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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03-02 (일) 09:11
분 류 사전2
ㆍ조회: 846      
[성씨] 안동권씨 (전통족보문화사)
안동 권씨(安東權氏)

안동(安東)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동부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고대(古代)의 창녕국(昌寧國)이었는데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고타야국(古陀耶國)·고창군(古昌郡)으로 불리웠고,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견훤(甄萱)과 싸워 전공을 세움으로써 안동부(安東府)로 승격되었다. 그후 영가군(榮可郡) 또는 복주(福州)로 개칭되었다가 1361년(공민왕 10) 안동대도호부(安東大都護府)로  승격되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의 시조(始祖) 권행(權幸)은 본래 신라(新羅)의 천년사직이 기울어 가는 서기 927년 후백제(後百濟) 견훤(甄萱)이 신라에  침입하여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하던 경애왕(景哀王:제55대 왕, 재위기간:924∼927)을 자살하게 하자 이에 격분한 김행(金幸)은 견훤의 군사를 맞아 싸우고, 김선평(金宣平:신안동 김씨의 시조), 장길(張吉:안동 장씨의 시조) 등과 함께 태조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창업에 공(功)을 세웠다.

이어 태조(太祖)가 기뻐하며 이들에게 삼한벽상아부공신 삼중대광태사(三韓壁上亞父功臣三重大匡太師)를 제수하고, 김행(金幸)에게는 <능히 기미에 밝고 권도에 통달하다>하여 권씨(權氏)의 성(姓)을 내리고 고창군(高昌郡)을 안동부(安東府)로 승격하여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니 안동 권씨(安東權氏)가 문호(門戶)를 열게 되었다.

일찍이 우리나라 유림(儒林)의 발상지(發祥地)로 알려진 영남내륙(嶺南內陸)에 깊숙히 뿌리를 내린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고려창업에서부터 두각(頭角)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오면서 명문대가(名門大家)로 확실한 기초(基礎)를 다졌으며, 10세를 전후하여 15파로 나누어졌다.

안동 권씨(安東權氏)에서 역사를 빛낸 두드러진  인맥(人脈)을 살펴보면 청덕(淸德)으로「고려사(高麗史)」에 기록된 수평(守平)의 손자(孫子) 단(단)이 충렬왕(忠烈王) 때 명신(名臣)으로 전리총랑(典理摠郞)을 지내며 3도를 다스려 폐단을 일소했고, 판위위시사(判衛尉寺事)로 시관(試官)을 겸임하여 권한공(權漢功)·최한지(崔漢之)·백이정(白頤正) 등 인재를 천거하여 그의 선견지명이 후세에 높이 평가되었다.

그의 아들인 부(傅)는 주자학(朱子學) 발전의 선구적인 학자(學者)로 「사서집주(四書集註)」·「은대집(銀臺集)」·「효행집(孝行集)」 등의 저서(著書)를 남긴 청백리(淸白吏)였다. 특히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인 자신을 비롯하여 아들 5형제 준(準:고창부원군), 종정(宗頂:광복군), 고(皐:영가군), 왕후(王煦:본명은 재, 계림부원대군), 겸(謙:복안부원군)과 3명의 사위 이제현(李齊賢:경주 이씨, 계림부원군)·왕숙(정순부원군)·왕순(회안대군)이 모두 봉군(封君)되어 <당대구봉군(當代九封君)>으로 명성을 떨쳤다.

충선왕(忠宣王)의 귀염을 받아 양자(養子)로 입양한 재(載)는 종실성(宗室姓)인 왕씨(王氏)로 개성(改姓)하여 왕후(王煦)라고 개명하고 아들 왕중귀(王重貴), 손자(孫子) 권숙(權肅)으로 대(代)를 이었으나 고려의 멸망과 더불어 권씨(權氏)로 복성(復姓)하였다.

원(元)나라 만권당(萬卷堂:고려 26대 충선왕이  원나라 연경에 설립한 독서당)에서  문명(文名)을 떨쳤던 한공(漢功)은 수홍(守洪)의 증손(曾孫)이며,  그의 아들 중화(仲和)는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으로 태종(太宗) 때 영의정(領議政)이 되어 여천백(呂泉伯)에 봉해졌다.

우왕(禑王) 때 좌사간(左司諫)으로 재직중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안동(安東) 옥산동(玉山洞)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정(定)은 태종(太宗)이 대사간(大司諫)·대사헌(大司憲)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끝내 거절하고 절개를  지켜 당시 사람들이 그 곳을 기사리(棄仕里)라고 불렀다.

