 보면 그가 신라 말에 고창군 별장을 지내던 중 서기 927년(신라 경순왕 1)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주군 월선면 내남리 포석정에서 놀이를 즐기고 있던 경애왕을 살해하였다.

930년(경순왕 4) 고려 태조인 왕건이 견훤과 대전할 때 이를 도와 함께 쳐부수니 태조가 기뻐하고,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하며 권씨의 성과 벼슬을 삼한벽상 아부공신 삼중대광 태사로 제수한 후 고창군을 식읍으로 하사하였다. 그후 지명이 안동부로 개칭됨에 따라 후손들이 안동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권씨는 고려 말기에서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조에 들어오면서 확고하게 지반을 다지고 10세를 전후하여 크게 14파로 갈리는데 그 중에서 특히 추밀공파와 복야공파, 좌윤공파에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여 가문의 중흥을 이루었다.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추밀공파의 파조인 수평(守平)이 청덕(淸德)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명성을 떨쳤다. 그는 일찍이 대정에 있으면서 가난하게 살았는데 낭중인 복장한이 죄없이 귀양가자 그 밭을 대신 경작하며 사다가 그가 사면되어 돌아오자 토지와 함께 임대료를 주어 사람들이 탄복하여 말하기를 "재산 쟁탈이 풍습화된 세상에 뜻밖의 사람을 보겠구나" 하며 칭찬하였다.

그 후 견룡의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가난함을 이유로 사양했으며, 뒤에 추밀원부사에 이르렀다.
수평의 아들 위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중서문하 평장사 등을 거쳐 태자태사를 역임했으며, 그의 아들 단은 충렬왕 때 전리총랑으로 3도를 다스려 폐단을 일소하고 지첨의부사에 올라 찬성사에 이르렀다.

첨의정승 부(傅)는 가문이 자랑하는 인물로서 그를 포함하여 다섯 아들과 세 명의 사위 등 아홉 명 모두가 봉군되므로 [당대구봉군]으로 일컬어졌다. 그의 다섯 아들 중에서도 셋째인 고는 문하시중을 지냈고, 넷째 재는 충선왕의 양자로 들어가 계림부원대군에 봉해졌으며, 손자인 엄과 숙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개성의 두문동에 은거하며 충절을 기리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검교좌정승을 지낸 희(僖)의 아들 근(近)은 어려서 당대의 석학 이색과 정몽주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공민왕 때 17세로 문과에 급제하니 왕이 "어린 나이에 무슨 과거를 보는가" 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이색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그릇이 커서 장차 큰 재목이 될 사람이오니 나이를 생각지 마옵소서" 하며 두둔해 주었다. 그는 춘추관 검열을 시작으로 벼슬길에 등용되어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한 후 우왕 때 대사성을 거쳐 예의판서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 된 후 태종 때 좌명일등공신으로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왕명을 받아 [동국사략]을 찬했다. 그는 성리학자 이면서도 문장이 뛰어나 저서로 남긴 [입학도설]이 후일 이황, 장현광 등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후에 벼슬이 대제학과 의정부 찬성사에 이르렀고, 그의 둘째 아들 제(踶)가 세종 때 정인지, 안지 등과 함께 유명한 [용어비천가]를 지어 왕에게 바쳤다. 근의 셋째 아들인 규(跬)는 태종의 셋째 딸 경안공주와 혼인하여 길창부원군에 봉해지고, 의용위 절제사를 역임했다.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철(轍)과 그의 아들 율(慄)은 안동권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율은 임진왜란 때 광주목사로 방어사 돈영의 휘하에서 중위장이 되어 금산군 이산사에서 왜군을 대파하였고, 전라도 순찰사에 승진한 후 정병 8천 명을 이끌고 병마절도사 선거이를 부사령관으로 하여 서울로 진격하다가 수원에서 다시 적을 대파한 후,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서 적의 3만 대군과 싸워 2만 4천의 사상자를 내게 했다.

이것이 유명한 행주대첩이며, 아녀자들의 치마폭에 돌을날라 투석전으로 적을 무찔렀다 하여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기도 했다. 이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라 정유왜란에서도 많은 공을 세워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선무일등공신으로 영가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밖에 인물로는 근의 증손 언이 중추원부사를 지내고 정난공신으로 복성군에 봉해졌으며, 8세손 길은 상주 판관으로 임진왜란 떼 공을 세워 상주의 충렬사에 계향되었다.

중종 때 정국공신으로 영가부원군에 봉해진 조는 첨의정승 부의 8세손으로 벼슬이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대재는 호조판서를 지내고 그림에도 뛰어나다. 한편 대사헌, 부제학 등을 지낸 해는 대재의 아들로 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대운의 손자 중경과 함께 이름을 남겼다.

복야공파에서는 수홍의 증손 한공이 고려 충숙왕 때 찬성사를 지내고 이제현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문명을 떨쳐 뒤에 도첨의정승에 올라 예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의 동생 한유는 평장사를 지냈으며, 한공의 아들 중화는 조선 태종 때 영의정에 올라 예천백에 봉해지고 고사, 의학, 지리, 복서에 정통하였으며, 글씨는 전서에 능했다. 연산군 때 대사헌을 지낸 경우는 한공의 7세손이며 후손 도는 참의를, 선은 사복시정을 지냈다.

문종의 국구로 화산부원군에 봉해진 전은 시조 행의 16세손이며, 그의 아들 자신이 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우찬성을 지낸 발과 대사헌, 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성리학자로 이름난 상일 등이 복야공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인가파의 인물로는 감이 익대 및 좌리공신으로 성종 때 이조판서에 올랐고, 그의 7세손 상하는 거유 송시열의 수제자로서 숙종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과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상하의 동생 상유도 송시열의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학자로서 이름을 날렸으며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상유의 아들 혁과 헌종 때 영의정을 지낸 돈인이 상하의 6세손으로 인가파를 빛낸 후손들이다.

좌윤공파 지정의 아들 세위는 정용별장으 지냈고, 그의 7세손 진은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전주판관을 지낸 후 조선에 와서 형조 및 이조판서를 거쳐 세종 때 좌의정에 올랐다.

그밖에 인물로는 선조 때 시인으로 이름난 호문이 어려서 이퇴계의 문하에서 글을 읽고 진사시에 올랐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 기슭에 무민제를 짓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특히 그는 학행으로 이름을 날려 많은 시가를 남겼는데 [독락팔곡], [한거십팔곡] 등이 유명하고 저서로는 [송암집]이 전해진다.

한말의 대신 중현은 고종 때 한성부윤과 참찬 등을 거쳐 법무 및 농상공부 대신을 지냈고, 기일은 한민족 총무로 독립운동 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살해되어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단장이 수여되었다.

또한 학규, 병덕, 동진, 준 등도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바쳤고, 병덕과 동진은 민족대표 33인중에 한 사람으로 명문의 대를 이어 가문을 빛낸 자랑스러운 후손들이다.

<집성촌>

경북 영주시 영주동
강원도 평강군 일원
경북 봉화군 봉화면 유곡리
경북 안동시 법상동
경북 예천군 용문면 저곡동

출전 : 경주 김문 계림군파 홈페이지
참고 : history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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