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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14 (화) 09:09
분 류 사전2
ㆍ조회: 494      
[고려] 전민변정사업 (브리)
전민변정사업 田民辨整事業

고려 후기 사급전(賜給田)과 농장의 발달에 따라 권세가들이 토지나 농민을 탈점함으로써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이들을 추쇄(推刷)환본(還本)하기 위해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등의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벌였던 사업.

12세기 이래 농민들은 권세가의 농장 확대로 인해 토지를 탈점당했고, 원간섭기에 이르러서는 정치혼란과 과렴(科斂) 등으로 과도하게 수탈당했다. 따라서 농민의 대규모 유망이 발생했는데, 유망민들은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권세가와 국왕 및 왕실의 부속 기관들이 차지했던 농장에 투탁하여 전호화되어 국가의 수취 체제에서 이탈, 국가재정을 위협했다.

따라서 국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탈점된 토지를 본주인들에게 돌려주고 노비가 된 자들은 다시 양인으로 환원시켜 민생의 안정과 재정 수취를 도모하는 전민변정사업을 했다. 이러한 전민변정사업은 대체로 3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시기는 무인 집권기이다. 이 시기는 몽골과의 전쟁으로 민이 유망하고 토지가 황폐하여 조세가 불균등해지자 이전의 호적이나 양안(量案)으로는 수취가 불가능해졌다. 또한 권세가들은 여전히 황무지 개간을 빙자하여 공전 사전의 탈점과 투탁을 통한 농장의 확대를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따라서 1269년(원종 10)에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고 호구를 재조사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공부를 정했다. 이 사업은 정부가 전민 문제로 인한 국가 재정의 심각성을 인식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며, 정치적으로는 최씨 무인 정권을 몰락시키고 집권한 김준(金俊) 정권의 경제 기반을 제거하기 위해 임연(林衍)ㆍ임유무(林惟茂) 부자가 실시한 것이었다.

제2시기는 충렬왕 이후부터 공민왕 이전의 원간섭기이다. 이때는 본격적인 원간섭기로 정치가 파행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원  관계에 따른 비용의 마련 등으로 국가 재정은 고갈되어갔다. 이와 관련하여 충렬왕대에는 1288(충렬왕 14), 1298, 1301년에 각각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그 가운데 1301년에 설치된 도감은 성격이 달랐다. 당시는 원의 간섭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일본 정벌과 같은 대규모의 사업이 진행되면서 심지어 고려 국내의 문제인 노비법을 개정하고자 원나라 정동행성평장사 활리길사에 의해 노비들이 속량된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고려 지배층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쳐 결국 1301년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속량된 노비들을 추쇄하여 본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충숙왕대에는 1318(충숙왕 5), 1320, 1321년에 찰리변위도감(察理辨違都監)과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이 각각 설치되었다. 당시 이 사업의 주체는 국왕이었으며 그 대상은 권문세가들과 원나라와 긴밀했던 기관들이었다. 그러나 최고 지배층의 공신사전(功臣賜田)과 홀치[忽赤], 순군(巡軍) 등 국왕과 긴밀했던 기관들에 대해서는 전민변정사업을 적극적으로 할 수 없었다.

충목왕대의 전민변정사업은 1347년(충목왕 3) 2월에 설치된 정치도감(整治都監)의 정치관들이 주체가 되어 전개되었다. 정치관들은 대부분 가문의 배경이 없는 과거 출신자들로, 권문세가들과 원을 배경으로 등장한 환관 세력(宦官勢力)들을 대상으로 전개되다가 친원 세력의 방해를 받고 실패했다.

이때의 전민변정사업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가 주체였으므로 반원적인 성격으로 이해되기도 하나 사실상 원의 지원을 받아 실시되었다. 즉 당시의 전민변정사업은 역대 국왕들이 교서의 형식을 통하여 제시했으며 그 활동은 전민변정도감 등 임시 관청에 의해 이루어졌고, 이는 원의 지원을 받은 국왕의 즉위나 복위 등 대체로 정치적인 재편기에 실시되었다.

당시 원은 고려 국왕을 통하여 고려를 지배하고자 했으며 국왕 역시 중요한 정치 기반은 원의 지원이었다. 따라서 원의 지원을 받은 국왕이 즉위 또는 복위하는 과정에서 교서를 반포하면서 전민 사업을 시행한 것은 '개혁 정치'가 크게 원의 고려 지배 전략에 부응하는 성격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려 사회의 모순이 워낙 커서 국가 체제의 유지가 힘들 정도였으므로, 원나라의 간섭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국왕 및 신진 관료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 국가 체제를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컸다.

제3시기는 원의 영향력이 쇠퇴하던 공민왕 이후이다. 공민왕대에는 1352(공민왕 1), 1356, 1366년에 각각 전민변정도감이 설치되었다. 이 가운데 1366년 5월 신돈(辛旽)의 주청에 의해 설치된 전민변정도감이 주목된다. 공민왕은 즉위 이후 대륙의 정세 변동에 따른 원의 약화를 이용하여 변발(髮)호복(胡服)을 풀고 정방(政房) 혁파, 지정연호(至正年號)의 사용 정지, 관제 개혁 등 반원 정책을 단행했고 기씨(奇氏) 등 친원 정치 세력을 제거했다.

공민왕은 1365년에 실권자였던 최영(催塋)을 계림윤(鷄林尹)으로 폄출하는 등 일군의 무장 세력을 거세시키는 한편 신돈을 등용하여 정치 권력을 새롭게 재편성했다. 이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전민의 추쇄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했다. 즉 그는 1365년 가뭄과 관련하여 세워졌던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의 기능을 확대 전환하여 명칭도 전민변정도감으로 바꾸고, 자신이 판사가 되어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함으로써 권문세가들이 탈점한 토지와 노비에 대해 개경은 15일, 지방은 40일의 기간을 정해 자진 신고하도록 했다.

신돈이 추진한 전민변정사업은 국가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했으며, 당시 일반 민중으로부터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각 정치 세력들의 이해와 크게 어긋나 신돈이 실각하면서 이 개혁 작업도 와해되었다. 결국 몇 차례의 전민변정사업으로는 고려 사회의 근본적인 해결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고려 말기에는 사전의 혁파를 주장하는 개혁파들이 등장하여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뒤 새로운 개혁 정치를 단행했다.

<전병무(田炳武) 글>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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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전반 개혁정치의 내용과 그 성격 <역사와 현실> 7 : 권영국, 역사비평사, 1992
고려 공민왕의 반원적 개혁정치에 대한 일고찰 <진단학보> 68 : 민현구, 진단학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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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CD GX], 한국브리태니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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