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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3-12-31 (수) 18:49
분 류 사전2
ㆍ조회: 3237      
[불교] 불교-아시아의 불교 (브리)
불교-아시아의 불교

세부항목

불교-불교의 기원
불교-불교의 역사
불교-아시아의 불교

중국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시대였다. 당시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하고 있었으며 아마도 불교 승려들은 상인들을 따라 중앙 아시아의 여러 지역들(코탄ㆍ소그디아ㆍ파르티아ㆍ쿠차 등)로부터 중국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불교를 처음 접한 중국인들은 불상을 보면서 부처를 신으로 여겼으며 현세적 구복의 대상으로 삼았다.

경전을 처음으로 한역한 사람은 파르티아인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람으로서 148년에 수도 뤄양[洛陽]에 와서 주로 선관(禪觀 dhyna)과 소승경전들을 번역했으며 비슷한 때에 지루가참(支婁迦讖)도 뤄양에 와서 대승경전인 〈도행반야경 道行般若經〉 등을 번역했다.

서진(西晉)의 축법호(竺法護)는 〈광찬반야경 光讚般若經〉ㆍ〈정법화경 正法華經〉 등 약 150부 300권을 번역하여 중국불교의 기초를 닦았다. 311년 장안이 북쪽 흉노족에게 정복당하자 한족들은 양쯔 강[揚子江] 이남으로 피난하여 동진(東晉:317~419)을 세웠으며 많은 지성인들은 허탈감 속에서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했다.

이러한 분위기 가운데 불교의 이질적 세계관이 중국 지성인들 가운데 파고들기 시작했으며 그들은 자연히 반야경전의 공(空) 사상을 노장의 무(無) 개념에 준해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였다. 경전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데 있어서도 그들은 의도적으로 유교나 도가 사상의 술어들을 사용했으며 이러한 경향을 격의(格義)라고 부른다.

화북지방에서는 서역 출신의 승려로서 주술에 능한 불도징(佛圖澄:232~348)이 눈부신 포교활동으로 많은 신자를 얻었으며 사찰들을 세웠다.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도안(道安:312~385)으로서 그는 반야경전을 강의했고 경전들을 수집하여 목록을 작성하는가 하면 외국 승려들을 초청하여 역경사업을 지원하는 등 많은 활약을 하여 중국 불교의 기반을 다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 혜원(慧遠:334~416)은 유교와 도가사상에 정통했던 승려로서 여산(廬山)에 거하면서 동진 불교를 주도했다. 그는 아미타불을 명상하는 염불결사(念佛結社)를 시작했으며 〈사문불경왕자론 沙門不敬王者論〉을 지어 세속적 정치권력에 대한 승가의 독립성을 옹호했다.

그러나 도안과 혜원의 불교 이해는 아직도 토착사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으며 구자(龜玆 Kucha)국으로부터 온 구마라집(鳩摩羅什 Kumrajva:334~413)의 역경활동에 의해 비로소 중국 승려들은 대승불교 철학의 진수를 이해하게 되었다.

구마라집은 〈대품반야경〉ㆍ〈묘법연화경〉ㆍ〈아미타경〉ㆍ〈유마경〉ㆍ〈금강경〉, 용수의 〈중론〉ㆍ〈십이문론〉ㆍ〈대지도론〉 등을 포함하여 35부 254권을 번역하여 중국 불교에 결정적인 초석을 놓았다. 그의 번역은 그 이전의 것들에 비해 사상적 내용의 전달이나 문체의 미려함에서 뛰어나 지금까지도 많이 읽히고 있다.

그의 제자 승조(僧肇:374~414)는 공사상을 천명하는 논서들을 지어 공에 대한 성숙한 중국적 이해를 보였고 도생(道生)은 대승 〈열반경〉 연구와 불성사상ㆍ돈오(頓悟) 사상으로 유명했다.

한편 구마라집 이후 인도 불교의 중요한 경전들의 번역은 계속되었으며 그 가운데 특히 담무참(曇無讖:385~433)의 대승 〈열반경〉, 불타발타라(覺賢이라고도 함:359~429)의 〈화엄경〉,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394~468)의 〈능가경〉, 보리류지(菩提流支)의 〈십지경론〉, 진제(眞諦:Paramrtha 499~569)의 〈섭대승론 攝大乘論〉ㆍ〈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의 번역은 각각 중국 불교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하기는 했으나 남조에서처럼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몇 차례에 걸쳐 심한 박해를 받는가 하면 대대적인 승가의 지원도 있어서 윈강[雲崗]의 석굴과 같은 거대한 불교유적을 남기고 있다. 남조에서는 왕실의 한결같은 지원 아래 불교가 번창했으며 특히 교학적 연구가 발달했다.

남북조시대는 아직도 인도 불교의 문헌들이 소개되고 있는 역경기로서 중국인들은 불교 전체를 파악하는 안목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인도 불교의 주요경전과 논서들이 번역될 때마다 한 특정한 문헌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주석적 학파들이 성립되었다.

