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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1 (수) 07:46
분 류 사전2
ㆍ조회: 398      
[고려] 이자겸의 난 (민족)
이자겸의 난 李資謙-亂

고려 인종 때 외척 권세가이던 이자겸이 왕권의 약화를 틈타 왕위를 찬탈하려던 반란. 척준경(拓俊京)과 그의 군사적 배경이 연계되었기 때문에 이ㆍ척의 난이라고도 한다.

고려의 문벌 귀족들은 왕권을 견제하면서 그들의 특권적 지위를 보장받기 위해 과거제도ㆍ전시과ㆍ녹봉제 등을 정비하였다. 과거에 의한 관직의 진출과 더불어 음서 제도와 같은 특권을 통해 가문의 지위를 높였다.

또 사전(賜田)ㆍ공음전(功蔭田) 등의 특권적 경제 기반 위에 토지의 개간이나 겸병 등으로 사전을 확대함으로써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키워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의 귀족적 특권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국가에 대한 어떠한 공훈보다도 왕실과의 혼인 관계가 가장 중요했다.

왕실과 혼인 관계를 거듭 맺음으로써 그들의 권세와 부귀는 더욱 강대해지고 번성해 갔다. 그들은 고려 초기부터 왕이 남매나 친족끼리 겹쳐서 혼인하던 관습을 이용해 일족의 변칙적 세력 확대를 꾀하였다.

고려 초기 이래 외척 중에서는 인주 이씨(仁州李氏 : 慶源李氏)의 세력이 가장 강대했다. 그들은 문종 이후 7대 80여 년 동안 왕실과 중복되는 혼인 관계를 맺어 후비ㆍ귀빈을 거의 독점적으로 들여보내 왕자ㆍ왕녀가 거의 그들의 외손이었다. 이씨 일문은 이자겸 때에 와서 세력의 절정기를 맞는다.

이자겸은 어린 외손자 인종을 옹립하고 정권을 좌지우지했으며 마침내 왕권을 능가할 만큼 세력이 비대하여 갔다. 이는 왕을 시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반란으로까지 발전되었다. 이렇게 정권을 둘러싸고 왕실과 외척ㆍ귀족 관료 사이에 대립과 항쟁이 격화되면서 귀족 사회의 지배 체제는 붕괴의 길로 나아갔다.

인주 이씨가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이허겸(李許謙) 때부터이다. 그의 딸이 안산 김씨(安山金氏) 은부(殷傅)의 아내가 되고 그가 낳은 두 딸이 모두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이 때부터 귀족 가문의 일원이 되어 손자 이자연(李子淵) 때에는 안효국대부인(安孝國大夫人 : 자연의 고모)의 손자가 덕종ㆍ정종ㆍ문종으로 이어져 영달의 길을 걷게 되었다. 또 자연의 세 딸이 문종의 왕비로 들어가게 된 것도 이와 깊은 관련을 가진다. 그 뒤 인종 때까지 왕들은 모두 이자연의 딸인 인예왕후의 혈통이었으며, 숙종을 제외한 왕들의 비 또한 인주이씨로 그 일문의 권세는 비할 데 없이 막강해졌다.

선종이 죽은 뒤 그의 아들 헌종이 나이가 어리고 몸이 약해 모후인 사숙태후(思肅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이자연의 손자인 자의(資義)는 중추원사(中樞院使)로서 그의 누이 원신궁주(元信宮主)와 선종에게서 낳은 한산후 균(漢山侯浮)을 왕위에 계승시키고자 하였다. 당시 종실에서는 계림공 희(鷄林公熙 : 뒤의 숙종) 등 이른바 헌종의 오숙(五叔)이 왕위를 넘겨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비해 이자의는 많은 재화를 비축하고 사병을 양성하며 한산후의 추대를 공언하고 있었다. 이 때 계림공은 기선을 제압하고 이자의의 세력을 분쇄해 실권을 잡고 드디어 헌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숙종은 인주이씨가 아닌 유씨 왕후를 맞이하게 된 듯하다. 이는 인주 이씨의 외척으로부터 벗어나 왕권을 강화시키려던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숙종의 아들인 예종이 이자겸의 딸을 왕비로 맞이함으로써 다시 인주 이씨와 왕실은 결연하게 된다.

이자의와 종형제 사이인 이자겸의 딸과 숙종의 아들인 예종과의 결연은 왕실에 대한 인주 이씨의 강력한 유대를 나타내고 있다. 예종 비 문경황후(文敬王后)는 자겸의 딸이며 인종의 모후이다. 자겸은 그의 딸을 왕비로 들여보냄으로써 갑자기 영달하게 되었다.

