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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01-05-12 (토) 22:13
분 류 사찰
ㆍ조회: 3330      
[금산사, 법주사]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2
[최완수의 우리문화 바로보기 23] 토착 미륵신앙의 땅, 금산사와 법주사 2
최완수 < 간송미술관 연구실장 >

신동아 / 2001년 5월호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과 토착 미륵신앙

그렇다면 기름진 들녘에 살면서 풍요로운 물산으로 넉넉한 살림을 자유롭게 꾸려가던 백제 사람들이 신라에게 나라를 빼앗긴 뒤 수탈과 압제, 멸시와 구박 속에서 꿰미에 꿰인 개구리처럼 죽지 못해 살아가는 이 고통의 현실을 어떻게 희망으로 바꿔놓을 수 있단 말인가. 진표는 그 방법을 ‘점찰선악업보경’에서 찾으려 하였다.

우선 절망적인 현실의 고통이 어디에 연유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점을 치고 그 원인이 규명되면 그 원인을 해소하기 위해 극한적인 망신참(亡身懺; 몸을 잊을 만큼 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가하여 이를 이겨냄으로써 과거의 죄악을 씻어내는 참회법)을 행하고 나서 희망의 성취 여부를 묻는 점을 다시 쳐서 미래의 희망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백제 유민들에게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은 가르침이 아닐 수 없었다. 절망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방법을 강구해낸 것이다. 그러니 징개맹갱이뜰에서 희망없이 살던 백제 유민들이 어찌 여왕벌을 만난 벌떼처럼 진표율사를 따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제 진표율사가 어떻게 해서 이 ‘점찰선악업보경’과 인연을 맺게 되며 그 내용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진표는 스스로 출가한 다음 개구리를 고통스럽게 한 일을 참회하기 위해 온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미륵보살이 직접 계법(戒法)을 전수해주기를 간절히 기원했다고 한다.

전신을 계속 치고 받으며 밤낮 없이 일심으로 망신참을 수련하자 7일 밤이 지나면서부터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첫 7일 밤이 지난 다음날 새벽에 지장(地藏)보살이 나타나 손으로 금지팡이를 흔들어 진표가 계법과 인연이 있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두 번째 7일이 지나자 귀신이 나타나 무서운 형상을 지으면서 진표를 바위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는데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는다. 그리고 세 번째 7일에 이르자 미륵보살이 나타나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법 구하는 열의를 칭찬하고 3법의(三法衣)와 질그릇으로 만든 발우를 몸소 진표에게 전해주었다.

그리고 또 진표라는 이름을 내려주며 무릎 밑에서 두 개의 물건을 꺼내 주는데 상아도 아니고 옥도 아니나 첨대(籤대; 점칠 때 쓰는 댓조각) 모양이었다. 하나에는 9(九)자가 다른 하나에는 8(八)자가 쓰여 있다. 이를 주면서 당부하기를 만약 사람들이 계법을 구하려고 하면 반드시 먼저 죄를 참회하고 나서 점을 치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108대의 첨대를 더 주면서 계를 구하러 오는 이들이 90일이나 40일 혹은 21일 동안 참회하고 정진하여 기한이 차면 부처님 앞에 나아가 108첨대와 2개의 첨대를 공중에 던져 점을 쳐보게 하라고 가르쳐준다. 그리고 8이라는 것은 새로 얻는 것이고 9라는 것은 본래 있던 계라는 의미라고 일러준다.

위와 같은 내용은 ‘점찰선악업보경’과 상당히 비슷한 내용이다. ‘송고승전’에서는 위와 같이 미륵보살이 직접 진표에게 그 내용 일부를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진표전간(眞表傳簡; 진표에게 점대를 전해주다)’에서는 미륵보살이 직접 진표에게 ‘점찰경’ 양권과 과보를 증명해주는 간자(簡子; 점대) 189개를 전해주었다 하고 있다. 표현을 좀더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내용을 옮겨보겠다.

“그 스승(숭제법사)이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가서 선도(善導) 삼장에게 수업하였다. 그런 뒤에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꿈에 뵙고 5계를 받았다.’ ‘얼마나 부지런히 닦으면 되겠습니까?’ 하고 진표가 묻자, ‘정성이 지극하면 1년이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숭제가 대답한다. 진표가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선계산(仙溪山) 부사의암(不思議庵)에 머물면서 삼업(三業; 身, 口, 意 3업과 善, 惡, 不記業 3업 등 여러 종류의 3업이 있다)을 널리 수련하는데 망신참(亡身懺)으로 방도(方道)를 삼았다.

