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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8 (일)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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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3323      
[사상] 유교-고려시대의 유교 (민족)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세부항목

유교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유교(참고문헌)

고려는 10세기 초 태조 왕건(918∼943)에 의해 창건되어 14세기말 공양왕(1389∼1392)까지 475년 간 지속되었다. 고려가 건국할 무렵에는 신라가 후백제와 태봉(泰封, 또는 후고구려)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왕건은 태봉의 장수로서 왕으로 추대되어 고려를 창업하였다. 고려에 신라가 부속되고 후백제가 항복함으로써(936) 삼국은 다시금 통일된 고려국으로 탄생하였다.

고려시대에 중국과 동북아시아의 역사는 매우 복잡한 시기였다. 당나라의 멸망(907),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 북방 거란족(契丹族)이 요나라를 세움(916∼1125), 중원(中原)에 송나라 건국(960). 여진족의 금 건국(1115), 북송의 멸망(1127), 다시 몽고제국(元) 성립(1206), 금나라 멸망(1234), 남송의 멸망(1279), 명나라 건국(1368), 원나라 멸망(1368) 등 한족과 동북의 주변 제 민족이 흥망성쇠를 거듭하였다. 따라서 고려왕조의 대외 관계도 정치·군사적으로 복잡할 수 밖에 없었다.

고려의 성립은 한국 민족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당시 분열된 후삼국을 통일시켰다. 둘째는 원삼국(原三國)으로의 귀속적 성향을 불식하고 완전히 통합된 단일 민족국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는 과거의 신라국이 아닌 고려국의 처지에서 원삼국 시대의 실체를 근본적으로 파악해 민족의 뿌리를 분명히 찾고 삼국의 ‘본기(本紀)’를 객관적·사실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기반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통일국가인 고려는 수많은 내우외환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려 초부터 긴장 관계에 있던 거란은 성종∼현종대에 걸쳐 10에서 40만에 달하는 대군으로 쳐들어왔다. 화전양면(和戰兩面)으로 극복하기는 했지만,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는 등 외부의 위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웠다.

후기의 몽고 침입은 고종 18년(1231)에 시작해 고종 44년의 제7차까지 침구(侵寇)하였다. 고려는 개경환도에 이르기까지 40년 간 항쟁했지만, 국토의 유린과 피해는 헤아릴 수 없었다. 1259년 대원(對元) 항복 의사 전달에 이어 원종 11년(1270) 개경 환도 이후 100년 간 몽고의 간섭과 압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고려 중기를 지나 수많은 반란을 겪어야 했다. 인종 때 이자겸(李資謙)의 난(1127), 묘청(妙淸)의 난(1135), 의종(1170) 및 명종(1173) 때 정중부(鄭仲夫) 등의 난이 있었다.

마침내 명종 26년(1196)에 최충헌(崔忠獻)으로부터 시작되어 최의(崔洑)의 사망에 이르기까지(1258) 60여 년 동안 최씨 정권이 들어서서 일종의 막부정치(幕府政治)가 실시되었다. 그 사이 국내 곳곳에서 일어났던 공·사노비·농민·군인 등의 민란과 삼별초의 난 등 수 많은 사태가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가 국난을 극복하고 약 500년 동안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 이래의 축적된 문화의 계승과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서였다. 고려는 유교적 요소를 계승하고 당·송의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사회 국가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정치·교육·윤리·학술·문화 등을 더욱 기구화, 조직화, 기능화하였다.

고려 말에 주자학이 들어와 기능하기 이전의 유교는 불교·도교 및 그 밖의 토속신앙과 갈등을 빚지 않고 공존·교섭·혼합되는 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송대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신진 사류들의 현실 의식과 유불도관(儒佛道觀)은 점차 비판적으로 변하였다.

고려시대의 유교를 관찰하기 위해 편의상 전후기로 분류하고, 다시 전기를 태조(918∼943)부터 정종(1034∼1046)까지를 제1기로, 문종(1046∼1083)부터 의종(1146∼1170)까지를 제2기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다시 후기를 명종(1170∼1197)부터 원종(1259∼1274)까지를 제3기로, 충렬왕(1274∼1308)부터 공양왕(1389∼1392)까지를 제4기로 구분하였다.

1. 고려 전기의 유교

[제1기]

태조∼정종의 129년 간이다. 태조는 후삼국을 평정한 다음 바로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친히 지어 반포하였다(936). 이로부터 태조 왕건의 문한 능력(文翰能力)을 알 수 있다.

태조의 〈십훈요 十訓要〉는 고려시대의 헌장이라고 일컬어지며, 고려 일대의 사상 풍토를 알려주는 기록이다. 태조는 고려의 창업에 즈음하여 유·불·도 및 재래의 토속신앙 등을 폭넓게 포섭해 정치를 안정시키고 민심을 수습하고자 하였다.

〈십훈요〉에 의하면, 고려의 창업은 부처의 힘과 삼한산천(三韓山川)의 음우(陰佑)에 힘입어 이룬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선교사원(禪敎寺院)의 건설과 연등·팔관을 행하고, 도교적 풍수설을 원용하는 등 종교적 기반 위에서 국풍을 세워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그러나 정치의 이념은 유교에서 구하였다. 〈십훈요〉의 3·4·7·9·10조는 유교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즉 왕위계승에서 재래의 골품제도와는 달리 요순의 선양설(禪讓說)을 이상적인 것으로 찬양하였다. 이것은 ≪예기≫의 이른바 세급(世及)의 원리 즉 적자전국(適子傳國)을 원칙으로 하면서, 형제수선(兄弟授禪)도 함께 인정한 것을 의미한다.

