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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4-03-28 (일) 20:10
분 류 사전2
ㆍ조회: 3432      
[사상] 유교-조선전기의 유교 (민족)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세부항목

유교
유교(한국상고 및 삼국시대와 유교)
유교(고려시대와 유교)
유교(조선 전기와 유교)
유교(조선 중기와 유교)
유교(조선 후기의 유교)
유교(참고문헌)

먼저 조선조 창건 1세기를 놓고 볼 때 태조·태종의 30년 간은 조선이 건국되어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다지는 창업기(創業期)였고, 세종·세조·성종의 70년간은 나라의 발전을 이룩한 수성기(守成期)였고, 제2세기를 맞은 연산군·중종·명종의 70년간은 국정이 허물어지고 진통을 겪는 사화기(士禍期)였다.

조선조의 창업에 참여한 사공파(事功派)와 고려에 충절을 지켰던 의리파(義理派)가 맥을 달리했고, 세조의 즉위 후 훈구파(勳舊派)와 그에 반대했던 절의파(節義派)는 서로 어긋나게 되었다.

사공파는 훈구파에 연결되었고 의리파와 절의파는 비판의식으로 합치하였다. 건국 1세기 동안 세조의 찬탈이라는 정변을 겪으면서도 국가를 발전시키고 선치(善治)를 베풀어서 중흥을 이루었다.

한편 연산군 이후로는 국정이 피폐하고, 의리파인 사림(士林)이 등장해 훈구파와 대립해 4대 사화가 발생하는 등 위망(危亡)의 형상을 보였다. 고려 말이래 거듭된 사화를 겪으면서도 사림파는 일정한 세력을 유지해 중종대에 이르러서는 도학정치를 실시하는 등 주도적 세력이 되었다.

16세기 성리학의 발달은 한국철학의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전기의 창업 및 수성 과정에 있었던 주요 사항을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유교 이념에 입각한 법전의 편찬이다. 이이(李珥)는 〈만언봉사 萬言封事〉에서 “태조가 국운을 열고, 세종이 수성해 비로소 ≪경제육전≫을 활용했으며, 성종조에 이르러 ≪경국대전≫을 간행하였다. 그 뒤에도 수시로 입법하여 ‘속록’이라 이름 붙인 것은 그 시대를 따른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조선조의 법전 편찬은 ‘법전편찬왕조’라고 일컬을 정도로 높이 평가받는다. 태조대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을 제진했고, 다시 ≪경제문감 經濟文鑑≫을 지었다. 조준·하륜(河崙) 등은 ≪경제육전≫(1397)을 편찬하였다.

태종대에는 원(元) ≪속육전 續六典≫(1413), 세종대에는 ≪신찬경제속육전 新撰經濟續六典≫(1433)이 나왔다. 성종대에는 ≪경국대전≫(1471)이 완성되었고, ≪대전속록 大典續錄≫(1492)이 나왔다.

중종대에 ≪대전후속록 大典後續錄≫(1543), 명종대에 ≪경국대전주해≫(1555), 숙종대에 ≪수교집록 受敎輯錄≫(1698) 및 ≪전록통고 典錄通考≫(1706), 영조대에 ≪속대전≫(1746), 정조대에 ≪대전통편≫, 그리고 고종대에 ≪대전회통≫(1865) 등이 나왔다. 그 밖에도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를 만들어 조선조의 실정에 맞도록 의용(依用)하였다.

법전의 편찬은 기본적으로 유교의 이념과 경전사상에 준거하였다. 조선조는 유교 입국으로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을 보더라도 유교의 왕도정치적 이념이 가득 차 있다.

특히, 전문(前文)인 ‘정보위(正寶位)’와 ‘헌전총서(憲典摠序)’의 내용에는 유교의 경전사상이 주자학적 해석으로 서술되어 있다. 생민(生民)을 위한 인정(仁政)을 주자의 ‘인설(仁說)’에 의해 해명하였다.

서거정(徐居正)의 ≪경국대전≫ 서(序)에는 법전의 제작이 천지(天地)와 사시(四時)에 비길 수 있고, 주관(周官), ≪주례≫와 표리가 된다고 하였다.

