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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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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918      
[조선] 정조 행장 1 (실록)
정조 대왕 행장(行狀) 1

행장 1
행장 2
행장 3
행장 4
행장 5

아, 대행 대왕이 하늘로 떠나신 그 다음달 병술일에 우리 사왕 전하(嗣王殿下)께서 애지(哀旨)를 내려 삼공(三公)ㆍ구경(九卿)과 관각(館閣)ㆍ삼사(三司)의 신하들로 하여금 묘호(廟號)를 올리게 하여 정종(正宗)이라고 하고, 능호(陵號)를 올리게 하여 건릉(健陵)으로 하고, 시호(諡號)는 문성 무열 성인 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로 올렸다. 예에 이른바 위대한 공로가 있는 자는 위대한 영예를 받는다는 그것이다. 그리고 또 여러 사신(詞臣)에게 명하여 행장ㆍ책문ㆍ비문ㆍ지문 등등을 지어올려 대례(大禮)를 충분히 돕고 동시에 그 훌륭한 아름다움을 천세 만세에 전할 수 있도록 하라고 하시기에 신들이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아뢰기를, "우리 대행 대왕께서 재위 25년 동안에 그 성대한 덕과 깊은 사랑 그리고 굉장하고 위대한 사업들은 마치 천지 일월처럼 높고도 빛나서 사람들 뼛속 깊이 스며있고 귀와 눈에도 선하거니와 다만 춘저(春邸)에 드시기 이전의 탄생에서부터 자라나는 동안 궁곤(宮梱) 내에서의 한가로운 생활상은 외정(外廷)에서는 미처 보고 알지 못한 것들이 있는데 지금 그것까지도 모두 소상히 게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인즉 대내에서 행록(行錄)을 내려주시는 일은 바로 우리 열성조가 옛부터 해오셨던 일이기에 신들이 감히 죽기 무릅쓰고 청하는 바이옵니다." 했더니, 이에 따라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팔측(八則)을 써서 내려주시고, 혜경궁(惠慶宮)이 십구측(十九則)을 써 내려주셨다. 이에 신 이만수(李晩秀)는 삼가 읽고 나서 날듯이 기쁜 마음으로 피눈물을 닦고 다음과 같이 행장을 올리는 바이다.

아, 대행 대왕의 성은 이씨요 휘는 산(祘)이며 자는 형운(亨運)으로 영종 대왕(英宗大王)의 손자이며 장헌 세자(莊獻世子)의 아들이다. 그리고 어머니는 혜빈(惠嬪) 풍산 홍씨(豊山洪氏)로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따님이었다. 영종 명에 의하여 진종 대왕(眞宗大王)의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 모후(母后)는 효순 왕후(孝純王后)이고, 풍양 조씨(豊陽趙氏) 좌의정 풍릉 부원군(豊陵府院君) 조문명(趙文命)의 따님이시다.

왕은 영종 28년(1752) 임신 9월 22일(기묘) 축시에 창경궁 경춘전(景春殿)에서 탄생했는데 그 곳은 바로 숙묘(肅廟)가 계시던 곳이었다. 신미년 겨울 장헌 세자 꿈에 용이 여의주를 안고 침상으로 들어왔었는데 꿈속에서 본 대로 그 용을 그려 벽에다 걸어두었더니 탄생하기 하루 전에 큰 비가 내리고 뇌성이 일면서 구름이 자욱해지더니만 몇 십 마리의 용이 굼틀굼틀 하늘로 올라갔고 그것을 본 도성의 인사들 모두는 이상하게 여겼었다. 급기야 왕이 탄생하자 우렁찬 소리가 마치 큰 쇠북소리와도 같아서 궁중이 다 놀랐으며 우뚝한 콧날에 용상의 얼굴과 위아래 눈자위가 펑퍼짐한 눈에 크고 깊숙한 입 등 의젓한 모습이 장성한 사람과 같았다. 영종이 거기 와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면서 혜경궁에게 이르기를, "이제 이 아들을 낳았으니 종묘 사직에 대한 걱정은 없게 되었다." 하고는, 손으로 이마를 만지면서, 꼭 나를 닮았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날로 원손(元孫)으로 호칭을 정하였다.

그후 백일(百日)이 채 안 되어 서고, 일년도 못 되어서 걸었으며 말도 배우기 전에 문자(文字)를 보면 금방 좋아라고 하고 또 효자도(孝子圖)ㆍ성적도(聖蹟圖) 같은 그림 보기를 좋아했으며 공자처럼 제물 차리는 시늉을 늘 했다. 의복은 화사한 것을 좋아하지 않고 때가 묻고 솔기가 터진 것도 싫어하지 않았으며 노리개 같은 것은 아예 눈에 붙이지를 않았다. 첫돌이 돌아왔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는 것이다. 계유년 겨울 인원 성모(仁元聖母)에게 휘호(徽號)를 올릴 때에 왕은 유모의 부축없이도 포화(袍靴)를 갖추고 절하고 꿇어앉고 오르고 내리고 하는 예를 행하자 그를 본 왕비가 감탄하였다. 갑술년 8월에는 보양청(輔養廳)을 두었으며, 을해년 봄에 처음으로 주자가 쓴 《소학(小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영종이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원손이 강을 마치고 나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지금 겨우 네 살인데도 얼굴 생김이나 그 기상이 보통 애들과는 크게 다르니 하늘이 혹시 우리에게 복을 내린 것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때부터 지혜와 생각하는 바가 날로 발전하였으며 날이 밝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빗고 독서에 들어갔으므로 혜경궁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염려되어 일찍 일어나지 말라고 타이르자 그때부터는 남이 모르게 등불을 가려두고 세수하였다.

정축년 봄에 인원(仁元)ㆍ정성(貞聖) 두 성모가 잇따라 한 달 사이에 승하하셨는데 그때 왕은 이제 겨우 한 자 정도의 옷을 입을 만큼 자라 궤전(饋典) 등의 예는 행할 수가 없었는데도 거처하는 곳이 빈전(殯殿)과 가까이 있어 아침 저녁 곡하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도 짚자리를 들고 망곡(望哭)을 하였다. 기묘년 2월 계해일에 왕세손(王世孫)에 책봉되고, 윤6월 경자일에 명정전(明政殿)에서 책립을 받았는데 거동 하나하나가 법도에 맞고 예를 행하는 모습이 본받을 만하였다. 영종이 전상으로 오르도록 명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옛날 주 무왕(周武王)이 면복[冕] 차림으로 태사인 상보(尙父)에게서 단서(丹書)7509) 를 받았듯이 오늘 이 책봉으로 하여 3백 년 종사(宗社)의 흥망이 너 한 사람에게 달려 있다. 너는 아직 나이 어리기 때문에 가깝고 쉬운 것부터 가르치기로 한다." 하고는, 《소학(小學)》 제사(題辭) 제3장의 16구절7510) 을 손수 써서 내렸다.

그해에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영종의 계비로 들어왔는데 왕은 그 대비를 혜경궁 섬기듯이 섬겼으며, 신사년 봄 영종의 거둥 때는 왕이 모시고 뒤를 따랐는데 운종(雲從) 거리에서 행차를 멈추고는 구경 나온 사민(士民)들로 하여금 세손(世孫)을 만나보게 하였다. 환궁한 후 묻기를, "오늘 구경 나온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너에게 기대하는 것이 무슨 일이더냐?"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신이 선(善)을 하기를 바랐었습니다." 하였다. 또 묻기를, "선을 하기가 그리 쉬운 일이더냐?" 하니, 대답하기를, "예. 쉽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유선(諭善) 서지수(徐志修)가 아뢰기를, "쉽다고 생각되어야지만 비로소 용감하게 전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영종이 매우 기뻐하였다. 2월 을미일에 자(字)를 정하고 3월 기유일 학궁에 들어가 선성(先聖)을 배알한 후 박사(博士)에게 수업을 청해 《소학》을 강하는데 왕이 질문하기를, "명명(明命)이 내 몸에 있다는 것은 어느 경지를 가리킨 것이며, 그것이 혁연(赫然)하도록 하자면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박사는 대답을 못했고 다리 주변에 둘러서서 구경하던 수많은 관중들은 서로 돌아보면서 성인(聖人)이라고 축하들을 했었다.

그달 정사일에 경현당(景賢堂)에서 관례를 행하고 임오년 2월 병인일에 청풍 김씨(淸風金氏) 증 영의정(贈領議政) 청원 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默)의 따님과 가례를 올렸는데 그가 바로 지금의 왕대비시다. 5월에 장헌 세자가 세상을 뜨자 왕은 슬픔으로 인한 손상이 너무 지나쳐 시자(侍者)들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경희궁(慶熙宮)에서 영종을 모시고 있으면서 낮이면 언제나 어좌(御座) 좌우를 떠나지 않고 밤이면 영빈(暎嬪) 곁으로 가 같이 밥먹고 같이 자면서 갖가지로 위로했으며 그후 갑신년 영빈의 병이 위독했을 때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급기야 상을 당해서는 임오년 상사 때 못지않게 슬퍼하였다. 그때 혜경궁은 창덕궁(昌德宮)에 있었는데 슬픔이 가슴에 맺혀 있어 자주 앓아누웠다. 왕은 그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신도 곧 침식(寢食)을 폐했으며 날마다 새벽이면 수서(手書)를 올려 안녕하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수저를 들었는데 그렇게 하기를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였다.

7월에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처럼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삼도록 명하고 세자궁에 춘방(春坊)과 계방(桂坊)을 두었다. 강하는 자리에서 빈대(賓對) 때나 또는 대소 신료들 입시 때면 왕을 명하여 자주 시좌(侍坐)하도록 하고 혹 경전의 뜻을 변론하기도 하고 혹은 국정을 참여하여 듣도록 하기도 하였다. 언젠가 빈대의 자리에서 묻기를, "삼남(三南) 지역에 흉년이 들었다는데 백성들을 어떻게 구제해야 하겠느냐?"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곡식이 있어야 구제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곡식을 어디서 가져오겠느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양혜왕(梁惠王)이 했던 것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영종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좋은 대답이다. 오늘 빈대하는 자리에서의 문답에 대해 너도 일찍 그 내용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니라." 하였다.

계미년 봄에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을 불러 접견했는데 그때 《맹자》를 강하고 있을 때였다. 명흠이 《맹자》의 근본 취지가 뭐냐고 묻자, 왕이 말하기를, "인욕(人欲)을 싹트지 못하도록 막고 천리(天理)를 존속시키는 일입니다." 하였으며, 명흠이 입지(立志)에 대하여 또 묻자, 왕이 말하기를, "원하는 바라면 요(堯)ㆍ순(舜)을 배우는 것입니다." 하였다. 명흠이 자리에서 물러나와 남들에게 말하기를, "총명 영특하고 슬기로운 상지(上智)의 자질로서 이 나라의 복이다." 하였다.