또한 봉록제도(俸祿制度)의 합리적 보장과 경요박부(輕法薄賦)를 실시해 백성에게 인정(仁政)을 실시할 것을 말하였다. 특히 제10조에 이르러서는 “널리 경사(經史)를 보아 옛 것을 거울삼고 오늘날을 경계하라”고 당부하면서 후세의 왕자들로 하여금 ≪서경≫에 나오는 주공(周公)의 ‘무일편(無逸篇)’을 써서 걸어놓고 출입할 때마다 살펴 위정의 표본으로 삼도록 당부하였다.

태조의 유교적 문치주의는 4대 광종과 6대 성종대에 계승·발전된다. 광종(949∼975)은 당대(唐代)의 정치적 요전(要典)인 ≪정관정요 貞觀政要≫를 숙독했다고 한다. 후주인(後周人) 쌍기(雙冀)를 중용하고 그의 건의에 따라 과거제도를 설치해 진사과·명경과·의복(醫卜) 등을 두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과거제도의 시작이었다.

이는 후백제와 고구려계의 지식인들까지도 고려 관료제의 내부로 흡수시키는 방도가 되었고, 지방 호족들의 중앙 관료화를 촉진해, 유교적 문치주의를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백관의 공복을 제정해 중화(中華)의 제도를 좇도록 한 것 또한 특기할만하다.

성종은 유교를 숭상해 공자와 주공의 풍을 일으키고, 당우(唐虞)의 정치를 이루려고 하였다. 성종조의 유교정치는 성종의 유교적 이상주의와 최승로(崔承老)의 유교적 합리주의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최승로는 그의 유명한 〈시무28조〉에서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요 내생(來生)의 자(資)이며, 유교는 치국의 근본이요 현세의 무(務)이다.”고 하여 유교를 기반으로 한 정교(政敎)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는 태조이래 제5대 경종에 이르기까지 군왕들의 득실·선악을 비평적으로 개진하였다. 그는 태조의 창업 정신을 존중하고 불교의 교리 자체를 부인하지 않았다.

그러나 과다한 불교 행사나 고래의 토속 행사를 비판해 국가의 중요 행사였던 연등과 팔관을 폐지하게 하는 등, 경제적 낭비를 일으키는 불교신앙의 파생적 부작용과 도참·귀신·양재(禳災) 등 도교적이며 토속적인 민간신앙까지도 타파하고자 하였다.

태조대에는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웠고, 성종대에는 동 6년(987)에 경학박사 1인과 의학박사 1인을 12목에 두도록 하였다. 성종 11년에는 중앙에 국자감(國子監)을 창설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종합대학으로 국자학(國子學)·태학(太學)·사문학(四門學) 등으로 조직되었다. 국자감에서는 유교경전을 기본교재로 교육하여 유교문화를 크게 진흥하였다.

성종은 효를 강조해 치국의 근본은 효에 있다 하여 누구나 육경과 삼례를 통해 효로 돌아가야 한다고 권장하였다. 실제로 사회 교화에도 힘써 노약자를 구휼하게 하고 효자·순손(順孫)과 의부·절부를 표창하였다.

또한 성종은 송나라와 문화 교류를 텄으며, 박사 임노성(任老成)은 송으로부터 대묘당도(大廟堂圖)·사직당도(社稷堂圖) 및 기(記)·문선왕묘도(文宣王廟圖)·제기도(祭器圖)·칠십이현찬기(七十二賢贊記) 등을 가져다가 헌상하였다. 이와 같이 성종대에 와서 사직단과 종묘가 세워지고 학교제도가 완비되는 등 유교 국가의 체모가 형성되었다.

8대 현종 때에는 태조 이후 7대에 이르는 국사(國史)의 찬수에 착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신라의 선철 최치원을 동 11년 그리고 설총을 동 13년에 각기 종향하였다. 이는 동방의 승무(陞黛) 18현의 전통을 이루는 효시로서 한국 유교사의 맥을 형성하는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성종∼현종대에는 수 차례의 거란 침략으로 나라가 전쟁 상태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의 유교문화는 국가적 차원에서 진흥되고 체제가 잡혀갔다.

[제2기]

문종∼의종의 125년 간이다. 첫째 성종대에 국자감이 관학(官學)으로 설치되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침체하고 사학이 크게 일어난다. 그 뚜렷한 사례로 11대 문종대(1046∼1083)를 즈음한 사숙(私塾)의 발달을 들 수 있다. 이것이 이른 바 12공도(十二公徒)이다. 그 가운데에서 최충(崔食)의 문헌공도(文憲公徒)가 가장 규모가 컸고 관학을 압도해 그 기능을 대신할 정도였다.