이복원(李福源)의 ≪대전회통≫ 서에도 역시 육전(六典)의 명칭이 ≪주례≫에서 비롯되었고, 그 명칭이 수 천년이 되도록 바뀌지 않았던 것은 천지 사시에서 그 상(象)을 취해 관직헌장(官職憲章)에 적용했기 때문이며, ‘육(六)’은 ‘자연의 수(數)’이고 ‘전(典)’은 ‘당연의 칙(則)’이라고 하였다.

유교가 어떻게 국가적·사회적으로 응용될 수 있었는가를 고찰하는 데 법전의 탐구는 필수적 요소이다. 조선 초 창업의 단계부터 제작해 100년 이내에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을 완전히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뒷날 내우외환을 굳건히 이길 수 있는 준거가 되었다.

둘째 성균관과 향교를 건립해 선성·선현을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고, 학교 교육을 실시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고려시대에도 중앙에 국자감과 지방에 향학을 두었지만, 고려 말에 다시 확장·발전되었다.

조선조가 창건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태조 7년(1398)에 국도(國都)의 동북쪽에 성균관을 낙성하였다. 문묘에는 중국의 제현을 중국식 제도에 따라 종향했고, 동국의 제현은 고려 제도에 의해 종사(從祀)하였다. 태조 스스로 문성왕묘(文成王廟)에 친사했고 전례와 악기를 익히도록 하였다.

문묘 북쪽에는 명륜당(明倫堂)을 세우고, 성균관제조 정도전과 권근으로 하여금 4품 이하의 유사(儒士)들에게 경사(經史)를 강습하도록 하였다. 양현고도 다시 세워 유생의 공궤(供饋)를 담당하게 하였다.

태종은 허조(許稠)로 하여금 석전의(釋奠儀)를 바로잡도록 하였고 알성례(謁聖禮)를 행하였다. 세종은 즉위 초에 곤면복(袞冕服)으로 알성례를 행했고, 1421년(세종 3)에는 왕세자의 입학례(入學禮)를 행해 이것이 상례가 되었다.

1475년(성종 6)에는 성균관에 존경각(奠經閣)을 두어 오경사서(五經四書) 등의 전적을 비치했고, 1477년에는 친히 석전례(釋奠禮)를 드리고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1478년에도 ‘문선왕(文宣王)’에게 헌작하고 역시 대사례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종의 알성은 1474·1475·1477·1478·1480·1482·1485·1487·1488·1492·1493년에 걸쳐 보인다.

성균관은 고려시대의 국자감을 계승했지만, 조선시대에는 국가적인 의미와 비중이 훨씬 심대하였다. 국도에는 성균관 이외에 중·동·서·남·북의 5부학당(五部學堂)이 국초부터 설치되어 국고의 지원을 받았는데, 북학만은 세종대에 폐지되어 4학(四學)으로 남게 되었다.

향교는 고려 인종 5년(1127) 제주(諸州)에 학(學)을 세워 교도를 널리 행한데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의종 이후 국정이 문란해 학제가 퇴폐했지만, 충숙왕 때 다시 부흥시켰다. 조선조에 이르러 1392년(태조 1) 학교의 흥폐(興廢)로 지방관의 고과(考課)를 정하는 법을 세우자 교학이 쇄신되기 시작하였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향학(鄕學)을 부·목·군·현에 1개교씩 설치해 교수 또는 훈도(訓導)를 두고, 교생의 정원은 부·목 90, 도호부 70, 군 50, 현 30으로 되어 있었다. 1918년의 조사에 의하면 향교의 총수는 335개로 집계되어 있다.

향교는 성균관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공자묘인 대성전과 강당인 명륜당으로 되어 있는 점이 같다. 성균관과 향교는 성리학으로 학생들을 양성해 그들이 국가의 동량이 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그러나 중기에는 국정이 문란해져 향교는 마치 과거 준비장소처럼 변질되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오히려 서원이 발달하였다.

셋째 조선 전기에 이룩된 학술 문화의 원리로서의 유교사상과 주자학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아야 한다. 조선조의 창업과 더불어 참여와 충절로 갈라지고 이것이 사공파와 의리파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지만, 유교 국가를 건설하자는 뜻은 마찬가지였다. 조선조의 입장에서도 고려에 대한 충절 인정할 수 있었고, 고려 충신의 자제와 제자도 조선조에 출사하였다.

