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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11 (토)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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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507      
[고려] 무신정권 (민족)
무신정권 武臣政權

고려 후기 무신들에 의해 문ㆍ무 제반의 정치 권력이 행사되던 시기의 특수한 형태의 정권. 1170년(의종 24)부터 1270년(원종 11)까지의 시기에 걸쳐 존속되었다.

[성립 배경]

무신 정권의 성립은 1170년 정중부(鄭仲夫) 등에 의한 무신란에서 비롯되었다. 무신란의 원인은 몇 가지로 설명될 수 있다.

첫째, 고려 전기 사회가 문벌 귀족들에 의한 문신 중심의 정치가 행해져 상대적으로 무신들에 대한 차별대우가 있었다는 점이다. 제도적으로도 무반은 정3품직인 상장군을 최고직으로 했고, 2품 이상직의 재상직에는 올라 갈 수 없었다.

따라서, 재상직은 문신이 독점하게 되었으며, 군대의 최고 지휘 통솔권마저도 문신이 장악하였다. 구주대첩(龜州大捷)의 강감찬(姜邯贊), 묘청(妙淸)의 난을 토벌한 김부식(金富軾), 여진 지역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윤관(尹瓘) 등 당시 군의 최고 지휘권을 가진 이들은 모두 문신 출신이었다.

둘째, 무신란에 적극적인 협조를 한 군인들의 불평ㆍ불만도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전시에는 물론 평상시에도 공역(工役)에 동원되었으며, 심지어는 군인전(軍人田)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였다.

한편, 무신들에 대한 외면적인 멸시ㆍ천대에도 불구하고, 무신들의 실제적인 세력은 성장하고 있었던 것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또한, 비대해진 문신 세력과 국왕간의 권력에 대한 갈등과 마찰이 난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도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요소들은 문신 중심의 정치를 구현해왔던 고려 전기 사회를 붕괴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고려 사회는 무신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무신들에 의해 새로운 형태의 정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성립과 몰락]

무신 정권은 1백년간 존속되었는데, 변천 과정은 대체로 성립기ㆍ확립기ㆍ붕괴기로 구분하고 있다. ① 성립기는 처음 권력을 장악한 이의방(李義方)ㆍ정중부를 거쳐 경대승(慶大升), 이의민(李義旼)에 이르는 시기, ② 확립기는 최충헌(崔忠獻)으로부터 최씨 4대가 세습 집권한 60여 년간의 시기, ③ 붕괴기는 김준(金俊)과 임연(林衍)ㆍ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집권하는 기간을 말한다.

정중부 등은 1170년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 정권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들 사이의 갈등은 그치지 않았다. 쿠데타의 동지들을 제거한 정중부는 1179년(명종 9) 청년 장군 경대승에게 살해당했고, 경대승이 4년만에 병사, 이에 이의민이 정권을 독점했으나 1196년 최충헌에게 살해당하였다.

최충헌의 등장은 고려 무신 정권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오게 하였다. 최충헌이 구축한 강력한 독재 체제는 정권을 자손에게 세습하게 함으로써 4대 60여 년간의 최씨 정권을 형성하게 하였다. 최충헌의 뒤를 이어 최우(崔瑀)가 독재 체제를 더욱 강화했고, 다시 최항(崔沆)ㆍ최의(崔洑)로 이어졌다.

그러나 최우가 집권한 지 10여 년만에 몽고가 계속 침입했고, 그 항전을 주로 최씨 정권이 담당했기 때문에 많은 시련을 겪게 되었다. 대내적으로 화전(和戰)을 둘러싼 대립ㆍ갈등과 전쟁으로 입은 사회ㆍ경제적인 피폐는 최씨 정권을 크게 약화시켰다.

거기에 최의는 어린 나이에 집권한 데다가 어리석고 나약해 간사한 무리가 날뛰고 참소가 성행해 뇌물이 공행되고 횡령이 자행되었다. 또, 계속되는 흉년을 제대로 구제하지 못해 민심을 크게 잃었다.

1258년 마침내 별장 김준(金俊)과 대사성 유경(柳璥) 등이 최의를 제거하고, 최씨 정권을 타도하였다. 그리하여 표면상 대권은 왕에게 돌아갔으나, 실권은 무신 김준ㆍ임연ㆍ임유무 등이 차례로 행사하게 되었다. 김준은 최씨 정권을 타도하고, 최씨 정권 이래 무신 집권자가 지니는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임명되어 정권을 좌우하다가 1268년(원종 9) 임연에게 암살을 당하였다.

임연은 일찍이 김준의 천거로 낭장이 되고, 또 최의를 제거해 최씨 정권을 타도하는 데도 가담하였다. 김준을 제거하고 나서는 왕의 폐립을 자행하는 한편,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권세를 떨쳤다.

