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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1-02-02 (수) 23:27
분 류 사전2
ㆍ조회: 740      
[조선] 정조 행장 4 (실록)
정조 대왕 행장 4

행장 1
행장 2
행장 3
행장 4
행장 5

19년 봄에 정순 대비ㆍ경모궁ㆍ혜경궁에 존호를 더 올리고 즉위 20년의 하례를 받았다. 문관은 시종(侍從) 이상, 무관은 곤수(閫帥) 이상, 음관은 준직(準職)이상으로 나이 61세인 사람에게는 모두 1급씩 가자(加資)했는데 그해의 은총을 나누기 위한 뜻인 동시에 작상(爵賞)이 너무 함부로 내려지는 것도 고려해서였다. 자전ㆍ자궁을 모시고 경모궁에 예를 행하면서 곤전(坤殿)도 함께 참여했는데 그날이 바로 장헌 세자의 환갑이었기 때문이다. 윤2월에는 자궁을 모시고 화성(華城)에 행행하여 현륭원을 배알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화성에 들려 성 내의 군사 훈련과 야간 훈련을 사열하고 봉수당(奉壽堂)에 나아가 자궁께 찬(饌)을 올리면서 칠작례(七爵禮)를 행하고 이어 신풍루(新豊樓)로 옮겨 본부(本府)의 사민(四民)에게는 쌀을 내리고 기민들에겐 죽을 내렸다. 그리고 낙남헌(洛南軒)으로 자리를 옮겨서는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는데 뭇 노인들이 잔을 올려 수를 빌었다. 그리고 원(園) 밑에 사는 백성들은 복호 2년, 화성 백성들은 복호 1년씩을 명하였다. 능원(陵園) 행행 때면 탁지부 신하가 정리사(整理使)가 되는 것이 옛날부터의 조례였는데 그 해부터는 원에 행행 때 안팎으로 정리사를 두어 모든 사무를 맡아 처리하게 하고 정리하고 남은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곡식을 사서 3백 주현(州縣)에다 나누어 보관해 두고 이름하여 정리곡(整理穀)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거두거나 나누어주는 데는 일정한 규정이 있었으며 그것으로 또 제주도의 진휼할 물자로 보태기도 하여 사랑의 은총이 미치는 범위를 넓히기도 하였다. 화성의 성묘(聖廟)를 배알하고 교궁(校宮)에다 경서(經書)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정동준(鄭東浚)의 관직을 삭탈하였다. 동준이 시종관으로 있던 시절부터 상의 후한 사랑을 받아 벼슬이 이경(貳卿)에까지 이르렀는데 왕명을 사칭하고 성상을 속이면서 그의 마음과 하는 짓이 괴상 망측하였다. 그리하여 언자(言者)가, 그의 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청했었는데 동준은 그후 곧 자살하고 말았다. 그런데 조참(朝參) 때 그의 고신(告身)을 거두어 불태워버리라고 명하고 이어 일대 출척(黜陟)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어필로 된 성적비(聖蹟碑)를 정주(定州)의 달천(㺚川)에다 세웠는데 태조(太祖)가 개선한 자리이고 선묘(宣廟)가 주필(駐蹕)했던 곳이다.

선희궁(宣禧宮)을 배알하고 세심대(洗心臺)에 나아가 제신들에게 술을 내렸다. 왕이 이르기를, "해마다 이때면 내가 꼭 이 대에 오는 것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정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옛 을묘년 나라 경사 때 고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쁨과 축의를 표했었는데 그때 영성군(靈城君)의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오고 있는 운대가 바로 이곳이다. 금년 역시 천재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이니 경들도 전인(前人)들이 했던 것처럼 이 태평 연월을 한번 빛나게 장식해보게나." 하였다.

내원(內苑)에서 꽃구경하고 고기 낚고 하다가 존덕정(尊德亭)으로 가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옛부터 내원 놀이에는 척리(戚里)가 아니고는 참여하지 못했었다. 외신(外臣)으로서 내연(內宴)에 참여한다는 것은 각별한 대우인 것이다. 옛날 인조가 계해년 반정 이후로 훈신(勳臣)들을 융숭히 대우하여 이러한 잔치에서 모시고 놀게 하면서 마치 한식구처럼 대했었는데, 효종은 즉위 초부터 훈귀(勳貴)의 폐단을 완전히 없애고 사림(士林)들을 초대해 두고는 마음과 뜻이 서로 통하여 마치 어수(魚水)요 천향(天香)이었으니, 지금까지도 송 문정공(宋文正公)이 등대(登對)했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또 조정에 분열이 생겨 숙종조부터 선왕조까지는 부득이 또 척리들과 밀착하지 않을 수 없어 금중 출입이 외조(外朝)에 비할 바 아니었는데 그것은 시기와 형편이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나는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현자를 가까이하고 척리는 멀리해야 하겠다는 것을 깊이 느꼈기 때문에 즉위 초기에 맨 먼저 내각(內閣)부터 세웠었는데 그것은 문치(文治)를 장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아침 저녁 좌우에다 두고 그들로부터 계옥(啓沃) 헌납(獻納)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였다. 그리하여 그들에게 좋은 벼슬을 주어 기반을 굳혀주고 남다른 예로 대우도 하며 심지어는 잔치에서 꽃구경 낚시놀이까지도 꼭 내각 신료들과 함께 해왔었다. 아울러 그들의 자질(子姪) 형제까지도 모두 자리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하면서 번거로운 예는 생략하고 오직 사랑으로 대해 자리 전체가 즐거움에 싸여 해마다 거의 상례로 되풀이 해왔으니 임금 신하 사이의 간격없는 만남이라든지 그 영광 그 은총이야말로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하로서 그러한 기회를 얻기란 극히 어려웠으리라고 할 만도 한데 그것이 결과적으로 근일에 와서 귀근(貴近)의 폐단이 극에 이르고 말았다. 전진이 있으면 후퇴가 있고 이완이 있으면 긴장이 있는 것이 이치이니 이 뒤를 이어 척리가 슬슬 나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사대부(士大夫)를 친근히 하는 것이 바로 나의 타고난 성품이고 또 마음써 해온 터다. 몇 십 년 그래오던 것을 지금 중도에 폐지할 수는 없는 일이니 이 자리에 오른 제신들은 모름지기 각자 자신을 깨우치는 마음으로 오늘의 내 이 말을 잊지 말라." 하였다.

어제로 된 영괴대비(靈槐臺碑)를 온양(溫陽)의 행궁(行宮)에다 세웠는데 바로 경모궁(景慕宮)이 경진년 온천에 갔을 때 홰나무 세 그루를 직접 심어둔 곳이었다.

여름에 환조 대왕(桓祖大王)과 의혜 왕후(懿惠王后)를 영흥(永興) 본궁(本宮)에다 올려 모셨다. 그보다 앞서 그해가 환조(桓祖)의 탄생 팔회갑(八回甲)이라 하여 대신을 함흥(咸興)으로 보내 본궁에다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게 했는데 그를 계기로 함흥 유생들이 소를 올려, 영흥 본궁에 옛 전사청(典祀廳) 자리가 있으므로 당연히 제향(躋享) 의식을 거행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왕이 느끼고 깨달은 바 있어 진전(眞殿)을 배알하고 이어 이문원(摛文院)에 나아가 대신 이하 제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더니 모두가 정례(情禮)에 맞는 일이라고 대답하였으므로 대신과 예관을 보내 고례(古禮)에 따라 본궁에다 위판(位版)을 만들고 길일(吉日)을 정해 올려 모시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어 풍패루(豊沛樓)에다 양로연(養老宴)을 베풀도록 명했다.