〈열반경〉을 연구하는 열반종, 〈십지경론〉을 연구하는 지론종, 〈섭대승론〉을 전공하는 섭론종, 〈중론〉ㆍ〈십이문론〉ㆍ〈백론〉에 기초한 삼론종 등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런가 하면 〈능가경〉의 연구와 전수를 주로 하는 능가종도 형성되어 초기 선 불교의 성립에 영향을 주었으며 정토신앙 계통의 〈무량수경〉ㆍ〈아미타경〉ㆍ〈관무량수경〉의 연구를 기반으로 한 중국 정토신앙의 전통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는 중국은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이와 때를 같이하여 천태종(天台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등장하여 남북의 정치적ㆍ사회적 통합과 종교적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천태종은 혜사(慧思)ㆍ혜문(慧文)을 거쳐 천태산의 지의(智:538~597)대사에 의해 사상적 기초를 이루었다. 천태종은 〈법화경〉을 소의(所依) 경전으로 삼는 종파로서 당시 중국에 들어온 모든 주요 불교사상들을 석존의 설법 시기에 따라 다섯(五時)으로, 교설의 내용과 방법에 따라 8가지(八敎)로 구분하여 정리하는 포괄적인 교상판석(敎相判釋:敎判이라고도 함)의 체계를 세웠다.

천태종은 또한 실천수행의 방법으로서 지관(止觀)의 명상법을 제시했다. 지(止)란 정신이 한 군데로 집중되어 통일된 상태를 뜻하고, 관(觀)은 공사상에 입각하여 사물의 실상을 보는 지혜의 훈련이다.

당조(唐朝)에는 인도의 날란다(Nland)사에서 유식사상을 공부하고 돌아온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하여 〈성유식론 成唯識論〉을 저술했으며 그의 제자 규기(窺基)는 그 주석서를 써서 중국 유식학파인 법상종(法相宗)의 창시자가 되었다.

현장은 귀국할 때 많은 불교전적을 가지고 와서 일생을 역경사업에 바쳤으며 그의 번역은 종전의 것에 비해 훨씬 더 정확한 것으로 신역(新譯)이라 부른다. 법상종은 다분히 인도적인 교학적 종파로서 당 초기에는 선풍을 일으켰지만 곧 인기를 잃어버리고 화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에 자리를 내주었다.

화엄종은 천태종과 더불어 가장 포괄적인 불교사상체계를 수립했다. 〈화엄경〉의 진리를 최고의 가르침으로 간주하는 화엄종은 종래의 모든 불교사상을 5가지 가르침(五敎)으로 정리하는 교판체계를 제시했다.

두순(杜順)ㆍ지엄(智儼)을 거쳐 법장(法藏:643~712)에 의해 완성된 화엄사상은 징관(澄觀)ㆍ종밀(宗密)에 의해 계승ㆍ발전되다가 845년의 폐불(廢佛) 사건을 계기로 점차 세력을 잃어갔다. 화엄사상의 핵심은 법계(法界) 사상으로서 화엄은 사(事) 법계, 이(理) 법계, 이사무애(理事無碍) 법계, 사사무애(事事無碍) 법계의 4종 법계를 말하고 있다.

이 법계사상은 천태의 관법과 마찬가지로 공(理) 사상에 입각한 것으로서 현상계(事)와 진리가 불가분(色卽是空)이며 현상계의 사물들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기적(緣起的)으로 연결되어 있음(事事無碍)을 말하고 있다.

천태ㆍ법상ㆍ화엄에 이르러 중국 불교는 실로 인도 불교를 능가할 만큼 정교하고 포괄적인 중국적 불교철학체계를 형성하게 되었으며 그 이전의 여러 학파들은 모두 거기에 흡수되어버렸다. 즉 삼론종은 천태종, 섭론종은 법상종, 지론종은 화엄종, 열반종은 천태ㆍ화엄종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천태ㆍ법상ㆍ화엄이 제아무리 정교한 논리로서 포괄적 사상체계를 세웠다 하더라도 대중적 종파가 되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추상적이었다. 그들은 결과적으로 대중적 지반을 확보하지 못하고 정권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 했으며 결국 중국의 문화적 풍토에 뿌리를 내리고 끝까지 남아 있게 된 것은 실천적 성격이 강한 선(禪)불교와 대중적 성격이 강한 정토(淨土) 신앙뿐이었다.

정토종은 이미 언급한 정토 삼부경전을 바탕으로 하여 담란(曇鸞), 도작(道綽)을 이은 선도(善道:613~681)에 의해 본격적으로 대중적 성격을 띤 사상으로 정립하게 되었다. 본래 정토신앙은 아미타불의 서원에 정토 왕생(往生)의 조건으로 언급된 염불을 통해 정토에 태어난 후 성불할 수 있다는 신앙으로서 염불(念佛)이란 아미타불과 정토의 모습을 명상하는 관상(觀想) 염불을 뜻했다.