갑신년 2월 임인일 왕을 효장 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명했는데 효장 세자는 바로 진종을 말한다. 하루는 강관(講官)이 삼남(三南)의 굶주린 백성들에 대해 아뢰면서 옷은 헐벗고 얼굴빛은 누렇게 떳다고 하자, 왕이 한참 동안이나 가여워하는 표정이더니 그날 저녁밥 때는 고기를 들지 않았다. 영종이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오늘 강관이 굶주린 백성들에 대한 애기를 했는데 불쌍한 마음이 들어 젓가락이 차마 가질 않습니다." 하였다.

을유년 봄 빈대(賓對)의 자리에서 모시고 있을 때 영종이 이르기를, "옛날 한 광무(漢光武)가 하남(河南)ㆍ남양(南陽)에 관하여 말한 명제(明帝)의 대답을 기특하게 여겼었는데,7511) 지금 나도 충주(忠州)의 포리(逋吏) 문제를 너에게 묻겠다. 지금 제신들 주장은,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되고 국가의 저축을 축내서도 안 된다고들 하는데 그 주장이 옳은가 틀린가?" 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열 명도 넘는 관리들에게 목숨을 부여하는 일이 바로 천지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큰 덕인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옛날 축낸 관곡을 받아 들이는 일에다 비유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노나라 임금은 부세의 율을 올리려고 했는데, 공자 제자들은 오히려 견감하려고 했으니 그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답하기를, "백성은 나라를 의지하여 살고 나라는 백성을 의지하여 존재하는데 백성들이 풍족하다면 임금이 부족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묻기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백성들을 부유하게 할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임금이 어질고 백성들을 사랑한다면 백성들을 부유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다시 묻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쓸데없는 일을 하느라 농사때를 빼앗지 않으면 됩니다." 하였는데, 영종은 참 좋은 말이라고 하고는 각도의 묵은 포흠을 모두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그해 겨울 왕이 큰 병을 앓았다. 영종은 너무 걱정이 되어 왕이 있는 집에서 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내면서 서연(書筵) 날이 되면 친히 소대(召對)를 하고 왕이 그 소리를 듣게 하고는 세손이 좋아하는지의 여부를 좌우에게 물었는데, 좌우에서 좋아한다고 대답하면 그 말을 들은 영종 역시 기뻐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세손이 마음가짐이 강해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신음하는 빛을 보이지 않고 내 마음을 편케 해주고 있다." 하였다. 병술년 봄에는 영종이 환후가 있어 여러 달을 위중한 상태에 있었는데 왕은 그때 큰 병을 앓고 난 후였으면서도 밤낮으로 시탕(侍湯)하면서 한발짝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앉고 눕고 하는 것을 모두 친히 부축했으며 한편으로는 조심하고 한편으로는 걱정하여 좌우의 사람들이 감격하였다. 그해에 환후가 말끔히 낫자 이를 일러 모두 왕의 효성의 소치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해부터서는 모든 조신들 입시 때 왕이 꼭 곁에서 모셨었다. 정해년 봄 영종이 적전(籍田)에 밭갈 때 영종은 쟁기를 잡고 다섯 번 밀고 왕은 일곱 번을 밀었다. 신묘년 봄에 종신(宗臣)인 이인(李䄄)과 이진(李禛)이 죄가 있어 영종이 진노하고, 하교하기를, "그 싹을 막아버리지 않으면 나라의 뿌리가 안전하지 못할 것이니 모두 탐라(耽羅)로 내쫓아버리라." 하여, 얼마 후 진은 적소(謫所)에서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은 너무 슬퍼하면서 사람을 보내, 돌볼 것을 돌보고 그 영구를 호송하여 돌아오도록 하였는데 그것을 두고 어느 척신(戚臣)이 말하는 자가 있자, 수찰(手札)로 답하기를, "1만리 바다 밖에서 아우가 죽었다는 부음을 받고 부연 파도가 너무 넓고 멀어 널을 부둥켜 안고 통곡할 길은 없다 하더라도 옛날을 생각하고 오늘의 이 슬픔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고 목이 메어 억누를 길이 없다. 이 세상에 얻기 어려운 것이 형제요 끊을 수 없는 것이 윤리(倫理)인데 그 윤리를 지상으로 알고 실천하는 이가 성인(聖人) 아니었던가. 그대가 비록 성상의 귀를 번거롭게 한대도 어찌 굽어살피심이 없겠는가." 하였다.

임진년에 와서 영종의 연세가 날로 높아가자 뭇 신하들이 유양(揄揚)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했는데 영종은 겸양의 마음으로 이를 허락지 않았다. 이에 왕은 손수 간곡한 상소를 올려 영종의 마음을 돌리기에 정성을 다했는데, 급기야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한 모퉁이 작은 나라에서 할아비는 손자를 의지하고 손자는 할아비를 의지하고 있는데 너의 글월을 보고서야 내 어찌 감동을 않겠느냐." 하고는, 본의를 굽히고 따라주었다. 이에 을유년 이후 술잔을 올려 만수 무강을 빌고 성대한 공로를 금옥에 새긴 일들은 모두 왕의 효성에 감동을 받아 이루어진 일들이었던 것이다. 병술년 이후로는 성상의 체후가 정섭(靜攝)을 요할 때가 많았는데, 왕이 낮이면 곁을 떠난 일이 없었고 밤이 되어도 옷을 벗는 일이 없었으며 조금이라도 증세가 더하면 곧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울면서 몸을 드러내놓고 신명(神明)께 기도하였다. 영종이 앉고 누울 때 좌우에서 혹 부축을 하면 곧 이르기를, "동궁은 어디 있느냐. 내 몸에는 내 손자만큼 맞는 사람이 없다." 하였다.

왕은 너덧 살 때부터 늘 꿇어앉기를 좋아하여 언제나 바지 무릎 닿은 곳이 먼저 떨어졌는데 여덟 아홉이 되자 더욱더 장중하고 별로 말이 없었으며 조급하게 말하거나 당황하여 얼굴빛이 변하는 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설어(褻御)ㆍ환첩(宦妾) 따위와는 별로 상대하여 말하지도 않았다. 왕이 고요히 앉아있는 것을 영종이 보고는 이르기를, "네 학문이 이제 자리가 잡혔나보다." 하고, 연신(筵臣)에게 이르기를, "세손의 성품이 보통과는 아주 달라 털끝만큼도 법도를 이탈하려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금원(禁苑)에 꽃이 필 때도 나를 따라서가 아니고는 한 번도 구경 나가는 일이 없고 날마다 독서가 일인데 그렇게 하려고 노력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영종 늘그막에는 허구한 날 시탕(侍湯)이었으나 병후가 조금이라도 덜하기만 하면 곧 서연(書筵)을 열었으며, 언제든지 성상이 깊이 잠들기를 기다려 파루가 너덧 번 쳐야 물러갔는데 가서는 또 촛불을 밝히고 책상 앞에서 글씨를 썼다. 그리고 닭이 울면 또 달려가 시탕을 하였던 것이다.

그때 화완 옹주(和緩翁主)의 아들 정후겸(鄭厚謙)은 성질이 비뚤어지고 조행이 없었는데 옹주만을 믿고 매우 방자하게 굴었으며, 홍봉한(洪鳳漢)의 아우 홍인한(洪麟漢)은 자기 형 세력을 깔고 재상이 되었는데 자기쪽 무리들과 야합하여 말을 퍼뜨리기를, "홍씨(洪氏)를 공격하면 이는 동궁(東宮)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이다." 하면서 그것을 구실로 온 세상의 입을 막으며 위협을 가했다. 또 홍상간(洪相簡)ㆍ민항렬(閔恒烈) 등은 춘궁(春宮)을 드나들며 앞장서서 기사년 흉론(凶論)을 만들어냈으며, 상간의 겨레붙이 홍계능(洪啓能)은 이른바 유생(儒生)의 이름에 가탁하여 멀리서 조정의 권한을 잡고 있었다. 그리고 윤양후(尹養厚)ㆍ윤태연(尹泰淵) 등은 홍인한ㆍ정후겸을 위해 목숨을 건 무리들로서 번갈아가며 전임(銓任)과 융병(戎柄)을 잡고 있었다. 영종이 왕에게 국정을 이양할 뜻을 비치자 이들은 그 틈을 타서 저들끼리 서로 뭉치고 많은 당여(黨與)를 심어 국권을 농락하고 법을 무시하며 조정을 무너뜨리려고 했는데 왕이 워낙 천질이 영명하고 고금(古今)에 통달한데다 척리(戚里)들이 국정에 간여하는 폐습을 무엇보다 싫어했기 때문에 그 적(賊)들에 대하여 조금도 경계의 빛을 늦추지 않았었다. 이에 그 적들은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들어가서는 상대의 속마음을 떠보는 방식으로 기회를 엿보고 나와서는 터무니없는 헛소문을 퍼뜨려 세손의 위치를 흔들어놓을 궁리만을 했고, 화완 옹주는 또 장기간 금중(禁中)에 있으면서 자기 자식을 위해 그 흉모를 온갖 방법을 다해 도왔다. 환첩이나 궁정의 하인들을 널리 조아(爪牙)로 포섭하고 왕의 동정만을 살폈지만 왕은 그를 미리 알고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면서 흔들리지도 않고 표면에 내놓지도 않고 그저 아무일 없는 듯이 태연하기만 했다. 게다가 또 영종이 성명하여 위엄을 보이지 않아도 무서워했고 정순 왕비 역시 지성으로 도왔기 때문에 그 적들이 결국 농간을 피우지 못했었다. 을미년 봄에 와서 성상의 병환이 날이 갈수록 더하여 크고 작은 사전(祀典) 모두를 왕이 대신 행하도록 명했고, 10월 상참(常參) 때는 하교하기를, "오늘 문을 나서보니 내 몸을 내가 잘 가누지 못하겠다. 어린것이 좀 숙성하여 이러한 때 기무(機務)를 대신 처리하는 솜씨를 직접 내게 보여주면 그 아니 빛나는 일이겠느냐." 하니, 그로부터 적들은 더욱 두려움을 느끼고 성상의 병세를 숨김으로써 대리 청정을 못하게 막을 계책을 꾸몄던 것이다.