두 본궁의 의식(儀式)이 만들어졌다. 건국 초기에 경도(京都)에는 계성전(啓聖殿)이 있고 함흥ㆍ영흥에는 본궁이 있었는데 선왕(先王)ㆍ선후(先后)의 위판을 모셔둔 곳으로서 원묘(原廟) 제도를 써왔다. 그리고 종전에는 내수사(內需司)로 하여금 전사관을 별도로 차출하여 제사를 모시게 했던 것인데 예조 판서와 봉상시가 관리를 제대로 못하여 옛법을 어기고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해 온 것이 많았으므로 왕이 그 의식 절차를 바로잡도록 특명을 내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술독 술잔 등도 새것으로 바꾸고 해마다 의폐(衣幣) 향축(香祝)을 봉하여 반드시 하루 전부터 재계하고 직접 그 일에 임하게 해왔던 것인데 환조를 올려 모신 예를 마치고는 각신(閣臣)을 명하여 그 의식을 만들어 인쇄하여 본궁에다 두도록 하였다.

6월 정유일에 자궁에 찬을 올리고 조관(朝官)으로서 나이 61세인 자에게는 궁전 뜰에서 술을 내렸으며,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사민(四民)에게 쌀을 하사하고, 각도에 윤음을 내려 향음주례(鄕飮洒禮)를 실시하라 하였다.

가을에는 조적(糶糴)을 문제로 책문(策問)을 내어 태학생과 여러 음관으로 하여금 조목별로 대책을 쓰게 하였다. 연신에게 말하기를, "조적은 바로 사창(社倉) 제도의 후신으로서 모곡(耗穀)이래야 쥐가 먹고 새가 먹어 축난 것에 불과한데 도신(道臣) 수령(守令)이 그 모곡을 받아 관용(官用)으로 쓰고 있다는 것이 벌써 정당한 도리가 아니다. 더구나 조정에서 그걸 가져다 쓰면서 마치 정당한 법에 의한 것처럼 한다면 그 얼마나 구차한 일이겠는가. 더더구나 분류(分留)7568) 가 갈수록 정확하지 못하여 산간 연해 지방이 모두 병이 들고 경외의 각 아문에는 이것저것 문서만 많기 때문에 관리들은 그를 이용하여 농간을 뿌리니 피해받는 쪽은 백성들인 것이다. 지금 그것을 바로잡자면 우선 진분(盡分)이라는 이름부터 없애야 하는데 그리 하자면 걸리는 데가 많아 결행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하였다.

겨울에 선희묘와 의소묘를 배알했다. 그해에는 경모궁의 오향제(五享祭)와 속절(俗節) 삭망(朔望) 때의 제사를 모두 친히 행했는데 어떤 때는 며칠씩 그냥 재전(齋殿)에 머물기도 하였으니, 그해가 회갑(回甲) 해였기 때문이었다.

수어 경청(守禦京廳)을 없애고 수어사(守禦使)는 남한산성을 진무하면서 광주 유수(廣州留守)를 겸하게 하였다.

《이충무전서(李忠武全書)》를 편찬하였다. 왕은 충절을 높이고 공로를 보답하는 길이라면 아끼지 않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지만 유독 충무공 이순신(李舜臣)과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에 대해서는 그를 최고로 여겨 그들의 유문(遺文)과 유사(遺事)를 편집하고 충무공은 《전서(全書)》, 충민공은 《실기(實紀)》라 하여 인행(印行)하였다.

사옹원이 오지그릇을 정교하고 화사하게 굽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20년 봄에 사단(社壇)에 기곡제(祈穀祭)를 올리고 내탕의 돈 일만 꿰미를 내려 호남백(湖南伯)으로 하여금 곡식을 사 제주도 기민들을 구제하도록 명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황단(皇壇)을 배알하고 대향(大享) 때의 희생과 기물을 살펴본 다음 하교하기를, "《대명집례(大明集禮)》에 의하면 정확(鼎鑊)을 살펴보는 일, 척개(滌漑)를 감시하는 일, 명수(明水)를 눈여겨보는 일, 이 모두를 친림(親臨)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단향 의식에는 다 섭행(攝行)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자못 상국을 상국으로 받드는 도리가 아니다. 내 마땅히 친림하여 살펴보리니 그렇게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는 이변이 있자, 하교하기를, "부덕한 사람이 20년이나 자리에 있었으니 무슨 재이인들 부르지 않을까마는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는 이변은 금시 초유의 일이다. 자신이 두려워하고 자신을 책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 그 어찌 감히 예사로이 형식만 취할 것인가. 옛 선왕조에 관상감에서 희고 붉은 기운이 해를 꿰뚫었다는 보고가 있었을 때 시사(試士)에 있어서는 그것이 직언을 들을 수 있고 인재를 얻을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정지하지 않았었고 대향에 있어서는 섭행을 하도록 했었다. 하늘을 받들고 선조를 받드는 일이 두 길이 있을 수 없고 재계를 할 때는 무엇보다 마음이 전일해야 하는 것이다." 하고, 여름 대향을 섭행하도록 명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뜻으로 빈대(賓對)를 행했다.