그러나 1270년에 병사하고, 뒤를 이어 아들 임유무가 교정별감이 되어 또한 권세를 부리다가 같은 해 제거를 당하였다. 임유무의 제거는 고려 무신 정권의 완전 몰락을 뜻하는 것이며, 1백년간의 무신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정치]

무신 정권 시대의 정치는 크게 전기(성립기)와 후기(확립기ㆍ붕괴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전기

전기에는 무신 정권으로서 아직 독자적인 집정부(執政府)를 갖추지 못하고 전대의 왕권 체제를 그대로 이용하면서 무신 집권자로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일종의 과도적인 무신 정권이었다. 정중부는 왕권 체제하의 관직인 평장사(平章事)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이의민은 좌복야(左僕射)를 거쳐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이들은 관직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해 동ㆍ서반(東西班)을 위압했고, 국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이들의 초월적인 권력은 왕권 체제 아래의 정치 기구의 하나인 중방(重房)을 배경으로 행사되었다.

중방은 원래 상장군과 대장군의 합좌 기관이었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성립되고 나서는 무신 집권자들이 그의 보호를 받기도 하고 또는 그를 이용하기도 하면서 초월적인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이렇게 무신 정권 전기의 정치는 중방을 구성하는 무신 전체가 정치에 참여했으므로 정치의 형태를 중방 정치(重房政治)라 일컫는다.

중방 정치는 무신들에 의한 일종의 합의제 정치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합의제 정치가 행해진 것은 무신집권자들이 아직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지 못한, 다시 말해 무신 정권으로 확고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과도적인 현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전기의 특징은 최씨 정권이 성립되면서 그 면모가 크게 달라졌다.

(2) 후기

최씨 정권은 독자적인 집정부를 갖추고 이를 중심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는 무신 집권자 1인 독재 체제를 확립하였다. 1인 독재 체제의 확립은 곧 무신 정권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며, 그 정비는 최충헌으로부터 시작되어 그의 아들 최우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되었다.

최충헌은 1196년(명종 26)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많은 조신(朝臣)을 학살하였다. 또한 왕에게 봉사 10조(封事十條)를 올려 정치ㆍ경제ㆍ사회의 혼란을 시정하도록 청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최충헌이 장차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마침내 최충헌은 명종ㆍ신종을 폐하고, 희종을 세웠다.

한편, 1209년(희종 5) 청교역리(靑郊驛吏)와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연결해 최충헌을 죽이려 한 사건을 계기로 교정도감(敎定都監)을 설치하였다. 교정도감은 처음에는 반대 세력을 탄압하는 데 이용되었으나, 뒤에는 비위의 규찰, 인사 행정, 세정(稅政), 기타 서정(庶政)을 처리하는 초월적 기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는 그대로 최씨 정권의 집정부가 되었다. 이리하여 최씨 정권은 왕권 체제와는 별도로 강력한 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교정도감에 대해 ≪고려사≫ 백관지에 "최충헌이 정권을 오로지함에 모든 행위가 교정도감으로부터 나왔다."라고 하여 그 기능이 강력했음을 설명해주고 있다. 교정도감은 최씨 정권기는 물론 김준과 임연 부자로 이어지다가 무신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교정별감은 최충헌이 교정도감을 설치하고, 그 장인 교정별감이 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 뒤의 무신 집권자들도 이 교정별감에 임명되어 그 직책을 가지고 정치를 좌우하였다. 이렇게 교정별감은 무신 집권자로서 당연히 임명되는 것이었으나, 임명은 장군직에 있는 자라야 되었던 것 같다.

최충헌이 장군의 신분으로 교정별감이 되었고, 최우 또한 장군으로서 부직(父職)을 이어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항은 최우의 서자로서 일찍이 출가해 선사(禪師)가 되어 이름을 만전(萬全)이라 하다가 1247년(고종 34)에 환속,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이 되었다가 부직을 이어 교정별감이 되었다. 최의는 최항의 사생아로서 최항이 죽자 차장군(借將軍)이 되고 곧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김준 역시 장군으로서, 임연ㆍ임유무 부자는 군직자로서 각각 교정별감에 임명되었다.

한편 교정도감에 버금가는 권력 기구로 정방(政房)이 있다. 정방은 1225년(고종 12) 최우가 그의 사저에 설치한 인사 행정, 즉 전정(銓政)을 취급하는 기관이었으나, 최우가 죽은 뒤 역대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계승되던 권력 기구였다. 무신 정권이 몰락된 뒤에도 존속해 국가 기관이 되었다. 이후 존폐가 있기는 했으나, 지인방(知印房) 또는 차자방(箚子房)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다가 창왕 때 상서사(尙瑞司)로 개편되었다.