최충의 9재(九齋)와 12공도를 통해 구경삼사(九經三史)를 더욱 익혀 한문 문장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었고, 시문·사장에 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과거를 보아 출사(出仕)하기도 하였다. 최충은 ‘해동공자’라 일컬을 정도였고, 최충의 9재는 우리 나라 사학의 효시로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사학의 발달에 맞추어 국가에서도 관학을 진흥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16대 예종(1105∼1122)은 국자감에 7재를 두었다. 그 가운데 6재는 유학재(儒學齋)라 하여 각기 경전을 가르쳤다. 그 명칭과 내용은 여택(麗澤, 周易)·대빙(待聘, 尙書)·경덕(經德, 毛詩)·구인(求仁, 周禮)·복응(服膺, 載禮)·양정(養正, 春秋)이었고, 나머지 1재는 무학재(武學齋)라 하였다.

예종은 스스로 선성(先聖)에게 헌작했을 뿐만 아니라, 백관 및 생원 700인과 더불어 ≪상서≫ 강의를 청하기도 했고, 국학의 장학 재단으로 양현고(養賢庫)를 설치해 학술 진흥과 교육 사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김인존(金仁存)·박승중(朴昇中)·김부식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으며, ≪시정책요≫의 찬술·≪정관정요≫의 주석·≪삼국사기≫의 찬술·≪역≫과 ≪춘추≫에 대한 저술 등의 학술 성과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종대(1122∼1146)에는 학교 교육을 더욱 공고히 하여 학제를 상정(詳定)하는 한편, 과거제도 역시 확장·보완해 내실을 기하였다. 경내(京內)의 국자감에는 육학(六學 : 國子學·大學·四門學·律學·書學·算學)을 두고, 지방의 주·군·현에는 향학(鄕學)을 두었다.

품계가 높은 문무관의 자제가 배우는 국자학·대학·사문학에서는 구경을 대·중·소경으로 나누어 가르쳤고 ≪논어≫·≪효경≫을 필수로 하였다. 8품 이하의 자제와 서인층에게는 율학·산학·서학을 가르쳐 교육의 범위를 확대하였다. 유교 교육을 상위에 놓아 중시했던 인식 태도를 볼 수 있다.

또한 과거제도 역시 내용이 확장되어 제술과(製述科)·명경과(明經科) 이외에 법(法)·산(算)·서(書) 등 기타 잡업(雜業)에까지 확대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시대의 문풍은 전성기에 달했지만, 과거시험에서 명경보다 제술을 숭상해 벼슬길에 오르는 일에 힘쓰고, 경학을 소홀히 하고 오로지 글짓기에 종사하는 경박부화(輕薄浮華)의 풍조를 낳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문인을 우대하고 무인을 멸시해 의종 말년에 이르러 무인 정중부 등에 의한 경계(庚癸)의 난(1170, 1173)이 폭발하게 하였다. 이때 많은 문사들이 죽고 일시에 문풍이 사라지게 되었다.

2. 고려 후기의 유교

[제3기]

명종∼원종의 105년 간이다. 이 시대에는 무인들의 계사란(癸巳亂, 명종 3년, 1173) 이래 정중부·이의방(李義方)·경대승(慶大升)·이의민(李義旼) 등이 쟁패해 번갈아 득세하였다.

명종 26년에 최충헌이 집권해 고종 45년(1258) 최의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완전한 무인정권 시대였다. 그 뒤 원종 11년(1270) 무인 세력이 완전히 몰락할 때까지 100년간은 국가가 온통 무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난의 초기에는 많은 선비가 죽거나 산간 불사(佛寺)로 도망했고, 왕성했던 고려의 문풍은 멸절되다시피 하였다. 그 뒤 최충헌·최이(崔怡)의 보호 정책에 의해 일부 문사들이 차츰 소생했으나 전반적으로 위축되고 쇠미한 실정이었다. 더구나 최씨 정권하의 30년 간은 몽고 침략군과의 항쟁기였고, 그 뒤 100년 간 고려는 몽고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대표적 문사로 이인로(李仁老)·이규보(李奎報)·최자(崔滋)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고급 관료로서 벼슬한 적도 있었지만, 유교 정신에 투철한 경세제민의 의기에 찬 유자라기보다 유교적 교양을 갖추고 한문에 능숙한 문인이요 묵객이었다.

이인로는 저서로 ≪은대집 銀臺集≫ 20권, ≪후집 後集≫ 4권, ≪쌍명재집 雙明齋集≫ 3권이 있었고, 현재는 ≪파한집≫ 3권이 전한다.

그는 시세를 보아 벼슬을 하기도 했지만, 적성에 맞지 않아 도피적 경향을 띠었다. 그와 종유(從遊)하던 이른 바 망년우(忘年友) 7인을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 불렀다. 이는 진대(晉代)의 청담(淸談)을 일삼던 ‘죽림칠현(竹林七賢)’에 비견할 만한 것이었다.

문하시랑에 올랐던 이규보는 ≪동국이상국집≫을 지었고, 〈동명왕편 東明王篇〉의 작자로 유명하다. 그 역시 ‘강좌칠현’과 교유하였다. 〈외부 畏賦〉·〈방선부 防蟬賦〉 등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당시의 파행적 세태를 비평·풍자하였다.

최자는 ≪보한집≫의 작자로 문장의 조탁에 종사하였다. 그는 시를 지어 음풍농월이나 일삼았던 문인들의 폐습을 지적하였다. 제왕은 마땅히 경사(經史)를 근본으로 정사를 펴고 풍화성속(風化成俗)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평장사(平章事)·지공거(知貢擧) 등 상당한 벼슬을 하였다.