① 먼저 사공파의 경우이다. 정도전은 고려 말 유배시에(1375) 〈심문천답 心問天答〉이라는 짧은 글을 써서 천인관계(天人關係)와 인간의 도덕적 주체성을 강조해 선악응보를 넘어선 유가의 의리 정신을 기술하였다.

조선조가 창건된 뒤에 다시 〈심기리편 心氣理篇〉(1394)과 〈불씨잡변 佛氏雜辨〉(1398)을 지어 ‘이단’을 비판하였다. 〈불씨잡변〉에서는 불교의 윤회·인과·심성·훼기인륜(毁棄人倫)·지옥·화복·걸식·유불동이·벽이단(闢異端) 등 15편에 걸쳐 비판 이론을 전개하였다.

권근은 위의 두 책에 대한 상세한 주석을 붙였다. 그는 〈불씨잡변〉의 서에서 정도전은 맹자를 계승한 사람으로 “독립불구(獨立不懼)하며 정일자신(精一自信)하여 보통 사람 보다 크게 뛰어난 인재”라고 평하면서 스스로 존경심을 품고 배우고자 하였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경제문감≫ 등을 저술해 유교적 정교론(政敎論)을 적극적으로 펼쳤고, 〈불씨잡변〉 등으로 이단을 비판하고 유교 이념을 천명하였다. 이와 같은 이론 구성은 전적으로 주자의 성리철학에 기초한 것이다.

권근은 이색(李穡)의 제자이며, 조선조에 벼슬해 주로 문한(文翰)의 직에 있으면서 경국(經國)과 외교에 학술적으로 기여하였다.

≪양촌집 陽村集≫과 더불어 ≪입학도설 入學圖說≫·≪오경천견록 五經淺見錄≫·≪동국사략 東國史略≫·≪사서오경구결 四書五經口訣≫ 등을 저술하였으며, 경학과 사학 그리고 성리학을 겸통한 석학이었다.

그는 성리학을 받아들이면서도 독자적인 이론을 전개한 부분이 많았다. 특히 ≪입학도설≫과 ≪오경천견록≫은 후세에 두고두고 영향을 주었다. 정도전이 실질적인 경세론으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권근은 조선 초기에 있어서 학술적으로 크게 이바지하였다.

권근의 문인 권우(權遇)·변계량(卞季良)·맹사성(孟思誠)·허조(許稠)·김반(金泮)·김종리(金從理) 등은 태종·세종대에 활동하였다. 김반은 조용(趙庸)의 문인 윤상(尹祥)과 더불어 성균관에서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그들 가운데 신숙주(申叔舟)·이석형(李錫亨) 등은 세종·세조조의 문신으로 활약하였다.

김반은 ≪성리대전≫·≪이학제요 理學提要≫·≪역상도설 易象圖說≫·≪사서장도 四書章圖≫ 등의 문헌을 읽어서 저술했는데 ≪속입학도설 續入學圖說≫일 것으로 추정된다.

권채(權採)는 ≪입학도설≫이야말로 이학(理學)의 연원을 열어준 것으로 간주, 그것을 본떠 ≪작성도 作聖圖≫와 ≪도설 圖說≫을 지었다. 권근의 ≪입학도설≫은 후세의 정지운(鄭之雲)·김인후(金麟厚)·이황(李滉)·기대승(奇大升) 등에 의해 작성된 각종의 천명도(天命圖)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② 의리파는 정몽주 이후 길재―김숙자―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진다.

길재는 권근의 제자였지만 정몽주에게도 배웠고, 학풍으로 보아 정몽주를 계승한 의리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조가 건국되자 은퇴하여 세상의 영욕에서 벗어나 향리에서 사숙(私塾)을 열어 학문과 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는 유교의 기본 덕목인 효·제·충·신·예의·염치를 중시해 스스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조선조 의리사상의 귀감으로 높이 추앙을 받았다.

김숙자는 길재의 문인으로 세종조에 성균관사예에 이르렀다. 세조가 즉위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는 세종에게 척불소(斥佛疏)를 올려 불교를 끌어들이는 것을 반대했고, ‘학규(學規)’를 지어 학문의 순차를 순서 있게 규정함으로써 정통적 유교 교육의 준범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김숙자는 강호로 돌아갔으나 그의 학문은 아들 종직에게 계승되었다.

