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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8-31 (화)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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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조회: 456      
[고려] 2군6위=이군육위 (민족)
2군 6위

이군 二軍

관련항목 : 육위

고려 전기의 중앙군 조직.

응양군(鷹揚軍 : 控鶴軍)과 용호군(龍虎軍 : 牽龍軍)의 2군을 일컫는 것으로 6위(六衛)와 함께 8위로도 불리는 등 고려 경군(京軍)의 핵심 부대였다.

근간이 되는 부대는 태조가 거느리던 중심 부대의 하나인 3군 중 중군(中軍 : 祐天軍ㆍ天武軍ㆍ杆天軍)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근거는 중군과 2군의 병력수가 같다는 데 있다.

그러나 2군이 직제상으로 확립되어 6위와 같이 중앙군을 형성한 시기는 현종 때이며, 특히 거란 침입 이후로 보인다. 2군은 친위군으로 왕의 근시를 담당했는데, 동일한 기능을 가진 집단을 둘로 나눈 이유는 불분명하다. 특히 이들이 근장(近仗)이라고도 불린 것으로도 6위보다 우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2군 내에서는 응양군이 용호군보다 우위에 있었다. 응양군의 장(長)을 반주(班主)라 해 무반의 우두머리로 삼았던 것을 보면 거의 확실한 사실이다. 2군의 규모는 응양군이 1영(領), 용호군이 2영으로 모두 3영이었다. 1영은 고려시대의 기본적인 부대 단위로서 1,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2군의 병원(兵員)의 수는 모두 3,000명에 달한다.

이 숫자는 6위가 42영 4만 2,000명이라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적은 숫자이지만 실제로 이들은 국왕과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소속의 무반보다 정권에 참여하는 데 보다 유리한 지위에 있었다.

편제는 6위와 마찬가지로 각 군에 상ㆍ대장군이 1인씩이며, 그 아래에 각 영의 실질적인 지휘관인 장군이 1인씩 배치되어 있었다. 그 밑으로 중랑장ㆍ낭장ㆍ별장ㆍ산원ㆍ오위(伍尉, 일명 校尉)ㆍ대정(隊正)을 두었다.

소속된 군인은 군반 씨족(軍班氏族)이라 해 군인전(軍人田)을 지급받는 세습 신분이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해서 당의 부병제가 변형된 형태로 보려는 견해도 있다. → 육위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初期의 軍人田(姜晉哲, 淑明女子大學校論文集 3, 1963), 高麗京軍考(李基白,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高麗兵制史硏究, 一潮閣, 1968), 한국사 5(국사편찬위원회, 1975), 高麗兵制管見(內藤雋輔, 靑丘學叢 15ㆍ16ㆍ18, 1934).


육위 六衛

고려 전기의 중앙군 조직.

좌우위(左右衛)ㆍ신호위(神虎衛)ㆍ흥위위(興威衛)ㆍ금오위(金吾衛)ㆍ천우위(千牛衛)ㆍ감문위 (監門衛)를 일컫는 것으로, 이군(二軍)과 함께 팔위(八衛)로 불리는 등 고려 경군(京軍)의 핵심을 이루었다. 이군과 마찬가지로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기 위해 전쟁에 동원했던 군대가 그 기간이 되었다.

[설립 경위]

태조가 거느리고 있던 군대ㆍ병력은 송악의 성주였던 태조 자신이 보유한 독립된 군대, 패강진(浿江鎭)ㆍ혈구진(穴口鎭)의 병력, 태봉의 군대, 지방의 성주들이 거느린 병력 등이었다. 이들 가운데 본래 송악 지방에 있던 태조의 기간군대와 그의 지휘 밑에 있던 여러 요소의 군대는 중앙군으로 편성되었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의 중앙군인 경군 편성의 면모는 일찍이 태조가 견훤의 항복을 계기로 후백제의 신검(神劍)을 쳐서 통일을 완성할 때의 군사 대진 편제와 후대의 경군과 대비함으로써 엿볼 수 있다.