한공(漢功)의 7세손이며 판관(判官) 질(牲)의 아들이자 함종부원군(咸從府院君) 어세겸(魚世謙)의 사위인 경우(景祐)는 당시 정희왕후(貞熹王后:세조의 비)의 친아우이며 우의정(右議政) 윤사흔(尹士昕)의 친형으로 세도의 핵심에 놓인 영평군 윤사분(尹士昐)이 중국(中國)에 사신(使臣)으로 다녀오면서 외래품을 많이 사와 사치하고 치부(致富)하는 성향이 있어 외래품 밀수를 적발, 직접 임금에게 고하여 옥에 가두었다.

성종(成宗)은 이같이 곧은 신하가 해침을 받을까 우려하여 세 계급이나 울려 신분을 보장해 주었으며 할머니인 정희왕후의 윤사분 구명운동도 지조와 영기있는 신하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거절하였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로 세도가 으뜸이었던 임사홍(任士洪)의 탄핵을 청원한 것도 경우(景祐)였는데 임사홍(任士洪)은 누가 주동이 되었는지도 모르고 경우(景祐)의 집에 찾아와“누가 감히 이 의논을 내었느냐”고 묻자 경우는 “오직 나라야 감히 할 수 있다”고 하니 임사흥은 기가 막혀 아무말도 못하고 물러갔다고 한다.

안동 권씨 가문(家門)에 가장 번성한 인맥(人脈)을 이룬 고(皐:겸교시중을 역임)의 아들 희(僖)는 조선개국원종공신(朝鮮開國原從功臣)으로 태종조(太宗祖)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을 지내고 영의정(領議政) 중화(仲和)와 함께 국가 원로들의 교유단체인 기영회(耆英會)를 설립하였으며, 슬하에 아들 화(和:삼사우사)·이사(二巳:출가)·충(衷:의정부 찬성사)·근(近:대제학, 좌명 1등공신)·우(遇:예문관 제학) 5형제를 낳아 명문(名門)의 기반을 닦았다.

조선조에서 최초로 대제학(大提學)을 역임한 근(近)은 당시 문장(文章)으로 명성을  떨쳤고, 나라의 예문(禮文)과 중국에 보내는 글은 모두 그가 지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특히 그는 얼굴빛이 검어서 사람들이 까마귀(烏)라 별칭하였으므로 자칭 소오자(小烏子)라 하였고, 공민왕(恭愍王)이 전부터 나이가 너무 적은 사람이 과거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기던 차에 근(近)이 18세로  병과(兵科)에 급제하자 왕이 노하여 “저렇듯 나이가 적은 자도 과거에 올랐느냐”하니 공거(貢擧)를 맡은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대답하기를 "그릇이 커서 장차 크게 쓸 사람이오니 나이가 적은 것으로 볼 것이 아니옵니다”하자 왕의 마음이 풀어졌다고 한다.

그의 학문(學問)이나 문장(文章)은 그에게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게 실망시키지 않을 정도였는데 경학(經學)에도 밝아「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했고, 그의「입학도설(入學圖說)」은 후일 이황(李滉)·장현광(張縣光)과 같은 석학(石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근(近)의 둘째 아들 제(踶)는 문형(文衡)으로 평생동안 세종(世宗)의 문신정치(文臣政治)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정인지(鄭麟趾)·안지(安止) 등과「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지어 바쳤다. 일찍이 그가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자 태종(太宗)은 “내 일찍 권근의 죽음을 슬퍼하였더니 이제 장원에 그 아들을 얻고 보니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제(踶)의 아들로는 35세 때 과거에 장원하여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르고 정난좌익공신(靖難佐翼功臣)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진 맏아들 남(擥)과  좌익 2등공신(左翼二等功臣)으로 화산군(花山君)에 봉해진 반(攀), 연천 현감(連川縣監)을 역임한 휘, 정난3등공신으로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진 경(擎)등 4형제가 있으며, 남의 아들 건(健)은 학문(學問)이 뛰어났고, 연산조(燕山朝)에 성현(成俔) 등과 함께「역대명감(歷代明鑑)」을 지어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서예(書藝)에도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1447년(세종 29)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절(節)은 안동 권씨의 충맥(忠脈)을 이은 인물(人物)이다. 그는 생김새가 기이하고 키도 컸으며 힘도 무척 세어 당대에 남이(南怡)와 더불어 소문난 장사였다.