그러나 쉬운 수행(易行)을 강조하는 중국 정토신앙에서는 염불이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칭명(稱名) 염불(南無阿彌陀佛)로 해석되었으며 이것을 누구나 행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정토왕생의 수행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정토신앙의 성립에는 6세기 후반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법사상, 즉 불교가 정법(正法)ㆍ상법(像法) 시대를 지나 지금은 불타의 올바른 가르침과 수행이 모두 사라져버린 말법(末法)시대가 도래했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선불교는 문자 그대로 선정(禪定)의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초기 선불교는 〈능가경〉을 소의 경전으로 삼고 불성(佛性) 사상에 근거하여 마음을 닦는 점진적인 수행을 중시했다. 이러한 수행전통은 5세기 말엽에 인도로부터 온 승려 보리달마(菩提達摩 Bodhidharma)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홍인(弘忍:601~674)ㆍ신수(神秀:606~706) 대사에 이르기까지 계승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선불교를 인도적 선과는 다른 독특한 중국적인 것으로 만든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점진적 수행(漸修) 사상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순간, 혹은 자기 마음의 본 바탕이 곧 불이라는(心卽佛) 것을 깨닫는 순간 곧바로 성불한다는 돈오(頓悟) 사상이었다.

이와 같은 선사상의 일대 전환이 일어난 것은 홍인의 제자였던 혜능(慧能:638~713)과 그의 제자로 자처했던 신회(神會) 화상에 의해서였다. 그후로부터 선불교는 번뇌를 제거하여 마음을 닦아가는 행위(修)보다는 마음의 본성을 깨닫는 체험(悟)을 강조하는 이른바 남종선(南宗禪)이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전통적인 인도적 좌선이나 수행보다는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중시하는 남종선의 추종자들은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 이야기들을 만들어냈으며, 그들의 설법과 선문답을 담은 어록(語錄)들을 발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보다도 오히려 조사(祖師)들의 어록을 더 중시하게까지 되었다.

이와 같은 선불교의 근본정신을 잘 나타내주는 말은, 진리는 경전의 문자보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이심전심(以心傳心)과 마음에 갑자기 와닿는 체험을 통해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성불한다는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의 구절들이다.

이러한 선사상의 배후에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직관적 지혜를 강조하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길을 찬양하는 중국의 도가적 사상이 짙게 깔려 있었으며 선불교는 인도적 공사상, 불성사상과 노장철학이 한데 어우러진 원숙한 중국적 불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로 선불교는 당 중엽부터 시작하여 당말ㆍ송초에 이르기까지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켰으며 불교에 대항하여 사상적 재무장을 하고 나선 신유학사상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선도(善導) 이후 대중적 뿌리를 내린 정토신앙에도 선불교의 영향 아래 염불선이 유행했으며 선수행자들 가운데서도 염불과 정토신앙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선정(禪定) 융합적 불교가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불교는 외래 종교로서 문화적 자긍심이 강한 중국인들 가운데는 처음부터 불교를 비판하는 배불론이 항상 존재해왔다. 배불론자들의 주요논지는 불교가 자연스러운 인륜을 무시하고 효(孝)에 어긋난다는 것, 경제적 낭비와 손실을 초래하며 초세간적 성격으로 인해 사회적 책임을 무시한다는 것 등이었다.

당나라 말기부터 이러한 배불론은 활기를 띠기 시작하여 송대에 들어오면서부터 불교는 신유학에 사상적 주도권을 내어주게 되었고 그로부터 전반적으로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다. 그러나 정토신앙과 선불교는 꾸준히 명맥을 유지해왔으며 도교나 토착신앙과의 습합(習合)을 통해 불교는 지속적으로 대중들의 종교로 유지되어왔다.

1930년경에는 전국적으로 약 73만 8,000명의 승려와 26만 7,000개의 사찰이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불교는 전반적으로 역동성을 상실했으나 중국 대중들 사이에 꾸준히 종교적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말과 20세기초에 침체된 불교계를 사상적ㆍ제도적으로 부흥시키려는 노력이 없지 않았으나 별다른 변혁을 일으키지는 못했고, 1949년 이래 공산치하에서 그나마 유지되어 오던 전통불교는 심한 탄압을 받아 거의 명목상의 존재가 되어버렸다.

일본

일본불교는 한국과 베트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본적으로 중국불교의 테두리 안에서 전개되었다.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초 백제를 통해서였다. 당시 일본은 백제와 친밀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552년 (긴메이 천황[欽明天皇] 13) 백제 성왕(聖王)은 불상과 을 보내 불교를 받아들일 것을 권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조정에는 새로운 종교를 지지하는 파와 반대하는 파의 대립이 있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왕실과 귀족들 간에 수용되었다. 특히 스이코 천황[推古天皇]의 섭정이었던 쇼토쿠 태자[聖德太子]594년 삼보흥륭(三寶興隆)의 칙서를 내리고 17개조헌법을 제정해서 불교의 국가적 숭앙을 촉구함으로써 일본 불교의 초석을 놓았다.