11월 계사일에 영종이 시임 대신과 원임 대신을 다 불러놓고 하교하기를, "요즘 들어 정신도 기운도 더욱 쇠하여 공사(公事)를 수응할 수가 없는데 나라 일을 생각하면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그 어린것이 조론(朝論)을 아는지? 국사(國事)를 아는지? 이판(吏判)ㆍ병판(兵判)은 누가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지? 옛날에 우리 황형(皇兄)7512) 께서는 '세제(世弟)가 좋을까, 좌우(左右)가 좋을까?' 하신 하교가 있었지만 지금으로 말하면 사정이 황형 시기와는 현격하게 다르지 않은가. 더구나 청정(聽政) 제도는 국조에서 예로부터 있어왔던 일 아닌가." 하니, 홍인한이 앞으로 나와 대답하기를, "동궁은 조론을 알 필요가 없고 전관(銓官)도 알 필요가 없으며 국사에 있어서는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영종이 한숨을 쉬시며 이르기를, "경들이 내 뜻을 모르는군. 차라리 내 손자로 하여금 내 마음을 알아차리게 하는 편이 더 났겠다." 하고는, 어제(御製) 《자성편(自省編)》과 《경세문답(警世問答)》을 동궁에게 진강하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그로부터 며칠 후 영종은 공사를 동궁에게로 들여가도록 명하여, 승지(承旨)가 받아쓰려고 하자 인한이 또 손을 내저으며 못하게 하였다. 이에 영종이 이르기를, "순감군(巡監軍)에 표지 붙이는 일을 중관(中官) 손에다 맡겨서야 될 일인가." 하니, 영의정 한익모(韓翼謩)가 아뢰기를, "성명께서 위에 계시는데 그까짓 무리들을 걱정할게 뭐겠습니까." 하였다. 영종은 성을 내시어 제신들을 다 물러가도록 명하고, 이어 순청 감군과 이조ㆍ병조의 비점(批點)을 동궁에게서 받도록 명했다. 이때 성상은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대보(大寶)ㆍ계자(啓字) 등을 다 동궁으로 옮겨두고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교를 내렸었지만 인한이 중간에서 말을 놀려 굳이 저지하는 바람에 성명(成命)이 오래도록 내려지지 못하고 사태는 위기일발의 상태로 치닫고 있어 무슨 변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은 상황이었으나 조정 내에는 감히 말 한마디 하는 자가 없었다.

12월 병오일 전 참판 서명선(徐命善)이 소를 올려, 대리 청정을 막아온 인한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하고 이어 한익모가 환관에게 다짐의 말을 했던 것을 논했다. 소가 올라왔다는 소식을 들은 영종은 명선과 대신(大臣)ㆍ대신(臺臣)들을 빨리 입시하도록 명하고는 명선에게 소를 아뢰게 했다. 영종은 무릎을 치며 감탄과 치하를 하면서 제신들을 돌아보며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신 송영중(宋瑩中)은 내용이 너무 과격하다고 했고 상신(相臣) 김상복(金相福)은 말의 근거를 캘 것을 청했는데, 영종은 인한ㆍ익모는 사적(仕籍)에서 삭제하고 상복은 파직, 영중은 사직하도록 명하고 명선은 특별히 발탁하여 도총관(都摠管)에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4일 후인 경술일에 왕을 명하여 모든 정사를 대리 청정하게 하자 왕이 세 번 소를 올렸는데, 비답을 내리기를, "명분이 바르고 말도 사리에 맞고 이 나라가 안정을 찾는 길이니 나로서는 더할 수 없이 다행한 일이요 너로서는 어버이에게 영화를 바치는 일이다.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우리 삼백 년 종국(宗國)을 잘 이끌어가도록 하라." 하고, 이어 청정의 의절(儀節)을 정유년7513) 에 했던 대로 하도록 명하였다. 그로부터 3일 후인 계축일 영종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와 청정 하례를 받았는데 왕은 곤복(袞服) 차림으로 조참(朝參)을 행한 후 백관으로부터 하례를 받고 그날 진찬(進饌)에서 구작례(九爵禮)를 행하였다. 그리고 뭇 신하들은 다 천세(千歲)를 불렀으며, 영종은 그를 돌아보며 매우 즐거운 표정을 지으셨다.

청정을 시작한 왕은 진전(眞殿)과 태묘(太廟)를 배알하고 각 궁묘(宮廟)에 두루 절을 올렸으며 포고한 명령들이 모두 하늘의 법칙에 맞아 전부가 다 호응하고 그대로 순종하는 실정이었지만 그래도 모든 일을 반드시 대조(大朝)에 품신하여 행하고 감히 전결하는 일이 없었다. 궁관(宮官)에게 말하기를, "궁관이 비록 사관을 겸하고는 있지만 간격없이 왕을 계도하는 것이 맡은 바 직분일진대 서연(書筵)에서 필요한 규감이 되고 경종이 되는 글이라든지 또는 국사에 관계되는 정령(政令)의 득실에 대해 그때그때 의견을 개진하여 나의 부족한 점을 도우라." 하였다.

심상운(沈翔雲)은 신축년7514) 역적의 손자로서 김상복(金相福)에게 부탁하여 자기 조계(祖系)를 고쳤으나 세상에서 인정해주지 않자, 정후겸(鄭厚謙)ㆍ홍낙임(洪樂任)에게 붙어 그들 심복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이때 와서 서명선의 상소가 들어가고 대리 청정의 명령이 내려지자 흉도(凶徒)들이 크게 불만을 나타내고는 상운을 끌어들여, 온실에서 자란 나무라는 말을 인용 그 내용으로 상서하게 하여 이미 내려진 명령을 번복하기 위한 계책을 안팎으로 매우 주밀하게 짜놓고 있었던 것이다. 왕이 그 상소를 보고는 이르기를, "상운 문제는 충(忠)과 역(逆)이 뒤바뀌는 중대한 문제라서 주고 받고 하는 과정을 광명(光明)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고는, 영종께 그 사실을 아뢰니, 영종은 의금부에 명하여, 상운은 국문한 후 먼 섬으로 귀양보내라고 하고, 이어 찬배(竄配) 이하의 문제들은 왕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명하였던 것이다.


병신년 1월 영지(令旨)를 내려 14개 조항에 달하는 시폐(時弊)를 열거하면서 중외의 신서(臣庶)들을 타이르고, 또 영을 내리기를, "각 궁가의 조세 감면 대상의 전결(田結)에 있어 궁속(宮屬)들이 그를 빙자하기 때문에 그 피해를 백성들이 받고 있다. 명례궁(明禮宮)은 동궁(東宮)에 소속된 궁이니 우선 근본부터 밝힌다는 뜻에서 그를 탁지(度支)에다 귀속시키고, 다른 각 궁가들도 앞으로 차례차례 그 예를 적용하도록 하라." 했으며, 또 영(令)하기를, "궁녀가 버젓이 줄 서 있는 관원 앞을 지나가고 지체 있는 관리가 여리(閭里)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으니 궁위(宮闈)의 기강이 어떻다는 것을 알 만하다. 게다가 환시(宦侍)나 추솔(騶率)들이 사부(士夫)인 양 행세를 하고 궁방(宮房) 관속들이 지방 고을에서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더더욱 변괴가 아닐 수 없다. 중외(中外)로 하여금 낱낱이 아뢰게 하라." 하였다.

어느 연신(筵臣)이 크고 작은 과거 때 면시(面試)를 실시할 것을 말하자, 왕이 이르기를, "선비 대우는 예(禮)와 성(誠)으로 해야지 먼저 의심부터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다만 고관(考官)은 적임자를 골라 맡겨야 할 것이고 그리고 공도(公道)를 넓히고 행문(倖門)만 막아버리면 그뿐이지 선비들을 꼭 틀에 묶어두고 서둘러 구비하기를 바랄 것까지야 뭐 있겠는가. 예로부터 임금들이 잘 다스리는 방법을 찾기 위해 너무 서둘렀던 이들이 많은데, 나는 지금 대리 청정 이후 한두 가지 폐단을 바로잡아 보려고 하고 있지만 이 역시도 너무 빠른 것이 아닐까 염려가 된다." 하였다.

2월에 수은묘(垂恩廟)를 배알했는데 수은묘란 경모궁(景慕宮)의 옛 이름이다. 환궁하여 영종께 상소하기를,

"임오년7515)에 내리신 처분에 대해 신으로서는 그것을 사시(四時)처럼 믿고 금석(金石)같이 지킬 것입니다. 가령 귀신 같은 못된 무리들이 감히 넘보는 마음을 먹고 추숭(追崇)의 논의를 내놓았을 때 신이 만약 그들의 종용을 받아 의리(義理)를 바꾸어놓는다고 하면 그는 천하에 대한 죄인이 되는 것은 물론 장차 종묘 사직에 대한 죄인이 될 것이며 동시에 만고의 죄인이 될 것입니다. 다만 《승정원일기》에 그 당시 사실들이 모두 기록되어 있어 그를 보고 전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듣고 논의하는 자들도 있어 그 소문이 온 세상에 유포되어 사람들 귀와 눈이 그 이외는 듣도 보도 못하게 하고 있으니 신 개인으로서의 애통한 마음은 돌아갈 곳 없는 궁인(窮人)과도 같습니다. 시골 마을에 사는 필부와 서민이라도 비절한 인정이 있고 사리를 아는 자라면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가슴에 사무친 슬픔을 죽도록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무지하오나 역시 지워버릴 수 없는 그 마음만은 있는데, 지금 와서 높이 세자의 자리에 앉아 백료(百僚)들을 대할 때 어찌 마음이 애통하지 않겠으며 이마에 땀이 나지 않겠습니까.

만약 신이 애통해 하는 것이 전하께서 하신 처분과 혹시 상치되는 점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전하가 하신 처분은 바로 공정한 천리(天理)에 의하여 하신 것이요 신이 애통해 하는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인정(人情)인 것으로 이른바 아울러 행하여도 서로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또 《승정원일기》가 없을 경우 후일 그 처분에 대해 증빙자료가 없어진다고 한다면 그도 그렇지가 않습니다. 국조(國朝)의 전례ㆍ고사들이 모두 기록으로 남아있어 금궤(金匱)ㆍ석실(石室)에 담겨져 각 명산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에 천추 만대를 두고 이동을 하셔도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데 어찌 꼭 일기가 필요할 게 뭐겠습니까.

아, 일기를 그대로 두고 안 두고는 오직 전하의 처분 여하에 달려있는 것이지만 신 자신이 처할 바로는 다만 저위(儲位)를 사양하고 종신토록 숨어 지내면서 그저 하루 세 때 삼가 기거(起居)를 살피는 직분을 다할 뿐인 것입니다. 말을 여기까지 하고 나니 저도 모르게 창자가 끊기고 심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하늘에 호소할 길조차도 없습니다."

하였는데, 왕은 이 상소를 직접 써서 궁관(宮官)을 시켜 승지에게 전하게 하고는 자신은 백포(白袍) 흑대(黑帶) 차림으로 존현각(尊賢閣) 앞뜰에 엎드려 처분을 기다렸던 것이다. 상소가 들어가자 영종이 하교하기를, "이 상소 내용을 들으니 슬프고 측은하게 느껴지는 내 마음을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는, 영종도 울고 제신들도 다 울었다. 그리고 이어 기거주(起居注) 기록 중 정축년 이후 임오년까지의 내용 중에 차마 듣지 못할 말들은 모두 실록(實錄)의 예에 따라 차일암(遮日巖)에 가서 세초(洗草)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왕을 명하여 수은묘(垂恩墓)에 가 배례를 올리도록 하였다.