정방에 대해 ≪고려사≫ 최이전(崔怡傳)에는 "백관이 최우의 사저에 가서 정안(政案)을 올리면 최우는 마루에 앉아 이것을 받고, 그 때 6품 이하의 관리는 마루 아래에서 재배하고 땅에 엎드려 감히 올려보지를 못하였다. 최우는 이로부터 정방을 사저에 설치하고 문사(文士)를 뽑아 이에 속하게 하여 그 이름을 필도치(必斤赤)라 하고, 백관의 인사를 처리해 비목(批目)에 써서 왕에게 바치면 왕은 다만 이를 결재해 내릴 뿐이었다."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정방의 설치 경위와 기능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그러나 일국의 인사 행정권을 장악한 것은 이미 최충헌 때에 있었다. 최충헌은 이의민 일당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뒤 3년만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이부지사(吏部知事)를 겸해 문무관의 인사에 깊이 관여했으며, 교정도감을 설치한 뒤 인사 행정을 장악하고 독단하였다. 그러므로 정방의 설치는 새로운 것이 아니라, 종전의 교정도감의 기능 가운데 인사행정을 분리 독립시켜 그것을 한층 더 강화해 제도화한 것으로 여겨진다.

무신 정권이 유지될 수 있었던 배경은 무력이었고, 무력은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이 더 효과적이었다. 무신 정권의 사적인 무력 집단으로는 도방(都房)과 삼별초(三別抄) 및 마별초(馬別抄)를 들 수 있다.

① 도방은 원래 경대승에 의해 처음으로 설치된 사병 집단이었다. 경대승이 정중부 일당을 제거하자, 무신들은 경대승을 공동의 적으로 여기고 적의를 품게 되었다. 이에 경대승은 자신의 신변을 보호할 목적으로 결사대 백수십명을 사저에 머무르게 하여 그 이름을 도방이라 하였다. 경대승이 죽자 폐지되었으나, 최충헌이 부활시켜 크게 강화되었고, 정권을 지탱하는 중요한 무력적 지주가 되었다.

최충헌은 이의민을 타도할 무렵부터 많은 사병을 양성해왔으나, 1200년(신종 3) 그의 사병 집단을 6번도방(六番都房)이라 하여 최씨 정권의 권력 기구의 하나로 제도화하였다. 이것은 아들 최우 때에 더욱 강화되어 내ㆍ외도방(內外都房)으로 개편되었다. 내도방은 최우 자신과 저택을 호위하게 하고, 외도방은 친척과 기타 외부의 호위를 맡게 한 것 같다.

최항 때에는 분번제(分番制)를 더욱 확대해 36번으로 조직을 개편, 강화하였다. 도방 36번은 최우 때의 내ㆍ외도방을 통합해 확장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확장과 강화는 당시 몽고와의 전쟁이 절정에 달한 데 대한 조처로 보인다.

최의에 의해 계승된 도방 36번은 최씨 정권이 몰락된 뒤 조직의 일부에 변동은 있었던 것 같지만, 김준과 임연ㆍ임유무 부자에 의해 계승, 장악되다가 임유무의 몰락과 더불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렇게 도방은 무신 집권자들의 사적 호위 기관으로서 병력도 굉장해 규모가 클 때는 36번의 분번 조직으로 구성되었으며, 장비나 기동력에 있어서도 국가의 군대를 능가하였다.

② 삼별초는 최씨 정권 때 조직된 사병 집단이면서 동시에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반관 반민의 특수 군대였다. 삼별초는 최우가 야별초(夜別抄)를 편성, 도둑을 단속하기 위해 밤에 순찰을 시킨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도둑이 전국에서 일어나자, 이를 증강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나누었고, 거기에 몽고에 잡혔다가 도망온 자들로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해 완성을 보게 된 것이다. 완성 시기는 대체로 최항 때로 여겨진다.

삼별초는 최씨 정권의 조아(爪牙)로 이용되었으며, 김준과 임연 부자에게 계승되었다. 이후 삼별초의 항거로 발전되었으며, 결국 이것을 계기로 소멸되었다.

삼별초는 시초가 밤에 도둑을 단속하는 데 있었으나, 차차 임무가 확대되었다. 경찰 임무에 있어서 포도(捕盜)ㆍ금폭(禁暴)ㆍ형옥(刑獄)ㆍ국수(鞠囚)를 맡았다. 또 군사 임무로는 도성(都城)의 수비를 비롯해 친위대(親衛隊)ㆍ특공대(特攻隊)ㆍ정찰대(偵察隊)ㆍ전위대(前衛隊)ㆍ편의대(便衣隊) 등의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역할에 있어서 몽고에 대한 항전은 주목된다. 몽고와의 항전에서 전반기에는 정부군이 활약했으나, 후반기에는 정부군에 대신해 삼별초의 활약이 활발해 항몽 전쟁을 삼별초가 도맡아 행한 느낌마저 있다. 더욱이, 삼별초의 항거는 주체성 발휘에 있어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③ 마별초는 최우가 몽고 기병의 영향을 받아 설치한 것으로 보이는 기병대로서, 최씨 정권의 호위 및 의장대로 활약하다가 최씨 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소멸되었다. 최씨 정권의 가병(家兵)의 일종인 마별초는 도방과 더불어 장비와 치장이 굉장했다고 한다.

이 밖에 무신 정권의 특수한 호위 기관으로 서방(書房)이 있다. 서방도 최씨 정권기에 이루어진 권력 기구의 하나로서 최우에 의해 만들어져 임유무 때까지 계속되던 숙위 기관(宿衛機關)이었다.