쇼토쿠 태자는 불교에 의해 씨족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형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불교의 보급은 또한 발달된 대륙문화의 수입을 뜻하기도 했다. 그는 스스로도 여러 경전을 연구하여 〈유마경〉ㆍ〈승만경〉ㆍ〈법화경〉에 대한 주석서를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대부분 고구려와 백제로부터 건너간 한국 승려들이었으며, 그들 가운데는 혜총ㆍ혜자와 같이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된 사람도 있었다. 이들 한국 승려들과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들에 의해 7세기 일본에는 〈삼론〉ㆍ〈성실론 成實論〉ㆍ〈구사론〉의 연구를 주로 하는 학파들이 각각 세워졌으며 중국의 법상종도 들어와서 강력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나라 시대[奈良時代:710~784]에는 화엄종도 수입되어 이른바 남도육종(南都六宗)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즉 율종ㆍ구사종ㆍ성실종ㆍ삼론종ㆍ법상종ㆍ화엄종으로서 주로 학승들이 경전과 교리를 연구하며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통제된 국교적 성격을 띤 불교였으며 민간포교활동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율종ㆍ법상종ㆍ화엄종이 가장 영향력 있는 교단을 형성했으며 현재까지도 남아 있다. 특히 도다이 사[東大寺]를 본거지로 한 화엄종은 나라 시대의 불교를 대표하다시피 했다. 도다이 사에 안치된 대불(大佛) 비로자나불상(毘盧遮那佛像)은 나라 불교의 상징으로서 우주만물에 편재해 있는 법신불의 세계와 사사무애의 법계를 나타내고 있다.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긴 헤이안 시대[平安時代:794~1185]에는 중국으로부터 천태종과 진언종(眞言宗)이 들어와서 일본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천태종은 사이초[最澄:767~822]에 의해 수입되었으며, 히에이 산[比叡山]에 자리를 잡고 대승 계단을 설치하고 나라를 위한 승려들의 훈련에 힘썼다.

사이초는 천태종뿐만 아니라 율ㆍ진언밀교ㆍ선 등도 들여왔기 때문에 일본 천태종은 매우 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신ㆍ구ㆍ의 3업을 통해 즉신성불(卽身成佛)을 목적으로 하는 진언종은 사이초와 함께 당에 갔던 구카이[空海:774~835]에 의해 도입되어 고야 산[高野山]에 자리를 잡았다.

진언종은 물론 성불을 목적으로 하나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기복적 성격이 강했으며 귀족들 사이에 매우 인기가 있었다. 천태와 진언은 모두 현세적 성격이 강한 일본의 토착신앙인 신도(神道)와 습합된 형태로 공존했다.

헤이안 시대 말기에는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겪는 가운데 말법사상이 유행했으며, 종래의 융합적 성격을 띤 불교를 배척하고 오로지 하나의 구원의 길만을 선택해서 따르려는 전수(專修)운동이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무사들이 지배하는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1192~1333]에 들어오면서 더욱 강화되어 새로운 종파들이 출현했으며, 일본불교의 특이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성립된 이러한 전수 불교적 종파들을 남도육종이나 천태종과 진언종으로부터 구별하여 신불교(新佛敎)라 부르기도 한다.

전수 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은 전수 염불을 주창한 호넨[法然:1132~1212]으로서, 오직 진실한 마음으로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기만 하면 정토에 왕생한다는 단순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여 많은 대중적 호응을 얻었으며 일본 정토종(淨土宗)의 원조가 되었다.

호넨의 제자들 가운데는 염불의 행(行)을 중시하느냐 아니면 아미타불의 본원을 믿는 믿음(信)을 중시하느냐에 대한 문제로 대립이 발생한 가운데 믿음을 중시하는 신란[親鸞:1173~1263]의 출현과 함께 정토진종(淨土眞宗)이라는 새로운 종파가 성립되었다.

신란은 신(信)의 일념이 발생하는 순간 정토왕생이 결정되며, 염불은 단지 아미타불의 은총에 대한 보은의 행위일 뿐임을 강조했다. 그는 믿음도 염불의 행도 모두 아미타불의 회향(廻向)의 힘에 의한 것이지,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순수타력신앙을 강조했다. 따라서 계율의 준수도 필요없게 되었으며 신란과 그의 제자들은 자유로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정토진종은 일본불교의 최대 종단을 형성하고 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또한 매우 투쟁적인 승려 니치렌[日蓮:1222~82]이 등장하여 니치렌 종[日蓮宗]을 개창했다. 그는 〈법화경〉 신앙을 고취했으며 염불을 모방하여 법화경의 이름을 부르는 창제행위(南無妙法蓮華經)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는 대중적인 신앙을 전파했다.

