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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13:59
분 류 사전2
ㆍ조회: 358      
[조선] 정조 (브리)
정조 正祖 1752(영조 28)~1800(정조 24)

조선 제22대 왕(1777~1800 재위).

정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 思悼世子)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이다. 비는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즉위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되고, 1762년 세자인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은 뒤 동궁으로 불렸으며, 1764년 2월 어려서 죽은 영조의 맏아들 효장세자(孝章世子 : 뒤의 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다. 1775년 11월 영조가 대리청정을 시키려 하자 홍인한(洪麟漢)이 "동궁은 노론ㆍ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ㆍ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를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욱 알 필요가 없다"는 삼불필지설(三不必知說)을 내세우며 반대했으나, 그해 12월 대리청정의 명을 받았고, 이듬해 3월 영조가 죽자 대보(大寶)를 세손에게 전하라는 유교(遺敎)에 따라 즉위했다.

왕위에 오르자 바로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했으며, 세손 때부터 그를 보호한 홍국영(洪國榮)을 도승지로 삼고 숙위대장(宿衛大將)을 겸직시켜 반대 세력을 숙청해 정권의 안정을 도모했다. 사도세자의 죽음을 사주한 숙의 문씨(淑儀文氏)의 작호를 삭탈하고, 화완옹주(和緩翁主)는 사가(私家)로 방축했으며, 문성국(文聖國)은 노비로 만들고, 그의 즉위를 방해했던 정후겸(鄭厚謙)과 홍인한을 경원과 여산으로 귀양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홍국영이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남용하자 조신들의 탄핵에 따라 1779년 9월 정계에서 물러나게 하고, 이듬해 2월에는 전리(田里)로 돌려보내 친정 체제를 강화했다.

규장각 설치와 문운의 융성

정조는 즉위한 다음날 어제봉안(御製奉安)의 장소로 마련했던 규장각(奎章閣)을 9월에 준공, 역대 왕의 문적들을 수집해 보관하게 하고, 중국에서 보내온 서적을 비롯한 많은 책들을 거두어 수장하게 했다. 1777년 12월 교서관(校書館)을 규장외각(奎章外閣)이라 하고, 1782년 2월 강화에 외규장각(外奎章閣)을 신축했다. 규장각에 이가환(李家煥)ㆍ정약용(丁若鏞) 등을 각신(閣臣)으로 선발해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도록 했으며, 정조 자신도 이들과 밤을 새워 대화를 나누고 시정(時政)의 득실과 학문을 논했다. 각신의 양성은 당파의 인물을 멀리하고 참신하고 유능한 신진들을 길러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만들려는 의도도 포함된 것이었다. 1779년에는 이덕무(李德懋)ㆍ유득공(柳得恭)ㆍ박제가(朴齊家)ㆍ서이수(徐理修) 등 서얼 출신으로 재주있는 인사들을 검서관(檢書官)으로 임명했다.

정조는 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활자에 깊은 관심을 갖고 1772년 임진자(壬辰字), 1777년 정유자(丁酉字), 1782년 한구자(韓構字), 1792년 목활자인 생생자(生生字), 1795년 구리로 정리자(整理字), 1797년 쇠로 춘추관자(春秋館字) 등 도합 80여 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했다. 금원(禁苑) 안에는 규장각의 부설기관으로 봉모당(奉謨堂)ㆍ열고관(閱古觀)ㆍ개유와(皆有窩)ㆍ서고(西庫)ㆍ이안각(移安閣) 등을 두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활발한 서적편찬 작업이 이루어져 1781년 <어정성학집략 御定聖學輯略>ㆍ<어정팔자백선 御定八子百選>, 규장각 소장 3만 여 권의 분류목록인 <규장총목 奎章總目>, 1782년 <동국문헌비고>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고>(146권), <국조보감 國朝寶鑑>, 1784년 <규장각지 奎章閣志>ㆍ<홍문관지 弘文館志>, 1785년 <대전통편>ㆍ<태학지 太學志>, 1786년 <갱장록 羹墻錄>, 1787년 <문원보불 文苑>ㆍ<어제춘저록 御製春邸錄>ㆍ<전율통보 典律通補>, 1788년 <동문휘고 同文彙考>, 1789년 <해동읍지 海東邑誌>, 1790년 <무예도보통지 武藝圖譜通志>, 1794년 <주서백선 朱書百選>, 1796년 <규장전운 奎章全韻>ㆍ<어정사기영선 御定史記英選>, 1797년 <오륜행실 五倫行實>, 1798년 <오경백편 五經百編>, 1799년 정조 자신의 문집인 <홍재전서 弘齋全書> 등이 편찬ㆍ간행되었다.

탕평책의 실시

정조는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을 실시했다. 아버지 장헌세자가 당쟁으로 희생되고 자신도 당쟁의 직접적 피해를 입음으로써 당쟁의 폐해를 절감하고, 자기의 거실을 탕탕평평실(蕩蕩平平室)이라 이름하는 등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려 했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峻論)의 인물을 중심으로 하는 탕평이었다. 영조대의 탕평책인 완론탕평(緩論蕩平)은 척신과 권력을 장악한 간신이 정치를 어지럽히고 남을 억누르는 방편이 되었으며, 왕권에만 영합하여 권력유지에 부심하여 '세상에서는 탕평당이 옛날의 붕당보다도 심하다고 하는 말이 퍼지는' 정도가 되었다고 인식하고, 초기부터 홍국영ㆍ유언호(兪彦鎬)ㆍ김종수(金種秀) 등 노론 중에서 청론(淸論)을 표방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정치 개혁을 실시했다.