처음 일곱 밤으로 기한을 삼고 전신을 돌에 부딪치니 무릎과 팔뚝이 모두 부서져 피가 바위 절벽으로 흘러내렸다. 성인의 반응이 없는 듯하여 몸을 버리려고 뜻을 세우고 다시 7일을 기약하여 두 번째 7일을 마치자 지장보살이 나타나 정계(淨戒)를 내려준다. 곧 개원 28년(효성왕 4년, 740) 경진 3월15일 진시(辰時)였다. 그때 나이 23세였다.

그러나 뜻이 자씨(慈氏, 미륵보살)에 있었기 때문에 감히 중지하지 못하고 영산사(靈山寺, 일명 변산 또는 능가산)로 옮겨서 정성과 용맹을 처음처럼 하니 과연 미륵이 감응하여 ‘점찰경’ 양권과 과보를 증명하는 간자(簡子; 점대) 189개를 내려주며 이렇게 말한다.

‘이중에서 제8간자는 새로 얻는 묘계(妙戒)를 의미하는 것이고 제9간자는 일찍이 얻었던 계의 기본틀(戒具)을 의미한다. 이 두 간자는 내 손가락 뼈이고 나머지는 모두 침단목(沈檀木, 침향목)으로 만들었으니 여러 번뇌를 의미하는 것이다. 너는 이로써 세상에 법을 전하여 사람을 건네주는 나룻배와 뗏목을 만들도록 하라.’”

진표가 부안 선계산 부사의암에서 23세에 ‘점찰경’ 2권과 점찰간자 189개를 미륵보살에게 직접 전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8간자와 제9간자는 미륵보살의 손가락뼈(과거 석가세존의 제자였을 때의 육신의 뼈마디라고 이해해야 할 듯)라는 것이다. ‘송고승전’에서 8, 9 두 개의 간자가 뼈도 아니고 옥도 아니었다고 한 것에서 한 걸음 더 진전한 표현이다.

108간자가 189간자로 된 것도 ‘점찰경’의 내용을 정확히 이해하고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발연사석비’에서는 진표의 스승인 금산사 순제법사가 진표에게 이 ‘점찰선악업보경’ 2권을 주면서 이 경전을 가지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의 양 성인 앞에 나아가서 간절하게 참회하며 구하면 계법을 전해줄 터이니 이를 세상에 전하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 진표가 27세 되던 해인 상원(上元) 원년(760, 경덕왕 19년) 경자에 쌀 20말을 쪄서 가루로 만들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서 쌀 다섯 홉을 하루 식량으로 삼아 미륵보살상 앞에서 계법을 부지런히 구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어도 수기(授記)를 받을 수 없어 분을 내어 바위 아래로 떨어지니 홀연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손으로 받아서 바위 위에 올려놓는다. 다시 소원을 발하여 삼칠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수련하면서 바위를 때리는 참회를 하자 3일에 이르러 손과 팔뚝이 부러져 떨어진다. 제7일 밤에 이르러 지장보살이 손으로 금지팡이를 흔들며 와서 쓰다듬는데 손과 팔이 예전과 같다.

지장보살이 가사와 발우를 주므로 진표는 그 감응에 감사하여 더욱 정진을 배로 늘려 삼칠일을 채우니 바로 천안(天眼)이 열리어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오는 것이 보인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함께 와서 진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신명(身命)을 아끼지 않고 계본 구하는 것을 칭찬하며 지장보살은 계본을 내려주고 미륵보살은 제8, 제9 간자를 내려주었다. 그때가 경덕왕 21년(762) 임인이었다.

연대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점찰경’의 구득 경로가 서로 다르나 ‘점찰경’을 가지고 점치는 점찰간자를 미륵에게 직접 받았다는 사실에서는 세 기록이 모두 일치하고 있다. 진표가 특히 제8간자와 제9간자를 중심으로 한 108, 혹은 189개의 점찰 간자를 미륵으로부터 전수받았다는 것은 모두 사실로 받아들인 듯하다.

이는 백제 지역, 특히 익산 미륵사 지역을 중심으로 이미 미륵신앙이 철저하게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사실 ‘점찰선악업보경’과 미륵보살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점찰선악업보경’은 ‘지장보살업보경(地藏菩薩業報經)’ ‘지장보살경’ 등으로 불리는 것으로 당 현장이 영휘 2년(651)에 번역한 ‘대승대집지장십륜경(大乘大集地藏十輪經)’ 10권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장안(長安) 4년(704)에 번역한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2권과 함께 지장삼부경(地藏三部經)으로 불리는 지장신앙의 중심경전이다.