소카갓카이[創價學會] 등 전후 일본에 출현한 신흥 종교들은 니치렌 종 내지 법화신앙 계통에서 파생한 것들이 많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중국으로부터 선불교의 종파들도 수입되었다. 에이사이[榮西1141~1215]는 임제종(臨濟宗), 그리고 도겐[道元:1200~53]은 조동종(曹洞宗)을 개창했다.

선불교와 함께 일본 중세에는 다도ㆍ서도ㆍ하이쿠[俳句:17음절의 짧은 시] 등이 유행했으며 선은 일본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상의 가마쿠라 신불교의 지도자들은 모두 천태종에 몸담고 있던 승려들이었으나 기성 교단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켰던 것인데, 그들에 의해 수립된 종파들은 가마쿠라와 아시카가 시대[足利時代:1338~1573]를 통하여 급성장했고, 오늘날에는 천태종과 진언종을 누르고 일본 불교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도쿠가와 시대[德川時代:1603~1867]에는 그리스도교를 추방하기 위해 불교를 국교로서 보호했기 때문에 각 종파의 교단조직이 정비되고 교학도 다듬어졌으나 종교적 창의성과 역동성은 없었다.

메이지 시대[明治時代:1868~1912]가 되어 국왕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가 대두하면서, 신도(神道)와 불교를 분리시키고 불교를 배격하는 운동이 전개됨에 따라 불교는 국교적 위치를 상실하고 침체기에 들어갔으며, 메이지 정부의 명에 따라 승려들의 대처(帶妻)가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유럽의 근대적 불교 연구 방법이 도입되어 산스크리트ㆍ팔리어ㆍ티베트어 불전에 대한 연구와 불교사의 연구가 크게 발전하기 시작했다. 일본불교는 전반적으로 종파적 성격이 매우 강하고 종파의 개조(開祖)에 대한 숭배가 성하며 계율준수의 전통이 사라져 승려들은 대부분 결혼을 하고 사찰들도 대다수 대를 이어 운영되고 있다.

티베트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초 손챈감포 왕 때였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하지 않아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파드마삼바바(蓮華生)가 인도로부터 밀교의 교의와 의례를 가지고 온 뒤 많은 이적을 행하여 티베트 승가를 형성하면서 불교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오래된 종파인 닝마파의 원조로 추앙받고 있다. 8세기말에는 인도 승려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도 티베트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794년경에는 왕 앞에서 마하연(摩訶衍)이라는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선불교 계통의 중국 승려들과, 파드마삼바바를 초청한 적호(寂護 ntaraksita)에 의해 대표되는 인도 불교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후자가 승리했으며, 그로부터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의 지배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티베트에는 불교 이전부터 '본'이라는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이 있었으며 밀교의 신비적 주술 의례는 점복ㆍ예언ㆍ주술 등을 신봉하는 토착신앙과 잘 조화되어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밀교와 본 신앙이 합쳐진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9세기 렐파첸 왕 때에는 대대적인 체계적 역경사업이 추진되어 산스크리트 원어에 비교적 충실한 표준화된 티베트어 번역이 이루어졌다. 11세기에는 인도의 고승이나 혹은 인도 유학 티베트 승들에 의해 새로운 종파들이 성립되었다. 인도 벵골 지방으로부터 전통적 불교 사상과 밀교에 모두 정통한 승려 아티샤(982~1054)가 와서 티베트 불교를 중흥시켰으며, 그의 제자 돔은 카담파라는 종파를 창시했다.

티베트 승려 독미는 인도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사캬 사원을 창건했으며 사캬파의 주지들은 12, 13세기에 걸쳐 몽골의 지원하에 세속적 권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주지들은 결혼을 했으며 주지직은 세습되었다. 인도 날란다사의 나로파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말파(1012~97)는 카귀파를 창시했다. 그의 후계자 밀라레파(1040~1123)는 티베트 최고의 시인이요 성자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다.

티베트 대장경은 14세기 부퇸(1290~1364)에 의해 수집ㆍ편찬되었으며 카귤과 텐귤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카귤에는 율ㆍ경ㆍ탄트라가 들어 있으며, 텐귤에는 논서ㆍ주석서와 문법ㆍ의학ㆍ점성술 등에 관한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14세기의 티베트 불교는 매우 세속화되고 도덕적인 타락을 보임에 따라 총 카 파(1357~1419)에 의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총 카 파는 당시 밀교의 극단적인 퇴폐적 측면을 개혁하고 승가에 엄격한 계율준수를 요구했다. 그는 밀교와 전통적인 대승과 소승을 균형 있게 취하도록 했다. 총 카 파에 의해 게룩파라는 새로운 종파가 창시되었으며 그후 게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조카이자 게룩파의 제3대 지도자인 게뒨 둡파(1391~1475)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되었으며 첫번째 다라이 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었다. 그후로부터 다라이 라마가 죽으면 49일 후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서 그의 후계자 물색이 시작된다. 다음 다라이 라마는 그 전 다라이 라마가 환생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3대 다라이 라마(1543~88)는 몽골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제5대 다라이 라마(1617~82)는 몽골군의 도움으로 전 티베트를 정치적으로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는 제14대 다라이 라마로서 티베트가 중국 공산화되기 1년 전인 1950년에 즉위했으나, 1959년 반(反) 중국 항거 때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에서 수만 명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라마교는 티베트 이외에도 몽골ㆍ시킴ㆍ부탄 등에도 퍼져 있다.

