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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창호
작성일 2010-08-29 (일) 17:50
분 류 사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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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조선시대의 과거 (브리)
조선시대의 과거

관련 문서 : 고려시대의 과거

조선 시대의 과거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려 시대의 것과 유사했으나 무과를 처음으로 실시했던 것과 승과제를 폐지시킨 점이 두드러진 차이이다. 또한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ㆍ문과ㆍ무과ㆍ잡과 등으로 나뉘었고, 정기시와 부정기시의 구분이 있었다.

정기시는 3년에 1회씩 실시하는 식년시를, 부정기시는 필요에 따라 수시로 열렸던 것을 말한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해석을 위주로 하는 시험이었고, 진사시는 글짓기 시험이었는데, 모두 초시ㆍ복시 두 단계 시험으로 각 100명씩 뽑아 생원ㆍ진사의 칭호를 내려주고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양자를 합해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했는데, 문과의 예비 고사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문신을 선발하는 시험인 문과에는 원칙적으로 생원ㆍ진사가 응시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ㆍ현직 관료를 비롯해서 일반 유생인 유학(幼學)까지도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조선 시대에는 학교와 과거를 분리하여 운영했음을 알 수 있고, 중국의 명ㆍ청 시대에 학교 시험을 과거에 포함시켜 일원화함으로써 학교를 과거의 준비 기관으로 만들었던 것과는 차이가 난다.

문과에는 초시ㆍ복시ㆍ전시의 3단계 시험이 있었는데, 이중 초시ㆍ복시는 초장ㆍ중장ㆍ종장으로 나누어 시험을 치렀다. 식년시 문과의 최종 합격자수는 33명이었다. 국초에는 그들 사이의 등급을 나누는 방법이 일정하지 않았으나, 1460년(세조 12) 갑과 3명, 을과 7명, 병과 23명으로 확정되었고, 이것이 <경국대전>에 법제화되었다.

무신 선발 시험인 무과는 고려말에 처음으로 도입되었지만, 실제로 처음 실시되었던 것은 조선 태종 때부터이다. 이의 실시는 문무 양반의 관료 체제가 전에 비해서 상당히 정비되어 가고 있었던 것과 사회 발전에 따른 전문 인력의 확보라는 점에서 주목되었다.

무과는 문과와 마찬가지로 초시ㆍ복시ㆍ전시의 3단계 시험을 치렀고, 시험 과목은 궁술(弓術)ㆍ기창(騎槍)ㆍ격구(擊毬) 등의 무술과 병서(兵書)ㆍ유교 경전에 대한 강경 시험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므로 과목상으로 문ㆍ무를 동시에 시험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과도 최종 시험이 끝난 후 성적에 따라 등급을 매기는데,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으로 되었다. 그리고 합격자에게는 문무과 모두 방방 의식(榜方儀式)을 통해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를 주었다.

잡과에는 역과(譯科)ㆍ의과(醫科)ㆍ음양과(陰陽科)ㆍ율과(律科) 등의 4종류가 있었다. 이외 상급서리인 성중관원(成衆官員)을 뽑는 이과(吏科)도 있어 1426년(세종 8)부터 시행되었으나 얼마 후 이원취재(吏員取才)로 바뀌면서 잡과에서 제외되었다.

역과는 조선의 대외 정책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통역관을 양성할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역과에는 한어(漢語)ㆍ몽고어(蒙古語)ㆍ여진어(女眞語)ㆍ왜어(倭語) 등의 4과가 있었다. 의과는 의무관을 선발하는 것이고 음양과는 천문ㆍ풍수지리를 담당하는 자를 뽑는 시험이었는데, 천문학(天文學)ㆍ지리학(地理學)ㆍ명과학(命課學)으로 세분되었다. 율과는 법률 전문가를 뽑는 것이었다.

잡과에는 초시와 복시만 있고 전시는 없었다. 시험 과목으로는 각각의 전공 서적과 유교 경전, <경국대전>을 필수로 했다. 합격자에게는 처음에는 홍패를 주었으나 뒤에 백패(白牌)로 바꾸었다. 문무과와 생원ㆍ진사시 합격자에게 국왕의 도장을 찍어 주었으나 잡과 합격자에게는 예조인(禮曹印)을 찍어 주었다. 이는 문무과, 생원ㆍ진사시보다 잡과가 경시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 시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에 대한 특별한 규정은 없다. 따라서 법제상 천민이 아니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반죄와 강상죄(綱常罪)와 같은 중죄인의 자손 및 범죄를 저질러 영구히 서용되지 못하는 자, 재가했거나 실행(失行)한 부녀자의 자손, 서얼 등은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했다.

임진왜란 이후 사회 변동에 따라 통치 체제가 흔들리면서 과거 제도에도 많은 폐단이 발생했다. 특히 후기에는 빈번한 과거 실시로 인해 합격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하는 자가 많아지고, 당파 사이에 대립이 행해짐에 따라 성적이나 실력보다 소속 당파나 정실에 의해 합격과 출세가 좌우되는 일이 많아졌다.

이러한 폐단을 근본적으로 없애기 위한 과거제 개혁 방안이 실학파, 특히 유형원(柳馨遠)이나 정약용(丁若鏞)에 의해 제기되었으나 채택되지 못했다. 그뒤 세도 정치가 행해지면서 모든 관직이 벌열(閥閱)에 의해 독점되어 과거에 합격하고 관직을 얻지 못한 관료 예비군만 누적되는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과거제는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1876년 개항 이후 새로운 문물이 전해져 근대 사회로 변모하게 되자 구래의 관리 등용 시험인 과거를 가지고서는 맞는 신진 인사들을 선발하기 곤란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894년에 단행한 갑오개혁에서 성균관을 근대식 교육 기관으로 개편하며 과거제를 폐지하고, 근대적인 관리 등용법을 제정했다. → 무과, 문과

<윤훈표(尹薰杓) 글>

출전 : [브리태니커백과사전], 한국브리태니커, 2001 '과거' 항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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