≪고려사≫ 최이전에 보면 "최우의 문객 가운데는 당대의 명유(名儒)가 많아 이들을 3번으로 나누어 교대로 서방에 숙위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었으니, 최우는 문객 가운데 무사로써 도방을, 문사로써 서방을 구성했던 것이다. 이렇게 문사들로 하여금 교대로 숙위하게 한 것은 그들이 고사(故事)에 밝고 식견이 높아 정치 고문으로 하고자 한 데 있었다. 한편으로 문사들을 우대 포섭하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그리하여 문사들은 무신 정권 수립이래 최우 때에 이르러 정방이 설치되고 서방이 설치됨으로써 처음으로 안식처를 얻게 되었다. 서방은 3번의 분번제로 편성되어 도방ㆍ삼별초 등과 더불어 새 집권자 추대에 참여하기도 하고, 최씨 정권이 타도된 뒤 왕의 행차를 호위하기도 하였다.

무신 정권기에 정치적으로 크게 주목되는 것은 문신의 지위이다. 무신 정권은 성립 과정에서 문신들을 대량 학살했으나 그들이 표방한 것과 같이 문신들을 전멸시키지는 못하였다. 문신들이 비록 무력에서 열세였지만 그들이 쌓아온 세력 기반이 전멸을 당할 정도로 허약하지 않았다. 또한 무신들이 쿠데타에서 성공해 정권을 장악한 이상 필요 이상의 만행은 바람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학살을 모면한 문신들은 정치에서 추방을 당해야 하였다.

한편, 쿠데타에 성공해 성립된 무신 정권은 무인들만으로는 정무 수행이 불가능하였다. 무인들은 일반적으로 무식했고 정무에 경험도 없었다. 이에 무신 정권은 정무 수행을 담당할 새로운 문신을 활발히 등용하였다. 당시 문신층은 무신 정권과 타협할 수 있는 구문신(舊文臣) 계통과 향리 또는 중앙의 이속(吏屬) 등을 상대로 과거를 통해 등용하는 신진 문인들이었다. 그러나 전자는 일부였고, 후자가 대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리하여 무신 정권기에는 전 시대인 문신 귀족 정치 시대에 비해 과거에 있어 급제자의 수가 훨씬 많았다. ≪고려사≫ 선거지(選擧志)를 보면, 문신 등용 시험인 대업(大業 : 제술업과 명경업)에 있어 문신 귀족 정치의 전성기라 할 수 있는 예종ㆍ인종ㆍ의종 3대 65년간에 비해 시행 횟수나 급제 인원이 무신 정권기에 오히려 상회한 적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과거가 베풀어진 상황을 통해 무신 정권 시대에 새 문신층이 활발히 등용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최씨 정권기는 정방과 서방을 설치하고 문인을 우대, 포섭함으로써 저명한 문사들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사회ㆍ경제]

무신 정권이 수립된 뒤 사회적으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농민과 천민 등 하부 계층의 반란이 계속적으로 일어난 것이다. 지방관과 향리들이 농민에 대해 압박과 수탈을 감행함으로써 농촌 사회가 피폐되고 유민(流民)이 증가되어 마침내 도둑들이 횡행하고 반란이 일어났다.

무신의 난이 일어나던 의종 때만 하더라도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ㆍ의주(宜州 :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 등지에서 대규모의 도둑이 일어났고,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서는 수령을 내쫓는 반란이 일어났다.

농민의 난은 무신 정권의 성립 후 더욱 격화되었고, 천민들도 가담하는 대규모의 민란으로 발전해 사회는 더욱 혼란하였다. 이렇게 무신 정권 시대로 들어 민란이 격화된 것은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무신란으로 인한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폭발한 것이다. 민란의 원인은 대체로 농민의 궁핍, 민중의 성장, 중앙 통제력의 약화 등을 들 수 있다.

무신 정권기에 처음으로 일어난 민란은 1172년(명종 2) 서북면(西北面)의 창주(昌州 :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 성주(成州 :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 철주(鐵州 : 지금의 평안북도 철산)에서의 민란이었다. 이 반란은 지방관의 횡포에 분격해 일어났는데, 그 영향은 차차 전국적으로 미쳐 1175년 남적(南賊) 석령사(石令史)가 반란을 일으켰다. 석령사를 남적이라 한 것으로 보아 개성의 남쪽에서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남도 지방에서는 1176년 공주 명학소(鳴鶴所)에서 망이(亡伊)ㆍ망소이(亡所伊) 등이 무리를 모아 스스로 산행병마사(山行兵馬使)라 일컫고 반란을 일으켜 공주를 함락시켰다. 이 난은 규모가 매우 컸는데, 한때 덕산ㆍ직산ㆍ여주ㆍ진천ㆍ아산ㆍ청주 등지를 휩쓸다가 1년만에 평정되었다.