세조(世祖)는 정란(靖難)하기 전 절(節)이 문무(文武)를 겸전한 인재임을 알고 찾아와 술을  마시면서 거사의 뜻을 의논하였으나 그는 청농(晴聾)이라 하여 거짓으로 먹은 척하고 응하지 않았으며, 정란이 일어난 후에도 김시습(金時習)처럼 미친 척하며 떠돌이로 여생을 보내며 끝까지 절의를 지켰다. 그러므로 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여(趙旅)·정보(鄭保)·성담수(成聃壽) 등과 더불어 <절의 8현(節義八賢)>으로 일컬어진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고급사(告急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헌한 협( )은 선무 3등공신(宣武三等功臣)으로 길창군(吉昌君)에 봉해졌고, 그의 손자(孫子) 대임(大任)은 정선옹주(貞善翁主:선조의 딸)와 혼인하여 길성위(吉城尉)에 봉해졌으며, 대운(大運)은 숙종(肅宗)대 이름난 상신(相臣)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대재(大載)와 함께 명성을 떨쳤다.

1547년(명종 2)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구례(求禮)에 유배되었던 벌(橃)은 풍채가 수려하고 성품이 검소하여 항상 악당의 세력에 항거하여 가난한 선비같이 살았다.

명종(明宗)의 살아있는 사전(辭典) 구실을 하였던 철(轍)은 선조(宣祖) 때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궤장(几杖)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노년(老年)에는 걸음걸이가 불편하여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까지 임금의 잦은 부름을 받은 명상(名相)으로 그의 아들이 임진왜란  때 행주대첩(幸州大捷)의 명장(名將) 율(慄)이다.

율(慄)은 충의(忠義)로 가통(家統)을 계승한 권문(權門)의 자랑으로, 일지기 한나라 영상(領相)의 집안에서 태어나 1582년(선조 15)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마칠 때까지 오직 나라를 위하여 충렬(忠烈)을 다했다.

특히 그는 사람을 거느림에 있어서 잘 친화하고 사랑하여 성심을 보이고  말과 기색이 강개(慷慨)하니 주위의 칭찬을 받았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국운(國運)이 위태롭게 되자 광주 목사(光州牧使)에 임명되어 전라도 순찰사 (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의 중위장(中衛將)으로 용인(龍仁)전투에서 패전했으나 금산(錦山)의 이치령(李峙嶺) 싸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정병 8천 명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던 도중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서 다시 적을 대파한 후 한강을 건넜다.

행주산성에서 2천 8백 명의 병력으로 적의 3만 대군과 싸워 2만 4천의 사상자를 내어 유명한 행주대첩의 전공을 세웠고, 이때 아녀자들의 치마폭에 돌을 날라와 투석전으로 적을 무찔렀다 하여 행주치마의 유래를 낳기도 하였다.

1599년(선조32) 가을에 병이 나서 강화(江華)의 촌 집으로 돌아갔다가 병이 위독해지자 한양(漢陽)에 우거(寓居)하던 집에서 일생을 마쳤으며, 아들이 없어 사위인 오성부원권(鰲城府院君) 이항복(李恒福)으로 혈손을 이었다.

한편 기호학파(畿湖學派 : 조선 선조 이후 율곡 이이를 조종으로 하는 기호지방의 성리학자들에 대한 총칭)로서 예론(禮論)에 밝았던 탄옹(炭翁) 시(諰)는 인조(仁祖)와 현종(顯宗) 떼 누차 벼슬에 등용되었으나 불취하고 학문연구(學問硏究)에 전력했다.

우리 나라 정주학(程朱學)의 거두(巨頭)로 일컬어진 상하(尙夏)는 일찍이 송시열(宋時烈)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여 그의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으며, 1689년(숙종 15)에 일어난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이 사사(賜死)당하게 되자 달려가서 이별을 고하고 의복과 책을 유품으로 받아 가지고 돌아와 유언에 따라 청주(淸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웠고, 숙종(肅宗)의 총애를 받아 우의정(右議政)과 좌의정(左議政)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했다.

그 외 연산군(燕山君) 때 안처겸(安處謙)의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비명에 죽은 주(柱)·질(질)·전(전)의 3부자와 광해군(光海君) 때 척족(戚族)들의 방종을 궁류시(宮柳詩)로 비방했다가 발각되어 유배길에 올랐던 필(韠),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눈부신 활약한 응수(應銖)가 유명했으며, 순장(順長)은 병자호란에 강화도(江華島)에서 의병장(義兵將)을 모아 왜적과 대항하다 성(城)이 함락되자 우의정(右議政)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자결하여 충절(忠節)의 전통(傳統)을 이어온 명문(名門) 안동 권씨(安東權氏)를 더욱 빛냈다.

출전 : 한국성씨사료연구원 홈페이지, 전통족보문화사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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