김종직의 높은 문명은 특히 성종의 사랑을 받았다. 그의 문하에서 김굉필·정여창(鄭汝昌)을 비롯해 김일손(金馹孫)·남효온(南孝溫)·강희맹(姜希孟) 같은 수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성종의 호문숭유(好文崇儒)에 힘입어 출사하였다. 이에 기존의 훈구파와 대립하는 형국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한편 정몽주와 길재의 문하였던 조용과 그의 제자 윤상(尹祥)은 성균관의 박사 및 장관으로 수 십년 간 재임하며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③ 세종조에는 유교사상을 기반으로 학술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다. 세종은 성왕이자 학자였다. 1420년 왕립연구소인 ‘집현전’을 설치해 인재를 선발하고, 수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재위 32년간 인문·사회·자연·과학을 망라한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룩한 업적은 세계적인 것이었다.

세종은 개인적 차원에서 불교를 숭상하고 불전도 간행했지만, 유교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이는 그의 ≪동호문답 東湖問答≫에서 “세종의 성스러우심은 전조(前朝)에 없었던 바이다. 국가를 안정시켜 정사가 때에 잘 맞았다. 유교를 숭상해(崇儒重道) 인재를 양육했으며, 예악을 제작해 후손에게 잘 살 수 있는 길을 터놓았으니, 우리 나라의 다스림이 여기서 융성하였다. 오늘에 이르도록 그 유택(遺澤)이 남아 있으니, 우리 나라 만년의 운이 세종에게서 처음 그 기틀이 잡힌 것이다.”고 하여 세종의 위업을 기리고 있다.

세종대에는 계파와 학맥에 관계없이 모두 합심해 국가 발전과 학술 문화의 진흥에 힘썼다. 실제로 세종은 경사(經史)와 제자서를 두루 읽었으며, 그 가운데서 사서오경을 중시하였다.

세종은 경연에서 “나는 제자백가의 글을 원하지 않고, 다만 사서오경과 ≪통감강목≫만을 돌려가면서 강독하기 바란다(세종실록 5년 9월).”고 하였다.

또한 ≪주역≫·≪성리대전≫과 관련한 경연의 기사가 나오고, 또 세종 스스로 “여러 차례……그 내용을 읽어보면 자세하고 정밀해 실로 남김이 없다. ……특히 궁리 공부에는 사서오경과 ≪성리대전≫이 더할 나위 없다.”고 하면서 중국에까지 종이와 먹을 보내 인쇄해올 방도를 강구하였다.

과거에도 사서오경 및 그 주석과 성리서가 들어와 탐구되었지만, 그와 같이 방대하게 체계적으로 집대성된 성리서가 전해온 것은 세종 초년에 이르러서였다.

명나라의 성조인 영락제(永樂帝) 13년(1415)에 ≪영락대전 永樂大全≫(일명 五經大全·四書大全·性理大全)이 완성되었는데, 이것이 처음 조선에 전해진 것은 4년 뒤인 세종 1년(1419) 12월 7일이었다.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던 경녕군(敬寧君)이 찬성 정역(鄭易), 형조판서 홍여방(洪汝方) 등과 함께 가지고 왔던 것이다.

세종 초기부터 유학 연구에 종전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집현전의 직제는 정1품으로부터 정9품에 이르며, 영전사(領殿事) 정1품, 대제학 정2품, 제학 종2품(이상 겸관), 그리고 부제학 정3품으로 했을 만큼 권위와 비중을 두었다.

세종대로부터 세조 2년에 이르기까지 집현전의 경력을 가진 학자가 90여 명에 달하고 있으니 당대의 명인들 대부분이 집현전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세종조에 이루어진 사업으로서 유교의 의례(儀禮)와 제도의 정비·서적의 편찬·음률의 제정·인정(仁政)의 실시·경사·천문·지리·의학 등 이루어놓은 업적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그 가운데 잘 짜여진 구조 원리에 입각한 훈민정음의 창제는 민족의 주체적 언어에 활로를 연 것이었다.