문정공(文靖公) 김인후(金麟厚)를 문선왕(文宣王) 묘무(廟廡)에 종사(從祀)하였다. 그전부터 경외의 유생들이 누차에 걸쳐 배식(配食)을 청해왔었으나 정중을 기하기 위해 허락지 않고 있다가 그때 와서 하교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 이후로 앞장서서 성리(性理)를 천명하고 도의 근원을 훤히 알고 있는 사람으로는 문정공 한 사람 뿐이다. 그의 시에 '하늘과 땅 그 사이에 두 사람이 있으니, 중니가 원기라면 자양7569)은 진수이지.[天地中間有二人 仲尼元氣紫陽眞]' 한 것을 보면 그의 학식이 다른 유자들에 비해 월등하다는 것을 알 만한 것으로 문정은 우리 나라의 주돈이(周敦頤)이다. 두 정씨와 장횡거ㆍ주자가 다 성묘(聖廟)에 배식되었는데 주자(周子)만 누락이 되었다면 두 정씨와 장횡거ㆍ주자의 마음이 편할 이치가 있겠는가. 가령 오현(五賢)7570) 이하로 성묘에 종사된 그 유자들이 여기 있다면 틀림없이 문정공에게 앞자리를 양보할 것이다." 하고, 그렇게 거행할 것을 명했으며 또 그 행검에 비해 시호가 만족하지 못하다 하여 '문정(文靖)'을 '문정(文正)'으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주자소(鑄字所)를 설치했다. 구리로 활자를 만든 것이 세종(世宗) 갑인년에 시작된 것인데 왕이 예각(藝閣)에 명하여 갑인자(甲寅字)를 기본으로 하여 글자를 주조하게 한 것이 전후 30만 자였다. 그리하여 그것으로 책을 인쇄하게 하고, 뒤에 또 정리자(整理字)를 주조하여 갑인년 겨울부터 창경궁 옛 홍문관(弘文館)에다가 인쇄소를 설치하고는 모든 어정(御定) 어명의 책들을 모두 거기에서 인쇄하고 편찬하게 하고서 이름하여 주자소라고 하였다.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도록 명했다. 왕이 존주의 의리에 대해 자나깨나 선왕의 뜻을 이어갈 생각으로 언제나 황단(皇壇)에 망배를 하고 관원을 보내 선무사(宣武祠)를 봉심하게 했으며, 영원사(寧遠祠)ㆍ무열사(武烈祠)에 제를 올리게 하고, 이 제독(李提督) 사당에 편액을 달고 해마다 제사를 모시게 했으며, 이 총병(李摠兵)ㆍ석 상서(石尙書)의 후손들을 찾았다. 삼학사(三學士)7571) 후예들을 발탁하여 등용하고 칠의사(七義士)7572) 들을 한꺼번에 제사지내고 용만(龍灣)에 있는 두 사당에 선액(宣額)하고 달천(㺚川)에 있는 묘에다는 어필의 비를 세웠다. 김응하 장군의 큰 절의를 장려하고, 이유길(李有吉)의 유손(遺孫)을 찾았으며, 임인관(林寅觀) 등 95명에 대하여는 박작(泊汋) 물가에다 단을 쌓고 한관(漢冠)을 끝까지 간직한 넋들을 위로했다. 의(義)를 지키고 척화(斥和)했던 신하들에 대해서는 모두들 표장(表奬)하고 기록으로 남겨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드러내 밝혔으며, 임진년에 공을 세우고 목숨을 바쳤던 신하들도 모두를 다 세상에 알렸다. 충신(忠臣)ㆍ의사(義士)의 단을 세웠으며 정충(旌忠)ㆍ상무(尙武)의 비문을 지었고, 홍의 장군(紅衣將軍) 곽재우, 익호 장군(翼虎將軍) 김덕령 등 여러 사람에 대해 다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제말(諸沫)ㆍ양대박(梁大樸) 자손들을 다 녹용(錄用)했는데 그때 와서 열조(列朝)에서 존주했던 사실들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겨울에는 정호인(鄭好仁)ㆍ성덕우(成德雨)를 친국한 후 다 귀양 보냈다. 호인은 병판(兵判)으로서 달력을 반사(頒賜)하는 단자를 뽑아 올리면서 홍낙임(洪樂任)을 빼버리지 않았기 때문이고, 덕우는 이조의 당상관으로서 홍수영(洪守榮)을 제관으로 차출했기 때문에 왕이 진노하여 그러한 처분이 있었던 것이다. 제신에게 하교하기를,

"만약 이 두 사람의 현재 드러난 죄만 가지고 논한다면 틀림없이 친국까지 하는 것을 지나치다고 할 것이나 지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만인(萬人)으로 하여금 두려움을 알고 백세(百世)가 되도록 본받게 하고 싶어서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경》에 이른바, 그 상형(祥刑)7573) 을 잘 살피라고 한 것으로 지금부터는 모두가 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나라의 법에 저촉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춘추(春秋)》가 만들어졌다. 삼전(三傳)7574) 이 똑같이 경(經)에 실려 있는데 그중의 좌씨전(左氏傳)이 역사서로서는 가장 자세하게 되어 있으나 다만 경과 전이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아 학자들이 그것을 불편하게 여겼다. 때문에 사신(詞臣)에게 명해 주자(朱子)의 《강목(綱目)》 범례를 따라 경을 강(綱)으로 하고 전(傳)은 목(目)으로 하여 인행하게 하였다. 선조 때에 일찍이 경전을 합해 강목이라고 했으나 미처 간행을 못했었고, 세종 병진년에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주해(註解)한 것은 바로 사정전(思政殿)에서 한 훈의(訓義)였는데 이번 그 책도 그 의례(義例)라든지 연갑(年甲)까지도 양조(兩朝)에서 했던 것과 꼭 같이 하여 그 역시 계술(繼述)의 뜻이 담겨져 있었다.

대신과 예조 당상이 청대하여 동궁(東宮) 책봉례를 거행할 것을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경술년 원자가 태어난 이후로는 명호(名號)가 이미 정해져 있고 신인(神人)이 의탁할 곳이 있게 되었다. 《서경》에도 이르기를 '비록 어려도 원자(元子)이시니' 했듯이 성왕(成王)이 보위(寶位)에 이미 올랐는데도 주공(周公)은 그때까지도 원자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원자라는 명호가 정해진 바에 책봉의 시기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리고 책봉례를 행하고 뒤이어 관례(冠禮)ㆍ가례(嘉禮)까지 함께 치르고자 하는데 《예기》에도 '하나를 행하면 셋이 좋아진다.'7575) [一行三善]고 말한 것처럼 나도 그래서 천천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제 내년이면 사부에게 나아갈 나이이니 우선 사부(師傅)부터 정해두었다가 봄이 되면 개강(開講)을 하도록 하라." 하고, 곧 강학청(講學廳)을 설치했다.

21년 봄에 각도에 윤음을 내려 늙은이를 쉬게 하고, 농부들 노고를 치하하고, 모든 일을 공경하고, 근본을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이르기를,

"《소학(小學)》이라는 책은 바로 학교에서 처음 가르치는 차제(次第)요 절목(節目)으로서 나같이 과매(寡昧)한 사람으로도 선왕께서 인도하시고 열어주신 그 은혜에 힘입어 동습(童習)의 나이에 날마다 배웠던 것이 다소의 힘이 되었음을 지금도 기억하거니와 요즘 와서는 배우는 방법도 변하고 가르치는 성의도 부족하여 그 책을 쌓아두기만 하고 보는 자가 없다. 내 그를 두려워하여 내각 신료를 명해 그 훈의(訓義)에 맞게 고증을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삼강이륜행실(三綱二倫行實)》 같은 책도 그것이 치교에 도움을 주고 세상을 격려하는 도구 구실을 할 만한 책으로서 《소학》과 함께 없어서 안 될 책이니 그를 합해 한 책으로 만들고 이름을 《오륜행실(五倫行實)》이라고 하라. 그리고 또 하루만 실시해도 사방이 풍동(風動)할 수 있는 예로는 향음주례(鄕飮洒禮)가 그것인데 옛날 우리 세종조 때 처음으로 양로연(養老宴)을 베푸시고 《삼강행실(三綱行實)》의 반하(頒下)도 역시 그 무렵에 하셨던 것이다. 나 소자도 어찌 감히 그를 본받아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향약(鄕約)도 그것이 백성을 순화시켜 좋은 풍속을 만드는 데 많은 힘이 되기 때문에 주부자(朱夫子)가 매 월초면 향약을 읽는 일을 하였던 것이고 나도 그래서 향약의 효과가 향음주례 못지 않다고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도 익히고 밝히지 않으면 안 되겠으니 기무(機務) 여가에 향음주례에 관한 의식과 향약 조례 등을 분류 제정하도록 하라. 과연 그 제도가 법 뿐이요 말 뿐인 것이 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완악한 자라도 융통성을 보일 것이며 아무리 어리석은 자라도 현명해질 것이다."