그런데 진표에 의해서 미륵보살이 이 경전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된다. 미륵보살이 진표에게 이 경전을 직접 전수해주었다거나 189간자를 전수해주었다 하여 미륵신앙과의 접합을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백제 유민식 미륵신앙에 ‘점찰경’ 참회점찰 수행방법이 가미되면서 망신참(亡身懺)과 같은 극단적인 자해참법이 첨가된 것이니 이는 우리 민족다운 미륵신앙 형태의 시초라 할 것이다.

본래 ‘점찰선악업보경’은 상하 2권으로 되어 있는데 말법(末法)시대의 악세(惡世) 박복(薄福)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으로 과거의 선악 업보와 현재 미래의 길흉화복을 점쳐서 그것이 흉수일 경우 지장보살에게 예배 공양하고 참회하는 의식을 거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게 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점치는 방법은 나무토막 6개를 4면으로 다듬어 한 면은 공면으로 남겨두고 3면에만 차례로 1, 2, 3과 4, 5, 6 등을 써나가 18에 이르게 하고 이를 세 번 던져서 합산한 숫자를 가지고 해당 숫자의 점대를 뽑아 점을 친다. 최고 숫자인 3, 6, 9, 12, 15, 18이 연속 3번 나와 합산되면 189가 되므로 189개의 점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 ‘점찰경’은 수나라 때(589∼618년) 천축 삼장 보리등(菩提燈)이 번역했다 하는데 수 문제 개황(開皇) 17년(597)에 비장방(費長房)이 지은 ‘역대삼보기’ 권12에서는 개황 13년(593)에 위경(僞經; 가짜 경전)으로 분류돼 조정에서 유포를 금하였다 한다. 그 뒤 당 고종 인덕(麟德) 원년(664) 도선(道宣)이 지은 ‘대당내전록(大唐內傳錄)’에서도 계속 위경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러나 측천무후 천책만세(天冊萬歲) 원년(695)에 명전(明佺) 등이 편찬한 ‘대주간정중경목록(大周刊定衆經目錄)’ 권1에서는 정경(正經)으로 인정받아 칙명을 받들어 간행된다. 그래서 당 현종 개원 18년(730)에 지승(智昇) 등이 편찬한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에서도 정경에 포함시키고 그 경위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미륵의 땅, 금산사(金山寺)와 법주사(法住寺)

‘발연사석비’에서는 계속 이렇게 말하고 있다.

“경덕왕 21년(762) 임인 4월27일 진표율사가 점찰교법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양성(兩聖)으로부터 전수하고 나서 금산사를 중창하려고 산을 내려오게 되었다. 대연진(大淵津)에 이르니 갑자기 용왕이 나타나서 옥(玉)가사를 꺼내 바치고 8만 권속을 거느리고 시위하여 금산사로 간다. 그러자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 안 가서 이를 이루어냈다.

다시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와서 진표율사에게 계법(戒法) 전해주는 것을 감득하고 율사는 시주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 권고하여 미륵장륙상을 구리로 부어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미륵이 내려와 계법을 전해주는 성대한 광경도 금당(金堂) 남쪽 벽에 그렸다. 상은 갑진(甲辰, 경덕왕 23년, 764) 6월9일에 주성(鑄成; 부어 만듦)하고 병오(丙午) 5월1일에 금당에 안치하니 이 해가 대력(大曆) 원년(766, 혜공왕 2년)이었다.”

이를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경덕왕 19년(760)에 27세로 변산 부사의방에서 망신참을 결행하여 지장보살로부터 가사와 발우 및 계본을 전수하고 다시 용맹정진을 더하여 미륵보살에게 점찰간자(점대)를 받는데 제8, 제9간자는 미륵의 손가락뼈로 만든 것이었다. 제8은 새로 얻는 계법을 의미하고 제9는 이미 있는 근본 계법을 의미하는데 이 점찰간자들은 과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어서 진표는 현재의 몸을 버리고 나면 대국왕의 몸을 받고 뒤에는 미륵이 상생해 있는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진표가 이런 가르침을 받는 것이 경덕왕 21년(762) 임인 4월27일인데 그 후에 곧바로 내려와 금산사를 중창하기 시작했다 하니 진표 29세 때다.