처음으로 묘문(墓門)에 들어선 왕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상설(象設) 앞에 엎드려 잔디를 쓰다듬으며 옷소매가 다 젖도록 목놓아 울다가 제신들이 교대로 아뢰는 바람에 날이 저물어서야 돌아왔다. 그 다음날 영종이 하교하기를, "종통(宗統)을 바로 세워 3백 년 종국(宗國)을 확고히 하고, 일기를 세초하여 만세를 두고 자식된 마음을 풀었다. 어제 묘소의 광경은 듣기만 했으나 눈으로 본 듯이 선하다. 어찌 콧날이 시큰할 뿐이겠는가. 내 나이 21세 때 유서(諭書)와 도상(圖像)을 받았었는데, 《내훈(內訓)》을 보았더니 태종께서 효부 은인(孝婦銀印)을 소헌 왕후(昭憲王后)7516) 에게 내린 일이 있었다. 지금 나도 그 고사(故事)를 따르겠다." 하였다. 그날로 세초에 관한 진하(陳賀)를 집경당(集慶堂)에서 거행한 후 어제 유서와 친필로 쓴 효손(孝孫) 두 글자로 은인(銀印)을 주조하여 집경당 뜰에서 친히 주었는데 그때부터 유서와 은인을 언제나 대가 앞에다 진열하기를 산개(繖蓋)보다 앞에 하였다.

3월 병자일에 영종이 승하하였다. 성상의 병세가 심상찮을 때부터 왕은 끼니도 들지 않고 눈도 안 붙이고 어탑(御榻)을 떠나는 일이 없이 여러 대신들로 하여금 둘러서서 증후를 살피게 했으며, 급기야 위독했을 때는 수장(水漿)도 입에 넣지 않고 곡성이 그치질 않았다. 이미 상을 당하여는 빈렴(殯斂) 등의 의식 절차를 왕이 몸소 다 살피고 계속 곡을 하면서도 점검할 것은 꼭 다 하여서 비록 정신 못차리게 창황한 즈음이었으나 모든 일이 하나도 예에 어긋남이 없었다. 대신 이하 제신들이 사위(嗣位)할 것을 청하자 왕은 곡만 하고 승락을 하지 않아 여러 날을 두고 정청(庭請)을 했지만 그 일을 아뢰기만 하면 곡부터 하였다. 그러다가 성복일(成服日)에 와서야 비로소 마지못해 따르면서 이르기를, "뭇사람들에게 부대껴 어쩔 수 없이 자리에는 올라야겠으나 그러나 면복(冕服) 차림으로 예를 거행한다는 것은 내 마음에 더욱 죄송함을 느끼게 한다. 그 예가 《서경》 강왕지고(康王之誥)에 나와있지만 그것이 예가 아니라고 평을 가한 소식(蘇軾)의 말이 집전(集傳)에 실려있다. 비록 양음(亮陰)의 제도는 못 행한다 하더라도 금방 최복(衰服)을 벗고 길복을 입는대서야 될 일인가." 하였다. 그러나 제신들이 고례(古禮)와 국제(國制)가 그렇다는 것을 들어 강력히 청하니 왕은 울면서 따를 수밖에 없어 면복을 갖추고 유교(遺敎)와 대보(大寶)를 빈전(殯殿) 문 밖에서 받고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왕비를 왕대비(王大妃)로 혜빈(惠嬪)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높이고 빈(嬪)을 왕비로 책봉하고는, 하교하기를, "종통(宗統)과 계서(繼序)는 중대한 일이기에 비록 손(孫)이 조(祖)를 승계하고 제(弟)가 형(兄)을 승계했더라도 그 할아버지와 그 형은 당연히 아버지 자리가 되는 것이다. 오늘의 왕대비 칭호도 사실은 손이 조를 승계한 그 의의를 부여한 것이다." 하였다. 그리고 영종의 유지(遺旨)에 따라 효장 세자(孝章世子)를 진종 대왕(眞宗大王)으로 추숭하고 효순빈(孝純嬪)을 효순 왕후로 추숭했으며, 효장 세자 묘는 영릉(永陵)이라고 했다. 그후 연신(筵臣)에게 하교하기를, "추숭 제도가 주나라 때 시작이 된 것이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건국 초기에나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영릉 추숭도 그것이 선왕조 유지이기에 감히 거행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것이 내 본의는 아니다." 하였다. 면복을 벗고 다시 상복을 입은 다음 윤음을 내려 중외에 유시하기를,

"아, 과인(寡人)은 사도 세자 아들이다. 선왕이 종통을 중히 여겨 나로 하여금 효장 세자 뒤를 잇도록 명했던 것인데, 내가 전일 선왕께 올린 글월을 보면 불이본(不貳本)에 대한 내 뜻을 충분히 짐작할 것이다. 예(禮)를 비록 엄밀히 지키지 않으면 안 되지만 정(情) 역시 풀지 않고는 안 되는 것이니 제사 모시는 절차를 당연히 제이대부(祭以大夫)의 예7517)대로 해야 할 것이나 태묘(太廟)의 예와는 달라야 하고, 혜경궁 역시 당연히 경외에서 공헌(貢獻)하는 바가 있어야 하나 대비와는 차등을 두어야 할 것이다. 해당 관아로 하여금 그 절차를 강정(講定)하여 아뢰게 하라. 그리고 만약 못된 귀신 같은 부정한 무리들이 이를 빙자하여 추숭(追崇)의 논의를 할 경우는 여기 선왕의 유교(遺敎)가 있으므로 의당 거기에 맞는 법을 적용하여 선왕의 영령께 고할 것이다."

하였다. 사도 세자에게 존호(尊號)를 추상하여 장헌(莊獻)이라고 하고, 수은묘(垂恩墓)는 영우원(永祐園)이라고 봉했으며, 사당은 경모궁(景慕宮)이라고 하고, 각종 모시는 의식 절차는 송(宋)의 복왕(濮王)에게 하던 의식.7518)을 따랐다. 그리고 축식(祝式)은 주자(朱子)가 정했던 대로 황숙부(皇叔父)라고 하고 종자(從子)라고 썼으며 오향(五享)7519) 때는 희생과 아악을 썼다. 그리고 사당이 비좁다 하여 넓게 확장하고는 세종(世宗) 때 종묘에 북장문(北墻門)을 두었던 것처럼 궁(宮)의 서쪽과 원(苑)의 동편에다 일첨(日瞻)ㆍ월근(月覲)ㆍ유첨(逌瞻)ㆍ유근(逌覲) 등의 문을 두고 매월 간소한 행차로 가 살피곤 했으며 《궁원의(宮園儀)》를 책으로 만들어 궁 안에다 두기도 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으면서 대종(大宗) 소종(小宗)의 논(論)을 저술하고 또 《상서(尙書)》에 있는 "마음은 예로 제어하고 일은 의리에 맞게 처리한다[以禮制心 以義制事]"라는 구절에 대해 강술한 바 있었는데, 지금 그 《궁원의》를 만든 것도 사실은 그것이 기본이 되었던 것이다.

이광좌(李光佐)ㆍ조태억(趙泰億)ㆍ최석항(崔錫恒) 등의 관작을 추탈했는데, 광좌 등은 영종 을해년에 추탈했다가 그후 다시 복관(復官)된 자들로서 왕이 그때 와서 신축ㆍ임인 년간의 사건의 옳고 그름을 당연히 먼저 밝혀내야 한다고 하면서 을해년에 했던 처분대로 다시 하라고 명했던 것이다. 적신(賊臣) 김상로(金尙魯)는 영종 정축년7520)부터 실권을 쥔 재상으로서 암암리에 궁녀 문(文)의 아우인 문성국(文聖國)과 결탁하여 영종과 세자와의 사이에 참화가 일어나도록 만든 자였는데, 이때 와서 하교하기를,

"정축년 12월 25일 대행 대왕이 공묵합(恭默閤)에 납시었을 때 상로가 감히 앞자리에서 망측하고 부도한 말로 답하니 선왕께서 그를 풍도(馮道)에다 비유하셨고, 언젠가 내게도 하교하시기를 '상로는 네 원수다. 임오년 일을 훗날 다시 들먹일 것은 비록 없겠지마는 임오년으로부터 5년 이전부터 5년 후인 임오년에 일어날 사건을 양성한 자는 바로 일개 상로뿐이다.' 하시기에 내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조아리면서 마음속에 깊이 새겨두었다. 뒤늦게나마 당연히 역률(逆律)로 다스려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또 윤음(綸音)을 내려 문녀(文女)의 죄악상을 포고하고 그의 작호(爵號)도 삭탈했으며 성국에게도 노적(孥籍)의 법을 적용했다가 곧 선왕조의 금령(禁令) 때문에 두 적신에 대한 추탈과 노적은 집행을 보류하였는데 가을에 와서 문녀에게는 사사(賜死)를 했으니 그것은 인산(因山)이 끝나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여름에는 이덕사(李德師)ㆍ조재한(趙載翰)ㆍ박상로(朴相老)ㆍ최재흥(崔載興) 등을 친국했는데, 이는 왕이 춘저에 있을 당시 재한 등이 임오년 일을 징토(懲討)한다는 핑계로 요사스런 환관 이흥록(李興祿)ㆍ김수현(金壽賢) 등과 비밀히 결탁한 후 왕에게 소문을 전했는데, 왕이 그때 어린 나이였지만 그들의 간악상을 알고는 마음속으로 미워했었다. 그런데 급기야 대상을 당하자, 시골 유생 이일화(李一和)를 시켜 상소하여 임오년 일을 다시 말하게 하고, 이덕사(李德師)의 상소문도 함께 올라왔는데 그 내용이 똑같았다. 이에 하교하기를, "이는 선왕(先王)을 무함한 역적이다." 하고는 재한ㆍ덕사 등을 친국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박상로는 부도한 말을 발설했던 관계로 드디어 사시(肆市)를 하였고, 덕사ㆍ재한ㆍ재흥 등은 모두 법대로 처형했으며, 그해 가을 영남 사람 이도현(李道顯)이 또 덕사와 똑같은 내용의 상소를 하여 그도 그날로 친국 끝에 목을 베었다.

그때 대신들과 삼사(三司)는 인한(麟漢)과 후겸(厚謙) 모자의 죄를 바로잡을 것을 청했는데, 이에 대해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임금들이 자기 자신과 관계되는 사건이면 그것을 혐의롭게 여겨 불론에 부치는 것이 너그러운 도량인 것으로만 생각한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의리(義理)가 흐리멍덩해지는 경우가 있었는데, 명철한 임금들도 그러한 실수를 면하지 못했으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인한으로 말하면 그가 지은 죄가 대리 청정을 방해한 정도뿐이 아니지 않은가." 하고, 인한ㆍ후겸은 귀양을 보내고, 후겸 어미는 성 밖으로 내쫓았으며, 신회(申晦)는 관직을 삭탈하고, 윤양후(尹養厚)ㆍ윤태연(尹泰淵)은 다 먼 곳으로 정배하였다. 태연의 족제(族弟) 윤약연(尹若淵)은 옥당(玉堂)의 관원으로서 투소(投疏)하여, 인한은 나라쪽 사람이라고 하고, 토역(討逆)의 논을 영합(迎合)이라고 주장했으므로, 왕이 그를 불러 다시 물었는데, 약연은 더욱 사리에 어긋난 말을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춘추(春秋)》의 법으로는 역적을 두둔하는 자도 역시 역적인 것이다." 하고, 드디어 약연을 역적 편에 서서 그들을 위해 정성을 쏟았다는 죄목으로 친국하였다.