하고, 내각에 명하여 《오륜행실(五倫行實)》과 《향례합편(鄕禮合編)》을 인쇄 배포하라고 했다.

원자 좌ㆍ우유선(左右諭善)을 두었다. 대신들에게 말하기를, "나도 춘저(春邸)에 있을 때 빈료(賓僚)들 도움을 많이 받았었는데 원자는 현재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단정하고 바른 선비의 도움이 더욱 절실하다. 좌우에서 보익(輔翼)하는 이 중에 학식 행검이 훈도(薰陶)의 영향을 주기에 알맞은 자가 지금 세상이라고 왜 없으랴만 모름지기 생소한 야인으로서 세상 물정에 숙달되지 아니한 자라야 비로소 엄탄(嚴憚)의 효과가 있을 것이니 그 점을 참작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하였다.

호조가 조선(漕船)에 관한 사목(事目)을 올리자, 하교하기를,

"선박으로 운반하는 일은 사실 군사 정책과도 관계가 있어 옛 주관(周官) 제도에서부터 한(漢)ㆍ당(唐)ㆍ송(宋)ㆍ명(明)에 이르기까지 물자 운반선이 바로 전선(戰船)이기도 했는데 그 역시 병농(兵農)이 서로 불가분의 관계라는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 나라는 조창(漕倉) 제도가 비록 군사 정책과 직접 상관은 없지마는 그 실제는 두 영(營)에서 대동미를 이리저리 옮겨주는 것이나 훈련 도감의 삼수량(三手粮)이라는 것이나 곡식이 필요할 때 그 필요한 양의 곡식을 대주는 점에 있어서는 같은 것이다. 그리고 무슨 사정이 달라졌을 때는 그 달라진 사정에 상응하는 정책이 필요한 것인데, 유독 조운 그 한 가지 일에 대해서만은 변통성 없이 옛날대로 고수할 것이 뭐 있겠는가. 전선으로도 이용한다는 뜻을 이미 말한 바도 있으니 선박 건조처의 영곤(營閫) 읍진(邑鎭) 들을 엄히 단속하여 견고하고 정밀하게 건조해서 조곡(漕穀) 운반에도 겸용할 수 있도록 하게 하라." 하였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화성(華城)의 성가퀴ㆍ망루 등을 두루 둘러보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효묘(孝廟)가 후원에다 척뇌당(滌惱堂)을 지어두고 내구마(內廐馬)를 타고서 중관(中官)에게 고삐를 잡히고 날마다 그 당에 가셨었는데 그것이 사실은 힘든 일을 익히려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 말을 타고 힘든 것을 연습하는 것은 바로 우리 가법(家法)인 것이다. 나도 금원(禁苑)에서 군무 관계로 전좌(殿座)하게 되었을 때면 반드시 말을 타는데 그는 열성조 고사(故事)를 따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비록 온종일 말을 달려도 피로한 줄을 모르는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원자(元子)가 사부(師傅)ㆍ유선(諭善)과 상견례를 행했다. 왕이 사부와 유선을 불러 접견하고 하교하기를, "오늘 이 예를 행하게 된 것은 하늘과 조종(祖宗)이 도와주신 것이다. 사부에게 나아가는 데도 절차가 있고 체모가 있기 마련인데 내 비록 배읍(拜揖)하는 모습은 보지 못했으나 그 강독(講讀)하는 소리를 처음 듣고 마음으로 기쁨을 느꼈다. 경들이 잘 보도해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원자가 강독을 마치고 여가만 있으면 언제나 곁에 앉도록 명하고 화려한 복장 기름진 음식은 몸과 입에 가까이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 경연 신료에게 말하기를, "나도 어려서부터 독서할 때 반드시 과정(課程)을 두었었는데 요즘은 원자를 위해 여가 때의 공부를 더하고 있다." 하고, 또 하교하기를, "지금도 기억하지만 옛 선왕께서는 농사를 아주 중히 여겨 밭 갈고 김맬 철이면 언제나 성남(城南) 들로 일찍 나가셔서 직접 살피곤 하셨으므로 지금까지도 그 곳 부로(父老)들이 성적(聖蹟)을 못잊어하고 성덕(聖德)을 칭송하면서 그곳에다 대(臺)를 세우고 이름하여 성경(省耕)이라고 하고 있다. 나도 어가를 모시고 누차 수행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고, 각신을 명하여 대호(臺號)를 써서 돌에 새겨 세우게 하고, 또 동쪽과 서쪽 두 교외에다 각기 대 하나씩을 더 세우라고 했다.

왕은 삼황(三皇) 그리고 열성(列聖)들 휘신(諱辰)를 당하면 언제나 소선(素膳)을 들이게 하였는데, 빈연(賓筵)의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근고(近古) 이전에는 공공연한 자리에서 회반(會飯)을 할 때면 쇠고기를 먹지 않았었고, 국기(國忌)를 당하여 재계 때면 조정 신료들도 모두 이틀간 소사(蔬食)를 했었다. 그것은 선왕조 초기까지도 그랬었고 오직 대향(大享)의 태뢰(太牢)와 진연(進宴)의 대선(大膳)에서만 비로소 쇠고기를 썼는데 그것이 바로 까닭 없이는 소를 잡지 않았던 고인들의 뜻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법은 간곳없고 각 궁방(宮房)들까지도 각기 딸린 푸줏간이 있다니 만약 법을 집행하는 유사(有司)들이 먼저 궁방부터 엄히 단속했더라면 그렇게 함부로 법을 어기고 금형을 범하는 폐단이 있었겠는가." 하였다.

가을에 장릉(章陵)을 배알하고 본군의 부로(父老)들 병고를 물었으며, 1년간 복호를 하고 갑인년 행차 때 그 행차 광경을 구경했던 나이 70, 80인 사람에게는 각기 1급씩 가자(加資)하였다. 그리고 이어 민회묘(愍懷墓)를 살피고 현륭원도 배알하였다.

22년 봄에 현륭원을 배알하고 화성부(華城府)에 묵으면서 이르기를, "원침(園寢)을 모신 지 지금까지 10년이 되도록 아직 이 부와 이곳 백성들에게 혜택이 미친 적이 없었으니 그것이 어찌 내 본의이겠는가. 성지(城池)가 아무리 든든하다 해도 어찌 뭇 백성들 마음이 성이 되어주는 것만 하겠는가. 백성들 마음부터 든든해야 일심으로 가꾸고 보호할 것이다. 을묘년 정리곡(整理穀)을 각도에다 분산 배치한 것은 그것이 비록 사랑과 은혜를 널리 베풀자는 뜻이었으나 3백 개의 주군(州郡)을 상대로 주고 걷고 하는 과정에서 어찌 폐단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름이 정리곡이라면 모곡은 더 받지 않아야 그 제도를 둔 본의에 맞는 것이니 그 정리곡을 모두 화성부에 소속시키고 모든 본부로부터 받는 곡(穀)에 대하여는 모곡 징수를 영원히 없애도록 하라." 하였다.