예종이 재위 17년 만에 죽자 태자 해(楷)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왕의 여러 아우들이 왕위를 넘겨다보았다. 자겸은 1122년 외손인 태자를 받들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에 자겸은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이라는 호를 받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가 되어 확고한 세력기반을 다졌다.

어린 왕을 받들고 실권을 쥔 자겸은 자기 세력권에서 벗어난 이는 백방으로 중상하고 제거했으며, 그의 족속을 요직에 배치하고 벼슬을 팔아 세력을 확대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그의 세력은 당시 병권을 배경으로 한 척준경 세력과 야합하였다.

척준경은 그가 추종하던 자겸과 결별하기 직전에 판병부사로서 자겸의 아들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지미(之美)와 함께 병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척준경이 자겸의 아들 지원(之元)의 장인이었기 때문에 이ㆍ척 양가의 유대는 매우 깊어졌다.

당시 고려에 온 송나라의 서긍(徐兢)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였다. 즉 인종이 즉위하던 해 12월 이자겸 일파는 왕의 작은아버지 대방공(帶方公)이 왕위를 찬탈하려고 문하시랑 한안인(韓安仁), 추밀사 문공인(文公仁)과 함께 모역을 꾀했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예부상서 이영(李永), 이부시랑 정극영(鄭克永), 병부시랑 임존(林存) 등 10여 명이 동조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이자겸 일파에게 체포되어 살해되었으며 유배된 자가 수백 명이었다는 것이다.

이자겸과 그 일파는 결국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이들에게 왕위 찬탈의 음모를 꾀했다고 누명을 씌워 숙청한 것이다. 하지만 서긍의 기록은 당시 집권 세력인 이자겸 일파의 주장을 듣고 그대로 적은 데 지나지 않는다. 이자겸에 의해 숙청된 한안인ㆍ이영ㆍ문공인ㆍ정극영 등은 출신 신분이 거의 모두 향리 자제로서 중앙으로 진출한 신진 관료들이었다.

이들은 오랜 문벌 귀족으로 뿌리를 내린 이자겸 일파와 대립하고 있었던 듯하다. 한안인 등 지방출신 신진 관료들의 숙청에 이어 1124년(인종 2)에는 동지추밀원사 최홍재(崔弘宰) 일련의 무인들을 유배하는 등 이자겸 일파는 실권을 한층 더 강화시켜 갔다.

이자겸의 위세는 점점 치솟아 양절익명공신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의 책봉을 받고, 부를 세워 숭덕부(崇德府)라 했으며, 궁을 의친궁(懿親宮)이라 부르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조상들도 추봉되었으며,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칭하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국공이 되니, 왕은 그에 대해 조서에 이름도 쓰지 않고 경(卿)이라고 부르지도 않는 등 특례로 대할 정도였다.

정부의 요직은 그의 일족과 추종자로 채워졌으며, 다른 성의 왕비가 들어오면 실권이 줄어들까 봐 마침내 그의 셋째딸을 강제로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듬해에 다시 넷째딸을 왕에게 납비해 일문의 권세는 세상을 뒤흔들기에 이르렀다. 경제적으로도 막대한 식읍을 받은 데다 불법으로 토지와 저택을 차지하였다.

뇌물이 공공연하게 돌고, 사방에서 들어오는 선물이 쌓여 썩는 고기가 수만 근이나 되었다. 심지어 노복들을 풀어 남의 수레와 말을 빼앗기까지 해 백성들은 모두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팔아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고려사≫ 이자겸전에 의하면 송나라에 표(表)를 올리고 토산물을 보내면서, 스스로를 국가의 정치를 왕이나 다름없이 맡는 직함이라는 뜻인 지군국사(知軍國事)라 일컬었다고 한다.

또한 지군국사가 되기 위해 조책(詔策)을 내리도록 강요하자 왕은 이 때부터 그를 혐오하게 되었다. 이에 그를 지켜본 내시지후(內侍祗候) 김찬(金粲), 내시녹사(內侍錄事) 안보린(安甫鱗)은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지녹연(智祿延)과 함께 이자겸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1126년 2월 25일 이들은 이자겸 일파를 제거할 뜻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중대한 일이므로 김찬을 평장사 이수(李需), 전평장사(前平章事) 김인존(金仁存)에게 보내어 그 계획을 문의하게 하였다. 이자겸의 재종형이기도 한 이수와 김인존은 원칙에 있어서는 동조했으나 신중론을 펼쳤다. 이러한 자중론에도 불구하고 왕은 김찬 등의 의견에 쏠렸다.