홍지해(洪趾海) 부자와 형제 그리고 윤태연(尹泰淵)ㆍ민항렬(閔恒烈)ㆍ이상로(李商輅)ㆍ이선해(李善海)ㆍ이경빈(李敬彬) 등이 서로 짜고 모의를 해가며 암암리에 국가 전복을 도모해왔던 흉물스런 말과 문서가 비로소 모두 드러나 차례로 국문을 당했는데, 약연은 섬으로 정배되어 가다가 길에서 죽고, 항렬ㆍ선해는 복주(伏誅)되고, 상간(相簡)은 결안(結案)을 받고 지레 죽고, 상로 역시 지레 죽었으며, 지해ㆍ찬해(纘海)ㆍ경빈은 섬으로 정배되었다. 또 태연(泰淵)ㆍ상운(翔雲)ㆍ양후(養厚)를 국문했는데 상운은 낙임(樂任)ㆍ후겸(厚謙)의 사주를 받았던 죄목으로 사실을 고백하고 법에 의해 처형되고, 태연ㆍ양후는 사실 고백 후 지레 죽었다. 그리고 궁액[掖] 무리 70여 명을 색출하여 유사(有司)에게 회부했는데 그들은 모두 후겸ㆍ인한 등의 사인(私人)들로서 안에서 기회를 엿보고 밖에 나와 선동을 일삼던 자들이었다. 유생 이명휘(李明徽)가 상소하여, 화양 서원(華陽書院)에다 황묘(皇廟)를 세우고 받드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가 친국 끝에 섬으로 정배되어 가기도 했다.

가을에 대고(大誥)를 내려 역적들의 역모 실상을 포고하면서 끝에다 이르기를, "이번 역적들은 그 대다수가 고가 대족(故家大族)이었기 때문에 그들 인척이나 친구들 사이에도 그들의 기미(氣味)에 물들고 그들 논의에 현혹된 자들이 틀림없이 많이 있을 것이나 그들 모두를 불문에 부쳐서 유신(維新)의 교화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하고, 대신들이 백관을 거느리고 인한ㆍ후겸의 12가지 큰 죄목을 하나하나 거론하면서 빨리 목벨 것을 청했으나 왕은 허락지 않았다. 제신들이 면대를 요청하고 강력히 주장하자, 왕이 이르기를, "아직까지 처분을 보류해 온 것은 자전의 마음이 불안하실까 염려스러워서였는데 오늘 자전의 하교에 사은(私恩)을 돌봐서는 안 되고 왕법(王法)을 굽혀서도 안 된다고 하셨기에 그 덕음(德音)을 듣고서는 내 마음에 결정을 내렸다." 하고는 인한ㆍ후겸에게 사사(賜死)를 명했던 것이다. 역적들을 다 베고는 《천의소감(闡義昭鑑)》 모양으로 책을 편찬하기 위하여 개국(開局)을 하도록 명하고 이듬해에 그 책이 완성되자 이름하여 《명의록(明義錄)》이라 하였다. 삼사가 후겸ㆍ인한 두 역적에 대하여는 그들 처자까지 연좌시킬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법이란 온 천하에 공평해야 하는 것으로 비록 지존의 임금이라도 자기 사의(私意)에 의해 이랬다저랬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형을 결정해 집행하는 데 있어 죽기 전에 결안(結案)을 받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율문(律文)에 준하는 것이 바로 아조(我朝) 4백 년 간의 변함없는 상전(常典)이다. 아, 상로(尙魯)ㆍ성국(聖國) 같은 원수와 상로(商輅)ㆍ상운(翔雲) 같은 역적에게도 차별을 두지 않았었는데 후겸ㆍ인한 둘에게만 법을 그렇게 적용한다면 법이란 천하에 공평해야 한다고 하는 뜻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부터는 결안도 않고 역률(逆律)을 적용하는 일, 그 몸이 죽은 후에 처자 연좌를 추가 실시하는 일, 결안은 차률(次律)로 하고서 극율(極律)을 가하는 일은 모두 없애라."

하였다. 삼사가 또, 안겸제(安兼濟)가 후겸을 위해 연희궁(燕禧宮) 터에다 집을 지어 계룡산(鷄龍山)에 관한 비결대로 하려고 했다 하여 그의 죄도 다스릴 것을 청하자, 하교하기를, "계룡산에 관한 말은 그것이 일개 비결에 의한 말인데 예로부터 군자(君子)가 일찍이 그러한 일로 사람을 죄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더구나 지존의 제왕(帝王)이겠는가. 그것이 바로 선유(先儒)들이 이른바 '채확(蔡確)7521) 을 공격하자면 공격할 말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거개정시(車蓋亭詩)로 죄안을 삼은 것은 원우(元祐) 시대의 현자들이 도리어 결과적으로 바른 것을 버린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과 같은 꼴인 것이다. 겸제가 후겸에게 붙었던 그것을 그의 죄로 삼으면 그에게 맞는 죄인 것이다." 하고, 먼 변방으로 정배하였다.

인산(因山) 의례가 확정되고 조조(朝祖)의 예7522)를 행하려고 할 때 하교하기를,

"혼상(魂箱)을 놓고 조조(朝祖)를 행하는 것이 《상례보편(喪禮補編)》에 기록되어 있으나 원래 상례(喪禮)란 전진이 있을 뿐 후퇴는 없는 법이다.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 보면 부하(負夏) 지방 어느 상주가 조조를 마치고 널을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보고 자유(子游)가 그것이 실례(失禮)인 것을 비난하자 증자(曾子)는 자유가 자기보다 더 잘 안다고 훌륭하게 여겼다. 한 뜰안에서 다시 옮겨 전에 있던 자리로 온 것도 예가 아니라고 비난했거늘 하물며 혼상을 모시고 나와 태묘(太廟)에 하직을 고하고서 다시 되돌려 빈전(殯殿)으로 모신다면 후퇴는 없다고 하는 예에 비추어 볼 때 현격한 차이가 있는 정도 뿐이 아니다. 또 '넋은 평소 거처하던 곳으로 돌아온다.[魂返室堂]'라는 것이 바로 선유(先儒)들 말이고 보면 조조를 하면서 재궁(梓宮)을 모시고 하지 않고 혼상을 모시고 하는 것 역시 예의 본의에 비추어 볼 때 또 어떻다고 하겠는가.

고례(古禮)를 따르자니 시대적으로 맞지 않음이 있고, 주부자(朱夫子)도 그에 관한 정론이 없어 우리 나라 선정(先正)들 역시 어떻게 해보려다 못하고 말았으니 그 문제는 함부로 논의할 성질이 아니다."

하고, 대신들과 예관(禮官)이 논의하도록 명했다가 논의가 귀일이 안 되자 《오례의(五禮儀)》를 따르도록 명했다. 계빈(啓殯)을 하려 할 때도 하교하기를, "세월이 흘러 인산(因山) 시기가 금방 닥쳤으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을 더더욱 가눌 길이 없구나. 내가 다소나마 정례(情禮)를 펼 수 있는 길이라고는 제전(祭奠) 그 일뿐이 아니겠는가." 하고, 반우(返虞)에서부터 칠우(七虞), 졸곡(卒哭)에 이르기까지 모두 친히 제례를 행하였다. 왕은 계빈하는 날도 슬퍼하는 모습이 처음 상을 당했을 때와 같았고, 처음에는 발인 행렬도 친히 따라가려고 했다가 예로부텨 그러한 예는 없다는 강력한 만류로 흥인문(興仁門) 밖에서 하직절을 올렸던 것이다. 영가(靈駕)가 이미 멀어졌는데도 그때까지 노차(路次)에 우두커니 서서 슬픈 곡성이 공중에 메아리쳤으므로 그를 들은 백성들도 모두 따라 울었다.

그 다음달에 처음으로 원릉(元陵)을 배알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한 후 유사에게 명하여 각 전궁(殿宮)의 공선(貢膳) 규례를 정해 팔도(八道)와 양도(兩都)에 반포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하교하기를, "그게 비록 하찮은 일이지만 백성들의 고통을 고려한 뜻에서이다." 하고, 이어 하교하기를, "나라에 보탬이 되고 백성들에게 유익하다면 내 살갗인들 무엇을 아끼겠는가. 선왕께서 과인(寡人)에게 늘 말씀하셨던 일이 국가 용도가 바닥이 났다는 것과 백성들 생활이 옹색하다는 것이었다. 나라와 백성을 생각할 때 밤중에도 일어나 자리를 서성인다. 그리고 궁방(宮房)의 전결(田結)에 있어 지정량 이외에 더 받는 자가 있거나, 대(代)가 다됐는데도 회수하지 않은 것이 있으면 그것은 국용(國用)에 큰 손실을 줄 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해를 끼치는 일이니 해당 아문으로 하여금 조사하여 바로잡도록 하라." 하고는, 이어 온빈(溫嬪) 이하 여러 궁방의 전결에 있어서도 대가 다한 것과 더 받아온 것들은 그 모두를 호조에 귀속시키도록 명하고, 내시(內侍)로서 녹(祿)을 받는 자는 월말에 가서 이조가 그 사실을 아뢰도록 했는데, 이는 《주례(周禮)》에, 천관 총재(天官冡宰)가 모든 것을 다 총괄하여 관리하던 제도를 모방하는 뜻에서였다.

이보다 앞서 각 궁방의 전세 납입에 있어 해마다 무뢰배들을 궁차(宮差)로 임용해 각도로 나누어 보내 저들 멋대로 끌고 당기고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백성들이 너무나 괴로워했다. 왕이 일찍부터 그 폐단에 대해 들어왔기 때문에 하교하기를, "내가 왕위에 오른 이후로 어떻게 하면 백성들을 잘 돌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거의 침식을 잊을 정도이다. 궁방의 전세 납부 제도가 수백 년을 두고 백성들에게 해를 끼쳐왔던 것이 사실이다. 무뢰배들이 궁가를 빙자하고 각 고을을 횡행하면서 백성들을 괴롭혀왔기 때문에 기름진 땅들은 모두 궁장(宮庄)의 소유가 되고 힘없는 백성들의 목숨이 거의 궁가에서 보낸 원역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백성들의 살과 뼈를 깎아내고 심지어 개와 닭까지 그 피해를 받고 있으니 저 불쌍한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지금부터는 각 궁방의 전세 납입을 본읍(本邑)에서 곧바로 호조에다 납입하고 호조가 그것을 각 궁방에다 떼어주도록 할 것이며, 궁노(宮奴)ㆍ도장(導掌)을 내려보내 세액을 올리고 정해진 액수 이상을 거두어들이는 폐단은 일체를 혁파하도록 묘당(廟堂)의 신들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각도에다 반포하게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신한부(信漢符)7523) 는 그것이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기 위한 것인데 근래 기강이 해이하고 아무도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엄숙해야 할 궁금이 하나의 거리가 되어버렸다. 지금 즉위 초를 계기로 하여 옛 제도를 다시 살펴야 하겠으니 지금부터는 부신없이 무턱대고 들어오는 자는 병조로 하여금 살피고 단속하게 하라." 하였다.

