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사전2 한국사사전1 한국사사전3 한국사사전4 한국문화사 세계사사전1 세계사사전2
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08 (수) 11:21
분 류 사전2
ㆍ조회: 409      
[고려] 무신정변=무신란 (민족)
무신란 武臣亂

고려 후기에 무신에 의해 일어난 난.

고려 시대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한 것은 두 차례 있었으나, 그것은 모두 지배층의 모순 속에서 일어났다. 문신이나 무신은 다 함께 지배층에 속하지만, 같은 지배층이라 하더라도 권력을 둘러싼 반목과 갈등의 요소는 항상 내재하고 있었다. 그 내재적 요소는 때로는 표면화되어 실력 행사로 나타났다.

고려를 건국한 세력은 무장(武將)들이었지만, 과거 제도와 유교주의가 채택됨으로써 차차 문치를 지향하는 사회로 변모되었다. 여기에서 같은 지배층이라 하더라도 문신의 지위는 높아지고, 상대적으로 무신의 지위는 낮아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발생했을 때에도 그 최고 지휘관은 문신이 되었고, 무신은 그 아래에서 지휘를 받았다.

관등에 있어서도 무신의 최고직은 정3품이 고작이었다. 또한 경제적 배경이 되는 전시과(田柴科) 체제에 의한 토지 지급이나 녹봉 체제에 의한 현물의 지급도 같은 위계의 문신에 미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무신의 문신에 대한 불평은 높아지고 갈등이 깊어지게 되었다. 그 불평과 갈등은 마침내 실력 행사로 나타나게 되었고, 그것은 세력의 기반을 다지지 않고서는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고려 시대 무신의 난으로 성공한 것은 1014년(현종 5)과 1170년(의종 24)에 일어난 무신의 난이었다. 전자의 성과는 1년 만에 수포로 돌아갔지만, 후자의 성과는 1세기 동안 정권을 장악해 정치ㆍ경제ㆍ사회ㆍ문화 등 전반에 걸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993년(성종 12) 이래 3차에 걸친 거란의 침입으로 국가와 사회가 겪은 타격은 컸지만,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무신들의 지위는 상승하였다. 그러나 문신 황보 유의(皇甫兪義)ㆍ장연우(張延祐) 등은 국고의 허실로 인해 백관들에게 지급할 녹봉이 부족한 것을 경군(京軍)에게 지급한 영업전(永業田)을 빼앗아 해결하려 하였다. 이에 평소에 문신들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품고 있던 상장군(上將軍) 김훈(金訓)과 최질(崔質) 등이 병사들을 충동해 반란을 일으키고 정치상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리하여 사실상 무신 정권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무신들의 집권 태세가 허술하였고, 게다가 문신 세력을 완전히 전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1년도 못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은 무신들이 문신들에게 더욱 학대받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무신들의 지위가 하향으로만 기울어진 것은 아니었다. 예종 때는 여진의 정벌이 있었고, 금나라가 새로 일어나 고려에 군사적 압박을 가해왔다. 뒤이어 인종 때는 이자겸(李資謙)의 난과 묘청(妙淸)의 난이 있었다. 이렇게 거듭 일어나는 군사 행동은 무신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 고려 귀족 사회의 모순은 그 자체 내의 대립과 분쟁을 가져왔고, 귀족들의 탐학과 수탈은 농촌 경제를 크게 악화시켜 유민의 속출과 농민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고려의 귀족 사회를 더 지탱할 수 없게 했을 뿐만 아니라 모순을 거듭하게 하였다.

의종은 문학과 풍류를 좋아해 명승지에 이궁(離宮)과 정자를 짓는데 백성과 군졸을 혹사하였다. 그리고 많은 문신들을 거느리고 정자나 사원을 찾아다니면서 시잔치ㆍ노래잔치를 베풀어 유흥에 도취하였다. 그 때마다 무신과 병사들은 밤새워 굶주리면서 호위하기에 바빴다.

한편, 의종의 총애를 받는 문신들 중에는 경박한 자가 적지 않았다. 인종 때 김돈중(金敦中)은 견룡(牽龍 : 禁軍의 부대이름) 대정(隊正) 정중부(鄭仲夫)의 수염을 촛불로 태워 희롱하였다.

또한 정중부가 반란을 일으키기 얼마 전에는 젊은 문신 한뢰(韓賴)가 나이 많은 대장군 이소응(李紹膺)의 뺨을 때려 희롱하는 등 횡포가 매우 심하였다.