준론탕평은 완론탕평과는 달리 충역(忠逆)ㆍ시비(是非)ㆍ의리(義理)를 분명히 하는 탕평으로서, 임금의 은혜를 강조하고 각 당에서 군자를 뽑아서 쓰는 '붕당을 없애되 명절(名節)을 숭상한다'는 것이었다. 정조는 영조대의 탕평이 세가대족(世家大族)의 화합에 우선하고 사대부의 화합에는 소극적이었던 데 대한 반성에서 의리의 탕평을 주장하고, 산림(山林)ㆍ궁중 세력과의 연결을 끊음으로써 청명(淸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즉위초 김귀주(金龜柱)와 홍인한의 외척당을 와해시켰으며, 홍국영도 제거했다. 1788년에는 남인 채제공(蔡濟恭)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준론탕평은 결국 사림 세력에 의한 공론 정치의 방향보다는 관료제의 정점이 되는 재상권의 강화를 통한 사림 정치 이념의 실현이라는 방향에서 왕권 강화를 지향했다.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文風)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했다. 규장각은 이제까지의 여러 관각(館閣)들의 기능을 병합(倂合)하여 권력을 일원화하려는 시도에서 만들어졌으며, 이를 통해 사기(士氣)ㆍ명절을 존중하는 청론을 강조함으로써 준론탕평을 달성할 수 있는 청류(淸流)의 인재를 키우겠다는 또 하나의 청요직(淸要職)으로서 기능했으며, 초계문신(抄啓文臣)은 새로운 인재 양성을 위한 제도적 장치가 되었다.

개혁 정치의 지향

강원 영월군에 있는 정조대왕 태실비

정치 체제를 정비하면서 정조가 의도했던 개혁은 1777년 반포된 대고(大誥)에 "민산(民産)을 만든다, 인재를 무성하게 한다, 군사를 다스린다, 재정을 풍족하게 한다"는 4개 항목으로 집약되어 있다. 민산의 문제는 경계(經界)에서 시작한다고 하여 근본적인 개혁을 전제(田制)의 개혁으로 파악하고, 조선 초기의 제도였던 직전법(職田法)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이는 정조 치세 동안에 실시되지는 못했다.

상공업은 말업(末業)으로 파악했으나, 농민의 이농현상에 따른 도시 소상인의 증가에 대해서는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실시함으로써 해결을 기도했다. 군사 문제는 군문(軍門)의 혼란을 지적하여 장용영(壯勇營)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의 기능을 병합, 장악하려는 시도를 했다. 재정의 문제는 축적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전통적인 주자학자들의 주장인 절약과 검소는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라고 보았다. 재화를 늘리기 위한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하는 북학파를 중시하고, 응지진농서(應旨進農書)를 받는 등 농업 생산력 발달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또한 재정 확립을 위한 기초 조사로서 중앙 각 관서와 군영의 보유 양곡수를 조사한 <곡부합록 穀簿合錄>, 전국에 걸친 환곡의 현황을 조사한 <곡총편고 穀總便攷>, 전세 징수의 기본상황을 파악한 <탁지전부고 度支田賦考> 등을 간행했으나, 구체적 방안을 세우지는 못했다.

그밖에 1776년 궁방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세금을 거두던 궁차징세법(宮差徵稅法)을 금지했다. 1777년 서얼들의 허통요청으로 <서류허통절목 庶類許通節目>을 정했다. 1778년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기 위해 형구(刑具)의 규격과 품제를 정한 <흠휼전칙 欽恤典則>을 발포하고, 도망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노비추쇄법을 폐지했다.

1782년 서운관(書雲觀)에 명하여 1777년을 기점으로 100년간의 역(曆)을 미리 계산하여 <천세력 千歲曆>을 편찬ㆍ간행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 字恤典則>을 반포하여 흉년에 버려지거나 굶주린 아이들을 구하는 법을 정했다. 재위중 천주교가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문제가 되었으나, 서학의 발흥은 정학(正學)인 주자학이 융성하면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유연하게 대처했다.

그리하여 1791년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신주를 불지르고 제사를 폐지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났으나,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으로써 사건을 더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또한 억울하게 죽은 아버지를 위해 장헌세자라는 존호(尊號)를 올리고 그 묘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으며, 묘호(廟號)를 경모궁(景慕宮)이라 하고, 1789년 18만 냥을 들여 경기도 양주에 있던 묘를 수원 화산(花山) 아래로 이장하여 현륭원(顯隆園)이라 했다. 이듬해 용주사(龍珠寺)를 개수ㆍ확장해 장헌세자의 명복을 빌게 했다.

1800년 6월 개혁의 의지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한 채 갑자기 죽은 뒤, 유언에 따라 현륭원 동쪽 언덕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1821년 효의왕후가 죽자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옮겨 합장했다. 시호는 문성무열성인장효왕(文成武烈聖仁莊孝王)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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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의 농업문제 - 정조말년의 응지진농서의 분석 <한국사연구> 2 : 김용섭, 한국사연구회, 1968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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