지녹연 등은 최탁(崔卓)ㆍ오탁(吳卓)ㆍ권수(權秀) 등 장군들과 의논해 군사를 이끌고 궁궐에 들어와 먼저 척준경의 아우 병부상서 척준신과 아들 내시 척순(拓純) 등을 죽여 시체를 궁성 밖에 내던졌다. 이자겸의 난은 이렇게 해서 도발되었다.

이 거사를 주도한 세력은 모두 하급 관료 및 무장들로서, 다분히 반문벌 귀족적이며 왕권 수호 세력이라 할 수 있다. 이에 이자겸은 재추(宰樞)와 백관을 자기 집에 소집해 대책을 논의하였다. 이 때 척준경은 일이 급하다며 수십만을 거느리고 그날 밤 신봉문(神鳳門) 밖으로 쳐들어가 기세를 올렸고, 지녹연ㆍ최탁 등은 군병이 크게 모였다고 낙담해 나오지 못하였다.

이튿날 새벽에 동생 척준신의 시체를 보고 자신도 죽음을 면치 못하리라는 것을 안 척준경은 이자겸의 아들 지보 등과 같이 군졸을 불러모아 군기고(軍器庫)에 들어가 갑옷과 병기를 가지고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하였다. 궁궐 안에서 거사를 일으켰던 이들은 감히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다만 활을 가지고 성문 위에서 지키기만 하였다.

왕이 신봉문에 거둥해 척준경의 군사에게 내탕(內帑)의 은폐(銀幣)를 풀어주고 시어사(侍御史) 이중(李仲)과 기거사인(起居舍人) 호종단(胡宗旦)으로 하여금 군사들을 선유해 무기를 버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척준경은 이중 등을 쫓아 왕 앞까지 활을 쏘아댔고,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崔學鸞)과 도명마녹사(都兵馬錄事) 소억(邵億)을 보내어 난의 주모자를 내놓으라고 요구하였다.

한편 척준경은 동화문(東華門) 행랑에 불을 질러 내침(內寢)까지 번졌으며, 왕은 근신 임경청(林景淸) 등 10여 명만을 거느리고 산호정(山呼亭)으로 피하였다. 드디어 왕이 선위(禪位)할 뜻을 비쳤으나 재추의 논의를 두려워한 이자겸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자 이수가 반대해 저지되었다.

한편 준경은 낭장 장성(張成)을 시켜 왕을 인도하던 오탁을 잡아 베고, 사람을 보내어 최탁ㆍ권수ㆍ고석ㆍ안보린 및 대장군 윤성(尹成), 장군 박영(朴英) 등을 붙들어 모두 죽였다. 또 좌복야 홍관(洪觀), 내시봉어(內侍奉御) 왕관(王觀) 등도 피살되었다. 지녹연ㆍ김찬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은 먼 곳으로 유배되었으며 지녹연은 도중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밖에 잡혀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결국 이자겸과 그 일파를 제거해 왕권을 지키려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갔고, 궁궐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산호정ㆍ상춘정(賞春亭)ㆍ상화정(賞花亭) 등 세 정과 내제석원(內帝釋院)의 낭무 일부만이 겨우 남았을 뿐이었다.

3월 자겸은 그의 집인 중흥택(重興宅)의 서원에 왕을 연금하고 좌우에는 모두 자신의 일파를 앉혔다. 정사도 왕이 청단하지 못하게 하고 동작과 음식도 제한하였다. 이로써 자겸과 준경은 더욱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왕은 내의군기소감(內醫軍器少監) 최사전(崔思全)과 대책을 의논한 결과 이자겸과 결탁한 척준경을 왕실편으로 끌어들여 병권을 확보한다면 이자겸을 쉽게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최사전은 척준경에게 이자겸은 신의가 없다며 충의로써 공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또한 왕은 척준경에게 교서를 내려 지난 일을 잊고 마음을 다해 어려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했고 그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이자겸의 아들인 지언(之彦)의 노비가 척준경의 노비가 왕궁에 활을 쏘고 궁궐을 태운 죄를 비난하고 이 일이 척준경에게 알려져 이 때부터 둘 사이에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자겸은 그의 아들을 척준경에게 보내 화해를 청했으나 준경은 고향에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인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지추밀원사 김부일(金富佾)을 준경의 집으로 보내어 거사를 재촉하도록 하였다.

한편 최사전은 또다시 준경을 회유해 준경은 마침내 계책을 결정하고 거사를 자청하게 되었다. 5월 1일 왕이 연경궁(延慶宮)으로 옮기자 초조해진 자겸은 연경궁 남쪽으로 옮겨가서 담을 뚫어 궁 안으로 통하게 하고, 군기고의 갑옷과 무기를 집 안에 간직하였다.