여름에 하교하기를, "벌레가 벼와 원침의 나무들을 해치고 있다면 그를 잡아 없애지 않아서야 될 일인가. 주관(周官)의 서씨(庶氏)ㆍ전씨(剪氏)7576)도 그 때문에 두었던 직(職)이었다. 구덩이를 파고 불에 태워 묻어버리는 것은 당(唐)의 요숭(姚崇)이 처음으로 했는데 그후 역대로 그렇게 시행해서 그것이 성헌(成憲)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근자에 원침의 나무들을 벌레가 해치고 있어 나무를 심었던 10개 읍을 시켜 잡아 없애라고는 하였으나 그 벌레라는 것이 살아서 움직이는 생물(生物)이기 때문에 늪지대로 몰아내버리는 것이 불에 태워 죽이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하면 생물을 살리는 덕도 그 속에 있는 것 아닌가. 듣기로는 벌레가 날아 바다로 들어가서 어하(魚蝦)로 변했다고 복파(伏波)가 무릉(武陵)을 다스릴 때의 생생한 증험7577)이 아직도 전해오고 있지 않은가. 그 벌레들을 잡아 구포(鷗浦) 어귀에다 던져버리라." 하였다.

경외의 사형수들을 관대하게 처리하고 제신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소결(疏決)할 때에 전례대로 정전에 임어하지 않은 까닭은 내 마음에 저으기 말못할 슬픔이 있어서이다. 천하 만사가 모두 내 마음으로 남을 헤아리는 것인데 심도(沁都) 일을 생각하면 내 마음을 도려내는 듯하여 정전에 앉아 유배보내는 무리들을 놓고 가부를 평론할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당상들만 해조에 모여서 사형수의 안(案)만을 여쭈라고 한 이유가 바로 거기 있었던 것이다." 하였다.

그때 가뭄이 너무 심해 모를 제때에 내지 못했으므로 각도에다 다른 곡물을 대신 심도록 권장했었다.

가을에는 경릉(敬陵)ㆍ창릉(昌陵)을 배알하고 그 구역 내에 있는 여러 능도 배알했다.

장용 외영(壯勇外營)에 오위(五衛) 제도를 창설했다. 국조의 군제(軍制)가 처음에는 의흥 삼군부(義興三軍府)를 두었다가 삼군부가 오위(五衛)로 바뀌면서 부(部)와 통(統)을 정하고 군대를 선출하는 법을 만들었으며, 민(民)과 병(兵)을 통합하여 군대를 농민에 붙이는 제도를 두었었다. 그러다가 그후 군문(軍門)을 설치하고 영사(營司)를 두면서 위(衛) 제도는 폐지되었다. 화성(華城)은 원래 경기 관내의 중진(重鎭)이기에 마병ㆍ보병의 군대 편제가 그 규모에 있어 훈련 도감과 비슷했었는데 계축년에 영(營)으로 승격된 후로는 국초에 함경도 마군(馬軍)을 친군위(親軍衛)라고 했던 것처럼 친군위 3백 명을 두고 보군(步軍) 26개 초(哨)를 두었다가 뒤이어 용인(龍仁) 등 5개 읍의 속오군(束伍軍) 중에서 정예하고 건장한 자를 뽑아 12개 초를 더 둠으로써 규모를 일영 오사(一營五司)로 만들었다. 그리고 또 본부 및 본부에 소속된 읍의 민병들을 뽑아 서로 번갈아가면서 성을 지키게 하는 제도도 새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사(司)ㆍ초(哨)의 명칭을 바꿔 위(衛)ㆍ부(部)로 하고 1개 영을 5개 위로, 5개 위는 25개 부로 편성하여 내외 영군(營軍)이 총 5천 명으로 되어 있었다. 이상과 같은 절목을 비변사가 만들어 올리자, 왕은 여러 무장(武將)들에게 이르기를, "화성이 군대 편제에 있어 다른 곳보다 먼저 옛날의 부ㆍ위 제도를 채택했는데 그도 의리와 관계가 있는 일이다." 하였다.

《오경백편(五經百篇)》을 완성했다.

《주역》ㆍ《서경》ㆍ《시경》ㆍ《춘추》ㆍ《예기》에서 99편을 취하고 《중용》ㆍ《대학》은 《예기》 속에다 그대로 두었으며 주자(朱子)의 장구서(章句序)를 그 끝에다 붙여 두었는데 이는 마치 《맹자》 맨 끝에다 명도(明道)의 묘표(墓表)를 붙여놓은 것과 같은 뜻7578)으로 판을 새겨 간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근세에 와서 시율(詩律)이 점점 음절이 촉박해지고 의미도 건조하다 하여 두보(杜甫)ㆍ육유(陸游)의 시 전편을 운(韻)에 따라 분류하여 인쇄 반포하였는데 그 모두가 백성을 계도하고 풍속을 순화시키기 위한 깊은 뜻에서 나온 것이다.

10월 기축일에는 각도에 윤음을 내려 농정(農政)을 권장하고 농서(農書)를 구했는데 그것은 다음해인 기미(己未)년이 바로 영묘(英廟)가 적전(藉田)을 친히 갈았던 해인데다 그달의 월건(月建)이 축(丑)이었기 때문에 토우(土牛)7579)로 풍년을 비는 뜻을 나타낸 것이다.

왕이 왕위에 있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럴수록 선진(先進)의 법을 따르기에 노력하여 명령이나 정교(政敎)를 오직 근본을 중시하고 사실을 추구하는 쪽으로 실시 선포하였기에 농서(農書)를 올려온 자도 경외를 막론 40여 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반궁(泮宮)에다는 선제(璿題)를 내려 일차 유생(日次儒生) 소외(召巍) 등에게 시험을 보이고 법온(法醞)을 내렸으며, 세종조(世宗朝)에서 화종(畵鍾)을 내리고 효종조(孝宗朝)에서 은배(銀盃)를 내렸던 것처럼 늘 쓰시던 은배를 특별히 내리면서 그 은배 복판에다 전서(篆書)로 '아유가빈(我有嘉賓)'이라고 새겨넣었는데 그 역시 손님에게 잔치를 베푸는 《시경》 녹명장(鹿鳴章)의 뜻으로 선비들을 예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 경연에 참여한 제신들과 응제한 제생들에게 명하여 그 사실을 시를 지어 읊도록 하고 또 친히 서문을 써 그 책 머리에다 싣게 하고 그것을 새겨 명륜당(明倫堂)에다도 걸어두게 했으며 또 그를 모아 책으로 만들어 주자소(鑄字所)에서 인쇄 반포하게 하면서 이름하여 《태학은배시집(太學銀盃詩集)》이라고 하였다.

왕은 왕위에 오르고부터 많은 인재를 길러내고 올바르게 계도할 방법에 깊은 관심을 두고 월강(月講) 순시(旬試) 제도를 실시하여 혹 그 자리에 나가 친히 시험을 보이기도 하고, 혹은 시제를 나눠주고 각자 재능을 재보기도 했으며, 혹은 경의(經義)를 강론하게 하여 학문의 깊이를 두드려보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왕은 그 시권을 직접 살펴보고 대책 내용도 친히 열람한 다음 혹자에게는 급제를 내리기도 하고 혹자에게는 벼슬을 주어 권장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공령문(功令文)을 편집 인쇄까지 하기도 했으며 여러 하사품도 많이 내렸고 은총과 영광 또한 전대에 없을 정도였으므로 온 나라 전체가 모두 빈흥(賓興) 대상이 되어 신해년에는 《경림문희록(瓊林聞喜錄)》이 만들어지고 임자년에는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계축년에는 《관동빈흥록(關東賓興錄)》, 갑인년에는 《탐라빈흥록(眈羅賓興錄)》, 을묘년에는 《풍패빈흥록(豊沛賓興錄)》과 《정시문정(正始文程)》, 경신년에는 《관북관서빈흥록(關北關西賓興錄)》이 각각 있게 되었다.