다시 2년 뒤인 경덕왕 23년(764) 갑진 6월9일에 미륵장륙상을 주성하였고 2년 뒤인 혜공왕 2년(766) 병오 5월1일에 이를 금당에 봉안했다 한다. 진표 33세 때 일이다. 이때 만든 미륵장륙입상의 대좌라고 생각되는 석연대(石蓮臺)(도판 3)가 보물 23호로 지정되어 현재도 금산사 마당에 남아 있다. ‘발연사석비’는 계속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금산사 중창과 미륵보살상 조성을 끝마친 진표율사는 금산사를 나와 속리산(俗離山)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소가 끄는 수레에 탄 사람을 만났는데 그 소들이 율사를 향해 무릎을 꿇고 운다. 수레에 탄 사람이 내려와 다음과 같이 묻는다. ‘무슨 까닭으로 이 소들이 화상을 보고 울며 화상은 어디서 오는가.’ 진표율사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금산사에 사는 진표라는 승려다. 나는 일찍이 변산 부사의방에 들어가 미륵, 지장 양성 앞에서 계법과 진짜 점대를 직접 전해 받았다. 절을 지어 이를 머물러 두고 오래 수도할 곳을 찾으려고 왔다. 이 소들은 겉으로는 미련한 듯하나 속이 밝아서 내가 계법을 받은 것을 알고 법을 존중하기 위해 무릎 꿇고 울었다.’ 그 사람이 듣고 이렇게 말했다. ‘축생도 오히려 이와 같은 신심이 있는데 하물며 내가 사람이 되어서 어찌 무심할 수 있는가’ 하고 곧 손으로 낫을 집어 스스로 머리칼을 자른다.

진표율사는 자비심으로 다시 머리를 깎고 계를 주었다. 속리산 골짜기에 이르러 길상초(吉祥草)가 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곳을 표시해두었다. 돌이켜 명주(溟州, 강릉) 해변으로 서서히 나아가니 물고기와 거북 자라 등이 바다에서 나와 율사 앞으로 온다. 몸을 대 육지와 같이 하므로 율사는 밟고 바다로 들어가 계법을 읊고 되돌아 나왔다.

더 가서 고성군(高城郡)에 이르러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으로 들어가 발연수(淵藪, 藪는 寺와 같은 의미)를 창건하고 점찰법회를 열며 7년을 머물렀다(772년, 40세). 그때에 명주 경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렸는데 율사가 그들을 위해 계법을 설하니 사람마다 받들어 지키고 삼보(三寶; 佛, 法, 僧)를 공경하기에 이르렀다.

조금 있다가 고성 해변에 무수한 어류가 스스로 죽어 나오므로 백성들이 이를 팔아 식량을 삼아 죽음을 면하였다. 율사는 발연사를 나와 다시 부사의방에 이르고 그런 후에 고향으로 가 부친을 뵌 다음 진문대덕방(眞門大德房; 진씨들이 세운 원찰인 듯)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때에 속리산 대덕(大德)인 영심(永深)과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함께 율사가 있는 곳을 찾아와 이렇게 청한다. ‘우리가 천리를 멀다 하지 않고 와서 계법을 구하니 원컨대 법문(法門)을 전해주십시오.’ 율사가 아무 말 없이 대답하지 않으니 세 사람은 복숭아나무로 올라가서 거꾸로 땅에 떨어지는 등 용맹하게 참회를 한다. 율사는 이에 교법을 전하고 관정(灌頂)한 다음 드디어 가사와 발우,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 1권, ‘점찰선악업보경’ 2권, 189점대를 주었다.

다시 미륵의 진짜 점대인 제9와 제8 점대를 주며 이렇게 경계하였다.

‘9라는 것은 이미 법을 삼고 있는 것이고 8이라는 것은 새로 얻는 성불종자(成佛種子; 대각을 이루는 씨앗)이다. 내가 이미 너희에게 부탁하였으니 이를 가지고 속리산으로 돌아가라. 산에 길상초가 난 곳이 있을 터인데 여기에 절을 짓고 이 교법(敎法)에 의지해서 사람과 하늘을 널리 제도하며 후세에 퍼뜨리도록 하라.’

영심 등이 가르침을 받들고 곧장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 나 있는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이름을 길상사라 하였다. 영심은 여기서 점찰법회를 처음 베풀었다. 율사는 부친과 더불어 다시 발연사에 이르러 함께 도업(道業)을 닦다가 효도를 끝마치었다.”

진표는 어째서 금산사 중창을 마친 다음 곧바로 속리산으로 향했을까. 미륵, 지장 양대 보살로부터 받은 신물(神物)을 오래 보관할 만한 절을 짓기 위해 갔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속리산의 지세를 살펴보자. 한반도의 등골을 이루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백두산에서 일어나 개마고원으로 함경도의 중앙을 뚫고 내려오다 그 분수령에서 동해변으로 다가들어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을 일으키고, 태백산에 이르러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륙으로 들어오다가 한반도의 남쪽 중심부에 이르러 정기를 모아 불쑥 솟구쳐낸 영산(靈山)이 바로 속리산이다.

