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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2 (목) 23:28
분 류 사전2
ㆍ조회: 386      
[고려] 거란의 침입 (두산)
거란의 침입 契丹-侵入

1. 거란의 침입 개요

고려의 북진 정책 및 친송 정책과 정안국에 위협을 느낀 거란이 993년(성종 12), 1010년, 1018년(현종 9)의 3차에 걸쳐 고려에 침입한 사건.

고려 건국 당시, 지금의 몽골과 만주 지방에는 거란족과 여진족이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중 거란족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가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916년(발해 애왕 16) 요(遼)나라를 건국하였다. 926년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고려와 국경을 접하게 되자 고려 태조는 북진 정책을 추진, 발해 유민을 포섭하였다.

거란은 고구려 장수왕 때 출복부(出伏部) 등 일부가 예속되었지만 고려와는 밀접한 관계를 유지, 922년(태조 5) 야율아보기가 낙타와 말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이들과 적대 관계를 유지하였고, 942년 태종이 낙타 50필을 보내자 사신은 섬으로 유배보내고 낙타는 만부교(萬夫橋)에서 굶겨 죽여버렸다.

이는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그 뒤에도 계승되어 정종 때 광군(光軍) 30만을 조직한 것도 요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송이 건국하고 고려가 송과 화친 정책을 실시하자 송은 고려와 협력하여 거란을 공격할 뜻을 비췄고, 압록강 유역의 정안국(定安國)도 송과 화친하면서 거란을 협공할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에 요는 국제적으로 고립되었다. 이에 요의 성종(聖宗)은 986년 정안국을 멸망시킨 다음 991년 위구(威寇)ㆍ진화(振化)ㆍ내원(來遠) 등의 압록강 유역에 성을 쌓고 고려 침략을 준비하였다.

2. 제1차 침략

거란의 제1차 침략은 993년(성종 12) 10월 요의 소손녕(蕭遜寧)이 침략해 오자 고려는 박양유(朴良柔)ㆍ서희(徐熙) 등을 보내 이를 막았으나 봉산군(蓬山郡)을 빼앗기자 이에 놀라 청화사(請和使)를 보내어 화친을 청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소손녕의 요구에 따라 항복하든지 서경 이북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나왔고, 후자가 유력했으나 서희ㆍ이지백(李知白) 등이 항전을 주장하였으므로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소손녕이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화친의 분위기가 일어났고 서희가 소손녕을 만나기로 하였다.

여기서 소손녕은 고려를 침략한 이유로 첫째, 고려가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자기 땅인 고구려를 침식하고 있으며 둘째, 이웃인 거란을 버리고 송나라와 교류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여 고려라고 했으므로 요의 동경(東京)도 고려의 땅이며 둘째, 압록강 유역도 고려 땅인데 고려가 요와 교류하고자 해도 여진이 있어 불가능하므로 이 지역을 회복하여 성을 쌓고 도로를 확보하면 교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대응하였다. 그 결과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개척하는 데 동의를 얻었고, 송나라의 연호 대신 요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다.

이에 고려는 흥화진(興化鎭)ㆍ통주(通州)ㆍ구주(龜州)ㆍ곽주(郭州)ㆍ용주(龍州)ㆍ철주(鐵州) 등을 획득하여 압록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결국 요의 제1차 침략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이나마 사대의 예를 받아 침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북진 정책의 일환으로서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비공식적으로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에 전략적 가치가 크다는 사실이 인식되면서 요는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3. 제2차 침략

1010년(현종 1) 11월 요의 성종은 직접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으며, 이를 거란의 제2차 침략이라고 한다. 당시, 고려는 목종의 모후(母后)인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이 불륜 관계를 맺고 왕위를 빼앗으려하자 강조(康兆)가 군사를 일으켜 김치양 일파를 제거하고 목종을 폐위했는데, 요는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구실로 침략한 것이다.

이는 구실에 불과한 것으로, 침략의 실제적인 목적은 송나라와의 교류를 완전히 차단하고 강동 6주를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요는 먼저 흥화진을 공격했으나 양규(楊規)의 항전으로 함락하지 못하자, 통주로 진군하여 고려의 주력 부대를 지휘하던 강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어 곽산ㆍ안주 등의 성을 빼앗고 개경까지 함락하자 현종은 나주(羅州)로 피난하였다. 요는 개경의 함락에만 서둘러 흥화진ㆍ구주ㆍ통주ㆍ서경 등을 그대로 두고 내려왔기 때문에 병참선이 차단되었다. 이에 요는 고려가 하공진(河拱辰)을 보내 화친을 청하자 현종이 친조(親朝)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받아들이고 돌아가다가 구주 등에서 양규ㆍ김숙흥(金叔興) 등의 공격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다.

4. 제3차 침략

1011년 정월 개경에 돌아온 현종은 요에 친조하지 않았고, 강동 6주를 반환해 달라는 요청에도 응하지 않았으며, 1013년 거란과 국교를 끊고 다음 해에 송나라와 다시 교류하였으므로 요는 다시 침략을 감행하였다.

1018년 12월 요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 오자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상원수, 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비하였다. 처음에 흥화진에서 소배압의 군대를 막아내자 이를 피하여 개경으로 나아가다가 자주(慈州)에서 강민첨의 공격을 받았으며, 다음 해 정월에 개경에서 멀지 않은 신은현(新恩縣)에 도달했으나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닫고 군사를 돌려 퇴각하다가 귀주에서 강감찬의 공격으로 대패, 10만 대군 가운데 살아남은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는데, 이것이 유명한 귀주대첩이다.

이로써 전쟁은 끝나고 1019년 양국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면서 국교가 회복되었다. 고려는 송나라의 연호를 정지하고 요의 연호를 사용하는 데 그치고, 요가 요구한 국왕의 친조와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았으며, 요가 멸망하는 1125년까지 양국 사이에 사행 무역(使行貿易)이나 밀무역(密貿易) 등이 성행했으며, 거란의 대장경이 들어와 의천의 속장경(續藏經) 간행에 영향을 주거나 원효의 《기신론소(起信論疏)》가 거란에 전해져 반포되기도 하였다.

출전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Deluxe], ㈜두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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