대정(大政) 시행을 앞두고 하교하기를, "서한(西漢)에서 관리 선임을 중히 여겼던 것은 그게 바로 근본을 공고히 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뜻에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가 않아 인재 등용에 있어 과거 시험으로 등용을 하고 시종(侍從)의 반열에 있는 자가 도리어 음관이나 무관만큼도 못한 경우가 있기 때문에 중앙에서 국가 조세도 맡아 관리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외지로 나가 자목(字牧)의 일도 맡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혹은 한미한 자리에서 갑자기 올라온 자로 하여금 묘당의 계획하는 자리에 참여하게 하기 때문에 금곡(金穀)이나 갑병(甲兵)에 있어 깜깜하기가 마치 소경이 주판 만지는 격이니 그야말로 등용된 자가 이쪽에서 바라는 인물이 아닌 것이다. 지금 만약 새로 임용된 문신(文臣)들로 하여금 지방의 작은 고을에 가 그곳 관리의 일을 익히고 우장(郵障)의 일까지도 겸임하게 하여 민생의 질고(疾苦)를 잘 알도록 했다가 그가 일소(馹召)로 왔을 때에 꾸밈없는 말과 글로 폐단을 제거할 대책을 낱낱이 개진하게 한다면, 구중 궁궐이 아무리 깊다 해도 사방을 가까이서 보는 것 같아 백성과 나라에 도움되는 것이 일개 수의 어사를 보내는 것보다 월등히 나을 것이니 묘당으로 하여금 그 대양책을 각별히 강구해 보도록 하라." 하고, 이어 문관ㆍ음관ㆍ무관을 서로 바꿔가며 임용하는 제도를 마련하도록 하였다.

23년 봄에 유행병이 만연하여 경외에 사망자가 12만 명이나 되었으므로 왕은 그것을 크게 우려하여 은휼(隱恤)의 은전을 광범위하게 시행하는 한편, 또 하교하기를, "고사(故事)를 상고해 보면 비록 여기(厲氣)가 아니더라도 모든 이름 모를 병이 유행할 때는 모두 별도의 여제(厲祭)를 지내고 또 교외 광장에다 단을 쌓아 죽은자에게 위령제도 지냈는데 그는 주(周)나라 때 벽책(疈磔) 제도에서 비롯되어 후세에 남아온 것으로 역시 백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예(禮)에 없는 것이라도 할 만한 일이면 다 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주공(周公)이 예서에다 기록해둔 것이고 우리 열성조에서도 다 해왔던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를 거행치 않는다면 그는 신인(神人) 사이를 좋게 만드는 도리가 아니니 북쪽 교외에 가 여제를 지내고 동ㆍ서ㆍ남의 교외에서는 위령제를 거행하도록 하라." 하고, 이어 각도에 명하여 모두 벽고(疈辜)의 예를 거행하도록 했었다.

건륭(乾隆)의 부음을 전달할 칙사가 올 참이었다. 청(淸)나라에 대한 복제로 옹정(雍正) 을묘년에 쓴 구례7580)가 있었는데 그에 대해 제신들 모두가 다 실례(失禮) 중에 또 실례이고 불이참(不貳斬)7581)의 뜻에도 어긋난다고 말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제신들 복색(服色)은 바로 고인들이 말했던, 띠풀로 얽어매고 종이로 싸고 한다는 것으로 사실 체제가 맞지 않은 것들이다. 우리 나라 예제(禮制)가 비록 불완전한 점이 많지만 성조(聖祖) 때 《예기》의 증자문(曾子問)을 놓고 강론해가면서 비로소 군신들의 복제를 바로잡았고 선왕조 때 《상례보편(喪禮補編)》이 만들어지면서는 예전의 잘못되었던 점들을 깨끗이 씻을 수가 있었다. 다만 그 복제는 우리 국내에서 행하는 복제이고, 청국에 대한 복제는 을묘년 이전의 제도를 그냥 그대로 쓰자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 복제까지 고칠 필요가 뭐 있겠느냐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 지금 관이나 복색을 《상례보편》 그대로 따르자면 도리어 먼저 것보다 더 중복(重服)이 될 혐의가 있고 또 불이참(不貳斬)이라는 말도 바로 황조(皇朝)와 제후국의 분별을 지적해서 한 말인데 그렇게 말할 경우 대일통(大一統)이라는 의리로 볼 때 장애가 없겠는가? 어차피 그럴 바에야 그냥 옛날 그 복제대로 입고서 억울함과 아픔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는 심정이나 가지고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낫겠다." 하였다.

《아송(雅誦)》이 만들어졌다. 왕은 시 3백 편 이후로 사무사(思無邪)의 근본 취지를 터득한 시로는 오직 주자(朱子)의 시가 그것이라고 여겨 손수 간추려서 인쇄 반포하고 경연(經筵)ㆍ주연(胄筵)의 강의 자료로 쓰게 했으며, 또 그를 존경각(尊經閣)에다 두고 유생들 월강(月講) 자료로도 삼게 했다.

경희궁(慶熙宮)에 행행하였다. 그때가 원릉(元陵) 휘신(諱辰)이었는데 정치달(鄭致達)의 처를 석방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제신들이 강력히 반대했으나 따르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 후 경모궁을 배알하고 윤음을 내려 여러 신료들에게 포고하기를,

"아, 그 옛날 그 친애하시던 마음씨가 어느 왕보다도 월등하셨다. 병자년 그 무렵 덕성각(德成閣)에서 《통감(通鑑)》을 강하다가 효문제기(孝文帝紀)의 회남왕(淮南王) 사건을 놓고는 일일이 분석을 하셨는데, 그때 눈물이 옷깃을 적신 연신(筵臣)도 있었었다. 지금 정씨의 처가 죽지 않고 늙고 병들어 있는데 그 옛날 하시던 그 말씀으로 미루어볼 때 임오년 이전 정씨의 처와의 지극했던 정리를 놓고 그때를 가만히 거슬러 생각해보면 그때는 비록 그를 공론에다 맡길 수밖에 없었으나 오늘 와서는 또 꼭 이렇게 해야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옛날 좋았을 때와 같이 오가고 만나야 할 것이다. 만약 오늘 내가 선왕의 그 뜻을 받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감히 옛날의 그 뜻을 이어왔다고 할 것인가.