지금까지 열거했던 이들은 빼어난 문장가였지만 경술(經術)보다는 사장(詞章)을 숭상했던 풍조를 벗어날 수 없었다.

[제4기]

충렬왕∼공양왕의 고려 말 119년 간이다. 첫째로 이 시기는 자주성을 잃고 100여 년에 걸쳐 원의 지배 하에 통제와 간섭을 받던 때이다.

고려는 충렬왕 때부터 원의 공주나 몽고 여자를 왕비로 삼았기 때문에, 고려왕은 원 황실의 사위요 외손이 됨으로써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이 되었다.

고려 땅의 일부는 원의 직속령이 되기도 했는데 공민왕 때 탈환한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가 그것이다. 왕세자는 연경(燕京)에 머물러 인질이 되었고, 즉위한 뒤에도 여러 번 왕래하며 수년간 개경(開京)을 비우기도 하였다.

왕의 칭호나 묘호도 격하되었고, 관제도 통폐합되었으며, 임금이 몽고식 변발과 복식을 했고, 몽고말을 쓰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는 인적·물적 징구(徵求)로 나라사람들을 궁핍하게 하였다. 고려는 구차스러운 안정을 얻었고, ‘고려’라는 국호를 간신히 존손시켰을 뿐이었다.

둘째로 정주 성리학이 전래되고 보급되었다는 사실이다. 원과의 관계가 아물어감에 따라 왕실과 더불어 관인 지식층의 연경 왕래의 길이 트여 문화 교류가 다시 이루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런 배경에서 당시 중국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던 송학 즉 정주학(程朱學)이 원경(元京)을 통해 고려에 수입되었다.

충렬왕 6년(1280)에 국자학생을 위해 최옹(崔雍) 등 7인을 경사교수(經史敎授)에 임명했고, 동 22년(1296)에 경사교수도감을 두고 7품 이상의 관인(官人)을 학습하게 하였다. 이러한 계속적 조처는 침체되었던 경사와 학술을 진흥시키려는 의도였다.

우리 나라에 주자학을 최초로 전래해온 안향(安珦)은 국학의 침체를 개탄하고 유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그는 원나라의 연경에 가서 ≪주자전서 朱子全書≫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주자의 ‘신서(新書)’를 접하고는, 이것이 학문의 정맥(正脈)이라 하여 연구에 몰두해 새로운 학풍을 일으켰다.

안향은 국학에 섬학전(膽學錢)을 두었고, 중국으로부터 공자와 72현의 초상 및 제기·악기와 경사 등의 문헌을 구해왔으며, 대성전(大成殿)을 완성하였다. 안향에 의해 주자학을 기본으로 경사를 널리 탐구하는 학문 전통이 뿌리내리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이정(白蓬正)은 안향에 이어서 연경에 10여 년 동안 머무르며 정주 성리학을 연구했고, 귀국 후 이제현·박충좌(朴忠佐)와 같은 선비들에게 그 학문을 전수하였다. 그 밖에 우탁(禹倬)은 정자의 ≪역전 易傳≫을 연구했고, 권보(權溥)는 주자의 ≪사서집주 四書集註≫를 간행했으며, 이곡(李穀)은 도학을 연구하였다.

셋째 고려 말의 주자학의 전개와 사회적 기능을 살펴보아야 한다. 이색은 이곡의 아들로서 고려 충숙왕 15년(1328)에 태어나 조선 태조 5년(1396)에 생애를 마쳤다. 그는 주자학이 들어온 지 50년이 지난 때로부터 고려조의 마지막 50년에 활동했던 전환기적 시대의 역사적 증인이다.

이색은 학문의 폭이 넓어서 경학과 성리학·도학과 문학·유학과 불교·학문과 벼슬을 겸비한 홍유석학(鴻儒碩學)이었다. 신구의 학문을 한 몸에 지니고 전후시대를 연결해 국학을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였다.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은 모두 그 밑에서 교수되었으며, 정도전·권근(權近)·하륜(河崙)·길재(吉再) 등의 수많은 명류(名流)가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이들은 여말의 신진학자들로서 시대를 책임지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역사적 인물들이다. 이제 제4기, 특히 그 후기에 이루어졌던 특징을 주자학과 관련해 살펴보자.

① 불교에 대한 교단적·교리적 비판이다. 종래에는 유·불·도가 상충하는 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유교를 높이고 이단을 배척하는 주자학이 들어온 후에 사정이 달라졌다.

안향은 그의 〈유국자제생문 諭國子諸生文〉에서 “성인의 도는 일용윤리(日用倫理)에 불과하다.……저 불자들은 부모를 버리고 집을 나가고(棄親出家) 멸륜패의(蔑倫悖義)하니 곧 이적(夷狄)의 유(類)이다.……내가 일찍이 중국에서 주자의 저술을 얻어보니 성인의 도를 밝히고 선불지학(禪佛之學)을 물리쳤으니, 공이 족히 공자와 짝할 만하다. 공자의 도를 배우려고 한다면 먼저 주자를 배우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으니 제생은 ‘신서(新書)’를 열심히 배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색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불교 자체에 대해서는 찬양하지만, 불교 교단의 팽창과 타락상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비판하고 그 폐단의 시정을 주장하였다.

