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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8-29 (일) 08:14
분 류 사전2
ㆍ조회: 400      
[고려] 상서성 (민족)
상서성(尙書省)

고려 시대 3성(三省)의 하나로 백관을 총령하던 중앙 관청.

태조 때 태봉의 관제에 따라 광평성(廣評省)ㆍ내봉성(內奉省)을 두고 그 뒤 내의성(內議省)을 설치해 최고의 정무 기관으로서 3성의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국초의 3성은 뒤에 성종 때 당제(唐制)를 모방해 설치한 3성과는 성격상 많은 차이가 있다.

≪고려사≫ 백관지에는 982년(성종 1) 3월 광평성을 어사도성(御事都省)으로 고치고, 995년(성종 14) 9월 상서도성으로 고쳤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내의ㆍ광평ㆍ내봉의 3성을 도식적으로 성종ㆍ문종대의 내사(중서)ㆍ문하ㆍ상서의 3성으로 직결시키는 것은 약간의 문제가 있다.

그것은 ≪삼국사기≫에 궁예 관제의 내봉성을 지금의 도성이라고 말하고 있고, ≪고려사≫ 백관지에도 역시 이와 같은 내용을 소주(小註)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광평성은 신라의 집사성(執事省) 기구를 계승해 태봉을 거쳐 고려에 내려오고, 또 병부(兵部)ㆍ창부(倉部)ㆍ의형대(義刑臺)ㆍ도항사(都航司) 등의 국무 분담 기관도 구제에 따라 계속되고 있어 6전 체계는 아니었다.

또 ≪고려사≫ 백관지에 국초부터 선관ㆍ병관ㆍ민관ㆍ형관ㆍ예관ㆍ공관의 어사육관(御事六官)이 있었다고 하지만, 이는 982년(성종 1) 3월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국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국초의 3성을 편의상 성종 때의 3성에 결부시켜 생각해 볼 수는 있겠지만, 국초에 당제를 본받아 3성을 설치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당제에 의한 고려의 3성제는 성종 때 성립되었지만, ≪고려사≫ 백관지는 문종 관제를 기본으로 그 관서의 조직과 구성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은 3성제를 비롯한 고려의 모든 제도가 문종대에 일단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문종 관제에 의한 상서성의 기본 조직은 상서도성과 6부 및 2속사(屬司) 였다. 그러나 상서성제가 처음 성립된 982년 3월에는 어사도성ㆍ9속사 였고, 1011년(현종 2)에 7속사가 혁파되면서 상서도성ㆍ6부ㆍ2속사로 축소되었다.

그러므로 상서도성에는 6부, 즉 상서이부ㆍ상서병부ㆍ상서호부ㆍ상서형부ㆍ상서예부ㆍ상서공부가 딸려 있었고, 상서이부는 고공사(考功司)를, 상서형부는 도관(都官)을 속사로 거느리고 있었다. 상서도성에는 2품 이상의 재상 4인, 즉 상서령(尙書令), 좌ㆍ우복야(左右僕射), 지성사(知省事)들이 있었다.

이들이 모두 상서도성에 속하고 있는 것은 상서성에 있어서의 도성의 지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더욱이, 도성의 장관인 상서령은 중서령(中書令), 문하시중(門下侍中)과 함께 최고 관품인 종1품이고, 좌ㆍ우복야, 지성사도 중서문하성의 평장사(平章事)와 동렬적인 위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이들 재신을 분석해보면 도성의 지위는 반드시 그렇지도 않았다. 먼저 상서령은 실직이 아니라 주로 종친에게 수여하는 작직(爵職)이었고, 좌ㆍ우복야는 중서문하성의 재신이나 중추원(中樞院)의 추신(樞臣)보다도 하위에 놓여 재상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

오히려 좌ㆍ우복야는 육부상서와 함께 팔좌(八座)로 통칭되어 재상 계열보다는 6상서 계열에 들어 있었다. 이러한 좌ㆍ우복야의 낮은 지위의 대우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복야직의 비실직성(非實職性)이다. 좌ㆍ우복야 가운데에는 실제로 도성에서 시무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비실무직으로 이용된 예가 많았다. 이러한 점은 지성사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말하면, 상서령은 허직(虛職)이고, 좌ㆍ우복야와 지성사는 재상에 포함되지 못했으며, 더욱이 실무직이 아닌 한직인 경우가 많았다. 한편, 도성 밑에 속해 있는 상서육부의 장관인 상서가 정3품직으로서 재상에 포함되지 않고 있는 것은 법제적으로 6부가 조정(朝政)에 참여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부상서가 비록 조정에 참석하지 못했지만, 정3품직 가운데에서도 특히 팔좌로서 재추(宰樞)로 올라가는 준직(准職)이었다는 점에 6부의 지위가 상당했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상서6부의 지위를 돋보이게 하는 것은 판사겸직제(判事兼職制)이다.

즉, 중서문하성의 재신은 6부의 판사를 겸하게 되어(중추원의 추신은 판사를 겸하지 못함.) 수상은 이부, 아상(亞相)은 병부 등 그 반차에 따라 6부의 장관인 상서의 위에 앉아 그 직무를 감독하였다. 이 재신의 육부판사직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재신판사가 직접 각 부의 사무를 감독, 지휘하는 실질적인 제도였던 것이다.

3성체제 아래서 상서성은 제도상 6부를 영속(領屬)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서성의 재신이 재신으로의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또 중서문하성의 재신이 판사겸직제를 통해 6부를 지배하고 있어서, 실질적으로는 6부상서가 중서문하성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상서성이 배관을 총령한다고 한 것은, 그 권한을 중서문하성의 참지정사(參知政事) 이하의 재신이 겸하고, 또 6부상서를 중추원의 추신이 겸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등은, 상서도성의 무력화와 6부의 독립성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상서육부는 도성이 아니라 오히려 중서문하성의 재신과 중추원의 추신을 통해 왕과 직결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상서도성이 아무런 일도 맡지 않는 허설아문(虛設衙門)은 아니었다.

좌ㆍ우복야 이하 9인의 정원(正員)과 2인의 도사(都事) 및 39인이나 되는 이속을 거느리고 있어, 나름대로 많은 일을 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에 나타난 직무를 추려보면, ① 6부를 비롯한 경사(京司)에서 주현으로 발송하는 공문, ② 주ㆍ부ㆍ군ㆍ현의 노인사설(老人賜設), ③ 경기를 비롯한 여러 주ㆍ현의 관장(管掌), ④ 외교문서의 작성ㆍ발송과 이 밖에 의형(議刑)ㆍ영조거애(迎詔擧哀)ㆍ재계(齋戒)ㆍ기우(祈雨)ㆍ장리(長吏)의 인사, 향공(鄕貢) 등을 관장하였다.

이것을 보면 상서도성은 정무의 처리에 발언권이 있는 권력 기구가 못 되고, 국가 행사의 주관, 공문의 발송 같은 것 등을 맡는 사무 관청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상서성은 그 뒤 1275년(충렬왕 1) 10월 중서문하성에 병합되어 첨의부로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時代 中央政治機構의 行政體系-尙書省 機構를 중심으로-(邊太燮,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朝鮮初期의 宗親府(金成俊, 韓國中世政治法制史硏究, 一潮閣, 1985).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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