한(漢)ㆍ당(唐) 이후로는 옛 성인의 시대와 거리가 멀고 도(道)도 점점 빛을 잃어 온 세상이 하나같이 골육 상잔을 하고 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병들어 죽었는데 곡(哭)은 무슨 곡이냐.'라고 말을 남겨 후세에 경종을 울렸던 것이다. 대체적으로 난적(亂賊)은 죽여야 한다고 하는 주장은 임금이라면 다 듣기 좋아하는 말이기 때문에 사람마다 현자나 어리석은 자나 용감한 자나 비겁한 자나 구별 없이 다 잘하는 말들이면서 특히 '전의친(全懿親)' 이 세 글자에 대해서는 모두가 쉬쉬하고 지사(志士)도 함구를 하는 실정이다. 지금 옛날에 그렇게도 우애하시던 그 마음을 본받기 위해 정씨의 처가 그러한 죄를 지었는데도 오늘 와서 다 풀어줬다는 것을 국사(國史)에도 기록하고 야승(野乘)에도 기록하면서 이르기를 '그의 죄는 물론 용서할 수 없는 죄이나 옛날의 그 아름다운 뜻을 받들기 위하여 법을 굽히고 사랑을 편 것이다.' 한다면 그것이 바로 명의(明義)에 있어서도 최고의 명의가 되는 것이며 우리 국가로서도 억만년 두고두고 받을 복록이 오늘부터 시작될 것이다." 하였다.

5월에 하교하기를, "이해 이달 이날이 바로 우리 단경 성후(端敬聖后)7582) 가 복위(復位)되어 능(陵) 봉하는 일을 독려하던 제신들이 일을 마치고 복명하던 때와 간지(干支)가 같은 때이고 또 주량(舟梁)7583) 보갑(寶甲)도 그해에 있었으니 주구(珠邱)를 바라볼 때 슬픈 마음이 새로워지는 것이다. 예관으로 하여금 날을 정하게 하고 대신을 보내 온릉(溫陵)에 가 잔 올리는 일을 대신 행하게 하라." 하였다.

가을에 연경에 가는 사신에게 유시하기를,

"내가 주자서(朱子書)에 대해 마음을 써 외우고 익히면서 그 대전(大全)을 가지고 요약해서 《회영(會英)》을 만들고, 부류별로 모아 《선통(選統)》을 만들고, 가려 뽑아서 《백선(百選)》을 만들고, 개괄적으로 골라 《절약(節約)》을 만들고, 또 모아서 《회선(會選)》을 만들었으나 그밖에 또 《춘추(春秋)》의 뜻과 맞는 것으로 대일통(大一統)의 문자를 만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대전》ㆍ《어류(語類)》 또는 《유서(遺書)》와 이경(二經)ㆍ사서(四書)의 《전의(傳義)》ㆍ《장구(章句)》ㆍ《집주(集註)》ㆍ《혹문(或問)》 그리고 《계몽(啓蒙)》ㆍ《가례(家禮)》ㆍ《시괘고오(蓍卦考誤)》ㆍ《창려고이(昌黎考異)》에서 《위씨계(魏氏契)》ㆍ《초사(楚辭)》ㆍ《통서(通書)》ㆍ서명(西銘)ㆍ태극도(太極圖) 등에 대한 해설 같은 모든 저술을 한데 모아 전서(全書)를 만들고 그 편집이 끝나면 그것을 선성(先聖)의 사당에 고한 후 간행하여 주부자(朱夫子)가 장주(漳州)에서 했던 것7584) 처럼 해보고 싶다. 그리고 《춘추》를 먼저 간행하려는 것은 역시 대일통이 무엇이라는 것을 나타내고자 하는 은미한 뜻이 있어서인 것이다.

다만 《어류》는 그 의례(義例)가 너무 뒤죽박죽이고 지록(池錄)과 요록(饒錄) 두 본7585) 이 비록 정밀하고 좋다고 해도 문숙공(文肅公) 황간(黃幹)이 그에 대해 불만을 표시한 바 있다. 또 각 부문별로 분류된 것으로는 장경부(張敬夫)의 수사 언인(洙泗言仁)과 충정공(忠定公) 조여우(趙汝愚) 유송조 제신 주의(有宋朝諸臣奏議) 같은 것이 일찍이 고정(考亭) 선생으로부터 지적을 받기 전만해도 그 은미한 표현과 중대한 의리가 분명하지 못하고 흐리멍덩한 곳이 있었는데 그 《어류》라고 어찌 주부자의 본뜻 그대로이겠는가. 그를 고정(考定)할 때 상세히 살펴보아야 할 것이므로 모름지기 미(眉)ㆍ휘(徽)ㆍ건안(建安) 제본과 대조하여 진면목(眞面目)을 얻어내야지만 전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대전(大全)으로 말하더라도 태주(台州)의 주장(奏狀)이 민판(閩板)에는 수록이 안 되어 있고, 육왕첩(陸王帖)ㆍ매화부(梅花賦) 같은 것도 누락되고 실려 있지 않으니 사행(使行)이 연경을 가게 되면 《대전》의 진짜 본과 《어류》의 각본을 꼭 구매해 와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그것을 빙자하여 다른 잡서가 경계 밖으로 나갔을 때는 왕부(王府)에 그것을 단속하는 법이 엄연히 있으니 누구도 감히 범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경봉각(敬奉閣)을 황단(皇壇) 곁으로 옮겨 지었다. 각이 옛날에는 동룡문(銅龍門) 왼편에 위치하고 있어 청(淸)나라 칙서를 소장해둔 곳과 서로 이웃해 있었는데 그때 와서 특별히 옮겨 짓도록 명하고 영종(英宗) 어필인 경봉(敬奉)ㆍ흠봉(欽奉)의 편액을 걸었으며, 태조(太祖)ㆍ신종(神宗)ㆍ의종(毅宗) 세 황제의 어필 또는 어화(御畵)로 된 병풍과 홍무(洪武) 25년 이후의 고인(誥印)을 모셔두었다.

헌릉(獻陵)을 배알하고 이어 현륭원을 배알했다.

안으로 대신(大臣)과 전관(銓官), 밖으로 각도의 방백(方伯)들로 하여금 조정 관료나 유생 할 것 없이 주자서(朱子書)를 전공하는 자면 그를 각자 추천해 올리라고 명했다.

신덕 왕후(神德王后) 사제(私第)와 치마대(馳馬臺)에다 어필로 된 구기비(舊基碑)ㆍ성적비(聖蹟碑)를 곡산(谷山)에다 세웠다.

장헌 세자(莊獻世子) 저술의 세 책을 엮어 펴냈는데 수집ㆍ교정에서부터 지우고 고치고 오려붙이고 하는 일까지 모두 어수(御手)를 거쳤다. 나라 사람들이 애송할 정도로 학문의 깊이가 있었는데 왕은 손때가 묻어 있는 그것이 소중해서 내부(內府)에 간직해 두었다가 그때 와서 직접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장차 열성(列聖)이 남겨놓은 교훈의 글과 함께 높이 모시고 오래 전하도록 하여 미처 못다한 효성을 거기에나마 표해보려는 뜻이었다.

《대학유의(大學類義)》가 만들어졌다. 진덕수(眞德秀)가 쓴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구준(丘濬)이 쓴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에서 가장 긴요하고 더욱 감계(鑑戒)가 될 만한 것들을 추려 뽑아 손수 평점하고 채집한 것들이었다. 왕이 춘저(春邸)에 있을 때부터 그 내용이 치도(治道)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누차에 걸쳐 감정(勘定)을 가해오다가 이때 와서야 비로소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미처 간행까지는 못했었는데 규장각(奎章閣)이 어제로 편집하여 올렸다.