이러한 고려의 귀족사회가 지닌 여러 모순은 마침내 무신의 난을 발생하게 하였다. 즉, 1170년 의종이 문신들을 거느리고 장단(長湍) 보현원(普賢院)에 행차할 때, 왕을 호종하던 대장군 정중부와 산원(散員) 이의방(李義方)ㆍ이고(李高)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수행했던 문신들을 학살하고, 그 날 밤으로 개성에 돌아와서 요직에 있는 문신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그들의 외침은 "문관(文冠)을 쓴 자는 비록 서리라 할지라도 종자를 남기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3일째 되는 날, 의종을 거제도로 추방하고 그 아우 익양공(翼陽公)을 왕으로 세워 그들의 괴뢰로 삼았다. 그가 명종이다.

그리하여 고려의 문신 귀족 정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이 무신 정권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그 뒤, 1세기 동안이나 무신들에 의한 정치 지배가 계속되어 고려 사회에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무신 전제 정치가 행해지게 되었다. 그 전기에는 소위 중방 정치(重房政治)라 하여 중방을 중심으로 무신 실권자들에 의한 합의제 정치가 행해졌다. 그러나 그 뒤 최씨 정권(崔氏政權)이 성립되고 그 정권에 의해 독자적인 권력 기구가 마련되었으며, 그것을 중심으로 최씨에 의한 1인 독재 정치가 행해졌다. 한편, 과거를 통해 새로운 관료층을 등용하였다. 그들 중 향리층에서 등용된 자는 후에 새로운 사대부 계층의 형성을 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무신들에 의한 농장(農莊)의 확대로 공전제(公田制)가 크게 무너졌다. 따라서 국가 재정의 파탄과 농민 경제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사회적으로는 신분 질서의 동요와 하극상의 풍조로, 여태껏 압박을 받아오던 하층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사회가 크게 동요되었다. 특히, 농민의 반란이 사방에서 일어나고 노예들이 신분 해방을 부르짖고 나섰으며 군인과 향리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또한 그 동안 왕실과 문신 귀족들의 보호를 받아오던 사원 세력이 무신 정권에 도전하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들 반란 세력은 모두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진압되었다.

문화적으로는 문인들이 위축되어 일반적으로는 크게 떨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현실도피적 문학인 패관문학이 발달하였고, 불교에 있어서는 선종(禪宗) 계통의 조계종이 확립되기도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자존을 위한 저항이 강력히 발휘된 것이 특색이다. 특히, 몽고와의 40여 년간의 항전은 무신 정권 또는 무인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1170년 무신의 난으로 성립된 무신 정권은 고려 전기의 문신 중심의 정치 사회 체제를 무너뜨리고, 무신들에 의한 정력적인 독재 정치와 아울러 몽고의 침략에 대항하면서 커다란 변동과 특색을 낳게 하였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高麗武臣政權の特質に關する一考察(金鍾國, 朝鮮學報 17, 1960), 高麗朝의 文班과 武班(邊太燮, 史學硏究 11, 1961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 1971), 高麗武班硏究(邊太燮, 亞細亞硏究 8-1, 1965 ; 高麗政治制度史硏究, 1971), 武臣政權과 對蒙抗爭(邊太燮, 한국사 7, 1973).

<민병하>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윗글 [고려] 예부시 (브리)
아래글 [조선] 경종 행장 (실록)
 
    N     분류     제목    글쓴이 작성일 조회
280 사전2 [고려] 예부시 (브리) 이창호 2010-09-01 411
279 사전2 [고려] 무신정변=무신란 (민족) 이창호 2010-09-08 409
278 사전2 [조선] 경종 행장 (실록) 이창호 2011-02-02 407
277 사전2 [조선] 선조 묘지문 (실록) 이창호 2011-01-29 405
276 사전2 [조선] 영조 (브리) 이창호 2011-01-23 403
275 사전2 [고려] 낭가사상 (한메) 이창호 2010-09-07 403
274 사전2 [현대] 재벌 (두산) 이창호 2011-04-01 401
273 사전2 [고려] 상서성 (민족) 이창호 2010-08-29 400
272 사전2 [조선] 박세당 (브리) 이창호 2011-01-25 399
271 사전2 [고려] 이자겸의 난 (민족) 이창호 2010-09-01 398
1,,,51525354555657585960,,,80

이창호의 역사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