정몽주는 고려 말 유학의 종장으로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는 칭호를 듣는다. 그는 불교가 현실 세계에 대한 구체적이고 명확한 이론을 결핍하고 있다고 보아 불교의 정치 참여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박사 김초(金貂)와 유생 박초(朴礎)는 불교를 반인륜적·반국가적인 것으로 규정해 척결해야 한다는 극렬한 주장을 펼쳤다. 이는 불교를 신봉하고 불계(佛戒)를 받았던 역대 제왕의 눈에 거슬려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정도전은 저술을 통해 불교 배척의 이론을 폈으며, 권근은 여기에 자세한 설명과 주석을 붙였다.

이와 같이 친불유자(親佛儒者: 불교에 친한 유학자)·지불유자(知佛儒者: 불교를 아는 유학자)·반불유자(反佛儒者: 불교에 반대하는 유학자)를 막론하고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당시의 불교에 대해 비판적·배척적 위치에 있었다.

② 사장(詞章) 위주의 ‘말학(末學)’으로부터 경학을 중시하고 ‘근본’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인종대에 송나라 사람인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에서 당시 고려의 문풍에 대해 “성률(聲律)을 숭상하고 경학에는 공부가 없었다. 문장을 보면 당의 여폐(餘弊)를 방불하였다.”고 하였다.

송의 문풍이 들어오면서 문구의 조탁에 얽매이던 사륙체 따위의 풍습에서 벗어나는 경향이 나타났다. 김부식·김부철(金副轍) 등은 동파문학(東坡文學)의 영향을 받아 신선미를 갖게 되었는가 하면, 임춘(林椿)·최자 등은 경사문체(經史文體)나 한대의 고문체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려시대는 사장이 발달한 시대로서 유자들도 문장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특히 무신집권 하에서 문예 방면에 힘쓰고 문장의 조탁으로 흐르는 일은 여전하였다.

그러나 주자학의 영향을 받은 당시의 사류들은 모두 부허(浮虛)한 사장지학(詞章之學)에 힘쓰기를 그만두고 질실(質實)한 경학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안향은 처음부터 육경과 사적(史籍) 그리고 경사와 주자서 등을 중국에서 구해 와 국학에 존치(存置)하였다. 그는 학교를 일으키고, 경사와 주자서의 독서를 강조하였다.

우탁은 “경사(經史)에 밝고 특히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다(고려사 열전)”. 이제현은 “사장을 좇던 이들이 모두 명경지사(明經之士)가 되도록 해야 할 것(역옹패설)”이며, “집집마다 정주(程朱)의 책이 있어 성리지학(性理之學)과 교지지도(敎之之道)를 알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익재난고)”이라고 하였다.

이색은 당대 제1의 문장가였지만 사람들이 “시를 외우고 글을 읽되(誦詩讀書) 도를 좋아함이 깊지 못하고, 번화하게 꾸미는 다툼이 이미 심하다. 장구(章句)를 조탁함이 너무 지나치니 성의정심(誠意正心)의 공은 어디에 있겠는가(고려사 열전).”라고 하였다. 그는 성리설을 이해했고, ≪주역≫·≪중용≫ 같은 경서를 풀어 논술하기도 하였다.

정몽주는 “사장은 말예(末藝)이며, 신심(身心)의 학이 있으니, 그 학이 ≪대학≫·≪중용≫에 있다.”고 하였다.

정도전은 이색에 대해 성균관을 이끌면서 “성리학을 밝히고 부화한 풍속을 내침에 선생을 발탁하여 학관(學官)을 삼고 경학을 강론하게 하였다(圃隱奏使稿書).”고 기록하였다. 조준(趙浚)은 향교의 교육에서 사서오경을 읽히고 사장읽기를 허락하지 말 것을 건의하였다.

고려 명인 중에 문장가 아닌 이가 없겠지만, 고려 말의 주자학자들은 한결같이 사장의 말폐를 지적하고 경학 장려를 주장하였다.

③ 고려 말의 사류들은 화이론적 역사관을 적용하고 새로운 국제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고려의 국권 회복을 도모하였다. 고려는 국초부터 대외 관계에서 중국의 선진 문화는 받아들이지만, 야만적인 정복 국가에 대해서는 결연히 배격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태조 〈십훈요〉에서도 옛부터 우리는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예악문물이 그 제도를 따랐음 밝혔다. 그러나 중국과 고려는 지역과 인성이 각기 달라 구차스럽게 똑같이 할 필요는 없다고 보고, 고도의 문명을 받아들이되 민족의 체질에 맞도록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 태조는 거란은 “금수의 나라요, 풍속과 언어도 다르니 의관제도(衣冠制度)를 본받지 말라”는 유지를 내렸다.

또한 태조는 폭력으로 침략을 일삼은 거란에 대해 폐물(幣物)을 거절하고 사자(使者)를 잡아 가두는 등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그 뒤 성종·현종 때는 거란의 침략을 물리쳤다. 주변에서 송·금이 일어나고, 금이 북송을 멸했어도 고려는 의연하였다.