한편, 망이ㆍ망소이의 난과 때를 같이해 덕산을 중심으로 손청(孫淸)이, 익주(益州 :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에서는 미륵산적(彌勒山賊)이 반란을 일으켰다. 1182년 전주에서는 군인과 관노(官奴)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는 나라에서 배를 만들면서 관리들의 독촉이 너무 가혹한 데 기인하였다.

이 밖에도 남원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등 반란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남포의 민란은 충청도ㆍ전라도뿐만 아니라 경상도에서도 자주 일어났으며, 규모나 세력도 한층 더 컸다. 1186년 진주수(晉州守)ㆍ김광윤(金光允)과 안동수(安東守)ㆍ이광실(李光實) 등의 탐학이 심해 백성들이 반란을 꾀하려 하자 이들 수령을 귀양보낸 일이 있었다.

1190년 동경(東京 :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에서 반란이 일어나 사방으로 확산되었다. 즉, 동경에서 반란이 일어난 지 3년 뒤 운문(雲門 :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 : 지금의 경상남도 울산)의 효심(孝心) 등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은 뒤에 합세해 그 수가 몇 만에 달했으며, 신라의 부흥을 표방하였다. 이 반란은 결국 정부군에 의해 평정되고 말았지만, 밀양의 전투에서 반란군 7천여 인이 죽었다는 것으로 보아 반란의 규모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충헌이 집권하고 있던 1199년(신종 2)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도 강릉)에서 반란이 일어나 삼척ㆍ울진의 두 현이 함락되었다. 또 동경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 명주의 반란 세력과 합세해 이웃의 주(州)ㆍ군(郡)을 약탈하였다.

이듬해 밀양의 관노 50여 명이 운문의 반란 세력에 투속했고, 금주(金州 :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의 잡족인(雜族人)들이 호족을 살해하였다. 1202년 탐라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경주 별초군(慶州別抄軍)의 반란도 있었다.

최충헌 집권기에 경상도 지방에서 일어난 민란 가운데 진주 민란과 동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란이 규모가 가장 컸다. 진주에서는 평소에 주리(州吏)와 반목 대립해오던 공사(公私)의 노비들이 1200년 반란을 일으키고, 합주(陜州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의 부곡(部曲) 반란군과 합세해 기세를 떨치다가 1년 만에 평정되었다.

동경은 앞서 김사미ㆍ효심 등의 반란이 있었던 곳이었다. 그러나 1202년 또다시 일어나 "고려의 왕업이 거의 다 되었으나 신라가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라는 격문을 돌려 운문ㆍ울진ㆍ초전 등 경상도 일대의 반란 세력의 호응을 받아 그 세력을 꺾는 데 10여 년이 걸렸다.

이와 같이, 무신 정권기의 반란은 그 전과 후의 양상이 달라, 전기는 대개 단독 세력으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나, 후기는 반란 세력이 연합 전선을 형성해 규모와 세력이 비대화되었다.

이 외에도 1203년 영주의 부석사와 대구의 부인사, 청송의 쌍암사의 승도들이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간 일이 있었고, 1217년(고종 4) 서경(西京 : 지금의 평양)에서 최광수(崔光秀)의 반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1198년(신종 1) 개성에서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이다.

만적은 개성 북산에 올라 나무를 하다가 공ㆍ사노비(公私奴婢)를 모아놓고 "정중부의 난 이래 국가의 공ㆍ대부(公大夫)는 천인 계급에서 많이 나왔다. 장상(將相)이 어찌 처음부터 씨가 따로 있겠는가! 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인의 매질 밑에서 고생만 해야 할 것인가!"라고 선동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만적 등 1백여 명이 잡혀 죽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반란이 그들의 신분 해방과 더 나아가 정권을 탈취하려 했던 점에서 크게 주목을 끈다.

무신 정권 시대의 반란으로 또 한가지 주목을 끄는 것은 승려들의 반란이다. 최충헌이 집권하기 이전에도 1174년 중광사(重光寺)ㆍ홍호사(弘護寺)ㆍ귀법사(歸法寺)ㆍ홍화사(弘化寺)의 승려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켜 이의민을 죽이려 했고, 1178년 흥왕사(興王寺)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발각되어 실패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최충헌이 집권하고 나서는 1202년 대구 부인사ㆍ동화사(桐華寺)의 승려들이 경주 별초군의 반란에 가담했고, 이듬해 앞에서와 같이 영주 부석사와 대구 부인사의 승려들이 반란을 꾀하다가 잡혀 귀양갔다.

1217년에는 흥왕사를 비롯해 홍원사(弘圓寺)ㆍ경복사(景福寺)ㆍ왕륜사(王輪寺)와 시흥의 안양사(安養寺), 광주의 수리사(修理寺) 등의 승려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다.