<길희성(吉熙星) 글>

한국

한국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4세기말로서 당시 고구려ㆍ 백제ㆍ 신라 부족연맹체를 벗어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군주국가로 도약하려 하고 있었다. 이러한 때에 불교라는 새로운 종교가 들어와 종래의 씨족중심적 세계관과 종교관을 대체하는 보편적 윤리와 이념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고구려의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중국 전진(前秦) 왕 부견(符堅)이 순도(順道)라는 승려와 더불어 불상과 경전을 보내 옴으로써 시작되었다. 같은 해에 왕은 태학(太學)을 세워 유학을 공부하게 했으며 율령을 반포해서 중앙집권적 국가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백제 때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東晉)으로부터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와서 불법을 전했으며 신라에서는 눌지왕 때(417~458) 이미 불교가 들어왔으나 국가적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법흥왕에 의해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다(527). 삼국에 있어서 불교의 전래는 단순한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엄청난 문화적ㆍ정치적ㆍ사회적 변화를 의미하는 사건이었다.

불교와 더불어 종래의 무속적 신령숭배와는 달리 불상으로 뚜렷하게 형상화된 숭배대상이 생겼으며 세속인들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승려들과 승가공동체, 심오한 철학적 사상을 담은 경전들, 계율에 근거한 새로운 보편적 윤리관, 그리고 건축ㆍ공예ㆍ학문ㆍ서예 등 대륙의 문물이 함께 들어온 것이다. 승려들은 당시 가장 개명된 지식인들로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등 왕의 참모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했던 것이다.

삼국 가운데서 불교를 국가발전의 힘으로 삼아 급기야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신라였다. 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해서 중국 대륙과의 문화적 접촉에 가장 불리했던 신라였으나 일단 불교가 공인된 후 왕실은 불교를 적극 지원하고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은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했으며 스스로도 말년에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승가의 일원이 되었고 왕비도 뒤를 따랐다고 한다. 이것은 왕법과 불법의 일치를 보여주는 상징적 행위로서 국가 종교로서의 불교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이었다.

법흥왕부터 시작하여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불교왕명시대라고 부를 정도로 왕실은 백정(白淨:또는 淨飯)ㆍ마야ㆍ승만 등과 같은 불교이름들을 가족들의 이름으로 사용하여 자신들의 권위를 높이고 스스로를 불법의 수호자로 과시했던 것이다.

국토를 확장하고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진흥왕은 국가적 사찰인 황룡사를 지었으며 왕자들의 이름을 불교의 전설적인 이상적 군주인 전륜성왕(轉輪聖王)이 지닌 보물인 금륜ㆍ동륜이라 지어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에는 화랑제도도 창시되었는데 화랑도는 미륵신앙과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다. 삼국통일의 중추적 역할을 한 화랑 김유신을 따르는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는데 용화수는 미륵불이 출현할 때 그 밑에서 성불한다는 나무이름이다. 이는 말하자면 신라가 미륵불의 출현과 더불어 이루어질 정토와도 같다는 생각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신라의 이러한 불교적 애국심의 배후에는 원광(圓光)ㆍ자장(慈藏)과 같은 뛰어난 승려들이 있었다. 원광은 진평왕 22년(600)에 중국으로부터 귀국하여 진평왕 31년(608)에 고구려가 신라 변경을 침범하니 왕의 요청으로 수나라에 군사적 도움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한 일이 있으며, 신라의 청년들을 위해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주기도 했다.

전통적인 불교의 오계와는 달리 세속오계는 유교적 덕목인 충ㆍ효를 강조하며 임전무퇴(臨戰無退)와 같이 군사적 용맹을 강조하는 내용도 담고 있다. 자장법사는 진골출신의 귀족으로서 636년 당에 유학하여 9년간 공부하고 귀국해 대국통(大國統)이라는, 승려들을 총괄하는 중책을 맡았다.

그는 통도사에 계단(戒壇)을 설치했으며 승려들로 하여금 계율을 엄격히 지키도록 했다. 그는 나라의 번영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으로 신라 불교의 중심지였던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려고 했다.

불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현세 구복적인 관심 속에서 불교를 숭상했으며 깊은 교리적 이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많은 승려들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요한 경전들을 배우고 돌아오는가 하면 어떤 승려들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명성을 떨치기도 했다.