고려는 태조의 창업 정신을 지켜왔지만, 원의 침략으로 40년간의 오랜 항쟁 끝에 물리적으로 굴복하였다. 이후 왕실을 비롯한 귀족층은 정치적으로 원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북경을 수도로 하는 원나라는 중국 문화를 기초로 하여 발전해 갈 수밖에 없었다. 원의 수도인 북경〔燕京〕을 통해 입수된 주자학은 춘추의리학을 바탕으로 한 존왕양이의 화이론적 민족주의를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는 뒷날 원세력을 몰아내고 명과 친화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게 되는 이론적인 근거가 되었다.

실제로 시세가 변해 중국에는 명이 건국되었고(1368), 고려는 명 태조에게 사빙(使聘)을 보냈다. 쇠미해진 원은 북쪽의 개평(開平)으로 쫓겨 북원(北元)을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앞서 공민왕은 즉위 년에 몽고식 체두변발(剃頭屯髮)을 고쳤으며, 동 5년에는 원의 감독관청이었던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철폐하고 원의 직속령으로 있던 동북의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회복하고, 원의 연호를 폐지하였다.

또한 행패가 심했던 친원일파를 숙청하고, 구세력인 권문세가를 억압해 대내적인 개혁과 더불어 친명반원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국가 체제를 전향적으로 구축해가고 있었다.

주자학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사대부들은 ≪통감강목 通鑑綱目≫을 이미 읽고 있었으며, 이색·이숭인은 왕명에 의해 강목의 정신에 입각해 고려 역사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남의 나라를 무력으로 복속시켰던 원을 배격하고, 인의예악(仁義禮樂)의 보편적 인도주의를 표방한 명을 승인하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며, 태조 이래의 전통 정신에 합치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박상충은 “무릇 신(信)을 버리고 역(逆)을 좇음은 천하의 불의이며, 강을 등지고 약을 향함은 금일의 비계(非計)이다(고려사 열전) ”고 하였고, 정몽주는 “우리 태조께서 당나라 말기에 일어나 중국을 예로 섬긴 것은 천하의 의주(義主)를 예로써 본받을 뿐이었다.……원사(元使)를 예접(禮接)함이 옳지 못하다.”고 하였다. 북원을 섬기자고 하는 이인임(李仁任)·지대윤(池大奫)과 대립했던 박상충은 귀양을 가다가 죽었고, 정몽주는 언양에 유배당하였다.

④ 고려 말에 가까워질수록 신진 사류들은 군왕으로 하여금 유교 경학을 토대로 주자학적 수련에 의해 정사를 펼치도록 추진하였다. 이는 불교를 좋아하는 군주의 입지를 유교로 전환시키는 것이었다.

조준은 그의 상소문에서 정치의 요체를 도학에 두어 ‘작성(作聖)과 치치(致治)’에 있다고 하고, ‘경(敬)’과 ‘공(公)’이 기본이라고 하였다. 그는 “정일집중(精一執中)은 요순의 학이며, 건중건극(建中建極)은 탕무(湯武)의 학이니”, “경사(經史)를 토론하고 치도(治道)를 논정(論定)함으로써 광명의 학을 이룰 것”을 진언하였다.

또한 홍유석학과 더불어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을 베풀어, 좌우사(左右史)로 하여금 언행을 기록해 후세에 길이 전하도록 하며, 아침저녁으로 경적(經籍)을 탐구해 본원을 밝힐 것을 건의하였다.

하륜은 주자의 ‘인설(仁說)’을 병풍으로 만들어 임금에게 바쳤다. 공양왕은 이를 환영해 “항상 좌우에 펴놓고 보아서, 충심으로 수성(修省)해 허물을 바루고 잘못을 고칠 것이니,……밖으로는 풍속의 성쇠를 보고 안으로는 군심(君心)의 선악을 생각하리라”고 말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이 고려 말의 사류들은 군주로 하여금 유교인이 되게 하여 격군택민(格君澤民)의 전통을 수립하고자 하였다.

⑤ 중앙과 지방에 학교를 세우고 확장·강화함으로써 유교사상에 투철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처음에 주자학이 수입될 즈음 안향이 국학을 재건하기 위해 섬학전을 두었다. 공민왕 때에는 성균관을 중수하고 이색을 중심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이 일어났다.

이에 수 많은 학자가 모여 학문과 교육 활동을 펼쳤다. 특히 정몽주는 “안으로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밖으로는 향교를 세워서 유술(儒術)을 일으켰다(고려사 열전)”. 또한 조준은 상소하기를 “학교는 풍화(風化)의 근원으로서 국가의 치란과 정치의 득실이 이것에 말미암는다.”고 하였다.

이런 흐름을 이제현의 소론(所論)은 총괄적으로 보여준다. “옛날에 태조께서 초매(草昧)에 경륜할 때 먼저 학교를 일으켜 인재를 양성했으니, 한 번 서도(西都)에 행차하심에 곧 수재정악(秀才廷帽)으로 하여금 박사로 삼아 육부(六部)의 생도를 가르치게 했으며……광종 다음에는 더욱 문교를 닦아 안으로는 국학을 높이고 밖으로는 향교를 베풀어서 이상(里庠)과 당서(黨序)에 현송(絃誦)이 들려, 이른바 문물이 중화(中華)와 같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었다. 불행히 의종 말년에 무인의 변이 일어나서 옥석(玉石)이 함께 타서 호구(虎口)를 벗어난 자는 깊은 산으로 도망해 관대를 벗고 중의 옷을 입은 채 여생을 마쳤으니, 신준(申駿)·오생(悟生) 같은 이가 이들입니다.……이제 전하께서 학교를 넓히고 상서(庠序)를 삼가하며, 육예(六藝)를 높이고, 오교(五敎)를 밝혀서 선왕의 도를 천명하시면 누가 진유(眞儒)를 반대하고 석자(釋子)를 추종하겠습니까(고려사 열전)?”라고 하였다.

