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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6-22 (화) 08:50
분 류 사전2
ㆍ조회: 547      
[고대] 가야 (브리)
가야 加耶

기원 전후 시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경상도 서부 지역에서 존재하던 세력 집단 또는 국가들의 총칭.

가야 위치도. 한국브리태니커백과사전 지도
가야 위치도

가야(伽倻:加耶, 伽耶)ㆍ가라(加羅)ㆍ가량(加良)ㆍ가락(駕洛)이라고도 한다. 한때 가야사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권이 이를 식민지배했다고 하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로 왜곡되기도 했다 (→ 색인 : 임나일본부설).

그러나 그후 이 지역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축적되어감에 따라 이러한 억설을 극복하고, 현재 가야사 자체의 독자적 발전 과정이 체계화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고 있다. 가야사는 대체로 5세기 후반을 경계로 하여 전기와 후기로 구분된다.

전기는 김해 지역의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을, 후기는 고령 지역의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 연맹을 의미한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철기 문화가 보급되면서 경상도 해안 지역의 여러 집단들도 일정한 정치 세력으로 결집되어 소국(小國) 단위로 통합되기 시작했다. 이들 소국들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하여 3세기경에 이르면 상호 연맹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이때부터 이들은 변한(弁韓)으로 총칭되었다.

전기 가야 연맹의 맹주국은 수로왕이 김해 지역의 9간(九干)을 통합하여 건설한 구야국이었다. 그러나 가야 제국의 연맹 관계는 백제국(佰濟國)을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나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 신라에 비하면 지극히 느슨한 것이었다. 이것은 상당 부분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지정학적ㆍ경제적 조건에서 나온 것이다.

전기 가야 연맹의 분포 범위는 김해를 중심으로 한 낙동강 하구 및 경상남도 해안 일대의 소국들에 국한되며, 내륙 지역에는 아직 가야 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해상 교통의 요지에 위치할 뿐 아니라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랑과 왜를 잇는 해상 교역의 중개지로 발달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의 교역 거점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이 밀려들어와서 소국 단위로 수준 높은 문화를 이루고, 각기 독자적인 교역권을 형성해가고 있었다.

따라서 가야는 대외적으로 신라ㆍ백제ㆍ왜 등의 이웃 집권 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이 되었으며, 내부적으로는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 우세 세력에 의한 일원적인 통합이 어려웠고 다원적이고도 완만한 연맹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고성ㆍ사천ㆍ마산ㆍ동래 등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서 김해에 못지않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면모를 반영한다. 이와 같은 정치적ㆍ문화적 특징으로 전기 가야 연맹은 집권적 통합력을 진전시켜간 이웃 신라ㆍ백제 등의 도전에 직면하여 재빨리 대처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구나 4세기에 이르러 교역 상대국이자 후원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낙랑과 대방이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완전히 축출되면서 주변의 세력 판도가 일변하자, 이러한 가야의 취약성은 현실적인 문제로 나타났다.

고구려는 반도에서의 경쟁국인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 후원했고, 이에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의 문물을 도입하여 바다 건너 왜에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정치적 중심지로 부상하면서 전통적인 교역 중심지인 가야 지역을 잠식해갔다. 백제는 왜와 연결하여 이를 견제하면서 역시 가야 지역에 친백제 세력을 만들어갔다. 이로 인해 가야 연맹의 여러 소국은 다시 친신라 세력과 친백제 세력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가야 중심 지역이 친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卓淳國:지금의 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서부의 여러 세력은 친백제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 고구려 광개토왕의 가야 지역 백제계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정토(征討)가 진행되면서 가야의 여러 세력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정치적으로 예속되어가는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었다.

5세기 이후 가야의 구심점은 서서히 낙동강 서안의 경상도 내륙 지역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내륙 지역은 전화(戰禍)를 거의 입지 않았고, 해안 지역의 선진 세력들이 이주해 풍부한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게 되었다. 특히 고령 지역의 반파국(伴跛國)은 집권적 정치 세력이 대두하여 가야 지역의 새로운 맹주국으로 부상했다. 흔히 이를 후기 가야 연맹 혹은 대가야 연맹이라 부른다.

후기 가야 연맹은 반파국을 중심으로 하여 보다 진전된 통합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5세기 후반 무렵부터는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을 파견하고 삼국 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ㆍ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기도 하고, 백제ㆍ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 초에는 백제와의 국경 지역인 기문(己汶:지금의 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왜와의 교역 중심지인 대사(帶沙:지금의 하동)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 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 연맹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기울였지만, 전기 가야 연맹을 구성한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완전 복속되어 562년(진흥왕 23)에 신라 장수 이사부(異斯夫)와 사다함(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소멸하였다.

<강봉룡(姜鳳龍) 글>

참고문헌

신비왕국 가야 : 고준환, 우리출판사, 1993
가야사연구 : 천관우, 일조각, 1991
고조선사ㆍ삼한사 연구 : 천관우, 일조각, 1989
삼한사회 형성과정 연구 : 이현혜, 일조각, 1984
가야사 : 문정창, 백문당, 1978
가야사 연구의 시간적ㆍ공간적 범위 <한국고대사 논총> 2 : 김태식, 지식산업사, 1991
가야의 역사적 추이 <가야문화> 2 : 김기웅, 가야문화연구원, 1989
가야의 국가형성 <가야문화> 1 : 김정학, 가야문화연구원, 1988
6세기 전반 가야남부제국의 소멸과정 고찰 <한국고대사연구> 1 : 김태식, 지식산업사, 1988
4세기 가야사회의 교역체계의 변천 <한국고대사연구> 1 : 이현혜, 지식산업사, 1988
5세기 후반 대가야의 발전에 대한 연구 <한국사론> 12 : 김태식, 서울대학교 국사학회, 1985
가야사의 연구 <사학연구> 37 : 김정학, 한국사학회, 1983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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