훈민정음은 사람의 발음기관의 “형상을 본떴으되 글자 모양은 고전(古篆)과 같게 하였다(象形而字倣古篆).”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에 의하면, 그 구조 원리가 음양오행과 삼재사상(三才思想) 및 ≪주역≫과 송대의 성리학에 기본하고 있다. 유교의 학술 사상을 주체적으로 응용해 만들어낸 최대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④ 세조의 즉위와 관련된 훈구파(勳舊派)와 절의파(節義派)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세조∼성종 연간에는 세종조의 치적을 계승해 중요한 치적을 많이 남겼다.

세조 때에 시작해 성종대에 완성된 ≪경국대전≫과 최초의 통사(通史)인 ≪동국통감≫이 간행(1484)되었다. 세조대에는 ≪국조보감≫·≪동국지도 東國地圖≫의 편찬, 호적제도와 보법(保法)에 의한 국방 체제의 정비, 직전법(職田法)의 실시, ≪역학계몽요해 易學啓蒙要解≫와 ≪오륜록 五倫錄≫의 찬수 및 기타 수많은 업적을 이룩하였다.

성종대에도 성균관에 존경각과 양현고를 설치하고, 향교에 지원을 확충했고, 세조 때에 없어진 집현전을 대신할 수 있도록 홍문관을 개편해 신진 사류를 영입하였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악학궤범≫·≪국조오례의≫·≪삼국사절요≫·≪동문선≫ 등을 찬술하는 등 건국 이래의 문화 전통을 집대성하였다.

세조 이후에도 계속 국사에 참여했던 현실주의적 훈신구가(勳臣舊家)들은 국가로부터 예우와 은전을 받았으며, 뒷날 훈구파를 형성하였다. 정인지(鄭麟趾)·최항(崔恒)·어효첨(魚孝瞻)·신숙주·이석형(李石亨)·양성지(梁誠之)·권람(權擥)·정창손(鄭昌孫)·서거정·이극감(李克堪)·한계희(韓繼喜)·노사신(盧思愼) 등이 많은 인물들이 있었다.

한편 계유정란에 이어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를 찬탈하는 충격적 사건이 일어났고(1455), 단종의 복위가 실패함으로써 사육신과 70여 명의 연류된 피죄인이 나오게 되었다.

온갖 희생과 죽음으로 항거한 사육신으로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그리고 끝까지 지조를 지켰던 생육신으로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 등이 있다. 그들 절의파의 불 같은 기개와 항거 정신은 뒷날에까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조선 전기 훈구파들의 실무적 공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그들의 현실주의적인 처신은 도덕적 비판의 여지를 안고 있었다. 훈구파의 맞은 편에는 고려말 이래 의리파와 세조 이후 절의파의 정신이 흐르고 있었다.

조선조 전기의 나머지 70년 간, 즉 연산군∼명종 연간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훈구 및 사림의 대립과 4대 사화 발생하였다. 세종∼성종 연간에 이루어진 유교 문화의 성취는 연산군대에 와서 크게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무오사화(1498)는 공신계열인 훈구파와 의리를 주장했던 사림파가 대립에서 발생하였다. 김일손이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편입했던 것을 빌미로 훈구파인 이극돈(李克墩)이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연산군을 자극해 의리파를 숙청하였다.

갑자사화는 왕실의 인척인 임사홍(任士洪)과 신수근(愼守勤)에 의해 일어났다. 그들은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의 사사(賜死)를 들추어 정부의 훈구 제신과 잔존 사림까지를 잔혹하게 처치하였다. 의리파를 무력하게 만든 상황에서 연산군의 횡음(橫淫)은 극에 달하였다. 성균관은 연락(宴樂)의 장소가 되었고 원각사는 기생들의 거처가 되었다.

중종반정이 전직 및 현직 훈구 대신에 의해 일어났다. 중종은 피화자(被禍者)를 신원했고 사림을 등용해 무너진 기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신진 사류에 의한 도학정치(道學政治)가 실시되어 나라는 일시에 중흥지세(中興之勢)로 나아갔다.

그러나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에 의해 기묘사화(1519)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일시의 사류가 희생되었다. 전대미문의 ‘지치중흥의 성업(聖業)’은 꺾이고 말았다.