이렇게 무신 정권이 성립되고 나서 지방 각지에서 농민ㆍ노비 등의 반란이 계속 일어났고, 거기에 사원 세력도 무신 집권자를 제거하려고 자주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최충헌은 강경책을 써서 반란 세력을 토벌하는 한편, 관작(官爵)을 주거나 혹은 부곡ㆍ향(鄕)ㆍ소(所) 등의 천민을 해방시키고 이 지역을 현(縣)으로 승격시키기도 하는 회유책을 써서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성공이 바로 최충헌으로 하여금 강력한 집권 체제를 수립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는 문신 귀족의 발호 시대부터 문란해지기 시작했지만, 무신 정권 시대에 들어 더욱 심하였다. 권세를 잡은 무신들은 물론이고 권세가와 호족, 사원들도 혼란한 세태를 틈타 마구 토지를 겸병해 거대한 농장(農莊)이 출연하게 되었다.

한 집안이 소유하는 토지가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는 막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2,3명이 나타나 농민에게 이중 삼중으로 조세를 부담하게 하는 상태였다. 이에 국고 수입은 감소되어 극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농민의 생활은 어려워져 빈곤과 고통 속에서 신음해 사회는 더욱 혼란해져 민란이 일어나는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문화]

무신 정권이 성립되자 문인 학자들 가운데는 출세를 단념하고 산촌(山村)에 묻히거나, 승려가 되는 자도 있었다. 산촌에 묻힌 문인들은 음주와 시가(詩歌)를 즐기는 경향을 나타내었는데, 대표적 인물로는 스스로를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기던 오세재(吳世才)ㆍ임춘(林椿)ㆍ이인로(李仁老)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가운데는 아주 세상을 등진 자도 있었지만, 출세의 길을 모색하는 자도 있었다. 문호로 이름이 높은 이인로는 무신의 난을 당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가 세상이 조용해지자 다시 나와 과거에 응시해 벼슬을 했으며, 오세재는 벼슬의 길을 모색해 50세에 과거를 보아 급제했으나 천거를 받지 못해 끝내 벼슬을 하지 못했고, 임춘도 벼슬의 길을 찾아 과거에 응시하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나 최씨 정권기에는 최충헌이 문사를 사랑하고 우대해 정방과 서방이 설치되어 문사를 등용함으로써 문인 학자들의 출세의 길이 크게 트이게 되었다. 이에 이인로ㆍ이규보(李奎報)ㆍ최자(崔滋) 등 저명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정치적 진출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리하여 세상을 등졌거나 출세를 했거나 간에 서로 공통되는 일면이 있어 이들은 서로 얽혀서 하나의 문학적 세계를 이룩했고, 거기에서 나타난 것이 패관문학이라고 하는 수필문학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물건을 의인화해 쓴 임춘의 <공방전 孔方傳>, 이규보의 <국선생전 蚣先生傳>, 이곡(李穀)의 <죽부인전 竹夫人傳> 등이 있고, 전설ㆍ일화ㆍ시화(詩話) 등을 소재로 한 이인로의 <파한집 破閑集>, 이규보의 <백운소설 白雲小說>, 최자의 <보한집 補閑集> 등이 있으며, 뒤에 나온 것으로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 饑翁稗說> 등이 있다.

또, 무신 정권 시대에는 대외적으로 민족 의식이 앙양되어 이규보는 장편의 서사시로 <동명왕편 東明王篇>을 엮어 고려가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 민족임을 널리 자랑하려 하였다.

무신 정권 시대에 있어 또한 크게 주목되는 것은 조계종(曹溪宗)의 성립이다. 앞서 의천(義天)이 천태종(天台宗)을 창설하고 선종 9산(禪宗九山)의 승려들을 많이 흡수함으로써 선종이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선종 9산은 무신 정권이 성립될 무렵 종파의 이름을 새로 조계종이라 하고 그 중흥을 꾀하였다.

조계종의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게 한 이는 지눌(知訥)이었다. 그는 무신 정권 시대에 송광사(松廣寺)를 중심으로 활약해 <정혜결사문 定慧結社文> 등의 저서를 내어 선학(禪學)과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다.

그의 일관된 사상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였다. 그는 이것을 후학들에게 가르치는 데 있어 <성적등지문 惺寂等持門>ㆍ<원돈신해문 圓頓信解門>ㆍ<경절문 徑截門>의 세 가지 방법으로 하였다.

<성적등지문>은 행(行)을 말하는 것이고, <원돈신해문>은 신(信)을 말하는 것이며, <경절문>은 증(證)을 말하는 것으로, 그는 무엇보다도 마음가짐의 중요성을 역설하였다. 그의 정혜쌍수와 돈오점수는 결국 마음을 깨닫고 닦아가기 위한 길을 제시한 것이며, 그의 저서들은 모두 이 정혜쌍수와 돈오점수의 풀이로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사상의 특징은 좌선(坐禪)을 제일로 하나, 염불(念佛)이나 간경(看經)도 중요시해 선(禪)을 중심으로 선종과 교종의 조화를 도모한 것으로, 전기의 의천이 교(敎)를 중심으로 교종과 선종의 조화를 도모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렇게 지눌에 의해 성립된 해동 조계종(海東曹溪宗)은 무신 정권 시대에 성립된 고려 불교의 특이한 존재로 이는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크게 발전하였다.