조선조의 영조는 고려 태조가 서경에 창학(創學)한 것을 가리켜 “고려조 500년의 근기(根基)가 진실로 여기에 있다(太學志).”고 했듯이 학교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고려 말의 학교재건운동은 학술적·이념적 의미에서 지도적 인물을 배출하고, 유교사상을 보편화하는 길이기도 하였다.

⑥ 고려 말의 주자학파는 재래의 의례·복식 그리고 법제 면에서 불교식과 몽고풍이 혼합되었던 것을 ≪가례≫를 통해 유교식으로 변경하였다. 정몽주는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고려사≫에는 “시속(時俗)이 상제(喪祭)에 불법(佛法)만을 숭상하는지라 정몽주가 처음으로 사서(士庶)로 하여금 ≪가례≫를 모방해 가묘(家廟)를 세워 선조를 받들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라에서도 가묘를 세우도록 영을 내렸지만, 단시일에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그 이전에도 사류 가운데는 이미 가묘를 세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가례≫는 사대부를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민간뿐만 아니라 종친에게도 그 법을 적용하도록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정몽주는 조정에서도 몽고의 복식을 고쳐 관복을 중국식에 따르게 하는 등 제도의 개혁을 주도했고, 공양왕 때에는 ‘신정률(新定律)’을 제진하고 6일간이나 진강하도록 했다고 한다.

⑦ 전제(田制)의 개혁과 유교의 인정(仁政)의 관련성이다. 전제는 국가 경제의 결정적 요인으로서 매우 중시되었다. 일찍이 맹자는 정전법(井田法)을 부활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정전(丁田)’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23년(통일 후 4년째인 940)에 역분전(役分田)을, 경종 1년(976)에 전시과(田柴科)를 실시해 토지제도를 제정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는 국초로부터 전시과를 실시해 나름의 합리적인 전제를 운영해왔지만, 후기에는 제도가 문란해져 과점(寡占)과 겸병(兼倂)의 폐단이 매우 커지게 되었다.

전제의 폐단과 개혁의 필요성은 식자들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일찍이 충숙왕 5년(1336)에 왕은 “공신의 사전(賜田)이 산천으로 표지를 삼아 받은 바가 날로 넓어지되 납세를 하지 않으며, 공부(貢賦)의 밭은 날로 줄어들고 있으니, 그 정수(定數) 밖으로 차지한 것은 조사해서 반납하도록 하라(高麗史 食貨志).”고 하여 폐단을 지적하였다.

귀족들의 토지 과다소유와 국가 경제의 위축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사원의 과다한 토지소유도 문제였다. 이색은 공민왕에게 상소하기를 “경계(經界)를 바루고 정지(井地)를 고르게 함은 치인(治人)의 선무(先務)라 하옵니다. 생각컨대, 우리 조종(朝宗)이 창수(創垂)하신 제도와 지수(持守)하신 규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으나, 400년간 말류의 폐가 있을 수밖에 없지만 그 중에서 전제(田制)가 더욱 심하옵니다.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호강(豪强)이 겸병하여 까치가 지은 집에 비둘기가 사는 것과 같습니다.……어떤 이는 말하기를 부자의 밭은 갑자기 뺏을 수 없고, 적년(積年)의 폐는 문득 고치기 어렵다 하지만, 이것은 용렬한 임금이 할 바요, 전하에게 바랄 것은 아닙니다.”고 하였다.

이런 논리는 맹자의 “무릇 인정(仁政)이란 반드시 경계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는 구절에 대한 주자의 풀이에 근거하고 있다.

주자는 “이 법이 닦여지지 않으면, 전(田)이 정분(定分)이 없게 되어 호강이 겸병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지(井地)가 불균하고 세부(稅賦)가 정법(定法)이 없어서 탐포(貪暴)한 자가 많이 취하게 되므로 곡록(穀祿)이 불평하게 된다. 인정을 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경계에서 시작하고 폭군오리(暴君汚吏)는 함부로 폐한다. 경계를 바르게 할 수 있다면 분전제록(分田制祿)은 힘들이지 않고 정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권근은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재물은 백성의 심장인데, 전쟁과 천재로 백성들은 굶은 기색이 있고 들에 굶어 죽은 시체가 있으며, 같은 밭에 주인이 2, 3명이나 있어서 다 각기 세금을 거둬가도 관리들이 금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 이 불쌍하고 외로운 백성들이 누구를 의지하며 뉘라서 이것을 바로잡아줄 것인가(高麗史 食貨志)”라고 탄식하면서 소를 올렸다.

공양왕 2년 9월 전제 개혁을 단행하게 된다. 그것은 점진적 개혁이나 개선이 아니라,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사르는 혁명적인 거사였다. 전제 개혁의 방법론에는 찬반론이 있었다.