과거 제도의 폐단에 관해 윤음(綸音)을 내려, 삼대(三代)시절 빈흥(賓興)의 법7524), 서한(西漢) 시대 현량(賢良) 선임 제도7525), 황조(皇朝)의 격옥(隔屋) 제도7526), 주자(朱子)의 공거의(貢擧議)7527) 등을 들어 정부(政府)ㆍ관각(館閣)의 신하들 의견을 두루 들었으나 결국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시행을 보류하고 말았다. 창경궁 내원(內苑)에다 규장각(奎章閣)을 세우고 영종 어제(英宗御製)의 편찬 인쇄가 끝나자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 관방(官方)이 송(宋)의 제도를 그대로 준용하고 있으면서 용도(龍圖)ㆍ천장(天章)7528) 의 제도 같이 어제(御製)를 모셔두는 곳은 없다. 광묘(光廟) 때 규장각이라는 명칭은 있었으나 미처 건립을 못했고, 숙묘(肅廟) 때도 규장각 칭호는 있었지만 역시 건립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내 그 열성조의 뜻을 이어 열성조 어제를 모두 모으고 후원에다 규장각을 지어 송나라가 그랬던 것처럼 열성조 모훈(謨訓)을 그곳에다 모시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저술한 것도 그를 편차(編次)하는 관(官)이 없어서는 안될 것이니 선왕조 시대에는 그를 편차했던 사람이 설사 그 일만 하고 직함은 없었을지라도 지금 그 각을 건립한 이상 직관을 두고 맡아 지키게 함으로써 명실상부한 편차인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 제학(提學)이 송(宋)으로 치면 바로 학사(學士)이고, 직제학(直提學)은 곧 송의 직학사(直學士)이니 용도각(龍圖閣)의 학사ㆍ직학사처럼 규장각에도 제학ㆍ직제학을 두라. 그리고 또 직각(直閣)ㆍ대교(待敎)를 두어 송의 직각(直閣)ㆍ대제(待制)를 둔 것 같이하면 그게 모두 근거있는 제도가 될 것이다."

하였다. 이어 이조에 명하여 6명의 각신(閣臣)을 차출하도록 했는데, 제학은 일찍이 문형(文衡)이나 양관(兩館)의 제학(提學)을 지냈던 사람으로 충용하도록 하고, 직제학은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사람으로 직각은 응교(應敎) 또는 이조 낭관을 역임한 사람으로 대교는 한림 권점을 받은 사람으로 각각 충용했으며 직각ㆍ대교는 뒤에 모두 권점을 했는데 즉위 초기 성명(聲明)의 치효가 사실은 여기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전랑(銓郞) 임용에 있어 통청(通淸)의 법을 부활시켰다. 이보다 앞서 영종(英宗)이 전랑 선임에 있어 시끄럽게 다투는 폐단이 있다 하여 혁파한 지가 몇 년 되었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옛 제도를 부활시켜 격양(激揚)에 도움을 주자는 청이 있었기 때문에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가 기유년에 와서 도로 혁파하였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 척신(戚臣) 홍봉한(洪鳳漢)이 추숭(追崇)을 주장하면서 성상의 귀를 현혹시켰는데 영종 임진년에 와서 역시 척신인 김귀주(金龜柱)가 상소하여 그 죄를 성토한 일이 있었다. 그 일을 두고 지금 와서 왕이 하교하기를,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그것을 끝까지 고집하는 것은 정신(廷臣)들도 다 알 것이다. 그 당시 봉조하(奉朝賀)의 주청에 대해 논자가 그를 성토한 것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예로부터 제왕(帝王) 집이라면 신하로서는 존경하고 근신해야 하는 것인데 김귀주 처지로서 주연(胄筵)에서 주고 받던 말을 대조(大朝)에 상소로 올렸으니, 대조가 만약 그것을 나에게 물었다면 내가 무슨 말로 대답을 했겠는가. 그 얼마나 섬뜩한 일인가." 하고, 귀주를 흑산도(黑山島)에 위리 안치하도록 했다가 갑진년에 와서 뭍으로 나오게 했다.

그해 겨울에 하교하기를, "언로(言路)는 국가로 치면 혈맥(血脈)인데 요즘 와서는 조용하기만 하고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으니 아마도 과인(寡人)이 과오를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자리를 물려받은 초기에 바른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사실 위에 있는 사람이 통솔을 잘못하기 때문이기는 한 것이지만 말하는 것이 직분인 자들로서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왜 죄가 아니겠는가. 양사의 제신들을 모두 파직시키라." 하였다. 한후익(韓後翼)이 정언(正言)으로서 투소(投疏)하면서, 을미년7529) 에 정권을 주고 받은 것이 대의 명분으로 볼 때 정상적인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마음으로 한 일도 아니라고 하여, 제신들이 그를 국문할 것을 청하니, 비답을 내리기를, "그 상소 내용에 임금의 잘못을 신랄하게 열거했으니 무릇 문자(文字)에 있어 부분적으로 꼬투리를 잡는 것이 청명한 조정에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신상권(申尙權)이 군직에 있으며 올린 상소에 후익을 성토하면서 왕을 찬양하는 말이 많았는데, 이를 보고는 하교하기를, "상권의 상소문은 바로 한 장의 상덕문(狀德文)이다. 과인이 등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슨 실질적인 정책이나 실질적인 효과가 조야(朝野)에 미쳐갔겠는가. 만약 상권의 말대로라면 임금 잘못이나 현재 정사에 대해 하나도 논의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러한 자를 죄주지 않으면 틀림없이 임금 자신이 높다랗게 앉아 스스로 성인인 양하는 폐단이 생길 것이다." 하고는, 그 상소문은 다시 돌려주고 그의 직을 삭탈하도록 하였다.

윤음(綸音)을 위조한 자가 있어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내어 경기 지방을 비롯 호령(湖嶺) 사이에까지 유포를 시켰는데 무릇 7개 조항으로 된 것으로서 흉도(兇徒)들이 민심을 선동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변(上變)한 자가 있었기에 10여 명이나 체포하여 신문하였으나 모두가 시골에 살면서 잘못 전해들은 무리들이었다. 하교하기를, "책할 것도 없다. 백성들을 자꾸 시끄럽게 하지 말라." 하고, 정상을 참작하여 특명으로 방면하였다. 그리고 윤음을 내려 팔도 백성들을 일깨웠던 것이다. 원년(元年) 봄에 동북면에 기근이 들어 사신을 보내 북관(北關)의 진휼을 감독하게 하고, 두 도의 도신(道臣)ㆍ어사(御史)에게 유시를 내려 백성을 돌보고 편의를 제공할 수 있는 정책을 강구하여 조목별로 들어 아뢰게 했으며, 각도로 하여금 도천(道薦)을 하게 하고, 또 경외를 막론하고 효행(孝行)과 절의(節義)가 특이한 자면 예조가 의정부와 논의하여 등급을 지어 아뢰도록 명하였다.

영릉(永陵)ㆍ홍릉(弘陵)을 배알하고, 3월에 친히 효명전(孝明殿) 연제(練祭)를 행한 후 하교하기를, "옛날 우리 선조 대왕(宣祖大王)께서 하교하시기를 '해를 향해 고개 숙이는 해바라기라면 곁가지인들 무슨 상관이며, 충성을 바치고 싶은 신하라면 왜 꼭 정적(正嫡)이어야 한다던가.' 했는데 그 얼마나 훌륭한 성인의 말씀인가. 그러나 우리 나라는 명분(名分)을 중히 여기고 지벌(地閥)을 숭상하는 풍토라서 신분이 낮은 자에게 요직은 맡겨도 청직은 맡기지 않는 것이 이미 옛분들의 정론이 되어 왔다. 몇 해 전 대각(臺閣)의 통청(通淸) 문제만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이 선왕의 고심 끝에 나온 제도였지만 결국 유명무실이 되고 말았는데, 필부(匹夫)가 억울함을 풀지 못하면 그도 천화(天和)에 손상을 준다고 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그 많은 서류(庶流)들은 그 수가 결코 적은 수가 아닐텐데 그들 중에 어찌 국가가 필요로 하는 재준(才俊)의 선비가 없을 것인가. 그런데 목덜미가 말라붙고 귀가 누렇게 뜬 상태로 모두 방안에서 죽어가고 만다면 그 서류들 역시 내 신자(臣子)가 아니던가. 그들이 제 하고 싶은 짓을 못하고 제 포부를 못펴게 한다면 그는 과인의 허물인 것이다. 두 전조의 신하들로 하여금 그들 길을 터주고 인재 선발하는 방법을 강구하여 대신과 논의를 거쳐 아뢰게 하라." 하고, 이조에 명하여 그 절목(節目)을 만들라고 하였다.

여름이 가물어 지제교(知製敎)가 기우제문(祈雨祭文)을 지어 올리자, 하교하기를, "책축(冊祝)에, 죄와 책임을 자신이 지는 뜻이 없어서야 될 일인가." 하고, 다시 지으라고 명했다. 그후 얼마를 지나도 계속 비가 내리지 않자, 윤음을 내려 10가지 사항을 들어 자신을 꾸짖고 이어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승정원이 감선(減膳) 때는 다른 일 보는 것도 정지할 것을 여쭈니, 하교하기를, "옛날 선묘(宣廟)가 정전을 떠나 있을 때 비현각(丕顯閣)이 비좁았던 관계로 법연(法筵)을 열지 못하자 선정신 율곡(栗谷)은 강원(講員) 수를 줄일지언정 법연을 정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더구나 감선은 피전(避殿)과는 또 다른데 강석을 여는 것이야 무슨 구애가 있겠는가. 수성(修省)하고 있을 때는 더욱 근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니 차후 감선이나 피전 때는 으레 강연을 열도록 여쭈라." 하였다.