태조가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신검과 최후의 결전을 할 때에는 중군(中軍)ㆍ좌강(左綱)ㆍ우강(右綱)의 삼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 편제는 마군(馬軍)과 보군(步軍)으로, 보군은 지천군(支天軍)ㆍ보천군(補川軍)ㆍ우천군(祐天軍)ㆍ천무군(天武軍)ㆍ간천군(杆天軍) 등 오군으로 구성되었다.

오군은 일시적인 편제라기보다 태조 당시 중앙군의 편성일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중군을 형성하고 있던 우천군ㆍ천무군ㆍ간천군은 태조의 친위군이었을 것이고, 또 각 군은 1천명으로서 모두 3천명이었다.

한편 후일 왕의 친위군인 응양(鷹揚)ㆍ용호(龍虎)의 이군 역시 도합 3영 3천명으로서 서로 병원(兵員)이 같다. 이러한 점에서 전자의 삼군이 뒤에 이군을 형성하게 하는 어떤 연관성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지천군ㆍ보천군의 이군은 마군과 함께 후일 육위의 모체가 되었다고 추측된다.

좌강ㆍ우강은 비록 임시적인 부대 치라고 보겠으나 좌위ㆍ우위와의 연관을 생각할 수 있으며, 또 병원수는 각기 약 4만씩으로 서로 비슷한 점도 주목된다. 이러한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태조가 거느리던 군대가 이군 육위로 새롭게 편제될 때, 육위와 이군는 이 각기 시기를 달리해 형성되었다. 우선 육위는 995년(성종 14)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해에는 중앙ㆍ지방의 관제가 대폭 정리되었는데, 이와 더불어 군사 조직의 정비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 때 군사 조직 정비의 목적은, 첫째, 지방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私兵)을 해체해 그들의 독자적인 병권을 박탈하는 데 있었으며, 둘째, 태조 이래의 중앙군을 개편하는 데 있었다. 태조의 부장들이 거느리던 군대는 그들의 사병과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이것을 국왕의 지휘를 받는 국군으로 개편해야만 하였다.

984년 군인의 복색을 정하고, 998년(성종 7)에는 태조 때 군적(軍籍)에 있던 자와 그 자손만을 군적에 남겨 군제의 인적 자원을 정비하였다. 이어 990년 좌우군영(左右軍營)을 설치해 중앙군을 좌위와 우위의 두 편제로 나누었다. 이를 기반으로 육위가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998년(목종 1) 전시과(田柴科)의 지급 대상자 규정 속에 육위나 제위(諸衛)의 존재가 발견되고 있다. 육위와 더불어 이군을 설치함으로써 고려의 경군은 그 편제를 완비하게 되었다. 이군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태조 때의 친위군이 광종대에 더욱 강화되었다가 성종 때 일단 축소되고, 현종 때쯤 이군으로 정비된 것이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현종 때에는 거란의 침입, 김훈(金訓)ㆍ최질(崔質)의 반란 등을 겪으면서 특히 궁성의 시위군(侍衛軍)을 강화하고 그것을 확고히 조직해야 할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임무와 조직]

이군 육위의 임무와 조직을 보면, 실제에 있어서 임무 분장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군인 응양군ㆍ용호군은 공학군(控鶴軍)ㆍ견룡군(牽龍軍)이라고도 불렀던 것 같으며, 궁성을 지키는 친위군으로서 그 군액은 3영, 3천명이었다.

이들은 궁성을 지키면서 국왕을 시위하는 임무를 지닌 관계로 국왕과 가까이 할 기회를 자주 가져 출세에 매우 유리하였다. 더욱이 이군 소속의 무반들은 다른 소속의 무반보다 정권에 참여할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무신란 때의 정중부(鄭仲夫)가 견룡군 출신이었으며, 그와 함께 거사한 이의방(李義方)ㆍ이고(李高) 역시 견룡군의 장교였던 것은 이를 입증하고 있다. 이군은 육위보다 우위를 차지하였다.