이성계(李成桂)·정도전·윤소종(尹紹宗) 등은 찬성의 입장을 취하였다. 이색은 쉽게 고칠 수 없다고 반대했고, 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변안열(邊安烈)·권근·유백유(柳伯濡) 등은 이색과 같았다. 정몽주는 중도적 입장을 취하였다.

전제의 개혁은 구질서 체제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하는 혁명적인 사건인 만큼, 종래의 호족은 물론 당시의 사류들에게도 개량수정주의와 완전 개혁의 급진적 견해 사이에 방법론적 차이가 있었다. 양측간에는 정치적 충돌도 발생했고, 결과는 보수파의 패배와 급진파의 성공으로 끝났다.

⑧ 고려 말의 최종 단계에서 주자학파인 신진 사류들이 갈등·분열하게 되는 경위와 고려 유학의 종장이었던 정몽주의 위치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안향이 주자학을 전해와서 계도(啓導)한 이래 100여년간 이해하고 섭취하여 응용단계에 이르기까지 주자학을 닦은 신진사류들 가운데는 이렇다 할 갈등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개인적 취향은 달랐을지라도 숙폐(宿弊)를 개혁해 유교적 질서를 확립하고자 한 점에서는 모두가 일치하였다. 그러나 고려 말의 최후 단계에 이르러 노선의 차이가 생기고 대체로 양분되는 현상을 빚는다. 그 이유는 현실적인 대응 방식에 대한 이견에서 오는 것이었다.

위화도회군이 있었을 때, 고려에 충성을 하면서 개혁을 추진해야 한다는 경장론적 입장과, 고려의 명운(命運)이 다해 어쩔 수 없이 혁명으로 새 나라를 열어야 한다는 창업론적 견해의 갈등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우왕의 폐출과 창왕의 옹립 및 폐출에 따른 찬반과 이견, 토지 개혁안의 제청 및 시행에 대한 찬반과 갈등은 주자학파간의 심각한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실질적으로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불사르고 전국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신진 사대부 개개인의 처지와도 관계되는 사회 경제적인 문제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예민한 문제였다. 여기에서 보수와 진보의 세력으로 갈라지면서 귀양도 보내고 처벌도 하는 등 정치적으로 갈등하였다.

정몽주는 당시 유학의 종장으로서 대국적인 입장에서 매사에 신중하고 끝까지 견디며 용의가 주도하였다. 국내외의 어려운 사정을 모두 짊어지고, 명과 일본을 오가며 국가의 체통을 살렸다. 우왕과 창왕의 폐출을 찬성했고, 토지 개혁의 필요성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공양왕 2년(1390)에는 ≪주자가례≫의 실시, 오부학당과 지방향교 등 학교의 건립, 원복(元服)을 화복(華服)으로 바꾸고, 의창(義倉)을 두며, 다시 동 4년에는 신정률(新定律)을 제진하는 등, 내수외비(內修外備)로 왕실의 중흥을 꾀하고 국기(國基)를 다지고자 하였다.

정몽주는 고려의 충신으로서 고려의 사직(社稷)이 그 한 몸에 달려 있었다. 이성계는 문하시중(좌정승), 정몽주는 수문하시중(우정승)이었다.

정몽주는 왕씨(王氏) 고려를 끝내고 날로 권위가 높아가며 중외(中外)의 인심이 쏠리고 있는 이성계를 옹립·추대해야 한다는 조준·정도전·남은(南誾)·윤소종(尹紹宗) 등을 대간(臺諫)으로 하여금 탄핵하게 하였다. 이어 이성계까지 탄핵하려는 마지막 단계에서 오히려 급하게 반격을 받아 순절하게 되었다(공양왕 4년).

이러한 충격을 안은 채 같은해 7월 고려는 망하고 근세 조선조의 새로운 창업을 보게 된다. 조선의 건국에 반대하는 많은 유학자들이 고려 수절신(守節臣)으로 충절을 지켰으니 이들을 ‘두문동(杜門洞) 72현’이라고 일컫는다.

이로 보아 고려에 대한 국가적 인식과 궁극적 신뢰가 아직도 두꺼운 지층을 이루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사류는 양분되고 골이 깊어졌다.

그들은 모두 주자학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신진 사류였지만, 정몽주의 순절을 기리고 고려의 충신으로 남아 조선조에 협력을 거부하였던 이들은 길재의 계통으로서 의리파가 되고,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해 새 나라를 건설했던 정도전·조준·하륜 등의 참여파는 사공파(事功派)가 되어 조선 전기의 양대 계통을 형성하였다.

이제 고려시대의 유교를 돌이켜 보면서 총괄적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고려 태조는 사상적으로 당시 분열과 분파의 형세를 보이던 종파 사상을 폭넓게 받아들이고 이질적 요소들을 상보적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불교적 신앙과 교리·도교적 습속과 민간신앙·유교적 이념을 통합해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 발전의 토대로 삼았다.

국가의 차원에서 정치·교육·윤리적 측면과 경사(經史)와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 문화의 발달은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따라서 고려 전기(태조∼의종)를 유교문화의 진흥기요 융성기라 한다면, 고려 후기(명종∼공양왕)는 유교문화의 퇴락·침체기를 거쳐 주자학 시대가 열리는 전환기라고 볼 수 있다.

<이동준(李東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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