기묘사화 이후 심정과 김안로(金安老)가 번갈아 전횡하고 난 뒤 중종 만년에는 기묘명현 등의 사림이 다시 복권되었다. 김정국(金正國)·이언적(李彦迪)·이황 등 사림파가 진출했고, 조광조의 직(職)도 추복(追復)되었다. 또한 현량과도 다시 설치하는 등 유풍(儒風)을 회복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명종 즉위 년에는 윤임(尹任)·윤원형(尹元衡)의 정쟁으로 말미암아 비판 세력이었던 사림은 또 다시 수난을 당하였다.

외척인 윤원형의 주모로 정순붕(鄭順朋)·이기(李咬)·임백령(林百齡)·허자(許磁) 등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유관(柳灌)·유인숙(柳仁淑) 등 수많은 사류가 죽었다.

그 뒤 5, 6년에 걸쳐 100여 명에 달하는 사인(士人)이 죽거나 쫓겨났다. 따라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윤원형의 20년 간을 암흑시대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기묘·을사사화를 거치면서 사림은 뜻을 펴지 못하고 향촌에 물러나서 학문을 닦았다. 이것을 계기로 16세기에 수많은 성리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둘째 도학사상과 성리학의 발달이다. 도학은 넓은 의미에서 송대 성리학을 일컫는 것이다. 유교의 정통적 의미에서의 진유(眞儒)란 성현의 도와 제왕의 법을 아우른 내성외왕(內聖外王)을 성취한 자를 뜻한다.

이이는 ‘행도(行道)와 수교(垂敎)’의 진퇴론(進退論)으로 진유를 규정하였다. 그는 우리 나라 도학의 시작은 조광조이며, 이황에 와서 유자의 모습이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조광조는 김종직·김굉필의 학맥을 이었고, 성균관에서는 유숭조(柳崇祖)에게 수학하였다.

김굉필은 실천 위주의 학문에 힘썼다. 스스로를 신칙하고, 후생을 훈도하고, 유도를 흥기시키는데 힘썼다. 입조(立朝)해서는 바른말을 하다가 무오사화로 유배당했고, 또 갑자사화로 희생되었다. 김굉필의 문하에는 조광조 이외에 김안국(金安國)·김정국·이장곤(李長坤) 등이 있었다.

유숭조는 성균관의 사장(師長)으로서 후학을 계도했고 도학정치의 실현을 목표로 이론을 전개하다가 갑자사화 때 유배되었다. 그는 ≪성리연원촬요 性理淵源撮要≫와 ≪대학잠 大學箴≫ 등을 저술해 이기사칠론(理氣四七論)에 대해 체계적으로 서술하였다.

조광조는 청년 학자로서 사림의 영수가 되었던 적도 있었다. 또한 성리학과 도학 정신을 현실 정치에 실현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이이는 그의 ≪경연일기≫에서 “문정(文正)이 비록 진퇴의 기(幾)에는 투철하지 못했지만, 이로부터 이학(理學)이 으뜸이며, 왕도가 귀하고 패도가 천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유교(斯道)에 불멸(不滅)의 공이 있다. 후인들이 우러러봄이 태산북두(泰山北斗)와 같다.”, “우리 나라에 이학이 전함이 없더니 전조(前朝)의 정몽주가 비로소 그 단서를 열었고 아조(我朝)의 김굉필이 실마리를 잡았지만 크게 갖추지는 못하였다. 조광조가 창도(倡道)하매 학자들이 다함께 추존(推尊)하였다. 오늘의 성리학이 있는 것은 광조의 힘이다.”고 하였다.

이이의 말처럼 조광조는 우리 나라 도학의 ‘태산북두’였다. 조광조는 도학을 진작시키기 위해 김굉필·정여창 등을 추숭(推崇)하여야 한다고 하였고, 정몽주를 문묘에 종사하도록 하였다.

이언적은 유교의 경학과 성리학을 이론적으로 논술한 대학자였다. 그는 ≪대학장구보유≫·〈속대학혹문〉·≪중용구경연의 中庸九經衍義≫·≪구인록 求仁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일찍이 도가적 입장에 서 있는 조한보(曺漢輔)와 무극태극 논변을 통해 유교의 본령을 성리학적으로 전개하였다. 이황은 이언적이 유도를 천명해 후세에 드리운(立言垂後) 공을 높게 평가하였다.