여기서 남쪽으로 휘어져 내린 줄기는 덕유산, 지리산으로 이어져 영호남을 나눈다. 북쪽으로 치고 올라간 줄기는 안성 칠현산에 이르러 한 가닥은 계속 북진하여 한남정맥(漢南正脈)을 이루어 과천 관악산에서 끝나고, 한 가닥은 서남진하여 금북정맥(錦北正脈)을 이루니 보령 성주산에서 끝을 맺는다.

그래서 오대산 이남 태백산 이서로부터 속리산의 북쪽 물까지 모두 모아서 남한강으로 몰아오게 되며,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이 되고, 동남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서, 국토의 절반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3대강의 공동 발원처를 이룬다.

이에 대체로 산맥과 수맥에 의해 나뉘어 있던 삼국시대에는 삼국의 세력이 자연 이곳에서 부딪게 되었다. 백제가 한강 유역까지 장악하였을 때는 백제 영토가 됐고, 고구려가 남진하면서는 고구려의 남쪽 변경이 됐으며,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하면서는 또한 그 영토가 되었다. 그래서 삼국시대에는 삼국 쟁패의 요충지가 되어 항상 전쟁에 시달리는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이곳에 대가람을 건립하는 것은 어느 쪽에서도 생각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진표율사는 삼국시대 내내 전쟁에 시달리느라 피폐할 대로 피폐해진 이곳 백성들에게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점찰교법을 펼칠 제2 후보지로 이곳을 택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더구나 통일된 신라왕국에서는 산맥과 수맥의 중심에 위치해 사통팔달의 정점에 있음에랴! 그래서 길상초가 나 있는 곳을 대가람터로 점찍어 두고 영종 등 제자들에게 미륵, 지장 양대 보살로부터 전수한 점찰 간자와 계본 및 ‘점찰경’ 등을 주어 보내며 대찰을 건립하게 하니, 그곳이 당시 길상사로 불리던 법주사(法住寺)였던 것이다(도판 5). 법이 머무는 절이라는 의미의 법주사라는 이름이 진표가 영심에게 전해준 법보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과 연관지어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일이다.

그래서 법주사에서는 불국시대에 조성되었으리라고 생각되는 국보 5호 쌍사자석등(도판 4)과 국보 64호 석연지(石蓮池, 도판 6) 등 창건 당시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진표전간’에 의하면 진표가 금강산 일대까지 교화하고 나자 그 소문이 경덕왕에게까지 전해져서 경덕왕이 진표율사를 왕궁으로 맞아들인다. 보살계를 받기 위해서였다. 이때 왕비를 비롯한 왕실의 비빈과 내외 친족도 모두 보살계 제자가 되었다. 그래서 경덕왕은 벼 7만 7000석을 시주하고 비빈과 왕실 내외 친족들은 비단 500필과 황금 50냥을 시주하였다.

진표율사는 이를 모두 받아가지고 인연 있는 여러 산에 나누어주어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하니, 영심 등이 법주사를 창건하는 데도 이런 왕실의 시주가 큰 몫을 차지하였을 것이다. 사실 이 재물은 백제 유민들이 수탈당한 것을 일부나마 찾아온 것일 뿐이었다.

법주사에도 초창기부터 미륵장륙상이 동으로 만들어져 산호전(珊瑚殿)에 봉안되어 있었다 하나 정유재란(1597)에 불타서 파괴되었다. 금산사 미륵장륙동상과 같은 운명을 맞이한 것이다.

그래서 금산사 미륵장륙상이 국보 62호 3층 미륵전(도판 7) 안에 36척(약 10.8m) 높이로 1938년 복원 조성되는 것과 같이 법주사 미륵장륙상도 산호전 터에 100척(약 30m) 높이로 1939년 복원 조성되었다(도판 8). 모두 동경미술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하고 돌아온 현대조각가 김복진(金復鎭)이 조성한 것으로 금산사 미륵장륙상은 석고로 조성하였고 법주사 미륵장륙상은 시멘트를 재료로 사용하였다.

이때는 일제가 창씨개명과 조선어 사용 금지 등으로 우리 문화를 말살하려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자행하던 시기였다. 이런 절망의 순간에 진표율사가 금산사와 법주사에 묻어둔 미륵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던 것이다. 그래서 모악산 금산사와 속리산 법주사는 영원히 미륵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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