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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5-13 (목) 22:54
분 류 사전2
ㆍ조회: 643      
[고대] 삼한 (브리)
삼한 三韓

삼국 시대 이전 한반도 중남부에 존재했던 정치 집단의 통칭.

마한(馬韓)ㆍ진한(辰韓)ㆍ변한(弁韓)을 말한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다양한 설이 제기되어왔으나, 일반적으로 마한은 경기도ㆍ충청도ㆍ전라도 지역에, 진한과 변한은 경상도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진한과 변한의 경우 대체로 낙동강 동쪽 지역을 진한, 서쪽 지역을 변한이라 하여 지역적으로 구분하기도 하나, 예외도 있어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다.

삼한 사회에 대한 사료로 가장 중요하면서 오래된 것은 중국측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그 내용이 〈후한서 後漢書〉ㆍ〈진서 晋書〉 등에 축약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들은 매우 소략하여 전모를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삼국의 역사를 중심으로 구성된 〈삼국사기〉ㆍ〈삼국유사〉 등 우리측 문헌 기록에는 더욱 단편적인 내용만이 실려 있어 삼한의 역사를 미궁에 빠뜨리고 있다.

역사

삼한의 형성 시기는 한(韓)이라는 명칭의 사용 시기와 일차적으로 관련된다. 한의 명칭은 위만(衛滿)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고조선 준왕(準王)의 세력이 한반도 중남부(충남ㆍ전북 일대)로 밀려오면서 사용되었다는 설도 있고, 이미 그 이전부터 청동기 문화를 기반으로 형성되어 있던 이 지역의 토착 세력 집단에 대해 쓰이고 있었다는 설 등이 있다.

여하튼 고조선의 유민 세력이 남하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하던 집단이 있었음은 고고학상 분명한 사실이므로 이들이 삼한의 모체가 된 것은 인정된다. 그러나 삼한으로 분립된 것은 준왕 세력의 이주 이후 위만 조선의 멸망에 따른 파상적인 이주민의 남하 과정에서 이들이 토착 집단과 결합하며 각지에서 철기 문화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 세력들을 형성한 데에서 비롯한 듯하다.

삼한 중에서 으뜸ㆍ종가를 가리키는 '마'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마한이 가장 먼저 형성되어 종주의 위치를 차지했다. 진한의 경우는 위만조선 당시 한(마한)의 북쪽에서 중국과 직접교역을 시도했던 독자세력 진국(辰國)이 해체되면서 한의 영향력하에 진한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삼한은 지역적ㆍ문화적ㆍ경제적 친연성에 따라 3개의 그룹으로 나뉜다.

철기 문화를 배경으로 각지에서 성장해 나간 삼한의 소국들이 어느 한 세력에 의해 통합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삼한에는 각기 연맹체를 이끌어가는 맹주가 있었지만, 후대와 같이 일원적인 집권 체제를 갖추고 초월적으로 군림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각각의 소국들은 자체 운동력을 가지고 중국 군현이나 여러 다른 세력들과 관계할 수 있었고, 단지 경제적ㆍ군사적 필요성 등에 의해 맹주국과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국들간의 분쟁에 따라 어느 한 소국이 다른 소국에 의해 통합되어 정치적ㆍ경제적으로 복속되는 경우가 많이 일어나게 되었다.

3세기 전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삼한 소국들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존립하고 있었다. 삼한의 소국들은 계속 세력이 우세한 집단에 의해 군사적으로 정복당하거나 그 위협에 못 이겨 스스로 복속해 들어감으로써 결국 4세기 중반에 이르러 마한 지역은 백제에 의해, 진한지역은 신라에 의해 모두 통합되었다. 변한의 경우는 통합의 구심체가 강력하지 못했던 관계로 후기까지 가야 연맹체라는 이름으로 소국들이 잔존했으나, 6세기 중반 이전에 신라에 의해 개별적으로 정복당하면서 소멸하고 말았다.

소국의 구조

삼한 소국으로는 마한 50여 개, 진한과 변한 각 12개씩의 이름이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전하고 있다. 소국들은 큰 경우 1만여 가(家)로부터 600~700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로 이루어져 있었다. 평균적으로는 2,000~3,000가로 이루어진 소국들이 많았다고 짐작된다. 영역상으로는 현재의 군(郡) 정도의 세력범위를 가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국에는 중심 읍락인 국읍(國邑)과 다수의 일반 읍락이 있었다. 국읍은 상대적으로 세력이 강하고 정치적ㆍ경제적ㆍ문화적으로 주도적인 기능을 수행했다. 국읍과 읍락은 종래 씨족 공동체 단계의 혈연에 의한 결합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연에 의해 형성된 결합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국읍에는 소국의 규모에 따라 신지(臣智)ㆍ험측(險側)ㆍ번예(樊濊)ㆍ살해(殺奚)ㆍ읍차(邑借)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통솔자가 있었고,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이 따로 있어 당시 제정(祭政)이 분리된 구조였음을 알 수 있다. 국읍의 수장은 각 소국간의 교역을 주관하고, 읍락에 대한 경제적ㆍ군사적 지배권을 행사했다.

각 소국에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이 있어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을 섬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죄를 지은 자가 이곳으로 도피하면 잡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재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계급분화에 기반한 새로운 지배질서 사이의 마찰을 줄이는 역할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물산과 풍속

삼한은 토착 농경 사회로서 토지가 비옥하여 벼농사를 비롯, 오곡을 재배했고, 양잠을 하여 면포를 직조했다고 한다. 진한과 변한에서는 특히 철의 산지가 많아 마한ㆍ예맥(濊貊)ㆍ왜 등이 철을 구해갔을 뿐 아니라 낙랑(樂浪)과 대방(帶方) 등 중국 군현에서도 수입해갔다. 철이 마치 중국의 화폐와 같이 쓰였다고 하는 기록을 보아 당시 삼한 사회의 철생산과 거래는 매우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철제 농기구나 무기류의 대량 제작이 가능해진 것은 삼한 사회의 생산력에 상당한 발전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철을 장악한 소국과 그렇지 못한 각국간의 경제력의 차이로 인해 소국간의 분쟁이 발생하면서 삼한 사회의 통합 작업이 가속화되기도 했다.

가옥의 구조는 구덩식[竪穴式] 움집이 많았다. 장례에는 관(棺)은 있으나 곽(槨)이 없었다고 한다. 소와 말을 순장하는 풍속이 있었으며, 변한에서는 큰 새의 깃털을 이용하여 사망자의 승천을 빌었다. 왜와 가까운 변한의 일부 지역에서는 편두(扁頭)와 문신(文身)의 풍속이 성행했다.→ 마한, 변한, 진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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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삼한고 〈조선사연구초〉 : 신채호, 1929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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