조계종의 성립은 종래의 교종이 현실세계와 결부해 이익을 추구한 데 대해, 조계종은 심성(心性)의 도야를 강조하고 불교의 내면적인 발전을 추구한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래의 교종이 왕족 및 문신 귀족과 결탁해 세속적인 불교로 발전했으나, 조계종은 산간 불교(山間佛敎)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간 것으로, 이러한 점에서 조계종은 무신 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으며 성장해갔다.

[항몽 투쟁]

무신 정권 시대는 대외 관계에 있어 민족적 의식이 강하게 나타난 것이 특징이다. 대표적인 것은 최씨 정권의 항몽 투쟁으로 표현된다. 몽고와의 40년 전쟁은 실로 무신 정권, 특히 최씨 정권이 주축이 되어 수행하였다.

최우가 집권하고 있던 1231년(고종 18) 몽고가 처음으로 고려를 침범하였다. 이 침범은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성립되어 일단락되었으나, 몽고는 고려에 대해 막대한 물품과 동남(童男)ㆍ동녀(童女)ㆍ공장(工匠) 등 인물까지도 요구해 고려를 괴롭혔다.

이 때 최우는 몽고와 끝까지 싸울 것을 결의하고, 1232년 강화천도를 단행하였다. 강화천도는 몽고에 대한 노골적인 선전포고가 되어 1258년 최씨 정권이 몰락될 때까지 치열한 전투가 반복되었다.

최씨 정권이 몰락된 뒤 김준ㆍ임연 등 무신 집권자들에 의해 항몽 태세가 이어지다가 1270년(원종 11) 삼별초의 항전까지 일어나게 하였다. 몽고와의 항전이 계속되는 동안 피차의 사신의 왕래가 행해져 고려는 몽고군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몽고는 군대의 철수에 앞서 개성 환도와 국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였다. 이에 국왕과 문신들은 몽고의 요구를 받아들일 것을 희망했으나, 최씨 정권은 끝내 이를 거절하고 항전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최씨 정권의 태도는 몽고와 강화가 성립될 경우, 최씨 정권의 존재가 무의미해질 우려를 생각한 점에도 있었지만, 원래 무신 정권이 지닌 주체적ㆍ민족적 의식의 반영에도 큰 비중이 있었다.

사실, 몽고와의 전투에 있어 전반기에는 정부군의 활동이 활발했으나 후반기에 들어 약해지고, 대신 최씨 정권의 사병인 삼별초의 활약이 활발해지고 있는데 이것은 최씨 정권의 항전 태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의의]

무신 정권 1세기 동안은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ㆍ대외적으로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하여 무신 정권기 이후의 사회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역사로 하여금 이전의 시기를 고려의 전기, 이후를 고려의 후기로 구분할 정도여서 무신 정권기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큰 것이다.

그 변화 가운데 크게 주목을 끄는 것은 정치적 변화와 사회적 변화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보다 주목을 끄는 것은 당대 뿐만 아니라 후대까지 영향을 미쳤던 사회적 변화라 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변화의 대강과 그 역사적 의의를 들면 다음과 같다.

무신 정권의 정치적 변화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주체가 되던 계층이 무신이라는 점이다. 여기에서 무신이라 함은 무인(군인)으로 군왕 체제하의 일정한 관직을 지니고 그것을 배경으로 권력을 행사하던 특수계층을 말하는 것으로 단순한 무인과는 구분되는 것이다. 이들 무신은 무신 정권이 성립되기 이전인 문신 귀족 전횡기에도 문신과 함께 쌍벽을 이루어 문무 양반 체제하에 특권을 누리던 계층이었다.

그러나 문존무비(文尊武卑)의 사상이 풍미하던 사회에서 무신의 지위는 문신보다 낮았다. 같은 문무 양반 계층인 데도 불구하고 문신은 정1품의 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었으나, 무신에게는 정3품인 상장군이 최고 관직이었으며, 또 정벌이나 방어 등 국가적 군사 작전에 있어 최고 지휘권은 문신이 장악하고 무신은 그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또 토지 지급에 있어서도 문신은 종1품인 중서령(中書令)ㆍ문하시중(門下侍中) 등에 올라 전시과(田柴科) 18과(科) 중 제1과에 해당되는 전지 100결(結)과 시지(柴地) 50결의 토지를 지급받았으나, 무신은 최고관직인 상장군이 되어 전시과 18과 중 제3과에 해당되는 전지 85결과 시지 40결의 토지를 지급받았다. 이렇게 무신 정권 성립 이전의 문신귀족 전횡기에는 무신의 정치적 사회적 지위가 문신에 비해 낮았다.