친히 사단(社壇)에 가 기우제를 행하고 돌아와서는 그 다음날 친히 소결(疏決)에 임하여, 서울 외지를 막론하고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시신을 발굴하여 검시하는 법을 두 조(朝)에서 교시한 대로 그대로 따를 것을 법제화하라고 하였다. 처음에 숙종(肅宗)은 각 지방 살인 사건에 있어 발굴 검시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몇 십년을 두고 사건이 미결로 남아 옥중에서 말라 죽은 자도 있다 하여 《무원록(無冤錄)》 규정대로 발굴 검시를 하도록 명했고, 영종(英宗)은 "주(周)나라 제도도 해골은 묻도록 되어 있는데 백골을 검시한다는 것은 두 번 죽임을 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몰래 매장한 것은 발굴 검시를 하고, 이미 공식으로 매장이 된 무덤은 검시하지 말라." 하고, 하교를 했던 것을 담당관들이 발굴 검시를 금한 것으로 잘못 알아듣고 서울과 지방에서 감히 발굴 검시를 못했기 때문에 조정 신료들이 누차 그에 대해 말해왔던 것이다. 이에 왕은 두 조정에서 받았던 수교(受敎)를 가져오게 하여 보고는 하교하기를, "선조(先朝)의 하교 중에, 이미 매장이 된 것은 검시하지 말라고 한 것은 발굴을 금한 뜻이 아니라 바로 백골 검시를 지적하신 것이다. 몰래 매장된 것은 검시를 하라는 것이 바로 숙조(肅祖) 수교인즉 새로 영갑(令甲)을 정할 것 없이 다만 두 조의 수교 그대로 준행하고 혹 해가 너무 오래된 것들은 함부로 발굴 검시를 말고 일단 계문(啓聞)하고 나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 을미년 증광시 정시(庭試) 때 신회(申晦)가 시관을 맡았는데 뇌물과 청탁이 판을 쳤기 때문에 합격자 발표 후에 물의가 크게 일었다. 흉도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스스로 알고 또 왕이 그 사실을 알까 두려워하여, 서연(書筵)에서 과거 문제에 대해 수작한 일이 있었다고 거짓 핑계를 대고는 정후겸ㆍ홍인한 무리가 좌우에서 협박과 제어를 가하여 동궁을 무함할 계책을 꾸몄었는데, 지금 와서 정신(廷臣)들이, 을미년의 방(榜)은 바로 그 역적들이 역모를 꾸미는 데 있어 중요한 계기로 이용한 것이라고 하면서 그 방을 삭제해버릴 것을 누차 청하였다. 그리하여 그 원방(原榜)은 파하고 전시에 직부(直赴)할 자격을 은사받은 것으로 갑을을 매겨 홍패 방[紅榜]을 다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축년에는 방 전체를 구별을 두지 않고 삭제하면서 잘못 걸린 사람도 있었다 하여 윤익동(尹翊東) 등 8명에 대하여는 복과(復科)를 하기로 하였다. 하교하기를,

"금려(禁旅)는 옛날로 치면 호분(虎賁)이요 우림(羽林)이다. 각 궁전의 숙직과 호위를 맡고 대가를 곁에서 호위하는 직책이니 선임에 있어 신중을 기하고 재목도 적임자를 골라야 할 것인데 도리어 훈국(訓局)의 마병(馬兵)이나 금위(禁衛)의 기사(騎士) 대우만도 못한대서야 될 일인가. 내금위(內禁衛)ㆍ겸사복(兼司僕) 중의 일번(一番)은 선천(宣薦)으로 통하는 자리로 정하고 인재를 골라 늘 보충 임명하여 무인으로서 초사(初仕)하는 발판을 삼도록 하라."

하였다. 이어 병조를 맡고 있는 신하에게 명하여 장신(將臣)과 함께 그에 관한 절목(節目)을 만들어 시행하게 하였다. 또 그후에는, 기사(騎士)는 서류(庶類)에서 뽑도록 하고 그들 초사(初仕)도 선천으로 통하는 금군(禁軍)과 같은 예를 적용하도록 하였다.

7월에 대내(大內)에 도둑이 들었다. 왕은 언제나 조회를 파하고는 존현각(尊賢閣)에 나아가 밤이 깊도록 책을 보시곤 했는데 그날 밤도 여느 때와 같이 촛불 아래서 책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발자국 소리가 들리는데 보장문(寶章門) 동북 쪽에서 행랑채 지붕을 타고 오는 소리였다. 어좌(御座)가 있는 방의 지붕 중앙에 이르더니 기왓장을 던지고 자갈을 뿌리는 것이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왕은 도둑이 든 것을 알고 환시(宦侍)와 액예(掖隷)들을 불러 불을 밝히고 보게 했는데 도둑은 이미 달아나고 없고 지붕 중앙에는 기왓장 자갈 등이 그대로 널려 있었다. 이에 숙직하던 위사(衛士)와 삼영문(三營門)의 밤을 지키던 군대들을 동원하여 담 안팎을 지키게 하고 금중(禁中)을 샅샅이 뒤졌으나 잡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위장(衛將)이 하룻밤에 다섯 교대로 순찰하던 옛 제도를 부활시키고 액예 무리 중에 근본이 분명하지 못한 자들은 도태시키도록 명했다.

존현각 위치가 너무 노출되어 있어 간악한 무리들이 거침없이 들어오기 쉽다 하여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제신들이 청해서 창덕궁(昌德宮)으로 거소를 옮겼다. 그런데 그해 8월에 또 도둑이 창덕궁 경추문(景秋門) 담을 넘어 들어왔다가 수포군(守舖軍)에게 체포되어 그를 신문했더니 원동(苑洞) 동임(洞任)인 전흥문(田興文)이 지난날 밤에 호위 군관(扈衛軍官) 강용휘(姜龍輝)와 함께 존현각 지붕 위로 잠입하여 난을 꾸미려고 했다가 못하고 지금 두 번째로 왔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흥문ㆍ용휘 두 역적을 친국했더니 실은 홍술해(洪述海)의 자식 상범(相範)이 시킨 것이었다.

과거에 상간(相簡)은 곤장 아래서 죽고, 지해(趾海)ㆍ찬해(纘海)는 섬으로 정배되고, 술해(述海) 역시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범한 장오죄로 사형에서 감제되어 섬으로 정배되어 갔으며, 계능(啓能)은 후겸ㆍ인한과 같은 무리였다는 이유로 역시 절도(絶島)로 귀양갔는데, 그 때문에 지해ㆍ술해의 자질(子姪) 처첩(妻妾)들이 밤낮으로 국가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여러 대 권귀(權貴) 집안이라서 문생(門生)과 고리(故吏)가 많았기 때문에 그들이 궁인(宮人) 액예 무리들과 암암리에 결탁을 하고 상당 기간 불궤(不軌)를 도모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상범과 용휘와는 서로 이웃에 살면서 그가 날쌔고 힘이 센 것을 알고는 천금을 주고 결탁해왔는데 흥문이 사는 곳이 금원(禁垣)과 가깝다 하여 그와도 합류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용휘는 허리에 철편(鐵鞭)을 차고 흥문은 손에 칼을 들고 대궐에 들어가 만나는 사람이면 곧 죽이기로 하고 상범은 형세를 보아가며 접응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그날 밤 용휘와 흥문이 함께 존현각으로 올라가 기와를 뜯고 모래를 뿌리며 도깨비 시늉을 하여 우선 사람들 귀와 눈을 현혹시킨 뒤 부도(不道)를 저지르려고 했던 것인데 갑자기 대궐 안이 발칵 뒤집힌 것을 보고는 그대로 달아났다가 급기야 거소를 옮기자 또 넘어 들어오다가 수포군에게 잡힌 것이다.

내응(內應)을 하기로 한 자들은 궁인(宮人)으로는 복빙(福氷)ㆍ수애(秀愛)ㆍ월혜(月惠)ㆍ금희(今喜)였고, 환관(宦官) 안국래(安國來), 액예 무리로는 강계창(姜繼昌)ㆍ김수대(金壽大)ㆍ김복상(金福尙)이었으며, 공모자로는 지해의 가객(家客)인 홍대섭(洪大燮)ㆍ홍필해(洪弼海)ㆍ홍신해(洪信海)였다. 상범을 국문한 결과 그들 역적 모의 내용이 흥문ㆍ용휘의 공초 내용과 똑같았고, 술해의 처 효임(孝任)은 무당과 결탁하여 흉물을 묻어두고 저주를 일삼았다. 그리고 홍계능(洪啓能)은 자기 아들 신해와 조카 홍이해(洪履海), 술해의 조카 홍상길(洪相吉)ㆍ홍상격(洪相格), 이택수(李澤遂)ㆍ민홍섭(閔弘燮) 등과 함께 밀실에서 음모를 꾸며 이윤이 태갑을 동궁(桐宮)에 내쳤던 일과 계해 반정(癸亥反正)의 일을 명분으로 삼아 지해ㆍ술해ㆍ찬해 세 역적이 귀양살이 가 있는 곳을 드나들었는데 이들이 추대하려고 했던 자는 종신(宗臣)인 이찬(李禶)이었다.

역적들이 이렇게 세 길로 역적 모의를 했던 사실이 이제 와서, 모두 탄로가 나 차례로 잡아다 국문하여 모두 복주(伏誅)되었고, 계능만은 국정(鞫庭)에서 발악을 하다가 제 죄를 자백하고 지레 죽었으며, 계희(啓禧)ㆍ홍섭(弘燮)은 그 관직을 추탈했다. 계능이 누구를 추대하려고 한다는 설이 처음에 상길의 공사에서 나왔을 때 대신과 기타 신하들이, 역당(逆黨)의 전모가 아직 다 밝혀지기도 전에 왕실의 지친(至親)인 찬(禶)의 이름이 그들 추대 대상 속에 거론되고 있다 하여 그를 체포하여 신문할 것을 일제히 청했는데 이때 왕은 불끈 일어나 소차(小次)로 들어간 다음 오랫동안 장전(帳殿)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제신들이 누차 면대를 요구했으나 되지 않아 부득이 궁문을 밀치고 들어가서, 사세가 급박하고 나라 형세 또한 위태하다고 극언을 하고, 궁성을 호위할 것을 청했으며 또 찬을 체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왕은 끝까지 허락지 않았다. 급기야 상길 등이 법에 의해 처형되자, 대신 이하 삼사(三司)ㆍ종친(宗親)ㆍ문관ㆍ음관ㆍ무관 할 것 없이 하루에 예닐곱 차례씩이나 전정(殿庭)에 엎드려 찬을 처형할 것을 계청했고, 관학(館學)의 유생들은 파하고 떠났으며, 심지어 전직 군교(軍校)와 의관ㆍ역관 그리고 각 아문의 이서(吏胥)에서 오부(五部)에 거주하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번갈아가며 글월을 올리고 강력히 다투고 하였으나 왕은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계차(啓箚)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오늘 일로 말하면 관숙(管叔)ㆍ채숙(蔡叔) 때와 같은 사실은 있으나 관숙ㆍ채숙과 같은 마음은 없었는데 관숙ㆍ채숙을 다스리던 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실로 차마 못할 일이다." 했는가 하면, 또 이르기를, "나의 심정을 말로 하자니 소리가 먼저 흐느껴지고, 글월로 쓰자니 눈물이 먼저 종이를 적신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겨우 살아남은 인생 나 같은 자가 어디 또 있으랴. 형제라고 오직 3명의 서제(庶弟)가 있을 뿐인데, 이진(李禛)은 풍로(風露)에 시달리다가 불행히 일찍 죽고, 이인(李䄄)은 나이 들수록 병이 떠나지 않고 있는데, 찬 하나가 다행히 병이 없기에 그가 잘 성장하고 자손도 번창하여 우리 선부(先父)의 자손들이 다 우리 조정에 서서 낳아서 길러주신 은혜를 만분지일이나마 보답하게 되기를 언제나 바라고 있는데 어쩌다가 흉악한 역적 무리가 일어나 그들이 추대한다는 속에 찬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 여인들 속에서 생장하고 나이 어려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추대가 무엇인지 어떻게 알 것인가. 나의 이 심정이야말로 옛 기록에서 찾아보아도 아마 둘도 없을 것이다. 은혜를 끊고 법을 집행한다는 것은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말이 여기에 미치니 이 아픔을 무어라 말하랴." 하였다.