고구려의 승려 승랑(僧郞)은 중국 삼론 사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혜관(慧灌)이라는 고구려 승은 일본으로 가서(635) 일본 삼론종의 창시자가 된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는 삼론학이 특히 성했던 것 같다.

백제에서는 율학연구가 특히 발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의 승려 겸익(謙益)은 521년에 인도에 가서 소승의 논서와 율서를 많이 가지고 와 72부에 달하는 율에 관한 문헌들을 번역했다고 한다. 백제의 율학이 번성함에 따라 일본으로부터 비구니들이 율학연구를 위해 백제에 오기도 했다(588).

당시 백제와 일본은 친밀한 관계에 있었으며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것도 백제의 성왕이었다(522). 율학에 정통한 백제 승 혜총(慧聰)은 58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와 더불어 유명한 쇼토쿠태자[聖德太子]스승이 되었다.

신라에도 원광ㆍ자장의 귀국과 더불어 7세기 전반부터 경전과 교학연구가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삼국통일을 전후로 하여 활약했던 승려 의상(義湘:625~702)ㆍ원효(元曉:617~686)에 이르러 신라의 교학은 극치를 이루었다.

의상은 중국 화엄의 제2조인 지엄의 문하에서 화엄사상을 대성한 법장과 더불어 공부하면서 두각을 나타내다가 귀국하여 한국 화엄종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후 화엄종은 줄곧 한국불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저서로서 화엄사상의 핵심을 210글자를 도상(圖像)으로 배열하여 나타낸 〈화엄일승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가 유명하다.

원효는 의상과 더불어 중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만법유심(萬法唯心)의 진리를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계기를 가진 뒤 중도에서 유학을 포기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교학의 대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에 알려졌던 거의 모든 중요한 경전들에 주석서를 쓰다시피 했으며 독특한 화쟁(和諍)의 논리로써 경전에 나타난 다양한 사상들을 조화시켰다.

그의 〈화엄경〉 주석서와 〈대승기신론〉 주석서는 특히 유명하며 중국 화엄학에까지 중요한 영향을 주었으며 그의 사상 자체도 〈기신론〉에 의존하는 바 크다. 또한 〈금강삼매경 金剛三昧經〉에 대한 그의 연구는 높이 평가되어 인도 논사들의 저술처럼 '논'(論)의 칭호를 받을 정도였다.

원효는 교학뿐만 아니라 파계한 후 대중포교활동에도 힘썼다. 원효를 비롯한 많은 신라 승들은 정토 경전에 대한 주석서를 썼으며 정토신앙을 보급하는 데 앞장섰다. 신라시대 이래 정토신앙은 비록 한 독립된 종파를 이루지는 않았으나 미륵신앙과 더불어 대중적 신앙으로 널리 퍼졌다.

한편 원측(圓測)과 같은 신라승은 현장법사의 문하에서 유식학에 두각을 나타내어 법상종의 창시자 자은대사(慈恩大師) 규기와 쌍벽을 이룰 정도였으며 그의 유식학은 도증(道證)ㆍ태현(太賢) 등에 의해 신라에 전해져 한국 법상종의 기초가 되었다.

신라는 8세기말부터 지배계급의 내분과 지방 호족들의 발호로 사회적 혼란기에 들어갔으며 불교계도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이무렵 중국 불교계에 선풍을 일으키기 시작한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해서 한국 불교는 새로운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중국으로부터 선을 전수받고 돌아온 승려들은 대부분 화엄종 출신의 승려들이었으며 그들은 주로 지방을 중심으로 하여 호족들의 비호를 받으며 자리잡게 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말기부터 고려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세워졌으며 그 개창자들은 대부분 중국 남종선의 거봉인 마조도일(馬祖道一:707~786) 계통의 법맥을 전수받은 자들이었다.

교외별전ㆍ이심전심을 강조하는 그들의 과격한 선풍(禪風)은 수도 경주를 중심으로 한 전통적인 교학적 종파들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으며 그후로부터 선과 교의 갈등은 한국불교의 새로운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고려를 세운 왕건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많은 사찰들을 세웠으며 선과 교를 모두 지원했다. 그가 후손을 위해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고려조 대대로 불교와 왕실은 태조의 정책에 따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되었다.

제4대 광종 때에는 과거제도의 도입과 함께 승려들을 위한 국가고시인 승과(僧科)도 설치되었으며, 승과를 통과한 선과 교의 승려들에게는 마치 관직과도 같이 각각 법계(法階)가 수여되었다. 승려들에 주어졌던 최고의 명예직은 왕사(王師)와 국사(國師)로서 국가종교로서의 고려불교의 위치를 잘 반영하는 제도이다.