그러나 무신 정권이 성립되면서 무신의 지위가 크게 상승해 문신의 지위를 압도하게 되었다. 무신 정권하에서 실권을 장악한 무신은 관록이나 출신 성분에 관계없이 국가 최고의 관직에 올라 최고의 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종전의 지위가 전도되어 무신의 지위가 문신의 지위를 압도하게 된 것은 신분 변화의 관점에서 볼 때 큰 의의가 있다. 그러한 신분 변화는 문무간의 지위 변화뿐만 아니라 농민과 천민(賤民) 등 하부 계층에까지 미쳐 그들의 신분 상승을 위한 자각 운동으로의 반란이 일어나 그것으로 인한 신분 질서의 동요 및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이러한 동요와 변화는 후세까지 영향을 미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정중부(鄭仲夫)ㆍ경대승(慶大升)의 뒤를 이어 무신 정권의 실권을 장악한 이의민(李義旼)은 천민 출신이면서 무신 정권의 제1인자로 군림해 최고의 부귀 영화를 누린 것은 무신 정권기의 신분 변화 가운데 대표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다 심각했던 것은 농민ㆍ노예 등 하부 계층에 의한 반란의 연속으로 신분 질서의 동요와 그 변화가 사회 전반적으로 파급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무신 정권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리하여 무신 정권은 하 부계층의 반란에 대해 강경책을 써서 진압하는 한편, 관직ㆍ물품을 주기도 하고, 향ㆍ소ㆍ부곡을 군(郡)ㆍ현(縣)으로 승격시켜 주민의 신분적 해방을 단행하는 회유책을 썼다.

그리하여 신분적 변화 운동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무신 정권이 몰락된 후에도 지속되어 천민 집단 지역인 향ㆍ소ㆍ부곡의 소멸이 지속되었음은 크게 주목을 끌고 있다.

다음 정치적 변화로는 우선 정치의 주체가 문신 중심에서 무신 중심으로 변화했으며, 무신 정권의 확립기인 최씨 정권기에 들어서 교정도감(敎定都監)이 설치되어 독재 정치가 자행되었다.

또한 정방(政房)이 설치되어 독단의 인사 행정이 자행되었으며, 정권 유지를 위한 사적 무력 집단으로 도방(都房)ㆍ삼별초(三別抄)ㆍ마별초(馬別抄) 등이 편성 운영된 것도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특히 정방은 무신 정권의 몰락 후에도 존속하면서 국가 인사 행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한 것은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무신 정권기를 통해 발생한 변화는 경제적ㆍ문화적인 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 변화는 무신 정권의 몰락 후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했음은 또한 그 나름대로 의의가 있다.

대표적인 경제적 변화는 토지 제도의 붕괴를 들 수 있다. 토지 제도는 무신 정권의 성립 이전부터 문란했지만, 무신 정권기에 들어 권세를 잡은 무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닥치는 대로 토지를 강점하였다. 그리고 권세가ㆍ호족ㆍ사원 등도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한 집안의 토지가 주(州)에서 군(郡)에 걸치는 광대한 것이었고, 한 토지에는 지주가 두 세명씩 나타나는 상태여서 농민은 2중 3중으로 수탈을 당하는 고난을 겪었다.

이와 같은 토지 제도의 붕괴 상황은 무신 정권의 몰락 후에도 사회적인 혼란과 함께 더욱 심해져 농장(農莊)의 발달과 함께 농민에 대한 수탈은 한층 더 가혹해지고 국고 수입의 감소로 국가 재정은 악화 일로에 놓이게 되는 등 무신 정권기의 토지 제도 붕괴의 영향은 그 후세까지 미치는 자못 심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문화적인 변화로는 무신 정권 아래에서 정치적인 진출에 제약을 받던 문인들에 의해 새로운 한문학(漢文學)으로 패관문학(稗官文學)이 등장하였다. 물건을 의인화(擬人化)해 쓴 설화 문학도 등장했으며, 무신 정권이 지니는 강렬한 주체 의식은 이규보(李奎報)로 하여금 장편의 서사시(敍事詩)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엮어 고려가 오랜 역사의 전통을 지닌 문화 민족임을 널리 자랑케 하였다.

또한 불교에 있어 선종(禪宗)인 조계종(曹溪宗)이 확립되었다. 조계종이 크게 떨치게 된 데에는 무신 정권기의 지눌(知訥)이 종풍(宗風)을 크게 진작시킨 데에 있다. 그러나 선종인 조계종이 왕족 및 문신귀족 등과 결탁해 세속화된 교종과는 달리, 산간불교로서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해 나아감으로써 도리어 무신 정권의 일정한 보호를 받게 된 데에도 중요한 원인이 있었다. 이렇게 무신 정권기에 확립된 조계종은 무신 정권의 몰락 후에도 후학들에게 계승되어 선풍(禪風)이 크게 떨쳤으니 또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무신 정권기에 있어 주목을 끄는 것은 강렬한 주체 의식의 발휘이다. 고려 자체가 주체 의식이 강렬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특히 무신 정권에 있어 그것이 더욱 두드러져 몽고와 40년간 항전을 지속한 것은 참으로 경탄을 금할 수 없는 주체 의식의 발휘인 것이다.

이러한 주체 의식은 무신 정권의 몰락된 데에도 영향을 미쳐 고려 말기의 배원 정책(排元政策)의 강행과 요동 정벌(遼東征伐)의 단행 등으로 계승 발전되었던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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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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