서경덕(徐敬德)은 우리 나라의 독특한 기철학자이다. 그는 성리학이 왕성한 시대에 기(氣)의 실재성을 강조했고, 기의 사실성을 떠난 관념만의 추상화를 부정했던 유기론자였다.

그는 〈원이기 原理氣〉·〈이기설 理氣說〉·〈태허설 太虛說〉·〈귀신사생론 鬼神死生論〉 등의 철학적 저술을 하였다. 그의 기수지학(氣數之學)을 포함한 자연철학은 자득(自得)한 경지가 있지만, 이황은 그의 자득한 바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의 철학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이황은 우리 나라의 위대한 성리학자로 숭앙받고 있다. 그의 생애는 대부분 사화로 점철되었다. 출생 3년 전에 무오사화, 4세에 갑자사화, 19세에 기묘사화, 45세에 을사사화가 있었다. 또한 명종 20년간의 어두운 세월을 지냈다.

그는 조정에 서기보다는 물러나 학문을 닦고자 하였다. 50세 이후에는 학문에 주력해 수많은 저술과 편찬을 남겼다. ≪역학계몽전의 易學啓蒙傳疑≫·≪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송계원명이학통록 宋季元明理學通錄≫·≪성학십도 聖學十圖≫ 등은 그의 역저이다.

그는 주자학에 거슬리는 학문에 대해 이단사설(異端邪說)을 논해 배척하였다. 〈비이기위일물변증 非理氣爲一物辨證〉·〈전습록논변 傳習錄論辨〉·〈심무체용론 心無體用論〉 등이 그것이다.

만년에 기대승과 7년에 걸쳐 사칠 논변을 전개하였다. 이 때 이황은 후세에도 크게 영향을 미쳤던 ‘이발이기수(理發而氣隨)’와 ‘기발이이승(氣發而理乘)’의 호발설(互發說)을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인간성의 존귀성을 확신해 이존설(理尊說)을 주장하였다.

68세에 선조에게 도학사상이 담긴 ≪성학십도≫를 제진했는데 여기에서 이황은 천인합일에 바탕해 경(敬思想)을 수양의 핵심으로 삼았다. 공맹·정주(程朱)·조선조의 주자학적 전통을 종합하였던 그는 정치 현장에 나아가기 보다 학문과 교육을 통해 성리학을 전파하였다.

또한 이황은 많은 사람들과 끊임없는 서신왕래를 하여 감화를 주었고, 당대의 조야와 사림으로부터 존경과 흠모를 받았다. 그로부터 많은 제자들이 나와 나중에 영남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황과 동시대 학자로서 조식(曺植)을 들 수 있다. 그는 산림처사로서 세속에 휩쓸리지 않는 선비의 청고(淸高)한 지조와 세사(世事)의 오류를 추상같이 질타하는 늠름한 기상을 보여주었다.

그는 성리학 밖에도 노장을 포함해 경사자집을 섭렵하였다. 학술적 저작으로는 ≪학기유편 學記類編≫을 남겼다. 그의 문하에서 오건(吳健)·정구(鄭逑)·최영경(崔永慶)·김우옹(金宇裵)·정인홍(鄭仁弘) 등이 나왔다.

이항(李恒)·김인후(金麟厚)·노수신(盧守愼)·기대승 등은 이황과 함께 이기심성설 등을 논의하였다. 그들은 이기(理氣)와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일원적으로 보느냐 이원적으로 보느냐에 따라 주장을 달리하였다. 혹은 출처와 인격을 두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또한 조광조의 문인이었던 성혼(成渾)의 아버지 성수침(成守琛)은 ‘성덕군자(成德君子)’의 모범으로 일컬어진다. 그는 유교의 덕행인 ‘입덕(立德)·입공(立功)·입언(立言)’을 실천하였다.

이이는 “학문은 서경덕이 깊고 덕기(德器)는 성수침이 넉넉하다.”고 했고, 성혼은 “일세의 인물로서는 성수침이 제일이다.”고 하였다.

조선조 전기에는 세조의 즉위와 4대 사화 같은 정변과 화난(禍難)을 겪으면서도 고려시대의 모습을 일신해 유교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그 결과 주자학적 경세론과 도학정치가 실시되었고, 많은 성리학자들에 의해 이기심성에 대한 연구가 깊어졌다.

<이동준(李東俊)>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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