이 모든 것은 결국 불교가 나라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을 뜻함과 동시에 불교가 관료조직화되어 국가의 관장 아래 들어갔음을 뜻하기도 한다. 왕실과 귀족들의 물질적 지원을 받은 불교는 외적으로는 번창했으나 사상적ㆍ정신적으로는 창의성을 상실했으며 승가는 도덕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

특히 선과 교의 대립은 종교적 갈등 못지 않게 교단적ㆍ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승가의 큰 문젯 거리가 되었다. 문종의 넷째 아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1055~1101)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은 화엄종 승려였으나 중국으로부터 천태종을 재수입하여 고려 천태종을 개창했다.

그는 천태사상에 입각하여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창함으로써 교학 위주의 제종파들과 수행 위주의 선을 통합하려 했으나, 실제로는 선을 억압하는 정책을 펴 그의 통합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무렵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뭉치기 시작했으며 천태종은 조계종과 같이 하나의 선종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의천과는 달리 조계종에서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출현하여 선교의 융화에 힘씀과 동시에 선의 수행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화엄에도 선과 같은 돈오(頓悟)의 길이 있음을 강조하여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을 제시했으며 돈오 후에는 반드시 점수(漸修)가 따라야 한다고 하여 수행의 방법으로서 정혜쌍수(定慧雙修) 혹은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을 세웠다.

마지막으로 그는 선만의 독특한 길인 경절문(徑截門), 즉 조사들의 선문답인 화두(話頭) 혹은 공안(公案)의 명상을 통해 모든 언어와 생각을 초월하는 깨달음을 얻는 길을 제시했다. 지눌의 선은 수선사(修禪社:지금의 松廣寺)를 본거지로 하여 최씨 무신정권의 지원 아래 번창했으며, 지눌 이후 한국 불교는 선이 우위를 점하면서 교를 흡수하는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신유학을 숭상하는 신진 사대부들에 의해 불교에 대한 거센 반발이 일면서 배불정책이 펼쳐짐에 따라 불교는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많은 승려들이 환속되고 국가의 지원을 받는 사찰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종파들이 통폐합되는가 하면 승과제도마저 철폐되었다. 백성들의 자유로운 출가가 금지되었으며 심지어는 도성 출입마저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가혹한 배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승가는 계속해서 자질있는 승려들을 배출하는 등 그 명맥을 유지했다. 특히 불교는 왕실의 여인들과 서민들의 계속적인 귀의를 받아왔다.

조선의 승려들 가운데서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1520~1604)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는 명종 때 승과가 일시 부활하자 응시하여 합격한 후 선종과 교종 모두를 총괄하는 판사(判事)로서 불교 중흥에 힘쓰다가 은퇴한 후 묘향산에 기거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조선시대의 명승들은 대부분 서산 문하에서 나와 조선 불교의 혜명을 이어갔다. 임진왜란을 맞아 휴정은 선조의 간청에 따라 승병을 모집하여 구국활동에 투신했으며, 그의 제자 사명대사四溟大師) 유정(惟政:1544~1610)은 승병 활동뿐만 아니라 전후 일본과의 강화 외교에도 큰 공헌을 했다.

휴정 이후 한국불교는 결정적으로 선을 주로하고 교를 종으로 하는 불교, 혹은 교로 시작하여 선으로 들어가는 사교입선적(捨敎入禪的)인 불교가 되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7세기경에 형성된 승려들을 위한 강원(講院)의 교과과정뿐 아니라 강원과 선원(禪院)의 관계에도 나타나 있다.

강원의 교육 내용은 선과 교를 겸했는데, 그 교육과정은 선원에서의 수행을 위한 예비단계적 성격을 지닌다. 이것은 조선 후기부터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한국 불교의 전통이다.

조선 후기를 통하여 사찰들은 권세 있는 양반과 관리들의 착취대상이 되어 승려들은 각종 부역을 강요받았으며, 온갖 물건들을 절에서 만들어 바치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 승려들 가운데는 사찰의 살림과 운영을 맡은 사판승(事判僧)과 수도에만 전념하는 이판승(理判僧)의 구별이 생기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한국의 사찰에는 공부에 정진하는 승려와 절 살림을 운영하는 등 외호(外護)에 힘쓰는 승려 간의 구별이 존재한다.

일제강점기에 불교는 조선 총독부의 사찰령에 의해 엄격한 통제하에 들어갔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에서 내린 불교에 대한 탄압적 조치들이 폐지됨에 따라 승려들은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승가는 친일세력과 한국 불교의 독립성 및 고유한 전통을 지키려는 승려들로 나누어져 갈등을 겪었으며, 일본 승려들의 영향 아래 결혼을 하는 대처승과 전통적인 비구승의 구별도 생기게 되어 해방을 맞은 승가에 분열의 큰 요인이 되었다.

현재 한국불교는 대처승 종단인 태고종과 한국불교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비구승 종단인 조계종의 양대 종단이 있으며, 그밖에 최근에 생긴 군소 종파들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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