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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9-21 (화) 23:16
분 류 사전2
ㆍ조회: 373      
[고려] 정방 (민족)
정방 政房

1225년(고종 12) 무신 집정 최우(崔瑀)가 설치한 사설 전주 기관(銓注機關).

최우의 사제(私第)에 설치된 후 무신 집권기의 전주를 담당했으며, 무신 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국가 기관으로 변해 존속하였다. 행정 실무에 어두워 문학ㆍ이무(吏務)에 능한 사람이 필요했던 무신 집권층과, 벼슬길에 진출을 갈망했던 사인(士人)이 서로 부응한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의해 설치되었다.

최충헌(崔忠獻)이 집권한 뒤 전주(銓注 : 관리를 임명하기 위해 직임에 합당한 인물을 임금에게 추천하는 일)를 마음대로 하였다. 최우 역시 문사들을 정방의 직원으로 임명해 그들에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최씨 정권은 이것을 통해 명실공히 문무 양반의 지배자가 되었다. 한편 문신들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무신 정권 몰락 이후에도 국가 기관으로 남게 되었다.

정방의 치폐 과정을 살펴보면, 1258년(고종 45) 3월에 김준(金俊)ㆍ유경(柳璥) 등이 최의(崔洑)를 죽이고 정방을 궁중으로 옮겼다. 유경은 일찍이 최씨의 3대 집정 최항(崔沆)에게 신임을 받아 정방에 종사한 일이 있었고, 집권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궁중에 정방 설치를 주장하였다.

국가 기관으로 되면서 권문세가들이 장악했고, 이제는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신흥관료의 진출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막아버리는 관부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충렬왕 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고려 말까지 개혁 정치를 표명할 때마다 정방의 폐치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혁 정치의 추진세력으로서 신진 관인을 등용하려면 권문세가의 관부로 되어버린 정방을 폐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면서 정방을 폐지하고, 정방이 가지고 있던 전주권을 사림원(詞林院)에 주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패하였다. 충선왕은 다시 1307년(충렬왕 33)에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여 충렬왕의 일당인 왕유소(王維紹) 등을 숙청하고, 정방을 혁파하면서 전주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이관시켰다.

1320년(충숙왕 7)에 정방이 다시 설치되었다. 당시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선위를 했지만 연경(燕京 : 지금의 중국 북경)에서 충숙왕의 일에 간섭했고, 특히 그의 신하였던 권한공(權漢功)ㆍ최성지(崔誠之)ㆍ이광봉(李光逢) 등에게 전주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 때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충선왕이 실각하게 되자,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 : 충선왕당)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설치했던 것이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 12월에 이제현(李齊賢) 등이 주도해 개혁 정치를 펼 때 다시 혁파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다시 설치되는데, 이 때 왕의 모비(母妃)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방이 설치된 뒤 신예(辛裔)ㆍ전숙몽 (田叔蒙)ㆍ강윤충(康允忠) 등이 공주에게 의지해 전주권을 마음대로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352년(공민왕 1) 1월에는 공민왕이 고질화된 권신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치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문무 전주권(文武銓注權)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일신(趙日新) 등 권신들의 반발로 1356년까지 실시되지 못했으며, 이 때의 정방 혁파는 명목상의 조처에 불과하였다. 1356년에 비로소 기철(奇轍) 일당이 제거되면서 정방은 혁파되어 전주권은 이부와 병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방은 신돈(辛旽) 집권시에 부설된 듯하다. 그것은 성석린(成石璘)이 차자방지인(箚子房知印)이 되어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아 임박(林樸)으로 바뀌었다고 한 사실이나, 우왕 때 권신 이인임(李仁任)ㆍ임견미(林堅味)ㆍ염흥방(廉興邦) 등이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전주를 마음대로 했다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그 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집권 체제를 굳힐 때에 정방을 혁파하고 상서사(尙瑞司)를 설치하였다. 그것으로 지금까지 관제(官制) 밖에 있던 정방이 관제 내에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성계를 둘러싼 신흥세력의 진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정방의 폐치는 관인층 내부의 분열 대립의 한 현상이었다. 권신들은 정방을 통해 전주권(銓注權)을 장악하고, 전민(田民)를 탈취해 전제(田制)를 문란하게 하였다. 따라서 전제와 전주법이 문란해진 시기가 바로 정방의 부설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인임ㆍ임견미ㆍ염흥방 등 정방 제조가 된 권신들의 행위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는 달리 정방 권신들의 부패된 권력 구조에 반발하고 관인 체제의 질서 회복을 주장하는 신흥 관인층이 대두되고 있었다. 이들은 정방을 혁파해 전주권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속하게 함으로써 관인 지배 질서를 회복시키고, 권신들이 탈취한 녹과전(祿科田)을 본래의 전주(田主)에게 돌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표되는 사람으로는 이제현과 왕후(王煦) 등이 있었다. 왕후는 정방 혁파와 녹과전에 대한 원주인에의 환급을 주장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정방 권신들에게는 정방 전주권(政房銓注權)의 장악이 토지를 겸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신진 관인층에게는 자기 발전을 위해 이들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초기의 정방이 신진 관인들의 진출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권문세족들의 세력 구축의 발판으로 이용되고, 신진 관인층의 성장 발전을 저해, 억압하는 낡은 권력 구조의 유제(遺制)로 화하였다. 이러한 둘 사이의 분열ㆍ대립이 정방 폐치의 반복으로 나타났으며, 사전 혁파(私田革罷)의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신진 관인층의 한 사람이던 이성계가 1388년(우왕 14) 5월 위화도에서 회군해 6월에 창왕을 세우고, 7월에 전제 개혁안을 제기했으며, 8월에 전선법(銓選法)을 회복하게 하여 9월에 정식으로 정방을 혁파하고 상서사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고려 후기 이래로 계속되어오던 권력 구조의 낡은 유제의 퇴보를 말하는 것이고, 새로이 등장한 관인층의 행정적 필요성에 의해 상서사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정방은 지인방(知印房)ㆍ차자방으로도 불렸으며, 직원으로는 1225년 창설 당시 정색상서(政色尙書)ㆍ정색소경(政色少卿)ㆍ정색서제(政色書題) 등이 있었다. 1278년(충렬왕 4)에는 필도치(必斤赤)를 두고 있으며, 설치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인(知印) 등의 관직도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공설 기관으로 된 1258년 이후에도 관제화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앞의 관직들도 일정한 직제로 확정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饑翁稗說, 牧隱集, 高麗政房考(金成俊, 史學硏究 13, 1962), 麗末鮮初의 尙瑞司(金潤坤, 歷史學報 25, 1964).

<김성준>

출전 : [디지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방미디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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