특히 응양군의 지휘관인 상장군(上將軍)은 반주(班主)라 하여 이군 육위의 상장군ㆍ대장군으로 구성된 중방회의(重房會議)의 의장이 되었으며, 무반의 대표자 노릇을 하였다. 한편, 육위는 경군의 중심을 이루는 부대였다. 병원수에서도 경군 45영, 4만5천명 가운데 육위가 42영, 4만2천명으로써 전체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육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좌우ㆍ신호ㆍ흥위의 삼위였다. 이 삼위는 32영, 3만2천명으로 전체 경군의 70% 이상을 차지하였다. 그러므로 이들을 다른 위와 구별해 삼위라고도 하였다. 이들 삼위는 국왕의 행차에 대한 호가(扈駕), 외국 사신의 송영(送迎) 등을 비롯해 국가의 중요 행사에 참여하였다.

또한 출정(出征)과 방수(防戍)의 임무를 띠고, 전쟁이 일어나면 전군을 지휘할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전투가 없을 때에는 군사 훈련이나 방수, 토목 공사에 동원되었다. 삼위에 속해 있는 정용(精勇)ㆍ보승(保勝)은 마군ㆍ보군의 병종(兵種) 구분이며, 전투의 핵심이 되었으므로 삼위가 이군 육위의 중심 부대였음을 알 수 있다.

삼위 외에 금오위는 수도의 치안을 담당한 경찰 부대였다. 뒤에 명칭이 비순위(備巡衛)로 바뀌기도 하였다. 천우위는 국왕을 시종하는 의장대(儀仗隊)였다. 상령ㆍ해령의 구별이 있어 육상ㆍ수상에서 각기 의장대의 임무를 띤 것이라고 보인다.

감문위는 궁성 안팎의 여러 문을 지키는 수문군(守門軍)이었다. 여기에는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휴가병이나 노병 또는 환자병을 소속시키기도 하였다. 이군육위는 그 조직 밑에 영(領) 이하의 하위 단위 부대를 편성해, 하급 장교를 그 지휘관으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단위 부대장들의 회의 제도가 따로 구성되어 있었다. 1영은 1천명이 정원이었으나 실제로는 결원이 많아 6백명 정도였다. 이러한 고려의 군사 체제를 계통적으로 조사하면 [표 3]과 같다.

[성격상의 문제]

고려는 중앙군의 편제에 있어 당나라의 부병제(府兵制)를 받아들이고 있었는가의 문제이다. 먼저 육위의 명칭은 당의 중앙군과 비슷한 점이 많아 육위에 편제된 군인을 흔히 부병이라고 불렀다.

당의 경우 부병은 지방의 절충부(折衝府) 소속 재향군인을 가리키는 것으로, 서울에 와서 근무하는 군인은 위사(衛士)라 하여 고려와 용어상의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다만, 고려에서는 절충부라는 군사조직이 성종 때 존재하였다.

여기에는 절충도위(折衝都尉)ㆍ과의(果毅)ㆍ별장(別將) 등의 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당과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의 절충부는 당나라와 같이 지방에 설치되지 않고 중앙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성종은 당나라의 부병제를 채택해 지방의 호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군대를 중앙 정부의 지배 밑에 편제하려 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성종의 이러한 계획은 계획만으로 그치고 말았다.

이와 같이 고려의 중앙 군제는 당나라의 부병제를 일시 참조했으나, 그들의 독자적인 군반 씨족제를 정비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중앙 군제는 기본적으로 당나라의 부병제를 수용했다고 파악하고, 당의 부병제의 실태와 변형된 점이 있다 하여도 이를 부병제로서 파악하려는 연구도 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初期의 軍人田(姜晉哲, 淑明女子大學校論文集 3, 1963), 高麗京軍考(李基白, 李丙燾博士華甲紀念論叢, 1956 ; 高麗兵制史硏究, 1968), 한국사 5(국사편찬위원회, 1975), 高麗兵制管見(內藤雋輔, 靑丘學叢 15ㆍ16, 1984).

<이희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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