이자겸은 이 때 유행하던, 이씨가 왕이 된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왕위마저 찬탈하려 마음먹었다. 그래서 떡에 독약을 넣어 왕을 독살하려 했으나 왕비가 이를 알려 수포로 돌아갔다.

그 달 20일 인종은 이자겸의 숭덕부군(崇德府軍)이 무장을 하고 연경궁 북쪽에서 침문(寢門)을 침범하려 하는 기미를 탐지하고 손수 밀지를 써서 환관 조의(趙毅)를 시켜 척준경에게 보내 거사를 재촉하였다.

척준경이 상서 김향(金向)에게 이를 보이자 그 역시 이에 동조해 함께 장교 7명과 요리(僚吏)ㆍ복례(僕隷) 20여 명을 거느리고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연경궁으로 향하였다. 순검도령(巡檢都領) 정유황(鄭惟晃)은 100명을 이끌고 군기감에 들어가 무장을 갖추고 궁중으로 갔다.

척준경은 궁궐로 가 천복전(天福殿) 문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왕을 호위하고, 활을 쏘아대는 이자겸의 무리를 피해 나왔다. 왕은 군기감에서 호위를 엄중히 하고, 척준경은 승선 강후현(康侯顯)을 시켜 이자겸과 그의 처자들을 불러 팔관보(八關寶)에 가두고 장군 강호(康好)와 고진수(高珍守) 등을 벤 뒤 그 밖의 무리들을 체포하였다. 왕은 광화문(廣化門)에 나아가 대역부도의 화가 궁궐 안에서 일어났으나 충신ㆍ의사의 의거로 그 해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이튿날 이자겸은 그의 처와 아들 지윤과 함께 영광으로 귀양 가고 다른 아들들도 각기 유배되었다. 그의 심복인 평장사 박승중(朴昇中) 등 30여 명과 관사(官私)의 노비 90여 명은 각각 먼 곳에 유배되었다. 이자겸의 딸인 두 왕비도 폐위되었고 임원애(任元屍)의 딸이 왕비가 되었다. 척준경과 이수ㆍ김향ㆍ최사전은 각기 공신호와 높은 관작을 받게 되었다.

이자겸은 그 해 12월에 영광의 유배지에서 죽었고, 척준경은 그가 세운 공을 믿고 발호하다가 정지상(鄭知常)의 탄핵을 받아 이듬해인 1127년 3월에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되었으며, 이듬해에 고향인 곡주(谷州)로 이배되었다.

인종은 1144년 척준경이 사직을 보위한 공을 참작해 검교호부상서(檢校戶部尙書)를 제수했으나 곧 등창으로 죽었다. 하늘을 찌를 듯하였던 인주 이씨의 외척세력은 이로써 몰락하고 왕정이 복고되었다.

이 난으로 고려왕실은 왕권의 미약함을 극도로 드러냈다. 건국한 지 200여 년 만에 왕실은 군국의 대권을 권신에게 빼앗기고 이성(異姓)에 의해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변이 진압되자 인종은 서경을 순행하면서 15조항의 유신정교(維新政敎)를 선포했는데, 왕권 강화를 염원하는 인종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개경의 궁궐이 변란에 재로 화했고 골육의 상쟁을 겪은 왕도에 대한 애착이 감하된 듯하다. 이 때 오랫동안 국도의 후보지로서 논의되었던 서경 천도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더욱이 풍수설은 인종의 마음을 끌었다.

또 개경의 귀족 관리들은 이ㆍ척의 변란이 진행되는 동안 일부 하급 관료나 군장 세력과는 달리 왕권을 적극적으로 수호하지 못하였다. 유교 정치 이념을 표방하고 충의를 윤리로 강조하던 귀족 세력이 이처럼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자 왕실로서는 소외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상황에서 서경천도와 서경 세력에 대한 관심과 함께 풍수설에 대해 왕실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미약한 왕실과 개경 귀족 간의 소원(疎遠)함과 그들 상호간의 분열은 새로운 정치 세력의 도전을 불러오게 되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圖經, 高麗時代史(金庠基, 東國文化社, 1961), 韓國史-中世篇-(李丙燾, 震壇學會, 乙酉文化社, 1961), 李資謙의 勢力基盤에 對하여(金潤坤, 大丘史學 10, 1976), 高麗慶源李氏家門의 展開過程(李萬烈, 韓國學報 21, 1980), 李子淵とその家系(藤田亮策, 靑丘學叢 13ㆍ15, 1933ㆍ1934).

<이희덕>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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