친국이 끝나자, 대신들이 승여를 부여잡고 계속 청하니, 왕은 승여를 희정당(熙政堂)에다 멈춰두고 앞으로 갈 수가 없었다. 왕이 대내로 돌아가자, 대신들이 금오(金吾)와 여러 당상을 거느리고 왕부(王府)로 가 찬을 뜰에다 끌어다두고 그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하였는데 찬은 거역을 하고 따르지 않았다. 이에 대신들은 다시 대언(對言)을 청하고는, 그것만 보더라도 이미 신하로 자처하는 도리가 아니라고 하면서 사사(賜死)를 청했으므로 왕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던 것이다. 찬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왕은 너무 슬퍼 오랫동안 정사도 살피지 않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부조를 하고 치상 절차를 돕게 했으며, 또 내수사에 명하여 예를 갖추어 안장하도록 하였다. 삼사(三司)가 그 명령을 취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그대들이 어찌 차마 그러한 사은(私恩)을 조금 베푸는 것까지 또 쟁집(爭執)하려 드는가." 하였다. 왕은 또 홍낙임(洪樂任)을 친국했다가 자전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하여 전석(全釋)을 특명하고 정신들이 누차 쟁집하였지만 허락지 않았다. 《속명의록(續明義錄)》을 찬집하여 그해 역모 사건을 다스린 전말을 기록했는데 그 의례(義例)는 원편(原編) 체재를 그대로 따랐다.

제신들이 호위청(扈衛廳)을 혁파할 것을 청하니, 하교하기를, "거기 있는 군관(軍官) 1천여 명도 우리 백성들인데 어찌 역적 하나가 거기에서 나왔다 하여 3개 청(廳) 소속들을 싸잡아 의심할 것인가. 조정 정령(政令)이 다 옳으면 먼 지방의 장사(將士)들도 창을 던져버리는 것이고, 사방 민심이 해이해지면 한 배 안의 사람들도 적이 되는 것인데 일개 호위청을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할 것이 뭐란 말인가. 지금의 3개 청도 원래 바꿀 수 없는 제도가 아니라 7개 청이 5개 청으로 되고 5개 청이 또 3개 청으로 된 것이니 그를 1개 청으로 통합하고 재예(才藝)가 우수한 자들을 정하게 뽑아 맡김으로써 옛 제도도 존속시키고, 용병(冗兵)도 없애고, 그들 마음도 위로가 되도록 하라." 하고, 이어 호위 대장(扈衛大將)은 아무리 대신이라도 훈척(勳戚)이 아니면 겸임을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무녀(巫女)들의 성안 출입을 금했으며, 의소 세손(懿昭世孫)의 묘를 둘러보고 의사ㆍ열사의 묘를 두루 참배하였다.

겨울에 우레가 친 이변으로 하여 감선(減膳)을 하고 구언(求言)도 했으며, 2년 봄에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이 완성되었다. 그보다 앞서 하교하기를,

"송(宋)의 태조는 일개 평범한 임금에 불과했지만 죄수들이 시달리다가 죽을까를 염려하여 개국(開國) 초기에 각주의 장리(長吏)들에게 죄수들을 잘 돌보도록 명했고 또 무더운 여름이면 옥리(獄吏)에게 조서를 내려 5일에 한 번씩 검사를 하고 옥사도 깨끗이 청소하며 수갑 형틀 등도 세척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먹을 것을, 병든 자에게는 약을 주게 했으며 죄가 경미한 자는 즉결로 처리하여 내보내게 하는 등 해마다 그를 되풀이했는데, 송나라 역사가 수백년 이어진 것도 그 원인이 그런 데에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우리 열성조께서 인명을 존중하고 백성을 돌보신 훌륭한 덕화야말로 바로 우리 가문 전래의 심법(心法)인데 이 소자(小子)가 어찌 감히 그 전통을 삼가 이어받지 않을까 보냐.

지금 더위가 다가오고 있는데 옥에 갇혀 있는 사형수들이 누차 고문을 당하고 난 뒤인데도 칼을 씌우고 수갑을 채워 내버려두고 형을 집행할 자도 형 집행을 않고 당연히 죽여야 할 자를 지레 석방하기도 하고 있으니 이는 요행수를 바라는 문을 열어주는 결과밖에 안 되는 것으로서 무형(無刑)을 목표로 형을 시행하는 뜻과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송조(宋朝)가 했던 일을 그대로 모방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그리고 형구(刑具)에 있어서는 그것이 각기 일정한 규격이 있는데 요즘 들으면 서울이나 외지 할 것 없이 옥을 다스리는 곳에서 법을 따르지 않고 있는 경우가 퍽 많다는데 법이란 누구에게나 평등한 것이어서 비록 임금이라도 감히 마음대로 못하는 것인데 하물며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관리들이겠는가."

하였다. 이어 형방 승지를 명하여 법부(法府)ㆍ법조(法曹)로 달려가서 법대로 되어 있지 않은 각종 형구들을 가져다가 규격에 맞게 바로잡게 하고, 또 각도 열읍(列邑)에도 유시를 내려 형구를 서울의 것에 준하도록 하게 했으며, 또 각영(各營)에도 명하여 곤장 규격을 바로잡게 하고, 또 《대명률(大明律)》ㆍ《대전(大典)》ㆍ《속대전(續大典)》을 참고 절충하여 따로 알맞은 법전을 만들라고 했었는데 이때 와서 그 책이 완성되어 인쇄 반포하였다. 그리고 또 유척(鍮尺)을 만들어 그 책과 함께 반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윤음(綸音)을 내려 여러 유신(儒臣)들을 정중히 불렀었다.

통어영(統禦營)을 강화부(江華府)로 통합하고 교동(喬桐)을 부사(府使)로 강등했는데 그는 강화도를 삼도(三道)의 요충 지대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후 조정 논의가 일치되지 않아 기유년에 와서 다시 옛날 제도대로 고쳤다.

대신(大臣)과 구경(九卿),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선왕의 부묘례(袝廟禮)를 거행할 날이 머지 않아 왕대비께도 책례를 올려야 할텐데 자궁(慈宮)에게만 유독 글자 한 자의 칭호도 올릴 수 없단 말인가. 아, 내가 대의(大義)라면 끝까지 지킨다는 것은 신료(臣僚)들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가령 그 예를 거행하자면 이존(貳尊)의 혐의가 있고 혹 압존(壓尊)과 관계가 되는데도 대의를 거스르고 자기 사의만을 내세워 억지로 숭봉(崇奉)하려고 한다면 이른바 그 숭봉은 내가 말하는 숭봉이 아닌 것이다. 이 일로 말하면 이미 이존의 혐의도 없거니와 또 양명(揚名)하여 부모를 현양하는 뜻에도 맞는 일이다. 그전 역사를 보아도 황자나 공주에게 호(號)를 주는 규정이 있었고, 본조(本朝)로만 말하더라도 순강(順康), 소령(昭寧)으로 가호(加號)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내 마음으로 옳다고 생각되는 길을 찾아 그대들과 논의하여 실현해보려고 하는 것이다." 하여, 이에 혜경궁(惠慶宮)으로 호를 올리기로 정하였던 것이다.

이보다 앞서 내수사 노비들을 추쇄(推刷)할 때 추쇄를 맡은 관리들이 모조리 조사하여 찾아낸다고 핑계를 대고는 사속(私贖)을 하도록 농간을 뿌리고 백방으로 조종을 하면서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추쇄관이 간 곳이면 마을이 비어버렸고 영종이 공물을 감제해 주었던 혜택도 그 때문에 좋은 결실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때에 와서 그 추쇄관 제도를 영원히 없애버리고 대신 각도의 도신(道臣)에게 명하여 선왕조 을해년 전세 총수입에 의거하여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고, 선두안(宣頭案)에 있어서는 승정원 계문에 의해 그 절목(節目)을 만들어 팔도에 반포하였다.

태학(太學)의 월강(月講) 제도를 거듭 천명하고 이어 영우원(永祐園)을 배알하였다. 하교하기를,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도 죽지 않고 여기 와 옛모습을 뵈오니 하늘이 다하고 땅이 다해도 이 설움 다할 길이 없고, 오늘 이 자리에 찬(禶) 마저도 없으니 슬픔이 가슴에 뒤엉켜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구나. 그의 아내야 무슨 죄이겠느냐. 특별히 석방하여 그의 제사를 받들게 하라." 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오랫동안 숨을 가누지 못했다. 효명전(孝明殿)에서 친히 대상(大祥)을 행하고는 하교하기를, "선대왕 상기가 다해가고 담례(禫禮)가 곧 앞에 있는데 내 아무리 예가 정한 한계를 지키려 해도 지극한 슬픔을 억제할 길이 없으니 이 어인 까닭인가? 예(禮)에 이르기를 '대상 후에는 백색 생명주를 입고, 그달에 담제를 모시고, 한 달 넘어서는 풍악을 듣는다.' 했고, 또 이르기를 '맹헌자(孟獻子)가 담제를 모시고 나서 악기를 매달아만 두고 울리지 않자 부자(夫子)께서, 남보다 한 단계 높다고 했다.' 하였다. 나는 그것이 오늘 본받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조 전례(國朝典禮)에는 담제 모시는 날 악기를 걸어두고 예에 정해진 대로 두들기는 것으로 되어있지만 세월을 두고 슬퍼하던 끝에 그리운 생각이 더욱 간절한데 경쇠를 울리고 비단옷 입고 하는 것이 비록 예제(禮制)를 따르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종고(鍾鼓) 관약(管籥)의 소리를 어떻게 차마 바로 그달에 금방 들을 수야 있겠는가." 하고, 대신 유신들과 많은 논의를 한 끝에 담월(禫月)에는 크고 작은 법악(法樂)을 달아만 두고 울리지는 말기로 규정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진종의 사친(私親) 정빈(靖嬪)7530)의 묘를 봉하여 수길원(綏吉園)이라 하고 사당은 연우궁(延祐宮)이라 했으며, 제례(祭禮)는 육상궁(毓祥宮) 제례를 따르도록 했다. 그리고 처음으로 병조 판서를 노부사(鹵簿使)로 삼았다.

하교하기를, "맹자(孟子)에 이르기를 '왕자(王者)의 백성은 너그럽고 여유가 있다.' 하였다. 비록 옛날에 일찍이 없었던 흉역(凶逆)이라 하더라도 그 악인의 우두머리를 없앤다면 협박 때문에 따랐던 자들은 풀어주어 그들 스스로 새사람이 될 길을 열어주고 그 마음을 고쳐먹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의 변함없는 이 마음은 천지신명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와서 삼사(三司)가 징토(懲討)를 주장하며 아뢰어 온 것이 적어도 몇 십 차례가 되는데 그중에 어찌 협박으로 따랐던 무리들이 없겠는가. 한 사람이 징토를 받으면 근심하는 자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렇다면 그 너그럽고 여유있던 세상에 비해 어쩌면 그리도 심하게 상반되고 있는가? 죄상이 가벼운 자는 말끔히 씻어주고 중범자가 없도록 더욱 엄밀한 방어를 해야지만 의리(義理)가 굳어져서 징토를 해도 거기에 전념할 수 있고 인심이 안정되어 개과천선도 할 것이니 삼사의 신들에게 그렇게 경계하라." 하였다.

(계속)

출전 : 정조실록 부록 정조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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