24년 1월 초하룻날 아침에 원자를 책봉하여 왕 세자로 삼았다. 그날로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돌아와 집복헌(集福軒) 바깥채에서 대신과 각신(閣臣)ㆍ예관(禮官)을 불러 인견한 후 하교하기를, "원자의 금년 나이가 11세인데 책봉례를 지금까지 늦춰 잡은 것은 무언가 기다림이 있어서였다. 《역(易)》에서는 쉽고 간단한 것을 귀히 여겼고, 《예기》에서도 삼선(三善)이 있으며 우리 현묘(顯廟)의 고사를 보더라도 관례ㆍ책봉례ㆍ가례 이 삼례(三禮)를 한 해에 모두 거행했었다. 천년 만년을 두고 자손에게 교훈을 주시고 편안한 복을 주신 것이니 그 어찌 오늘 우리가 그대로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하고, 이어 관례ㆍ책봉례를 같이 거행하도록 명하고 또 이어 가례도 그 해에 치루었다.

현륭원을 배알했다. 책봉례가 정해지자 왕은 그 예를 맡아 거행할 제신들을 대할 때마다 늘 옛날 애기를 하면서 눈물로 옷깃을 적시곤 했는데 현륭원을 배알하고는 제신들에게 하교하기를, "오늘이야 내가 어떻게 차마 이 원을 하직하고 돌아가겠는가." 하고는 잔디 위의 한데에 엎드려서 목이 쉬도록 흐느껴 울었다. 제신들이 울며 청한 끝에 저녁 무렵에야 재전(齋殿)에 들어 머물다가 이튿날 환궁했다.

예조가 책봉례 의식 절차에 관해 아뢰자, 하교하기를,

"내가 오늘과 같은 유모(孺慕)의 마음으로 예(禮)대로 하기 위해 임전(臨殿)을 한다면 내 마음이 편하겠는가. 예도 인정(人情)에서 우러나는 것이기에 인정에 맞으면 천리(天理)에도 맞는 법이다. 더구나 공조(公朝)의 예가 사례(士禮)와는 비록 구별이 있다지만 며느리 맞이한 집에서도 사흘 동안은 풍악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였다. 옛날 우리 세종 대왕께서도, 그때의 수수(授受) 과정을 보면 우리 태종 대왕이 보평전(報平殿)에서 내신(內臣)에게 동궁을 모시고 오도록 명하여 대왕이 계시던 내전(內殿)에서 대보(大寶)를 넘겨주심으로써 그 길로 왕위에 오르셨던 것이다. 요(堯)가 명하고 순(舜)이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전장(典章)이었겠는가마는 예가 그렇게도 간편하셨다. 그것이 이 소자가 일심으로 본받고 따라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번 삼가례(三加禮)에 있어서도 명빈(命賓)ㆍ책저(冊儲)ㆍ전책(傳冊) 임전(臨殿) 등의 예들은 모두 생략하라. 그리고 예를 마친 후의 하의(賀儀)도 전(殿)ㆍ궁(宮)에 한꺼번에 하도록 하라. 그러면 내가 어찌 감히 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임권은 못하겠으니 권정례(權停禮)로 하도록 하고 춘궁의 하례 의식도 현묘(顯廟) 시절에 했던 전례대로 역시 권정례로 하도록 하라." 하였다.

2월 을유일 왕세자가 관례와 책봉례를 집복헌 바깥채에서 거행했다. 예를 마친 후 왕은 왕세자와 함께 진전(眞殿)ㆍ태묘(太廟)와 경모궁(景慕宮)을 배알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제신들에게 말하기를, "오늘 예를 마치고 나니 종묘 사직이 더욱 소중해지고 하늘에 계신 영령들께서도 틀림없이 기뻐하고 계실 것이지만 나의 마음을 더욱 무어라 말할 수가 없구나." 하고, 원릉을 배알한 후 그 국내의 각능도 배알했다.

혜경궁(惠慶宮)이 부스럼으로 인하여 열흘이 넘게 편찮았는데 왕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근심에 쌓여 옷도 벗을 사이 없이 친히 약을 바르고 하느라 어수(御手)마저 부을 정도였다. 그때 와서 모든 증상이 쾌차되어 제신들이 하례를 거행할 것을 청했으나 왕은, 자궁 마음이 그리 거추장스럽게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세자빈(世子嬪)을 처음 간택했는데 안동 김씨(安東金氏)가 간선되었으니 전 참판 김조순(金祖淳)의 딸로서 바로 지금의 곤전(坤殿)이다. 처음 간택을 하려면서 연신(筵臣)들에게 이르기를, "간택이라는 것이 옛 예가 아닌 것이다. 선정(先正) 이 문성공(李文成公)이 일찍이 그에 대한 격언(格言)을 했었으나 국조(國朝)에서 해오던 일이라서 감히 안 할 수도 없는 일이다." 하였다.

여름에 유신 김이재(金履載)가 상소하여 전관(銓官)을 논핵하자, 왕은 준엄한 하교를 내리고 그를 귀양보냈다. 즉위 이후 오늘까지 왕이 외곬으로 지켜왔던 대의(大義)와 인재의 용사(用舍)에 관한 근본 취지, 시속을 바로잡기 위해 고심했던 문제 등에 관한 여러 천백 마디 내용을 연신들에게 펴보이고 이어 그를 연본(筵本)으로 등사하여 조신(朝紳)들에게 반사하도록 명했었다.

왕이 그해에 와서 경사가 있을 때마다 오히려 마음에 병이 되어 자주 편찮을 때가 있었는데다 시탕(侍湯)하느라 또 피로가 겹쳐 6월 초부터 부스럼이 나기 시작하여 날이 갈수록 점점 더해갔다. 그러면서도 승지를 불러 하교하기를, "농사는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내 병 때문에 지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28일에 이르러 병이 크게 악화되어 대신 이하 제신들이 와내(臥內)에 들어가 증후를 살펴보니 왕은 이미 말을 못하는 상태에서 들릴락말락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제신들이 귀기울여 들어보니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 글자를 들먹이고 있는 것으로 수정전은 곧 정순 대비(貞純大妃)가 있는 곳이었다. 왕의 생각은 아마 자성(慈聖)께 무언가 고해야 할 말이 있었던 듯한데 이미 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왕은 그날 유시(酉時)에 창경궁 영춘헌(迎春軒)에서 끝내 승하하고 말았는데 당시 춘추가 49세였고,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ㆍ승지ㆍ사관(史官)들일 뿐 환시(宦侍)나 궁첩(宮妾)들은 한 사람도 가까이 없었다. 대상(大喪)의 그날 심산 궁곡의 농부에서부터 심지어 아낙과 어린애들까지도 마치 자기 부모를 여읜듯이 모두가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11월 갑신일 자시(子時)를 기해 현륭원 동쪽 두 번째 산등성이에다 해좌(亥坐)로 장례를 모셨는데 거기가 바로 건릉(健陵)이다. 아, 원통하여라.

(계속)

출전 : 정조실록 부록 정조 대왕 행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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